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율탈춤

한자명

殷栗-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여름(夏) > 5월 > 정일

집필자 정형호(鄭亨鎬)
갱신일 2018-11-15

정의

단오에 황해도 은율 장터에서 한량과 농민들이 놀던 탈춤의 일종. 황해도 서쪽 구월산 아래에 있는 은율읍은 구한말에는 500호, 광복 후에는 1,500호 정도의 소읍이었다. 쌀, 과일, 면화가 많이 나고 물산의 집산지로서, 이런 물적 기반이 탈춤 전승의 바탕이 되었다.

유래

이 탈놀이는 200~300여 년 전부터 전승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세기 중후반에 뛰어난 놀이꾼으로 유명했던 조병모와 박동환 3형제의 활동 시기로 보아 최소 19세기 초반에 놀이가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예부터 ‘놀탈’이 센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주로 농민이나 지역 한량들이 놀이의 주체가 되었다.

은율탈춤은 황해도 지역에 전승되는 해서탈춤이나 경기도 산대놀이와 마찬가지로, 주로 5월 단오에 펼쳐졌다. 이 시기는 본격적인 모내기가 시작되기 직전으로, 식물의 생장과 풍년을 기원하는 세시적 성격을 지닌다. 은율에서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단옷날 낮에 씨름, 그네뛰기 대회가 벌어지고, 밤에 모닥불을 피우고 밤새 탈춤을 추었다.

이 놀이는 단오를 기점으로 2~3일 진행되었다. 예전에는 사월 초파일, 7월 백중, 그 밖에 은율 군수나 지역 유지의 회갑연에 초청되었으며, 인근 지역에서도 공연을 하였다. 가장 전승이 활발했던 시기는 1900년 전후로 보이며, 일제강점기에는 약화되어 명맥이 유지되는 정도였다.

해방 이후 장용수, 장봉헌에 의해 체계적인 전승이 이루어졌다. 장용수는 공산 치하에서 농악대장으로서 연희를 주도하였는데, 당시 반강제적으로 인민극장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전쟁 이후에 잠시 중단되었다가 월남한 장용수를 중심으로 장봉헌이 힘을 합쳐 1960년대 중반부터 복원하였다. 1976년에 이두현, 김천흥의 채록본이 만들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1978년 2월 무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인천시 남구 숭의 4동 수봉공원 입구에 있는 전수회관에서 체계적인 전승과 후진 양성을 하고 있다.

내용

은율탈춤은 마숲의 산당에서 탈고사로 시작된다. 마숲은 풍수적으로 고양이와 솔개 형상의 기운을 막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된 숲이다. 이곳에 산신을 모시는 산당(山堂)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탈춤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에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탈고사 이후에 길놀이가 시작된다. 이후 탈판에 와서 저녁부터 밤늦게까지 탈춤을 추고, 밤새워 뒷풀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놀이 기금은 유지들이 찬조를 하고, 일부 주민들이 걸립(乞粒)에 참여하여 충당한다.

탈춤은 고구려 탈춤의 전통을 이어받아 장삼을 끼고 춤을 추는 역동적인 춤사위로 이루어져 있다. 장단은 타령장단, 염불장단, 잦은돔부리장단, 돌장단이 주로 사용되며, 반주는 피리, 젓대, 북, 장고, 해금이 중심이다. 그리고 삽입 가요로 꼬뚝이타령, 중타령, 대꼬타령, 병신난봉가, 나니가타령이 있다.

탈춤을 추는 공간은 원형 야외무대이다. 자유롭게 참여하여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일반석은 탈판 주위에 멍석을 깔고 앉으며, 임시로 만든 일부 다락은 자릿세를 별도로 받았다. 특히 상인들에게 다락의 관리를 맡기고, 비용 일부를 부담하게 했다. 그런 점에서 이 탈춤은 지역 상권의 유지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탈은 다른 해서탈과 마찬가지로 진흙본을 바탕으로 석고틀을 만들며, 그 위에 두꺼운 마분지를 여러 겹 붙인다. 그리고 눈과 입을 뚫고, 코와 혹 따위를 도드라지게 나타낸다. 원래 놀이가 끝난 다음에 탈을 태워 버렸으나 1925년 이후에는 보관하여 계속 사용하였다.

탈의 모양은 흰색과 붉은색 계통이 대부분이다. 상쇠, 첫째⋅둘째⋅셋째 양반, 새맥시는 흰색이고, 먹중⋅원숭이⋅최괄이⋅말뚝이는 붉은색이다. 그 밖에 노승은 회색, 할미는 검은색이다. 특히 먹중, 노승, 최괄이, 세양반, 말뚝이의 얼굴에는 3~6개의 둥근 혹이 있다. 혹은 밖에서부터 검정, 흰색, 빨강, 검정색 선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에 황색의 크고 둥근 점으로 되어 있다. 노승은 다른 황해도 지역과 마찬가지로 선이 굵은 붉은 색 입술을 그려서 호색한을 상징한다.

