두레풍장(互助风场)

한자명

互助风场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농악

집필자 송기태(宋奇泰)

정의

여름철 두레패가 농사일을 하면서 치는 농악.

개관

두레풍장은 조선 후기 이앙법의 보급 이후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7~18세기 이앙법이 보급되면서 두레가 확산되고 그 과정에서 두레농악이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두레의 조직적 활동 과정에서 농악이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이앙법은 16세기 초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중심으로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이앙법에 적합한 노동 조직인 두레가 결성되어 촌락 단위로 파급되었다. 기존의 직파법 아래의 노동 조직인 황두와 달리 두레는 농기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활동하였다. 1738년(영조 14)에는 민간에서 사용하는 기치旗幟와 쟁고錚鼓가 나라에 후환이 될까 우려하여 이를 압수하는 문제를 놓고 임금과 신하가 대화를 나누었다. 당시에도 농기와 풍물은 이미 ‘백년민속’이어서 금지하기가 어려운 것으로 결론지었다.
두레는 공동 노동 조직으로 규율이 강했고 자체적으로 상벌제를 운영하는 등 조직적으로 활동했으며, 농사 기술을 비롯하여 활동에 필요한 민요와 농악 등을 가르쳤다. 두레의 규율을 어기거나 미풍양속을 해친 사람에게는 매를 때리거나 멍석말이 등의 벌을 주기도 하였다. 두레패가 이동할 때는 깃발을 들고 농악을 연주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두레풍장이 발달하였다.
두레가 1950~60년대를 기점으로 소멸하면서 두레풍장도 전승이 중단되었다. 현재는 밀양백중놀이, 부여세도두레풍장, 익산기세배, 김포통진두레놀이, 인천부평두레놀이, 여수소동패놀이 등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두레풍장을 보존·전승되고 있다.

