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모

한자명

暖帽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겨울(冬) > 12월 > 복식

집필자 강순제(姜淳弟)
갱신일 2018-11-27

정의

겨울에 쓰는 방한모의 총칭. 대체로 검은색의 명주, 단(緞)과 같은 견직물을 사용하여 만들고 모피로 선(縇)을 두르기도 한다.

내용

난모(煖帽, 暖帽)란 머리와 뺨을 보호하기 위하여 쓰는 방한모를 통칭하는 용어이나, 박일원(朴一源)이 편찬한 『추관지(秋官志)』에 따르면 난모는 특히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쓰는 방한모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또한 『정조실록(正祖實錄)』 정조 3년 1월 13일에 전경문신(專經文臣)의 전강(殿講)에서 수석한 사람에게 난모를 하사한 기록과 정조 12년 1월 5일에 대사간으로 삼았던 사람을 등연(登筵) 때 난모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직(遞職)시킨 기록으로 보아 의례적인 용도의 쓰개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난모는 문관, 음관, 무관이 10월 초하루에서 이듬해 1월 그믐날까지 관복을 입을 때에 사모 안에 착용하였는데, 재료는 당상관일 경우 초피(貂皮)였고 당하관은 서피(鼠皮)로서 모피의 재료에 차이를 두었다고 한다.

난모로 통칭되는 방한모들에는 한자로 표기되는 이엄(耳掩), 액엄(額掩), 풍차(風遮), 삼산건(三山巾), 휘항(揮項), 만선두리(滿縇頭里)와 한글로 표기되는 볼끼, 남바위, 아얌, 굴레, 조바위, 풍뎅이가 있다. 이들 중 이엄, 삼산건, 휘항, 풍뎅이, 만선두리는 남자들이 주로 사용하던 것이고, 볼끼, 남바위, 풍차는 남녀 양식에 차이가 없는 것, 아얌, 조바위는 여성 전용, 굴레는 어린이 전용의 방한모인데, 이엄을 제외한 대부분의 방한모들은 조선 후기에 등장하여 계급에 관계없이 두루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방한모의 형태상의 공통적인 특징은 머리 위쪽이 대부분 트여 있다는 것인데, 여자들은 방한모의 정수리 트임의 앞뒤를 장식 끈이나 산호구슬을 꿰어 연결하고 이마와 뒤통수 부근에 매듭과 장식술, 비취나 옥판을 달아 장식했다.

이엄은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사용되었던 방한모의 하나로 피견(披肩)이라고도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 권3 「예전(禮典)」 의장(儀章) 관조(冠條)에 의하면 당상관은 단(段), 초피이엄, 3품 이하 9품까지의 당하관은 초(綃), 서피이엄으로 품계에 따라 재료에 차이를 두어 사용한 의례적인 쓰개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보면 이엄은 왕 이하 신하, 사인들이 사용했던 방한구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조선 초기에는 귀를 가릴 정도의 크기였고 후에는 머리를 덮을 정도로 커졌다고 한다. 특히 조선 전기의 기록에 이엄이 초피관(貂皮冠), 초관(貂冠), 모관(毛冠), 감투(甘套) 등의 방한모와 함께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엄은 한자풀이 그대로 주로 귀를 가렸던 용도의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숙종실록(肅宗實錄)』 숙종 13년 10월 1일의 기록에는 상의원에서 들여온 이엄 초피의 품질이 나빠 무역해온 역관(譯官)을 가두도록 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엄의 재료인 초피는 주로 수입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풍차는 남바위와 비슷하나 볼끼를 더하여 귀와 뺨, 턱을 가릴 수 있는 방한구로서, 볼끼는 사용하지 않을 경우 뒤로 젖혀서 뒤통수에 맨다. 검은색 단을 사용하고 가장자리에 모피를 두른 형태의 것은 겨울용이나 모피를 두르지 않고 안을 융으로 대어 비교적 엷게 만든 것은 늦가을이나 이른 봄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풍차는 조선시대 어휘집에서 풍령(風領), 난이(煖耳)의 대역어로 기록되어 있어 귀를 가리는 볼끼가 더해진 방한구였음을 알 수 있다.

