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탈춤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무용

집필자 양종승(梁鍾承)
갱신일 2019-01-24

정의

해서 지방海西地方에서 전승되어 온 탈춤.

내용

해서 지방은 우리나라 중서부에 위치해 있는 황해도黃海道를 일컫는 지역명이다. 황주黃州와 해주海州 첫글자를 따 붙여진 황해도는 지리적으로 평안도와 더불어 우리나라 서북 지역에 있다. 그런데 서울에서 이곳을 왕래하기 위해서는 예성강 하류에 있는 벽란도碧瀾渡나루, 즉 서쪽으로 뻗은 바다를 건너야 했으므로 이 지역을 해서海西라고 했다.
해서 지방, 즉 황해도 일대에서 전승되어 온 가면극을 총칭하여 ‘해서탈춤’이라 부르는데,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봉산, 기린, 서흥, 평산, 신계, 금천, 수안, 황주, 안악, 은율, 재령, 신천, 송화, 해주, 강령, 옹진, 연백 등 곳곳에서 활기찬 전승이 이루어졌었다. 그런데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위축되기 시작하더니 1930년대 이르러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쇠퇴하고 말았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부터 는 아예 계승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945년 광복을 맞이하면서 부활되어 연희되었지만 곧이어 6·25전쟁이 일어남으로써 전승의 맥은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남북 분단 후, 남한에서 6·25전쟁을 전후하여 월남한 연희자들에 의해 해서탈춤 복원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무렵, 정부가 펼친 전통문화재건운동도 본격화되어 져 각지의 탈춤들이 복원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봉산, 강령, 은율의 해서탈춤이 복원되었다.
황해도 본토에서는 탈춤 발전에 지역 유지와 학식있는 지방관청 소속의 이속吏屬들 역할이 컸다. 봉산鳳山탈춤을 발전시키는 데 한몫했던 안초목도 이속 출신 인물 중 한 사람이다. 한편, 봉산탈춤은 19세기 말부터 경술국치 이전까지 전성기를 이루었다. 일제강점기에서도 나름대로의 흥행 분위기를 타고 1930년대까지 이어졌다. 주로 단오놀이로 이루어졌는데 황해도 봉산군 동선면 길양리의 경수대에서 전승되었던 것이 1915년경 무렵 경의선 철도가 개통되고 행정관청 이전과 도시화에 따른 환경 변화에 힘입어 사리원 경암산 아래로 옮겨 놀아졌다. 일제강점기 중후반에 들어서면서는 일제의 민족 연희 탄압으로 위축되었고, 광복 후에는 사회 혼란과 민속행사 제지로 파탄의 길을 걷게 되었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황해도 사리원에서 월남한 김진옥金辰玉과 민천식閔千植 등에 의해 서울에서 복원이 이루어졌고,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남한 출신의 젊은 계승자들을 참여하게 되면서 전승의 활기를 되찾게 된 것이다.
봉산탈춤은 먼저 길놀이, 서막고사, 무동춤 등 전 마당을 연 후, 이어서 전 과장을 연희하는 본마당이 열린다. 길놀이에서는 악공을 선두로 사자, 말뚝이, 취발이 순서로 출연자 전원이 열을 지어 읍내를 일주한다. 전 과장의 본마당 탈춤이 모두 끝나면 소제燒祭를 치르면서 탈을 태우고 풍년과 마을의 무사를 기원한다. 이어서 연희자와 관객이 함께 어울려서 밤새 뒤풀이를 벌인다.
봉산탈춤은 총 일곱 과장으로 나누어진다. 제1과장 상좌춤은 사방신四方神에 대한 벽사辟邪 의식무이다. 상좌 네 명이 동일하게 백장삼과 흰 고깔을 쓰고 사방의 신들을 향한 춤을 구사한다. 제2과장 팔목중춤은 제1경 목중춤과 제2경 법고놀이로 나뉜다. 여덟 목중이 차례로 등장하여 사설을 한 다음 모두 함께 뭇동춤을 춘 후 퇴장한다. 법고놀이에서는 두 명의 목중이 법고를 갖고서 재담을 한다. 제3과장 사당춤은 일곱 명의 거사들이 사당을 업고 등장하여 소리를 하고 춤추며 논다. 홀아비 거사가 사당을 희롱하다 쫓겨난다. 제4과장 노장춤에서는 제1경 노장춤과 제2경 신장수춤 그리고 제3경 취발이춤으로 나뉜다.
노장춤에서는 생불生佛이라 칭송받던 노장이 소무에게 유혹되어 파계한다. 신장수춤은 노장이 소무의 신을 외상으로 구입하자 신발값을 받으려는 신장수가 원숭이를 대신 보냈다가 장작전으로 오라는 내용의 노장 편지에 받고 놀라 도주한다. 취발이춤은 노장을 물리친 취발이가 소무와 사랑을 나눈 뒤 아이를 얻어 글을 가르치고 신세타령을 한다. 제5과장 사자춤은 부처가 보낸 사자가 파계한 승려를 잡아먹으려 하자 회개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용서한다. 제6과장 양반춤은 말뚝이와 양반 삼형제가 재담을 섞어 가며 풍자적 춤을 춘다. 제7과장 미얄춤은 난리 중 헤어졌던 영감이 첩을 데리고 들어와 갈등을 초래한다. 할멈이 영감한테 맞아 죽자 남강노인이 등장하여 무당을 불러 진오귀굿을 펼친다.
봉산탈춤 음악은 삼현육각 관현악에 맞추어 염불, 굿거리, 타령 등을 연주한다. 주요 춤사위로는 고개잡이, 황소걸음, 외사위, 겹사위, 양사위, 연풍대, 까치걸음, 물결사위, 게걸음, 가제걸음, 활개펴기, 개구리뛰기, 물레방아돌기, 도리깨질사위, 만사위, 상우리 등이 있다.
강령康怜탈춤은 황해도 강령지방에서 마을 주민들에 의해 전승되었던 지역 탈놀이였다. 1939년 10월 13일부터 14일까지 이틀 동안 서울 부민관으로 초청 될 정도로 번성하기도 하였다. 강령탈춤은 마을의 학식 있는 토박이 원로들이 이끌었고 연희는 마을 남자들이 맡아 했다. 그리고 강령 인근에 있었던 재인마을 구암리 갈모동 재인들이 악사로 참여하였다. 강령탈춤은 이북 지역의 큰 명절인 단오날 주로 놀았으며, 단오가 지난 후 10일 만에 뒤풀이라 하여 다시 한 번 놀고는 사용하였던 모든 탈을 탈판의 모닥불에 태워 액을 물리쳤다.
강령탈춤은 1950년 6월 20일에서 21일까지 이틀 간 강령 본토에서 마지막으로 공연된 후, ·625전쟁과 남북 분단으로 인해 전승의 맥이 단절되었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월남한 오인관(강령 태생, 말뚝이 역), 양소운(해주 태생, 미얄 역), 박동신(해주 태생, 피리악사), 지관용(연백 태생, 피리악사), 김지옥(강령 출신, 재물대감 역)등에 의해 재건되어 1970년 국가무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강령출신 김응규(당시 양정중학교 재학)가 1943년에 그의 스승인 민속학자 임석재 선생을 안내하여 강령 현지에서 탈꾼 최준봉과 최승원의 제보로 강령탈춤 대사를 채록케 하였다. 1981년에는 서울에서 김응규를 비롯한 송순희(강령출신, 전 과장에 능했음), 조규홍(강령 출신, 대역), 조순환(강령 출신, 취발이 역) 등이 1970년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과정에서 누락된 대사와 춤 그리고 과정 등을 복구하는 역할을 하였다.