내용

평야가 발달한 농촌 지역에서는 두레가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대개 모심기를 마치면 마을에서 두레를 조직하였다. 김매기 등의 공동 작업을 위해 성년 남자들을 의무적으로 참가시키기 때문에 구성원 대부분은 젊은 청년들이었다. 두레패는 일하거나 쉴 때 그리고 이동할 때 항상 깃발을 들고 농악을 연주하고, 들에서 김매기 등의 일을 하면서 들노래에 맞춰 농악을 연주한다. 이를 총칭하여 두레풍장이라고 한다.
경남 밀양에서는 김매기가 끝나면 백중을 전후로 날을 택해 농신제를 지내고 백중놀이(호미씻이)를 하였다. 농신대를 만들어서 땅에 꽂고 두레패가 농악을 치면서 농신대를 몇 바퀴 돌고 농신장을 일으키는 굿을 한다. 북을 치면서 고사소리를 하며 잡귀맥이굿을 하고, 고시레를 한 뒤 음복한다. 그리고 각자가 미리 준비한 주머니에 쌀·콩·돈과 기원물을 넣어 농신대에 매단다. 이어 농신대 주변에서 농악을 치며 모정자놀이(농사풀이)·작두말·양반춤·범부춤·오북춤과 같은 판놀음을 벌이고 하루를 즐긴다.
경기도 고양 지역에서는 두레패들이 들녘으로 나갈 때 농기를 앞세우고 풍물로 길군악을 치며 들어간다. 논두렁에 기를 꽂고 김을 맬 때나 마을에 들어갈 때 길군악을 친다. 김매기가 끝나면 날을 받아 농신제를 지내는데, 이를 ‘호미걸이’라 일컫는다. 호미걸이는 잘사는 집에서 술 한 동이 또는 안주 한 가지씩을 장만하게 하여 음식을 준비한다. 호미걸이를 하는 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농기를 앞세우고 풍물로 길군악을 치며 당으로 이동하고, 제상을 마련하여 당제를 지낸다. 당제를 마친 뒤에 당 마당에서 농악을 치고 있으면, 이웃 마을 농악대들이 풍물을 울리면서 모여든다. 두레패끼리 기세배를 하고 점심을 나누어 먹고 합굿으로 판놀음을 벌인다.
충남 부여 세도면에서는 두레가 결성되어 두레꾼들이 모이면 마당 한 귀퉁이에 용기龍旗를 세우고 그 앞에서 기 고사를 지냈다. 두레를 시작하는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매일 아침 기 고사를 지내고 일을 시작한다. 저녁에 일을 모두 마친 다음에도 하루의 무탈을 기에고하고 해산한다. 용기에 기 고사를 드리고 난 뒤 풍물을 울리며 논으로 향한다. 논에 도착하면 두레풍장가락(논풍장가락)을 친다. 김매기가 끝난 뒤 영기를 앞에 들고 풍물을 치면서 마을로 복귀한다. 두레꾼들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다른 마을의 두레패와 마주치게 되면, 서로 시비를 걸고 호미걸이·풍장싸움·기싸움 등으로 자웅을 겨룬다. 호미걸이는 땅바닥에서 선을 그어 놓고 각 마을에서 힘센 장정이 나와 호미를 걸고 줄다리기를 하듯이 잡아당기는 놀이다. 기싸움은 큰 농기를 들고 흔들어서 기력을 과시하는 것이고, 풍장싸움은 풍물패가 나와 풍장을 치면서 실력을 겨루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두레꾼들이 몰려나와 상대방 농기를 쓰러뜨리며 싸움을 벌인다. 농기가 땅에 닿으면 싸움이 끝난다. 두레싸움에서 진 두레패는 농기로 이긴 편 농기를 향해 기세배를 한다.
전북 김제 지역은 만경평야가 펼쳐져 있어 두레 농악이 발달하였다. 김매기할 때 지심매기굿을 하는데, 용기와 영기를 마을 입구에 세워 놓고 두레꾼들이 모여 풍물을 치며 일터로 나간다. 이때 총각 좌상은 곤장을 메고 일을 감독하며, 못방구를 치면서 김매기를 한다. 김매기를 마치면 여러 마을 두레들이 한자리에 모여 합굿을 치면서 기맞이굿을 한다. 또 칠월칠석날에는 장원머슴을 뽑아 사다리나 소를 태운다. 두레꾼들이 풍장을 치면서 장원 머슴을 태우고 주인집으로 들어가면 주인이 닭을 잡고 술대접을 한다. 또 인근 익산 지역에서는 정월에 여러 마을의 두레패가 모여 기세배를 한다.
전남 여수에서는 두레를 소동패와 대동패로 나누어 관리하였다. 16세부터 19세까지의 청소년들이 소동패로 가입되어 노래와 풍물을 배우고 두래패 활동을 하였다. 대동패와 소동패는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기 위해 마을 앞에 영기를 세우고 조반소고를 울렸다. 그러면 아침 식사를 하고, 모임 소고를 치면 영기 앞으로 모여 길소고를 치면서 일터로 나갔다. 두레패가 길을 다가다 다른 마을 두레패와 만나면 문장을 주고받으며 학식을 겨루고, 씨름이나 이어달리기, 밀치기 등을 하면서 두레싸움을 하였다. 두레싸움에서 진편은 정중하게 영문전갈營門傳喝을 올렸다.

특징 및 의의

두레풍장은 정월 마을굿과 함께 한국의 농악을 지탱하는 뿌리였다. 마을마다 두레패가 결성되어 농기고사를 지내고 들녘으로 나가면서 풍장을 쳤다. 김매기를 할 때나 마을로 복귀할 때도 풍장을 쳤다. 또한 김매기를 마친 뒤 풍장굿을 치거나 호미씻이, 호미걸이를 하였고, 두레패끼리 싸움을 하여 기세배를 하였다. 이렇게 여름철 농사와 관련된 집단놀이는 두레패에 의해서 행해졌고, 이러한 행사들을 모두 두레풍장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는 각 시·군에서 지역의 두레풍장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전승하고 있다.

참고문헌

농악(정병호, 열화당, 1986), 마을굿과 두레굿의 의식구성(이보형,서울대학교 동양음악연구소, 1981), 성남 오리뜰 두레놀이(이희병, 민속원,2010), 세도 두레풍장/공주 선학리 지게놀이(강성복·박종익·이걸재, 민속원, 2011).

