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등회(燃燈會)

한자명

燃燈會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여름(夏) > 4월 > 정일

집필자 안지원(安智源)

정의

등불을 밝혀 석가의 탄신을 축하하는 의식. 연등(燃燈)은 불교문화권에서 널리 성행해 온 불교의식이다. 불교에서는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을 세상을 밝히는 지혜에 비유하고 석가 생존 시부터 부처님 앞에 불을 밝히는 연등 공양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유래

연등 공양은 브라만교의 신들에게 물, 향, 꽃, 등불, 음식을 바치던 인도 전래의 풍습을 불교가 수용한 것으로, 불교 발생 초기부터 불교행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연등 공양의 공덕에 대하여는 초기 소승경전인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부터 이야기되었으며, 대승경전들이 성립되면서 연등은 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하나인 공덕바라밀을 실천하는 한 방편으로서 확고히 자리하게 되었다.

『화엄경(華嚴經)』에는 등불의 종류와 공덕 내용이 보다 자세히 실려 있고, 연등 공덕만을 단독으로 다루어 연등 공양의 전거 경전으로 일컬어지는 『불설시등공덕경(佛說施燈功德經)』도 성립되었다. 이 경전은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연등을 보시하는 공덕에 대하여 설법하신 내용을 담고 있다. 불탑묘(佛塔墓)에 연등하면 그것이 작은 심지불이라도 복덕은 대단히 커서 임종 시에 네 가지 광명을 보게 되며, 죽어서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나 다섯 가지 청정(淸淨)을 얻게 되고, 부처님 앞에 다른 사람이 보시한 등불을 보고 신심이 청정해져 합장하고 기뻐하면 이것만으로도 여덟 가지 증상법(增上法)을 얻게 된다고 한다.

또한 『현우경(賢愚經)』의 가난한 여인 난타가 지극한 정성으로 바친 초라한 연등 하나가 왕이 바친 셀 수 없이 많은 화려한 연등들이 세찬 비바람에 다 꺼진 후에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정성스러운 마음에서 우러난 연등이 얼마나 큰 공덕인지를 강조하는 예로 흔히 인용되고 있다. 5세기 초 인도로 구법(求法)을 떠났던 중국 동진(東晋)의 승려 법현(法顯)은 중인도 마가다국에서 4월 8일 석가탄신일에 불·보살상 앞에서 밤새도록 연등과 기악을 공양하는 축하행사를 열고 있었다고 전한다.

연등은 처음에는 여러 가지 공양물(꽃, 향, 의복, 장식 깃발, 기악 등) 가운데 하나였으나, 대승불교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점차 불교행사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그 비중이 더 커지게 되었다. 불교행사는 종교의례 기능만이 아니라, 집단의 연대감을 고양하는 데도 효과가 있기 때문에 국가나 지역의 유력자들은 대규모 불교행사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역사

{우리나라 최초의 연등행사} 우리나라의 연등 행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통일신라시대 경문왕(景文王) 6년(866) 정월 보름에 왕이 황룡사(皇龍寺)로 행차하여 등불들을 구경하고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사이다. 그런데 통일신라시대 연등행사는 중국 상원연등회의 영향으로 석가탄신일이 아닌 정월 대보름인 상원(上元)에 개최되었다. 중국에서 도교 교단은 불교의 성행에 자극받아 중국 전래 세시풍속인 1월과 7월의 농경제례를 상원과 중원으로 체계화하여 도교 행사일로 정하였다. 도교의 상원행사에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정월 농경제례의 연등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불교의 연등 공덕 신앙과 연결되어 상원연등회라는 불교행사가 생겨나게 되었다. 상원연등회는 당나라 현종(玄宗) 때 정례적인 국가 공식 불교행사로 선포되었고, 송대(宋代)에 이르러 민간의 절기 풍속으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상원연등회 풍속이 신라로 전파되어 정월 보름에 국왕이 절로 행차하여 연등행사를 하였던 것이다.

