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잡이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봄(春) > 3월 > 생업

집필자 주강현(朱剛玄)

정의

서해안 최대의 어종은 조기로, 조기는 지역에 따라 조구 또는 조긔라고도 부르며, 한자음으로는 석수어(石首魚)로 지칭한다. 조기라 하면 참조기를 뜻하며, 보굴치, 부서, 백조기 같은 참조기와 다른 근연종이 상당히 많다.

내용

조기의 산란기는 4~6월로서 주 산란기는 5월, 산란하기 좋은 수온은 10~13도이다. 산란장은 서해 중부 연안으로서 주 산란장은 전통적으로 연평도 연안이었으나, 남쪽에서의 저인망 어선의 남획으로 산란장이 남하되었다. 암컷의 생물학적 최소형은 전장 20센티미터 전후로, 마리당 포란수는 체장 30센티미터에서 3~7만개, 35센티미터에서 10만개이다. 성장이 상당히 빠르다. 당해년도에 새끼가 12센티미터로 자라며, 2년차에 17센티미터, 5년차에 24센티미터, 6년차에 26센티미터로 자라는데 평균 몸길이는 20~30센티미터이고 평균 몸무게는 280그램이다. 참조기의 수명은 최대로 11세로 추정된다. 수온이 16도 이상 높아지면 알을 밴 조기들은 물 깊이 들어가고, 수온이 낮아지면 다시 연안으로 나오며 10월 무렵에 월동처로 간다. 조기는 중층과 표층을 회유하며 낮에는 심층으로 들어간다.

조기잡이는 이같은 조기의 생태에 따라서 밑으로부터 이루어진다. 조기는 동중국해 쪽에서 서해로 올라오는 회유 어종으로 흑산도로부터 신의주 앞바다와 중국 대련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어장이 형성되어 있으며, 어부들은 조기를 따라서 북상하면서 잡아나간다. 조기잡이 출어는 여러 단계의 사리로 구분된다. 흑산도 일대에서 첫 어장이 형성된 후, 전라도 영광과 부안 앞바다인 칠산어장, 충남 태안 앞바다인 방우리어장(격렬비열도), 연평도어장, 평북 철산 앞바다인 대화도어장이 중요하다. 밑에서 올라온 조기는 알을 실어 통통하게 살져서 칠산에서 곡우사리를 형성하며, 이때의 조기가 굴비를 제조하는 데 적격이다. 위도의 왕등이섬을 빠져나가 방우리어장에서 잠시 어장이 형성되며, 곧바로 연평도에서 입하사리가 이루어진다. 입하에는 알이 매우 굵어지고 살이 빠지게 되는데 이때쯤이면 기온이 높아져서 굴비를 만들 수 없게 된다. 대화도에 이르면 이미 산란이 이루어지고 살이 빠지게 되는 바, 이를 소만사리라 부른다. 따라서 곡우와 입하 때의 조기를 최상품으로 친다.

조기는 흑산도에서는 낚시로도 잡으나 대개 중선망을 이용한다. 자원이 풍족했을 때는 연안의 돌멩이로 막은 돌살 또는 대나무나 소사나무로 엮은 어살에서 다량으로 잡아들이기도 했다.

연평도에 있던 어살은 임경업신화를 배태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서해 어부들은 임경업 덕분에 조기를 잡게 되었다는 믿음을 지니고, 열성으로 임경업장군을 모셔왔다. 특히 연평도 임경업당은 ‘민간 신앙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고기잡이배들의 순례지였다. 임경업이 병사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가던 중에 소사나무로 어살을 메어서 조기를 잡아 병사들을 배불리 먹였다는 전설에서 비롯하는 바, 어로 도구와 신화 탄생의 연관성을 말해준다.