은율탈춤은 제1과장 사자춤, 제2과장 헛목(상좌)춤, 제3과장 목중춤, 제4과장 양반춤, 제5과장 노승춤, 제6과장 영감⋅할미광대춤으로 이루어져 있다. 놀이 초반에 나오는 사자춤과 상좌춤은 축귀의식무(逐鬼儀式舞)로, 탈판과 마을을 정화시키는 의미를 지닌다. 특히 상좌춤은 상좌 한 사람이 흰 장삼에 고깔을 쓰고 의식무인 사방무를 춘다. 이것은 원래 4방위의 정화 의식무에서 출발하는데, 4인 상좌무가 후대에 1~2인으로 줄어든 것이다.

팔먹중춤은 8명의 먹중이 차례로 등장하여 자기소개와 흥풀이 춤을 추는데, 진행 방식은 봉산탈춤과 유사하다. 팔먹중이 함께 흥겨운 춤을 추는 대목은 탈판의 신명을 이끌어 내는 기능을 강하게 드러낸다. 먹중이나 옴중은 노장을 희롱하며, 행위 가 중의 모습에서 벗어나 불교의 세속화를 보여준다.

양반과 하인과의 관련 내용을 보면, 은율탈춤은 말뚝이를 통해 양반에 대한 언어 희롱보다는 신체 공격이 두드러진다. 말뚝이는 첫째 양반의 얼굴을 채찍으로 후려치기도 하고, 둘째 양반 앞에 엉덩이를 대고 방귀를 뀌며, 심지어는 신체 불구인 셋째 양반을 깔아뭉개는 식으로 공격한다. 특히 셋째 양반이 반신불수의 몸에 입과 코가 비뚤어진 비정상적 모습으로 등장해 외형적인 골계를 통해 양반을 비하한다. 따라서 양반과 하인, 말뚝이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보면 하인이 주도하는 유형이다.

노승춤은 중과 소무, 최괄이의 관계에서 중과 소무가 결합하다가 나중에 최괄이가 등장해서 중으로부터 소무를 탈취하여 결합하는 내용이다. 이런 유형은 탈놀이의 중 관련 내용에서 가장 일반화된 것으로 산대놀이, 해서탈춤, 남사당 덧뵈기에 두루 나타난다. 소무가 한 사람 등장하며, 중이 소무를 지키기 위해 최괄이와 필사적으로 싸우지만, 결국 소무를 빼앗기게 된다.

할미 관련 내용은 할미와 영감의 반가운 만남도 잠시, 첩인 뚱딴지가 등장하면서 처첩간 갈등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뚱딴지에 의해 할미가 죽게 되며, 영감의 소생 시도와 무당의 진혼굿 순서로 진행된다. 할미는 허리를 노출하고 엉덩이를 심하게 흔들면서 강한 성적 욕구를 나타낸다. 이것은 생산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생산력을 회복하려는 강한 욕구를 의미한다.

은율에서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중과 관련된 내용에 노승과 새맥시(소무역)의 결합이 나오고, 이에 최괄이(취발이역)가 끼어들어 여자를 탈취한다. 그런데 ‘최괄이가 새맥시 사이에 낳은 아들을 어르는 장면’이 양반 관련 내용의 뒷부분에 나온다. 따라서 일상적인 내용 전개와 조금 다르다.

의의

은율탈춤은 고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 무능하고 권위적인 양반을 풍자하며, 불교를 민중적 시각에서 현실적으로 수용하고, 중의 타락과 파계승 풍자, 가부장제하의 남성의 횡포에 대한 여성의 핍박을 보여준다. 그러나 갈등의 고조에 의한 극단적인 대립보다 일시적인 화해의 양상으로 이끌어 가며 놀이의 성격을 유지한다.은율탈춤은 탈놀이의 일반적 성격과 마찬가지로 신명을 풀어나가는 대동놀이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또한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적 성격을 바탕으로 전승하면서 세시놀이적 성격도 지니고 있다.