{상원연등회의 역사}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王建)은 바로 이러한 연등행사의 전례를 수용하여 상원연등회를 국가적 차원의 불교행사로 법제화하였다. 그가 상원연등회를 주목한 이유는 그것이 모든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축제와 같은 행사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상원연등회는 정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개설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성내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그리고 궁성대로와 성문들을 오색비단으로 장식하여 등불을 밝히고 궁성의 담을 따라서 등불을 쭉 매달아 야간에도 궁성 안은 대낮 같았다. 연등을 하는 저녁이라는 의미로 등석(燈夕)이라 부르는 보름날 밤 상원연등회 행사가 절정에 이르렀다. 국왕은 왕족과 백관들을 데리고 절로 행차하여 분향한 후 궁성 정문의 누대에 올라 수만 개의 연등이 밝혀져 있는 장관을 구경하고 주연을 베풀었다. 이때 등석을 축하하는 시와 문장을 짓는 것이 풍류가 되어 유명한 문인들과 관리 대부분이 등석시부(燈夕詩賦)를 남겼다.

백성들도 절에 가서 분향하고 그해의 복을 빌었으며 궁성 문루 앞 가설무대에서 공연되는 음악과 산대놀이, 백희(百戱)를 구경하기도 하고, 상원연등회 특수를 겨냥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상인들이 갖가지 특산품과 고금의 진기한 물건들을 벌여놓은 임시 개설 시장인 등시(燈市)를 돌아다니면서 밤새도록 즐겼다. 이처럼 상원연등회는 모든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행사를 제공하였다.

신라 말 각 지방에 할거한 호족들 가운데 하나였던 태조 왕건은 적대의식을 지양하고 겸양지덕을 전략으로 하여 다른 호족들을 포섭하였으며, 세금 감면 등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책을 강구하여 민심을 고려 쪽으로 유도하여 나갔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는 부처와 산천신에 대한 신앙이 매우 성행하고 있었으므로, 이처럼 민심과 밀착된 불교를 문화적 공통분모로 적극 활용하여 지역과 계층의 분열을 극복하고, 고려 왕실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이 모두 함께 즐길 수 있는 상원연등회가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완벽히 구현해 줄 수 있는 불교행사라고 생각하여 태조는 상원연등회를 국가적인 축제로 만들어 매년 성대하게 개최하였고, 후대 왕들에게도 이를 반드시 준수할 것을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당부하였다.

상원연등회는 성종(成宗)이 유교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지향하여 유교의례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에 따라 중지되었다가, 현종(顯宗)이 즉위하면서 20여 년만인 1010년에 다시 개최되었다. 그런데 현종은 상원연등회를 부활하면서 개최 일자를 정월 보름에서 2월 보름으로 한 달 늦추어 이를 정례화 하였다. 현종이 개최 일자를 변경한 것은 상원연등회가 한 해 농사를 시작하며 풍년을 기원하는 기곡제(祈穀祭)의 역할을 하고 있는 데서 연유한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달리 음력 정월까지는 땅이 해동되지 않으므로 농사의 시작은 사실상 음력 2월이 된다. 고려에서는 2월부터 10월까지를 농경이 이루어지는 달로 잡고 있었다.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세공편(歲功篇)」에서 2월 보름은 화조(花朝)인데, 고려는 이날을 상원절(上元節)로 하고 있다고 전한다. 현종은 중국에서 받아들인 상원연등회를 고려의 농사 절기에 맞게 한 달 늦추어 토착화한 것이다. 고려가요 ‘동동(動動)’의 “2월 보름에, 아아, 높이 켠 등불 같구나. 만인을 비출 모습이구나. 아으 동동다리”라는 가사 내용을 보아도 2월의 대표행사로 상원연등회를 꼽고 있다. 이후 상원연등회는 국가의례로서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초파일연등회} 고려시대 연등행사는 이와 같이 2월 보름 상원연등회가 대표적이었지만, 석가탄신일인 사월 초파일에도 연등회가 열렸다. 사월 초파일 연등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의종(毅宗) 때 백선연(白善淵)이 석가탄신일에 등불을 밝혔다고 하는 『고려사(高麗史)』의 기사이다. 사월 초파일은 불교문화권에서는 중요한 축일이기 때문에 상원연등회처럼 대규모 행사는 아니더라도 경축행사는 있어 왔다. 이러한 석가탄신일 행사가 무인집권기 최고 권력가였던 최우(崔瑀)에 의해 사월 초파일 연등회로 발전되었다.