서해에서는 조기잡이를 최대의 생계 수단으로 하여 어업을 꾸려왔고, 어로 기술상으로는 전래의 어살로부터 중선배를 거쳐 기계배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겪어왔다. 임경업을 조기의 신으로 모시기도 했으며, 당(堂)이 지금껏 존재하며, 구전문학으로서의 설화뿐만 아니라 배치기와 뱃고사가 조기잡이에 연계되어 전승되고 있다. 어부들은 흑산도로부터 신의주 앞바다와 만주 대련에 이르기까지 넓은 어장을 확보하였다. 조기가 많이 잡히고 돈이 돌다 보니 자연스럽게 파시가 형성되었다. 이 풍습들이 모두 조기잡이의 쇠퇴와 더불어 사라져갔다.

지역사례

조기잡이는 전라도의 칠산어장과 경기도의 연평어장을 최고로 친다. 북쪽으로 대화도어장도 중요하지만 알이 꽉 찬 조기는 양대 어장에 주로 모인다. 칠산과 연평의 사례를 보면 서해안 조기잡이의 핵심적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칠산어장의 경우는 일찍이 지도군수 오횡묵이 정무일기 『지도군총쇄록(智島郡叢刷錄)』에서 말하기를, “법성포 서쪽 칠산바다에는 배를 댈 곳이 없고…… 고기를 사고팔며 오가는 거래액이 가히 수십만 냥에 이른다. 가장 많이 잡히는 물고기는 조기로 팔도에서 모두 먹을 수 있다” 하였다. 칠산바다는 법성 근역의 칠뫼[七山]뿐 아니라 북쪽의 위도까지 아우른다. 곡우가 되면 한시부터 열세시 사이에 정확하게 조기떼가 울었다. 어부들은 대나무통을 바다에 넣고 한쪽 귀를 막고서 울음소리를 들었다. 법성포 구수산의 철쭉꽃이 뚝뚝 떨어져 바다를 물들이면 어민들은 조기떼가 왔다는 신호로 알아듣고 이내 고기잡이를 나갔다. 그때 잡아들인 조기를 말려서 오가잽이(오사리에 잡는다는 뜻) 굴비를 만들었으니, 그 전통이 오늘에 이어져서 법성포 굴비가 되었다. 법성포 굴비가 맛좋은 이유는 참조기만으로 1년 이상 된 양질의 소금을 사용하여 건조하며, 해풍, 습도, 일조량이 알맞은 기후 조건에서 만들기 때문이다. 법성포는 ‘하늘이 내린 굴비의 고장’이라 하거니와, 굴비 제조에 필수적인 소금, 바람, 갯벌이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연평도의 경우는 20세기 중반까지도 조기잡이로 명성을 날렸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 “토산은 석수어가 남쪽 연평평(延平坪)에서 나고, 봄과 여름에 여러 곳의 고깃배가 모두 이곳에 모이어 그물로 잡는데, 관에서 그 세금을 거두어 나라 비용에 쓴다.” 하였다. 조선 전기부터 조기떼가 대규모로 잡히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영광의 파시평(波市坪)과 더불어 황해도 연평평에서의 조기잡이가 등장한다. 연평파시는 연평파시평, 연평작사라 불렀다. 불과 30~40년 전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연평파시가 벌어져서 수천 척의 배가 몰려오는 성황을 이루었다. 칠산파시와 더불어 최대의 조기어장을 형성하면서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연평어장은 해주만 일대의 잘 발달한 리아스식 해안과 자잘한 섬들을 포괄한다. 미력리도, 갈리도, 장재도, 초마도 같은 자잘한 섬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어 연평열도라고 부른다. 조기잡이 중선의 주어장은 연평도 서쪽 10~15리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어구도 중선, 건강망, 궁선, 어살이 쓰였다. 중선은 연평도 앞바다보다도 서쪽에 길게 돌출한 황해도 등산곶(登山串) 근역과 구월봉 아래에서 조업을 했는데, 수심이 20미터를 넘는다. 구월봉 아래는 이른바 구월이바다로 부르던 구월반도가 길게 늘어진 곳이다. 구월봉은 조기잡이배들이 자신의 위치를 판단하는 가늠을 잡는 봉우리다. 등산이와 구월이 앞바다는 자잘한 여와 모래밭으로 형성되어 있어 조기에게 최적의 산란장이었다. 연평파시에는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를 비롯하여 각지의 배가 몰려왔다.

