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야류(水營野遊)

한자명

水營野遊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정일

집필자 박진태(朴鎭泰)

정의

부산광역시 남구 수영동에서 전승되는 민속탈놀이. ‘수영들놀음’이라고도 하는데,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다. 동래와 부산진의 들놀음은 수영에서 분파되었다는 설이 있다. 야류는 또 야유(夜遊)·야유(冶遊)·야유(揶揄)로도 표기하는데, 공연 시각이나 풍자성에 근거하여 견강부회(牽强附會)한 민간어원설에 의한 설명이다.

들놀음의 어원에 대해서는 ‘들’이 논바닥이나 마당과 같은 연희 장소를 가리키므로 들에서 노는 탈놀음이라는 주장과 들이 농경의 장소를 가리키며 들놀음이란 명칭은 농경의 장소인 들에서 행해지던 농경의례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다.

유래

수영야류의 유래에 대해서는 초계 밤마리 오광대가 전래되어 형성시켰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러한 일방적인 전파설을 비판하고 지신밟기와 산신제와 덧뵈기춤놀이와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토착적인 농경의례를 모태로 탈놀이가 이미 성립되었으며, 다만 유랑예인집단의 탈놀이 영향을 받아 정교하게 발전시켰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수영들놀음은 수영야류계가 주동이 되어 연희되다가 1930년대에 중단되었으며, 8·15 광복 직후 부활되었으나 다시 중단되었다. 그 후 1960년대에 들어 민속예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던 때 수양반(首兩班) 역을 놀았던 최한복과 말뚝이 역을 놀았던 조두영 등의 구술과 증언을 토대로 재연되었으며, 그 결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현재 수영고적민속보존협회가 전승을 담당하고 있다. 대표적인 연희자(기능보유자) 중 김용태(말뚝이·사자)·조복준(악사)·조덕주(탈 제작)는 작고하였고, 김달봉(영노)·윤수만(악사)·태덕수(수양반)·문장수(사자·셋째양반)·조홍복(영감)은 현재 활동하고 있다.

수영야류는 현재 독립적인 탈놀이로 연행되지만, 원래는 산신제의 맥락에서 형성되어 전승되었다. 공연 장소도 지금은 보존회관 앞마당으로 바뀌었지만 원래는 수영팔도시장의 장터였다.

내용

수영야류는 정월 3~4일 무렵부터 야류계가 주동이 되어 굿패를 편성하여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지신밟기를 하고 걸립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수양반의 배역을 맡은 사람이 상쇠가 되어 성주풀이로 시작해서 조왕풀이, 장독풀이, 샘풀이, 마구간풀이, 고방풀이, 뒷간풀이를 차례로 하고, 대문풀이로 끝맺었다. 그리고 이때 각 집에서는 대문 앞에 향불과 술과 음식을 차려 놓고 돈이나 곡식을 내놓았는데, 술과 음식은 굿패가 먹고 돈이나 곡식은 들놀음의 경비에 조달했다. 수영의 지신밟기는 13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 중에 한편으로 일정한 장소를 지정하여 탈을 정성껏 제작한 다음 탈제[假面祭]를 지내며 무사히 들놀음을 끝마치기를 빌었다.

이렇게 하여 경비와 탈과 의상, 도구 등의 준비가 완료되면 14일 밤에 원로들 앞에서 각자 연습한 연기를 심사받고서 배역을 확정하였다. 이를 시박[試匏]이라 했으며, 수양반과 말뚝이 역은 제일 어려워서 재담과 춤에 능숙한 사람이 맡을 수 있었다. 이 시박은 시연회 내지 총연습의 성격을 띠면서 개인적이고 즉흥적인 요소를 억제하고, 전승적이고 유형적인 요소가 유지되는 데 이바지했다.