강령탈춤은 앞놀이로 길놀이와 서막고사가 있으며 본 놀이로 총 7과장의 탈놀이가 있다. 그리고 뒷놀이로 뒤풀이를 한다. 길놀이는 강령 팔경대에서 서부마을과 동부마을을 돌아 탈판까지 온다. 탈꾼들이 탈판에 모여 탈을 모아 두고 서막고사를 지낸다. 제1과장 사자춤은 두 명의 마부가 각각 사자를 데리고 나와 벽사辟邪의 춤을 추며 탈판을 정화시킨다. 이때 원숭이가 타령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함께 춤춘다. 제2과장 말뚝이춤은 첫 목춤이라고도 하는데 두 명의 말뚝이가 무대 좌우에서 각각 달음질하여 중앙으로 나와 서로 놀란 체하고 달아나서 다시 만나서 대무한다.
제3과장 목중춤은 목중이 춤을 추다가 사설을 하면 또 다른 한 명의 목중이 나와 그를 후려쳐 내쫓는다. 그리고 노래와 사설 그리고 염불을 한 후 춤춘다. 제4과장 상좌춤은 두 명의 상좌가 나와 대무한다. 제5과장 양반말뚝이춤은 맏양반, 둘째양반, 재물대감, 도령이 차례로 등장하여 양반 근본을 논한다. 이때 하인 말뚝이가 이들을 조롱하면서 양반의 무능과 허세를 드러낸다.
제6과장 노승춤은 제1경 팔목중춤, 제2경 노승춤, 제3경 취발이춤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여덟 명의 목중이 나와 뭇동춤을 추다가 노승과 소무를 데려다 놓는다. 노승이 소무를 얼러 파계 한 후 함께 놀고 있으면 취발이 등장하여 노승을 내쫒고 소무를 차지한 후 아기를 낳는다. 제7과장 영감·할미춤은 전쟁으로 헤어졌던 영감이 용산삼개집을 데리고 나타나 할멈과 만난다. 영감과 할멈 그리고 첩 용산삼개집의 삼각관계에서 할멈이 죽는다. 남강노인이 등장하여 할멈을 위해 진오기굿을 펼친다.
강령탈춤은 삼현육각 편성으로 염불도드리, 타령, 잦은굿거리 등의 장단을 연주하는데 특이한 것은 쌍피리 연주이다. 춤사위로는 감는사위, 거드렁사위, 겨누기, 겹사위, 고개잡이, 곱사위, 까치걸음, 돌릴사위, 맞사위, 뿌림사위, 앉아뛰기, 양발뛰기, 양사위, 어르는사위, 엇사위, 엎메기, 엎발찧기, 여닫이, 연풍대, 외발뛰기, 우방진右方進, 인사사위, 좌방진左方進, 좌우치기, 짓는사위, 채는사위, 코차기, 펴는사위, 푸는사위, 학걸음, 허튼사위, 후방진後方進 등이 있다. 이와 같은 강령탈춤의 춤사위를 표출하는 독특한 춤 형식으로는 장삼을 머리 위로 장엄하게 휘두르는 장삼춤과 양사방으로 활달하게 뿌리는 한삼춤이 있다.
황해도 구월산 아래에 있는 은율읍은 쌀과 면화 등이 많이 생산되어 수시로 물산 객주들이 드나들던 경제 활동지였다. 그래서 탈춤이 성행하는 데 좋은 환경을 갖고 있었다. 이곳은 19세기 초반쯤부터 농민들과 한량들이 주체가 되는 ‘놀탈’이 센 곳으로 유명했는데, 놀탈은 모내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5월 단오에 경작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놀아졌다. 낮에는 씨름그네뛰기가 벌어지고 놀탈은 밤에 모닥불을 피우고 밤새행해졌다. 은율탈춤에 드는 비용은 마을 유지들이 찬조하고 주민들의 걸립 동참으로 충당하였다. 은율탈춤은 탈고사를 시작으로 길놀이로 이어진다. 본 탈판은 초저녁부터 늦은 밤까지 이어진다. 끝마무리는 뒤풀이로 한다. 광복 후, 인천에서 장용수, 장봉헌 등에 의해 복원되어 197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은율탈춤은 총 여섯 개 과장으로 짜여 있다. 제1과장 사자춤은 축귀의식무이다. 제2과장 상좌춤은 독무로 추는데 흰 장삼에 고깔을 쓰고 벽사 의식적 사방무를 춘다. 제3과장 목중춤은 여덟 명의 먹중이 차례로 등장하여 자기를 소개한 후 흥겨운 한삼춤을 추어 불교세속화를 보여 준다. 제4과장 양반춤은 하인이 양반 얼굴을 채찍으로 후려치고 엉덩이를 들이 대어 방귀를 뀌며 비하한다. 제5과장 노승춤은 중과 소무 그리고 최괄이의 삼각관계에서 중과 소무가 결합하자 최괄이가 등장하여 소무를 쟁취한다. 제6과장 영감·할미광대춤은 헤어졌던 할미와 영감이 재회하고 영감 첩인 뚱딴지가 등장하여 처첩 간 갈등이 일어난다. 할미가 죽자 무당이 진혼굿을 한다.
은율탈춤은 삼현육각 반주에 타령장단, 염불장단, 잦은돔부리장단, 돌장단이 연주된다. 주요 춤사위는 떡메사위, 올림사위, 제끼는사위, 도는사위, 업는사위, 몸찍는사위, 곱사위, 찍는사위, 걷는사위, 젖는사위, 뛰는사위, 팔돌릴사위, 나비걷기, 까치걸음 등이다.
해서탈춤 중 전승 자료가 뚜렷이 남아 있는데도 복원되지 못한 것이 해주海州탈춤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강령탈춤과 상호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전승 발전되었던 해주탈춤은 황해도 남부 해주만 연안의 정치·경제·문화 중심지에서 전승되었던 도시 탈춤이었다. 해주탈춤 대사본 중에는 민속학자 최상수가 1940~1943년까지 4년 동안 매년 8월 해주 현지에서 김경찬(당시 49세)과 오희주(당시 52세) 두 연희자의 구술을 토대로 채록한 것이 있다. 그리고 1954년 황해도 현지에서 김일출이 조사한 자료가 전한다. 대사의 전반적 내용은 최상수가 쓴 『해서가면극연구』(1967년)에 실려 있는 것이 구체적이다. 당시 해주탈춤 명인으로 이름난 탈꾼으로는 해주예악연구소를 창설하고 그곳에서 무용 사범을 지낸 장량선張良善을 비롯한 오순옥(말뚝이 역), 이시언(취발이 역), 강오순(노장 역), 이치우(대양반 역) 등이 있었다. 장량선에게서 해주탈춤을 배워 6·25전쟁을 전후해 월남한 연희자로는 양소운(봉산탈춤 예능보유자)과 박동신(강령탈춤 예능보유자, 피리악사)이 있으며, 이들에 의해 구체적인 내용이 확인되었다.
해주탈춤 짜임새는 제1과장 말뚝이과장, 제2과장 먹중과장, 제3과장 양반과장, 제4과장 상좌춤과장, 제5과장 노장춤과장(제1경 먹중놀음, 제2경 소무놀음, 제3경 원숭이놀음, 제4경 취발이놀음), 제6과장 미얄할미·영감과장 등으로 짜여 있다. 해주탈춤에 쓰이는 장단은 영산(염불), 도드리, 타령, 굿거리 등이고 삼현육 각 편성의 음악이 연주된다. 해주탈춤 형식은 강령탈춤과 마찬가지로 활달한 한삼의 사위춤과 장엄한 장삼춤이다. 춤사위로는 채는사위, 거드렁사위, 겹사위, 인사사위, 맞사위, 겨누기, 양발돋음, 외발돋음, 한삼사위, 코차기, 양사위, 업메기, 여닫이, 엇사위, 학사위 연풍대, 까치걸음 등이 있다.

