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제

한자명

塔祭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의례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1-08

정의

정월 초사흘이나 대보름을 전후한 시기에 돌탑을 신앙대상물로 하여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의 한 종류. 지역에 따라서는 탑신제(塔神祭)·조탑제(造塔祭)·거리제·당산제·수살제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탑은 장승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앙대상물로 손꼽히지만 그동안 서낭당과 동일시되거나 혼효(混淆)되어 그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탑과 서낭당은 확연하게 구분될 뿐 아니라, 탑제는 정월 대보름 동제의 커다란 줄기를 형성하면서 뚜렷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개관

마을에서 전승되는 탑은 종교적인 목적에 의해 잡석으로 쌓은 원뿔대 모양의 신체(神體)를 의미한다. 그 어원은 불탑을 일컫는 탑파(塔婆, thupa)의 준말인 ‘탑’에서 유래된 호칭이다. 아마도 돌을 쌓은 형태와 마을에서의 상징성이 사찰의 불탑과 유사한 면이 있기 때문에 민간에서 그 명칭을 차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탑제’란 탑과 제(祭)의 합성어로 돌탑에 대한 제례의식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지방에 따라서 탑은 조산(造山)·조탑(造塔)·수살·도탐·방사탑(防邪塔)·수구(水口)막이·수구매기 등 다양한 이름으로 호칭된다. 가령 조산은 영남지방, 조탑은 호남, 수살은 충북, 도탐은 전북 무주에서 주로 불리는데, 이러한 탑의 이칭은 마을의 정주공간에서 비보(裨補)·진호(鎭護) 및 방액(防厄)의 기능을 띠고 건립되는 것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또한 탑은 1기만 서 있는 경우도 있지만 짝으로 건립되는 예가 적지 않으며, 마을에 따라서는 3~7기까지 세우기도 한다. 그런데 짝으로 탑을 건립한 경우에는 으레 성(性)이 구분되어 있어 할아버지탑·할머니탑, 남자탑·여자탑, 안탑·바깥탑, 내외탑 등으로 부르는 것이 통례이다.

탑신앙은 충남 금산과 대전을 비롯하여 충북 옥천·보은·청원·영동, 전북 무주·진안·장수·남원·순창, 경북 상주 등 내륙 산간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제주도 및 강원·전남 등에서도 골고루 보이고 있다. 반면에 금강 이북과 경기지방에서는 탑이 매우 희소한 것으로 나타난다.

기원

탑은 민속신앙의 원류로 인식될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매우 미미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24 「백제본기(百濟本紀)」 근구수왕조(近仇首王條)에는, “고구려 국강왕(國岡王) 사유(斯由)가 친히 침입하자 근초고왕이 태자를 보내어 도망가는 적을 추격해서 크게 무찌르고 적석위표(積石爲表), 곧 돌을 쌓아 표식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사는 탑의 고형으로 추정되는 누석단(累石壇)의 유래가 고대사회에서 돌을 쌓아 부족간의 경계로 삼고 이를 경계신의 처소로 여긴 데서 발생했다는 설의 근거가 되었다. 이 밖에 암석숭배 및 천신숭배의 상징물로서 하늘과 인간의 교섭을 위해 돌무더기가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으나 단순한 추론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탑과 상당한 친영성이 있는 적석신앙은 몽골의 오보(Oboga)를 비롯하여 티베트, 일본 등에서도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기원전 2,000년경 사막에 살고 있던 셈족은 돌무더기와 선돌에 대한 신앙을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스에서도 돌무더기는 널리 신앙되었다. 그리하여 길을 가던 농부가 돌무더기 곁을 지나칠 때는 그 위에다 돌을 더 얹어놓고 가는 것이 관례였다. 만약 돌무더기 꼭대기에 커다란 돌이 세워져 있으면 제물로 음식을 조금 갖다 놓는데, 농부는 돌무더기 속에 그리고 꼭대기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돌 속에 어떤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돌무더기에 대한 신앙은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기원은 선돌과 더불어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 통설이다. 따라서 탑의 유래와 기원을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선사시대 적석신앙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오랜 세월 불교·무속신앙·풍수 등과 습합되는 과정에서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안동의 옛 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는 성내조산(城內造山)·견항조산(犬項造山) 등 11개소에 무려 22기의 조산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특히 견항조산에는 입춘일에 헌관(獻官)을 정하여 제사하고 오곡을 그릇에 담아 이 그릇을 산 위에 놓고 농사점을 쳤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보아 조선시대에도 탑을 건립하고 제를 지내는 관행이 매우 성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마을제당의 구조를 상당(上堂)과 하당(下堂)의 이중구조로 파악할 때 탑은 전형적인 하당을 구성하는 신앙대상물로 간주된다. 물론 산제당이나 윗당산에 간혹 탑이 위치하는 사례도 있으나 그것은 퍽 드물고, 대개 마을 어귀와 풍수상의 허결(虛決)한 지점에 건립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현재 마을에서 전승되는 탑은 장승·선돌·솟대 등과 함께 산신에 대응하는 하위신(下位神)의 개념으로 치성을 받고 있으며, 그에 대한 의례 역시 거리제와 흡사한 하당의례(下堂儀禮)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러한 탑제의 이중구조는 충청지방에 분포하는 탑에서 뚜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탑신앙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는 충남 금산에서는 산신제와 탑제가 복합된 사례를 흔히 목격할 수 있으며, 산제당 없이 탑만 존재하는 경우에도 거의 예외 없이 음력 정월 초삼일 전후에 탑제가 치러진다. 반면에 남부지방으로 내려갈수록 탑제는 크게 약화되거나 주신(主神)으로 치성을 받지 못한 채 단지 당산제의 일부로 포함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를테면 당산제 후에 ‘헌식밥’ 혹은 ‘지신밥’이라 해서 조탑 앞에 음식을 묻거나 간단하게 음식을 차려놓고 술을 올리는 것이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방사탑과 같이 애당초 풍수적인 목적을 띠고 건립된 탑 중에는 아무런 의식이 베풀어지지 않는 사례도 종종 있다.

