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싸움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가을(秋) > 8월 > 정일

집필자 한양명(韓陽明)

정의

두 마리 황소를 맞붙여 승부를 겨루는 놀이. 소를 중요한 생산수단으로 여겼던 전통사회에서 소싸움은 어느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임시로 벌이는 소싸움이 아니라 두 마을 또는 여러 마을에서 마을을 대표하는 소를 끌고 나와 연례적으로 벌인 소싸움은 경상남도 일원과 경상북도 청도 지역 등 이른바 가야문화권에서만 전승되어 있다.

내용

연례적으로 벌어진 놀이로서 소싸움은 주로 추석(秋夕) 무렵에 행해졌다. “정월 씨름, 팔월 소싸움”이라는 경북 청도 지역의 향언(鄕言)은 이를 말해준다. 이 시기는 수도재배의 힘든 노동이 일단락되는 농한기이다. 이 기간 중에 직접 농업생산에 종사한 일꾼들이 주도한 놀이가 바로 소싸움이었다. 현재까지도 소싸움이 강성한 경남 진주 지역에서 “소싸움 날은 상머슴의 날이다.”라는 말이 통용되는 것도 이런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추석이 되면 인접한 두 마을에서는 자연스레 소싸움 이야기가 나오고 각 마을에서는 싸움에 나설 소를 가린다. 싸움소는 평소 초동(樵童)들의 소싸움 등을 통해서 마을에서 가장 강하다고 공인된 소로서, 싸움에 대비하여 특별한 훈련을 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싸움 장소는 통상 두 마을의 경계 지역에 있는 개천이나 논밭이다. 개천에서 싸울 경우, 소들은 하상(河床)에서 싸우고 사람들은 개천 둑에서 응원한다. 소싸움에 참여하는 마을사람들은 그 싸움을 자기 마을의 위신이 걸린 싸움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음은 마을 대항전으로 벌어진 소싸움의 사례이다.

경북 청도군 풍각면 봉기리 대 현리의 소싸움을 보면, 인접한 두 마을인 봉기리와 현리에서는 1930년대 중반까지 매년 추석 뒷날이나 그 다음 날에 두 마을 사이에 있는 개울에서 소싸움을 벌였다. 각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센 황소 한 마리씩 출전하는데 소의 목에는 적·청·황의 세 천을 엮은 ‘이남기(끈)’를 둘러주었다. 소를 앞세우고 마을의 남녀노소가 함께 싸움터에 나가며 이때 풍물패를 꾸려 자기 마을 소를 응원하였다. 워낙 싸움이 거칠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망라한 마을사람들은 개울의 둑 위에서 열렬히 응원하였고, 소들은 하상(河床)에서 싸움을 벌였다. 이때 소를 몰고 나온 머슴이나 소 주인은 싸움소를 따라 움직이며 싸움을 독려하였다.

승부는 머리를 맞대고 싸우다가 먼저 도망가는 쪽이 패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대개 단판으로 결정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패한 마을에서 다른 소를 끌고 나와서 이긴 마을의 소와 한 번 더 싸움을 붙인 적도 있다. 이 싸움에는 어떤 상품도 걸려 있지 않으며, ‘싱벽[勝負慾]’과 마을의 ‘세도’때문에 싸웠다고 한다. 싸움에서 이기면 풍물패를 앞세우고, 머슴이 소를 타고 마을로 돌아오며 소의 주인집에서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내놓아 마을 잔치가 벌어졌다.

인접한 두 마을 간의 대항전이 아니라 근동(近洞), 혹은 관내의 다수 마을이 참여하는 보다 큰 규모의 소싸움 역시 추석 무렵에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경남 의령의 경우, 20세기 초엽에 적어도 수십 개 마을의 소들이 출전하고 난장이 서는 대규모 소싸움이 벌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1909년,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선생이 진양잡영(晉陽雜詠) 12수를 발표하면서 소싸움을 평하기를 “당지(當地)의 투우(鬪牛)가 심히 성하여 천백(千百)명의 같은 무리들이 크게 충돌을 벌이면 그 등약(騰躍)하고 포효하는 모습이 진실로 일대 장관이더라.”라고 한 것도, ‘수무바다’라고 일컫던 남강 백사장에서 벌어진 대규모의 소싸움을 본 소감을 피력한 것이다. 다음은 여러 마을의 소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소싸움의 사례이다.