삼산건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나이 많은 조사(朝士)가 대궐을 출입할 때 쓰는 작은 풍차를 항풍차(項風遮) 혹은 삼산건이라 한 것으로 보아 풍차와 유사한 형태로서 조선 후기에 관복에 사용된 방한모로 보인다. 『헌종실록(憲宗實錄)』 헌종 10년 12월 10일의 기록에는 조복(朝服) 가운데 이엄을 삼산건으로 대신하되 당상은 초피로, 당하는 흑피로 가장자리를 꾸미라고 명하고 있어, 조선 후기에는 삼산건이 이엄을 대신하여 관복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휘항은 조선후기에 사용된 명칭으로 호항(護項)의 중국 발음에서 기원한 것이다. 『아언각비(雅言覺非)』 권2 호항에는 목을 감싸는 털쓰개[毛幘]라 하였는데, 현존하는 유물에서 형태를 보면 정수리 부분은 뚫리고 크기는 앞이마와 귀, 머리, 등을 넉넉히 덮을 정도로 크며, 앞쪽에 끈을 달아 앞가슴에서 여미도록 되어 있다. 『추관지』에 의하면 휘항은 융복에, 혹은 군병 또는 노인이 쓰는 것이라 하였는데, 『정조실록』 정조 16년 1월 22일의 기록에서도 병사의 방한구로 휘항을 쓰게 하라고 전교하고 있어 특히 군사가 쓰는 방한모임을 알 수 있다.

만선두리는 조선후기에 사용된 명칭으로 무신들이 공복에 쓴 방한모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털로 된 목도리의 앞, 뒤 그리고 바깥 쪽 가장자리를 초(貂)로 선 둘렀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 하였다. 길이가 길어 뒤로 길게 넘어가며, 끝은 제비꼬리 모양이고, 가장자리에는 털, 주로 담비 털로 선을 둘렀는데, 볼끼가 달려 있다.

볼끼는 어휘집에서 보면 ‘차검피(遮臉皮)’, ‘피마호(皮馬虎)’, ‘자포(䐉包)’ 등의 한자 표기에 대한 우리말 풀이로서 뺨과 턱을 덮기 위한 방한구이다. 안쪽에는 털을 받치고 겉은 주로 남색이나 자주색 비단을 대고, 또는 가죽이나 헝겊조각에 솜을 두어 만든다. 두 뺨을 가려 싸고 양끝의 끈으로 머리 정수리에서 잡아매는데, 노인들은 이 위에 남바위를 덧쓰기도 하였다.

남바위는 뒤가 목덜미까지 오는 형태로 겉감은 검은색, 남색, 자주색 비단을 사용하고, 안감은 녹색, 붉은색, 연두색 등의 비단이나 면직을 사용하며, 안에는 털이나 융을 대거나 솜을 두기도 하였다. 앞은 이마를 덮고 뒤는 귀를 거쳐 목과 등을 덮으며 위쪽에는 구멍을 뚫었다. 부인이나 노인들이 주로 착용하였고 특히 여자용에는 겉면에 수부다남(壽富多男)의 글자와 길상문(吉祥文)의 금박을 넣었고, 앞면 윗부분에 술, 보석, 매듭 등으로 장식하였다.

굴레는 조선 후기 상류층 가정에서 돌쟁이부터 4∼5세 이하의 남녀 어린이가 사용한 방한을 겸한 장식적인 쓰개로 자수나 금박 장식을 하기도 한다. 지방에 따라 형태가 약간씩 다른데 서울의 굴레는 세 가닥으로 되었고, 개성의 굴레는 아홉 가닥으로 되었다. 겨울에는 검정 비단으로, 봄가을에는 갑사(甲紗)로 만들었다. 가닥마다 색이 다르며 수를 놓거나 금박을 박고, 뒤에는 도투락댕기를 달았으며, 정수리 부분에는 구슬이나 보석을 달았다.