1968년 조기잡이가 ‘공식적’으로 퇴장할 때까지 수천 척의 배들이 줄지어 서서 포구에서 당섬까지 배를 딛고서 그대로 걸어들어 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연평파시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나무와 쌀, 물 따위를 이곳에서 장만하였으니, 이런저런 장사꾼들이 몰려들어 극성을 떨었고, 300여 곳이 넘는 술집이 번성하여 수백의 여성들이 화장을 짙게 하고 사내들을 기다렸다. 배들이 몰려오면 연평의 아낙과 처녀들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허리 깊이까지 빠지면서 배 있는 곳으로 가서 물을 팔았다. 조기가 잡히면 시선배가 몰려왔다. 마포나루에서 얼음을 잔뜩 실은 시선배들이 땔깜, 식량 따위를 싣고 연평도까지 와서 사로잡은 조기와 맞바꾸었다. 일부는 해주항을 거쳐 개성부잣집으로 실려가기도 했다. 얼음에 차곡차곡 채워진 조기들은 강화도 북쪽을 통해 그대로 한강을 거슬러올라가 마포나루까지 직진하였다. 이 상인들을 경강상인(京江商人)으로 불렀으니, 마포새우젓 동네까지 진출하여 서울의 생선 공급을 도맡아 했다.

의의

1960년대 이래의 남획으로 말미암아 조기잡이가 대거 쇠퇴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조기는 제사상에 반드시 올라야 하는 ‘절 받는 물고기’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고 있으며, 매우 비싼 값에 팔리고 있어 조기의 문화적 장기 지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수산학적 통계에 의하면 조기는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생선의 하나로 인정된다. 조기잡이를 통하여 창조된 파시 풍습, 어로 도구, 당신화 같은 것들은 비록 조기잡이가 쇠퇴하였더라도 여전히 어업문화사적 의미를 지니며 전승되고 있다.

참고문헌

玆山魚譜, 黃金の海朱剛玄 (法政大出版部, 2003), 조기에 관한 명상 (주강현, 한겨레신문사, 1998)

조기잡이

조기잡이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봄(春) > 3월 > 생업

집필자 주강현(朱剛玄)

정의

서해안 최대의 어종은 조기로, 조기는 지역에 따라 조구 또는 조긔라고도 부르며, 한자음으로는 석수어(石首魚)로 지칭한다. 조기라 하면 참조기를 뜻하며, 보굴치, 부서, 백조기 같은 참조기와 다른 근연종이 상당히 많다.