시박에서 배역이 확정되면 보름날 낮에 탈을 쓰고 의상을 갖추어 놀이꾼으로 분장한 수양반이 농악대를 데리고서 술·과일·포육(脯肉)을 차려 놓고 토신과 독신(纛神)을 -일설에는 산정머리 송씨할매와 산신이라고도 한다- 모신 제당(祭堂)에서 당제를 지내고, 먼물샘[遠水井]에 가서 용신에게 고사를 지내고, 마지막으로 최영 장군을 마을 수호신으로 모신 신당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고사를 지내는 동안 시장터의 한가운데에 높은 장대를 세워 꼭대기에 기를 꽂고, 그 바로 아래에 용·봉황새·거북선·연꽃 모양의 큰 등을 매달았다. 그리고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새끼줄을 치고서 200~300개의 작은 등을 여기저기 매달아 놀이판의 조명 시설을 갖추었으며, 장대를 중심으로 하여 원형으로 금줄을 치고서 금줄 안은 놀이판이 되고 금줄 밖은 관중석이 되게 했다. 놀이판 옆에는 소도구실 내지는 놀이꾼들의 분장실이나 대기실에 해당하는 개복청(改服廳)을 설치했다.

저녁이 되면 놀이패가 놀이판에서 약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먼물샘이나 강변에 모여서 길놀이의 준비를 한다. 그리고 등을 든 아이들이 맨 앞에 서고, 꽹과리(2~3명)·장고(4~5명)·소고(약 10명)·징(1명)·북(1~2명)으로 구성된 농악대, 길군악대, 기생들로 구성된 팔선녀, 사자나 당나귀, 소를 탄 수양반을 비롯한 여러 양반과 말뚝이, 난봉가대, 양산도대의 순서로 행렬을 이루고서 달이 뜨는 시각에 맞추어 출발하여 놀이판으로 갔다. 이것은 신맞이 행렬의 잔영으로 길을 밝히는 소등대(小燈隊)를 앞세우고, 악대의 인도에 따라 가무단을 거느리고 탈놀이패가 일정한 집결 장소에서 놀이판으로 이동하는 가장행렬이다.

행렬이 도착하면 등불과 모닥불로 대낮처럼 환한 놀이판에서는 농악대의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덧뵈기춤을 추며 난장판을 벌이는 일종의 집단적인 황홀경에 들어갔는데, 수영의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다른 마을에서 구경을 온 사람들도 함께 어울려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신명풀이를 했으며, 즉흥적인 촌극을 연출하여 폭소를 자아내기도 하는 희극적 분위기였다. 이때 야류계에서 미리 준비해 둔 종이고깔을 사서 쓰고 춤을 추어 공중의 새끼줄을 매단 등에서 떨어지는 촛농을 피했으며, 고깔을 판 돈은 들놀음 공연의 경비에 보태었다.

덧뵈기춤놀이를 술을 마셔가며 3~4시간 동안 벌이다가 자정 무렵이 되면 기운도 빠지고 흥도 다하므로 부녀자와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본격적인 탈놀이가 양반마당·영노마당·영감·할미마당·사자마당의 순서로 연행되었다. 탈놀이가 끝나면 놀이패와 신명이 난 구경꾼이 어울려 다시 한바탕 춤을 추고 놀았다. 이어 놀이패는 탈을 벗어 한 곳에 모아 놓고 고사를 지낸 다음 탈을 불태우면서 새해에는 액운이 없고, 무사태평하고, 만사가 형통하기를 빌었다.

탈놀이는 양반마당, 영노마당, 영감·할미마당, 사자마당으로 구성된다. 양반마당은 양반들이 하인 말뚝이를 호출하여 시중드는 일을 등한시한 잘못을 질책하면 말뚝이가 양반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본댁에 가서 대부인과 통정한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양반들이 패가망신당하는 내용이다. 양반과 말뚝이가 ‘양반의 권위, 말뚝이의 도전, 양반의 응전, 말뚝이의 항복, 양반의 승리’로 진행되는 말싸움에 이어 춤을 추는 행동 양태를 반복한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싸움굿과 화해굿에 뿌리를 두고서 대사를 통해 갈등을 표출시키고 춤을 통해 갈등을 해소시키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반어적인 계급적 화해와 화해춤을 통해서 양반을 조롱하는 탈놀이 특유의 풍자 기법이다.

