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설화 > 전설

집필자 조정현(曺鼎鉉)
갱신일 2018-12-27

정의

입향시조의 <만인적선 이야기>와 안씨 부부의 <피 천석 묘 이야기>, 하회별신굿탈놀이 유래로서 <허 도령 전설>, 겸암과 서애 관련 이야기 등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하회마을에 전승되는 설화.

역사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마을 전체를 동쪽과 남쪽, 서쪽 세 방향으로 감싸 도는 빼어난 터에 자리 잡은 풍산 류 씨(豊山柳氏) 동성 마을이다. 지형은 풍수학적으로 태극형(太極形)·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행주형(行舟形)이라고 한다. 낙동강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S자형을 이루면서 마을을 감싸고 흐른다 하여 하회(河回)라는 이름이 붙었다. 안동 하회마을에는 대체로 허 씨(許氏)와 안 씨(安氏) 등 유력한 씨족이 살아 왔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635년(인조 13)의 기록을 보면, 류 씨(柳氏)가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동성 마을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류씨의 입향조는 8세 전서공(典書公) 류종혜(柳從惠)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과 같은 동족 기반은 중흥조 류운룡(柳雲龍)과 류성룡(柳成龍)에 의해 이루어졌다. 류운룡은 14세손이며 류성룡은 지손(支孫)인데, 이 두 계손들을 겸암파(謙菴派)와 서애파(西厓派)로 부르기도 한다. 낙동강의 상류인 화천(花川)이 하회마을을 감싸고 흐르며, 그 둘레에는 넓은 모래밭이 펼쳐져 있다. 이 중 일부가 <피 천석 묘 이야기>에 나오는 섬들이다. 서북쪽에는 울창한 노송림(老松林)인 만송정이 들어서 있다. 강류(江流)의 마을 쪽이 백사장인데 반해, 건너편은 층암절벽으로 부용대 등 여러 정대(亭臺)와 정사(精舍)가 자리 잡고 있어 경승지이다. 과거 강 건너 인근 마을로 통하는 교통수단은 나룻배였으며, 음력 7월 보름에는 부용대 밑에서 선유줄불놀이와 함께 시회(詩會)가 열리기도 했다. 이와 같은 유구한 역사 속에서 전승되어 온 이야기들은 하회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줄거리

풍산 류 씨가 하회마을에 정착하게 된 내력을 형상화한 이야기와, 선(先) 거주민이었던 순흥 안 씨가 피천석을 얻으며 자연스레 마을 주도권을 류 씨들에게 내주게 된다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먼저 풍산 류 씨가 하회마을에 정착할 수 있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만인적선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전서공이 화산을 오르내리면서 3년간 답산을 한 뒤에 연화부수형의 명당임을 알고 지금의 하회에 터를 잡고자 양진당 자리에 집을 지었다. 그런데 집을 지어놓으면 밤새 무너지곤 했다. 세 차례나 그러고 나서 기진맥진하여 잠이 들었는데, 도사가 현몽하여 이르기를 이 터에다가 집을 지으려면 마을로 들어오는 고갯길에서 3년 동안 만인(萬人)에게 적선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마을 입구 큰 고개에다가 원두막을 짓고 길 가는 사람들에게 밥도 주고 신발도 주고 잠도 재워 주며 3년 동안 적선을 하였다. 그런 뒤에 집을 짓자 더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때 집을 이룬 것이 지금 양진당의 사랑채 일부라고 한다. 전서공이 많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길지에 마을을 이루어 발복(發福)한 까닭에서인지 하회에 터 잡은 풍산 류 씨는 점차 가문이 번성했다. 반면에 화산 기슭에 터를 이루었던 허 씨와 안 씨는 상대적으로 문중이 위축되어 하회를 떠나는 사람이 늘게 되었다. 결국 하회마을은 허씨와 안씨의 터전이었던 화산 기슭에서 화천가에 자리 잡은 류 씨들의 터전으로 중심이 이동되었다. 다음으로 <피 천석 묘 이야기>는 풍산 류 씨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세거해 오던 안 씨들 중 한 부부가 주인공이다. 고려시대 때 가난한 안 씨 부부가 들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쓰러져 있는 행각승을 만났다. 안 씨 부부는 이를 가엾이 여겨 집으로 데리고 와서 없는 살림에도 살뜰히 구완을 했다. 부부의 도움으로 깨어난 행각승은 고마움에 대한 답례로서 명당을 하나 잡아주겠다고 하더니 “삼정승이 나는 명당과 당년에 천석을 하는 명당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 하고 말했다. 워낙 궁핍해서 호구지책이 막연했던 부부는 서슴지 않고 “당년에 천석을 할 수 있는 명당을 잡아 달라.”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행각승이 잡아 준 자리로 부부는 선고의 묘를 이장했다. 그해 여름에 장마가 지고 물길이 바뀌더니 묘 아래편 현재의 섬들에 드넓은 들이 생겨났다. 부부가 그 들에 피 종자를 뿌리니 그해에 천석을 수확하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동네 사람들이 그 안 씨의 묘를 “피 천석 묘”라고 부르게 되었다.

