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쇠머리대기(靈山-)

한자명

靈山-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정일

집필자 배도식(裵桃植)

정의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서 쇠머리란 도구를 가지고 행하는 대보름 놀이.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영산면에서는 동부 마을과 서부 마을로 나누어서 서까래를 엮고 새끼로 묶어 쇠머리 모양의 조형물을 만들었다. 이를 마을의 힘센 젊은이들이 메고 공터에서 서로 부딪히게 하여 부서지거나 땅에 먼저 내려앉는 쪽이 싸움에 진 것으로 판정했는데, 이를 ‘쇠머리대기’라 했다. 이 놀이는 지금도 전승되고 있다.

어원 및 이칭

쇠머리대기란 쇠머리처럼 생긴 목조 조형물들을 서로 부딪치며 노는 놀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 명칭이 고정되기 전에는 ‘나무소싸움’이란 명칭을 써 왔다. 일제강점기 때 발간되었던 『조선의 향토오락(朝鮮の鄕土娛樂)』에는 ‘목마경쟁(木馬競爭, 목마싸움)’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1960년대에는 목우희(木牛戱) 혹은 목우전(木牛戰)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지역에서는 나무쇠싸움·소나무싸움 등으로 일정한 이름 없이 불러오다가 1969년 이 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부터 쇠머리대기란 이름으로 고정되었다.

유래

이 놀이의 유래에는 몇 가지 이설이 있다. 첫째, 영산의 뒷산이 마치 성난 황소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보고 싸울 듯한 기세로 서 있는데, 이 산들의 모습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이 설을 ‘산살설(山煞說, 山殺說)’이라 하는데, 산에 살기(煞氣)가 서렸다는 의미 혹은 산들끼리 살기(殺氣)를 뻗치고 있다는 뜻에서 이런 말이 생겼다는 것이다. 영산의 진산인 영축산(靈築山, 靈鷲山)과 그 옆에 마주 서 있는 작약산(勺藥山, 현지 사람들은 함박산으로 많이 부른다.)이 서로 겨루는 형상이어서 여기서 내뿜는 살기를 풀어 주어야 고을이 편안하다는 고로(古老)들의 말에 따라 나무로 얽은 쇠머리를 만들어 싸움을 붙였다는 것이다. 둘째, 옛날 이 고을 동헌이 앉은 방향이 축좌(丑座)여서 소가 억눌림을 당하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지살(地煞, 地殺)을 풀어주지 않으면 소가 잘 되지 않고, 따라서 농사를 잘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소를 활기차게 움직이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나무로 소를 만들어 싸움을 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살설(地煞說, 地殺說)이다. 셋째, ‘이 싸움놀이’에서 파생되어 생성되었다는 설이다. 영산 줄당기기의 기능보유자 조성국(曹星國)의 의하면, ‘이싸움’이란 영산에서 오래 전부터 행해 오던 ‘골목줄싸움놀이’라 한다. 이 놀이를 할 때 젊은이들이 줄의 머리 아래에 서까래를 받쳐 메고 나와서 상대방의 줄과 부딪힌 데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그 밖에 조선시대 젊은이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쇠머리를 만들어 메고, 높은 성문이나 성벽을 공격하기 위한 군사훈련에서 시작되었다는 설과 목우(牧牛)를 장려하기 위하여 쇠머리를 만들어 논 것이 대동놀이로 확대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 놀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문헌의 기록이 없어서 그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내용

이 놀이는 정월 대보름날 낮에 영산의 교리 마을 앞 논벌에서 시행되었다. 이 장소에서 실시한 근거를 『영산 줄다리기 쇠머리대기』에서는 교리 앞의 논벌은 영산의 진산인 영축산과 함박산이 마주쳐서 그 골짜기의 물이 흘러내리는 부분에 위치하여 두 산의 기운을 받는 지점이고 또 그 자리에서 두 산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장소여서 두 산의 살을 풀어 줄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쇠머리대기가 실시되는 때에는 영산의 주민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인근의 고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놀이 구경도 하고, 음식을 사먹고, 막걸리도 마시며 축제의 기분을 만끽한다.

