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대제

한자명

社稷大祭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봄(春) > 2월 > 의례

집필자 한형주(韓亨周)
갱신일 2018-11-09

정의

전근대 사회에서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시고 국가의 안녕과 농사의 풍성함을 기원하며 드리던 제사. 2000년 중요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제사를 드리는 대상은 사(社)와 직(稷)을 정위(正位)로 하고, 여기에 후토(后土)와 후직(后稷)을 배향신으로 삼아 같이 모신다.

사직(社稷)은 사와 직의 합성어이다. 직은 고대 이래로 재배되던 오곡(五穀) 중에서 그 대표자로 인식되어 제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사는 고대 중국인의 수목신앙(樹木信仰)의 한 형태 또는 토지신이나 마을 공동체의 집단모임소 같은 여러 형태로 인식되다가 한대(漢代) 이후 ‘사(社)는 토신(土神), 직(稷)은 곡신(穀神)’이라는 정현(鄭玄)의 설에 따라 토지신으로 이해되었다.

개관

사직제는 토지와 곡식의 신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전근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던 농업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농업의 안정적인 재생산을 추구하는 농민들의 열망과 이들의 안정이 국가의 유지와 발전의 바탕이 된다는 통치자들의 의식이 결합되어 예제로 표출된 것이 사직제였다. 사직제는 이러한 속성으로 단순히 국가의 제사라는 의미로만 한정되지 않고, 국가 자체를 의미하는 보편적인 용어로도 많이 쓰이게 되었다.

사직제는 정기적인 제사와 부정기적인 제사로 구분된다. 정기적인 제사는 중춘(仲春: 음력 2월), 중추(仲秋: 음력 8월), 납일[臘日: 동지 뒤 셋째 미일(未日)]에 시행하는데, 이때는 제사의 규모가 가장 큰 대제(大祭)로 시행한다. 부정기적인 제사로는 기우(祈雨)나 기청(祈晴) 또는 치병(治病)을 위한 기고제(祈告祭)가 있고, 책봉(冊封), 관혼(冠婚), 출병(出兵) 같은 국가의 큰 일이 있을 때 시행하는 고유제(告由祭)가 있다.

한편 사직은 제사의 시행 주체와 목적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였다. 『예기(禮記)』 권22 「제법(祭法)」에는 “왕이 군성(群姓)을 위해 세운 사(社)를 태사(太社), 왕이 스스로를 위해 세운 사를 왕사(王社)라 하며, 제후가 백성(百姓)을 위해 세운 사를 국사(國社), 제후가 스스로를 위해 세운 사를 후사(侯社)라 하며, 대부 이하가 무리를 지어 세운 사를 치사(置社)라 한다.”라는 설명이 있다. 태사, 국사, 치사는 주관자의 지위에 따라 구분한 것이고, 왕사, 후사는 제사의 목적이 공적인가 사적인가에 따라 명칭을 달리한 것이다. 이것은 직(稷)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고대 이래 한국에서는 태사직(국사직)의 명칭은 보이지만, 천자(제후)의 사적인 왕사직(후사직)은 보이지 않아 사직제의 공적인 모습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유래

사직의 용례는 『주례(周禮)』, 『예기(禮記)』, 『맹자(孟子)』 같은 선진(先秦)시대의 경전에서 찾아진다. 이것은 사직제의 기원이 중국의 주대(周代)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려준다. 그렇지만 사직제가 유교 이념에 입각한 국가 제사로 시행되기 시작한 것은 한대(漢代)부터이며, 당대(唐代)를 거치면서 보다 체계화되었고, 이후 사직은 중국 역대 정사(正史)의 예지(禮志) 길례(吉禮)에 중요한 항목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의 사직은 환구(?丘), 방택(方澤), 종묘(宗廟) 같은 다른 국가 제사들에 비해 그 비중이 떨어졌다. 역대 오례(五禮)의 근간이 되었던 당의 『개원례(開元禮)』에 사직은 큰 제사인 대사(大祀)가 아닌 중사(中祀)에 편입되었고, 이는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가 송대(宋代)에 이르러 사직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대사로 승격되었고, 이후 명(明)과 청(淸)을 거치면서 그대로 이어졌다. 이같이 사직은 당대 이전에는 중사, 송대 이후에는 대사로 그 비중이 달랐지만 전반적으로 환구나 종묘에 비견될 정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사직과 성격상 유사하지만 천하의 모든 토지를 대상으로 삼은 방택(方澤)이 국가 제사에서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이후 사직제가 대사로 간주되었고, 특히 조선에서는 천지의 제사인 환구제와 방택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더욱 컸다.

