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분재

한자명

盂蘭盆齋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가을(秋) > 7월 > 정일

집필자 정병삼(鄭炳三)
갱신일 2018-11-19

정의

죽은 사람이 사후에 거꾸로 매달리는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구하기 위해, 후손들이 음식을 마련하여 승려들에게 공양하는 것. 우란분재(盂蘭盆齋)는 흔히 백중이라 부르는 음력 7월 15일에 사찰에서 거행하는 불교 행사이다. 날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우란분절(盂蘭盆節)이라고도 한다. 우란분이란 산스크리트어 ‘ullambana’에서 나온 말인데 ‘avalambana’가 전화(轉化)하여 생긴 말로서 거꾸로 매달려 있다[倒懸]는 뜻이다.

유래

우란분재는 불교 경전인 『우란분경(盂蘭盆經)』과 『목련경(目連經)』에서 비롯되었다. 『우란분경』에 의하면, 부처의 십대 제자 중에 신통력이 뛰어난 제자인 목련(目連)은 어머니가 선행을 닦지 못해 아귀도에 떨어져 배가 고파 피골이 상접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목련이 음식을 가져다주었으나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새까맣게 타서 먹을 수가 없었다. 목련이 비통해하며 그 원인을 물으니 부처는 죄업의 뿌리가 너무 깊어 그렇게 된 것이므로, 시방의 여러 승려들의 위신력(威神力)만이 구제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방법으로 모든 승려들이 스스로의 잘못을 점검하는 자자(自恣)를 행하는 7월 15일에, 과거의 7세 부모와 현세의 부모 중에 재앙에 빠진 자가 있으면 밥을 비롯한 백 가지 음식과 다섯 가지 과일을 우란분(盂蘭盆)에 담고 향과 촛불을 켜서 시방의 승려들에게 공양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수행하고 교화하는 모든 승려들이 이 공양을 받으면, 현재의 부모가 무병장수하며 복락을 누리고, 돌아가신 조상은 고통에서 벗어나 하늘에 태어나 끝없는 복락을 누린다고 하였다.

『목련경』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목련의 모친이 살아서 악행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져 고생하는 것을, 목련이 대승경전을 외우고 우란분재를 베풀어 지옥, 아귀, 축생으로부터 차례대로 구제하여 천상에 태어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의식을 7월 15일인 자자일(自恣日)에 행하는 것은, 수행 정진하는 하안거(夏安居) 석 달 동안 보고 듣고 의심하던 일들을 서로 논의하고 잘못을 고백하여 마무리 짓는 마지막 날이어서 승려들에게 공덕을 올리기 좋은 날이기 때문이다.

내용

7월 보름은 흔히 백중이라고 하는데, 백종(百種), 중원(中元) 또는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한다. 백중날 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큰 행사가 열렸다. 불교의 4대 명절을 보통 불탄절(佛誕節), 출가절, 성도절, 열반절로 꼽지만, 이에 못지않게 성행한 것이 우란분절(盂蘭盆節)이었다. 불교가 동아시아 문화권에 들어와 유교의 효(孝) 윤리와 충돌하면서 효를 실천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불교 배척의 중요한 논거가 되어 왔다. 이에 대응하여 불교계에서 설정한 우란분재는 돌아간 부모가 혹 좋지 못한 과보를 받으면 후손들이 이를 천도하여 천상에 태어나도록 한다고 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에 따라 우란분절은 초파일의 불탄절과 함께 불교계의 가장 대표적인 명절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인 양나라 무제 때 동태사에서 처음으로 우란분재를 지낸 이후 역대 제왕들이 우란분재를 설하였다. 이 행사는 7월 15일이 아닌 다른 날에도 행해졌고, 당나라 중기 이후에는 민속화된 행사로 정착되어 승려와 일반인들이 함께 우란분재를 시행하고 공양을 올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우란분재가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고려 이전의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일본에서도 이 재를 신라의 진평왕대부터 시행해 왔으므로 신라시대부터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우란분재가 여러 차례 개설된 것을 찾을 수 있다. 예종 때인 1106년에 궁궐의 장령전(長齡殿)에서 선왕(先王) 숙종의 명복을 빌고 천도를 바라는 우란분재가 거행되었고, 이는 1109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의종 때인 1153년에는 봉원전(奉元殿)에서 개설되었다. 충렬왕(忠烈王) 때인 1285년에는 신효사(神孝寺)에서, 1296년에는 광명사(廣明寺)에서 거행하여 고려 말에는 궁궐에서 사찰로 개최 장소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는데, 공민왕 때인 1356년에는 다시 내전(內殿)에서 우란분재를 개설하였다. 이들은 모두 부모를 비롯한 조상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으로서 7월 15일에 열렸다. 이 밖에 왕실 밖이나 각 사찰에서도 우란분재가 널리 열렸으리라 추측된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초기에는 우란분재가 시행되었다. 『태조실록(太祖實錄)』에는 태조 7년인 1398년 7월에 흥천사(興天寺)에서 우란분재를 설하였다고 하였다. 조선 전기의 풍속과 문물을 전하는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권2에는 “7월 15일을 풍속에서 백종(百種)이라 부르는데, 승가에서는 백 가지의 꽃과 과일을 모아 우란분재를 개설한다. 서울의 비구니 사찰에서 더욱 심하다. 부녀들이 많이 모여들어 쌀과 곡식을 바치고 돌아간 조상의 영혼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 때로는 승려들이 길가에 탁자를 놓고 거행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은 모두 금하게 하여 일부에 그친다.”라고 하여, 이미 15세기 말에 국가의 금령으로 우란분절 행사가 크게 위축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끊이지 않고 중요한 행사로 전승되었다. 그래서 점차 일반화되고 민속화된 우란분절은 각 사찰에서 죽은 이를 위해 재를 지내는 행사로 널리 시행되었다.