분석

하회마을과 관련한 <만인적선 이야기>와 <피 천석 묘 이야기>는 본래 살고 있던 선주민인 허 씨와 안 씨, 풍산 류 씨가 어떻게 흥망성쇠를 이루어 왔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길 끝 마을인 하회에서 풍산 류 씨가 선주민인 허 씨와 안 씨들에게 만인적선을 행함으로써 터를 얻었다는 것과, 안 씨들이 당대에 천석꾼이 될 욕심으로 인해서 후대의 명운을 풍산 류 씨에게 넘겨주게 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향 초기 전서공이 건물을 지으려고 기둥을 세워 놓으면 밤사이 무너져 내려서 만인적선을 통해 덕을 쌓고 나서야 현재의 양진당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별신굿의 성주대는 하회마을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매개체일 뿐만 아니라 불안정한 자연 조건 속에 터 잡고 있는 하회마을 주민들의 기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 풍산 류 씨의 입향사와 허 씨와 안 씨, 류 씨로 이어지는 세거사를 알 수 있다. 전서공이 밀림지대였던 화천가에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과 집을 지으려 했을 때 거듭 무너졌다는 이야기, 하회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는 선주민(先住民)과 이주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회로 들어오는 고갯길에서 적선하는 것은 곧 하회에 터 잡고 사는 선주민 세력들에게 전적으로 봉사한 셈이다. 신참자로서 선주민들에게 오랫동안 봉사를 한 뒤에, 마침내 그들의 동의를 얻어 지금의 터에 마을을 이룩하게 된 것이 오늘의 하회라고 하겠다. <피 천석 묘 이야기>는 ‘섬들’이 생태계에 대한 적극적인 적응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주어진 땅이며, 안 씨들이 하회의 주성씨였던 때부터 ‘섬들’이 하회의 중요한 물적 기반이었음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를 통해 당대의 재물을 탐낸 안 씨들의 쇠락을 당연시하면서 하회 류씨들의 세거를 정당화하는 담론으로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징

하회마을의 이야기는 마을의 유래와 역사뿐만 아니라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반상(班常)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안동 하회마을에는 오랜 민간전승 놀이인 선유줄불놀이와 하회별신굿이 행해지고 있는데, 별신굿에 쓰였던 하회탈 및 병산탈들은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제작 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별신굿 때 쓰이는 탈과 관련한 <허 도령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향언으로 “허 씨 터전에 안 씨 문전에 류 씨 배판”이라고 하여 허 씨와 안 씨가 터를 닦고 마침내 류 씨에 이르러 꽃을 피우게 되었다는 뜻으로 회자되고 있다. 또한 <만인적선 이야기>나 <피 천석 묘 이야기> 등은 모두 풍산 류씨가 세거하게 되어 오늘날과 같은 동성 마을을 이루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경북북부지역의 전통문화(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1988), 민속마을 하회여행(임재해, 밀알, 1994).