영노마당은 수양반을 상징적이고 가상적인 신수(神獸)인 영노가 잡아먹음으로써 양반계급을 타도하려는 민중의식을 표출시킨다. 영노와 양반이 힘겨루기에 앞서 지혜겨루기를 벌이지만, 양반이 참패하고 결국 영노에게 잡아먹히는 내용으로 양반의 신체적인 무력함과 함께 지적인 어리석음을 동시에 풍자한다.

영감·할미마당은 영감과 할미가 이별하였다가 재회하지만 작은 각시를 얻은 영감이 세 아들들을 할미가 죽게 만든 사실을 알고 화가 나서 할미를 타살(打殺)한다. 영감·할미마당은 가부장제적 봉건사회에서 여성이 겪어야 했던 수난상을 놀이화한 것이다. 아울러 남성의 권위에 도전하였다가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 할미를 통해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른바 송구영신(送舊迎新)하는 신년의례(新年儀禮)의 의미만이 아니라 낡은 생활, 낡은 질서, 낡은 시대를 보내고 새로운 생활, 새로운 질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려는 인간의 보편적인 꿈을 투사시킨 것이다.

사자마당에서는 사자가 담비를 잡아먹는데, 여기에는 민간신앙과 관련된 몇 가지 전설이 있다. 수영 동남쪽의 백산이 수영의 앞산인데도 불구하고 그 형상이 마치 사자가 마을을 등지고 달아나는 모양이므로 그 사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범을 제물로 바치는 놀이라고 하며,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형상인 백산의 사자신이 해안을 침범하는 왜적을 물리쳐 수영을 수호하는 걸 상징하기 위해 사자가 범을 잡아먹는 놀이를 한다고도 한다. 또한 수영 근처의 호암(虎巖)이란 바위가 있는 탓으로 호환이 심하다고 믿고 호랑이의 침입을 막기 위해 사자탈을 쓰고서 춤을 춘다고도 한다. 사자를 백산의 산신가면이나 악귀를 퇴치하는 벽사가면(辟邪假面)으로 생각하는 한 사자춤놀이는 주술·종교적 기능을 지닌 신성극 또는 제의극으로 오락적이고 세속적인 내용의 양반마당, 영노마당, 영감·할미마당과 구별된다.

인근의 동래야류가 수영야류에서 분파되었다고 하지만, 동래야류는 사자마당이 성립되어 있지 않은 대신 문둥이마당이 있다. 그리고 수영의 말뚝이탈은 양식적이지만 동래의 말뚝이탈은 사실적이고, 수영의 덧뵈기춤은 방어적이지만 동래의 춤사위는 포용적이며, 수영의 영노는 양반을 잡아먹는 상극 원리를 보이지만 동래의 영노는 양반과 화해하는 상생 원리를 보이는 식으로 동일한 들놀음 전승권에 속하면서도 제각기 다른 지역적 특징을 보인다.

참고문헌

전환기의 탈놀이 접근법 (박진태, 민속원, 2004), 韓國의 民俗劇 (沈雨晟 編著, 創作과批評社, 1975), 野遊·五廣大 (강용권, 語文論叢8, 螢雪出版社, 1977), 韓國의 假面劇 (李杜鉉, 一志社, 1979), 오광대와 들놀음 연구 (정상박, 집문당, 1986), 野遊·五廣大탈놀이 (徐淵昊, 열화당, 1989), 영남지방의 洞祭와 탈놀이 (박진태 외, 太學社, 1996), 水營傳統文化財 (水營古蹟民俗藝術保存協會, 1997), 수영야류 (정상박 외, 화산문화, 2001)

