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반(婚班)

한자명

婚班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혼례

집필자 천혜숙(千惠淑)

정의

중첩된 혼인관계를 대대로 계승해 온 문중 집단.

역사

혼반은 부계 종법질서가 강화된 16세기 이후 문중의 형성과 더불어 나타난 것으로, 17세기 이후 양반사족층의 혼인문화로 정착하였다. 근대 이후로 신분제가 사라지고 문중조직이 약화되면서, 또한 근대적 혼인제도가 보편화되면서 거의 사라졌으나 양반문화의 전통이 강한 가문이나 지역에서는 혼반이나 길성・피성을 따지는 관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내용

축자적으로 혼반은 ‘서로 혼인을 맺을 만한 지체’ 또는 ‘혼인의 조건에서 반격이 걸맞은 양반 가문’을 뜻하는 말이지만, 사회과학에서는 지체나 반격이 대등한 양반가문 간의 잦은 연줄혼인으로 맺어진 사회적 연대를 의미한다. 통혼관계를 보면 그 가문의 지체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전근대 사회에서 혼인은 한 가문의 가격家格을 말해주는 징표와도 같은 것이었다. 조선조의 양반사족들은 지체가 낮은 성씨나 가문과의 혼인을 낙혼落婚이라고 하여 수치스럽게 여겼다. 또 가문에 따라서는 혼인하기에 좋은 길성吉姓, 혼인을 피해야 하는 피성避姓 또는 악성惡姓이 있었다. 길성・피성의 관습이 언제부터 비롯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조선왕조가 계급내혼제를 강화하고 낙혼과 더불어, 자기보다 높은 신분과 혼인하는 앙혼仰婚, 역적 가문과의 혼인 등을 법으로 금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체는 통념상 혈통·문명文名·관작官爵·경제력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지체가 대등한 문중 사이의 혼인은 인척으로 맺어진 두 문중의 사회적 결합을 가능하게 하고, 나아가 사회적으로 문중의 세력을 강화하는 기반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조선조의 양반들은 특정 가문과 혼인하여 자손이 번성하고 가운이 융성해지면 길성吉姓 또는 길반吉班이라고 하여, 그 가문과 혼인관계를 지속했다 . 이러한 혼인관계를 ‘길혼吉婚’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척관계에 있는 사람이 중매하여 혼인을 성사시키는 연줄혼인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연줄혼인에는 두 문중이 당대 통혼관계를 중첩하거나, 두 문중이 세대 간 인척관계를 계속하거나, 세 문중이 서로 중첩적인 인척관계를 맺어 온 것 등의 세 가지 유형이 나타난다. 사족층 가운데는 가문 간 연줄관계를 지속해 오다가도 그 가문의 여자가 시집온 후로 가운家運이 위축되고 안 좋은 일이 생기거나 하면 연줄을 다른 곳으로 바꾸기도 했다 . 부계친족 문중의 잦은 연줄혼인의 계승이 곧 혼반을 형성하는 바탕이다. 적어도 부계 파조派祖 이후 특정 성씨와 4촌 이내에서 1회 이상의 연줄혼인이 적어도 3~4대 이상은 지속되어야 혼반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누이바꿈’혼과 같은 거의 근친에 가까운 연줄혼인의 지속은 같은 문중끼리의 사돈관계가 겹치는 연비연사聯臂連査 관계를 누적시킴으로써, “따지고 보면 남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친족관계가 서로 중복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양반사족층이 연줄혼인을 선호하게 된 것은 부계 종법을 중심으로 한 향촌사회의 질서 재편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조선 사회는 여전히 처가 중심의 남귀여가혼이 지배적이어서 사위와 외가가 한 촌락에 거주하는 경우가 흔하였고, 자녀균분상속제로 인해 사위가 부모의 터전을 이어받거나 외손이 제사를 받드는 일이 다반사였다. 따라서 당시는 반촌이라고 하더라도 사위와 외손을 포함한 여러 성씨가 함께 거주하는 이성잡거촌異姓雜居村의 면모를 띤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부계 종법질서가 강화되는 17세기에 이르러서 부계의 대표 조상을 파조派祖로 내세운 문중이 형성되면서 비로소 특정 문중이 동성촌락을 지배하여 세거하는 형태가 나타난다. 이때 부계 조상인 파조는 사회적으로 현달한 존재로서, 높은 관작을 지냈거나 학문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연히 경제적인 부도 따랐으며, 이러한 여러 조건들이 해당 문중의 사회적 위세가 되어 누대로 이어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점차 향촌사회의 지배 성씨가 된 문중들은 자기들끼리 혼반으로 결집함으로써 그 위세를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문중 간 통혼을 매개로 한 혼반의 형성은 그들의 사회적 결속을 위한 일종의 문화적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안동지역에서는 진성 이씨眞成李氏·의성 김씨義城金氏·광산 김씨光山金氏·풍산 류씨豐山柳氏·안동 김씨安東金氏 등이 오랫동안 혼반관계를 유지하였다. 또 경남지역의 하동 정씨河東鄭氏·광산 김씨光山金氏·은진 송씨恩津宋氏·연안 이씨延安李氏 등도 상호 지속적인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사회・경제적인 결속을 도모한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조 향촌사회 사족층의 동향이나 조선조의 혼인 연구에서 혼반은 양반층의 신분 내혼과 통혼권 형성과정에서 나타난 중요한 혼인문화의 하나로 주목되었다. 특히 안동 사림의 혼반관계를 일종의 사회적 연대(alliance)로 주목한 조강희의 연구 이래로, 혼반의 정치・사회적 기능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지역사례