옛날에는 정월 대보름의 놀이로 행하여 오던 것을 1961년부터 3·1절에 행하게 되었다. 이 고장이 기미 3·1 독립운동 때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므로 조상들이 피 흘려 싸웠던 애국적인 장거를 기념하기 위해 ‘3·1 민속문화제’를 열고, 이때에 호국 영령에게 제사지내기, 영산의 고유 민속놀이인 쇠머리대기, 줄당기기, 서낭대싸움놀이, 진잡이놀이, 문호장굿놀이 등을 모두 행하기로 했다.

쇠머리대기를 하려면 쇠머리를 만들어야 한다. 쇠머리를 만드는 데에는 서까래와 새끼줄이 필요하다. 길이 4~5미터, 지름이 10~15센티미터 되는 소나무 서까래 30~40개가 필요하다. 쇠머리의 앞부분 기단이 되는 나무는 지름이 약 30센티미터에 길이가 약 4미터 정도 되는 굵은 나무를 쓴다. 이 나무는 쇠머리 전체를 지탱하는 받침대 구실을 하면서 상대와 부딪칠 때는 강력한 공격용의 선봉인 동시에 상대방 공격을 저지하는 버팀목 구실을 한다. 이 기단목의 길이가 짧거나 굵기가 적당하지 않으면 볼품없는 쇠머리가 되고 그 기능도 잘 해내지 못하고 만다.

옛날에 쇠머리를 만들기 위해 산에 벌목하러 갈 때면 풍물잡이들을 앞세우고 가서 간단히 고사를 지냈다. 요즘은 함부로 입산할 수도 없고 벌목 허가를 받을 수도 없으므로 나무를 구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옛날에는 반드시 생소나무를 사용하여 쇠머리를 만드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었다. 새로 베어온 나무여야 신성감이 있고, 맞부딪혔을 때 탄력성도 있어서 위험성이 적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생나무를 벌목할 수 없으므로 지난해에 썼던 나무들을 모아 두었다가 다음해에 쓰기도 한다.

쇠머리를 만드는 시기는 쇠머리대기 행사를 하는 하루 전날, 동부는 영산 시장 북편의 공터에서 만들고, 서부는 연지 못이 있는 서리 동사무소 앞마당에서 만든다. 옛날에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만들었고, 요즘은 양력으로 3월 1일 행사를 치르므로 2월 28일에 만든다. 쇠머리를 만드는 작업은 손질이 많이 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간단히 고사를 지낸 후 막걸리를 마셔가며 빠르게 일을 한다. 쇠머리의 뼈대가 되는 나무를 얽어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서까래에다 일일이 새끼를 감아서 표면을 부드럽게 만든다. 격돌할 때 완충작용을 하여 사람이 다치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 만들었던 당시의 쇠머리 크기는 폭 4미터, 길이 5미터, 높이 3.5미터였고, 무게는 1.5톤 정도였다. 쇠머리가 만들어지면 양 진영에서는 몇 명의 장정들이 쇠머리를 둘러싸고 지킨다. 혹 누가 나쁜 생각으로 쇠머리를 훼손한다든지 부정 탈 일을 하면 재수가 없어 승리하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결전의 날이 밝으면 양쪽 진영에서는 풍물패를 앞세우고 풍악을 신나게 울리며 동네를 돈다. 쇠머리대기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뜻도 되지만, 초장부터 기세를 높여 승리를 하겠다는 의도에서이다. 각 진영의 대표가 되는 힘센 장정이 서낭대를 앞세우고 소장(小將)·중장(中將)·대장(大將)의 집으로 간다. 이들은 서낭대 앞으로 와서 술을 붓고 경건히 절을 올린다. 오늘의 승리를 다짐하는 뜻에서이다. 그리고 대장집에서는 음식을 내어 장정들을 먹인다. 그리고 사람들은 서낭대와 풍물패를 앞세우고 쇠머리가 버티고 앉아 있는 마을의 광장으로 간다.