내용

조기의 산란기는 4~6월로서 주 산란기는 5월, 산란하기 좋은 수온은 10~13도이다. 산란장은 서해 중부 연안으로서 주 산란장은 전통적으로 연평도 연안이었으나, 남쪽에서의 저인망 어선의 남획으로 산란장이 남하되었다. 암컷의 생물학적 최소형은 전장 20센티미터 전후로, 마리당 포란수는 체장 30센티미터에서 3~7만개, 35센티미터에서 10만개이다. 성장이 상당히 빠르다. 당해년도에 새끼가 12센티미터로 자라며, 2년차에 17센티미터, 5년차에 24센티미터, 6년차에 26센티미터로 자라는데 평균 몸길이는 20~30센티미터이고 평균 몸무게는 280그램이다. 참조기의 수명은 최대로 11세로 추정된다. 수온이 16도 이상 높아지면 알을 밴 조기들은 물 깊이 들어가고, 수온이 낮아지면 다시 연안으로 나오며 10월 무렵에 월동처로 간다. 조기는 중층과 표층을 회유하며 낮에는 심층으로 들어간다. 조기잡이는 이같은 조기의 생태에 따라서 밑으로부터 이루어진다. 조기는 동중국해 쪽에서 서해로 올라오는 회유 어종으로 흑산도로부터 신의주 앞바다와 중국 대련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어장이 형성되어 있으며, 어부들은 조기를 따라서 북상하면서 잡아나간다. 조기잡이 출어는 여러 단계의 사리로 구분된다. 흑산도 일대에서 첫 어장이 형성된 후, 전라도 영광과 부안 앞바다인 칠산어장, 충남 태안 앞바다인 방우리어장(격렬비열도), 연평도어장, 평북 철산 앞바다인 대화도어장이 중요하다. 밑에서 올라온 조기는 알을 실어 통통하게 살져서 칠산에서 곡우사리를 형성하며, 이때의 조기가 굴비를 제조하는 데 적격이다. 위도의 왕등이섬을 빠져나가 방우리어장에서 잠시 어장이 형성되며, 곧바로 연평도에서 입하사리가 이루어진다. 입하에는 알이 매우 굵어지고 살이 빠지게 되는데 이때쯤이면 기온이 높아져서 굴비를 만들 수 없게 된다. 대화도에 이르면 이미 산란이 이루어지고 살이 빠지게 되는 바, 이를 소만사리라 부른다. 따라서 곡우와 입하 때의 조기를 최상품으로 친다. 조기는 흑산도에서는 낚시로도 잡으나 대개 중선망을 이용한다. 자원이 풍족했을 때는 연안의 돌멩이로 막은 돌살 또는 대나무나 소사나무로 엮은 어살에서 다량으로 잡아들이기도 했다. 연평도에 있던 어살은 임경업신화를 배태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서해 어부들은 임경업 덕분에 조기를 잡게 되었다는 믿음을 지니고, 열성으로 임경업장군을 모셔왔다. 특히 연평도 임경업당은 ‘민간 신앙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고기잡이배들의 순례지였다. 임경업이 병사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가던 중에 소사나무로 어살을 메어서 조기를 잡아 병사들을 배불리 먹였다는 전설에서 비롯하는 바, 어로 도구와 신화 탄생의 연관성을 말해준다. 서해에서는 조기잡이를 최대의 생계 수단으로 하여 어업을 꾸려왔고, 어로 기술상으로는 전래의 어살로부터 중선배를 거쳐 기계배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겪어왔다. 임경업을 조기의 신으로 모시기도 했으며, 당(堂)이 지금껏 존재하며, 구전문학으로서의 설화뿐만 아니라 배치기와 뱃고사가 조기잡이에 연계되어 전승되고 있다. 어부들은 흑산도로부터 신의주 앞바다와 만주 대련에 이르기까지 넓은 어장을 확보하였다. 조기가 많이 잡히고 돈이 돌다 보니 자연스럽게 파시가 형성되었다. 이 풍습들이 모두 조기잡이의 쇠퇴와 더불어 사라져갔다.