내용

고대 국가에서 사직의 용례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3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1세기 초인 유리왕대에 처음 나타난다. 그러나 이때의 사직은 국가를 의미하는 용어였고, 건축물로서의 사직은 동천왕 21년(247) 수도인 환도성이 전란으로 피폐하게 되자, 평양성을 쌓고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는 기록에서 비로소 보인다. 그 후 고국양왕 8년(391)에 왕명으로 국사(國社)를 세우고, 종묘를 수리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와 「제사지(祭祀志)」에 나온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魏書)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3세기 전반에 왕실인 계루부(桂婁部)와 전왕족인 소노부(消奴部)에 사직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고국양왕 8년에 세웠다는 국사는 소수림왕 이후 왕권 강화와 제도 정비에 따라 계루부 왕실의 사직을 국가적인 사직으로 격상시켜 정비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3세기 이후 고구려에서 사직제가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사의 내용과 형식이 중국의 유교적인 제사인지, 토착의 농업신에 대한 제사인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3세기의 기록은 후자의 가능성이 크고, 고국양왕대 국사의 설립은 전자의 형식을 보다 강화시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에서는 37대 선덕왕대에 사직단이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의 사직제가 어떠한 형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미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로 당의 문물이 상당수 도입된 상태였다. 더구나 신라의 종묘가 천자의 7묘가 아닌 제후의 5묘를 기반으로 했고, 천지(天地)의 제사는 천자의 예라 하여 배제하며, 제후의 격에 맞추어 사직과 경내(境內)의 산천만을 제사했다는 사신(史臣)의 평은 이때의 사직제가 중국의 것, 그 중에서도 제후의 체제에 기반했음을 말해준다. 백제의 사직에 대해서는 남은 기록이 없다. 그렇지만 중국 문화의 도입이 활발했던 백제에서 사직제가 시행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고려시대의 사직제는 성종 10년(991) 개경의 서쪽에 사직단이 영조(營造)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사직단의 건립은 중국의 당제(唐制)에 근거하였다. 이후 사직제는 제도적인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몇 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사직단이 무너져 다시 재건하는 과정을 겪었다. 예컨대 현종 5년(1014)에 강감찬이 사직단을 수축하고 그 의주(儀註)를 찬정(撰定)한 것이나, 문종 6년(1052)에 거란의 침입으로 무너진 사직을 대신하여 개경 안 서쪽에 새로 사직단을 세운 것이 그 실례이다.

고려시대 사직제는 의종 때 최윤의(崔允儀)가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 50권을 편찬한 것에 기반을 둔다. 현재 이 의주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학자들이 『상정고금례』를 기초로 여러 자료들을 정리해 편찬한 『고려사』 「예지」 길례조를 통해 사직제의 내용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사직은 동쪽에 사(社)가, 서쪽에 직(稷)이 있었고, 후토(后土)와 후직(后稷)을 배향하였다. 그리고 제사의 시기는 중춘과 중추의 상무일(上戊日)과 납일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중국과 조선이 동일하다. 그런데 고려에서는 사와 직의 명칭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삼았다. 이것은 사직제가 천자의 예로 시행되었음을 의미하는데, 당시에 천지의 제사인 환구제와 방택제가 시행되었다는 사실과 결부되어 주목된다. 다만 국왕의 개인적인 기복을 위한 왕사(王社)와 왕직(王稷)의 제도가 운영되지 않아 중국과 구별되었다. 그런데 『고려사』에는 사직제를 큰 제사인 대사(大祀)로 규정했지만, 의식은 섭행을 전제로 한 사직의(社稷儀) 단 한 개만 있었다. 제의(祭儀)는 『개원례』의 내용을 바탕으로 했는데, 태위(太尉)를 초헌관, 태상경(太常卿)을 아헌관, 광록경(光祿卿)을 종헌관으로 각각 규정했으며 국왕은 빠져 있다. 이것은 문종을 비롯한 역대 국왕이 사직제에 참석했던 사례와는 맞지 않는다. 이에 대해 『고려사』 찬자(撰者)는 현종 5년(1014) 사직의주(社稷儀注)를 찬정했지만, 그것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렇지만 고려시대에는 지기(地祇)의 최고신이 방택이었고, 최고의 제사인 환구제가 천지인(天地人)의 합제(合祭)로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사직제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음은 분명하다.

