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신당제

한자명

國師神堂祭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봄(春) > 3월 > 의례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1-08

정의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淸安)에서 3월 초에 장압산(長鴨山)의 큰 나무에서 국사신 부부를 맞이하여 관아에 모셔 제사하고 돌려보내던 풍속. 청안의 국사신당제는 조선시대에 현(縣) 차원에서 준비되었던 대규모의 행사였으나, 지금은 단지 청안면 운곡리의 마을 신앙으로 축소되어 매년 음력 정월 14일 밤에 세 마을이 각각 제사를 지낸다.

내용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3월 월내조(月內條)에, “청안 풍속에, 삼월 초가 되면 그 현의 우두머리 관리가 읍민들을 거느리고 국사신 부부를 동면(東面) 장압산 위에 있는 큰 나무에서 맞이하여 읍내로 들어온다. 그리고 무격(巫覡)들로 하여금 술과 음식을 갖추어 놓고 징을 울리고 북을 치며 떠들썩하게 현아(縣衙)와 각 관청에서 그 신에 대한 제사를 지낸다. 그렇게 하기를 20여 일 한 후에야 그 신을 도로 그 전 큰 나무로 돌려보낸다. 이런 행사를 2년 만에 한 번씩 한다.”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청안의 국사신당제는 조선 후기 관아에서 거행되었던 매우 성대한 제의였음을 알 수 있다.

청안의 국사신당제는 산신신앙과 풍수지리설의 비보(裨補) 관념이 결합되어 생성된 신앙의례로 여겨진다. 청안은 예부터 남산(南山)이 높아 화기(火氣)가 많은 까닭에 그 산의 이름을 수신(水神)인 거북이의 이름을 붙여 좌구산(坐龜山)이라 했다. 또 그 산에 비보사찰(裨補寺刹)인 구석사(龜石寺)를 세워 화기를 압승(壓勝)했는데, 국사신이 좌정한 장압산은 운곡리 안장압 마을의 배산으로서 좌구산에서 뻗어내린 지맥이다. 그러므로 국사신의 신격은 화기를 제어하고 읍치를 수호하는 산신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국사신당제는 청안현의 관아와 여러 관청 건물에 불이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화재막이로서, 2년마다 민관이 함께 국사신 부부를 모셔다가 제사하고 무당이 관아와 관청을 돌면서 굿을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 국사신당제를 지내는 동안 그 부부를 20여 일 동안 모셔두었던 국사당은 청안면 소재지인 읍내리 동쪽에 있었다. 그 밑에 자리 잡은 마을을 지금도 국사랭이로 부르고 있어 위의 기록을 뒷받침한다.

현행 국사제

지금도 안장압을 위시한 밭장압과 괴실 같은 운곡리 세 마을에서는 해마다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닿는 정결한 제관을 선정하여 음력 정월 14일 밤에 각각 국사제를 지낸다. 마을에서는 “옛날 삼국시대에 국사(國師) 부부가 이 곳을 지나가다가 마침 임신한 부인이 입덧이 나서 고기가 먹고 싶었다. 그래서 국사 몰래 도랑에서 가재 한 마리를 잡아먹었다. 국사가 이 사실을 알고 살생을 했다고 진노하여 장압산 꼭대기에 있는 큰 나무 아래에서 열반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국사의 고매한 덕망을 기리고 부인이 가재를 먹고 죽은 한을 달래기 위하여 국사제를 지내게 되었다.”라는 설화가 구전되고 있다.

한편, 『동국세시기』에 나오는 국사신 부부를 맞이했던 큰 나무는 운곡리 안장압의 국사숲을 일컫는다. 촌로들에 따르면 고을의 원님이 부임을 하면 반드시 이 마을의 국사님께 인사를 드리러 오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한다. 또 예전에는 숲속에 국사가 타고 다니는 신승물(神乘物)을 상징하는 목마(木馬)가 안치되어 있었다. 국사신당제의 중요한 특징은 고기를 제물로 올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온 동민이 일주일 가량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설화에 따라 주신의 신격이 국사인 점을 고려한 까닭이다. 그렇긴 하되 가재를 먹고 죽은 부인의 한을 달래기 위하여 제관은 소매 속에 북어 한 마리를 감추고 있다가 제사를 마치면 국사의 신목이 안 보이게 부인의 신목 옆에 몰래 놓아둔다.

의의

청안의 국사신당제는 조선시대 읍치 차원에서 거행되었던 관행제(官行祭)이다. 현재는 마을 신앙의 형태로 변모하여 그 모습을 전하고 있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충청 지역에서 확인되는 국사당(국수당, 수당, 국시당)의 존재는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보이는 계룡산 국사당을 비롯하여 보고된 서산시 안면도 우포 국수당과 서산시 부석면 창리 국수당 같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동안 국사당신앙은 산신이나 성황신 또는 서낭신에 대한 신앙과 혼효(混淆)되어 그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따라서 『동국세시기』에 소개된 청안의 국사신당제와 이를 계승한 것으로 보이는 오늘의 운곡리 국사제는 그 역사성과 지속하고 변화하는 양상을 포착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東國歲時記, 輿地圖書
韓國民間信仰硏究 (金泰坤, 集文堂, 1983)
槐山郡誌 (槐山郡誌編纂委員會, 1990)
괴산의 마을공동체신앙 (김근수, 괴산문화원, 1998)

국사신당제

국사신당제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봄(春) > 3월 > 의례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1-08

정의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淸安)에서 3월 초에 장압산(長鴨山)의 큰 나무에서 국사신 부부를 맞이하여 관아에 모셔 제사하고 돌려보내던 풍속. 청안의 국사신당제는 조선시대에 현(縣) 차원에서 준비되었던 대규모의 행사였으나, 지금은 단지 청안면 운곡리의 마을 신앙으로 축소되어 매년 음력 정월 14일 밤에 세 마을이 각각 제사를 지낸다.