부계 불천위 종가가 많기로 유명한 안동은 혼반을 통한 정치・사회적 결속이 특히 번성했던 지역이다. 경상북도 안동 지역 동성촌락의 지배 사족이 내세운 부계 파조들 대부분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인 점도 주목된다. 퇴계학의 적통임을 드러내는 것은 이 지역에서 가문의 위상을 강화하고 반격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남인에 속한 안동의 양반사족층은 1694년의 갑술옥사甲戌獄事 이후로 중앙 정계로의 진출이 어려워지면서 퇴계학을 중심으로 한 향교나 서원 활동을 통해 일종의 정치・사회적 결속을 도모하였다. 안동 사림이 이황의 제자를 주축으로 결집한것과 동성촌락을 토대로 부계 가문의 결속을 강화한 것은 그러한 추세를 말해주는 것이다. 문중 간의 통혼을 매개로 한 혼반의 형성도 그러한 정치・사회적 결속의 일환이었다. 중앙 정치권에서 소외되면서 통혼의 범위가 좁아진 상황에서 퇴계학맥을 중심으로 한 혼반의 형성을 통해 가문 간의 결속을 다졌던 것이다. 따라서 안동의 혼반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상대 성씨의 파조가 퇴계학맥에 속하는가의 여부이다. 이는 안동의 혼반에서 생물학적 혈통 못지않게 학연이 중요하게 작용하였음을 말해 주는 사실이다.

안동에서 일찍이 재지在地 기반을 확보한 학봉鶴峯과서애西厓의 두 가문 가운데, 퇴계 가문과의 유대는 학봉가문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였다. 학봉 김성일金誠一을 파조로 한 학봉계의 혼반을 살펴보면, 안동 임하면 천전리에서 생장한 학봉은 처가가 있는 금계에 정착하면서 재지기반을 확보하였는데, 그의 손자 김시구金是九가 이황의증손녀를 배우자로 맞이하고 그의 조카 김용金涌이 이황의 손서孫壻가 되면서 진성 이씨와 혼반을 형성한 것을 볼 수 있다. 서애 류성룡柳成龍을 파조로 한 서애 문중에서는 16세기 중반 진성 이씨를 비롯하여 퇴계학파에 속했던 예안 이씨, 인동 장씨, 의성 김씨, 경주 이씨와 집중적으로 혼인관계를 지속하였다. 서애 류성룡의 손자 류원지가 김성일의 손자인 김시구의 딸과 혼인하고, 겸암 류운룡의 아들과 김극일의 딸이 혼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서애 문중과 학봉 문중 간의 혼인 비율이 높았던 것이 주목된다. 당시 정치적 대응 방식에서 일정한 시각차를 드러낸 두 가문이지만 서원의 추향 문제로양 계열이 대립한 19세기의 병호시비屛虎是非가 있기 전까지는 서로 혼반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이렇게 때로 대립적이고 때로 상호 보완관계에 있던 이 지역 사족들은 여성을 매개로 문중 간의 결합을 이루면서 대내외적으로 결집된 힘을 유지해 왔다. 곧 가문 간의 혼반 형성은 안동 사림 내부의 대립과 조화의 역학관계를 반영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그들의 결속을 보장하는 일종의 제어장치로서 안동 사림의 정치적 세력을 결집하는 기능을 하였던 셈이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양반 혼인 700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지척에 있는 가문들이 혼반관계를 맺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이는 명문의 동성집단이 밀집해 있는 안동이라는 지연이 작용한 것이다.