조선시대의 사직제는 태조 4년(1395) 한양에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고, 그 해 제사를 시행하면서 시작되었다. 건국 초부터 사직제는 종묘제와 더불어 가장 규모가 큰 대사로 규정되었고, 관념상 지기(地祇)인 사직은 인귀(人鬼)인 종묘보다 상위인 국가 최고의 제사였다.

건국 초 사직제는 고려의 것이 그대로 시행되다가 태종대에 명나라 『홍무예제(洪武禮制)』의 주현사직의(州縣社稷儀)를 바탕으로 새로운 제의가 모색되었다. 그러다가 세종대 집현전(集賢殿)을 중심으로 고제(古制) 연구가 이루어짐으로써 『홍무예제』의 비판적 검토와 역대 중국의 사직제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었는데, 특히 송대(宋代)의 제의(祭儀)가 적극 검토, 수용되었다. 아울러 명과의 사대 관계를 고려해 고려의 태사(太社), 태직(太稷)제가 아닌 제후의 격에 맞춘 국사(國社), 국직(國稷)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직제는 일부의 수정을 거쳐 성종대 『국조오례의』 길례로 정리되었다.

중국과 고려에서 환구, 방택, 종묘에 비해 사직의 중요성이 떨어지고 그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것과 달리, 조선시대의 사직은 종묘와 비견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이것은 천지의 제사인 환구제와 방택제가 천자의 예라는 이유로 폐지된 후 자연신으로 유일하게 대사로 편입된 존재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조선왕조는 건국 이후 농본(農本)을 표방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창하였는데, 그 상징성이 사직제를 통해 구현되었다. 환구와 종묘를 양축으로 삼는 고려시대의 제사 체계와는 달리 조선시대의 국가 제사는 크게 종묘(영녕전 포함)를 중심으로 한 제사의 범주와 사직을 비롯해 선농(先農), 선잠(先蠶), 풍운뇌우(風雲雷雨), 악해독(嶽海瀆) 같은 농사와 관련된 신들의 범주가 양립하였는데, 사직은 후자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이었다.

이처럼 조선에서 사직제가 고려 때보다 중시되었지만, 동급의 종묘제와 비교할 때 국왕의 관심이 컸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건국 후 성종 대까지 대략 1세기 동안 국왕의 종묘제 참석이 41회로 나타나지만 사직친제 참석은 단 3회만 나타난다. 그나마 2회는 신왕의 즉위와 관련된 것이고, 농사와 관련된 사직제는 성종 16년(1485)의 1회에 불과하였다. 이후에도 사직친제는 그 사례가 별로 없고, 대부분 신하들의 섭제(攝祭)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국가의 공적인 차원에서는 종묘와 사직이 병렬되지만 실제로 국왕이 농본의 상징인 사직제보다 왕통의 상징인 종묘제를 더 중시했던 현실이 반영된 것이다. 이로 인해 관료들은 국왕과 달리 국가의 상징을 종묘보다는 사직에서 찾았고, 자신들을 가리킬 때 ‘종묘의 신하[宗廟之臣]’라기보다는 ‘사직의 신하[社稷之臣]’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직제에는 기존의 대제와 기고 외에 기곡(祈穀)이 새로 추가되었다. 원래 기곡제는 만물이 소생하는 1월에 환구에서 하늘에 대한 제사로 시행되었다. 따라서 제천(祭天)을 시행했던 고려시대와 조선의 세조대에는 기곡제가 당연했지만, 세조 사후 환구제가 폐지되자 이 역시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곡제가 농본(農本)을 상징하는 가장 큰 제사라는 인식과 그를 통해 통치자의 정통성을 천명(天命)과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결합되어 변형된 형태가 모색되었다. 최초의 기곡제는 중종 34년(1538) 흉년 뒤에는 기곡한다는 명분으로 선농(先農)에서 시행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는 국왕이 선농에서 친경(親耕)을 하며 기곡제를 거행했다. 그러나 숙종 21년(1694)에는 『예기』의 “맹춘(孟春)에 상제(上帝)께 기곡한다.”라는 구절을 근거로 정월에 사직에서 기곡제를 행하도록 정했고, 다음해 숙종은 직접 사직에서 기곡제를 시행하였다. 이어서 그 다음해에는 기곡제를 상시적인 행사로 법제화하였다. 이후 사직에서의 기곡제는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리고 그 규정은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 기재되었는데, 그 등급은 대사(大祀)로 하였다.