쇠머리 앞에는 벌써 고사 제물이 준비되어 있다. 주과포혜에다 고기와 생선 그리고 큼직한 떡시루가 통째로 풍성하게 놓여 있고 돼지머리도 있다. 촛불을 켜 놓고 세 대장이 나란히 서서 경건하게 고사를 올린다. 축문을 읽고, 오늘의 결전에 반드시 이기게 해 달라고, 출전하는 장정들이 다치지 않게 보살펴 달라고 간청을 올린다. 그리고 마을이 무병하고 안과태평하며, 농사가 잘 되어 올해도 근심걱정 없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고사가 끝나면 50여 명의 장정들이 바지저고리 차림에 머리에는 수건을 동여매고 쇠머리를 멘다. 쇠머리 앞에 대장과 중장, 소장이 올라타고 그들은 은빛 나는 긴 칼을 쳐들고 사기를 돋운다. 출전할 때는 쇠머리의 앞에 행진할 차례대로 기수들이 도열한다. 쇠머리대기를 하기 전에 서낭대 싸움과 진잡이 놀이를 먼저 시킨다. 이들 놀이는 쇠머리대기의 전초전으로 사기를 돋우고 관중들을 흥분시키는 데에 한몫을 한다.

이윽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쇠머리가 출전한다. 양편의 쇠머리는 양 진영 풍물패의 뒤를 따라 광장을 몇 바퀴 돌면서 기세 싸움을 하고, 관중들은 서로 자기편이 이기라고 목청을 다하여 응원을 한다. 이때 쇠머리꾼들은 상대방을 야유하기 위한 노래를 주고받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앞의 가사는 메김소리이고, 뒤의 가사는 받는소리이다.

오왜 증산아, 오왜 증산아, 얼시구 절시구. 오왜 증산아.붙어 보자 붙어보자. 오왜 증산아. 동(서)부는 안 될끼다, 오왜 증산아. 서(동)부는 사대부라, 오왜 증산아. 동(서)부는 물개똥, 오왜 증산아. 동(서)부 쇠머리 물개똥, 오왜 증산아. 서(동)부 쇠머리 꽃이 핀다, 오왜 증산아.

이렇게 외쳐대며 광장을 몇 바퀴 돌면서 붙을 듯, 붙을 듯하다가 용하게 비켜간다. 관중들은 손에 땀을 쥔다. 풍물소리는 격렬하게 울려 퍼진다. 사람들의 함성 소리도 한껏 높다. 각 진영의 쇠머리 위에 타고 지휘하는 대장들은 연신 칼을 흔들어 대며 지휘를 한다. 그러나 거대한 쇠머리는 잘 움직여 주지 않는다. 이윽고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나고, 한쪽 쇠머리가 기울어진다. 이긴 쪽의 대장들이 진 쪽의 쇠머리로 건너가서 타고 더욱 눌러 댄다.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이다. 쇠머리가 밀려나거나 넘어지거나 먼저 지상에 닿게 되는 쪽이 진다.

이 지역 고로들의 말에 의하면 40~50년 전에 만들었던 쇠머리는 지금 크기의 두 배는 되었다 한다. 그래서 그때는 쇠머리를 메는 사람의 수도 한쪽에 약 100명 정도는 되었다. 지금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았던 때의 크기를 기준으로 하여 만들고 있는데, 그때보다 몸체의 길이가 약간 길어졌다. 그래서 보기도 좋을 뿐 아니라 안정감이 있어 공격을 당해도 쉽게 밀리지 않으므로 잘 넘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위험이 좀 줄어든 것이다.