특징 및 의의

해서탈춤의 주제는 첫째, 모든 나쁜 액을 쫓아내는 벽사의식, 둘째 파계승에 대한 조롱, 셋째 양반들에 대한 모독과 풍자, 넷째 일부 처첩 사이의 삼각관계로 인한 슬픔과 서민생활의 애환 등이다. 특이한 것은 북쪽 지방색을 나타내는 활달한 한삼춤과 장엄한 장삼춤이다. 한삼춤은 소매 끝에 달린 하얀 한삼을 활기차게 뿌리면서 활달한 돋음질을 곁들여 추는 형식이고, 장삼춤은 역시 활달한 돋음질과 함께 묵직한 칡베의 장삼을 머리 위로 감고 뿌리면서 장엄하게 추는 장삼놀림의 춤이다.
장삼춤 형식은 봉산이나 은율에는 보이지 않지만 강령이나 해주에서는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어서 해서 탈춤에도 지역 갈래에 따라 다양한 토속적 춤 형식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한편, 해서탈춤에서는 한삼춤의 독창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목중춤과 말뚝이춤 등을 통해 보여 주고 있기도 하다. 이를 테면 봉산탈춤이나 은율탈춤에서는 한 명의 말뚝이만 등장하는 것과는 달리 강령이나 해주에서는 두 명의 쌍말뚝이가 등장하여 곤장을 휘두르며 다양한 춤사위로 펼치면서 대무한다.
해서탈춤의 춤 형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장단, 복색 그리고 채찍, 곤장, 부채, 지팡이, 방울지팡이, 육환장, 염주, 손수건, 나뭇가지, 취발이새끼, 서낭기, 세왕필, 신칼 등의 춤 도구이다. 장단은 춤의 강약과 대소삼 그리고 형태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복색의 한 부분인 한삼과 장삼은 더그레나 장삼 소매 끝 부분에 부착되어 있어서 손놀림을 하게 되면 다양한 춤사위를 구사하게 만든다. 한삼뿌림과 장삼놀림은 율동감과 생동감을 갖게 하고 춤의 표현력을 한층 고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한삼의 경우에는 가벼운 천으로 기다랗게 제작되어 쉽게 나풀거릴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더욱 재빠른 춤사위를 구사하기 쉽게 활용된다. 하지만 장삼의 경우에는 두꺼운 칡베로 길고 넓게 만들어져 무겁고 더욱 느린 춤사위를 구사하게 만든다.
춤도구 또한 장단이나 복색 못지않게 춤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주로 소품으로 취급되는 부채, 대지팡이, 곤장 등의 활용은 율동감과 생동감뿐만 아니라 춤이 갖는 의미 전달에도 큰 도움을 끼친다. 춤사위와 춤사위를 자연스럽게 연결할 뿐만 아니라 고저를 조절하는 데도 한몫한다. 특히 이야기 중심의 극적인 춤의 이해력을 넓히고 의미 전달을 돕는다.
해서탈춤에서 춤이 갖는 의미와 기능은 삶의 의식성을 비롯한 신앙성, 불교성, 놀이성, 예술성, 연희의 공간성과 시간성 및 교육성, 생산성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삶의 민중의식과 관련된 것으로서는 억눌린 자의 활기찬 기상을 춤으로 보여 줌으로써 지배층을 모독하고 동시에 민중의 억울함을 폭로하여 개혁을 시도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이러한 것은 양반의 가냘픔과 어리석음을 표출하는 반면, 민중 대변자로서 말뚝이와 취발이는 활기찬 진보적 성격을 나타낸다. 억눌린 자의 한을 풀어낼 뿐만 아니라 해방의 의지를 통해 솟구치는 환희의 심정을 미적인 감각으로 살려 냄으로써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대립적 선상을 민중 해방춤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탈춤을 통해 지배층과 피지배층과의 화합 및 화해를 도모하고 미래 삶에 대한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뿐만 아니라 지역민의 대동단결과 발전을 도모한다. 영감과 할멈의 재회는 헤어짐과 만남을 통해 삶의 슬픔과 환희라는 양면적 구조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싸움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나눠짐으로써 갈등은 해소되지만 원과 한을 낳게 하는 인간사의 본질을 드러내기도 한다. 결국 꼬여짐의 원풀이 내지는 한풀이를 통해 산 자의 미래를 위한 한국인의 본질적 무속신앙 행위의 굿춤이 표현된다.
해서탈춤의 춤 형식이 신앙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나쁜 액을 쫓고 동시에 해로운 기운을 제거하며 잡귀와 잡신을 몰아냄으로써 탈판을 정화하는 벽사의식의 춤이 크게 부각되는 데서 알 수 있다. 불교와 관련하여서는 노승이나 목중 등 불교 승려들이 의례 관련의 춤을 통해 불교와 연관된 의미와 기능을 갖도록 하고 있다. 수도승의 고행과 수도 형태를 담은 불교적 또는 불교 지향적 춤은 불교의 단면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는 불교의 민중화 또는 교육화 내용을 춤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와는 달리, 경륜을 갖고 있는 승려가 어여쁜 소무에 동하여 불법을 파계함으로써 불교의 부도덕한 면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민간과 승려의 동시 출연으로 인한 민중놀이의 불교화 또는 불교의식의 민중화를 직간접적으로 표출한다. 이는 탈춤이 불교의식과 민중놀이가 서로 섞여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놀이성은 관객을 동원하기 위한 길놀이의 춤이라든가 뒤풀이의 뭇동춤이나 허튼춤 또는 신풀이춤 등에서 그 진정성을 잘 보여 준다. 이러한 흥판과 난장판은 결국 연희자와 관객들이 함께 어울리는 놀이적 행위의 한 면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길놀이춤을 통해 관객들의 참여를 유도하여 흥을 고조시킴으로써 놀이적 연희로 이끌어 가는 것도 같은 목적이다. 또한 탈놀이 진행 과정에서 추임새뿐 아니라 자유로운 자기만의 흥춤을 추어 축제적 놀이 성격을 갖게 하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오늘날 해서탈춤 전승은 정형화된 춤사위로 연희를 이끌어 간다. 