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계문묘석전

한자명

春季文廟釋奠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봄(春) > 2월 > 의례

집필자 최순권(崔順權)
갱신일 2018-11-12

정의

성균관과 향교의 대성전[文廟]에서 2월의 첫 정일[上丁日]에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의식. 봄에 지내는 제사라 하여 춘계석전 또는 문묘에서 지낸다 하여 춘계문묘석전이라 한다. 일년에 두 번, 2월과 8월의 첫 정일(丁日)에 지내는 제사라고 하여, 상정제(上丁祭) 또는 정제(丁祭)라 하며, 봄철의 정일에 지내는 제사라고 춘정(春丁)이라고도 한다.

유래

석전(釋奠)은 ‘처음에 단지 채소를 놓고 폐백을 올린다.’라고 하여 산천(山川), 묘사(廟社) 같은 모든 제사를 석채(釋菜), 석전이라고 하였다. 후대에 와서 옛날에 선비가 스승을 알현할 때 채소를 폐백으로 바치고, 『주례(周禮)』와 『예기(禮記)』에 학교를 세우거나 입학을 하면 반드시 채소로써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하여, 석전은 성현에 대한 제사만 지칭하게 되었다. 나아가 채소 이외에 소나 양 같은 희생(犧牲)을 제물로 올리고 음악을 갖추어 제사를 지냄으로써 이를 석전이라 하였다. 공자가 선성(先聖)으로 추대되면서 공자의 탄일(8월 27일)과 기일(2월 18일)에 맞추어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석전을 봉행하게 되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문선왕(文宣王: 공자)에 대한 제사의 예를 석전이라 규정하여 국가제사 가운데 중사(中祀)로 분류하였고, 주현(州縣)마다 향교에 문묘를 설치하여 석전을 봉행하게 하였다.

역사

석채나 석전의 역사는 주대(周代)의 선성, 선사의 예에서 비롯되었다. 한대(漢代) 이후로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채용하면서 주공(周公)을 선성으로, 공자를 선사로 받들어 공자의 사당에 태뢰[大牢]를 올리거나, 공자의 옛집에 궐리사(闕里祠)를 세워 공자와 72 제자를 치제(致祭)하였다. 당대(唐代)에 와서 비로소 공자를 선성으로 받들어 문선왕으로 추증(追贈)하였고, 그의 제자 안자(顔子)를 선사로 배향하였다. 또 송대(宋代)에는 사당에 동서 양무(兩廡)를 세워 문묘를 확립하였고, 원대(元代)에는 안자 이외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명대(明代)에는 문묘를 대성전(大成殿)이라 하고, 공자와 그의 제자 외에 송과 명의 유학자까지 종사(從祀)하여 오늘날의 문묘제가 확립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때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건너가 그곳의 국학(國學)을 찾아 석전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에 국학 설립을 추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성덕왕(成德王) 13년에는 김수충(金守忠)이 당나라에서 공자와 10철(十哲)과 72 제자의 화상(畵像)을 가져와 국학에 안치하였다는 것에서 일찍이 석전의식이 국학에서 봉행되었을 것으로 본다.