내용

{고려 상원연등회의 특징} 고려의 상원연등회는 중국의 상원연등회와 아주 흡사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개경(현 개성)뿐만 아니라 지방 각지의 향읍에서 사찰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개최되었는데, 고려 왕실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통합이 주요 목적이었으므로 개경에서의 연등회는 후대 왕들에 의해 태조 왕건을 기리는 태조신앙이 의례 절차의 핵심 부분을 이루었다. 『고려사(高麗史)』 예지 가례잡의(禮志 嘉禮雜儀)에 수록된 상원연등회의(上元燃燈會儀) 의례절차에 따르면, 상원연등회 첫날인 14일 소회일은 국왕이 왕족과 백관들을 거느리고 2,000여명의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태조의 원찰인 봉은사(奉恩寺)로 행차하여 봉안된 태조의 초상화에 분향하고 술을 올리는 의식이 중심이 되었다. 이튿날 대회일에는 큰 연회가 베풀어졌는데, 연회 형식은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국왕에게 위계 순서대로 차, 술, 꽃을 올리면 국왕은 이들에게 차, 술, 꽃, 봉약, 과실을 하사하는 절차가 반복되면서 술과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군신간의 친목을 도모함과 아울러 왕의 정치적인 권위를 확인하였다.

{초파일연등회의 개설과 발전} 그러므로 최우에 의해 개설된 사월 초파일 연등회는 상원연등회와는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최고 실권자로서 국왕 위에 군림하던 최우는 막강한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고종(高宗) 32년(1245)에 국왕이 주체인 기존의 상원연등회와는 별개로 석가탄신일인 사월 초파일에 자신의 집에서 연등회를 화려하게 개최하였던 것이다. 무대를 가설하고 밤새도록 기악과 온갖 잡희를 연출해 즐기도록 하여 도읍 안의 남녀노소 구경꾼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후 사월 초파일 연등회가 상원연등회보다 성행하게 되었는데, 원(元) 간섭기 이후 고려의 자주성이 상실되면서 태조신앙을 절대적으로 내세우며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고려의 사회적 통합을 확인하던 상원연등회는 중단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월초파일 연등놀이의 특징} 사월 초파일 연등회에서는 무엇보다도 연등 공덕 자체가 중요시되어, 등롱(燈籠)을 구슬과 옥으로 만드는 등 행사가 극도로 사치스러워졌고, 이러한 등불들을 즐기는 호사스런 잔치가 되었다. 공민왕(恭愍王) 때 왕권을 위임받은 것과 다름없던 막강한 권력자 신돈(辛旽)이 사월 초파일 자신의 집에서 대연등회를 열었는데, 개경 사람들이 모두 이를 따라하느라 가난한 사람들은 구걸을 해서라도 연등을 하였다고 한다. 점차 국가의례인 상원연등회의 위상은 하락되었고, 도리어 민간에서는 개인적 기복을 위한 사월 초파일 연등회가 가장 중요한 불교행사로 되어 사회적으로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상원연등회는 건국 주체세력인 사대부들이 고려의 구습으로 혁파를 상소하여 폐지되었다. 반면에 사월 초파일 연등회는 사월 초파일 연등놀이로 계승되었다.

조선시대 사월 초파일 연등놀이는 행사 며칠 전부터 준비가 시작되었다. 민가와 관청, 시장, 거리의 집집마다 대나무를 묶어 등불대를 세우고 오색 비단으로 깃발을 만들어 맨 위에 단다. 깃발 바로 아래 갈고리를 만들어서 줄을 꿴 후 등을 쭉 매달아 서서히 잡아올리면 가장 위의 등이 갈고리까지 올라가 멈추게 된다. 민가에서는 자녀의 수대로 등을 달아서 9일까지 밝히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밤이 되어 불을 켜면 등불 모양이 층층으로 이어져서 마치 구슬을 꿴 것 같았다고 한다. 등은 모양에 따라 수박등, 마늘등, 연꽃등, 칠성등, 오행등, 일월등, 종등, 북등, 가마등, 병등, 방울등, 봉황등, 학등, 거북등, 사자등, 잉어등, 수복등, 태평등, 만세등, 남산등과 같은 각양각색의 등이 있었으며, 바람에 따라 빙빙 도는 등, 수십 발의 종이쪽을 붙여 펄펄 나는 등, 종이로 바른 소박한 등에서부터 오색 비단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값비싼 등까지 여러 종류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이 지속되어 연산군(燕山君) 때 한양 도성 내 절들이 모두 폐지되었고, 인종(仁宗) 때는 승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사월 초파일 밤에는 통행금지가 해제되어 온 장안 사람들은 도성 밖 절에 가서 참배하고, 초저녁부터 주위 산으로 올라가 등불을 구경하고 밤새도록 돌아다니면서 떠들썩하게 놀았다. 아이들은 등불대 밑에 자리를 깔고 앉아 느티떡과 소금에 볶은 콩을 먹으며, 물동이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돌려가면서 두드리는 수부(水缶)놀이를 하였다.