의의

영산의 쇠머리대기는 영산에서만 놀았던 놀이이다. 쇠머리란 거대한 나무로 된 조형물을 만들어 동·서부 마을이 격돌하는 경기로서 지역민의 관심이 대단하다. 이런 놀이를 통하여 사람들은 집단적인 재미를 맛보고, 주민끼리 화합 단결하며, 그해의 풍농을 기원했다. 그리고 열심히 농사일에 임할 수 있도록 활력소를 충전하는 계기로 삼았다. 쇠머리는 안동의 차전놀이에서 사용하는 동채보다 크기 때문에 놀이에 사용하는 기구도 우리나라 민속놀이에서는 가장 큰 것이다. 따라서 이 조형물이 부딪쳐서 넘어질 때는 위험성도 크다. 그러나 아직 인명 피해는 한 번도 없었다. 나무에 일일이 새끼줄을 감아 위험성을 줄이고, 놀이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이 놀이를 행할 때는 쇠머리를 메는 쇠머리꾼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주민이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참여하여 함께 응원하고, 막걸리도 마시고 국밥도 먹으면서 즐기고 논다는 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곳 사람들은 놀이의 결판이 나기 전까지는 동·서부로 갈려 적대감을 격렬히 보이기는 하나, 일단 승부가 결정되면 화합의 마당에서 다같이 하나가 되어 주민 모두가 공동체임을 확인한다. 쇠머리대기는 안동의 차전놀이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차전놀이는 ‘동채’라는 수레를 만들어 사용하고, 쇠머리대기는 나무를 얽어 쇠머리를 만들어 싸움을 붙이는 것이 다르다.

정월 영산쇠머리대기

참고문헌

朝鮮の鄕土娛樂 (村山智順 著, 朝鮮總督府, 1941), 靈山 줄다리기 쇠머리대기 (曹星國, 素民苑, 1978), 韓國民俗大觀5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82), 韓國 民俗의 原形 (裵挑植, 集文堂, 1995)

영산쇠머리대기

영산쇠머리대기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정일

집필자 배도식(裵桃植)

정의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서 쇠머리란 도구를 가지고 행하는 대보름 놀이.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영산면에서는 동부 마을과 서부 마을로 나누어서 서까래를 엮고 새끼로 묶어 쇠머리 모양의 조형물을 만들었다. 이를 마을의 힘센 젊은이들이 메고 공터에서 서로 부딪히게 하여 부서지거나 땅에 먼저 내려앉는 쪽이 싸움에 진 것으로 판정했는데, 이를 ‘쇠머리대기’라 했다. 이 놀이는 지금도 전승되고 있다.

어원 및 이칭

쇠머리대기란 쇠머리처럼 생긴 목조 조형물들을 서로 부딪치며 노는 놀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 명칭이 고정되기 전에는 ‘나무소싸움’이란 명칭을 써 왔다. 일제강점기 때 발간되었던 『조선의 향토오락(朝鮮の鄕土娛樂)』에는 ‘목마경쟁(木馬競爭, 목마싸움)’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1960년대에는 목우희(木牛戱) 혹은 목우전(木牛戰)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지역에서는 나무쇠싸움·소나무싸움 등으로 일정한 이름 없이 불러오다가 1969년 이 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부터 쇠머리대기란 이름으로 고정되었다.

