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축(立春祝)

한자명

立春祝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절기

집필자 최순권(崔順權)

정의

입춘날 봄이 온 것을 기리어 축하하거나 기원하는 내용을 적은 글. 입춘(立春)은 새해를 상징하는 절기이자 봄을 맞는 날이므로 이날 봄의 형상에 적합한 축하·기원·경계 등의 글을 쓰는데, 이를 입춘축(立春祝)·춘축(春祝)이라 한다. 그리고 종이를 잘라 좋은 글을 쓰고 입춘일에 각 집마다 대문이나 기둥 등에 붙인다고 하여, 입춘첩·춘첩·춘첩자(春帖子)·입춘방(立春榜)·춘방(春榜)·문첩(門帖)이라 하며, 또는 입춘(立春)붙인다고 한다. 그리고 문이나 기둥마다 대구의 글을 지어 붙인다고 하여, 춘련(春聯)·대련(對聯)·문대(門對)라고도 한다.

유래

문첩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중국 황제(黃帝) 때 흉악한 귀신을 쫓기 위해 설날 도부(桃符)에 신도(神荼)와 울루(鬱壘)의 형상을 그려 문에다 걸었다는 것에서, ‘신도울루(神荼鬱壘)’ 넉 자를 써서 붙인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춘련은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입춘에 봄을 맞이하여 봄의 행운을 부른다는 ‘의춘(宜春)’ 두 자를 써서 문에 붙인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편 진운첨(陳雲瞻)의 『잠운루잡화(簪雲樓雜話)』에 의하면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섣달 그믐날 하루 전에 공경대부와 일반 서민들로 하여금 대문 위에 춘련(春聯) 한 폭씩을 붙이라고 한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에서 춘첩자는 고려시대부터 보이는데, 『동문선(東文選)』에는 김부식(金富軾)이 쓴 내전(內殿) 춘첩자가 기록되어 있으며,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송나라 서긍(徐兢)이 개경 광화문(廣化門)에 붙여져 있는 “눈 자취 아직도 삼운폐에 있는데(雪痕尙在三雲陛) 햇살이 비로소 오봉루에 오르네(日脚初升五鳳樓) 제후들 잔 올려 축수하니(百辟稱觴千萬壽) 곤룡포 자락에 서광이 어리네(袞龍衣上瑞光浮)”라는 춘첩자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도 어전(御殿)과 태후전(太后殿)의 춘첩자가 있는데, 대체로 장수를 기원하는 5언 또는 7언시이다.

조선시대에도 춘축 또는 춘첩자라고 하여 봄을 축하하는 시를 적고 있으며, 이를 선물로 주고받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지제교(知製敎)로 하여금 5언 절구(絶句)로 짓게 하고, 그 가운데 뛰어난 1수(首)를 택하여 궁문(宮門)에 붙이게 하였으며, 세종 13년에는 춘첩자는 연상시(延祥詩)로 된 입춘을 축하하는 글이라 하여 문소전(文昭殿) 등의 묘문(廟門)에는 붙이지 않게 하였다. 성종대 이후로는 문신(文臣)을 대궐 뜰에 모아 놓고 운(韻)을 나누어 5언·7언 율시(律詩)를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영조 39년에는 춘첩자를 지어 올릴 인원수를 8명으로 정하여, 일년에 세 번 첩자(帖子)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정조 5년에는 입춘 첩자는 송도(頌禱)뿐만 아니라 잠규(箴規)하는 뜻이 깃들어 있다고 하여, 규장각의 제학·직제학·직각·대교는 첩사(帖詞) 두 편씩을 뽑아서 직접 써서 올리게 하였다. 현재 규장각 도서에는 정조대부터 순조대까지 규장각 대신들이 써왔던 춘첩자를 모아 편찬한 3권의 『춘첩자』가 있다.