의의

사직제는 토지신과 곡식신을 대상으로 한 국가의 제사이다. 전근대의 산업에서 농업의 비중은 절대적이었고, 농민 생활의 안정은 왕조 통치의 기본 바탕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사직제는 고대부터 시행되었고, 유교적 통치 이념을 내세웠던 고려시대 이후로는 그 의례의 정비를 통해 중요한 국가 제사로 자리 잡았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적 왕도 정치를 구현하면서 민생(民生)의 안정을 사직제의 상징성에서 찾음으로써 그 중요성은 더욱더 강조되었다. 조선시대 종묘와 사직의 제사는 가장 중요한 국가 제사였지만 종묘가 왕통(王統)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중시되었다면, 사직은 농민 생활의 안정을 추구했던 치자들의 의식이 의례화된 것이다. 흔히 국가를 지칭할 때 종묘보다는 사직을 언급했던 것은 백성이 국가의 근간이고 농업이 안정되어야 국가가 유지될 수 있다는 농본의 중요성을 강조한 당대인들의 관념을 드러낸 것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國朝續五禮儀, 國朝五禮儀, 社稷署儀軌, 三國史記, 朝鮮王朝實錄
朝鮮初期 國家 祭禮儀의 정비와 『洪武禮制』 (金海榮, 淸溪史學9, 韓國精神文化硏究院 淸溪史學會, 1992)
朝鮮 太宗·世宗代 社稷祭의 이해와 운영 (韓亨周, 韓國史學報6, 고려사학회, 1999)
韓國中世禮思想硏究 (李範稷, 一潮閣, 1991)
朝鮮初期 祀典에 관한 硏究 (金海榮, 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學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4)
朝鮮初期 國家祭禮 硏究 (韓亨周, 一潮閣, 2002)

사직대제

사직대제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봄(春) > 2월 > 의례

집필자 한형주(韓亨周)
갱신일 2018-11-09

정의

전근대 사회에서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시고 국가의 안녕과 농사의 풍성함을 기원하며 드리던 제사. 2000년 중요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제사를 드리는 대상은 사(社)와 직(稷)을 정위(正位)로 하고, 여기에 후토(后土)와 후직(后稷)을 배향신으로 삼아 같이 모신다. 사직(社稷)은 사와 직의 합성어이다. 직은 고대 이래로 재배되던 오곡(五穀) 중에서 그 대표자로 인식되어 제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사는 고대 중국인의 수목신앙(樹木信仰)의 한 형태 또는 토지신이나 마을 공동체의 집단모임소 같은 여러 형태로 인식되다가 한대(漢代) 이후 ‘사(社)는 토신(土神), 직(稷)은 곡신(穀神)’이라는 정현(鄭玄)의 설에 따라 토지신으로 이해되었다.

개관

사직제는 토지와 곡식의 신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전근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던 농업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농업의 안정적인 재생산을 추구하는 농민들의 열망과 이들의 안정이 국가의 유지와 발전의 바탕이 된다는 통치자들의 의식이 결합되어 예제로 표출된 것이 사직제였다. 사직제는 이러한 속성으로 단순히 국가의 제사라는 의미로만 한정되지 않고, 국가 자체를 의미하는 보편적인 용어로도 많이 쓰이게 되었다. 사직제는 정기적인 제사와 부정기적인 제사로 구분된다. 정기적인 제사는 중춘(仲春: 음력 2월), 중추(仲秋: 음력 8월), 납일[臘日: 동지 뒤 셋째 미일(未日)]에 시행하는데, 이때는 제사의 규모가 가장 큰 대제(大祭)로 시행한다. 부정기적인 제사로는 기우(祈雨)나 기청(祈晴) 또는 치병(治病)을 위한 기고제(祈告祭)가 있고, 책봉(冊封), 관혼(冠婚), 출병(出兵) 같은 국가의 큰 일이 있을 때 시행하는 고유제(告由祭)가 있다. 한편 사직은 제사의 시행 주체와 목적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였다. 『예기(禮記)』 권22 「제법(祭法)」에는 “왕이 군성(群姓)을 위해 세운 사(社)를 태사(太社), 왕이 스스로를 위해 세운 사를 왕사(王社)라 하며, 제후가 백성(百姓)을 위해 세운 사를 국사(國社), 제후가 스스로를 위해 세운 사를 후사(侯社)라 하며, 대부 이하가 무리를 지어 세운 사를 치사(置社)라 한다.”라는 설명이 있다. 태사, 국사, 치사는 주관자의 지위에 따라 구분한 것이고, 왕사, 후사는 제사의 목적이 공적인가 사적인가에 따라 명칭을 달리한 것이다. 이것은 직(稷)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고대 이래 한국에서는 태사직(국사직)의 명칭은 보이지만, 천자(제후)의 사적인 왕사직(후사직)은 보이지 않아 사직제의 공적인 모습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유래