특징 및 의의

혼반의 기초가 되는 연줄혼인은 교환혼의 일종인 ‘누이바꿈’혼과 비슷한 형태이나 형성 배경은 전혀 무관하다. 누이바꿈혼은 두 집안이 친밀한 관계이거나 혼사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인척관계를 맺는 것인 데 비해, 연줄혼인은 지체가 비슷한 둘 또는 세 가문이 반격을 유지하거나 사회적 결속을 위한 필요에서 여자를 교환하는 것이다. 혼반은 혈통·학연·가풍 등을 혼인의 중요한 조건으로 고려한다는 점에서, 가문 간의 단순한 인연이나 경제적 필요 때문에 이루어지는 ‘혼맥’과도 다르다. 조선조의 혼반은 생물학적으로 맺어진 혼인 집단이 정치적・사회적 결합의 의미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특정 가문의 혼반을 통해 그 가문의 사회적 위세, 정치적 권력, 그리고 경제적 부의 정도까지 짐작할 수 있다. 안동의 혼반에서는 퇴계학맥과 가풍 여부가 중요하게 고려된 점이 특징적이다. 혼반은 혼인을 지나치게 가족과 친족 또는 출계出系 중심으로 이해하던 시각에서 벗어나 혼인의 연대(alliance)가 지닌 정치・사회사적 의의를 읽을 수 있는 혼인문화로 주목될 만하다.

참고문헌

16~19세기 풍산류씨 하회파의 혼반(김명자, 국학연구12, 안동국학진흥원, 2008), 안동사림의 정치적 분화와 혼반 형성(설석규, 안동학연구1,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2002), 영남지방 양반가문의 혼인에 관한 연구(조강희,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영남지방의 혼반 연구(조강희, 민족문화논총6,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4), 조선후기 향촌사회의 족적 결합-경상도 단성현의 실태 분석(한기범, 호서사학19・20, 호서사학회, 1992).

혼반

혼반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혼례

집필자 천혜숙(千惠淑)

정의

중첩된 혼인관계를 대대로 계승해 온 문중 집단.

역사

혼반은 부계 종법질서가 강화된 16세기 이후 문중의 형성과 더불어 나타난 것으로, 17세기 이후 양반사족층의 혼인문화로 정착하였다. 근대 이후로 신분제가 사라지고 문중조직이 약화되면서, 또한 근대적 혼인제도가 보편화되면서 거의 사라졌으나 양반문화의 전통이 강한 가문이나 지역에서는 혼반이나 길성・피성을 따지는 관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내용