고려시대에는 성종(成宗) 7년에 임노성(任老成)이 송나라에서 ‘문선왕묘도(文宣王廟圖)’를 들여왔고, 숙종(肅宗) 6년에는 국자감(國子監)에서 문선왕묘의 좌우 행랑에 새로 61자(子)와 21현(賢)을 그려서 석전에 종사하길 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최치원(崔致遠), 설총(薛聰), 안향(安珦) 같은 우리나라 인물을 문묘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또 충렬왕(忠烈王) 29년에는 김문정(金文鼎)이 원나라에서 선성 10철상과 문묘 제기를 가져왔고, 34년에는 공자(孔子)의 작호(爵號)를 더 추가하여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 하였다. 충선왕(忠宣王) 때에는 “문선왕은 백대의 스승이다.”라고 하여 춘추 석전과 삭망(朔望) 제향에 선비들이 모여 정결하게 제사지낼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서울에 성균관, 지방에 향교를 세워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의 4성(四聖)과 10철을 모시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는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소옹(邵雍), 장재(張載), 주희(朱熹)의 송조 6현(宋朝六賢) 그리고 설총, 최치원, 안향을 비롯한 유학자 108명을 모시고 석전을 거행하였다. 『국조오례의』에는 주자의 석전의(釋奠儀)에 의해 석전의식을 정리하고, 아울러 제기, 제복 등의 도설을 제시하였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도통과 도학이 확립되면서 광해군대에는 사림의 주장에 따라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같은 동방오현(東方五賢)을 문묘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유학자도 도학 기준에 따라 종사 여부를 결정하여 숙종 8년에는 순황(荀況) 등을 폐출하고, 주자의 제자인 황간(黃榦) 등을 새로이 종사하였다. 우리나라 유학자 가운데 김인후(金麟厚),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 조헌(趙憲),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박세채(朴世采)도 문묘에 종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리학(주자학)을 국시(國是)로 삼았기 때문에 중국과 달리 숙종(肅宗) 40년에 송시열의 상소를 계기로 송조 6현을 대성전에 모셨고, 명대에 종사된 육구연(陸九淵) 같은 양명학자들은 배제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성균관과 향교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문묘의 석전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변하였고, 1937년부터는 태양력의 도입에 따라 석전도 양력 4월 15일과 10월 15일에 봉행되었다. 1949년에는 전국유림대회의 결의에 따라 대성전에 공자와 4성, 송조 2현, 동방 18현만 모시고, 10철을 비롯한 중국 유현 108위의 위패는 매안(埋安)하였으며, 석전도 탄일인 음력 8월 27일에만 봉행하였다. 1953년에는 다시 10철과 송조 6현을 복위(復位)하고, 제일을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로 환원하여 대성전에서 공자와 4성, 10철과 송조 6현, 동방 18현을 모시고 석전을 봉행하였다. 한편 강릉 향교에서는 대성전에 공자를 포함해서 4성과 10철, 송조 6현을, 동무와 서무에는 동방 18현과 중국 유학자 94위를 모시고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현재도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서는 해마다 봄(음력 2월)과 가을(음력 8월)의 상정일에 동시에 석전을 거행하고 있다. 그 석전 의식은 대개 『국조오례의』의 석전의례에 따라 진행한다. 다만 동무와 서무에 모셨던 동방 18현을 현재는 대성전으로 옮겨 모시고 있기 때문에 동무와 서무에서의 분헌례(分獻禮)가 생략되고, 대신 대성전에서 모든 행례가 이루어진다.

내용

{춘계문묘석전(春季文廟釋奠)의 순서} 석전 의식은 집례의 창홀(唱笏)에 의해 진행되는데, 그 대강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집례와 묘사(廟司)가 섬돌 아래에서 4배(拜)를 올린 뒤에 손을 씻고 정해진 자리에 선다. 집례가 홀기(笏記)를 부르기 시작하면, 전악(典樂)이 악사(樂士)들을 인솔하여 정해진 자리로 나아가고, 모든 제관들도 정해진 자리로 나아가 4배를 한다. 묘사(廟司)와 봉향(奉香), 봉로(奉爐)가 대성전으로 올라 문을 열고 개독(開櫝)을 한다. 알자(謁者)와 찬인(贊引)이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 분헌관(分獻官)을 인도하여 정해진 자리로 나아간다. 알자가 초헌관에게 행사하기를 청하면 당하악(堂下樂)과 문무(文舞)를 시작하고, 헌관과 참례자 모두가 4배를 한다.