참고문헌

은율탈춤대사 (이두현, 국어교육26, 한국국어교육연구회, 1975)
韓國의 假面劇 (李杜鉉, 一志社, 1979)
황해도탈놀이 (徐淵昊, 悅話堂, 1988)
한국 가면극의 유형과 전승원리 연구 (정형호,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은율탈춤

은율탈춤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여름(夏) > 5월 > 정일

집필자 정형호(鄭亨鎬)
갱신일 2018-11-15

정의

단오에 황해도 은율 장터에서 한량과 농민들이 놀던 탈춤의 일종. 황해도 서쪽 구월산 아래에 있는 은율읍은 구한말에는 500호, 광복 후에는 1,500호 정도의 소읍이었다. 쌀, 과일, 면화가 많이 나고 물산의 집산지로서, 이런 물적 기반이 탈춤 전승의 바탕이 되었다.

유래

이 탈놀이는 200~300여 년 전부터 전승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세기 중후반에 뛰어난 놀이꾼으로 유명했던 조병모와 박동환 3형제의 활동 시기로 보아 최소 19세기 초반에 놀이가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예부터 ‘놀탈’이 센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주로 농민이나 지역 한량들이 놀이의 주체가 되었다. 은율탈춤은 황해도 지역에 전승되는 해서탈춤이나 경기도 산대놀이와 마찬가지로, 주로 5월 단오에 펼쳐졌다. 이 시기는 본격적인 모내기가 시작되기 직전으로, 식물의 생장과 풍년을 기원하는 세시적 성격을 지닌다. 은율에서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단옷날 낮에 씨름, 그네뛰기 대회가 벌어지고, 밤에 모닥불을 피우고 밤새 탈춤을 추었다. 이 놀이는 단오를 기점으로 2~3일 진행되었다. 예전에는 사월 초파일, 7월 백중, 그 밖에 은율 군수나 지역 유지의 회갑연에 초청되었으며, 인근 지역에서도 공연을 하였다. 가장 전승이 활발했던 시기는 1900년 전후로 보이며, 일제강점기에는 약화되어 명맥이 유지되는 정도였다. 해방 이후 장용수, 장봉헌에 의해 체계적인 전승이 이루어졌다. 장용수는 공산 치하에서 농악대장으로서 연희를 주도하였는데, 당시 반강제적으로 인민극장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전쟁 이후에 잠시 중단되었다가 월남한 장용수를 중심으로 장봉헌이 힘을 합쳐 1960년대 중반부터 복원하였다. 1976년에 이두현, 김천흥의 채록본이 만들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1978년 2월 무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인천시 남구 숭의 4동 수봉공원 입구에 있는 전수회관에서 체계적인 전승과 후진 양성을 하고 있다.

