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제(先農祭)

한자명

先農祭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봄(春) > 2월 > 의례

집필자 한형주(韓亨周)

정의

농업신인 신농(神農)과 후직(后稷)에게 연풍(年豐)을 기원하며 드리던 국가제의. 제사 후에 국왕이 동교(東郊)의 적전(籍田)에서 오추례(五推禮)를 시행하여 농사의 모범을 보이기 때문에 경적례(耕籍禮) 또는 적전례(籍田禮)라고도 부른다.

선농제는 유교 국가의 제왕들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천적인 권농책(勸農策)으로 강조했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에서 일찍부터 시행되었다. 선농제의 시행 시기는 삼국시대에는 기록이 없고, 고려시대에는 맹춘(孟春: 음력 1월)의 길해(吉亥: 길한 해일)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맹춘에는 추워서 파종할 시기가 아니라며 경칩(驚蟄) 뒤의 길해로 그 시기를 바꾸었다.

선농(先農)의 명칭에서 보듯이 중농(仲農)과 후농(後農)의 관념도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2 「잡지(雜誌)」 제사조(祭祀條)에는 신라에서 입춘(立春) 후 해일(亥日)에 선농을, 입하(立夏) 후 해일에 중농을, 입추(立秋) 후 해일에 후농을 각각 제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문종 2년(1048) 5월에 중농을, 정종 12년(1046) 4월에 후농을 제사한 사례가 보인다. 이로 볼 때 중농과 후농은 신농과 후직에게 제사할 때 그 시기의 선후에 따라 붙인 명칭인 것 같다. 이 관념은 조선 초까지 있었지만 고전(古典)에 중농과 후농이 없다는 판단으로 그 제사가 폐지되고(『태종실록(太宗實錄)』 권27 태종 14년 4월 정사), 결국 선농만이 제사의 대상이 되었다.

역사

선농제의 기원은 『주례(周禮)』와 『예기(禮記)』에 적전(藉田)의 제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의 주대(周代) 이전으로 소급된다. 그렇지만 선농제가 유교적 국가 제사로 제도화된 것은 한대(漢代)의 일이며, 당대(唐代)에는 사전(祀典)에 중사(中祀)로 규정되었다.

우리나라의 선농제는 앞서 『삼국사기』에서 언급한 신라의 선농과 중농, 후농의 제사에서 그 기록이 처음 나온다. 아마도 재래의 농업신 제사에 중국에서 도입된 유교적 제사가 결합된 형태인 것 같은데, 이 외에는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다.

고려시대의 선농제는 성종 2년(983) 정월 을해일에 신농과 후직을 제사했다는 기록에서 처음 사례가 나온다. 이후 선농제는 제도적으로 정비되었는데,『고려사』 권62 「예지」4 적전조(籍田條)에 따르면 제단의 규모는 사방 3장(丈), 높이 5척으로 사면에 계단이 있으며, 양유(兩壝)의 체제로 매 유마다 25보씩에 이르렀다. 제사의 등급은 중사(中祀)였다. 선농제는 고려시대 유교적인 중농 이념과 권농책의 상징성으로 인해 이후 현종, 인종 같은 왕들이 직접 제사를 주관할 정도로 중시되었다. 그러나 몽골 간섭기 이후 그 제도가 무너지고 적전(籍田)은 왕의 사냥터로 이용되기에 이르렀는데, 공민왕 때에 사전(祀典) 개편으로 전기의 제도로 복구를 모색했지만, 결국 완수되지 못한 상황에서 왕조가 교체되었다.

조선시대의 선농제는 태종 13년(1413) 사전(祀典)을 분정(分定)할 때 중사(中祀)에 편입되었고, 동왕 16년(1416) 제단이 축조되면서 새 제도가 마련되었다. 선농제단은 세종 12년(1430)에 최종 수정되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등재되었는데, 그 규모는 사방 2장 3척, 높이 2척 7촌, 양유(兩壝)로 고려 때보다 규모가 축소되었다. 한편 종묘제와 사직제 같은 중앙 제사의 비용을 대는 일종의 제전(祭田)인 적전의 제도 역시 마련되었다. 적전은 동적전과 서적전으로 구성되는데, 그 규모는 4백결로(『태종실록』 권27 태종 14년 4월 계축), 이 중 서적전의 소출만 연 5천석 이상이었다(『세종실록(世宗實錄)』 권29 세종 7년 8월 무자).