먼저 영신(迎神)의 의미로 전폐례(奠幣禮)를 행하는데, 당상악(堂上樂)과 문무를 시작한다. 초헌관이 공자 신위 앞에 나아가 삼상향(三上香)하고 백저포(白苧布)의 폐백을 올리는데,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의 신위 앞에서도 이와 같이 하고 제자리로 돌아온다.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초헌례(初獻禮)를 행하는데, 당상악과 문무를 시작한다. 초헌관이 공자 신위전에 나아가 술잔을 올리고 물러나 꿇어앉으면 대축(大祝)이 축문을 읽고,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의 신위 앞에서도 이와 같이 한다. 이어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아헌례와 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종헌례를 행하는데, 이때에는 당하악과 무무(武舞)를 시작하며, 축문은 읽지 않는다.

종헌례가 끝나면 분헌관이 종향(從享)되어 있는 10철과 송조 6현, 동방 18현에게 술잔을 드리는 분헌례(分獻禮)를 행한다. 분헌례 이후에는 초헌관이 음복위에 나가 서향하여 석전에 쓴 술과 조육을 먹는 음복례(飮福禮)를 행한다. 음복례가 끝나면 참례자 모두 4배를 한다.

대축이 변두를 조금 움직이는 철변두(徹籩豆)를 행하는데 이때 당상악을 연주한다. 철변두가 끝나면 당하악을 연주하고, 헌관 이하 참례자 모두 4배를 한다.

마지막으로 초헌관이 제사가 끝나서 축문과 폐백을 태우는 것을 지켜보는 망료례(望燎禮)를 행한다. 이어 알자가 초헌관에게 예가 끝났음[禮畢]을 아뢰고, 알자와 찬인이 헌관을 인도하여 물러나면 집사자가 내려와 4배를 한다.

의의

석전 의식은 성균관과 향교에서 공자와 선현들의 학문을 배울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의식을 통해 학생들에게 사표(師表)를 보여주고 숭모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國朝五禮儀, 文廟享祀錄, 三國史記, 俎豆錄
文廟享祀制의 成立과 變遷 (朴贊洙, 藍史鄭在覺博士古稀記念東洋學論叢, 1984)
朝鮮後期文化運動史 (鄭玉子, 一潮閣, 1988)
朝鮮前期 儀禮硏究-性理學 正統論을 中心으로 (池斗煥,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한국의 제사 (국립민속박물관, 2003)

춘계문묘석전

춘계문묘석전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봄(春) > 2월 > 의례

집필자 최순권(崔順權)
갱신일 2018-11-12

정의

성균관과 향교의 대성전[文廟]에서 2월의 첫 정일[上丁日]에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의식. 봄에 지내는 제사라 하여 춘계석전 또는 문묘에서 지낸다 하여 춘계문묘석전이라 한다. 일년에 두 번, 2월과 8월의 첫 정일(丁日)에 지내는 제사라고 하여, 상정제(上丁祭) 또는 정제(丁祭)라 하며, 봄철의 정일에 지내는 제사라고 춘정(春丁)이라고도 한다.

유래

석전(釋奠)은 ‘처음에 단지 채소를 놓고 폐백을 올린다.’라고 하여 산천(山川), 묘사(廟社) 같은 모든 제사를 석채(釋菜), 석전이라고 하였다. 후대에 와서 옛날에 선비가 스승을 알현할 때 채소를 폐백으로 바치고, 『주례(周禮)』와 『예기(禮記)』에 학교를 세우거나 입학을 하면 반드시 채소로써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하여, 석전은 성현에 대한 제사만 지칭하게 되었다. 나아가 채소 이외에 소나 양 같은 희생(犧牲)을 제물로 올리고 음악을 갖추어 제사를 지냄으로써 이를 석전이라 하였다. 공자가 선성(先聖)으로 추대되면서 공자의 탄일(8월 27일)과 기일(2월 18일)에 맞추어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석전을 봉행하게 되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문선왕(文宣王: 공자)에 대한 제사의 예를 석전이라 규정하여 국가제사 가운데 중사(中祀)로 분류하였고, 주현(州縣)마다 향교에 문묘를 설치하여 석전을 봉행하게 하였다.