축자적으로 혼반은 ‘서로 혼인을 맺을 만한 지체’ 또는 ‘혼인의 조건에서 반격이 걸맞은 양반 가문’을 뜻하는 말이지만, 사회과학에서는 지체나 반격이 대등한 양반가문 간의 잦은 연줄혼인으로 맺어진 사회적 연대를 의미한다. 통혼관계를 보면 그 가문의 지체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전근대 사회에서 혼인은 한 가문의 가격家格을 말해주는 징표와도 같은 것이었다. 조선조의 양반사족들은 지체가 낮은 성씨나 가문과의 혼인을 낙혼落婚이라고 하여 수치스럽게 여겼다. 또 가문에 따라서는 혼인하기에 좋은 길성吉姓, 혼인을 피해야 하는 피성避姓 또는 악성惡姓이 있었다. 길성・피성의 관습이 언제부터 비롯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조선왕조가 계급내혼제를 강화하고 낙혼과 더불어, 자기보다 높은 신분과 혼인하는 앙혼仰婚, 역적 가문과의 혼인 등을 법으로 금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체는 통념상 혈통·문명文名·관작官爵·경제력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지체가 대등한 문중 사이의 혼인은 인척으로 맺어진 두 문중의 사회적 결합을 가능하게 하고, 나아가 사회적으로 문중의 세력을 강화하는 기반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조선조의 양반들은 특정 가문과 혼인하여 자손이 번성하고 가운이 융성해지면 길성吉姓 또는 길반吉班이라고 하여, 그 가문과 혼인관계를 지속했다 . 이러한 혼인관계를 ‘길혼吉婚’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척관계에 있는 사람이 중매하여 혼인을 성사시키는 연줄혼인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연줄혼인에는 두 문중이 당대 통혼관계를 중첩하거나, 두 문중이 세대 간 인척관계를 계속하거나, 세 문중이 서로 중첩적인 인척관계를 맺어 온 것 등의 세 가지 유형이 나타난다. 사족층 가운데는 가문 간 연줄관계를 지속해 오다가도 그 가문의 여자가 시집온 후로 가운家運이 위축되고 안 좋은 일이 생기거나 하면 연줄을 다른 곳으로 바꾸기도 했다 . 부계친족 문중의 잦은 연줄혼인의 계승이 곧 혼반을 형성하는 바탕이다. 적어도 부계 파조派祖 이후 특정 성씨와 4촌 이내에서 1회 이상의 연줄혼인이 적어도 3~4대 이상은 지속되어야 혼반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누이바꿈’혼과 같은 거의 근친에 가까운 연줄혼인의 지속은 같은 문중끼리의 사돈관계가 겹치는 연비연사聯臂連査 관계를 누적시킴으로써, “따지고 보면 남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친족관계가 서로 중복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양반사족층이 연줄혼인을 선호하게 된 것은 부계 종법을 중심으로 한 향촌사회의 질서 재편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조선 사회는 여전히 처가 중심의 남귀여가혼이 지배적이어서 사위와 외가가 한 촌락에 거주하는 경우가 흔하였고, 자녀균분상속제로 인해 사위가 부모의 터전을 이어받거나 외손이 제사를 받드는 일이 다반사였다. 따라서 당시는 반촌이라고 하더라도 사위와 외손을 포함한 여러 성씨가 함께 거주하는 이성잡거촌異姓雜居村의 면모를 띤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부계 종법질서가 강화되는 17세기에 이르러서 부계의 대표 조상을 파조派祖로 내세운 문중이 형성되면서 비로소 특정 문중이 동성촌락을 지배하여 세거하는 형태가 나타난다. 이때 부계 조상인 파조는 사회적으로 현달한 존재로서, 높은 관작을 지냈거나 학문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연히 경제적인 부도 따랐으며, 이러한 여러 조건들이 해당 문중의 사회적 위세가 되어 누대로 이어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점차 향촌사회의 지배 성씨가 된 문중들은 자기들끼리 혼반으로 결집함으로써 그 위세를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문중 간 통혼을 매개로 한 혼반의 형성은 그들의 사회적 결속을 위한 일종의 문화적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안동지역에서는 진성 이씨眞成李氏·의성 김씨義城金氏·광산 김씨光山金氏·풍산 류씨豐山柳氏·안동 김씨安東金氏 등이 오랫동안 혼반관계를 유지하였다. 또 경남지역의 하동 정씨河東鄭氏·광산 김씨光山金氏·은진 송씨恩津宋氏·연안 이씨延安李氏 등도 상호 지속적인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사회・경제적인 결속을 도모한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조 향촌사회 사족층의 동향이나 조선조의 혼인 연구에서 혼반은 양반층의 신분 내혼과 통혼권 형성과정에서 나타난 중요한 혼인문화의 하나로 주목되었다. 특히 안동 사림의 혼반관계를 일종의 사회적 연대(alliance)로 주목한 조강희의 연구 이래로, 혼반의 정치・사회적 기능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지역사례