두레풍장

두레풍장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농악

집필자 송기태(宋奇泰)

정의

여름철 두레패가 농사일을 하면서 치는 농악.

개관

두레풍장은 조선 후기 이앙법의 보급 이후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7~18세기 이앙법이 보급되면서 두레가 확산되고 그 과정에서 두레농악이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두레의 조직적 활동 과정에서 농악이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이앙법은 16세기 초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중심으로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이앙법에 적합한 노동 조직인 두레가 결성되어 촌락 단위로 파급되었다. 기존의 직파법 아래의 노동 조직인 황두와 달리 두레는 농기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활동하였다. 1738년(영조 14)에는 민간에서 사용하는 기치旗幟와 쟁고錚鼓가 나라에 후환이 될까 우려하여 이를 압수하는 문제를 놓고 임금과 신하가 대화를 나누었다. 당시에도 농기와 풍물은 이미 ‘백년민속’이어서 금지하기가 어려운 것으로 결론지었다.두레는 공동 노동 조직으로 규율이 강했고 자체적으로 상벌제를 운영하는 등 조직적으로 활동했으며, 농사 기술을 비롯하여 활동에 필요한 민요와 농악 등을 가르쳤다. 두레의 규율을 어기거나 미풍양속을 해친 사람에게는 매를 때리거나 멍석말이 등의 벌을 주기도 하였다. 두레패가 이동할 때는 깃발을 들고 농악을 연주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두레풍장이 발달하였다.두레가 1950~60년대를 기점으로 소멸하면서 두레풍장도 전승이 중단되었다. 현재는 밀양백중놀이, 부여세도두레풍장, 익산기세배, 김포통진두레놀이, 인천부평두레놀이, 여수소동패놀이 등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두레풍장을 보존·전승되고 있다.