참고문헌

경북북부지역의 전통문화(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1988), 민속마을 하회여행(임재해, 밀알, 1994), 안동문화재대관(안동시, 2007).

하회마을

하회마을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설화 > 전설

집필자 조정현(曺鼎鉉)
갱신일 2018-12-27

정의

입향시조의 와 안씨 부부의 , 하회별신굿탈놀이 유래로서 , 겸암과 서애 관련 이야기 등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하회마을에 전승되는 설화.

역사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마을 전체를 동쪽과 남쪽, 서쪽 세 방향으로 감싸 도는 빼어난 터에 자리 잡은 풍산 류 씨(豊山柳氏) 동성 마을이다. 지형은 풍수학적으로 태극형(太極形)·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행주형(行舟形)이라고 한다. 낙동강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S자형을 이루면서 마을을 감싸고 흐른다 하여 하회(河回)라는 이름이 붙었다. 안동 하회마을에는 대체로 허 씨(許氏)와 안 씨(安氏) 등 유력한 씨족이 살아 왔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635년(인조 13)의 기록을 보면, 류 씨(柳氏)가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동성 마을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류씨의 입향조는 8세 전서공(典書公) 류종혜(柳從惠)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과 같은 동족 기반은 중흥조 류운룡(柳雲龍)과 류성룡(柳成龍)에 의해 이루어졌다. 류운룡은 14세손이며 류성룡은 지손(支孫)인데, 이 두 계손들을 겸암파(謙菴派)와 서애파(西厓派)로 부르기도 한다. 낙동강의 상류인 화천(花川)이 하회마을을 감싸고 흐르며, 그 둘레에는 넓은 모래밭이 펼쳐져 있다. 이 중 일부가 에 나오는 섬들이다. 서북쪽에는 울창한 노송림(老松林)인 만송정이 들어서 있다. 강류(江流)의 마을 쪽이 백사장인데 반해, 건너편은 층암절벽으로 부용대 등 여러 정대(亭臺)와 정사(精舍)가 자리 잡고 있어 경승지이다. 과거 강 건너 인근 마을로 통하는 교통수단은 나룻배였으며, 음력 7월 보름에는 부용대 밑에서 선유줄불놀이와 함께 시회(詩會)가 열리기도 했다. 이와 같은 유구한 역사 속에서 전승되어 온 이야기들은 하회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줄거리

풍산 류 씨가 하회마을에 정착하게 된 내력을 형상화한 이야기와, 선(先) 거주민이었던 순흥 안 씨가 피천석을 얻으며 자연스레 마을 주도권을 류 씨들에게 내주게 된다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먼저 풍산 류 씨가 하회마을에 정착할 수 있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는 다음과 같다. 전서공이 화산을 오르내리면서 3년간 답산을 한 뒤에 연화부수형의 명당임을 알고 지금의 하회에 터를 잡고자 양진당 자리에 집을 지었다. 그런데 집을 지어놓으면 밤새 무너지곤 했다. 세 차례나 그러고 나서 기진맥진하여 잠이 들었는데, 도사가 현몽하여 이르기를 이 터에다가 집을 지으려면 마을로 들어오는 고갯길에서 3년 동안 만인(萬人)에게 적선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마을 입구 큰 고개에다가 원두막을 짓고 길 가는 사람들에게 밥도 주고 신발도 주고 잠도 재워 주며 3년 동안 적선을 하였다. 그런 뒤에 집을 짓자 더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때 집을 이룬 것이 지금 양진당의 사랑채 일부라고 한다. 전서공이 많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길지에 마을을 이루어 발복(發福)한 까닭에서인지 하회에 터 잡은 풍산 류 씨는 점차 가문이 번성했다. 반면에 화산 기슭에 터를 이루었던 허 씨와 안 씨는 상대적으로 문중이 위축되어 하회를 떠나는 사람이 늘게 되었다. 결국 하회마을은 허씨와 안씨의 터전이었던 화산 기슭에서 화천가에 자리 잡은 류 씨들의 터전으로 중심이 이동되었다. 다음으로 는 풍산 류 씨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세거해 오던 안 씨들 중 한 부부가 주인공이다. 고려시대 때 가난한 안 씨 부부가 들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쓰러져 있는 행각승을 만났다. 안 씨 부부는 이를 가엾이 여겨 집으로 데리고 와서 없는 살림에도 살뜰히 구완을 했다. 부부의 도움으로 깨어난 행각승은 고마움에 대한 답례로서 명당을 하나 잡아주겠다고 하더니 “삼정승이 나는 명당과 당년에 천석을 하는 명당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 하고 말했다. 워낙 궁핍해서 호구지책이 막연했던 부부는 서슴지 않고 “당년에 천석을 할 수 있는 명당을 잡아 달라.”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행각승이 잡아 준 자리로 부부는 선고의 묘를 이장했다. 그해 여름에 장마가 지고 물길이 바뀌더니 묘 아래편 현재의 섬들에 드넓은 들이 생겨났다. 부부가 그 들에 피 종자를 뿌리니 그해에 천석을 수확하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동네 사람들이 그 안 씨의 묘를 “피 천석 묘”라고 부르게 되었다.