{현대의 연등행사} 일제강점기에는 원각사 자리의 탑골공원에 꽃으로 장식한 탄생불을 모셔놓고 관불의식(灌佛儀式)을 행하였으며, 저녁에는 흰코끼리상을 앞세우고 등을 들고 종로 - 을지로 - 광화문을 도는 제등행진을 하였다. 1975년 사월 초파일 석가탄신일이 공휴일로 제정됨에 따라, 1976년부터 연등행사가 부활되어 여의도광장에서 조계사까지 불교신자들의 사월 초파일 제등행진이 다시 시작되었다. 1996년부터 불교 교단은 조계종을 중심으로 석가탄신일 행사를 동대문운동장에서 조계사까지의 제등행진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행사들로 다양화하고, 연등축제라는 이름의 종합 축제로 전환하였다. 사월 초파일 연등축제는 범종단적으로 성대하게 치러지는 불교계의 가장 큰 행사이다. 이러한 사월 초파일 석가탄신일 행사에서 여전히 연등 공양이 구심점을 이루고 있는 것은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高麗史, 東国歳時記, 三國史記, 洌陽歳時記, 太祖實録, 高麗時代 國家 佛敎儀禮 硏究 (安智源,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高麗時代 燃燈會의 起源과 成立 (安智源, 震檀学報88, 震檀学會, 1999), 한국의 불교의례Ⅰ (정각 문상련, 운주사, 2001)

연등회

연등회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여름(夏) > 4월 > 정일

집필자 안지원(安智源)

정의

등불을 밝혀 석가의 탄신을 축하하는 의식. 연등(燃燈)은 불교문화권에서 널리 성행해 온 불교의식이다. 불교에서는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을 세상을 밝히는 지혜에 비유하고 석가 생존 시부터 부처님 앞에 불을 밝히는 연등 공양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유래

연등 공양은 브라만교의 신들에게 물, 향, 꽃, 등불, 음식을 바치던 인도 전래의 풍습을 불교가 수용한 것으로, 불교 발생 초기부터 불교행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연등 공양의 공덕에 대하여는 초기 소승경전인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부터 이야기되었으며, 대승경전들이 성립되면서 연등은 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하나인 공덕바라밀을 실천하는 한 방편으로서 확고히 자리하게 되었다. 『화엄경(華嚴經)』에는 등불의 종류와 공덕 내용이 보다 자세히 실려 있고, 연등 공덕만을 단독으로 다루어 연등 공양의 전거 경전으로 일컬어지는 『불설시등공덕경(佛說施燈功德經)』도 성립되었다. 이 경전은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연등을 보시하는 공덕에 대하여 설법하신 내용을 담고 있다. 불탑묘(佛塔墓)에 연등하면 그것이 작은 심지불이라도 복덕은 대단히 커서 임종 시에 네 가지 광명을 보게 되며, 죽어서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나 다섯 가지 청정(淸淨)을 얻게 되고, 부처님 앞에 다른 사람이 보시한 등불을 보고 신심이 청정해져 합장하고 기뻐하면 이것만으로도 여덟 가지 증상법(增上法)을 얻게 된다고 한다. 또한 『현우경(賢愚經)』의 가난한 여인 난타가 지극한 정성으로 바친 초라한 연등 하나가 왕이 바친 셀 수 없이 많은 화려한 연등들이 세찬 비바람에 다 꺼진 후에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정성스러운 마음에서 우러난 연등이 얼마나 큰 공덕인지를 강조하는 예로 흔히 인용되고 있다. 5세기 초 인도로 구법(求法)을 떠났던 중국 동진(東晋)의 승려 법현(法顯)은 중인도 마가다국에서 4월 8일 석가탄신일에 불·보살상 앞에서 밤새도록 연등과 기악을 공양하는 축하행사를 열고 있었다고 전한다. 연등은 처음에는 여러 가지 공양물(꽃, 향, 의복, 장식 깃발, 기악 등) 가운데 하나였으나, 대승불교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점차 불교행사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그 비중이 더 커지게 되었다. 불교행사는 종교의례 기능만이 아니라, 집단의 연대감을 고양하는 데도 효과가 있기 때문에 국가나 지역의 유력자들은 대규모 불교행사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역사