그리하여 『동국세시기』에 “승정원(承政院)에서는 미리 뽑은 시종신(侍從臣)과 당하(堂下)의 문관들에게 10일 전부터 연상시를 지어 올리게 한다. 이때 홍문관, 예문관과 규장각의 제학에게 운자(韻字)를 내게 하여 5언·7언의 율시, 절구를 짓게 하고 채점하여 합격한 것은 대궐 안의 기둥이나 문설주에 붙이게 한다. 입춘의 춘첩자나 단오의 단오첩도 모두 이와 같다.”고 하여, 춘첩자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작성하여 붙인다고 하였다. 이것은 사마광(司馬光)의 『일록(日錄)』에 “한림원에서 춘사(春詞)를 청하는 명령을 기다려 써두었다가 입춘에 잘라내어 궁중의 문에 붙인다.”고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내용

입춘은 정월의 첫 번째 절기이고, 봄을 알리는 날이기 때문에 신년(新年)으로 여긴다. 그래서 해가 바뀌면 묵은해의 액(厄)을 멀리 보내고 새로운 봄을 맞이하는 입춘축을 써서 문이나 기둥에 붙인다. 입춘축은 태양의 황도(黃道)가 450도에 이르러 입춘점을 지나는 시각에 붙이는데, 사대부집에서는 궁중의 춘첩자와 같이, 새로 시(詩)나 사(詞)를 써서 축하하는 뜻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은 옛사람의 아름다운 글귀를 따다가 쓰기도 한다. 여러 가게에서는 명필가에게 글을 받아서 문 밖 기둥에 붙이기도 한다.

동국세시기』나 『경도잡지(京都雜志)』 등에 전하는 춘첩으로, ‘문신호령(門神戶靈) 가금불상(呵噤不祥)’, ‘국태민안(國泰民安) 가급인족(家給人足)’, “우순풍조(雨順風調) 시화세풍(時和歲豊)‘ 등의 대구어(對句語)가 있으며, 여염집의 기둥이나 문설주에는 ’수여산(壽如山) 부여해(富如海), ‘거천재(去千災) 래백복(來百福)’,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요지일월(堯之日月) 순지건곤(舜之乾坤)’, ‘애군희도태(愛君希道泰) 우국원연풍(憂國願年豊)’, ‘부모천년수(父母千年壽) 자손만대영(子孫萬代榮)’, ‘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 사방무일사(四方無一事)’, ‘국유풍운경(國有風雲慶) 가무계옥수(家無桂玉愁)’, ‘재종춘설소(災從春雪消) 복축하운흥(福逐夏雲興)’, ‘북당훤초록(北堂萱草綠) 남극수성명(南極壽星明)’, ‘천상삼양근(天上三陽近) 인간오복래(人間五福來)’, ‘계명신세덕(鷄鳴新歲德) 견폐구년재(犬吠舊年災)’,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개문백복래(開門百福來)’, ‘봉명남산월(鳳鳴南山月) 인유북악풍(麟遊北嶽風)’, ‘문영춘하추동복(門迎春夏秋冬福) 호납동서남북재(戶納東西南北財)’, ‘육오배헌남산수(六鰲拜獻南山壽) 구룡재수사해진(九龍載輸四海珍)’, ‘천증세월인증수(天增歲月人增壽) 춘만건곤복만가(春萬乾坤福滿家)’ 등의 대련(對聯)을 많이 쓴다고 하였다. 또한 문이나 문설주에 붙이는 단첩(單帖)에는 ‘춘도문전증부귀(春到門前增富貴)’, ‘춘광선도길인가(春光先到吉人家)’, ‘상유호조상화명(上有好鳥相和鳴)’, ‘일춘화기만문미(一春和氣滿門楣)’, ‘일진고명만제도(一振高名滿帝都)’ 등이 있다고 하였다.