여느 동제와 마찬가지로 탑제는 새해를 맞이하여 농사의 풍년과 수복강령을 기원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신격은 매우 다양한데, 일반적으로 축문에는 영탑지신(靈塔之神)·탑신지신(塔神之神)·동탑지신(洞塔之神)·이사지신(里社之神)·수호지신(守護之神)·거리산신·길산지신 등으로 표현된다. 또한 일부 마을에서는 오방신앙의 요소를 엿볼 수 있는 오방지신(五方之神)·오방신장(五方神將)·오방토지지신(五方土地之神) 등도 찾아지고 있다.

탑제의 전개과정은 마을에 따라 다소 상이하다. 하지만 대개의 하당의례가 그러하듯 연행 현장에는 풍물이 수반되고,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나 참석하여 함께 소지를 올리며 무병제액을 기원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제를 마친 뒤에는 탑돌이와 같은 불교식 의례 및 가가호호에 대한 지신밟기 등이 부가되기도 한다. 가령 정월 대보름에 탑제를 지내는 충남 금산과 부여, 충북 청원 등에서는 제의를 마치면 풍물패를 앞세우고 탑돌이를 한 연후에 밤이 늦도록 지신밟기를 하며 축원을 해준다.

이에 비해 정월 초삼일 이전에 탑제를 모시는 경우 대체로 엄숙한 정숙형(靜肅形) 제의로 치른다. 그 까닭은 정초에는 쇳소리를 내지 않고 언행을 삼가는 관행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간혹 무당이나 승려가 탑제를 주관하는 사례도 발견되며, 전북 진안, 장수에서는 당산제와 별도로 부녀자들이 따로 길일을 택하여 당산과 조탑에 팥죽을 바치는 팥죽제를 지내기도 한다. 이는 고샅(골목)과 조탑 주변에 팥죽을 뿌려서 마을에 깃든 잡귀와 역질을 몰아내는 독특한 형식의 제의이다.

의의

우리나라에서 전승되는 탑은 풍수의 비보 관념에 기초하여 불교 및 무속신앙, 음양오행사상의 요소가 두루 내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엇보다도 마을이라는 정주공간에서 지세의 결점을 보충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적극 투영된 산물이 바로 탑이라 할 수 있다. 탑제는 그 기원이 매우 심원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신앙의 요소가 응축되어 있어 민속문화의 근간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永嘉誌
朝鮮의 累石壇과 蒙古의 鄂博에 취하여 (孫晉泰, 朝鮮民族文化의 硏究, 乙酉文化社, 1948)
세계종교사 (Noss,John B 저·윤이흠 역, 현음사, 1986)
북방민족의 샤마니즘과 제사습속 (국립민속박물관, 1998)
금산의 탑신앙 (강성복, 금산문화원, 1999)
청원 옥화리 산사계의 성격과 산신제·탑제 (강성복, 민속학연구11, 국립민속박물관, 2002)