아얌은 겨울에 부녀자들이 나들이할 때 추위를 막으려고 머리에 쓰는 방한구이다. 아얌은 귀를 내놓고 이마만 덮는 형태로서 고급품은 겉은 고운 털로 하고 가장자리에는 2∼3센티미터의 검은 털로 선을 둘렀다. 뒤에는 아얌드림을 늘어뜨렸는데 아얌드림은 검은 자줏빛으로 댕기와 비슷하며, 밀화(蜜花)나 금판(金板)으로 만든 매미를 군데군데 달아 장식하였다. 앞 중심과 뒤통수에 걸쳐 자주 또는 검정색 조영(組纓)이나 산호주(珊瑚珠)를 꿴 끈을 달고 술 장식을 드리웠다.

조바위는 조선 후기부터 서양의 목도리가 등장할 때까지 부녀자들이 사용한 방한모이다. 겉은 검정 비단, 안은 남색 비단이나 무명이 대부분이며, 겹으로 만들었다. 정수리 부분은 열려 있고, 앞이마와 귀, 머리 전체를 덮는다. 뺨에 닿는 부분은 둥근 모양으로 귀가 완전히 덮이고 길이는 뒤통수를 가릴 정도이다. 귀를 덮는 부분은 안으로 1∼3센티미터 정도 오긋하게 휘었다. 옥, 마노, 비취 따위로 앞과 뒤를 장식하고 오색 술을 달았으며, 꼭대기의 앞뒤에 끈목이나 산호 줄을 연결했다. 부귀(富貴), 다남(多男), 수복(壽福), 강녕(康寧) 같은 글자와 꽃무늬 금박을 가장자리에 올려 만든 것도 있다. 오늘날에는 돌날 여아들이 쓰는 예장용 쓰개로 사용되고 있다.

풍뎅이는 조선시대 말기에 남바위와 함께 휘항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는데, 풍동이, 풍등이, 풍댕이라고도 표기된다. 풍뎅이라는 명칭은 풍뎅이라는 곤충과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도 하고, 머리가 물에 풍덩 빠지듯 덮어씌우는 모자라는 뜻의 토속적인 말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형태나 쓰임새는 남바위와 닮았으나 남바위와는 달리 목 뒷부분이 짧고 이마를 감싸는 부분이 넓으며 가장자리에 두르는 모피의 폭이 좁다. 대체로 공단이나 검은 물을 곱게 먹인 명주를 겹으로 하고 그 속에 고운 솜을 넣은 다음 흰 끝동이나 빨간 끝동을 둘렀거나 사냥한 고운 짐승의 털을 붙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난모들은 조선 후기 이전에는 상류사회의 쓰개로 지위, 부의 상징물의 의미가 컸으나, 조선 후기 이후에는 일반화되어 남녀노소 모두 목적으로 널리 착용하게 되었다.

의의

난모는 추위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쓰는 방한모로 사신 또는 공덕을 쌓은 신하에게 베푸는 중요한 하사품의 하나였다. 뿐만 아니라 지위와 부를 나타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쓰개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방한구의 종류가 많아지면서 난모로 통칭되는 방한모의 명칭들은 한자로 표기되는 이엄(耳掩), 액엄(額掩), 풍차(風遮), 삼산건(三山巾), 휘항(揮項), 만선두리(滿縇頭里)가 있었고, 한글로 표기되는 볼끼, 남바위, 아얌, 굴레, 조바위, 풍뎅이가 있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방한모의 명칭들이 다양해졌고 특히 조바위나 아얌, 굴레와 같이 장식을 겸한 방한모가 등장해 눈에 띄는 변화를 보여주었다.