우란분재 행사는 오늘날에도 과거와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시행되고 있다. 음력 7월 15일에 사찰에서는 갖은 음식과 과일을 마련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조상의 영혼을 천도하기 위한 의식을 거행한다. 특히 초파일의 불탄절에 연등을 공양하여 부처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에 비하여, 우란분절에는 백등(白燈)을 밝혀 죽은 조상을 추모한다.

오늘날 거행하는 우란분절 법회의 의식은 불탄절 봉축법회와 같은 절차로 행하며, 다만 고혼(孤魂) 영가의 조상을 천도하는 의례가 추가된다. 조상을 천도하는 특성에 맞추어 독경은 천수경(千手徑)이나 지장경(地藏經) 또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가운데 선택해서 시행한다. 요즈음 서울의 한 사찰에서 시행하는 우란분절 행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란분절 법회는 돌아가신 부모의 천도를 위해 승려에게 공양을 올리는 사은법회로 진행한다. 1부는 부처를 모셔 올리는 차례로 관욕(灌浴)과 상단불공축원이 진행된다. 2부는 삼귀의, 보현행원, 청법가, 설법, 우란분공양, 사은사봉독, 불자대중 삼배 순으로 진행된다. 3부는 영가시식과 봉송소전으로 진행된다. 우란분공양에서는 절의 신도회가 마련한 공양물을 절에 주석하는 대중승려에게 올리고, 이어 신도들이 합장하고 사은사를 봉독하며 승려에 대한 공경의 예를 다한다. 우란분공양에 앞서 대중스님들은 우란분경을 함께 봉송한다. 신도들이 마련한 우란분에는 승려들의 내의, 양말, 면 티셔츠, 치약, 비누와 같은 일용용품을 담는다.

의의

오늘날 우란분절에 행하는 우란분재는 생명의 실상, 영혼의 의미, 천도의 공덕을 생각해보는 모임을 마련하는 기회로도 활용되고 있다. 공덕을 쌓는 방법으로 굶주리는 자에게 먹을 것을 보시하고, 병든 사람을 치료하며, 외로운 자를 위로하며, 청정한 수행자를 보호하라고 한 가르침을 현대 사회에서 베풂의 공덕을 쌓는 날로 변환시킨 것이다. 돌아가신 부모와 모든 무주고혼(無主孤魂)의 원한을 풀어 극락왕생하게 할 뿐 아니라, 고통 받는 생명이 질곡에서 해방되어 죽은 자와 산 자가 한마음으로 만나는 행사를 마련하여 우란분절의 참뜻을 새긴다. 수해로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천도재가 열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로하는 민속 행사도 열린다. 복지시설을 찾아 노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봉사하여 효를 실천하며, 이웃에게 따뜻한 베풂의 자리도 마련한다. 고통에서 헤매는 모든 생명들을 해방시키자는 뜻에서 야생동물들을 산으로 돌려보내고 물고기를 놓아주는 방생 행사도 한다. 요즈음의 우란분절은 부처의 위신력과 승려들의 수행력, 신도들의 공덕을 합친 생명 해방의 날로 기념하려는 추세에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目連經, 慵齋叢話, 盂蘭盆經, 太祖實錄, 朝鮮佛敎通史 (李能和, 1918)
盂蘭盆齋와 目漣傳承의 文化史 (史在東 編, 中央人文社, 2000)