조선시대의 선농친제(先農親祭)는 성종대에 처음 행해졌다. 성종은 6년(1475) 윤 정월 을해일에 백관을 거느리고 동교(東郊)의 제단에서 선농제를 지낸 뒤 적전에서 오추례(五推禮)를 행하였고, 동왕 19년(1488) 윤정월과 24년(1493) 3월에도 각각 친히 제사했다. 이후 중종, 명종, 인조, 숙종 같은 역대의 왕들이 친행했다는 기록이 종종 나온다. 그리고 비록 국왕의 친제가 없어도 대신들의 섭행으로 선농제가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내용

선농제는 시행 주체에 따라 국왕의 친제(親祭)와 대신의 섭제(攝祭)로 구분된다.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친제는 제사의 선행절차(先行節次), 거가출궁(車駕出宮), 행례절차(行禮節次), 경적례(耕籍禮), 거가환궁(車駕還宮)의 5단계로 진행된다.

선행절차에는 제관들의 재계(齋戒)와 제수의 진설(陳設), 희생(犧牲)의 검사가 포함된다. 거가출궁은 국왕이 제단에 가는 과정으로, 국왕이 선농단에 도착하면 의식이 시작된다. 행례절차는 전폐(奠幣)와 작헌(酌獻), 송신(送神)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전폐는 국왕이 먼저 정위(正位)인 신농에게 3번 향(香)을 올리고 폐백을 드리며 절을 한 후 배위(配位)인 후직에게 같은 의식을 시행한다. 전폐 후에 모혈(毛血)을 올린다. 작헌에서는 예찬(禮饌)을 올린 후 왕이 정위와 배위에게 각각 술잔을 올리고 엎드린 후 축문을 읽고 절을 하는 초헌례가 시행된다. 초헌을 마치면 아헌례와 종헌례가 시행된다. 헌례가 끝나면 음복(飮福)과 수조(受胙)를 하고 제기를 거둔다. 이후 제수를 구덩이에 파묻고 헌관 이하가 퇴장한다.

이상의 제례가 끝나면 왕이 적전에서 경적의 의식을 행한다. 먼저 왕이 경적위(耕籍位)에 이르러 다섯 번 밭가는 예[五推禮]를 행하고 관경대(觀耕臺)에 올라간다. 이어 종친과 재신(宰臣)이 칠추례(七推禮)를, 판서와 대간이 구추례(九推禮)를 각각 행하고, 이후에 서인(庶人)이 백묘(百畝)를 경작하였다. 이어 기민(耆民)이 국왕에게 4배(拜)하고, 왕의 교서(敎書)가 반포된다. 이상의 의식을 마치면 국왕 이하는 퇴장하고 서인이 파종(播種)한다.

의의

선농제는 농업신인 신농과 후직을 대상으로 한 국가의 제사이다. 전근대 산업에서 농업의 비중은 절대적이었고, 농민 생활의 안정은 왕조 통치의 기본 바탕이었다. 이 때문에 고대부터 농업 관련 제사들이 주목되었는데, 유교적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강조했던 고려시대 이후로는 대사(大祀)인 사직제와 중사인 선농제를 중심으로 그 의례를 시행함으로써 민생(民生)의 안정과 권농정책(勸農政策)의 상징성을 추구하였다. 이 중에서도 선농제는 관념적인 제사 의식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국왕이 직접 농사에 참여해 모범을 보이는 실천성을 수반했다는 점에서 다른 국가 제사들과는 구별되는 모습을 보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國朝續五禮儀, 國朝五禮儀, 三國史記, 朝鮮王朝實錄, 春官通考, 조선시대 親耕禮의 변천과 그 의미 (이욱, 宗敎硏究34, 韓國宗敎學會, 2004), 韓國中世禮思想硏究 (李範稷, 一潮閣, 1991), 朝鮮初期 祀典에 관한 硏究 (金海榮, 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學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4), 儒敎 祈��儀禮에 관한 硏究-朝鮮時代 國家祀典을 中心으로 (李煜, 서울大學校 博士學位論文, 2000), 朝鮮初期 中祀祭禮의 정비와 그 운영 (韓亨周, 震檀學報89, 震檀學會, 2000), 朝鮮初期 國家祭禮 硏究 (韓亨周, 一潮閣, 2002), 高麗前期 重農理念과 農耕儀禮 (韓政洙, 건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선농제