참고문헌

經國大典, 雅言覺非, 燃藜室記述, 五洲衍文長箋散稿, 朝鮮王朝實錄, 秋官志
朝鮮時代의 冠帽 (溫陽民俗博物館, 1988)

난모

난모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겨울(冬) > 12월 > 복식

집필자 강순제(姜淳弟)
갱신일 2018-11-27

정의

겨울에 쓰는 방한모의 총칭. 대체로 검은색의 명주, 단(緞)과 같은 견직물을 사용하여 만들고 모피로 선(縇)을 두르기도 한다.

내용

난모(煖帽, 暖帽)란 머리와 뺨을 보호하기 위하여 쓰는 방한모를 통칭하는 용어이나, 박일원(朴一源)이 편찬한 『추관지(秋官志)』에 따르면 난모는 특히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쓰는 방한모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또한 『정조실록(正祖實錄)』 정조 3년 1월 13일에 전경문신(專經文臣)의 전강(殿講)에서 수석한 사람에게 난모를 하사한 기록과 정조 12년 1월 5일에 대사간으로 삼았던 사람을 등연(登筵) 때 난모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직(遞職)시킨 기록으로 보아 의례적인 용도의 쓰개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난모는 문관, 음관, 무관이 10월 초하루에서 이듬해 1월 그믐날까지 관복을 입을 때에 사모 안에 착용하였는데, 재료는 당상관일 경우 초피(貂皮)였고 당하관은 서피(鼠皮)로서 모피의 재료에 차이를 두었다고 한다. 난모로 통칭되는 방한모들에는 한자로 표기되는 이엄(耳掩), 액엄(額掩), 풍차(風遮), 삼산건(三山巾), 휘항(揮項), 만선두리(滿縇頭里)와 한글로 표기되는 볼끼, 남바위, 아얌, 굴레, 조바위, 풍뎅이가 있다. 이들 중 이엄, 삼산건, 휘항, 풍뎅이, 만선두리는 남자들이 주로 사용하던 것이고, 볼끼, 남바위, 풍차는 남녀 양식에 차이가 없는 것, 아얌, 조바위는 여성 전용, 굴레는 어린이 전용의 방한모인데, 이엄을 제외한 대부분의 방한모들은 조선 후기에 등장하여 계급에 관계없이 두루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방한모의 형태상의 공통적인 특징은 머리 위쪽이 대부분 트여 있다는 것인데, 여자들은 방한모의 정수리 트임의 앞뒤를 장식 끈이나 산호구슬을 꿰어 연결하고 이마와 뒤통수 부근에 매듭과 장식술, 비취나 옥판을 달아 장식했다. 이엄은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사용되었던 방한모의 하나로 피견(披肩)이라고도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 권3 「예전(禮典)」 의장(儀章) 관조(冠條)에 의하면 당상관은 단(段), 초피이엄, 3품 이하 9품까지의 당하관은 초(綃), 서피이엄으로 품계에 따라 재료에 차이를 두어 사용한 의례적인 쓰개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보면 이엄은 왕 이하 신하, 사인들이 사용했던 방한구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조선 초기에는 귀를 가릴 정도의 크기였고 후에는 머리를 덮을 정도로 커졌다고 한다. 