사직의 용례는 『주례(周禮)』, 『예기(禮記)』, 『맹자(孟子)』 같은 선진(先秦)시대의 경전에서 찾아진다. 이것은 사직제의 기원이 중국의 주대(周代)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려준다. 그렇지만 사직제가 유교 이념에 입각한 국가 제사로 시행되기 시작한 것은 한대(漢代)부터이며, 당대(唐代)를 거치면서 보다 체계화되었고, 이후 사직은 중국 역대 정사(正史)의 예지(禮志) 길례(吉禮)에 중요한 항목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의 사직은 환구(?丘), 방택(方澤), 종묘(宗廟) 같은 다른 국가 제사들에 비해 그 비중이 떨어졌다. 역대 오례(五禮)의 근간이 되었던 당의 『개원례(開元禮)』에 사직은 큰 제사인 대사(大祀)가 아닌 중사(中祀)에 편입되었고, 이는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가 송대(宋代)에 이르러 사직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대사로 승격되었고, 이후 명(明)과 청(淸)을 거치면서 그대로 이어졌다. 이같이 사직은 당대 이전에는 중사, 송대 이후에는 대사로 그 비중이 달랐지만 전반적으로 환구나 종묘에 비견될 정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사직과 성격상 유사하지만 천하의 모든 토지를 대상으로 삼은 방택(方澤)이 국가 제사에서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이후 사직제가 대사로 간주되었고, 특히 조선에서는 천지의 제사인 환구제와 방택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더욱 컸다.