수영야류

수영야류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정일

집필자 박진태(朴鎭泰)

정의

부산광역시 남구 수영동에서 전승되는 민속탈놀이. ‘수영들놀음’이라고도 하는데,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다. 동래와 부산진의 들놀음은 수영에서 분파되었다는 설이 있다. 야류는 또 야유(夜遊)·야유(冶遊)·야유(揶揄)로도 표기하는데, 공연 시각이나 풍자성에 근거하여 견강부회(牽强附會)한 민간어원설에 의한 설명이다. 들놀음의 어원에 대해서는 ‘들’이 논바닥이나 마당과 같은 연희 장소를 가리키므로 들에서 노는 탈놀음이라는 주장과 들이 농경의 장소를 가리키며 들놀음이란 명칭은 농경의 장소인 들에서 행해지던 농경의례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다.

유래

수영야류의 유래에 대해서는 초계 밤마리 오광대가 전래되어 형성시켰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러한 일방적인 전파설을 비판하고 지신밟기와 산신제와 덧뵈기춤놀이와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토착적인 농경의례를 모태로 탈놀이가 이미 성립되었으며, 다만 유랑예인집단의 탈놀이 영향을 받아 정교하게 발전시켰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수영들놀음은 수영야류계가 주동이 되어 연희되다가 1930년대에 중단되었으며, 8·15 광복 직후 부활되었으나 다시 중단되었다. 그 후 1960년대에 들어 민속예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던 때 수양반(首兩班) 역을 놀았던 최한복과 말뚝이 역을 놀았던 조두영 등의 구술과 증언을 토대로 재연되었으며, 그 결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현재 수영고적민속보존협회가 전승을 담당하고 있다. 대표적인 연희자(기능보유자) 중 김용태(말뚝이·사자)·조복준(악사)·조덕주(탈 제작)는 작고하였고, 김달봉(영노)·윤수만(악사)·태덕수(수양반)·문장수(사자·셋째양반)·조홍복(영감)은 현재 활동하고 있다. 수영야류는 현재 독립적인 탈놀이로 연행되지만, 원래는 산신제의 맥락에서 형성되어 전승되었다. 공연 장소도 지금은 보존회관 앞마당으로 바뀌었지만 원래는 수영팔도시장의 장터였다.