{우리나라 최초의 연등행사} 우리나라의 연등 행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통일신라시대 경문왕(景文王) 6년(866) 정월 보름에 왕이 황룡사(皇龍寺)로 행차하여 등불들을 구경하고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사이다. 그런데 통일신라시대 연등행사는 중국 상원연등회의 영향으로 석가탄신일이 아닌 정월 대보름인 상원(上元)에 개최되었다. 중국에서 도교 교단은 불교의 성행에 자극받아 중국 전래 세시풍속인 1월과 7월의 농경제례를 상원과 중원으로 체계화하여 도교 행사일로 정하였다. 도교의 상원행사에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정월 농경제례의 연등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불교의 연등 공덕 신앙과 연결되어 상원연등회라는 불교행사가 생겨나게 되었다. 상원연등회는 당나라 현종(玄宗) 때 정례적인 국가 공식 불교행사로 선포되었고, 송대(宋代)에 이르러 민간의 절기 풍속으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상원연등회 풍속이 신라로 전파되어 정월 보름에 국왕이 절로 행차하여 연등행사를 하였던 것이다. {상원연등회의 역사}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王建)은 바로 이러한 연등행사의 전례를 수용하여 상원연등회를 국가적 차원의 불교행사로 법제화하였다. 그가 상원연등회를 주목한 이유는 그것이 모든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축제와 같은 행사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상원연등회는 정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개설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성내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그리고 궁성대로와 성문들을 오색비단으로 장식하여 등불을 밝히고 궁성의 담을 따라서 등불을 쭉 매달아 야간에도 궁성 안은 대낮 같았다. 연등을 하는 저녁이라는 의미로 등석(燈夕)이라 부르는 보름날 밤 상원연등회 행사가 절정에 이르렀다. 국왕은 왕족과 백관들을 데리고 절로 행차하여 분향한 후 궁성 정문의 누대에 올라 수만 개의 연등이 밝혀져 있는 장관을 구경하고 주연을 베풀었다. 이때 등석을 축하하는 시와 문장을 짓는 것이 풍류가 되어 유명한 문인들과 관리 대부분이 등석시부(燈夕詩賦)를 남겼다. 백성들도 절에 가서 분향하고 그해의 복을 빌었으며 궁성 문루 앞 가설무대에서 공연되는 음악과 산대놀이, 백희(百戱)를 구경하기도 하고, 상원연등회 특수를 겨냥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상인들이 갖가지 특산품과 고금의 진기한 물건들을 벌여놓은 임시 개설 시장인 등시(燈市)를 돌아다니면서 밤새도록 즐겼다. 이처럼 상원연등회는 모든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행사를 제공하였다. 신라 말 각 지방에 할거한 호족들 가운데 하나였던 태조 왕건은 적대의식을 지양하고 겸양지덕을 전략으로 하여 다른 호족들을 포섭하였으며, 세금 감면 등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책을 강구하여 민심을 고려 쪽으로 유도하여 나갔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는 부처와 산천신에 대한 신앙이 매우 성행하고 있었으므로, 이처럼 민심과 밀착된 불교를 문화적 공통분모로 적극 활용하여 지역과 계층의 분열을 극복하고, 고려 왕실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이 모두 함께 즐길 수 있는 상원연등회가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완벽히 구현해 줄 수 있는 불교행사라고 생각하여 태조는 상원연등회를 국가적인 축제로 만들어 매년 성대하게 개최하였고, 후대 왕들에게도 이를 반드시 준수할 것을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당부하였다. 상원연등회는 성종(成宗)이 유교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지향하여 유교의례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에 따라 중지되었다가, 현종(顯宗)이 즉위하면서 20여 년만인 1010년에 다시 개최되었다. 그런데 현종은 상원연등회를 부활하면서 개최 일자를 정월 보름에서 2월 보름으로 한 달 늦추어 이를 정례화 하였다. 현종이 개최 일자를 변경한 것은 상원연등회가 한 해 농사를 시작하며 풍년을 기원하는 기곡제(祈穀祭)의 역할을 하고 있는 데서 연유한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달리 음력 정월까지는 땅이 해동되지 않으므로 농사의 시작은 사실상 음력 2월이 된다. 고려에서는 2월부터 10월까지를 농경이 이루어지는 달로 잡고 있었다.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세공편(歲功篇)」에서 2월 보름은 화조(花朝)인데, 고려는 이날을 상원절(上元節)로 하고 있다고 전한다. 현종은 중국에서 받아들인 상원연등회를 고려의 농사 절기에 맞게 한 달 늦추어 토착화한 것이다. 고려가요 ‘동동(動動)’의 “2월 보름에, 아아, 높이 켠 등불 같구나. 만인을 비출 모습이구나. 아으 동동다리”라는 가사 내용을 보아도 2월의 대표행사로 상원연등회를 꼽고 있다. 이후 상원연등회는 국가의례로서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초파일연등회} 고려시대 연등행사는 이와 같이 2월 보름 상원연등회가 대표적이었지만, 석가탄신일인 사월 초파일에도 연등회가 열렸다. 사월 초파일 연등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의종(毅宗) 때 백선연(白善淵)이 석가탄신일에 등불을 밝혔다고 하는 『고려사(高麗史)』의 기사이다. 사월 초파일은 불교문화권에서는 중요한 축일이기 때문에 상원연등회처럼 대규모 행사는 아니더라도 경축행사는 있어 왔다. 이러한 석가탄신일 행사가 무인집권기 최고 권력가였던 최우(崔瑀)에 의해 사월 초파일 연등회로 발전되었다.

