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제(馬社祭)

한자명

馬社祭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가을(秋) > 8월 > 의례

집필자 한형주(韓亨周)

정의

마구간 안에 있는 토신(土神) 즉, 처음 말을 탄 자를 신격화하여 드리는 제사. 조선시대 국가사전(國家祀典)에 소사(小祀)로 등재되었으며, 제사 시기는 중추(仲秋)의 중기(中氣) 후 강일(剛日)이었다.

내용

마사제는 중국 고대의 예서인 『주례(周禮)』 권(卷)4 하관사마조(夏官司馬條)에 이미 그 존재가 보여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알려주는데, 당대(唐代) 이후 국가의 사전(祀典)에 소사(小祀)로 포함되어 제사가 행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는 그 명칭이 보이지 않다가 『고려사(高麗史)』 「예지(禮志)」에 처음 나온다. 그렇지만 이곳에는 제사의식만 있을 뿐 그 기원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다만 조선시대 『영조실록(英祖實錄)』 영조 25년(1749) 9월 12일조에 고려 의종대에 선목제(先牧祭)가 시작되었다는 기록에서 그와 유사한 마사제 역시 그때부터 시행되었으리라 추측된다. 『고려사』 「지(志)」17 예(禮)5 길례소사조(吉禮小祀條)에 따르면, 마사단은 넓이가 9보(步), 높이가 3척(尺)의 규모로 사방으로 섬돌계단이 있고[四出陛], 유(壝)가 25보(步)이며, 예감(瘞埳)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제사의 시기는 중동(仲冬: 11월) 길일(吉日)로 희생은 돼지 한 마리이며, 축판에는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표현하였다.

조선시대 마사제는 태종 13년(1413)에 소사로 설정되었고 제단의 규모는 고려와 동일하였다. 그렇지만 태종대 후반기에 넓이 2장 1척, 높이 2척 5촌, 사출폐(四出陛), 1유(壝)의 형태로 규모가 축소되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이르렀다. 한편 축문에는 ‘국왕(國王)’이라 칭하였고, 제사 시기는 중추의 중기 후 강일로 구체화되었다. 한편 국초에는 무격(巫覡)이 마사제를 주관했지만, 태종 13년부터 사복사(司僕寺) 관원이 향(香)을 받아 유교식으로 제사하도록 바꾸었다. 이 마보단은 전관목장(箭串牧場) 안에 위치하였다.

마보단의 제도와 의식은 성종대 『국조오례의』 편찬으로 완성되었지만 이후 실제 제사는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마보제 시행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고, 정조대 편찬된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효종대 이후 마사제가 폐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국가 사전에도 반영되어 결국 영조대 찬정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와 그 서례(序例)에는 지금 마사제가 폐지되었다고 기술되기에 이르렀다.

의의

마사제는 전근대 주요한 교통 수단이자 전쟁 수단이었던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이를 유교적인 제사로 전화시킨 제사 중의 하나이다. 이 제사는 국가 체제의 주요 기반인 군사력, 특히 전마(戰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고려와 조선 연간에 시행되었는데, 조선 후기 군사 관련 제사가 약화되면서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高麗史, 國朝續五禮儀, 國朝五禮儀, 朝鮮王朝實錄, 周禮, 春官通考, 朝鮮初期 國家祭禮 硏究 (韓亨周, 一潮閣, 2002), 朝鮮時代 軍事關聯 국가제사의 정비와 그 운영 (한형주, 東峰申千湜敎授停年記念史學論叢, 2005)

마사제

마사제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가을(秋) > 8월 > 의례

집필자 한형주(韓亨周)

정의

마구간 안에 있는 토신(土神) 즉, 처음 말을 탄 자를 신격화하여 드리는 제사. 조선시대 국가사전(國家祀典)에 소사(小祀)로 등재되었으며, 제사 시기는 중추(仲秋)의 중기(中氣) 후 강일(剛日)이었다.

내용

마사제는 중국 고대의 예서인 『주례(周禮)』 권(卷)4 하관사마조(夏官司馬條)에 이미 그 존재가 보여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알려주는데, 당대(唐代) 이후 국가의 사전(祀典)에 소사(小祀)로 포함되어 제사가 행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는 그 명칭이 보이지 않다가 『고려사(高麗史)』 「예지(禮志)」에 처음 나온다. 그렇지만 이곳에는 제사의식만 있을 뿐 그 기원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다만 조선시대 『영조실록(英祖實錄)』 영조 25년(1749) 9월 12일조에 고려 의종대에 선목제(先牧祭)가 시작되었다는 기록에서 그와 유사한 마사제 역시 그때부터 시행되었으리라 추측된다. 『고려사』 「지(志)」17 예(禮)5 길례소사조(吉禮小祀條)에 따르면, 마사단은 넓이가 9보(步), 높이가 3척(尺)의 규모로 사방으로 섬돌계단이 있고[四出陛], 유(壝)가 25보(步)이며, 예감(瘞埳)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제사의 시기는 중동(仲冬: 11월) 길일(吉日)로 희생은 돼지 한 마리이며, 축판에는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표현하였다. 조선시대 마사제는 태종 13년(1413)에 소사로 설정되었고 제단의 규모는 고려와 동일하였다. 그렇지만 태종대 후반기에 넓이 2장 1척, 높이 2척 5촌, 사출폐(四出陛), 1유(壝)의 형태로 규모가 축소되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이르렀다. 한편 축문에는 ‘국왕(國王)’이라 칭하였고, 제사 시기는 중추의 중기 후 강일로 구체화되었다. 한편 국초에는 무격(巫覡)이 마사제를 주관했지만, 태종 13년부터 사복사(司僕寺) 관원이 향(香)을 받아 유교식으로 제사하도록 바꾸었다. 이 마보단은 전관목장(箭串牧場) 안에 위치하였다. 마보단의 제도와 의식은 성종대 『국조오례의』 편찬으로 완성되었지만 이후 실제 제사는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마보제 시행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고, 정조대 편찬된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효종대 이후 마사제가 폐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국가 사전에도 반영되어 결국 영조대 찬정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와 그 서례(序例)에는 지금 마사제가 폐지되었다고 기술되기에 이르렀다.

의의

마사제는 전근대 주요한 교통 수단이자 전쟁 수단이었던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이를 유교적인 제사로 전화시킨 제사 중의 하나이다. 이 제사는 국가 체제의 주요 기반인 군사력, 특히 전마(戰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고려와 조선 연간에 시행되었는데, 조선 후기 군사 관련 제사가 약화되면서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高麗史, 國朝續五禮儀, 國朝五禮儀, 朝鮮王朝實錄, 周禮, 春官通考朝鮮初期 國家祭禮 硏究 (韓亨周, 一潮閣, 2002)朝鮮時代 軍事關聯 국가제사의 정비와 그 운영 (한형주, 東峰申千湜敎授停年記念史學論叢,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