역사

석채나 석전의 역사는 주대(周代)의 선성, 선사의 예에서 비롯되었다. 한대(漢代) 이후로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채용하면서 주공(周公)을 선성으로, 공자를 선사로 받들어 공자의 사당에 태뢰[大牢]를 올리거나, 공자의 옛집에 궐리사(闕里祠)를 세워 공자와 72 제자를 치제(致祭)하였다. 당대(唐代)에 와서 비로소 공자를 선성으로 받들어 문선왕으로 추증(追贈)하였고, 그의 제자 안자(顔子)를 선사로 배향하였다. 또 송대(宋代)에는 사당에 동서 양무(兩廡)를 세워 문묘를 확립하였고, 원대(元代)에는 안자 이외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명대(明代)에는 문묘를 대성전(大成殿)이라 하고, 공자와 그의 제자 외에 송과 명의 유학자까지 종사(從祀)하여 오늘날의 문묘제가 확립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때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건너가 그곳의 국학(國學)을 찾아 석전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에 국학 설립을 추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성덕왕(成德王) 13년에는 김수충(金守忠)이 당나라에서 공자와 10철(十哲)과 72 제자의 화상(畵像)을 가져와 국학에 안치하였다는 것에서 일찍이 석전의식이 국학에서 봉행되었을 것으로 본다. 고려시대에는 성종(成宗) 7년에 임노성(任老成)이 송나라에서 ‘문선왕묘도(文宣王廟圖)’를 들여왔고, 숙종(肅宗) 6년에는 국자감(國子監)에서 문선왕묘의 좌우 행랑에 새로 61자(子)와 21현(賢)을 그려서 석전에 종사하길 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최치원(崔致遠), 설총(薛聰), 안향(安珦) 같은 우리나라 인물을 문묘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또 충렬왕(忠烈王) 29년에는 김문정(金文鼎)이 원나라에서 선성 10철상과 문묘 제기를 가져왔고, 34년에는 공자(孔子)의 작호(爵號)를 더 추가하여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 하였다. 충선왕(忠宣王) 때에는 “문선왕은 백대의 스승이다.”라고 하여 춘추 석전과 삭망(朔望) 제향에 선비들이 모여 정결하게 제사지낼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서울에 성균관, 지방에 향교를 세워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의 4성(四聖)과 10철을 모시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는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소옹(邵雍), 장재(張載), 주희(朱熹)의 송조 6현(宋朝六賢) 그리고 설총, 최치원, 안향을 비롯한 유학자 108명을 모시고 석전을 거행하였다. 『국조오례의』에는 주자의 석전의(釋奠儀)에 의해 석전의식을 정리하고, 아울러 제기, 제복 등의 도설을 제시하였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도통과 도학이 확립되면서 광해군대에는 사림의 주장에 따라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같은 동방오현(東方五賢)을 문묘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유학자도 도학 기준에 따라 종사 여부를 결정하여 숙종 8년에는 순황(荀況) 등을 폐출하고, 주자의 제자인 황간(黃榦) 등을 새로이 종사하였다. 우리나라 유학자 가운데 김인후(金麟厚),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 조헌(趙憲),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박세채(朴世采)도 문묘에 종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리학(주자학)을 국시(國是)로 삼았기 때문에 중국과 달리 숙종(肅宗) 40년에 송시열의 상소를 계기로 송조 6현을 대성전에 모셨고, 명대에 종사된 육구연(陸九淵) 같은 양명학자들은 배제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성균관과 향교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문묘의 석전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변하였고, 1937년부터는 태양력의 도입에 따라 석전도 양력 4월 15일과 10월 15일에 봉행되었다. 1949년에는 전국유림대회의 결의에 따라 대성전에 공자와 4성, 송조 2현, 동방 18현만 모시고, 10철을 비롯한 중국 유현 108위의 위패는 매안(埋安)하였으며, 석전도 탄일인 음력 8월 27일에만 봉행하였다. 1953년에는 다시 10철과 송조 6현을 복위(復位)하고, 제일을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로 환원하여 대성전에서 공자와 4성, 10철과 송조 6현, 동방 18현을 모시고 석전을 봉행하였다. 한편 강릉 향교에서는 대성전에 공자를 포함해서 4성과 10철, 송조 6현을, 동무와 서무에는 동방 18현과 중국 유학자 94위를 모시고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현재도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서는 해마다 봄(음력 2월)과 가을(음력 8월)의 상정일에 동시에 석전을 거행하고 있다. 그 석전 의식은 대개 『국조오례의』의 석전의례에 따라 진행한다. 다만 동무와 서무에 모셨던 동방 18현을 현재는 대성전으로 옮겨 모시고 있기 때문에 동무와 서무에서의 분헌례(分獻禮)가 생략되고, 대신 대성전에서 모든 행례가 이루어진다.