유래

이 놀이의 유래에는 몇 가지 이설이 있다. 첫째, 영산의 뒷산이 마치 성난 황소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보고 싸울 듯한 기세로 서 있는데, 이 산들의 모습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이 설을 ‘산살설(山煞說, 山殺說)’이라 하는데, 산에 살기(煞氣)가 서렸다는 의미 혹은 산들끼리 살기(殺氣)를 뻗치고 있다는 뜻에서 이런 말이 생겼다는 것이다. 영산의 진산인 영축산(靈築山, 靈鷲山)과 그 옆에 마주 서 있는 작약산(勺藥山, 현지 사람들은 함박산으로 많이 부른다.)이 서로 겨루는 형상이어서 여기서 내뿜는 살기를 풀어 주어야 고을이 편안하다는 고로(古老)들의 말에 따라 나무로 얽은 쇠머리를 만들어 싸움을 붙였다는 것이다. 둘째, 옛날 이 고을 동헌이 앉은 방향이 축좌(丑座)여서 소가 억눌림을 당하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지살(地煞, 地殺)을 풀어주지 않으면 소가 잘 되지 않고, 따라서 농사를 잘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소를 활기차게 움직이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나무로 소를 만들어 싸움을 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살설(地煞說, 地殺說)이다. 셋째, ‘이 싸움놀이’에서 파생되어 생성되었다는 설이다. 영산 줄당기기의 기능보유자 조성국(曹星國)의 의하면, ‘이싸움’이란 영산에서 오래 전부터 행해 오던 ‘골목줄싸움놀이’라 한다. 이 놀이를 할 때 젊은이들이 줄의 머리 아래에 서까래를 받쳐 메고 나와서 상대방의 줄과 부딪힌 데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그 밖에 조선시대 젊은이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쇠머리를 만들어 메고, 높은 성문이나 성벽을 공격하기 위한 군사훈련에서 시작되었다는 설과 목우(牧牛)를 장려하기 위하여 쇠머리를 만들어 논 것이 대동놀이로 확대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 놀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문헌의 기록이 없어서 그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내용