내용

{고려 상원연등회의 특징} 고려의 상원연등회는 중국의 상원연등회와 아주 흡사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개경(현 개성)뿐만 아니라 지방 각지의 향읍에서 사찰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개최되었는데, 고려 왕실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통합이 주요 목적이었으므로 개경에서의 연등회는 후대 왕들에 의해 태조 왕건을 기리는 태조신앙이 의례 절차의 핵심 부분을 이루었다. 『고려사(高麗史)』 예지 가례잡의(禮志 嘉禮雜儀)에 수록된 상원연등회의(上元燃燈會儀) 의례절차에 따르면, 상원연등회 첫날인 14일 소회일은 국왕이 왕족과 백관들을 거느리고 2,000여명의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태조의 원찰인 봉은사(奉恩寺)로 행차하여 봉안된 태조의 초상화에 분향하고 술을 올리는 의식이 중심이 되었다. 이튿날 대회일에는 큰 연회가 베풀어졌는데, 연회 형식은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국왕에게 위계 순서대로 차, 술, 꽃을 올리면 국왕은 이들에게 차, 술, 꽃, 봉약, 과실을 하사하는 절차가 반복되면서 술과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군신간의 친목을 도모함과 아울러 왕의 정치적인 권위를 확인하였다. {초파일연등회의 개설과 발전} 그러므로 최우에 의해 개설된 사월 초파일 연등회는 상원연등회와는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최고 실권자로서 국왕 위에 군림하던 최우는 막강한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고종(高宗) 32년(1245)에 국왕이 주체인 기존의 상원연등회와는 별개로 석가탄신일인 사월 초파일에 자신의 집에서 연등회를 화려하게 개최하였던 것이다. 무대를 가설하고 밤새도록 기악과 온갖 잡희를 연출해 즐기도록 하여 도읍 안의 남녀노소 구경꾼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후 사월 초파일 연등회가 상원연등회보다 성행하게 되었는데, 원(元) 간섭기 이후 고려의 자주성이 상실되면서 태조신앙을 절대적으로 내세우며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고려의 사회적 통합을 확인하던 상원연등회는 중단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월초파일 연등놀이의 특징} 사월 초파일 연등회에서는 무엇보다도 연등 공덕 자체가 중요시되어, 등롱(燈籠)을 구슬과 옥으로 만드는 등 행사가 극도로 사치스러워졌고, 이러한 등불들을 즐기는 호사스런 잔치가 되었다. 공민왕(恭愍王) 때 왕권을 위임받은 것과 다름없던 막강한 권력자 신돈(辛旽)이 사월 초파일 자신의 집에서 대연등회를 열었는데, 개경 사람들이 모두 이를 따라하느라 가난한 사람들은 구걸을 해서라도 연등을 하였다고 한다. 점차 국가의례인 상원연등회의 위상은 하락되었고, 도리어 민간에서는 개인적 기복을 위한 사월 초파일 연등회가 가장 중요한 불교행사로 되어 사회적으로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상원연등회는 건국 주체세력인 사대부들이 고려의 구습으로 혁파를 상소하여 폐지되었다. 