탑제

탑제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의례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1-08

정의

정월 초사흘이나 대보름을 전후한 시기에 돌탑을 신앙대상물로 하여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의 한 종류. 지역에 따라서는 탑신제(塔神祭)·조탑제(造塔祭)·거리제·당산제·수살제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탑은 장승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앙대상물로 손꼽히지만 그동안 서낭당과 동일시되거나 혼효(混淆)되어 그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탑과 서낭당은 확연하게 구분될 뿐 아니라, 탑제는 정월 대보름 동제의 커다란 줄기를 형성하면서 뚜렷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개관

마을에서 전승되는 탑은 종교적인 목적에 의해 잡석으로 쌓은 원뿔대 모양의 신체(神體)를 의미한다. 그 어원은 불탑을 일컫는 탑파(塔婆, thupa)의 준말인 ‘탑’에서 유래된 호칭이다. 아마도 돌을 쌓은 형태와 마을에서의 상징성이 사찰의 불탑과 유사한 면이 있기 때문에 민간에서 그 명칭을 차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탑제’란 탑과 제(祭)의 합성어로 돌탑에 대한 제례의식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지방에 따라서 탑은 조산(造山)·조탑(造塔)·수살·도탐·방사탑(防邪塔)·수구(水口)막이·수구매기 등 다양한 이름으로 호칭된다. 가령 조산은 영남지방, 조탑은 호남, 수살은 충북, 도탐은 전북 무주에서 주로 불리는데, 이러한 탑의 이칭은 마을의 정주공간에서 비보(裨補)·진호(鎭護) 및 방액(防厄)의 기능을 띠고 건립되는 것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또한 탑은 1기만 서 있는 경우도 있지만 짝으로 건립되는 예가 적지 않으며, 마을에 따라서는 3~7기까지 세우기도 한다. 그런데 짝으로 탑을 건립한 경우에는 으레 성(性)이 구분되어 있어 할아버지탑·할머니탑, 남자탑·여자탑, 안탑·바깥탑, 내외탑 등으로 부르는 것이 통례이다. 탑신앙은 충남 금산과 대전을 비롯하여 충북 옥천·보은·청원·영동, 전북 무주·진안·장수·남원·순창, 경북 상주 등 내륙 산간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제주도 및 강원·전남 등에서도 골고루 보이고 있다. 반면에 금강 이북과 경기지방에서는 탑이 매우 희소한 것으로 나타난다.