내용

수영야류는 정월 3~4일 무렵부터 야류계가 주동이 되어 굿패를 편성하여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지신밟기를 하고 걸립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수양반의 배역을 맡은 사람이 상쇠가 되어 성주풀이로 시작해서 조왕풀이, 장독풀이, 샘풀이, 마구간풀이, 고방풀이, 뒷간풀이를 차례로 하고, 대문풀이로 끝맺었다. 그리고 이때 각 집에서는 대문 앞에 향불과 술과 음식을 차려 놓고 돈이나 곡식을 내놓았는데, 술과 음식은 굿패가 먹고 돈이나 곡식은 들놀음의 경비에 조달했다. 수영의 지신밟기는 13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 중에 한편으로 일정한 장소를 지정하여 탈을 정성껏 제작한 다음 탈제[假面祭]를 지내며 무사히 들놀음을 끝마치기를 빌었다. 이렇게 하여 경비와 탈과 의상, 도구 등의 준비가 완료되면 14일 밤에 원로들 앞에서 각자 연습한 연기를 심사받고서 배역을 확정하였다. 이를 시박[試匏]이라 했으며, 수양반과 말뚝이 역은 제일 어려워서 재담과 춤에 능숙한 사람이 맡을 수 있었다. 이 시박은 시연회 내지 총연습의 성격을 띠면서 개인적이고 즉흥적인 요소를 억제하고, 전승적이고 유형적인 요소가 유지되는 데 이바지했다. 시박에서 배역이 확정되면 보름날 낮에 탈을 쓰고 의상을 갖추어 놀이꾼으로 분장한 수양반이 농악대를 데리고서 술·과일·포육(脯肉)을 차려 놓고 토신과 독신(纛神)을 -일설에는 산정머리 송씨할매와 산신이라고도 한다- 모신 제당(祭堂)에서 당제를 지내고, 먼물샘[遠水井]에 가서 용신에게 고사를 지내고, 마지막으로 최영 장군을 마을 수호신으로 모신 신당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고사를 지내는 동안 시장터의 한가운데에 높은 장대를 세워 꼭대기에 기를 꽂고, 그 바로 아래에 용·봉황새·거북선·연꽃 모양의 큰 등을 매달았다. 그리고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새끼줄을 치고서 200~300개의 작은 등을 여기저기 매달아 놀이판의 조명 시설을 갖추었으며, 장대를 중심으로 하여 원형으로 금줄을 치고서 금줄 안은 놀이판이 되고 금줄 밖은 관중석이 되게 했다. 놀이판 옆에는 소도구실 내지는 놀이꾼들의 분장실이나 대기실에 해당하는 개복청(改服廳)을 설치했다. 저녁이 되면 놀이패가 놀이판에서 약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먼물샘이나 강변에 모여서 길놀이의 준비를 한다. 그리고 등을 든 아이들이 맨 앞에 서고, 꽹과리(2~3명)·장고(4~5명)·소고(약 10명)·징(1명)·북(1~2명)으로 구성된 농악대, 길군악대, 기생들로 구성된 팔선녀, 사자나 당나귀, 소를 탄 수양반을 비롯한 여러 양반과 말뚝이, 난봉가대, 양산도대의 순서로 행렬을 이루고서 달이 뜨는 시각에 맞추어 출발하여 놀이판으로 갔다. 이것은 신맞이 행렬의 잔영으로 길을 밝히는 소등대(小燈隊)를 앞세우고, 악대의 인도에 따라 가무단을 거느리고 탈놀이패가 일정한 집결 장소에서 놀이판으로 이동하는 가장행렬이다. 행렬이 도착하면 등불과 모닥불로 대낮처럼 환한 놀이판에서는 농악대의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덧뵈기춤을 추며 난장판을 벌이는 일종의 집단적인 황홀경에 들어갔는데, 수영의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다른 마을에서 구경을 온 사람들도 함께 어울려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신명풀이를 했으며, 즉흥적인 촌극을 연출하여 폭소를 자아내기도 하는 희극적 분위기였다. 이때 야류계에서 미리 준비해 둔 종이고깔을 사서 쓰고 춤을 추어 공중의 새끼줄을 매단 등에서 떨어지는 촛농을 피했으며, 고깔을 판 돈은 들놀음 공연의 경비에 보태었다. 덧뵈기춤놀이를 술을 마셔가며 3~4시간 동안 벌이다가 자정 무렵이 되면 기운도 빠지고 흥도 다하므로 부녀자와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본격적인 탈놀이가 양반마당·영노마당·영감·할미마당·사자마당의 순서로 연행되었다. 탈놀이가 끝나면 놀이패와 신명이 난 구경꾼이 어울려 다시 한바탕 춤을 추고 놀았다. 