이 놀이는 정월 대보름날 낮에 영산의 교리 마을 앞 논벌에서 시행되었다. 이 장소에서 실시한 근거를 『영산 줄다리기 쇠머리대기』에서는 교리 앞의 논벌은 영산의 진산인 영축산과 함박산이 마주쳐서 그 골짜기의 물이 흘러내리는 부분에 위치하여 두 산의 기운을 받는 지점이고 또 그 자리에서 두 산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장소여서 두 산의 살을 풀어 줄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쇠머리대기가 실시되는 때에는 영산의 주민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인근의 고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놀이 구경도 하고, 음식을 사먹고, 막걸리도 마시며 축제의 기분을 만끽한다. 옛날에는 정월 대보름의 놀이로 행하여 오던 것을 1961년부터 3·1절에 행하게 되었다. 이 고장이 기미 3·1 독립운동 때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므로 조상들이 피 흘려 싸웠던 애국적인 장거를 기념하기 위해 ‘3·1 민속문화제’를 열고, 이때에 호국 영령에게 제사지내기, 영산의 고유 민속놀이인 쇠머리대기, 줄당기기, 서낭대싸움놀이, 진잡이놀이, 문호장굿놀이 등을 모두 행하기로 했다. 쇠머리대기를 하려면 쇠머리를 만들어야 한다. 쇠머리를 만드는 데에는 서까래와 새끼줄이 필요하다. 길이 4~5미터, 지름이 10~15센티미터 되는 소나무 서까래 30~40개가 필요하다. 쇠머리의 앞부분 기단이 되는 나무는 지름이 약 30센티미터에 길이가 약 4미터 정도 되는 굵은 나무를 쓴다. 이 나무는 쇠머리 전체를 지탱하는 받침대 구실을 하면서 상대와 부딪칠 때는 강력한 공격용의 선봉인 동시에 상대방 공격을 저지하는 버팀목 구실을 한다. 이 기단목의 길이가 짧거나 굵기가 적당하지 않으면 볼품없는 쇠머리가 되고 그 기능도 잘 해내지 못하고 만다. 옛날에 쇠머리를 만들기 위해 산에 벌목하러 갈 때면 풍물잡이들을 앞세우고 가서 간단히 고사를 지냈다. 요즘은 함부로 입산할 수도 없고 벌목 허가를 받을 수도 없으므로 나무를 구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옛날에는 반드시 생소나무를 사용하여 쇠머리를 만드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었다. 새로 베어온 나무여야 신성감이 있고, 맞부딪혔을 때 탄력성도 있어서 위험성이 적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생나무를 벌목할 수 없으므로 지난해에 썼던 나무들을 모아 두었다가 다음해에 쓰기도 한다. 쇠머리를 만드는 시기는 쇠머리대기 행사를 하는 하루 전날, 동부는 영산 시장 북편의 공터에서 만들고, 서부는 연지 못이 있는 서리 동사무소 앞마당에서 만든다. 옛날에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만들었고, 요즘은 양력으로 3월 1일 행사를 치르므로 2월 28일에 만든다. 쇠머리를 만드는 작업은 손질이 많이 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간단히 고사를 지낸 후 막걸리를 마셔가며 빠르게 일을 한다. 쇠머리의 뼈대가 되는 나무를 얽어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서까래에다 일일이 새끼를 감아서 표면을 부드럽게 만든다. 격돌할 때 완충작용을 하여 사람이 다치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 만들었던 당시의 쇠머리 크기는 폭 4미터, 길이 5미터, 높이 3.5미터였고, 무게는 1.5톤 정도였다. 쇠머리가 만들어지면 양 진영에서는 몇 명의 장정들이 쇠머리를 둘러싸고 지킨다. 혹 누가 나쁜 생각으로 쇠머리를 훼손한다든지 부정 탈 일을 하면 재수가 없어 승리하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결전의 날이 밝으면 양쪽 진영에서는 풍물패를 앞세우고 풍악을 신나게 울리며 동네를 돈다. 쇠머리대기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뜻도 되지만, 초장부터 기세를 높여 승리를 하겠다는 의도에서이다. 각 진영의 대표가 되는 힘센 장정이 서낭대를 앞세우고 소장(小將)·중장(中將)·대장(大將)의 집으로 간다. 이들은 서낭대 앞으로 와서 술을 붓고 경건히 절을 올린다. 오늘의 승리를 다짐하는 뜻에서이다. 그리고 대장집에서는 음식을 내어 장정들을 먹인다. 그리고 사람들은 서낭대와 풍물패를 앞세우고 쇠머리가 버티고 앉아 있는 마을의 광장으로 간다. 쇠머리 앞에는 벌써 고사 제물이 준비되어 있다. 주과포혜에다 고기와 생선 그리고 큼직한 떡시루가 통째로 풍성하게 놓여 있고 돼지머리도 있다. 촛불을 켜 놓고 세 대장이 나란히 서서 경건하게 고사를 올린다. 축문을 읽고, 오늘의 결전에 반드시 이기게 해 달라고, 출전하는 장정들이 다치지 않게 보살펴 달라고 간청을 올린다. 그리고 마을이 무병하고 안과태평하며, 농사가 잘 되어 올해도 근심걱정 없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고사가 끝나면 50여 명의 장정들이 바지저고리 차림에 머리에는 수건을 동여매고 쇠머리를 멘다. 쇠머리 앞에 대장과 중장, 소장이 올라타고 그들은 은빛 나는 긴 칼을 쳐들고 사기를 돋운다. 출전할 때는 쇠머리의 앞에 행진할 차례대로 기수들이 도열한다. 쇠머리대기를 하기 전에 서낭대 싸움과 진잡이 놀이를 먼저 시킨다. 이들 놀이는 쇠머리대기의 전초전으로 사기를 돋우고 관중들을 흥분시키는 데에 한몫을 한다. 이윽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쇠머리가 출전한다. 양편의 쇠머리는 양 진영 풍물패의 뒤를 따라 광장을 몇 바퀴 돌면서 기세 싸움을 하고, 관중들은 서로 자기편이 이기라고 목청을 다하여 응원을 한다. 이때 쇠머리꾼들은 상대방을 야유하기 위한 노래를 주고받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앞의 가사는 메김소리이고, 뒤의 가사는 받는소리이다. 오왜 증산아, 오왜 증산아, 얼시구 절시구. 오왜 증산아.붙어 보자 붙어보자. 오왜 증산아. 동(서)부는 안 될끼다, 오왜 증산아. 서(동)부는 사대부라, 오왜 증산아. 동(서)부는 물개똥, 오왜 증산아. 동(서)부 쇠머리 물개똥, 오왜 증산아. 서(동)부 쇠머리 꽃이 핀다, 오왜 증산아. 이렇게 외쳐대며 광장을 몇 바퀴 돌면서 붙을 듯, 붙을 듯하다가 용하게 비켜간다. 관중들은 손에 땀을 쥔다. 풍물소리는 격렬하게 울려 퍼진다. 사람들의 함성 소리도 한껏 높다. 각 진영의 쇠머리 위에 타고 지휘하는 대장들은 연신 칼을 흔들어 대며 지휘를 한다. 그러나 거대한 쇠머리는 잘 움직여 주지 않는다. 이윽고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나고, 한쪽 쇠머리가 기울어진다. 이긴 쪽의 대장들이 진 쪽의 쇠머리로 건너가서 타고 더욱 눌러 댄다.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이다. 쇠머리가 밀려나거나 넘어지거나 먼저 지상에 닿게 되는 쪽이 진다. 이 지역 고로들의 말에 의하면 40~50년 전에 만들었던 쇠머리는 지금 크기의 두 배는 되었다 한다. 그래서 그때는 쇠머리를 메는 사람의 수도 한쪽에 약 100명 정도는 되었다. 지금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았던 때의 크기를 기준으로 하여 만들고 있는데, 그때보다 몸체의 길이가 약간 길어졌다. 그래서 보기도 좋을 뿐 아니라 안정감이 있어 공격을 당해도 쉽게 밀리지 않으므로 잘 넘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위험이 좀 줄어든 것이다.

