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단오제

한자명

江陵端午祭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여름(夏) > 5월 > 정일

집필자 장정룡(張正龍)
갱신일 2019-05-17

정의

음력 5월 5일 강릉 지역에서 펼쳐지는 제의(祭儀). 1967년에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유래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단오민속은 부족국가시대부터 행해져 온 파종의례(播種儀禮)에서 출발하여 벽사진경의 신앙적 의미가 강조되었다. 그 후 그네와 씨름 등 민속예능을 결합하여 명절축제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강릉단오제의 표피적 주제는 세시풍속 주기이나, 이면적 주제는 지역 신화와 예능으로 형성되어 있다.

단오는 3월부터 5월까지 춘계 파종 후 5월의 성장촉진 의례로 진행되면서 길일의 정점을 이루는 시기이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추강선생문집(秋江先生文集)』 권5,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에 오늘날 한국의 대표 축제라고 할 수 있는 강릉단오제의 원류인 영동산신제와 고을 풍습에 대해 기록해 놓았다.

1603년 교산 허균의 기록에 강릉단오제의 중심 신격(神格)은 대관령 산신으로 좌정한 김유신 장군이라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도 “강릉에는 제사지내는 외에 특별히 다른 것이 있다(江陵則享祀外 別有異者).”라고 하였다. 곧, 마을에서 봄가을로 행해지는 일반적 마을 성황제와 특별히 다른 것은 매년 4월 15일 호장과 무격이 대관령에서 신목(神木)으로 국사신(國師神)을 모셔 와서 봉안하였다가, 5월 5일 굿과 탈놀이 등으로 신을 즐겁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별히 다른 것’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중국 단오와 다른 토착 제의의 요체를 말하고자 한 뜻이다. 그것은 삼국통일을 성취한 신라의 김유신을 산신으로, 나말여초(羅末麗初)의 승려 범일(梵日, 810~889)을 국사신격으로 봉안하고 독자적인 축제를 펼쳐왔다는 것이다. 이후 범일국사의 탄생설화는 952년에 편찬된 『조당집(祖堂集)』과 달리 『증수임영지』에서는 양가(良家)의 처녀가 해가 비친 물을 마시고 잉태한 고대형 태양신화의 신비한 화소로 바뀌었다. 오늘날 강릉단오제의 내용은 향토지 『증수임영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마을마다 성황사가 있어 춘추로 제사를 지내는데, 강릉에서는 제사지내는 외에 특별히 다른 것이 있다. 매년 4월 15일 본부의 호장이 무당을 거느리고 대관령 산 위에 있는 한 칸의 신사(神祠)에 가서 고유(告由)하고, 무당으로 하여금 나무에다가 신령을 구하게 한다. 나무에 신이 내려 그 가지가 저절로 흔들리게 되면, 신령의 소의로 이렇게 된다고 한다. 그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서 기운 센 젊은이에게 들게 하고 오는데, 이 행차를 국사의 행차라고 말한다. (중략) 황혼에 관사에 이르면 횃불이 들판을 메우고 관청의 일꾼들이 이를 맞아 모셔 안치하였다.”

성황사의 춘추제와 특별히 다른 일을 추적해 보면 단오제의 원형에 대해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이 기록해 놓았다. 이것은 이능화(李能和, 1869~1945)가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에서 『추강냉화』에 수록된 것으로 잘못 본 것이나, 남효온은 문집 『추강선생문집』 권5, 유금강산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영동민속에는 매년 3, 4, 5월 중에 날을 가려 무당과 함께 바다와 육지에서 나는 음식을 아주 잘 장만하여 산신제를 지낸다. 부자는 말에 음식을 싣고 가고 가난한 사람은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가서 신의 제단에 제물을 진설한다.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비파를 뜯으면서 연 사흘을 즐겁게 취하고 배불리 먹은 후 집으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매매(賣買)를 시작한다.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조그만 물건도 얻을 수도 없고 주지도 않는다.”

추강 선생이 1471년에 영동 지역을 다닌 것을 기록한 것으로 산신제를 지내고 축제를 여는 모습이 강릉단오제와 흡사하다. 특히 3월부터 준비하여 4월과 5월 단옷날을 택해서 제를 지내는 모습이 그러하다. 실제로 강릉단오제가 시작되는 4월에는 분위기가 고조되는데, 4월 15일 대관령산신제를 전후하여 어촌인 강릉시 강문동마을에서는 성황당에서 별신제 풍어굿을 올리고, 산촌인 강동면 심곡마을에서는 마을 뒷산에 올라가 산맥이제를 지낸다. 이처럼 지금도 강릉 일대의 어촌과 산촌에서 3월부터 5월까지 마을 제례를 지내는 것을 보면, 추강의 기록은 강원도 산간마을의 산메기나 별신제와 유사한 점도 발견된다.