하지만 탈춤은 원래 즉흥적 춤으로 이루어졌었다. 즉흥성이 있다는 것은 춤사위의 자유로움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춤의 변화를 요하는 중요한 발판이 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유교적인 윤리 도덕의 영향으로 지배층 양반들이 피지배층 사이에서 연희되었던 탈춤이나 판소리 등 민중예술을 무시하고 폄하하였던 까닭에 사회적으로 공인된 무대가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탈춤은 공간이 터진 마당이나 야외에서 놀아졌고 이로써 오히려 연희자와 관객이 즉흥성을 갖게 되고 또한 참여자들이 일체감을 가질 수 있는 연희로 발달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탈춤은 자연스럽게 관객이 연희에 끼어들어 대사뿐만 아니라 춤에서도 한 몫하게 된 것이다.
해서탈춤은 다분히 예술성을 담고 있다. 다양한 춤형식과 복잡하고 섬세한 춤사위는 예술적 기교와 기술을 바탕으로 한다. 비록 탈춤이 마을의 청장년들로 구성된 비전문적인 춤꾼들에 의해 민중놀이로서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짜인 춤 형식과 춤사위 기법으로 보아 예술적 끼를 갖지 않은 춤꾼이 소화하기란 쉽지 않다. 이에 탈춤에 관여하였던 춤꾼들은 분명 예능적 끼를 가진 자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수많은 관람객이 참여하는 공연장에서 흥행을 하기 위해서는 기법을 연마하고 예술적 미를 다듬었을 것이다.
해서탈춤에서의 교육성은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위협하여 교화시키려는 사자춤이나, 사자를 인간사회에 순화시키는 내용의 춤으로 표출되고 있는 윤리적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취발이 새끼를 춤으로 교육하고 성장시킴으로써 가면극에서 춤이 갖는 교육성의 한 면을 엿볼 수가 있다. 한편, 탈춤에서 생산성은 대단히 중요하다. 영감이 첩과 결합하는 교합의 춤은 생산적 능력을 나타낸다. 소무가 취발이와의 교태스러운 관계에서 새끼를 출산하는 대목 또한 삶과 인간의 생산성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미얄할멈이나 노승의 비생산적인 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결과로서, 될 수 있는 것과 될 수 없는 것의 이중성을 춤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서탈춤에서 춤은 대사와 대사를 연결하는 기능을 한다. 예컨대, 양반・말뚝이과정에서 양반과 말뚝이 사이의 대립적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에서 극 진행이 다음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아 보이지만 양반춤과 말뚝이춤의 대무를 통해 자연스럽게 대사를 연결하고 극의 진행을 도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춤은 또한 움직임을 통해 대사로 표현하지 못한 지배층에 대한 억울함을 발산, 사회적 모순의 폭로 등을 표출한다. 대사 이면에 담겨진 응어리를 춤으로 자유로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애환과 한이 내재된 민중들의 심정을 묘사하기 위해 춤을 추는 탈꾼들은 현실 사회의 일원이지만 탈판을 통해 신분과 지위를 초월한 민중의 대변자로 탈바꿈된다. 어두운 저녁 탈판 중앙에 피어진 장작불을 뛰어 넘는 춤을 추었다는 것은 곧 응어리진 한을 풀어내려는 극히 도약적인 의도임을 알 수 있다.
해서탈춤에서 춤 역할은 또한 사회적 구조 및 인간 심리적 모순과 갈등을 풍자와 해학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춤 자체가 익살스럽고 상징적이며 표현방식이 강렬한 데서 알 수 있다. 손놀림이나 발디딤이 강한데서는 이러한 본질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소화해 낼 수 있다는 것은 탈춤이 상정된 특정 인물의 탈을 쓰고 추는 가면의 춤이며 여러 가지 동작을 통해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탈춤에서 춤 역할은 무엇보다도 추악한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고 억울한 민중의 감정을 발산하는 데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면모는 춤이 전투적이고 과격한 춤사위들로 이루어지고 있는 데서 확인된다. 그리하여 탈춤이 민중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을 초월한 개혁 의지를 강하게 나타내는 연희임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사례를 강령탈춤 코차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는 땅에서 하늘로 솟았다가 다시 땅으로 돌아오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초월의 세계로 갔다가 다시 현실로 되돌아옴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것은 탈춤이 현실적인 것과 탈속적인 것을 동시적으로 감싸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강령탈춤 자료집(양종승외, 민속원, 2004), 공연문화연구(양종승,한국공연문화학회, 2002), 은율탈춤의 춤사위 분석 및 미의식 연구(나지경,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탈놀이의 기원과 구조(박진태, 새문사, 1990), 한국가면극(이두현,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69), 한국가면극(전경욱, 열화당, 1998), 한국 가면극의 유형과 전승원리 연구(정형호,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해주탈춤(양종승, 민속소식지, 국립민속박물관, 2005), 황해도탈놀이(서연호, 열화당, 1988).