내용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3월 월내조(月內條)에, “청안 풍속에, 삼월 초가 되면 그 현의 우두머리 관리가 읍민들을 거느리고 국사신 부부를 동면(東面) 장압산 위에 있는 큰 나무에서 맞이하여 읍내로 들어온다. 그리고 무격(巫覡)들로 하여금 술과 음식을 갖추어 놓고 징을 울리고 북을 치며 떠들썩하게 현아(縣衙)와 각 관청에서 그 신에 대한 제사를 지낸다. 그렇게 하기를 20여 일 한 후에야 그 신을 도로 그 전 큰 나무로 돌려보낸다. 이런 행사를 2년 만에 한 번씩 한다.”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청안의 국사신당제는 조선 후기 관아에서 거행되었던 매우 성대한 제의였음을 알 수 있다. 청안의 국사신당제는 산신신앙과 풍수지리설의 비보(裨補) 관념이 결합되어 생성된 신앙의례로 여겨진다. 청안은 예부터 남산(南山)이 높아 화기(火氣)가 많은 까닭에 그 산의 이름을 수신(水神)인 거북이의 이름을 붙여 좌구산(坐龜山)이라 했다. 또 그 산에 비보사찰(裨補寺刹)인 구석사(龜石寺)를 세워 화기를 압승(壓勝)했는데, 국사신이 좌정한 장압산은 운곡리 안장압 마을의 배산으로서 좌구산에서 뻗어내린 지맥이다. 그러므로 국사신의 신격은 화기를 제어하고 읍치를 수호하는 산신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국사신당제는 청안현의 관아와 여러 관청 건물에 불이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화재막이로서, 2년마다 민관이 함께 국사신 부부를 모셔다가 제사하고 무당이 관아와 관청을 돌면서 굿을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 국사신당제를 지내는 동안 그 부부를 20여 일 동안 모셔두었던 국사당은 청안면 소재지인 읍내리 동쪽에 있었다. 그 밑에 자리 잡은 마을을 지금도 국사랭이로 부르고 있어 위의 기록을 뒷받침한다.

현행 국사제

지금도 안장압을 위시한 밭장압과 괴실 같은 운곡리 세 마을에서는 해마다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닿는 정결한 제관을 선정하여 음력 정월 14일 밤에 각각 국사제를 지낸다. 마을에서는 “옛날 삼국시대에 국사(國師) 부부가 이 곳을 지나가다가 마침 임신한 부인이 입덧이 나서 고기가 먹고 싶었다. 그래서 국사 몰래 도랑에서 가재 한 마리를 잡아먹었다. 국사가 이 사실을 알고 살생을 했다고 진노하여 장압산 꼭대기에 있는 큰 나무 아래에서 열반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국사의 고매한 덕망을 기리고 부인이 가재를 먹고 죽은 한을 달래기 위하여 국사제를 지내게 되었다.”라는 설화가 구전되고 있다. 한편, 『동국세시기』에 나오는 국사신 부부를 맞이했던 큰 나무는 운곡리 안장압의 국사숲을 일컫는다. 촌로들에 따르면 고을의 원님이 부임을 하면 반드시 이 마을의 국사님께 인사를 드리러 오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한다. 또 예전에는 숲속에 국사가 타고 다니는 신승물(神乘物)을 상징하는 목마(木馬)가 안치되어 있었다. 국사신당제의 중요한 특징은 고기를 제물로 올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온 동민이 일주일 가량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설화에 따라 주신의 신격이 국사인 점을 고려한 까닭이다. 그렇긴 하되 가재를 먹고 죽은 부인의 한을 달래기 위하여 제관은 소매 속에 북어 한 마리를 감추고 있다가 제사를 마치면 국사의 신목이 안 보이게 부인의 신목 옆에 몰래 놓아둔다.

의의

청안의 국사신당제는 조선시대 읍치 차원에서 거행되었던 관행제(官行祭)이다. 현재는 마을 신앙의 형태로 변모하여 그 모습을 전하고 있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충청 지역에서 확인되는 국사당(국수당, 수당, 국시당)의 존재는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보이는 계룡산 국사당을 비롯하여 보고된 서산시 안면도 우포 국수당과 서산시 부석면 창리 국수당 같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동안 국사당신앙은 산신이나 성황신 또는 서낭신에 대한 신앙과 혼효(混淆)되어 그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따라서 『동국세시기』에 소개된 청안의 국사신당제와 이를 계승한 것으로 보이는 오늘의 운곡리 국사제는 그 역사성과 지속하고 변화하는 양상을 포착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東國歲時記, 輿地圖書韓國民間信仰硏究 (金泰坤, 集文堂, 1983)槐山郡誌 (槐山郡誌編纂委員會, 1990)괴산의 마을공동체신앙 (김근수, 괴산문화원,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