내용

평야가 발달한 농촌 지역에서는 두레가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대개 모심기를 마치면 마을에서 두레를 조직하였다. 김매기 등의 공동 작업을 위해 성년 남자들을 의무적으로 참가시키기 때문에 구성원 대부분은 젊은 청년들이었다. 두레패는 일하거나 쉴 때 그리고 이동할 때 항상 깃발을 들고 농악을 연주하고, 들에서 김매기 등의 일을 하면서 들노래에 맞춰 농악을 연주한다. 이를 총칭하여 두레풍장이라고 한다.경남 밀양에서는 김매기가 끝나면 백중을 전후로 날을 택해 농신제를 지내고 백중놀이(호미씻이)를 하였다. 농신대를 만들어서 땅에 꽂고 두레패가 농악을 치면서 농신대를 몇 바퀴 돌고 농신장을 일으키는 굿을 한다. 북을 치면서 고사소리를 하며 잡귀맥이굿을 하고, 고시레를 한 뒤 음복한다. 그리고 각자가 미리 준비한 주머니에 쌀·콩·돈과 기원물을 넣어 농신대에 매단다. 이어 농신대 주변에서 농악을 치며 모정자놀이(농사풀이)·작두말·양반춤·범부춤·오북춤과 같은 판놀음을 벌이고 하루를 즐긴다.경기도 고양 지역에서는 두레패들이 들녘으로 나갈 때 농기를 앞세우고 풍물로 길군악을 치며 들어간다. 논두렁에 기를 꽂고 김을 맬 때나 마을에 들어갈 때 길군악을 친다. 김매기가 끝나면 날을 받아 농신제를 지내는데, 이를 ‘호미걸이’라 일컫는다. 호미걸이는 잘사는 집에서 술 한 동이 또는 안주 한 가지씩을 장만하게 하여 음식을 준비한다. 호미걸이를 하는 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농기를 앞세우고 풍물로 길군악을 치며 당으로 이동하고, 제상을 마련하여 당제를 지낸다. 당제를 마친 뒤에 당 마당에서 농악을 치고 있으면, 이웃 마을 농악대들이 풍물을 울리면서 모여든다. 두레패끼리 기세배를 하고 점심을 나누어 먹고 합굿으로 판놀음을 벌인다.충남 부여 세도면에서는 두레가 결성되어 두레꾼들이 모이면 마당 한 귀퉁이에 용기龍旗를 세우고 그 앞에서 기 고사를 지냈다. 두레를 시작하는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매일 아침 기 고사를 지내고 일을 시작한다. 저녁에 일을 모두 마친 다음에도 하루의 무탈을 기에고하고 해산한다. 용기에 기 고사를 드리고 난 뒤 풍물을 울리며 논으로 향한다. 논에 도착하면 두레풍장가락(논풍장가락)을 친다. 김매기가 끝난 뒤 영기를 앞에 들고 풍물을 치면서 마을로 복귀한다. 두레꾼들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다른 마을의 두레패와 마주치게 되면, 서로 시비를 걸고 호미걸이·풍장싸움·기싸움 등으로 자웅을 겨룬다. 호미걸이는 땅바닥에서 선을 그어 놓고 각 마을에서 힘센 장정이 나와 호미를 걸고 줄다리기를 하듯이 잡아당기는 놀이다. 기싸움은 큰 농기를 들고 흔들어서 기력을 과시하는 것이고, 풍장싸움은 풍물패가 나와 풍장을 치면서 실력을 겨루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두레꾼들이 몰려나와 상대방 농기를 쓰러뜨리며 싸움을 벌인다. 농기가 땅에 닿으면 싸움이 끝난다. 두레싸움에서 진 두레패는 농기로 이긴 편 농기를 향해 기세배를 한다.전북 김제 지역은 만경평야가 펼쳐져 있어 두레 농악이 발달하였다. 김매기할 때 지심매기굿을 하는데, 용기와 영기를 마을 입구에 세워 놓고 두레꾼들이 모여 풍물을 치며 일터로 나간다. 이때 총각 좌상은 곤장을 메고 일을 감독하며, 못방구를 치면서 김매기를 한다. 김매기를 마치면 여러 마을 두레들이 한자리에 모여 합굿을 치면서 기맞이굿을 한다. 또 칠월칠석날에는 장원머슴을 뽑아 사다리나 소를 태운다. 두레꾼들이 풍장을 치면서 장원 머슴을 태우고 주인집으로 들어가면 주인이 닭을 잡고 술대접을 한다. 또 인근 익산 지역에서는 정월에 여러 마을의 두레패가 모여 기세배를 한다.전남 여수에서는 두레를 소동패와 대동패로 나누어 관리하였다. 16세부터 19세까지의 청소년들이 소동패로 가입되어 노래와 풍물을 배우고 두래패 활동을 하였다. 대동패와 소동패는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기 위해 마을 앞에 영기를 세우고 조반소고를 울렸다. 그러면 아침 식사를 하고, 모임 소고를 치면 영기 앞으로 모여 길소고를 치면서 일터로 나갔다. 두레패가 길을 다가다 다른 마을 두레패와 만나면 문장을 주고받으며 학식을 겨루고, 씨름이나 이어달리기, 밀치기 등을 하면서 두레싸움을 하였다. 두레싸움에서 진편은 정중하게 영문전갈營門傳喝을 올렸다.

특징 및 의의

두레풍장은 정월 마을굿과 함께 한국의 농악을 지탱하는 뿌리였다. 마을마다 두레패가 결성되어 농기에 고사를 지내고 들녘으로 나가면서 풍장을 쳤다. 김매기를 할 때나 마을로 복귀할 때도 풍장을 쳤다. 또한 김매기를 마친 뒤 풍장굿을 치거나 호미씻이, 호미걸이를 하였고, 두레패끼리 싸움을 하여 기세배를 하였다. 이렇게 여름철 농사와 관련된 집단놀이는 두레패에 의해서 행해졌고, 이러한 행사들을 모두 두레풍장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는 각 시·군에서 지역의 두레풍장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전승하고 있다.

참고문헌

농악(정병호, 열화당, 1986), 마을굿과 두레굿의 의식구성(이보형,서울대학교 동양음악연구소, 1981), 성남 오리뜰 두레놀이(이희병, 민속원,2010), 세도 두레풍장/공주 선학리 지게놀이(강성복·박종익·이걸재, 민속원,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