내용

고대 국가에서 사직의 용례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3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1세기 초인 유리왕대에 처음 나타난다. 그러나 이때의 사직은 국가를 의미하는 용어였고, 건축물로서의 사직은 동천왕 21년(247) 수도인 환도성이 전란으로 피폐하게 되자, 평양성을 쌓고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는 기록에서 비로소 보인다. 그 후 고국양왕 8년(391)에 왕명으로 국사(國社)를 세우고, 종묘를 수리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와 「제사지(祭祀志)」에 나온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魏書)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3세기 전반에 왕실인 계루부(桂婁部)와 전왕족인 소노부(消奴部)에 사직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고국양왕 8년에 세웠다는 국사는 소수림왕 이후 왕권 강화와 제도 정비에 따라 계루부 왕실의 사직을 국가적인 사직으로 격상시켜 정비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3세기 이후 고구려에서 사직제가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사의 내용과 형식이 중국의 유교적인 제사인지, 토착의 농업신에 대한 제사인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3세기의 기록은 후자의 가능성이 크고, 고국양왕대 국사의 설립은 전자의 형식을 보다 강화시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에서는 37대 선덕왕대에 사직단이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의 사직제가 어떠한 형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미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로 당의 문물이 상당수 도입된 상태였다. 더구나 신라의 종묘가 천자의 7묘가 아닌 제후의 5묘를 기반으로 했고, 천지(天地)의 제사는 천자의 예라 하여 배제하며, 제후의 격에 맞추어 사직과 경내(境內)의 산천만을 제사했다는 사신(史臣)의 평은 이때의 사직제가 중국의 것, 그 중에서도 제후의 체제에 기반했음을 말해준다. 백제의 사직에 대해서는 남은 기록이 없다. 그렇지만 중국 문화의 도입이 활발했던 백제에서 사직제가 시행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고려시대의 사직제는 성종 10년(991) 개경의 서쪽에 사직단이 영조(營造)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사직단의 건립은 중국의 당제(唐制)에 근거하였다. 이후 사직제는 제도적인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몇 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사직단이 무너져 다시 재건하는 과정을 겪었다. 예컨대 현종 5년(1014)에 강감찬이 사직단을 수축하고 그 의주(儀註)를 찬정(撰定)한 것이나, 문종 6년(1052)에 거란의 침입으로 무너진 사직을 대신하여 개경 안 서쪽에 새로 사직단을 세운 것이 그 실례이다. 고려시대 사직제는 의종 때 최윤의(崔允儀)가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 50권을 편찬한 것에 기반을 둔다. 현재 이 의주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학자들이 『상정고금례』를 기초로 여러 자료들을 정리해 편찬한 『고려사』 「예지」 길례조를 통해 사직제의 내용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사직은 동쪽에 사(社)가, 서쪽에 직(稷)이 있었고, 후토(后土)와 후직(后稷)을 배향하였다. 그리고 제사의 시기는 중춘과 중추의 상무일(上戊日)과 납일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중국과 조선이 동일하다. 그런데 고려에서는 사와 직의 명칭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삼았다. 이것은 사직제가 천자의 예로 시행되었음을 의미하는데, 당시에 천지의 제사인 환구제와 방택제가 시행되었다는 사실과 결부되어 주목된다. 다만 국왕의 개인적인 기복을 위한 왕사(王社)와 왕직(王稷)의 제도가 운영되지 않아 중국과 구별되었다. 그런데 『고려사』에는 사직제를 큰 제사인 대사(大祀)로 규정했지만, 의식은 섭행을 전제로 한 사직의(社稷儀) 단 한 개만 있었다. 제의(祭儀)는 『개원례』의 내용을 바탕으로 했는데, 태위(太尉)를 초헌관, 태상경(太常卿)을 아헌관, 광록경(光祿卿)을 종헌관으로 각각 규정했으며 국왕은 빠져 있다. 이것은 문종을 비롯한 역대 국왕이 사직제에 참석했던 사례와는 맞지 않는다. 이에 대해 『고려사』 찬자(撰者)는 현종 5년(1014) 사직의주(社稷儀注)를 찬정했지만, 그것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렇지만 고려시대에는 지기(地祇)의 최고신이 방택이었고, 최고의 제사인 환구제가 천지인(天地人)의 합제(合祭)로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사직제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음은 분명하다. 조선시대의 사직제는 태조 4년(1395) 한양에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고, 그 해 제사를 시행하면서 시작되었다. 건국 초부터 사직제는 종묘제와 더불어 가장 규모가 큰 대사로 규정되었고, 관념상 지기(地祇)인 사직은 인귀(人鬼)인 종묘보다 상위인 국가 최고의 제사였다. 건국 초 사직제는 고려의 것이 그대로 시행되다가 태종대에 명나라 『홍무예제(洪武禮制)』의 주현사직의(州縣社稷儀)를 바탕으로 새로운 제의가 모색되었다. 그러다가 세종대 집현전(集賢殿)을 중심으로 고제(古制) 연구가 이루어짐으로써 『홍무예제』의 비판적 검토와 역대 중국의 사직제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었는데, 특히 송대(宋代)의 제의(祭儀)가 적극 검토, 수용되었다. 아울러 명과의 사대 관계를 고려해 고려의 태사(太社), 태직(太稷)제가 아닌 제후의 격에 맞춘 국사(國社), 국직(國稷)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직제는 일부의 수정을 거쳐 성종대 『국조오례의』 길례로 정리되었다. 중국과 고려에서 환구, 방택, 종묘에 비해 사직의 중요성이 떨어지고 그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것과 달리, 조선시대의 사직은 종묘와 비견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이것은 천지의 제사인 환구제와 방택제가 천자의 예라는 이유로 폐지된 후 자연신으로 유일하게 대사로 편입된 존재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조선왕조는 건국 이후 농본(農本)을 표방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창하였는데, 그 상징성이 사직제를 통해 구현되었다. 환구와 종묘를 양축으로 삼는 고려시대의 제사 체계와는 달리 조선시대의 국가 제사는 크게 종묘(영녕전 포함)를 중심으로 한 제사의 범주와 사직을 비롯해 선농(先農), 선잠(先蠶), 풍운뇌우(風雲雷雨), 악해독(嶽海瀆) 같은 농사와 관련된 신들의 범주가 양립하였는데, 사직은 후자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이었다. 이처럼 조선에서 사직제가 고려 때보다 중시되었지만, 동급의 종묘제와 비교할 때 국왕의 관심이 컸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건국 후 성종 대까지 대략 1세기 동안 국왕의 종묘제 참석이 41회로 나타나지만 사직친제 참석은 단 3회만 나타난다. 그나마 2회는 신왕의 즉위와 관련된 것이고, 농사와 관련된 사직제는 성종 16년(1485)의 1회에 불과하였다. 이후에도 사직친제는 그 사례가 별로 없고, 대부분 신하들의 섭제(攝祭)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국가의 공적인 차원에서는 종묘와 사직이 병렬되지만 실제로 국왕이 농본의 상징인 사직제보다 왕통의 상징인 종묘제를 더 중시했던 현실이 반영된 것이다. 이로 인해 관료들은 국왕과 달리 국가의 상징을 종묘보다는 사직에서 찾았고, 자신들을 가리킬 때 ‘종묘의 신하[宗廟之臣]’라기보다는 ‘사직의 신하[社稷之臣]’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직제에는 기존의 대제와 기고 외에 기곡(祈穀)이 새로 추가되었다. 원래 기곡제는 만물이 소생하는 1월에 환구에서 하늘에 대한 제사로 시행되었다. 따라서 제천(祭天)을 시행했던 고려시대와 조선의 세조대에는 기곡제가 당연했지만, 세조 사후 환구제가 폐지되자 이 역시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곡제가 농본(農本)을 상징하는 가장 큰 제사라는 인식과 그를 통해 통치자의 정통성을 천명(天命)과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결합되어 변형된 형태가 모색되었다. 최초의 기곡제는 중종 34년(1538) 흉년 뒤에는 기곡한다는 명분으로 선농(先農)에서 시행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는 국왕이 선농에서 친경(親耕)을 하며 기곡제를 거행했다. 그러나 숙종 21년(1694)에는 『예기』의 “맹춘(孟春)에 상제(上帝)께 기곡한다.”라는 구절을 근거로 정월에 사직에서 기곡제를 행하도록 정했고, 다음해 숙종은 직접 사직에서 기곡제를 시행하였다. 이어서 그 다음해에는 기곡제를 상시적인 행사로 법제화하였다. 이후 사직에서의 기곡제는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리고 그 규정은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 기재되었는데, 그 등급은 대사(大祀)로 하였다.