분석

하회마을과 관련한 와 는 본래 살고 있던 선주민인 허 씨와 안 씨, 풍산 류 씨가 어떻게 흥망성쇠를 이루어 왔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길 끝 마을인 하회에서 풍산 류 씨가 선주민인 허 씨와 안 씨들에게 만인적선을 행함으로써 터를 얻었다는 것과, 안 씨들이 당대에 천석꾼이 될 욕심으로 인해서 후대의 명운을 풍산 류 씨에게 넘겨주게 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향 초기 전서공이 건물을 지으려고 기둥을 세워 놓으면 밤사이 무너져 내려서 만인적선을 통해 덕을 쌓고 나서야 현재의 양진당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별신굿의 성주대는 하회마을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매개체일 뿐만 아니라 불안정한 자연 조건 속에 터 잡고 있는 하회마을 주민들의 기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 풍산 류 씨의 입향사와 허 씨와 안 씨, 류 씨로 이어지는 세거사를 알 수 있다. 전서공이 밀림지대였던 화천가에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과 집을 지으려 했을 때 거듭 무너졌다는 이야기, 하회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는 선주민(先住民)과 이주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회로 들어오는 고갯길에서 적선하는 것은 곧 하회에 터 잡고 사는 선주민 세력들에게 전적으로 봉사한 셈이다. 신참자로서 선주민들에게 오랫동안 봉사를 한 뒤에, 마침내 그들의 동의를 얻어 지금의 터에 마을을 이룩하게 된 것이 오늘의 하회라고 하겠다. 는 ‘섬들’이 생태계에 대한 적극적인 적응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주어진 땅이며, 안 씨들이 하회의 주성씨였던 때부터 ‘섬들’이 하회의 중요한 물적 기반이었음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를 통해 당대의 재물을 탐낸 안 씨들의 쇠락을 당연시하면서 하회 류씨들의 세거를 정당화하는 담론으로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징

하회마을의 이야기는 마을의 유래와 역사뿐만 아니라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반상(班常)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안동 하회마을에는 오랜 민간전승 놀이인 선유줄불놀이와 하회별신굿이 행해지고 있는데, 별신굿에 쓰였던 하회탈 및 병산탈들은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제작 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별신굿 때 쓰이는 탈과 관련한 도 전해지고 있다. 향언으로 “허 씨 터전에 안 씨 문전에 류 씨 배판”이라고 하여 허 씨와 안 씨가 터를 닦고 마침내 류 씨에 이르러 꽃을 피우게 되었다는 뜻으로 회자되고 있다. 또한 나 등은 모두 풍산 류씨가 세거하게 되어 오늘날과 같은 동성 마을을 이루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경북북부지역의 전통문화(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1988), 민속마을 하회여행(임재해, 밀알, 1994).

참고문헌

경북북부지역의 전통문화(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1988), 민속마을 하회여행(임재해, 밀알, 1994), 안동문화재대관(안동시,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