우란분재

우란분재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가을(秋) > 7월 > 정일

집필자 정병삼(鄭炳三)
갱신일 2018-11-19

정의

죽은 사람이 사후에 거꾸로 매달리는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구하기 위해, 후손들이 음식을 마련하여 승려들에게 공양하는 것. 우란분재(盂蘭盆齋)는 흔히 백중이라 부르는 음력 7월 15일에 사찰에서 거행하는 불교 행사이다. 날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우란분절(盂蘭盆節)이라고도 한다. 우란분이란 산스크리트어 ‘ullambana’에서 나온 말인데 ‘avalambana’가 전화(轉化)하여 생긴 말로서 거꾸로 매달려 있다[倒懸]는 뜻이다.

유래

우란분재는 불교 경전인 『우란분경(盂蘭盆經)』과 『목련경(目連經)』에서 비롯되었다. 『우란분경』에 의하면, 부처의 십대 제자 중에 신통력이 뛰어난 제자인 목련(目連)은 어머니가 선행을 닦지 못해 아귀도에 떨어져 배가 고파 피골이 상접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목련이 음식을 가져다주었으나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새까맣게 타서 먹을 수가 없었다. 목련이 비통해하며 그 원인을 물으니 부처는 죄업의 뿌리가 너무 깊어 그렇게 된 것이므로, 시방의 여러 승려들의 위신력(威神力)만이 구제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방법으로 모든 승려들이 스스로의 잘못을 점검하는 자자(自恣)를 행하는 7월 15일에, 과거의 7세 부모와 현세의 부모 중에 재앙에 빠진 자가 있으면 밥을 비롯한 백 가지 음식과 다섯 가지 과일을 우란분(盂蘭盆)에 담고 향과 촛불을 켜서 시방의 승려들에게 공양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수행하고 교화하는 모든 승려들이 이 공양을 받으면, 현재의 부모가 무병장수하며 복락을 누리고, 돌아가신 조상은 고통에서 벗어나 하늘에 태어나 끝없는 복락을 누린다고 하였다. 『목련경』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목련의 모친이 살아서 악행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져 고생하는 것을, 목련이 대승경전을 외우고 우란분재를 베풀어 지옥, 아귀, 축생으로부터 차례대로 구제하여 천상에 태어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의식을 7월 15일인 자자일(自恣日)에 행하는 것은, 수행 정진하는 하안거(夏安居) 석 달 동안 보고 듣고 의심하던 일들을 서로 논의하고 잘못을 고백하여 마무리 짓는 마지막 날이어서 승려들에게 공덕을 올리기 좋은 날이기 때문이다.