경북 의령의 소싸움을 보면, 소싸움은 바쁜 논농사일이 한풀 끝난 칠월 백중이나 팔월 한가위 무렵에 행해졌다. 싸움은 넓은 모래사장이나 풀밭에서 이루어졌는데, 의령읍의 남산천과 정암진의 모래사장, 가례면의 한내변, 유곡면의 세간천변, 부림천변 등이 소싸움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싸움의 장소가 정해지면 음식장사들이 미리 몰려들어 일대 난장을 이룬다. 고삐와 코뚜레를 푼 싸움소들은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상머슴이나 주인에게 이끌려 싸움터의 이곳, 저곳을 돌면서 자기편 관중들로부터 열렬한 격려와 쓰다듬을 받는다. 싸움터에 나간 싸움소가 잠깐 동안 상대를 응시하다가 순간적으로 상대방의 허를 찔러 급소를 공격해 들어가면 모래사장, 혹은 풀밭은 격투장으로 변한다. 관중들의 열렬한 응원 속에서 소들은 ‘뿔걸이’, ‘옆목치기’, ‘들치기’ 등의 공격방법을 동원하여 상대방을 밀어붙인다. 이때 주인은 채찍으로 소를 때리면서 ‘받아라’, ‘찍어라’, ‘이러이러’ 하고 외치면서 소를 독려한다. 약한 쪽이 싸움을 포기하고 달아날 때까지는 보통 몇 분이 소요되지만 길게는 수십 분이 소요될 경우도 있다. 싸움의 결과는 소의 동작을 보면 미리 알 수 있다. 달아날 방향을 찾는 듯이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거나 꼬리를 흔들고, 뒷배가 들쭉날쭉하면서 똥을 싸거나 입에 흰 거품을 내뿜으면 이미 자신을 잃었다는 표시이다. 싸움에서 이긴 소는 목과 뿔을 비단과 들꽃으로 장식하기도 하며 소등에는 상머슴이나 주인이 올라타서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풍물을 울리고 춤을 추면서 개선하는 군사들처럼 마을로 돌아온다. 마을로 들어오면 소의 주인집에서 마련한 음식으로 밤늦도록 잔치를 즐긴다.

이와 같이 보다 큰 규모의 소싸움, 즉 청도의 풍각면이나 이서면처럼 이름난 우시장을 중심으로 면 관내의 각 마을들이 참여하던 소싸움이나 의령, 진주, 김해 등지에서 행해진 고을 규모의 초대형 소싸움이 역사상 어떠한 시점에서 시작되었는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보면 이앙법(移秧法)이 널리 퍼짐으로써 집약적인 노동력 투입이 요청되고 그에 따라 두레 등의 협업관행이 활성화되었으며, 오늘날과 같은 집락(集落)이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고 축력의 이용이 획기적으로 증대된 조선 후기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처럼 범공동체적인 소싸움이 등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소싸움의 주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두 마을 간의 소싸움일 경우, 싸움에 참여하는 각 마을에서 가장 세다고 공인된 소를 싸움소로 내세운 점, 그 소가 지게 되면 마을의 다른 소를 데리고 와서라도 이기려고 했다는 점, 풍물패가 함께 했다는 점, 소싸움을 마을 간의 ‘세도(세력) 싸움’으로 인식하고 자기 마을 소의 승리를 마을의 승리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등은 소싸움이 단순히 소 주인 간의 싸움이 아니라 그 소가 속해 있는 마을 간의 싸움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성격은 여러 마을들이 참여하는 보다 큰 규모의 소싸움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싸움에 참여하는 소가 있으면 마을의 풍물패들이 그 소와 함께 싸움터로 나아가서 열렬히 응원할 뿐만 아니라 몸소 싸움에 참여한다. 마을 사람들이 싸움에 참여하는 방식은 대단히 직접적이다. 자기 마을의 소가 불리하면 상대편 소의 꼬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상대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되면 소싸움판은 난장판이 되게 마련이다. “센 소도 그 마을의 세력이 없으면 진다.”라는 말이 통용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싸움이 끝나면 마을사람들은 소를 앞세우고 풍물을 잡히며 함께 돌아온다. 승리하였을 경우 마을은 온통 잔치판이 되고 대개 부농인 소 주인은 음주가무가 따르는 뒤풀이를 주선하게 마련이다.