오늘날의 단오제는 중심신격으로 범일이라는 강릉 출신의 실존 승려를 국사성황신으로 봉안하고 있는 점이 기록과 다르다. 『고려사(高麗史)』에 전하는 김순식 장군 이야기는 그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출병하였을 때 태조의 꿈에 이상한 중이 군사 삼천 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그 이튿날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도왔다는 꿈 이야기를 하자, 김순식은 자신이 대관령에 이르렀을 때 이상한 승사(僧祠)가 있었으므로 제단을 만들어 기도했다는 기록이 처음이다.

조선 경종 무렵에 펴낸 강릉 향토지 『강릉지(江陵誌)』 풍속조 대관산신탑산기(大關山神 塔山記)에 보면, “김순식이 고려 태조를 따라 남쪽을 정벌할 때, 꿈에 승속(僧俗) 두 신이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구해 주었다. 꿈에서 깨어보니 싸움에 이겼으므로, 대관령에 사우(寺宇)를 지어 제사를 올린다.”라고 하였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승려는 범일국사, 속인은 김유신 장군이라고 한다.

허균은 조선 선조 36년(1603) 여름, 그의 나이 34세 때 당시 수안군수를 역임하고 잠시 모친과 함께 외가인 강릉 사천의 애일당에 내려와 약 4개월 간 머물렀을 때 강릉단오제를 보았다.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14, 문부11, 대령산신찬병서(大嶺山神贊幷書)에는, 당시 명주사람들이 5월 길일을 택해, 대관령 산신인 김유신 장군을 괫대와 꽃으로 맞이하여 부사에 모신 다음, 온갖 잡희를 베풀어 신을 즐겁게 해준다고 하였다. 신이 즐거워하면 하루 종일 괫대[花蓋]가 쓰러지지 않으며 그해는 풍년이 들고, 신이 화를 내면 이것이 쓰러져 그해는 반드시 풍재나 한재가 있다고 말한 수노(首奴)의 이야기를 그대로 적고 있으며, 이 말을 듣고 자신도 이상하게 여겨 그날 가서 보았더니 과연 괫대가 쓰러지지 않아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며 환호성을 지르고 경사롭게 여겨 서로 손뼉을 치며 춤을 추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살펴보면 지금부터 400여 년 전에 강릉단오제의 주신격은 김유신 장군이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강릉단오제가 산신제의 성격에서 성황제로 옮겨가는 시기는 영조 무렵으로 추정된다.

강릉국사성황제와 관련된 조선 영조 때 일화가 전한다. 영조 임오년(1762) 여름에 부사 윤방(尹坊)이 삼척에서 사람을 죽인 사건을 살피는 검사관으로 갔다. 금부에 있는 서리를 파면했다는 이유로 이규(李逵)라는 사람이 명을 받고 관아에 와서 아전의 우두머리를 문책하려고 했다. 최광진(崔光振)이 호장(戶長)이었다. 아전이 그를 부르니, 바로 이날이 국사성황신을 모셨다가 보내는 5월 5일이었다. 호장이 성황사에서 일을 보다가 시간이 흐른 뒤 관아에 도착했다. 이규의 성격이 조급하여 사람을 시켜 결박하고, 마패로 마구 때리면서 “너는 성황신만 중히 여기고 나를 천박하게 대우하니 대체 성황은 어떤 신령이냐? 너는 비록 성황신을 존경할지 모르나 나에게는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면서 흉악한 말을 하자, 갑자기 사지가 뒤틀리며 뼛속을 찌르는 아픔을 느끼고 결박당하듯이 정신이 혼미해지자 비로소 겁을 내면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로 “나는 이제 죽는구나.” 하고 피를 토하면서 죽었다.