내용

7월 보름은 흔히 백중이라고 하는데, 백종(百種), 중원(中元) 또는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한다. 백중날 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큰 행사가 열렸다. 불교의 4대 명절을 보통 불탄절(佛誕節), 출가절, 성도절, 열반절로 꼽지만, 이에 못지않게 성행한 것이 우란분절(盂蘭盆節)이었다. 불교가 동아시아 문화권에 들어와 유교의 효(孝) 윤리와 충돌하면서 효를 실천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불교 배척의 중요한 논거가 되어 왔다. 이에 대응하여 불교계에서 설정한 우란분재는 돌아간 부모가 혹 좋지 못한 과보를 받으면 후손들이 이를 천도하여 천상에 태어나도록 한다고 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에 따라 우란분절은 초파일의 불탄절과 함께 불교계의 가장 대표적인 명절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인 양나라 무제 때 동태사에서 처음으로 우란분재를 지낸 이후 역대 제왕들이 우란분재를 설하였다. 이 행사는 7월 15일이 아닌 다른 날에도 행해졌고, 당나라 중기 이후에는 민속화된 행사로 정착되어 승려와 일반인들이 함께 우란분재를 시행하고 공양을 올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우란분재가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고려 이전의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일본에서도 이 재를 신라의 진평왕대부터 시행해 왔으므로 신라시대부터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우란분재가 여러 차례 개설된 것을 찾을 수 있다. 예종 때인 1106년에 궁궐의 장령전(長齡殿)에서 선왕(先王) 숙종의 명복을 빌고 천도를 바라는 우란분재가 거행되었고, 이는 1109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의종 때인 1153년에는 봉원전(奉元殿)에서 개설되었다. 충렬왕(忠烈王) 때인 1285년에는 신효사(神孝寺)에서, 1296년에는 광명사(廣明寺)에서 거행하여 고려 말에는 궁궐에서 사찰로 개최 장소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는데, 공민왕 때인 1356년에는 다시 내전(內殿)에서 우란분재를 개설하였다. 이들은 모두 부모를 비롯한 조상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으로서 7월 15일에 열렸다. 이 밖에 왕실 밖이나 각 사찰에서도 우란분재가 널리 열렸으리라 추측된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초기에는 우란분재가 시행되었다. 『태조실록(太祖實錄)』에는 태조 7년인 1398년 7월에 흥천사(興天寺)에서 우란분재를 설하였다고 하였다. 조선 전기의 풍속과 문물을 전하는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권2에는 “7월 15일을 풍속에서 백종(百種)이라 부르는데, 승가에서는 백 가지의 꽃과 과일을 모아 우란분재를 개설한다. 서울의 비구니 사찰에서 더욱 심하다. 부녀들이 많이 모여들어 쌀과 곡식을 바치고 돌아간 조상의 영혼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 때로는 승려들이 길가에 탁자를 놓고 거행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은 모두 금하게 하여 일부에 그친다.”라고 하여, 이미 15세기 말에 국가의 금령으로 우란분절 행사가 크게 위축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끊이지 않고 중요한 행사로 전승되었다. 그래서 점차 일반화되고 민속화된 우란분절은 각 사찰에서 죽은 이를 위해 재를 지내는 행사로 널리 시행되었다. 우란분재 행사는 오늘날에도 과거와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시행되고 있다. 음력 7월 15일에 사찰에서는 갖은 음식과 과일을 마련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조상의 영혼을 천도하기 위한 의식을 거행한다. 특히 초파일의 불탄절에 연등을 공양하여 부처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에 비하여, 우란분절에는 백등(白燈)을 밝혀 죽은 조상을 추모한다. 오늘날 거행하는 우란분절 법회의 의식은 불탄절 봉축법회와 같은 절차로 행하며, 다만 고혼(孤魂) 영가의 조상을 천도하는 의례가 추가된다. 조상을 천도하는 특성에 맞추어 독경은 천수경(千手徑)이나 지장경(地藏經) 또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가운데 선택해서 시행한다. 요즈음 서울의 한 사찰에서 시행하는 우란분절 행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란분절 법회는 돌아가신 부모의 천도를 위해 승려에게 공양을 올리는 사은법회로 진행한다. 1부는 부처를 모셔 올리는 차례로 관욕(灌浴)과 상단불공축원이 진행된다. 2부는 삼귀의, 보현행원, 청법가, 설법, 우란분공양, 사은사봉독, 불자대중 삼배 순으로 진행된다. 3부는 영가시식과 봉송소전으로 진행된다. 우란분공양에서는 절의 신도회가 마련한 공양물을 절에 주석하는 대중승려에게 올리고, 이어 신도들이 합장하고 사은사를 봉독하며 승려에 대한 공경의 예를 다한다. 우란분공양에 앞서 대중스님들은 우란분경을 함께 봉송한다. 신도들이 마련한 우란분에는 승려들의 내의, 양말, 면 티셔츠, 치약, 비누와 같은 일용용품을 담는다.

의의

오늘날 우란분절에 행하는 우란분재는 생명의 실상, 영혼의 의미, 천도의 공덕을 생각해보는 모임을 마련하는 기회로도 활용되고 있다. 공덕을 쌓는 방법으로 굶주리는 자에게 먹을 것을 보시하고, 병든 사람을 치료하며, 외로운 자를 위로하며, 청정한 수행자를 보호하라고 한 가르침을 현대 사회에서 베풂의 공덕을 쌓는 날로 변환시킨 것이다. 돌아가신 부모와 모든 무주고혼(無主孤魂)의 원한을 풀어 극락왕생하게 할 뿐 아니라, 고통 받는 생명이 질곡에서 해방되어 죽은 자와 산 자가 한마음으로 만나는 행사를 마련하여 우란분절의 참뜻을 새긴다. 수해로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천도재가 열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로하는 민속 행사도 열린다. 복지시설을 찾아 노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봉사하여 효를 실천하며, 이웃에게 따뜻한 베풂의 자리도 마련한다. 고통에서 헤매는 모든 생명들을 해방시키자는 뜻에서 야생동물들을 산으로 돌려보내고 물고기를 놓아주는 방생 행사도 한다. 요즈음의 우란분절은 부처의 위신력과 승려들의 수행력, 신도들의 공덕을 합친 생명 해방의 날로 기념하려는 추세에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目連經, 慵齋叢話, 盂蘭盆經, 太祖實錄, 朝鮮佛敎通史 (李能和, 1918)盂蘭盆齋와 目漣傳承의 文化史 (史在東 編, 中央人文社,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