기원

탑은 민속신앙의 원류로 인식될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매우 미미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24 「백제본기(百濟本紀)」 근구수왕조(近仇首王條)에는, “고구려 국강왕(國岡王) 사유(斯由)가 친히 침입하자 근초고왕이 태자를 보내어 도망가는 적을 추격해서 크게 무찌르고 적석위표(積石爲表), 곧 돌을 쌓아 표식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사는 탑의 고형으로 추정되는 누석단(累石壇)의 유래가 고대사회에서 돌을 쌓아 부족간의 경계로 삼고 이를 경계신의 처소로 여긴 데서 발생했다는 설의 근거가 되었다. 이 밖에 암석숭배 및 천신숭배의 상징물로서 하늘과 인간의 교섭을 위해 돌무더기가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으나 단순한 추론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탑과 상당한 친영성이 있는 적석신앙은 몽골의 오보(Oboga)를 비롯하여 티베트, 일본 등에서도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기원전 2,000년경 사막에 살고 있던 셈족은 돌무더기와 선돌에 대한 신앙을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스에서도 돌무더기는 널리 신앙되었다. 그리하여 길을 가던 농부가 돌무더기 곁을 지나칠 때는 그 위에다 돌을 더 얹어놓고 가는 것이 관례였다. 만약 돌무더기 꼭대기에 커다란 돌이 세워져 있으면 제물로 음식을 조금 갖다 놓는데, 농부는 돌무더기 속에 그리고 꼭대기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돌 속에 어떤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돌무더기에 대한 신앙은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기원은 선돌과 더불어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 통설이다. 따라서 탑의 유래와 기원을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선사시대 적석신앙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오랜 세월 불교·무속신앙·풍수 등과 습합되는 과정에서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안동의 옛 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는 성내조산(城內造山)·견항조산(犬項造山) 등 11개소에 무려 22기의 조산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특히 견항조산에는 입춘일에 헌관(獻官)을 정하여 제사하고 오곡을 그릇에 담아 이 그릇을 산 위에 놓고 농사점을 쳤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보아 조선시대에도 탑을 건립하고 제를 지내는 관행이 매우 성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마을제당의 구조를 상당(上堂)과 하당(下堂)의 이중구조로 파악할 때 탑은 전형적인 하당을 구성하는 신앙대상물로 간주된다. 물론 산제당이나 윗당산에 간혹 탑이 위치하는 사례도 있으나 그것은 퍽 드물고, 대개 마을 어귀와 풍수상의 허결(虛決)한 지점에 건립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현재 마을에서 전승되는 탑은 장승·선돌·솟대 등과 함께 산신에 대응하는 하위신(下位神)의 개념으로 치성을 받고 있으며, 그에 대한 의례 역시 거리제와 흡사한 하당의례(下堂儀禮)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러한 탑제의 이중구조는 충청지방에 분포하는 탑에서 뚜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탑신앙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는 충남 금산에서는 산신제와 탑제가 복합된 사례를 흔히 목격할 수 있으며, 산제당 없이 탑만 존재하는 경우에도 거의 예외 없이 음력 정월 초삼일 전후에 탑제가 치러진다. 반면에 남부지방으로 내려갈수록 탑제는 크게 약화되거나 주신(主神)으로 치성을 받지 못한 채 단지 당산제의 일부로 포함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를테면 당산제 후에 ‘헌식밥’ 혹은 ‘지신밥’이라 해서 조탑 앞에 음식을 묻거나 간단하게 음식을 차려놓고 술을 올리는 것이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방사탑과 같이 애당초 풍수적인 목적을 띠고 건립된 탑 중에는 아무런 의식이 베풀어지지 않는 사례도 종종 있다. 여느 동제와 마찬가지로 탑제는 새해를 맞이하여 농사의 풍년과 수복강령을 기원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신격은 매우 다양한데, 일반적으로 축문에는 영탑지신(靈塔之神)·탑신지신(塔神之神)·동탑지신(洞塔之神)·이사지신(里社之神)·수호지신(守護之神)·거리산신·길산지신 등으로 표현된다. 또한 일부 마을에서는 오방신앙의 요소를 엿볼 수 있는 오방지신(五方之神)·오방신장(五方神將)·오방토지지신(五方土地之神) 등도 찾아지고 있다. 탑제의 전개과정은 마을에 따라 다소 상이하다. 하지만 대개의 하당의례가 그러하듯 연행 현장에는 풍물이 수반되고,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나 참석하여 함께 소지를 올리며 무병제액을 기원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제를 마친 뒤에는 탑돌이와 같은 불교식 의례 및 가가호호에 대한 지신밟기 등이 부가되기도 한다. 가령 정월 대보름에 탑제를 지내는 충남 금산과 부여, 충북 청원 등에서는 제의를 마치면 풍물패를 앞세우고 탑돌이를 한 연후에 밤이 늦도록 지신밟기를 하며 축원을 해준다. 이에 비해 정월 초삼일 이전에 탑제를 모시는 경우 대체로 엄숙한 정숙형(靜肅形) 제의로 치른다. 그 까닭은 정초에는 쇳소리를 내지 않고 언행을 삼가는 관행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간혹 무당이나 승려가 탑제를 주관하는 사례도 발견되며, 전북 진안, 장수에서는 당산제와 별도로 부녀자들이 따로 길일을 택하여 당산과 조탑에 팥죽을 바치는 팥죽제를 지내기도 한다. 이는 고샅(골목)과 조탑 주변에 팥죽을 뿌려서 마을에 깃든 잡귀와 역질을 몰아내는 독특한 형식의 제의이다.

의의

우리나라에서 전승되는 탑은 풍수의 비보 관념에 기초하여 불교 및 무속신앙, 음양오행사상의 요소가 두루 내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엇보다도 마을이라는 정주공간에서 지세의 결점을 보충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적극 투영된 산물이 바로 탑이라 할 수 있다. 탑제는 그 기원이 매우 심원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신앙의 요소가 응축되어 있어 민속문화의 근간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永嘉誌朝鮮의 累石壇과 蒙古의 鄂博에 취하여 (孫晉泰, 朝鮮民族文化의 硏究, 乙酉文化社, 1948)세계종교사 (Noss,John B 저·윤이흠 역, 현음사, 1986)북방민족의 샤마니즘과 제사습속 (국립민속박물관, 1998)금산의 탑신앙 (강성복, 금산문화원, 1999)청원 옥화리 산사계의 성격과 산신제·탑제 (강성복, 민속학연구11, 국립민속박물관,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