이처럼 각 수준의 소싸움이 공동체의 참여와 후원 아래 행해졌고, 그 승패를 마을의 승패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소싸움은 줄당기기, 동채싸움, 팔매싸움 등과 마찬가지로 대동놀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동체 → 소 주인 → 소 ↔ 소 ← 소 주인 ← 공동체

소싸움은 외형상 소들의 싸움이지만 그 배후에는 우선 소 주인이 있고 다음으로 그 소가 속한 공동체가 있다. 이 싸움에는 일차적으로 소 주인의 명예와 위신이 걸려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소속 공동체의 위신과 명예가 걸려 있다. 따라서 ‘소 - 소 주인 - 공동체’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싸움의 주체를 이루게 된다.

전통적 소싸움에는 이렇다 할 물질적 유인(誘因)이 없다. 두 마을 간의 싸움인 경우에는 상품이 전혀 없었다. 이길 경우 소 주인이 마을사람들에게 한턱을 쓰기 때문에 오히려 경제적으로는 손해였다. 여러 마을이 참여하는 보다 큰 규모의 소싸움에서는 우승한 소에게 ‘광목필’ 정도를 걸어주었다고 하지만 이 역시 보다 후대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처럼 특별한 물질적 유인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싸움이 대단히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무언가 다른 유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보자들은 이것을 흔히 ‘싱벽’ 즉 싸움에 이기고자 하는 욕구, 혹은 ‘세도’ 즉 마을의 힘 내지는 위세의 과시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전통적 소싸움은 물질적 유인 때문에 행해진 것이 아니라 소 주인, 보다 깊게는 해당 지연공동체의 명예, 혹은 위신의 과시라는 비물질적 유인 때문에 행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싸움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 속에서 소와 싸움의 의미는 어떠할까? 우선 싸움소는 소 주인, 나아가서는 공동체를 대리하는 존재이다. 소는 곧 마을사람들을 대신해 싸우는 존재로서 마을사람들은 그들의 싸움을 소에게 위임한다. 이러한 위임을 통해서 마을 사람들은 싸움소와 그들을 동일시하며 그러한 동일시는 소의 수성(獸性)에 대한 인간의 참여와 소에 대한 인성(人性)의 부여라는 교환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마치 소가 말귀를 알아듣는 듯 싸움의 요령을 알려주고 격려와 응원의 고함을 쉴 새 없이 내지르는 소 주인과 마을사람들의 모습은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싸움소는 소속 지연공동체의 모든 소를 대리하는 존재이자 소와 함께 농업생산을 주도하는 일꾼들, 즉 마을사람들의 대리자라는 점에서 마을의 모든 남성, 나아가서는 모든 마을사람들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마을의 소들 그리고 마을 일꾼들의 힘의 총합은 곧 해당 지연공동체의 현재의 생산력 및 미래의 생산력을 표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마을을 대표하여 소싸움에 나서는 황소는 곧 그 마을의 생산력, 그리고 생산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소싸움은 각 마을 간의 생산력의 경합이라는 문화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던 전통적 소싸움은 1970년대에 이르러 경남 진주를 시작으로 이른바 투우대회가 본격적으로 개최되면서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우선 전통적 소싸움의 주체였던 마을공동체가 뒤로 물러나고 소 주인이 싸움의 주체가 되었으며 엄격한 경기 규칙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전통적 소싸움에는 없던 체급 구분이 이루어지고 토너먼트 방식으로 각 체급의 우승 소를 가리게 되었다. 또한 우승 소에게는 거액의 상금을 주고, 그 소의 몸값도 몇 배나 오름으로써 물질적 유인이 소싸움의 중요한 동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현재 소싸움은 대구, 경북 청도, 경남 의령·진주·김해·창원, 전북 정읍 등에서 연중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청도에서는 대규모 실내 투우장을 건설하여 소싸움을 상설화하고 우권(牛券)을 발행하여, 그 동안 음성적으로 이루어졌던 소싸움 도박을 양성화하는 등 획기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참고문헌

소싸움의 변화와 그 원인에 대한 고찰-마을공동체적 성격과 놀이 원리를 중심으로 (한양명, 민속학연구2, 국립민속박물관, 1995)

소싸움

소싸움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가을(秋) > 8월 > 정일

집필자 한양명(韓陽明)

정의

두 마리 황소를 맞붙여 승부를 겨루는 놀이. 소를 중요한 생산수단으로 여겼던 전통사회에서 소싸움은 어느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임시로 벌이는 소싸움이 아니라 두 마을 또는 여러 마을에서 마을을 대표하는 소를 끌고 나와 연례적으로 벌인 소싸움은 경상남도 일원과 경상북도 청도 지역 등 이른바 가야문화권에서만 전승되어 있다.