반면에 사월 초파일 연등회는 사월 초파일 연등놀이로 계승되었다. 조선시대 사월 초파일 연등놀이는 행사 며칠 전부터 준비가 시작되었다. 민가와 관청, 시장, 거리의 집집마다 대나무를 묶어 등불대를 세우고 오색 비단으로 깃발을 만들어 맨 위에 단다. 깃발 바로 아래 갈고리를 만들어서 줄을 꿴 후 등을 쭉 매달아 서서히 잡아올리면 가장 위의 등이 갈고리까지 올라가 멈추게 된다. 민가에서는 자녀의 수대로 등을 달아서 9일까지 밝히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밤이 되어 불을 켜면 등불 모양이 층층으로 이어져서 마치 구슬을 꿴 것 같았다고 한다. 등은 모양에 따라 수박등, 마늘등, 연꽃등, 칠성등, 오행등, 일월등, 종등, 북등, 가마등, 병등, 방울등, 봉황등, 학등, 거북등, 사자등, 잉어등, 수복등, 태평등, 만세등, 남산등과 같은 각양각색의 등이 있었으며, 바람에 따라 빙빙 도는 등, 수십 발의 종이쪽을 붙여 펄펄 나는 등, 종이로 바른 소박한 등에서부터 오색 비단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값비싼 등까지 여러 종류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이 지속되어 연산군(燕山君) 때 한양 도성 내 절들이 모두 폐지되었고, 인종(仁宗) 때는 승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사월 초파일 밤에는 통행금지가 해제되어 온 장안 사람들은 도성 밖 절에 가서 참배하고, 초저녁부터 주위 산으로 올라가 등불을 구경하고 밤새도록 돌아다니면서 떠들썩하게 놀았다. 아이들은 등불대 밑에 자리를 깔고 앉아 느티떡과 소금에 볶은 콩을 먹으며, 물동이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돌려가면서 두드리는 수부(水缶)놀이를 하였다. {현대의 연등행사} 일제강점기에는 원각사 자리의 탑골공원에 꽃으로 장식한 탄생불을 모셔놓고 관불의식(灌佛儀式)을 행하였으며, 저녁에는 흰코끼리상을 앞세우고 등을 들고 종로 - 을지로 - 광화문을 도는 제등행진을 하였다. 1975년 사월 초파일 석가탄신일이 공휴일로 제정됨에 따라, 1976년부터 연등행사가 부활되어 여의도광장에서 조계사까지 불교신자들의 사월 초파일 제등행진이 다시 시작되었다. 1996년부터 불교 교단은 조계종을 중심으로 석가탄신일 행사를 동대문운동장에서 조계사까지의 제등행진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행사들로 다양화하고, 연등축제라는 이름의 종합 축제로 전환하였다. 사월 초파일 연등축제는 범종단적으로 성대하게 치러지는 불교계의 가장 큰 행사이다. 이러한 사월 초파일 석가탄신일 행사에서 여전히 연등 공양이 구심점을 이루고 있는 것은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高麗史, 東国歳時記, 三國史記, 洌陽歳時記, 太祖實録高麗時代 國家 佛敎儀禮 硏究 (安智源,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高麗時代 燃燈會의 起源과 成立 (安智源, 震檀学報88, 震檀学會, 1999)한국의 불교의례Ⅰ (정각 문상련, 운주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