내용

{춘계문묘석전(春季文廟釋奠)의 순서} 석전 의식은 집례의 창홀(唱笏)에 의해 진행되는데, 그 대강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집례와 묘사(廟司)가 섬돌 아래에서 4배(拜)를 올린 뒤에 손을 씻고 정해진 자리에 선다. 집례가 홀기(笏記)를 부르기 시작하면, 전악(典樂)이 악사(樂士)들을 인솔하여 정해진 자리로 나아가고, 모든 제관들도 정해진 자리로 나아가 4배를 한다. 묘사(廟司)와 봉향(奉香), 봉로(奉爐)가 대성전으로 올라 문을 열고 개독(開櫝)을 한다. 알자(謁者)와 찬인(贊引)이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 분헌관(分獻官)을 인도하여 정해진 자리로 나아간다. 알자가 초헌관에게 행사하기를 청하면 당하악(堂下樂)과 문무(文舞)를 시작하고, 헌관과 참례자 모두가 4배를 한다. 먼저 영신(迎神)의 의미로 전폐례(奠幣禮)를 행하는데, 당상악(堂上樂)과 문무를 시작한다. 초헌관이 공자 신위 앞에 나아가 삼상향(三上香)하고 백저포(白苧布)의 폐백을 올리는데,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의 신위 앞에서도 이와 같이 하고 제자리로 돌아온다.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초헌례(初獻禮)를 행하는데, 당상악과 문무를 시작한다. 초헌관이 공자 신위전에 나아가 술잔을 올리고 물러나 꿇어앉으면 대축(大祝)이 축문을 읽고,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의 신위 앞에서도 이와 같이 한다. 이어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아헌례와 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종헌례를 행하는데, 이때에는 당하악과 무무(武舞)를 시작하며, 축문은 읽지 않는다. 종헌례가 끝나면 분헌관이 종향(從享)되어 있는 10철과 송조 6현, 동방 18현에게 술잔을 드리는 분헌례(分獻禮)를 행한다. 분헌례 이후에는 초헌관이 음복위에 나가 서향하여 석전에 쓴 술과 조육을 먹는 음복례(飮福禮)를 행한다. 음복례가 끝나면 참례자 모두 4배를 한다. 대축이 변두를 조금 움직이는 철변두(徹籩豆)를 행하는데 이때 당상악을 연주한다. 철변두가 끝나면 당하악을 연주하고, 헌관 이하 참례자 모두 4배를 한다. 마지막으로 초헌관이 제사가 끝나서 축문과 폐백을 태우는 것을 지켜보는 망료례(望燎禮)를 행한다. 이어 알자가 초헌관에게 예가 끝났음[禮畢]을 아뢰고, 알자와 찬인이 헌관을 인도하여 물러나면 집사자가 내려와 4배를 한다.

의의

석전 의식은 성균관과 향교에서 공자와 선현들의 학문을 배울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의식을 통해 학생들에게 사표(師表)를 보여주고 숭모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國朝五禮儀, 文廟享祀錄, 三國史記, 俎豆錄文廟享祀制의 成立과 變遷 (朴贊洙, 藍史鄭在覺博士古稀記念東洋學論叢, 1984)朝鮮後期文化運動史 (鄭玉子, 一潮閣, 1988)朝鮮前期 儀禮硏究-性理學 正統論을 中心으로 (池斗煥,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한국의 제사 (국립민속박물관,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