지역사례

조기잡이는 전라도의 칠산어장과 경기도의 연평어장을 최고로 친다. 북쪽으로 대화도어장도 중요하지만 알이 꽉 찬 조기는 양대 어장에 주로 모인다. 칠산과 연평의 사례를 보면 서해안 조기잡이의 핵심적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칠산어장의 경우는 일찍이 지도군수 오횡묵이 정무일기 『지도군총쇄록(智島郡叢刷錄)』에서 말하기를, “법성포 서쪽 칠산바다에는 배를 댈 곳이 없고…… 고기를 사고팔며 오가는 거래액이 가히 수십만 냥에 이른다. 가장 많이 잡히는 물고기는 조기로 팔도에서 모두 먹을 수 있다” 하였다. 칠산바다는 법성 근역의 칠뫼[七山]뿐 아니라 북쪽의 위도까지 아우른다. 곡우가 되면 한시부터 열세시 사이에 정확하게 조기떼가 울었다. 어부들은 대나무통을 바다에 넣고 한쪽 귀를 막고서 울음소리를 들었다. 법성포 구수산의 철쭉꽃이 뚝뚝 떨어져 바다를 물들이면 어민들은 조기떼가 왔다는 신호로 알아듣고 이내 고기잡이를 나갔다. 그때 잡아들인 조기를 말려서 오가잽이(오사리에 잡는다는 뜻) 굴비를 만들었으니, 그 전통이 오늘에 이어져서 법성포 굴비가 되었다. 법성포 굴비가 맛좋은 이유는 참조기만으로 1년 이상 된 양질의 소금을 사용하여 건조하며, 해풍, 습도, 일조량이 알맞은 기후 조건에서 만들기 때문이다. 법성포는 ‘하늘이 내린 굴비의 고장’이라 하거니와, 굴비 제조에 필수적인 소금, 바람, 갯벌이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연평도의 경우는 20세기 중반까지도 조기잡이로 명성을 날렸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 “토산은 석수어가 남쪽 연평평(延平坪)에서 나고, 봄과 여름에 여러 곳의 고깃배가 모두 이곳에 모이어 그물로 잡는데, 관에서 그 세금을 거두어 나라 비용에 쓴다.” 하였다. 조선 전기부터 조기떼가 대규모로 잡히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영광의 파시평(波市坪)과 더불어 황해도 연평평에서의 조기잡이가 등장한다. 연평파시는 연평파시평, 연평작사라 불렀다. 불과 30~40년 전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연평파시가 벌어져서 수천 척의 배가 몰려오는 성황을 이루었다. 칠산파시와 더불어 최대의 조기어장을 형성하면서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연평어장은 해주만 일대의 잘 발달한 리아스식 해안과 자잘한 섬들을 포괄한다. 미력리도, 갈리도, 장재도, 초마도 같은 자잘한 섬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어 연평열도라고 부른다. 조기잡이 중선의 주어장은 연평도 서쪽 10~15리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어구도 중선, 건강망, 궁선, 어살이 쓰였다. 중선은 연평도 앞바다보다도 서쪽에 길게 돌출한 황해도 등산곶(登山串) 근역과 구월봉 아래에서 조업을 했는데, 수심이 20미터를 넘는다. 구월봉 아래는 이른바 구월이바다로 부르던 구월반도가 길게 늘어진 곳이다. 구월봉은 조기잡이배들이 자신의 위치를 판단하는 가늠을 잡는 봉우리다. 등산이와 구월이 앞바다는 자잘한 여와 모래밭으로 형성되어 있어 조기에게 최적의 산란장이었다. 연평파시에는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를 비롯하여 각지의 배가 몰려왔다. 1968년 조기잡이가 ‘공식적’으로 퇴장할 때까지 수천 척의 배들이 줄지어 서서 포구에서 당섬까지 배를 딛고서 그대로 걸어들어 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연평파시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나무와 쌀, 물 따위를 이곳에서 장만하였으니, 이런저런 장사꾼들이 몰려들어 극성을 떨었고, 300여 곳이 넘는 술집이 번성하여 수백의 여성들이 화장을 짙게 하고 사내들을 기다렸다. 배들이 몰려오면 연평의 아낙과 처녀들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허리 깊이까지 빠지면서 배 있는 곳으로 가서 물을 팔았다. 조기가 잡히면 시선배가 몰려왔다. 마포나루에서 얼음을 잔뜩 실은 시선배들이 땔깜, 식량 따위를 싣고 연평도까지 와서 사로잡은 조기와 맞바꾸었다. 일부는 해주항을 거쳐 개성부잣집으로 실려가기도 했다. 얼음에 차곡차곡 채워진 조기들은 강화도 북쪽을 통해 그대로 한강을 거슬러올라가 마포나루까지 직진하였다. 이 상인들을 경강상인(京江商人)으로 불렀으니, 마포새우젓 동네까지 진출하여 서울의 생선 공급을 도맡아 했다.

의의

1960년대 이래의 남획으로 말미암아 조기잡이가 대거 쇠퇴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조기는 제사상에 반드시 올라야 하는 ‘절 받는 물고기’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고 있으며, 매우 비싼 값에 팔리고 있어 조기의 문화적 장기 지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수산학적 통계에 의하면 조기는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생선의 하나로 인정된다. 조기잡이를 통하여 창조된 파시 풍습, 어로 도구, 당신화 같은 것들은 비록 조기잡이가 쇠퇴하였더라도 여전히 어업문화사적 의미를 지니며 전승되고 있다.

참고문헌

玆山魚譜黃金の海朱剛玄 (法政大出版部, 2003)조기에 관한 명상 (주강현, 한겨레신문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