해서탈춤

해서탈춤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무용

집필자 양종승(梁鍾承)
갱신일 2019-01-24

정의

해서 지방海西地方에서 전승되어 온 탈춤.

내용

해서 지방은 우리나라 중서부에 위치해 있는 황해도黃海道를 일컫는 지역명이다. 황주黃州와 해주海州 첫글자를 따 붙여진 황해도는 지리적으로 평안도와 더불어 우리나라 서북 지역에 있다. 그런데 서울에서 이곳을 왕래하기 위해서는 예성강 하류에 있는 벽란도碧瀾渡나루, 즉 서쪽으로 뻗은 바다를 건너야 했으므로 이 지역을 해서海西라고 했다.해서 지방, 즉 황해도 일대에서 전승되어 온 가면극을 총칭하여 ‘해서탈춤’이라 부르는데,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봉산, 기린, 서흥, 평산, 신계, 금천, 수안, 황주, 안악, 은율, 재령, 신천, 송화, 해주, 강령, 옹진, 연백 등 곳곳에서 활기찬 전승이 이루어졌었다. 그런데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위축되기 시작하더니 1930년대 이르러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쇠퇴하고 말았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부터 는 아예 계승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945년 광복을 맞이하면서 부활되어 연희되었지만 곧이어 6·25전쟁이 일어남으로써 전승의 맥은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남북 분단 후, 남한에서 6·25전쟁을 전후하여 월남한 연희자들에 의해 해서탈춤 복원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무렵, 정부가 펼친 전통문화재건운동도 본격화되어 져 각지의 탈춤들이 복원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봉산, 강령, 은율의 해서탈춤이 복원되었다.황해도 본토에서는 탈춤 발전에 지역 유지와 학식있는 지방관청 소속의 이속吏屬들 역할이 컸다. 봉산鳳山탈춤을 발전시키는 데 한몫했던 안초목도 이속 출신 인물 중 한 사람이다. 한편, 봉산탈춤은 19세기 말부터 경술국치 이전까지 전성기를 이루었다. 일제강점기에서도 나름대로의 흥행 분위기를 타고 1930년대까지 이어졌다. 주로 단오놀이로 이루어졌는데 황해도 봉산군 동선면 길양리의 경수대에서 전승되었던 것이 1915년경 무렵 경의선 철도가 개통되고 행정관청 이전과 도시화에 따른 환경 변화에 힘입어 사리원 경암산 아래로 옮겨 놀아졌다. 일제강점기 중후반에 들어서면서는 일제의 민족 연희 탄압으로 위축되었고, 광복 후에는 사회 혼란과 민속행사 제지로 파탄의 길을 걷게 되었다.6·25전쟁을 전후하여 황해도 사리원에서 월남한 김진옥金辰玉과 민천식閔千植 등에 의해 서울에서 복원이 이루어졌고,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남한 출신의 젊은 계승자들을 참여하게 되면서 전승의 활기를 되찾게 된 것이다.봉산탈춤은 먼저 길놀이, 서막고사, 무동춤 등 전 마당을 연 후, 이어서 전 과장을 연희하는 본마당이 열린다. 길놀이에서는 악공을 선두로 사자, 말뚝이, 취발이 순서로 출연자 전원이 열을 지어 읍내를 일주한다. 전 과장의 본마당 탈춤이 모두 끝나면 소제燒祭를 치르면서 탈을 태우고 풍년과 마을의 무사를 기원한다. 이어서 연희자와 관객이 함께 어울려서 밤새 뒤풀이를 벌인다.봉산탈춤은 총 일곱 과장으로 나누어진다. 제1과장 상좌춤은 사방신四方神에 대한 벽사辟邪 의식무이다. 상좌 네 명이 동일하게 백장삼과 흰 고깔을 쓰고 사방의 신들을 향한 춤을 구사한다. 제2과장 팔목중춤은 제1경 목중춤과 제2경 법고놀이로 나뉜다. 여덟 목중이 차례로 등장하여 사설을 한 다음 모두 함께 뭇동춤을 춘 후 퇴장한다. 법고놀이에서는 두 명의 목중이 법고를 갖고서 재담을 한다. 제3과장 사당춤은 일곱 명의 거사들이 사당을 업고 등장하여 소리를 하고 춤추며 논다. 홀아비 거사가 사당을 희롱하다 쫓겨난다. 제4과장 노장춤에서는 제1경 노장춤과 제2경 신장수춤 그리고 제3경 취발이춤으로 나뉜다.노장춤에서는 생불生佛이라 칭송받던 노장이 소무에게 유혹되어 파계한다. 신장수춤은 노장이 소무의 신을 외상으로 구입하자 신발값을 받으려는 신장수가 원숭이를 대신 보냈다가 장작전으로 오라는 내용의 노장 편지에 받고 놀라 도주한다. 취발이춤은 노장을 물리친 취발이가 소무와 사랑을 나눈 뒤 아이를 얻어 글을 가르치고 신세타령을 한다. 제5과장 사자춤은 부처가 보낸 사자가 파계한 승려를 잡아먹으려 하자 회개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용서한다. 제6과장 양반춤은 말뚝이와 양반 삼형제가 재담을 섞어 가며 풍자적 춤을 춘다. 제7과장 미얄춤은 난리 중 헤어졌던 영감이 첩을 데리고 들어와 갈등을 초래한다. 할멈이 영감한테 맞아 죽자 남강노인이 등장하여 무당을 불러 진오귀굿을 펼친다.봉산탈춤 음악은 삼현육각 관현악에 맞추어 염불, 굿거리, 타령 등을 연주한다. 주요 춤사위로는 고개잡이, 황소걸음, 외사위, 겹사위, 양사위, 연풍대, 까치걸음, 물결사위, 게걸음, 가제걸음, 활개펴기, 개구리뛰기, 물레방아돌기, 도리깨질사위, 만사위, 상우리 등이 있다.강령康怜탈춤은 황해도 강령지방에서 마을 주민들에 의해 전승되었던 지역 탈놀이였다. 1939년 10월 13일부터 14일까지 이틀 동안 서울 부민관으로 초청 될 정도로 번성하기도 하였다. 강령탈춤은 마을의 학식 있는 토박이 원로들이 이끌었고 연희는 마을 남자들이 맡아 했다. 그리고 강령 인근에 있었던 재인마을 구암리 갈모동 재인들이 악사로 참여하였다. 강령탈춤은 이북 지역의 큰 명절인 단오날 주로 놀았으며, 단오가 지난 후 10일 만에 뒤풀이라 하여 다시 한 번 놀고는 사용하였던 모든 탈을 탈판의 모닥불에 태워 액을 물리쳤다.강령탈춤은 1950년 6월 20일에서 21일까지 이틀 간 강령 본토에서 마지막으로 공연된 후, ·625전쟁과 남북 분단으로 인해 전승의 맥이 단절되었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월남한 오인관(강령 태생, 말뚝이 역), 양소운(해주 태생, 미얄 역), 박동신(해주 태생, 피리악사), 지관용(연백 태생, 피리악사), 김지옥(강령 출신, 재물대감 역)등에 의해 재건되어 1970년 국가무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강령출신 김응규(당시 양정중학교 재학)가 1943년에 그의 스승인 민속학자 임석재 선생을 안내하여 강령 현지에서 탈꾼 최준봉과 최승원의 제보로 강령탈춤 대사를 채록케 하였다. 1981년에는 서울에서 김응규를 비롯한 송순희(강령출신, 전 과장에 능했음), 조규홍(강령 출신, 대역), 조순환(강령 출신, 취발이 역) 등이 1970년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과정에서 누락된 대사와 춤 그리고 과정 등을 복구하는 역할을 하였다.