오늘날에도 ‘입춘대길 건양다경’ 같은 입춘첩을 써두었다가 입춘에 책력(冊曆)에 나와 있는 시간에 맞추어 대문이나 기둥 등에 붙인다. 먼저 사당에 가서 입춘이 왔음을 고하는 ‘감고(敢告) ○○년(年) 입춘(立春) ○○월(月) ○○일(日) ○○시(時)’의 입춘축을 붙이고, 이어 집의 구조와 기능에 따라서, 대문에는 ‘입춘대길 건양다경’, 중문에는 ‘문신호령 가금불상’과 ‘신도울루’, 기둥에는 ‘천증세월인증수 춘만건곤복만가’, 아버지 방에는 ‘부주평안(父主平安)’, 어머니 방에는 ‘모주평안(母主平安)’, 곳간에는 ‘의이장지(義以藏之), 절이용지(節以用之)’ 등 각각의 기원문을 써서 붙인다. 상중(喪中)에 있는 집에서 입춘첩을 붙이지 않는다.

유사사례

입춘첩과 유사한 사례로 관상감에서 주사(朱砂)로 벽사문을 써서 대궐 문설주에 붙이거나, 『은중경(恩重經)』의 진언(眞言)을 인쇄하여 문에 붙이기도 하였으며, 공고(公告)의 의미로서 국왕이 내린 별유(別諭)를 입춘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인접국가사례

중국에서는 춘첩으로 제석(除夕)에 ‘하도낙서(河圖洛書)’, ‘신도울루’, ‘인봉구학(麟鳳龜鶴)’ 등의 글을 써서 붙이거나, 정월 초하루에 붉은 종이에다 글을 써서 붙이기도 하며, 상원(上元)에는 춘첩을 훔치는 풍속도 있었다.

참고문헌

東國歲時記, 東文選, 宣和奉使高麗圖經, 成宗實錄, 世宗實錄, 洌陽歲時記, 英祖實錄, 正祖實錄, 한국세시풍속자료집성-삼국·고려시대 편 (국립민속박물관, 2003), 한국세시풍속자료집성-신문·잡지 편 1876~1945년 (국립민속박물관, 2003)

입춘축

입춘축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절기

집필자 최순권(崔順權)

정의

입춘날 봄이 온 것을 기리어 축하하거나 기원하는 내용을 적은 글. 입춘(立春)은 새해를 상징하는 절기이자 봄을 맞는 날이므로 이날 봄의 형상에 적합한 축하·기원·경계 등의 글을 쓰는데, 이를 입춘축(立春祝)·춘축(春祝)이라 한다. 그리고 종이를 잘라 좋은 글을 쓰고 입춘일에 각 집마다 대문이나 기둥 등에 붙인다고 하여, 입춘첩·춘첩·춘첩자(春帖子)·입춘방(立春榜)·춘방(春榜)·문첩(門帖)이라 하며, 또는 입춘(立春)붙인다고 한다. 그리고 문이나 기둥마다 대구의 글을 지어 붙인다고 하여, 춘련(春聯)·대련(對聯)·문대(門對)라고도 한다.