선농제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봄(春) > 2월 > 의례

집필자 한형주(韓亨周)

정의

농업신인 신농(神農)과 후직(后稷)에게 연풍(年豐)을 기원하며 드리던 국가제의. 제사 후에 국왕이 동교(東郊)의 적전(籍田)에서 오추례(五推禮)를 시행하여 농사의 모범을 보이기 때문에 경적례(耕籍禮) 또는 적전례(籍田禮)라고도 부른다. 선농제는 유교 국가의 제왕들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천적인 권농책(勸農策)으로 강조했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에서 일찍부터 시행되었다. 선농제의 시행 시기는 삼국시대에는 기록이 없고, 고려시대에는 맹춘(孟春: 음력 1월)의 길해(吉亥: 길한 해일)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맹춘에는 추워서 파종할 시기가 아니라며 경칩(驚蟄) 뒤의 길해로 그 시기를 바꾸었다. 선농(先農)의 명칭에서 보듯이 중농(仲農)과 후농(後農)의 관념도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2 「잡지(雜誌)」 제사조(祭祀條)에는 신라에서 입춘(立春) 후 해일(亥日)에 선농을, 입하(立夏) 후 해일에 중농을, 입추(立秋) 후 해일에 후농을 각각 제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문종 2년(1048) 5월에 중농을, 정종 12년(1046) 4월에 후농을 제사한 사례가 보인다. 이로 볼 때 중농과 후농은 신농과 후직에게 제사할 때 그 시기의 선후에 따라 붙인 명칭인 것 같다. 이 관념은 조선 초까지 있었지만 고전(古典)에 중농과 후농이 없다는 판단으로 그 제사가 폐지되고(『태종실록(太宗實錄)』 권27 태종 14년 4월 정사), 결국 선농만이 제사의 대상이 되었다.

역사

선농제의 기원은 『주례(周禮)』와 『예기(禮記)』에 적전(藉田)의 제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의 주대(周代) 이전으로 소급된다. 그렇지만 선농제가 유교적 국가 제사로 제도화된 것은 한대(漢代)의 일이며, 당대(唐代)에는 사전(祀典)에 중사(中祀)로 규정되었다. 우리나라의 선농제는 앞서 『삼국사기』에서 언급한 신라의 선농과 중농, 후농의 제사에서 그 기록이 처음 나온다. 아마도 재래의 농업신 제사에 중국에서 도입된 유교적 제사가 결합된 형태인 것 같은데, 이 외에는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다. 고려시대의 선농제는 성종 2년(983) 정월 을해일에 신농과 후직을 제사했다는 기록에서 처음 사례가 나온다. 이후 선농제는 제도적으로 정비되었는데,『고려사』 권62 「예지」4 적전조(籍田條)에 따르면 제단의 규모는 사방 3장(丈), 높이 5척으로 사면에 계단이 있으며, 양유(兩壝)의 체제로 매 유마다 25보씩에 이르렀다. 제사의 등급은 중사(中祀)였다. 선농제는 고려시대 유교적인 중농 이념과 권농책의 상징성으로 인해 이후 현종, 인종 같은 왕들이 직접 제사를 주관할 정도로 중시되었다. 그러나 몽골 간섭기 이후 그 제도가 무너지고 적전(籍田)은 왕의 사냥터로 이용되기에 이르렀는데, 공민왕 때에 사전(祀典) 개편으로 전기의 제도로 복구를 모색했지만, 결국 완수되지 못한 상황에서 왕조가 교체되었다. 조선시대의 선농제는 태종 13년(1413) 사전(祀典)을 분정(分定)할 때 중사(中祀)에 편입되었고, 동왕 16년(1416) 제단이 축조되면서 새 제도가 마련되었다. 선농제단은 세종 12년(1430)에 최종 수정되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등재되었는데, 그 규모는 사방 2장 3척, 높이 2척 7촌, 양유(兩壝)로 고려 때보다 규모가 축소되었다. 한편 종묘제와 사직제 같은 중앙 제사의 비용을 대는 일종의 제전(祭田)인 적전의 제도 역시 마련되었다. 적전은 동적전과 서적전으로 구성되는데, 그 규모는 4백결로(『태종실록』 권27 태종 14년 4월 계축), 이 중 서적전의 소출만 연 5천석 이상이었다(『세종실록(世宗實錄)』 권29 세종 7년 8월 무자). 조선시대의 선농친제(先農親祭)는 성종대에 처음 행해졌다. 성종은 6년(1475) 윤 정월 을해일에 백관을 거느리고 동교(東郊)의 제단에서 선농제를 지낸 뒤 적전에서 오추례(五推禮)를 행하였고, 동왕 19년(1488) 윤정월과 24년(1493) 3월에도 각각 친히 제사했다. 이후 중종, 명종, 인조, 숙종 같은 역대의 왕들이 친행했다는 기록이 종종 나온다. 그리고 비록 국왕의 친제가 없어도 대신들의 섭행으로 선농제가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내용