강령탈춤은 앞놀이로 길놀이와 서막고사가 있으며 본 놀이로 총 7과장의 탈놀이가 있다. 그리고 뒷놀이로 뒤풀이를 한다. 길놀이는 강령 팔경대에서 서부마을과 동부마을을 돌아 탈판까지 온다. 탈꾼들이 탈판에 모여 탈을 모아 두고 서막고사를 지낸다. 제1과장 사자춤은 두 명의 마부가 각각 사자를 데리고 나와 벽사辟邪의 춤을 추며 탈판을 정화시킨다. 이때 원숭이가 타령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함께 춤춘다. 제2과장 말뚝이춤은 첫 목춤이라고도 하는데 두 명의 말뚝이가 무대 좌우에서 각각 달음질하여 중앙으로 나와 서로 놀란 체하고 달아나서 다시 만나서 대무한다.제3과장 목중춤은 목중이 춤을 추다가 사설을 하면 또 다른 한 명의 목중이 나와 그를 후려쳐 내쫓는다. 그리고 노래와 사설 그리고 염불을 한 후 춤춘다. 제4과장 상좌춤은 두 명의 상좌가 나와 대무한다. 제5과장 양반말뚝이춤은 맏양반, 둘째양반, 재물대감, 도령이 차례로 등장하여 양반 근본을 논한다. 이때 하인 말뚝이가 이들을 조롱하면서 양반의 무능과 허세를 드러낸다.제6과장 노승춤은 제1경 팔목중춤, 제2경 노승춤, 제3경 취발이춤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여덟 명의 목중이 나와 뭇동춤을 추다가 노승과 소무를 데려다 놓는다. 노승이 소무를 얼러 파계 한 후 함께 놀고 있으면 취발이 등장하여 노승을 내쫒고 소무를 차지한 후 아기를 낳는다. 제7과장 영감·할미춤은 전쟁으로 헤어졌던 영감이 용산삼개집을 데리고 나타나 할멈과 만난다. 영감과 할멈 그리고 첩 용산삼개집의 삼각관계에서 할멈이 죽는다. 남강노인이 등장하여 할멈을 위해 진오기굿을 펼친다.강령탈춤은 삼현육각 편성으로 염불도드리, 타령, 잦은굿거리 등의 장단을 연주하는데 특이한 것은 쌍피리 연주이다. 춤사위로는 감는사위, 거드렁사위, 겨누기, 겹사위, 고개잡이, 곱사위, 까치걸음, 돌릴사위, 맞사위, 뿌림사위, 앉아뛰기, 양발뛰기, 양사위, 어르는사위, 엇사위, 엎메기, 엎발찧기, 여닫이, 연풍대, 외발뛰기, 우방진右方進, 인사사위, 좌방진左方進, 좌우치기, 짓는사위, 채는사위, 코차기, 펴는사위, 푸는사위, 학걸음, 허튼사위, 후방진後方進 등이 있다. 이와 같은 강령탈춤의 춤사위를 표출하는 독특한 춤 형식으로는 장삼을 머리 위로 장엄하게 휘두르는 장삼춤과 양사방으로 활달하게 뿌리는 한삼춤이 있다.황해도 구월산 아래에 있는 은율읍은 쌀과 면화 등이 많이 생산되어 수시로 물산 객주들이 드나들던 경제 활동지였다. 그래서 탈춤이 성행하는 데 좋은 환경을 갖고 있었다. 이곳은 19세기 초반쯤부터 농민들과 한량들이 주체가 되는 ‘놀탈’이 센 곳으로 유명했는데, 놀탈은 모내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5월 단오에 경작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놀아졌다. 낮에는 씨름과 그네뛰기가 벌어지고 놀탈은 밤에 모닥불을 피우고 밤새행해졌다. 은율탈춤에 드는 비용은 마을 유지들이 찬조하고 주민들의 걸립 동참으로 충당하였다. 은율탈춤은 탈고사를 시작으로 길놀이로 이어진다. 본 탈판은 초저녁부터 늦은 밤까지 이어진다. 끝마무리는 뒤풀이로 한다. 광복 후, 인천에서 장용수, 장봉헌 등에 의해 복원되어 197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었다.은율탈춤은 총 여섯 개 과장으로 짜여 있다. 제1과장 사자춤은 축귀의식무이다. 제2과장 상좌춤은 독무로 추는데 흰 장삼에 고깔을 쓰고 벽사 의식적 사방무를 춘다. 제3과장 목중춤은 여덟 명의 먹중이 차례로 등장하여 자기를 소개한 후 흥겨운 한삼춤을 추어 불교세속화를 보여 준다. 제4과장 양반춤은 하인이 양반 얼굴을 채찍으로 후려치고 엉덩이를 들이 대어 방귀를 뀌며 비하한다. 제5과장 노승춤은 중과 소무 그리고 최괄이의 삼각관계에서 중과 소무가 결합하자 최괄이가 등장하여 소무를 쟁취한다. 제6과장 영감·할미광대춤은 헤어졌던 할미와 영감이 재회하고 영감 첩인 뚱딴지가 등장하여 처첩 간 갈등이 일어난다. 할미가 죽자 무당이 진혼굿을 한다.은율탈춤은 삼현육각 반주에 타령장단, 염불장단, 잦은돔부리장단, 돌장단이 연주된다. 주요 춤사위는 떡메사위, 올림사위, 제끼는사위, 도는사위, 업는사위, 몸찍는사위, 곱사위, 찍는사위, 걷는사위, 젖는사위, 뛰는사위, 팔돌릴사위, 나비걷기, 까치걸음 등이다.해서탈춤 중 전승 자료가 뚜렷이 남아 있는데도 복원되지 못한 것이 해주海州탈춤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강령탈춤과 상호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전승 발전되었던 해주탈춤은 황해도 남부 해주만 연안의 정치·경제·문화 중심지에서 전승되었던 도시 탈춤이었다. 해주탈춤 대사본 중에는 민속학자 최상수가 1940~1943년까지 4년 동안 매년 8월 해주 현지에서 김경찬(당시 49세)과 오희주(당시 52세) 두 연희자의 구술을 토대로 채록한 것이 있다. 그리고 1954년 황해도 현지에서 김일출이 조사한 자료가 전한다. 대사의 전반적 내용은 최상수가 쓴 『해서가면극연구』(1967년)에 실려 있는 것이 구체적이다. 당시 해주탈춤 명인으로 이름난 탈꾼으로는 해주예악연구소를 창설하고 그곳에서 무용 사범을 지낸 장량선張良善을 비롯한 오순옥(말뚝이 역), 이시언(취발이 역), 강오순(노장 역), 이치우(대양반 역) 등이 있었다. 장량선에게서 해주탈춤을 배워 6·25전쟁을 전후해 월남한 연희자로는 양소운(봉산탈춤 예능보유자)과 박동신(강령탈춤 예능보유자, 피리악사)이 있으며, 이들에 의해 구체적인 내용이 확인되었다.해주탈춤 짜임새는 제1과장 말뚝이과장, 제2과장 먹중과장, 제3과장 양반과장, 제4과장 상좌춤과장, 제5과장 노장춤과장(제1경 먹중놀음, 제2경 소무놀음, 제3경 원숭이놀음, 제4경 취발이놀음), 제6과장 미얄할미·영감과장 등으로 짜여 있다. 해주탈춤에 쓰이는 장단은 영산(염불), 도드리, 타령, 굿거리 등이고 삼현육 각 편성의 음악이 연주된다. 해주탈춤 형식은 강령탈춤과 마찬가지로 활달한 한삼의 사위춤과 장엄한 장삼춤이다. 춤사위로는 채는사위, 거드렁사위, 겹사위, 인사사위, 맞사위, 겨누기, 양발돋음, 외발돋음, 한삼사위, 코차기, 양사위, 업메기, 여닫이, 엇사위, 학사위 연풍대, 까치걸음 등이 있다.