특히 조선 전기의 기록에 이엄이 초피관(貂皮冠), 초관(貂冠), 모관(毛冠), 감투(甘套) 등의 방한모와 함께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엄은 한자풀이 그대로 주로 귀를 가렸던 용도의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숙종실록(肅宗實錄)』 숙종 13년 10월 1일의 기록에는 상의원에서 들여온 이엄 초피의 품질이 나빠 무역해온 역관(譯官)을 가두도록 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엄의 재료인 초피는 주로 수입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풍차는 남바위와 비슷하나 볼끼를 더하여 귀와 뺨, 턱을 가릴 수 있는 방한구로서, 볼끼는 사용하지 않을 경우 뒤로 젖혀서 뒤통수에 맨다. 검은색 단을 사용하고 가장자리에 모피를 두른 형태의 것은 겨울용이나 모피를 두르지 않고 안을 융으로 대어 비교적 엷게 만든 것은 늦가을이나 이른 봄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풍차는 조선시대 어휘집에서 풍령(風領), 난이(煖耳)의 대역어로 기록되어 있어 귀를 가리는 볼끼가 더해진 방한구였음을 알 수 있다. 삼산건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나이 많은 조사(朝士)가 대궐을 출입할 때 쓰는 작은 풍차를 항풍차(項風遮) 혹은 삼산건이라 한 것으로 보아 풍차와 유사한 형태로서 조선 후기에 관복에 사용된 방한모로 보인다. 『헌종실록(憲宗實錄)』 헌종 10년 12월 10일의 기록에는 조복(朝服) 가운데 이엄을 삼산건으로 대신하되 당상은 초피로, 당하는 흑피로 가장자리를 꾸미라고 명하고 있어, 조선 후기에는 삼산건이 이엄을 대신하여 관복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휘항은 조선후기에 사용된 명칭으로 호항(護項)의 중국 발음에서 기원한 것이다. 『아언각비(雅言覺非)』 권2 호항에는 목을 감싸는 털쓰개[毛幘]라 하였는데, 현존하는 유물에서 형태를 보면 정수리 부분은 뚫리고 크기는 앞이마와 귀, 머리, 등을 넉넉히 덮을 정도로 크며, 앞쪽에 끈을 달아 앞가슴에서 여미도록 되어 있다. 『추관지』에 의하면 휘항은 융복에, 혹은 군병 또는 노인이 쓰는 것이라 하였는데, 『정조실록』 정조 16년 1월 22일의 기록에서도 병사의 방한구로 휘항을 쓰게 하라고 전교하고 있어 특히 군사가 쓰는 방한모임을 알 수 있다. 만선두리는 조선후기에 사용된 명칭으로 무신들이 공복에 쓴 방한모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털로 된 목도리의 앞, 뒤 그리고 바깥 쪽 가장자리를 초(貂)로 선 둘렀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 하였다. 길이가 길어 뒤로 길게 넘어가며, 끝은 제비꼬리 모양이고, 가장자리에는 털, 주로 담비 털로 선을 둘렀는데, 볼끼가 달려 있다. 볼끼는 어휘집에서 보면 ‘차검피(遮臉皮)’, ‘피마호(皮馬虎)’, ‘자포(䐉包)’ 등의 한자 표기에 대한 우리말 풀이로서 뺨과 턱을 덮기 위한 방한구이다. 안쪽에는 털을 받치고 겉은 주로 남색이나 자주색 비단을 대고, 또는 가죽이나 헝겊조각에 솜을 두어 만든다. 두 뺨을 가려 싸고 양끝의 끈으로 머리 정수리에서 잡아매는데, 노인들은 이 위에 남바위를 덧쓰기도 하였다. 남바위는 뒤가 목덜미까지 오는 형태로 겉감은 검은색, 남색, 자주색 비단을 사용하고, 안감은 녹색, 붉은색, 연두색 등의 비단이나 면직을 사용하며, 안에는 털이나 융을 대거나 솜을 두기도 하였다. 앞은 이마를 덮고 뒤는 귀를 거쳐 목과 등을 덮으며 위쪽에는 구멍을 뚫었다. 부인이나 노인들이 주로 착용하였고 특히 여자용에는 겉면에 수부다남(壽富多男)의 글자와 길상문(吉祥文)의 금박을 넣었고, 앞면 윗부분에 술, 보석, 매듭 등으로 장식하였다. 굴레는 조선 후기 상류층 가정에서 돌쟁이부터 4∼5세 이하의 남녀 어린이가 사용한 방한을 겸한 장식적인 쓰개로 자수나 금박 장식을 하기도 한다. 지방에 따라 형태가 약간씩 다른데 서울의 굴레는 세 가닥으로 되었고, 개성의 굴레는 아홉 가닥으로 되었다. 