선농제는 시행 주체에 따라 국왕의 친제(親祭)와 대신의 섭제(攝祭)로 구분된다.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친제는 제사의 선행절차(先行節次), 거가출궁(車駕出宮), 행례절차(行禮節次), 경적례(耕籍禮), 거가환궁(車駕還宮)의 5단계로 진행된다. 선행절차에는 제관들의 재계(齋戒)와 제수의 진설(陳設), 희생(犧牲)의 검사가 포함된다. 거가출궁은 국왕이 제단에 가는 과정으로, 국왕이 선농단에 도착하면 의식이 시작된다. 행례절차는 전폐(奠幣)와 작헌(酌獻), 송신(送神)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전폐는 국왕이 먼저 정위(正位)인 신농에게 3번 향(香)을 올리고 폐백을 드리며 절을 한 후 배위(配位)인 후직에게 같은 의식을 시행한다. 전폐 후에 모혈(毛血)을 올린다. 작헌에서는 예찬(禮饌)을 올린 후 왕이 정위와 배위에게 각각 술잔을 올리고 엎드린 후 축문을 읽고 절을 하는 초헌례가 시행된다. 초헌을 마치면 아헌례와 종헌례가 시행된다. 헌례가 끝나면 음복(飮福)과 수조(受胙)를 하고 제기를 거둔다. 이후 제수를 구덩이에 파묻고 헌관 이하가 퇴장한다. 이상의 제례가 끝나면 왕이 적전에서 경적의 의식을 행한다. 먼저 왕이 경적위(耕籍位)에 이르러 다섯 번 밭가는 예[五推禮]를 행하고 관경대(觀耕臺)에 올라간다. 이어 종친과 재신(宰臣)이 칠추례(七推禮)를, 판서와 대간이 구추례(九推禮)를 각각 행하고, 이후에 서인(庶人)이 백묘(百畝)를 경작하였다. 이어 기민(耆民)이 국왕에게 4배(拜)하고, 왕의 교서(敎書)가 반포된다. 이상의 의식을 마치면 국왕 이하는 퇴장하고 서인이 파종(播種)한다.

의의

선농제는 농업신인 신농과 후직을 대상으로 한 국가의 제사이다. 전근대 산업에서 농업의 비중은 절대적이었고, 농민 생활의 안정은 왕조 통치의 기본 바탕이었다. 이 때문에 고대부터 농업 관련 제사들이 주목되었는데, 유교적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강조했던 고려시대 이후로는 대사(大祀)인 사직제와 중사인 선농제를 중심으로 그 의례를 시행함으로써 민생(民生)의 안정과 권농정책(勸農政策)의 상징성을 추구하였다. 이 중에서도 선농제는 관념적인 제사 의식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국왕이 직접 농사에 참여해 모범을 보이는 실천성을 수반했다는 점에서 다른 국가 제사들과는 구별되는 모습을 보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國朝續五禮儀, 國朝五禮儀, 三國史記, 朝鮮王朝實錄, 春官通考조선시대 親耕禮의 변천과 그 의미 (이욱, 宗敎硏究34, 韓國宗敎學會, 2004)韓國中世禮思想硏究 (李範稷, 一潮閣, 1991)朝鮮初期 祀典에 관한 硏究 (金海榮, 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學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4)儒敎 祈��儀禮에 관한 硏究-朝鮮時代 國家祀典을 中心으로 (李煜, 서울大學校 博士學位論文, 2000)朝鮮初期 中祀祭禮의 정비와 그 운영 (韓亨周, 震檀學報89, 震檀學會, 2000)朝鮮初期 國家祭禮 硏究 (韓亨周, 一潮閣, 2002)高麗前期 重農理念과 農耕儀禮 (韓政洙, 건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