특징 및 의의

해서탈춤의 주제는 첫째, 모든 나쁜 액을 쫓아내는 벽사의식, 둘째 파계승에 대한 조롱, 셋째 양반들에 대한 모독과 풍자, 넷째 일부 처첩 사이의 삼각관계로 인한 슬픔과 서민생활의 애환 등이다. 특이한 것은 북쪽 지방색을 나타내는 활달한 한삼춤과 장엄한 장삼춤이다. 한삼춤은 소매 끝에 달린 하얀 한삼을 활기차게 뿌리면서 활달한 돋음질을 곁들여 추는 형식이고, 장삼춤은 역시 활달한 돋음질과 함께 묵직한 칡베의 장삼을 머리 위로 감고 뿌리면서 장엄하게 추는 장삼놀림의 춤이다.장삼춤 형식은 봉산이나 은율에는 보이지 않지만 강령이나 해주에서는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어서 해서 탈춤에도 지역 갈래에 따라 다양한 토속적 춤 형식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한편, 해서탈춤에서는 한삼춤의 독창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목중춤과 말뚝이춤 등을 통해 보여 주고 있기도 하다. 이를 테면 봉산탈춤이나 은율탈춤에서는 한 명의 말뚝이만 등장하는 것과는 달리 강령이나 해주에서는 두 명의 쌍말뚝이가 등장하여 곤장을 휘두르며 다양한 춤사위로 펼치면서 대무한다.해서탈춤의 춤 형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장단, 복색 그리고 채찍, 곤장, 부채, 지팡이, 방울지팡이, 육환장, 염주, 손수건, 나뭇가지, 취발이새끼, 서낭기, 세왕필, 신칼 등의 춤 도구이다. 장단은 춤의 강약과 대소삼 그리고 형태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복색의 한 부분인 한삼과 장삼은 더그레나 장삼 소매 끝 부분에 부착되어 있어서 손놀림을 하게 되면 다양한 춤사위를 구사하게 만든다. 한삼뿌림과 장삼놀림은 율동감과 생동감을 갖게 하고 춤의 표현력을 한층 고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한삼의 경우에는 가벼운 천으로 기다랗게 제작되어 쉽게 나풀거릴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더욱 재빠른 춤사위를 구사하기 쉽게 활용된다. 하지만 장삼의 경우에는 두꺼운 칡베로 길고 넓게 만들어져 무겁고 더욱 느린 춤사위를 구사하게 만든다.춤도구 또한 장단이나 복색 못지않게 춤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주로 소품으로 취급되는 부채, 대지팡이, 곤장 등의 활용은 율동감과 생동감뿐만 아니라 춤이 갖는 의미 전달에도 큰 도움을 끼친다. 춤사위와 춤사위를 자연스럽게 연결할 뿐만 아니라 고저를 조절하는 데도 한몫한다. 특히 이야기 중심의 극적인 춤의 이해력을 넓히고 의미 전달을 돕는다.해서탈춤에서 춤이 갖는 의미와 기능은 삶의 의식성을 비롯한 신앙성, 불교성, 놀이성, 예술성, 연희의 공간성과 시간성 및 교육성, 생산성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삶의 민중의식과 관련된 것으로서는 억눌린 자의 활기찬 기상을 춤으로 보여 줌으로써 지배층을 모독하고 동시에 민중의 억울함을 폭로하여 개혁을 시도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이러한 것은 양반의 가냘픔과 어리석음을 표출하는 반면, 민중 대변자로서 말뚝이와 취발이는 활기찬 진보적 성격을 나타낸다. 억눌린 자의 한을 풀어낼 뿐만 아니라 해방의 의지를 통해 솟구치는 환희의 심정을 미적인 감각으로 살려 냄으로써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대립적 선상을 민중 해방춤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탈춤을 통해 지배층과 피지배층과의 화합 및 화해를 도모하고 미래 삶에 대한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뿐만 아니라 지역민의 대동단결과 발전을 도모한다. 영감과 할멈의 재회는 헤어짐과 만남을 통해 삶의 슬픔과 환희라는 양면적 구조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싸움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나눠짐으로써 갈등은 해소되지만 원과 한을 낳게 하는 인간사의 본질을 드러내기도 한다. 결국 꼬여짐의 원풀이 내지는 한풀이를 통해 산 자의 미래를 위한 한국인의 본질적 무속신앙 행위의 굿춤이 표현된다.해서탈춤의 춤 형식이 신앙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나쁜 액을 쫓고 동시에 해로운 기운을 제거하며 잡귀와 잡신을 몰아냄으로써 탈판을 정화하는 벽사의식의 춤이 크게 부각되는 데서 알 수 있다. 불교와 관련하여서는 노승이나 목중 등 불교 승려들이 의례 관련의 춤을 통해 불교와 연관된 의미와 기능을 갖도록 하고 있다. 수도승의 고행과 수도 형태를 담은 불교적 또는 불교 지향적 춤은 불교의 단면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는 불교의 민중화 또는 교육화 내용을 춤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와는 달리, 경륜을 갖고 있는 승려가 어여쁜 소무에 동하여 불법을 파계함으로써 불교의 부도덕한 면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민간과 승려의 동시 출연으로 인한 민중놀이의 불교화 또는 불교의식의 민중화를 직간접적으로 표출한다. 이는 탈춤이 불교의식과 민중놀이가 서로 섞여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놀이성은 관객을 동원하기 위한 길놀이의 춤이라든가 뒤풀이의 뭇동춤이나 허튼춤 또는 신풀이춤 등에서 그 진정성을 잘 보여 준다. 이러한 흥판과 난장판은 결국 연희자와 관객들이 함께 어울리는 놀이적 행위의 한 면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길놀이춤을 통해 관객들의 참여를 유도하여 흥을 고조시킴으로써 놀이적 연희로 이끌어 가는 것도 같은 목적이다. 또한 탈놀이 진행 과정에서 추임새뿐 아니라 자유로운 자기만의 흥춤을 추어 축제적 놀이 성격을 갖게 하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오늘날 해서탈춤 전승은 정형화된 춤사위로 연희를 이끌어 간다. 