이 기록을 근거로 본다면, 조선 후기에 성황신의 위엄과 신앙적 기반이 지속적으로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강릉단오제는 향리가 주관하고 향직의 우두머리격인 호장이 초헌관을 맡았으며, 관노들은 탈춤을 추고, 나팔수와 신목잡이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수노(首奴)가 삼헌관을 맡아 성황신 행렬에 참가하였다. 산신에서 성황신으로의 신격 변화는 1600년 무렵 허균의 김유신 산신 기록이 150년 뒤에는 국사성황신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국사성황신이 누구인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범일이 국사로 추증(追贈)되었다는 사실이 국사성황신으로서 위상설정에 기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김유신 장군은 강릉 출신이 아니라는 점에 반하여, 범일국사는 강릉의 굴산사를 세운 고승으로 일찍이 이 지방에서 존숭했다는 사실로 그 추정이 가능하다. 또한 강릉 지역이 일찍이 영향을 받은 바 있는 신라 김유신 장군을 배제하고 제의를 통해 지역주민의 구심체를 형성하여 이를 토착 세력화하려는 의지도 일조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국사’라는 칭호는 국사봉, 구수봉, 국수봉이라는 지명이 전국에 퍼져 있으며 동시에 ‘신이 좌정한 봉우리’라는 뜻이 있음을 감안할 때, 대관령을 신성한 봉으로 인정하고 여기서 산신제를 지낸 것이 신라 때의 승려와 연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강릉단오제는 범일국사가 실질적인 중심신격으로 바뀌면서 성황신제를 봉안하는 마을 제의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금부터 약 1,000년 전인 고려시대부터 대관령의 치제를 대략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강릉을 중심으로 동예국(東濊國)의 무천제(舞天祭)가 전승되었는데, 농공시필기(農功始畢期)인 5월과 10월에 국중대회(國中大會)가 열렸다. 다시 말해 10월 상달의 예국 무천제와 연계된 5월 수릿달 축제로 이미 정착되었다가 중국으로부터 단오민속을 수용하면서 길일인 단옷날을 택해 축제를 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강릉단오제는 토착 향토축제에서 일찍이 출발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예국의 무천제는 시기가 지남에 따라 산신제와 성황제로 바뀌어 전승되었으며, 현대에 이르러 강릉 고유의 전통문화를 중심으로 한 지역 전통의 향토축제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강릉단오제는 3월부터 5월에 이르는 기간동안 응천순시(應天順時)에 따라 마을의 토착신격을 봉안하고 곡물 성장을 도모하는 파종 후 성장의례와 질병 예방의 주술의례가 중심이 되어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용

강릉단오제는 제례를 중심으로 행해지는데 기예능보유자로는 1967년 지정된 김신묵(金信黙, 1893년 3월 18일생, 작고)의 뒤를 1982년 2월 1일 지정된 김진덕(金振悳, 1910년 5월 20일생, 작고)이 이어나갔으며, 또 조규돈(曹圭燉)이 보유자로서 집례를 맡고 있다. 제례와 함께 행해지는 무속행사는 장재인(張在仁, 1907년 4월 25일생, 작고) 무녀의 뒤를 이어 박용녀(朴龍女, 1912년 12월 18일생, 작고)와 신석남(申石南, 1930년 2월 28일생, 작고) 무녀가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신석남의 며느리인 빈순애(賓順愛) 무녀가 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음력으로 기록된 단오제 일정은 다음과 같다.

3월 20일: 신주근양(神酒謹釀)
4월 1일(初端午): 헌주(獻酒)와 무악(巫樂)
4월 8일(再端午): 헌주와 무악
4월 14일: 봉영(奉迎) 출발
4월 15일(三端午): 봉영, 대관령성황제 및 산신제
4월 27일(四端午): 무제(巫祭)
5월 1일(五端午): 화개(花蓋),
관노가면극(官奴假面劇) 본제 시작
5월 4일(六端午): 관노가면극, 무악(巫樂)
5월 5일(七端午): 관노가면극, 무악 본제
5월 6일(八端午): 소제(燒祭), 봉영

일정은 다소 신축성이 있으나, 근 50여 일에 걸쳐서 강릉단오제를 준비하고 시행한다는 점에서 강릉의 충분한 문화적 역량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강릉단오제 지정문화재 행사인 제례, 굿, 관노가면극 이외에도 민속행사로 강릉농악, 향토민요경창, 시조경창, 그네대회, 씨름대회, 궁도대회 같은 수릿날의 전통풍속과 지역 민속놀이가 있으며, 체육행사와 경축행사가 열린다. 강릉단오제의 제례는 전래 유교식 제례양식을 취하는데, 복식과 홀기, 축문을 갖추고 헌관 및 집사들이 산신제, 성황제, 영신제, 봉안제, 조전제, 송신제를 거행한다. 제전행사의 제물은 도가(都家)에서 정성껏 마련하며, 신주(神酒)는 칠사당에서 제관들과 무당이 주관하여 빚는다. 제례진행은 강릉시장과 각급 기관장, 사회단체장이 제관이 되어 향토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한다. 현재 행해지는 제례의식은 다음과 같다.