내용

은율탈춤은 마숲의 산당에서 탈고사로 시작된다. 마숲은 풍수적으로 고양이와 솔개 형상의 기운을 막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된 숲이다. 이곳에 산신을 모시는 산당(山堂)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탈춤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에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탈고사 이후에 길놀이가 시작된다. 이후 탈판에 와서 저녁부터 밤늦게까지 탈춤을 추고, 밤새워 뒷풀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놀이 기금은 유지들이 찬조를 하고, 일부 주민들이 걸립(乞粒)에 참여하여 충당한다. 탈춤은 고구려 탈춤의 전통을 이어받아 장삼을 끼고 춤을 추는 역동적인 춤사위로 이루어져 있다. 장단은 타령장단, 염불장단, 잦은돔부리장단, 돌장단이 주로 사용되며, 반주는 피리, 젓대, 북, 장고, 해금이 중심이다. 그리고 삽입 가요로 꼬뚝이타령, 중타령, 대꼬타령, 병신난봉가, 나니가타령이 있다. 탈춤을 추는 공간은 원형 야외무대이다. 자유롭게 참여하여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일반석은 탈판 주위에 멍석을 깔고 앉으며, 임시로 만든 일부 다락은 자릿세를 별도로 받았다. 특히 상인들에게 다락의 관리를 맡기고, 비용 일부를 부담하게 했다. 그런 점에서 이 탈춤은 지역 상권의 유지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탈은 다른 해서탈과 마찬가지로 진흙본을 바탕으로 석고틀을 만들며, 그 위에 두꺼운 마분지를 여러 겹 붙인다. 그리고 눈과 입을 뚫고, 코와 혹 따위를 도드라지게 나타낸다. 원래 놀이가 끝난 다음에 탈을 태워 버렸으나 1925년 이후에는 보관하여 계속 사용하였다. 탈의 모양은 흰색과 붉은색 계통이 대부분이다. 상쇠, 첫째⋅둘째⋅셋째 양반, 새맥시는 흰색이고, 먹중⋅원숭이⋅최괄이⋅말뚝이는 붉은색이다. 그 밖에 노승은 회색, 할미는 검은색이다. 특히 먹중, 노승, 최괄이, 세양반, 말뚝이의 얼굴에는 3~6개의 둥근 혹이 있다. 혹은 밖에서부터 검정, 흰색, 빨강, 검정색 선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에 황색의 크고 둥근 점으로 되어 있다. 노승은 다른 황해도 지역과 마찬가지로 선이 굵은 붉은 색 입술을 그려서 호색한을 상징한다. 은율탈춤은 제1과장 사자춤, 제2과장 헛목(상좌)춤, 제3과장 목중춤, 제4과장 양반춤, 제5과장 노승춤, 제6과장 영감⋅할미광대춤으로 이루어져 있다. 놀이 초반에 나오는 사자춤과 상좌춤은 축귀의식무(逐鬼儀式舞)로, 탈판과 마을을 정화시키는 의미를 지닌다. 특히 상좌춤은 상좌 한 사람이 흰 장삼에 고깔을 쓰고 의식무인 사방무를 춘다. 이것은 원래 4방위의 정화 의식무에서 출발하는데, 4인 상좌무가 후대에 1~2인으로 줄어든 것이다. 팔먹중춤은 8명의 먹중이 차례로 등장하여 자기소개와 흥풀이 춤을 추는데, 진행 방식은 봉산탈춤과 유사하다. 팔먹중이 함께 흥겨운 춤을 추는 대목은 탈판의 신명을 이끌어 내는 기능을 강하게 드러낸다. 먹중이나 옴중은 노장을 희롱하며, 행위 가 중의 모습에서 벗어나 불교의 세속화를 보여준다. 양반과 하인과의 관련 내용을 보면, 은율탈춤은 말뚝이를 통해 양반에 대한 언어 희롱보다는 신체 공격이 두드러진다. 말뚝이는 첫째 양반의 얼굴을 채찍으로 후려치기도 하고, 둘째 양반 앞에 엉덩이를 대고 방귀를 뀌며, 심지어는 신체 불구인 셋째 양반을 깔아뭉개는 식으로 공격한다. 특히 셋째 양반이 반신불수의 몸에 입과 코가 비뚤어진 비정상적 모습으로 등장해 외형적인 골계를 통해 양반을 비하한다. 따라서 양반과 하인, 말뚝이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보면 하인이 주도하는 유형이다. 노승춤은 중과 소무, 최괄이의 관계에서 중과 소무가 결합하다가 나중에 최괄이가 등장해서 중으로부터 소무를 탈취하여 결합하는 내용이다. 이런 유형은 탈놀이의 중 관련 내용에서 가장 일반화된 것으로 산대놀이, 해서탈춤, 남사당 덧뵈기에 두루 나타난다. 소무가 한 사람 등장하며, 중이 소무를 지키기 위해 최괄이와 필사적으로 싸우지만, 결국 소무를 빼앗기게 된다. 할미 관련 내용은 할미와 영감의 반가운 만남도 잠시, 첩인 뚱딴지가 등장하면서 처첩간 갈등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뚱딴지에 의해 할미가 죽게 되며, 영감의 소생 시도와 무당의 진혼굿 순서로 진행된다. 할미는 허리를 노출하고 엉덩이를 심하게 흔들면서 강한 성적 욕구를 나타낸다. 이것은 생산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생산력을 회복하려는 강한 욕구를 의미한다. 은율에서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중과 관련된 내용에 노승과 새맥시(소무역)의 결합이 나오고, 이에 최괄이(취발이역)가 끼어들어 여자를 탈취한다. 그런데 ‘최괄이가 새맥시 사이에 낳은 아들을 어르는 장면’이 양반 관련 내용의 뒷부분에 나온다. 따라서 일상적인 내용 전개와 조금 다르다.

의의

은율탈춤은 고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 무능하고 권위적인 양반을 풍자하며, 불교를 민중적 시각에서 현실적으로 수용하고, 중의 타락과 파계승 풍자, 가부장제하의 남성의 횡포에 대한 여성의 핍박을 보여준다. 그러나 갈등의 고조에 의한 극단적인 대립보다 일시적인 화해의 양상으로 이끌어 가며 놀이의 성격을 유지한다.은율탈춤은 탈놀이의 일반적 성격과 마찬가지로 신명을 풀어나가는 대동놀이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또한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적 성격을 바탕으로 전승하면서 세시놀이적 성격도 지니고 있다.

참고문헌

은율탈춤대사 (이두현, 국어교육26, 한국국어교육연구회, 1975)韓國의 假面劇 (李杜鉉, 一志社, 1979)황해도탈놀이 (徐淵昊, 悅話堂, 1988)한국 가면극의 유형과 전승원리 연구 (정형호,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