이어 놀이패는 탈을 벗어 한 곳에 모아 놓고 고사를 지낸 다음 탈을 불태우면서 새해에는 액운이 없고, 무사태평하고, 만사가 형통하기를 빌었다. 탈놀이는 양반마당, 영노마당, 영감·할미마당, 사자마당으로 구성된다. 양반마당은 양반들이 하인 말뚝이를 호출하여 시중드는 일을 등한시한 잘못을 질책하면 말뚝이가 양반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본댁에 가서 대부인과 통정한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양반들이 패가망신당하는 내용이다. 양반과 말뚝이가 ‘양반의 권위, 말뚝이의 도전, 양반의 응전, 말뚝이의 항복, 양반의 승리’로 진행되는 말싸움에 이어 춤을 추는 행동 양태를 반복한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싸움굿과 화해굿에 뿌리를 두고서 대사를 통해 갈등을 표출시키고 춤을 통해 갈등을 해소시키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반어적인 계급적 화해와 화해춤을 통해서 양반을 조롱하는 탈놀이 특유의 풍자 기법이다. 영노마당은 수양반을 상징적이고 가상적인 신수(神獸)인 영노가 잡아먹음으로써 양반계급을 타도하려는 민중의식을 표출시킨다. 영노와 양반이 힘겨루기에 앞서 지혜겨루기를 벌이지만, 양반이 참패하고 결국 영노에게 잡아먹히는 내용으로 양반의 신체적인 무력함과 함께 지적인 어리석음을 동시에 풍자한다. 영감·할미마당은 영감과 할미가 이별하였다가 재회하지만 작은 각시를 얻은 영감이 세 아들들을 할미가 죽게 만든 사실을 알고 화가 나서 할미를 타살(打殺)한다. 영감·할미마당은 가부장제적 봉건사회에서 여성이 겪어야 했던 수난상을 놀이화한 것이다. 아울러 남성의 권위에 도전하였다가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 할미를 통해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른바 송구영신(送舊迎新)하는 신년의례(新年儀禮)의 의미만이 아니라 낡은 생활, 낡은 질서, 낡은 시대를 보내고 새로운 생활, 새로운 질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려는 인간의 보편적인 꿈을 투사시킨 것이다. 사자마당에서는 사자가 담비를 잡아먹는데, 여기에는 민간신앙과 관련된 몇 가지 전설이 있다. 수영 동남쪽의 백산이 수영의 앞산인데도 불구하고 그 형상이 마치 사자가 마을을 등지고 달아나는 모양이므로 그 사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범을 제물로 바치는 놀이라고 하며,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형상인 백산의 사자신이 해안을 침범하는 왜적을 물리쳐 수영을 수호하는 걸 상징하기 위해 사자가 범을 잡아먹는 놀이를 한다고도 한다. 또한 수영 근처의 호암(虎巖)이란 바위가 있는 탓으로 호환이 심하다고 믿고 호랑이의 침입을 막기 위해 사자탈을 쓰고서 춤을 춘다고도 한다. 사자를 백산의 산신가면이나 악귀를 퇴치하는 벽사가면(辟邪假面)으로 생각하는 한 사자춤놀이는 주술·종교적 기능을 지닌 신성극 또는 제의극으로 오락적이고 세속적인 내용의 양반마당, 영노마당, 영감·할미마당과 구별된다. 인근의 동래야류가 수영야류에서 분파되었다고 하지만, 동래야류는 사자마당이 성립되어 있지 않은 대신 문둥이마당이 있다. 그리고 수영의 말뚝이탈은 양식적이지만 동래의 말뚝이탈은 사실적이고, 수영의 덧뵈기춤은 방어적이지만 동래의 춤사위는 포용적이며, 수영의 영노는 양반을 잡아먹는 상극 원리를 보이지만 동래의 영노는 양반과 화해하는 상생 원리를 보이는 식으로 동일한 들놀음 전승권에 속하면서도 제각기 다른 지역적 특징을 보인다.

참고문헌

전환기의 탈놀이 접근법 (박진태, 민속원, 2004)韓國의 民俗劇 (沈雨晟 編著, 創作과批評社, 1975)野遊·五廣大 (강용권, 語文論叢8, 螢雪出版社, 1977)韓國의 假面劇 (李杜鉉, 一志社, 1979)오광대와 들놀음 연구 (정상박, 집문당, 1986)野遊·五廣大탈놀이 (徐淵昊, 열화당, 1989)영남지방의 洞祭와 탈놀이 (박진태 외, 太學社, 1996)水營傳統文化財 (水營古蹟民俗藝術保存協會, 1997)수영야류 (정상박 외, 화산문화,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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