겨울에는 검정 비단으로, 봄가을에는 갑사(甲紗)로 만들었다. 가닥마다 색이 다르며 수를 놓거나 금박을 박고, 뒤에는 도투락댕기를 달았으며, 정수리 부분에는 구슬이나 보석을 달았다. 아얌은 겨울에 부녀자들이 나들이할 때 추위를 막으려고 머리에 쓰는 방한구이다. 아얌은 귀를 내놓고 이마만 덮는 형태로서 고급품은 겉은 고운 털로 하고 가장자리에는 2∼3센티미터의 검은 털로 선을 둘렀다. 뒤에는 아얌드림을 늘어뜨렸는데 아얌드림은 검은 자줏빛으로 댕기와 비슷하며, 밀화(蜜花)나 금판(金板)으로 만든 매미를 군데군데 달아 장식하였다. 앞 중심과 뒤통수에 걸쳐 자주 또는 검정색 조영(組纓)이나 산호주(珊瑚珠)를 꿴 끈을 달고 술 장식을 드리웠다. 조바위는 조선 후기부터 서양의 목도리가 등장할 때까지 부녀자들이 사용한 방한모이다. 겉은 검정 비단, 안은 남색 비단이나 무명이 대부분이며, 겹으로 만들었다. 정수리 부분은 열려 있고, 앞이마와 귀, 머리 전체를 덮는다. 뺨에 닿는 부분은 둥근 모양으로 귀가 완전히 덮이고 길이는 뒤통수를 가릴 정도이다. 귀를 덮는 부분은 안으로 1∼3센티미터 정도 오긋하게 휘었다. 옥, 마노, 비취 따위로 앞과 뒤를 장식하고 오색 술을 달았으며, 꼭대기의 앞뒤에 끈목이나 산호 줄을 연결했다. 부귀(富貴), 다남(多男), 수복(壽福), 강녕(康寧) 같은 글자와 꽃무늬 금박을 가장자리에 올려 만든 것도 있다. 오늘날에는 돌날 여아들이 쓰는 예장용 쓰개로 사용되고 있다. 풍뎅이는 조선시대 말기에 남바위와 함께 휘항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는데, 풍동이, 풍등이, 풍댕이라고도 표기된다. 풍뎅이라는 명칭은 풍뎅이라는 곤충과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도 하고, 머리가 물에 풍덩 빠지듯 덮어씌우는 모자라는 뜻의 토속적인 말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형태나 쓰임새는 남바위와 닮았으나 남바위와는 달리 목 뒷부분이 짧고 이마를 감싸는 부분이 넓으며 가장자리에 두르는 모피의 폭이 좁다. 대체로 공단이나 검은 물을 곱게 먹인 명주를 겹으로 하고 그 속에 고운 솜을 넣은 다음 흰 끝동이나 빨간 끝동을 둘렀거나 사냥한 고운 짐승의 털을 붙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난모들은 조선 후기 이전에는 상류사회의 쓰개로 지위, 부의 상징물의 의미가 컸으나, 조선 후기 이후에는 일반화되어 남녀노소 모두 목적으로 널리 착용하게 되었다.

의의

난모는 추위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쓰는 방한모로 사신 또는 공덕을 쌓은 신하에게 베푸는 중요한 하사품의 하나였다. 뿐만 아니라 지위와 부를 나타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쓰개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방한구의 종류가 많아지면서 난모로 통칭되는 방한모의 명칭들은 한자로 표기되는 이엄(耳掩), 액엄(額掩), 풍차(風遮), 삼산건(三山巾), 휘항(揮項), 만선두리(滿縇頭里)가 있었고, 한글로 표기되는 볼끼, 남바위, 아얌, 굴레, 조바위, 풍뎅이가 있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방한모의 명칭들이 다양해졌고 특히 조바위나 아얌, 굴레와 같이 장식을 겸한 방한모가 등장해 눈에 띄는 변화를 보여주었다.

참고문헌

經國大典, 雅言覺非, 燃藜室記述, 五洲衍文長箋散稿, 朝鮮王朝實錄, 秋官志朝鮮時代의 冠帽 (溫陽民俗博物館,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