하지만 탈춤은 원래 즉흥적 춤으로 이루어졌었다. 즉흥성이 있다는 것은 춤사위의 자유로움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춤의 변화를 요하는 중요한 발판이 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유교적인 윤리 도덕의 영향으로 지배층 양반들이 피지배층 사이에서 연희되었던 탈춤이나 판소리 등 민중예술을 무시하고 폄하하였던 까닭에 사회적으로 공인된 무대가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탈춤은 공간이 터진 마당이나 야외에서 놀아졌고 이로써 오히려 연희자와 관객이 즉흥성을 갖게 되고 또한 참여자들이 일체감을 가질 수 있는 연희로 발달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탈춤은 자연스럽게 관객이 연희에 끼어들어 대사뿐만 아니라 춤에서도 한 몫하게 된 것이다.해서탈춤은 다분히 예술성을 담고 있다. 다양한 춤형식과 복잡하고 섬세한 춤사위는 예술적 기교와 기술을 바탕으로 한다. 비록 탈춤이 마을의 청장년들로 구성된 비전문적인 춤꾼들에 의해 민중놀이로서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짜인 춤 형식과 춤사위 기법으로 보아 예술적 끼를 갖지 않은 춤꾼이 소화하기란 쉽지 않다. 이에 탈춤에 관여하였던 춤꾼들은 분명 예능적 끼를 가진 자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수많은 관람객이 참여하는 공연장에서 흥행을 하기 위해서는 기법을 연마하고 예술적 미를 다듬었을 것이다.해서탈춤에서의 교육성은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위협하여 교화시키려는 사자춤이나, 사자를 인간사회에 순화시키는 내용의 춤으로 표출되고 있는 윤리적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취발이 새끼를 춤으로 교육하고 성장시킴으로써 가면극에서 춤이 갖는 교육성의 한 면을 엿볼 수가 있다. 한편, 탈춤에서 생산성은 대단히 중요하다. 영감이 첩과 결합하는 교합의 춤은 생산적 능력을 나타낸다. 소무가 취발이와의 교태스러운 관계에서 새끼를 출산하는 대목 또한 삶과 인간의 생산성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미얄할멈이나 노승의 비생산적인 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결과로서, 될 수 있는 것과 될 수 없는 것의 이중성을 춤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해서탈춤에서 춤은 대사와 대사를 연결하는 기능을 한다. 예컨대, 양반・말뚝이과정에서 양반과 말뚝이 사이의 대립적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에서 극 진행이 다음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아 보이지만 양반춤과 말뚝이춤의 대무를 통해 자연스럽게 대사를 연결하고 극의 진행을 도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춤은 또한 움직임을 통해 대사로 표현하지 못한 지배층에 대한 억울함을 발산, 사회적 모순의 폭로 등을 표출한다. 대사 이면에 담겨진 응어리를 춤으로 자유로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애환과 한이 내재된 민중들의 심정을 묘사하기 위해 춤을 추는 탈꾼들은 현실 사회의 일원이지만 탈판을 통해 신분과 지위를 초월한 민중의 대변자로 탈바꿈된다. 어두운 저녁 탈판 중앙에 피어진 장작불을 뛰어 넘는 춤을 추었다는 것은 곧 응어리진 한을 풀어내려는 극히 도약적인 의도임을 알 수 있다.해서탈춤에서 춤 역할은 또한 사회적 구조 및 인간 심리적 모순과 갈등을 풍자와 해학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춤 자체가 익살스럽고 상징적이며 표현방식이 강렬한 데서 알 수 있다. 손놀림이나 발디딤이 강한데서는 이러한 본질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소화해 낼 수 있다는 것은 탈춤이 상정된 특정 인물의 탈을 쓰고 추는 가면의 춤이며 여러 가지 동작을 통해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탈춤에서 춤 역할은 무엇보다도 추악한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고 억울한 민중의 감정을 발산하는 데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면모는 춤이 전투적이고 과격한 춤사위들로 이루어지고 있는 데서 확인된다. 그리하여 탈춤이 민중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을 초월한 개혁 의지를 강하게 나타내는 연희임을 짐작케 한다.이러한 사례를 강령탈춤 코차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는 땅에서 하늘로 솟았다가 다시 땅으로 돌아오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초월의 세계로 갔다가 다시 현실로 되돌아옴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것은 탈춤이 현실적인 것과 탈속적인 것을 동시적으로 감싸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강령탈춤 자료집(양종승외, 민속원, 2004), 공연문화연구(양종승,한국공연문화학회, 2002), 은율탈춤의 춤사위 분석 및 미의식 연구(나지경,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탈놀이의 기원과 구조(박진태, 새문사, 1990), 한국가면극(이두현,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69), 한국가면극(전경욱, 열화당, 1998), 한국 가면극의 유형과 전승원리 연구(정형호,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해주탈춤(양종승, 민속소식지, 국립민속박물관, 2005), 황해도탈놀이(서연호, 열화당,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