내용

연례적으로 벌어진 놀이로서 소싸움은 주로 추석(秋夕) 무렵에 행해졌다. “정월 씨름, 팔월 소싸움”이라는 경북 청도 지역의 향언(鄕言)은 이를 말해준다. 이 시기는 수도재배의 힘든 노동이 일단락되는 농한기이다. 이 기간 중에 직접 농업생산에 종사한 일꾼들이 주도한 놀이가 바로 소싸움이었다. 현재까지도 소싸움이 강성한 경남 진주 지역에서 “소싸움 날은 상머슴의 날이다.”라는 말이 통용되는 것도 이런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추석이 되면 인접한 두 마을에서는 자연스레 소싸움 이야기가 나오고 각 마을에서는 싸움에 나설 소를 가린다. 싸움소는 평소 초동(樵童)들의 소싸움 등을 통해서 마을에서 가장 강하다고 공인된 소로서, 싸움에 대비하여 특별한 훈련을 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싸움 장소는 통상 두 마을의 경계 지역에 있는 개천이나 논밭이다. 개천에서 싸울 경우, 소들은 하상(河床)에서 싸우고 사람들은 개천 둑에서 응원한다. 소싸움에 참여하는 마을사람들은 그 싸움을 자기 마을의 위신이 걸린 싸움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음은 마을 대항전으로 벌어진 소싸움의 사례이다. 경북 청도군 풍각면 봉기리 대 현리의 소싸움을 보면, 인접한 두 마을인 봉기리와 현리에서는 1930년대 중반까지 매년 추석 뒷날이나 그 다음 날에 두 마을 사이에 있는 개울에서 소싸움을 벌였다. 각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센 황소 한 마리씩 출전하는데 소의 목에는 적·청·황의 세 천을 엮은 ‘이남기(끈)’를 둘러주었다. 소를 앞세우고 마을의 남녀노소가 함께 싸움터에 나가며 이때 풍물패를 꾸려 자기 마을 소를 응원하였다. 워낙 싸움이 거칠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망라한 마을사람들은 개울의 둑 위에서 열렬히 응원하였고, 소들은 하상(河床)에서 싸움을 벌였다. 이때 소를 몰고 나온 머슴이나 소 주인은 싸움소를 따라 움직이며 싸움을 독려하였다. 승부는 머리를 맞대고 싸우다가 먼저 도망가는 쪽이 패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대개 단판으로 결정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패한 마을에서 다른 소를 끌고 나와서 이긴 마을의 소와 한 번 더 싸움을 붙인 적도 있다. 이 싸움에는 어떤 상품도 걸려 있지 않으며, ‘싱벽[勝負慾]’과 마을의 ‘세도’때문에 싸웠다고 한다. 싸움에서 이기면 풍물패를 앞세우고, 머슴이 소를 타고 마을로 돌아오며 소의 주인집에서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내놓아 마을 잔치가 벌어졌다. 인접한 두 마을 간의 대항전이 아니라 근동(近洞), 혹은 관내의 다수 마을이 참여하는 보다 큰 규모의 소싸움 역시 추석 무렵에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경남 의령의 경우, 20세기 초엽에 적어도 수십 개 마을의 소들이 출전하고 난장이 서는 대규모 소싸움이 벌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1909년,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선생이 진양잡영(晉陽雜詠) 12수를 발표하면서 소싸움을 평하기를 “당지(當地)의 투우(鬪牛)가 심히 성하여 천백(千百)명의 같은 무리들이 크게 충돌을 벌이면 그 등약(騰躍)하고 포효하는 모습이 진실로 일대 장관이더라.”라고 한 것도, ‘수무바다’라고 일컫던 남강 백사장에서 벌어진 대규모의 소싸움을 본 소감을 피력한 것이다. 다음은 여러 마을의 소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소싸움의 사례이다. 경북 의령의 소싸움을 보면, 소싸움은 바쁜 논농사일이 한풀 끝난 칠월 백중이나 팔월 한가위 무렵에 행해졌다. 싸움은 넓은 모래사장이나 풀밭에서 이루어졌는데, 의령읍의 남산천과 정암진의 모래사장, 가례면의 한내변, 유곡면의 세간천변, 부림천변 등이 소싸움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싸움의 장소가 정해지면 음식장사들이 미리 몰려들어 일대 난장을 이룬다. 고삐와 코뚜레를 푼 싸움소들은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상머슴이나 주인에게 이끌려 싸움터의 이곳, 저곳을 돌면서 자기편 관중들로부터 열렬한 격려와 쓰다듬을 받는다. 