의의

사직제는 토지신과 곡식신을 대상으로 한 국가의 제사이다. 전근대의 산업에서 농업의 비중은 절대적이었고, 농민 생활의 안정은 왕조 통치의 기본 바탕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사직제는 고대부터 시행되었고, 유교적 통치 이념을 내세웠던 고려시대 이후로는 그 의례의 정비를 통해 중요한 국가 제사로 자리 잡았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적 왕도 정치를 구현하면서 민생(民生)의 안정을 사직제의 상징성에서 찾음으로써 그 중요성은 더욱더 강조되었다. 조선시대 종묘와 사직의 제사는 가장 중요한 국가 제사였지만 종묘가 왕통(王統)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중시되었다면, 사직은 농민 생활의 안정을 추구했던 치자들의 의식이 의례화된 것이다. 흔히 국가를 지칭할 때 종묘보다는 사직을 언급했던 것은 백성이 국가의 근간이고 농업이 안정되어야 국가가 유지될 수 있다는 농본의 중요성을 강조한 당대인들의 관념을 드러낸 것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國朝續五禮儀, 國朝五禮儀, 社稷署儀軌, 三國史記, 朝鮮王朝實錄朝鮮初期 國家 祭禮儀의 정비와 『洪武禮制』 (金海榮, 淸溪史學9, 韓國精神文化硏究院 淸溪史學會, 1992)朝鮮 太宗·世宗代 社稷祭의 이해와 운영 (韓亨周, 韓國史學報6, 고려사학회, 1999)韓國中世禮思想硏究 (李範稷, 一潮閣, 1991)朝鮮初期 祀典에 관한 硏究 (金海榮, 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學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4)朝鮮初期 國家祭禮 硏究 (韓亨周, 一潮閣,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