부계 불천위 종가가 많기로 유명한 안동은 혼반을 통한 정치・사회적 결속이 특히 번성했던 지역이다. 경상북도 안동 지역 동성촌락의 지배 사족이 내세운 부계 파조들 대부분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인 점도 주목된다. 퇴계학의 적통임을 드러내는 것은 이 지역에서 가문의 위상을 강화하고 반격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남인에 속한 안동의 양반사족층은 1694년의 갑술옥사甲戌獄事 이후로 중앙 정계로의 진출이 어려워지면서 퇴계학을 중심으로 한 향교나 서원 활동을 통해 일종의 정치・사회적 결속을 도모하였다. 안동 사림이 이황의 제자를 주축으로 결집한것과 동성촌락을 토대로 부계 가문의 결속을 강화한 것은 그러한 추세를 말해주는 것이다. 문중 간의 통혼을 매개로 한 혼반의 형성도 그러한 정치・사회적 결속의 일환이었다. 중앙 정치권에서 소외되면서 통혼의 범위가 좁아진 상황에서 퇴계학맥을 중심으로 한 혼반의 형성을 통해 가문 간의 결속을 다졌던 것이다. 따라서 안동의 혼반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상대 성씨의 파조가 퇴계학맥에 속하는가의 여부이다. 이는 안동의 혼반에서 생물학적 혈통 못지않게 학연이 중요하게 작용하였음을 말해 주는 사실이다. 안동에서 일찍이 재지在地 기반을 확보한 학봉鶴峯과서애西厓의 두 가문 가운데, 퇴계 가문과의 유대는 학봉가문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였다. 학봉 김성일金誠一을 파조로 한 학봉계의 혼반을 살펴보면, 안동 임하면 천전리에서 생장한 학봉은 처가가 있는 금계에 정착하면서 재지기반을 확보하였는데, 그의 손자 김시구金是九가 이황의증손녀를 배우자로 맞이하고 그의 조카 김용金涌이 이황의 손서孫壻가 되면서 진성 이씨와 혼반을 형성한 것을 볼 수 있다. 서애 류성룡柳成龍을 파조로 한 서애 문중에서는 16세기 중반 진성 이씨를 비롯하여 퇴계학파에 속했던 예안 이씨, 인동 장씨, 의성 김씨, 경주 이씨와 집중적으로 혼인관계를 지속하였다. 서애 류성룡의 손자 류원지가 김성일의 손자인 김시구의 딸과 혼인하고, 겸암 류운룡의 아들과 김극일의 딸이 혼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서애 문중과 학봉 문중 간의 혼인 비율이 높았던 것이 주목된다. 당시 정치적 대응 방식에서 일정한 시각차를 드러낸 두 가문이지만 서원의 추향 문제로양 계열이 대립한 19세기의 병호시비屛虎是非가 있기 전까지는 서로 혼반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이렇게 때로 대립적이고 때로 상호 보완관계에 있던 이 지역 사족들은 여성을 매개로 문중 간의 결합을 이루면서 대내외적으로 결집된 힘을 유지해 왔다. 곧 가문 간의 혼반 형성은 안동 사림 내부의 대립과 조화의 역학관계를 반영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그들의 결속을 보장하는 일종의 제어장치로서 안동 사림의 정치적 세력을 결집하는 기능을 하였던 셈이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양반 혼인 700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지척에 있는 가문들이 혼반관계를 맺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이는 명문의 동성집단이 밀집해 있는 안동이라는 지연이 작용한 것이다.

특징 및 의의

혼반의 기초가 되는 연줄혼인은 교환혼의 일종인 ‘누이바꿈’혼과 비슷한 형태이나 형성 배경은 전혀 무관하다. 누이바꿈혼은 두 집안이 친밀한 관계이거나 혼사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인척관계를 맺는 것인 데 비해, 연줄혼인은 지체가 비슷한 둘 또는 세 가문이 반격을 유지하거나 사회적 결속을 위한 필요에서 여자를 교환하는 것이다. 혼반은 혈통·학연·가풍 등을 혼인의 중요한 조건으로 고려한다는 점에서, 가문 간의 단순한 인연이나 경제적 필요 때문에 이루어지는 ‘혼맥’과도 다르다. 조선조의 혼반은 생물학적으로 맺어진 혼인 집단이 정치적・사회적 결합의 의미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특정 가문의 혼반을 통해 그 가문의 사회적 위세, 정치적 권력, 그리고 경제적 부의 정도까지 짐작할 수 있다. 안동의 혼반에서는 퇴계학맥과 가풍 여부가 중요하게 고려된 점이 특징적이다. 혼반은 혼인을 지나치게 가족과 친족 또는 출계出系 중심으로 이해하던 시각에서 벗어나 혼인의 연대(alliance)가 지닌 정치・사회사적 의의를 읽을 수 있는 혼인문화로 주목될 만하다.

참고문헌

16~19세기 풍산류씨 하회파의 혼반(김명자, 국학연구12, 안동국학진흥원, 2008), 안동사림의 정치적 분화와 혼반 형성(설석규, 안동학연구1,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2002), 영남지방 양반가문의 혼인에 관한 연구(조강희,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영남지방의 혼반 연구(조강희, 민족문화논총6,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4), 조선후기 향촌사회의 족적 결합-경상도 단성현의 실태 분석(한기범, 호서사학19・20, 호서사학회,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