유래

문첩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중국 황제(黃帝) 때 흉악한 귀신을 쫓기 위해 설날 도부(桃符)에 신도(神荼)와 울루(鬱壘)의 형상을 그려 문에다 걸었다는 것에서, ‘신도울루(神荼鬱壘)’ 넉 자를 써서 붙인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춘련은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입춘에 봄을 맞이하여 봄의 행운을 부른다는 ‘의춘(宜春)’ 두 자를 써서 문에 붙인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편 진운첨(陳雲瞻)의 『잠운루잡화(簪雲樓雜話)』에 의하면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섣달 그믐날 하루 전에 공경대부와 일반 서민들로 하여금 대문 위에 춘련(春聯) 한 폭씩을 붙이라고 한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에서 춘첩자는 고려시대부터 보이는데, 『동문선(東文選)』에는 김부식(金富軾)이 쓴 내전(內殿) 춘첩자가 기록되어 있으며,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송나라 서긍(徐兢)이 개경 광화문(廣化門)에 붙여져 있는 “눈 자취 아직도 삼운폐에 있는데(雪痕尙在三雲陛) 햇살이 비로소 오봉루에 오르네(日脚初升五鳳樓) 제후들 잔 올려 축수하니(百辟稱觴千萬壽) 곤룡포 자락에 서광이 어리네(袞龍衣上瑞光浮)”라는 춘첩자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도 어전(御殿)과 태후전(太后殿)의 춘첩자가 있는데, 대체로 장수를 기원하는 5언 또는 7언시이다. 조선시대에도 춘축 또는 춘첩자라고 하여 봄을 축하하는 시를 적고 있으며, 이를 선물로 주고받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지제교(知製敎)로 하여금 5언 절구(絶句)로 짓게 하고, 그 가운데 뛰어난 1수(首)를 택하여 궁문(宮門)에 붙이게 하였으며, 세종 13년에는 춘첩자는 연상시(延祥詩)로 된 입춘을 축하하는 글이라 하여 문소전(文昭殿) 등의 묘문(廟門)에는 붙이지 않게 하였다. 성종대 이후로는 문신(文臣)을 대궐 뜰에 모아 놓고 운(韻)을 나누어 5언·7언 율시(律詩)를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영조 39년에는 춘첩자를 지어 올릴 인원수를 8명으로 정하여, 일년에 세 번 첩자(帖子)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정조 5년에는 입춘 첩자는 송도(頌禱)뿐만 아니라 잠규(箴規)하는 뜻이 깃들어 있다고 하여, 규장각의 제학·직제학·직각·대교는 첩사(帖詞) 두 편씩을 뽑아서 직접 써서 올리게 하였다. 현재 규장각 도서에는 정조대부터 순조대까지 규장각 대신들이 써왔던 춘첩자를 모아 편찬한 3권의 『춘첩자』가 있다. 그리하여 『동국세시기』에 “승정원(承政院)에서는 미리 뽑은 시종신(侍從臣)과 당하(堂下)의 문관들에게 10일 전부터 연상시를 지어 올리게 한다. 이때 홍문관, 예문관과 규장각의 제학에게 운자(韻字)를 내게 하여 5언·7언의 율시, 절구를 짓게 하고 채점하여 합격한 것은 대궐 안의 기둥이나 문설주에 붙이게 한다. 입춘의 춘첩자나 단오의 단오첩도 모두 이와 같다.”고 하여, 춘첩자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작성하여 붙인다고 하였다. 이것은 사마광(司馬光)의 『일록(日錄)』에 “한림원에서 춘사(春詞)를 청하는 명령을 기다려 써두었다가 입춘에 잘라내어 궁중의 문에 붙인다.”고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내용