싸움터에 나간 싸움소가 잠깐 동안 상대를 응시하다가 순간적으로 상대방의 허를 찔러 급소를 공격해 들어가면 모래사장, 혹은 풀밭은 격투장으로 변한다. 관중들의 열렬한 응원 속에서 소들은 ‘뿔걸이’, ‘옆목치기’, ‘들치기’ 등의 공격방법을 동원하여 상대방을 밀어붙인다. 이때 주인은 채찍으로 소를 때리면서 ‘받아라’, ‘찍어라’, ‘이러이러’ 하고 외치면서 소를 독려한다. 약한 쪽이 싸움을 포기하고 달아날 때까지는 보통 몇 분이 소요되지만 길게는 수십 분이 소요될 경우도 있다. 싸움의 결과는 소의 동작을 보면 미리 알 수 있다. 달아날 방향을 찾는 듯이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거나 꼬리를 흔들고, 뒷배가 들쭉날쭉하면서 똥을 싸거나 입에 흰 거품을 내뿜으면 이미 자신을 잃었다는 표시이다. 싸움에서 이긴 소는 목과 뿔을 비단과 들꽃으로 장식하기도 하며 소등에는 상머슴이나 주인이 올라타서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풍물을 울리고 춤을 추면서 개선하는 군사들처럼 마을로 돌아온다. 마을로 들어오면 소의 주인집에서 마련한 음식으로 밤늦도록 잔치를 즐긴다. 이와 같이 보다 큰 규모의 소싸움, 즉 청도의 풍각면이나 이서면처럼 이름난 우시장을 중심으로 면 관내의 각 마을들이 참여하던 소싸움이나 의령, 진주, 김해 등지에서 행해진 고을 규모의 초대형 소싸움이 역사상 어떠한 시점에서 시작되었는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보면 이앙법(移秧法)이 널리 퍼짐으로써 집약적인 노동력 투입이 요청되고 그에 따라 두레 등의 협업관행이 활성화되었으며, 오늘날과 같은 집락(集落)이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고 축력의 이용이 획기적으로 증대된 조선 후기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처럼 범공동체적인 소싸움이 등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소싸움의 주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두 마을 간의 소싸움일 경우, 싸움에 참여하는 각 마을에서 가장 세다고 공인된 소를 싸움소로 내세운 점, 그 소가 지게 되면 마을의 다른 소를 데리고 와서라도 이기려고 했다는 점, 풍물패가 함께 했다는 점, 소싸움을 마을 간의 ‘세도(세력) 싸움’으로 인식하고 자기 마을 소의 승리를 마을의 승리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등은 소싸움이 단순히 소 주인 간의 싸움이 아니라 그 소가 속해 있는 마을 간의 싸움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성격은 여러 마을들이 참여하는 보다 큰 규모의 소싸움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싸움에 참여하는 소가 있으면 마을의 풍물패들이 그 소와 함께 싸움터로 나아가서 열렬히 응원할 뿐만 아니라 몸소 싸움에 참여한다. 마을 사람들이 싸움에 참여하는 방식은 대단히 직접적이다. 자기 마을의 소가 불리하면 상대편 소의 꼬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상대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되면 소싸움판은 난장판이 되게 마련이다. “센 소도 그 마을의 세력이 없으면 진다.”라는 말이 통용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싸움이 끝나면 마을사람들은 소를 앞세우고 풍물을 잡히며 함께 돌아온다. 승리하였을 경우 마을은 온통 잔치판이 되고 대개 부농인 소 주인은 음주가무가 따르는 뒤풀이를 주선하게 마련이다. 이처럼 각 수준의 소싸움이 공동체의 참여와 후원 아래 행해졌고, 그 승패를 마을의 승패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소싸움은 줄당기기, 동채싸움, 팔매싸움 등과 마찬가지로 대동놀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동체 → 소 주인 → 소 ↔ 소 ← 소 주인 ← 공동체 소싸움은 외형상 소들의 싸움이지만 그 배후에는 우선 소 주인이 있고 다음으로 그 소가 속한 공동체가 있다. 이 싸움에는 일차적으로 소 주인의 명예와 위신이 걸려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소속 공동체의 위신과 명예가 걸려 있다. 