의의

영산의 쇠머리대기는 영산에서만 놀았던 놀이이다. 쇠머리란 거대한 나무로 된 조형물을 만들어 동·서부 마을이 격돌하는 경기로서 지역민의 관심이 대단하다. 이런 놀이를 통하여 사람들은 집단적인 재미를 맛보고, 주민끼리 화합 단결하며, 그해의 풍농을 기원했다. 그리고 열심히 농사일에 임할 수 있도록 활력소를 충전하는 계기로 삼았다. 쇠머리는 안동의 차전놀이에서 사용하는 동채보다 크기 때문에 놀이에 사용하는 기구도 우리나라 민속놀이에서는 가장 큰 것이다. 따라서 이 조형물이 부딪쳐서 넘어질 때는 위험성도 크다. 그러나 아직 인명 피해는 한 번도 없었다. 나무에 일일이 새끼줄을 감아 위험성을 줄이고, 놀이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이 놀이를 행할 때는 쇠머리를 메는 쇠머리꾼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주민이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참여하여 함께 응원하고, 막걸리도 마시고 국밥도 먹으면서 즐기고 논다는 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곳 사람들은 놀이의 결판이 나기 전까지는 동·서부로 갈려 적대감을 격렬히 보이기는 하나, 일단 승부가 결정되면 화합의 마당에서 다같이 하나가 되어 주민 모두가 공동체임을 확인한다. 쇠머리대기는 안동의 차전놀이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차전놀이는 ‘동채’라는 수레를 만들어 사용하고, 쇠머리대기는 나무를 얽어 쇠머리를 만들어 싸움을 붙이는 것이 다르다.

참고문헌

朝鮮の鄕土娛樂 (村山智順 著, 朝鮮總督府, 1941)靈山 줄다리기 쇠머리대기 (曹星國, 素民苑, 1978)韓國民俗大觀5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82)韓國 民俗의 原形 (裵挑植, 集文堂,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