입춘은 정월의 첫 번째 절기이고, 봄을 알리는 날이기 때문에 신년(新年)으로 여긴다. 그래서 해가 바뀌면 묵은해의 액(厄)을 멀리 보내고 새로운 봄을 맞이하는 입춘축을 써서 문이나 기둥에 붙인다. 입춘축은 태양의 황도(黃道)가 450도에 이르러 입춘점을 지나는 시각에 붙이는데, 사대부집에서는 궁중의 춘첩자와 같이, 새로 시(詩)나 사(詞)를 써서 축하하는 뜻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은 옛사람의 아름다운 글귀를 따다가 쓰기도 한다. 여러 가게에서는 명필가에게 글을 받아서 문 밖 기둥에 붙이기도 한다. 『동국세시기』나 『경도잡지(京都雜志)』 등에 전하는 춘첩으로, ‘문신호령(門神戶靈) 가금불상(呵噤不祥)’, ‘국태민안(國泰民安) 가급인족(家給人足)’, “우순풍조(雨順風調) 시화세풍(時和歲豊)‘ 등의 대구어(對句語)가 있으며, 여염집의 기둥이나 문설주에는 ’수여산(壽如山) 부여해(富如海), ‘거천재(去千災) 래백복(來百福)’,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요지일월(堯之日月) 순지건곤(舜之乾坤)’, ‘애군희도태(愛君希道泰) 우국원연풍(憂國願年豊)’, ‘부모천년수(父母千年壽) 자손만대영(子孫萬代榮)’, ‘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 사방무일사(四方無一事)’, ‘국유풍운경(國有風雲慶) 가무계옥수(家無桂玉愁)’, ‘재종춘설소(災從春雪消) 복축하운흥(福逐夏雲興)’, ‘북당훤초록(北堂萱草綠) 남극수성명(南極壽星明)’, ‘천상삼양근(天上三陽近) 인간오복래(人間五福來)’, ‘계명신세덕(鷄鳴新歲德) 견폐구년재(犬吠舊年災)’,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개문백복래(開門百福來)’, ‘봉명남산월(鳳鳴南山月) 인유북악풍(麟遊北嶽風)’, ‘문영춘하추동복(門迎春夏秋冬福) 호납동서남북재(戶納東西南北財)’, ‘육오배헌남산수(六鰲拜獻南山壽) 구룡재수사해진(九龍載輸四海珍)’, ‘천증세월인증수(天增歲月人增壽) 춘만건곤복만가(春萬乾坤福滿家)’ 등의 대련(對聯)을 많이 쓴다고 하였다. 또한 문이나 문설주에 붙이는 단첩(單帖)에는 ‘춘도문전증부귀(春到門前增富貴)’, ‘춘광선도길인가(春光先到吉人家)’, ‘상유호조상화명(上有好鳥相和鳴)’, ‘일춘화기만문미(一春和氣滿門楣)’, ‘일진고명만제도(一振高名滿帝都)’ 등이 있다고 하였다. 오늘날에도 ‘입춘대길 건양다경’ 같은 입춘첩을 써두었다가 입춘에 책력(冊曆)에 나와 있는 시간에 맞추어 대문이나 기둥 등에 붙인다. 먼저 사당에 가서 입춘이 왔음을 고하는 ‘감고(敢告) ○○년(年) 입춘(立春) ○○월(月) ○○일(日) ○○시(時)’의 입춘축을 붙이고, 이어 집의 구조와 기능에 따라서, 대문에는 ‘입춘대길 건양다경’, 중문에는 ‘문신호령 가금불상’과 ‘신도울루’, 기둥에는 ‘천증세월인증수 춘만건곤복만가’, 아버지 방에는 ‘부주평안(父主平安)’, 어머니 방에는 ‘모주평안(母主平安)’, 곳간에는 ‘의이장지(義以藏之), 절이용지(節以用之)’ 등 각각의 기원문을 써서 붙인다. 상중(喪中)에 있는 집에서 입춘첩을 붙이지 않는다.

유사사례

입춘첩과 유사한 사례로 관상감에서 주사(朱砂)로 벽사문을 써서 대궐 문설주에 붙이거나, 『은중경(恩重經)』의 진언(眞言)을 인쇄하여 문에 붙이기도 하였으며, 공고(公告)의 의미로서 국왕이 내린 별유(別諭)를 입춘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인접국가사례

중국에서는 춘첩으로 제석(除夕)에 ‘하도낙서(河圖洛書)’, ‘신도울루’, ‘인봉구학(麟鳳龜鶴)’ 등의 글을 써서 붙이거나, 정월 초하루에 붉은 종이에다 글을 써서 붙이기도 하며, 상원(上元)에는 춘첩을 훔치는 풍속도 있었다.

참고문헌

東國歲時記, 東文選, 宣和奉使高麗圖經, 成宗實錄, 世宗實錄, 洌陽歲時記, 英祖實錄, 正祖實錄한국세시풍속자료집성-삼국·고려시대 편 (국립민속박물관, 2003)한국세시풍속자료집성-신문·잡지 편 1876~1945년 (국립민속박물관,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