따라서 ‘소 - 소 주인 - 공동체’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싸움의 주체를 이루게 된다. 전통적 소싸움에는 이렇다 할 물질적 유인(誘因)이 없다. 두 마을 간의 싸움인 경우에는 상품이 전혀 없었다. 이길 경우 소 주인이 마을사람들에게 한턱을 쓰기 때문에 오히려 경제적으로는 손해였다. 여러 마을이 참여하는 보다 큰 규모의 소싸움에서는 우승한 소에게 ‘광목필’ 정도를 걸어주었다고 하지만 이 역시 보다 후대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처럼 특별한 물질적 유인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싸움이 대단히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무언가 다른 유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보자들은 이것을 흔히 ‘싱벽’ 즉 싸움에 이기고자 하는 욕구, 혹은 ‘세도’ 즉 마을의 힘 내지는 위세의 과시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전통적 소싸움은 물질적 유인 때문에 행해진 것이 아니라 소 주인, 보다 깊게는 해당 지연공동체의 명예, 혹은 위신의 과시라는 비물질적 유인 때문에 행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싸움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 속에서 소와 싸움의 의미는 어떠할까? 우선 싸움소는 소 주인, 나아가서는 공동체를 대리하는 존재이다. 소는 곧 마을사람들을 대신해 싸우는 존재로서 마을사람들은 그들의 싸움을 소에게 위임한다. 이러한 위임을 통해서 마을 사람들은 싸움소와 그들을 동일시하며 그러한 동일시는 소의 수성(獸性)에 대한 인간의 참여와 소에 대한 인성(人性)의 부여라는 교환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마치 소가 말귀를 알아듣는 듯 싸움의 요령을 알려주고 격려와 응원의 고함을 쉴 새 없이 내지르는 소 주인과 마을사람들의 모습은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싸움소는 소속 지연공동체의 모든 소를 대리하는 존재이자 소와 함께 농업생산을 주도하는 일꾼들, 즉 마을사람들의 대리자라는 점에서 마을의 모든 남성, 나아가서는 모든 마을사람들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마을의 소들 그리고 마을 일꾼들의 힘의 총합은 곧 해당 지연공동체의 현재의 생산력 및 미래의 생산력을 표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마을을 대표하여 소싸움에 나서는 황소는 곧 그 마을의 생산력, 그리고 생산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소싸움은 각 마을 간의 생산력의 경합이라는 문화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던 전통적 소싸움은 1970년대에 이르러 경남 진주를 시작으로 이른바 투우대회가 본격적으로 개최되면서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우선 전통적 소싸움의 주체였던 마을공동체가 뒤로 물러나고 소 주인이 싸움의 주체가 되었으며 엄격한 경기 규칙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전통적 소싸움에는 없던 체급 구분이 이루어지고 토너먼트 방식으로 각 체급의 우승 소를 가리게 되었다. 또한 우승 소에게는 거액의 상금을 주고, 그 소의 몸값도 몇 배나 오름으로써 물질적 유인이 소싸움의 중요한 동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현재 소싸움은 대구, 경북 청도, 경남 의령·진주·김해·창원, 전북 정읍 등에서 연중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청도에서는 대규모 실내 투우장을 건설하여 소싸움을 상설화하고 우권(牛券)을 발행하여, 그 동안 음성적으로 이루어졌던 소싸움 도박을 양성화하는 등 획기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참고문헌

소싸움의 변화와 그 원인에 대한 고찰-마을공동체적 성격과 놀이 원리를 중심으로 (한양명, 민속학연구2, 국립민속박물관,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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