  1. 신주빚기: 강릉단오제를 준비하는 과정의 하나로서 가장 먼저 행해지는 의식으로 음력 4월 5일에 신에게 바칠 술을 빚는다. 이것을 ‘신주’라고 하는데, 1960년대에는 음력 3월 20일 제주로 사용되는 술을 도가에서 정성껏 담갔다. 옛날 관아였던 칠사당에는 일주일전에 미리 금줄을 치고 황토와 소금을 뿌려 부정한 일을 막는다. 당일 칠사당 마루에서 무녀가 부정굿을 하여 사방의 부정과 제관에게 따라온 부정 등 온갖 부정함을 깨끗하게 제거하는 굿을 한다. 무녀가 신칼을 휘두르고 재액을 몰아내는 굿 사설을 늘어놓으며, 깨끗한 물로 부정치기를 한다.

    신에게 바치는 술은 제관들이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갖추어 입은 다음, 기능보유자가 참여한 가운데 부정 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말을 못하도록 입을 흰 천으로 감싼 다음 강릉시장이 보낸 관미(官米) 두 되와 시민들이 보낸 헌미(獻米)로 누룩, 솔잎을 버무려 단지에 넣고 정화수를 붓는다. 제주단지는 한지로 덮고 금줄로 잘 묶어 칠사당 호장청의 아랫방에 두어 익히는데, 이때 무격(巫覡)들이 장단을 울리고 무녀가 술이 잘 숙성되기를 기원하는 축원가를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호장, 부사, 수노(首奴), 성황직(남자 무당의 우두머리), 내무녀가 참여하여 관에서 보내준 쌀이나 제전(祭田)에서 산출된 깨끗한 쌀 한말에 누룩을 섞어 신주를 빚었다. 신주는 탁주로 쌀과 누룩을 2 : 1 비율로 섞는데, 쌀 한 말을 했을 때 술맛이 좋도록 솔잎 닷 되를 넣는다.

    신주를 정성껏 빚는 일은 매년 단오제를 잘 지내 국사성황신과 여성황신이 이곳 주민들에게 풍요와 안녕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행한다. 신주는 제의 진행상 중요한 제물의 하나이며, 신주를 빚음으로써 시민뿐만 아니라 이 일에 참여하는 제관들도 제의가 시작된 것으로 믿었다.

  2. 산신제와 국사성황제: 대관령은 강릉의 진산(鎭山)으로 높이 865미터, 고갯길이 13킬로미터로 아흔아홉 굽이로써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관문이다. 이곳의 북쪽 능선에 산신당과 성황사가 있는데, 음력 4월 15일 헌관들이 산신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40미터 정도 아래에 있는 국사성황사에서 성황제를 지낸 다음 성황신을 모셔온다. 산신당은 한 칸의 기와집으로 ‘山神堂’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에는 나무 제단에 산신화상과 대관령산신지신(大關嶺山神之神)이라고 쓴 위패(位牌)를 세워놓았다. 산신은 김유신 장군이라고 전하는데, 호랑이와 함께 있는 고승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음력 4월 15일 아침 10시부터 대관령 산신당에서는 산신제가 행해지는데,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의 헌작과 홀기에 따라 행해지는 유교식 제례이다. 국사성황신제는 11시 무렵부터 행해지는데 ‘城隍祠’라고 쓰인 한 칸의 기와집에 제물을 차려놓고 지낸다. 내부에는 ‘대관령국사성황지신(大關嶺國師城隍之神)’이라고 쓴 위패를 세워놓았으며 벽 쪽에 걸린 화상은 범일국사를 상징하는데, 전립을 쓰고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다.

    이 행사를 자세하게 기록한 『증수임영지』에 따르면 “매년 4월 15일에 강릉부의 호장이 무당을 거느리고 대관령 산 위에 있는 한 칸의 신사에 가서 고유(告由)하고 무당으로 하여금 나무에다가 신령을 구하게 하여 나무에 신이 내려 흔들리면 가지를 하나 꺾어 기운 센 사람이 들게 하고 온다.”라고 하였다. 이 행차를 국사(國師) 행차라고 했는데, 날라리를 부는 사람이 앞에서 인도하고 무당들이 징을 치고 북을 울리면서 따르고 호장이 대창역마를 타고 천천히 그 뒤를 따른다고 하였다. 이때는 도로 가에 사람들이 담을 에워싼 것과 같이 모여들어 종이나 천을 신목에 걸고 기원하거나 음식을 장만하여 무당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기록에는 대관령에서 내려와 저녁에 강릉부 관사에 이르면 횃불이 들판을 메우는데, 하급 관노들이 신목을 맞이하여 성황사에 안치한다고 되어 있다. 현재의 행사 역시 이 내용과 큰 차이는 없지만, 자동차로 신목을 봉송하다가 대관령 옛길로 구산성황당까지 내려오는 과정을 재현하고 있다.

  3. 구산성황신제와 학산성황제: 국사성황신이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를 내려오다가 조선조 때 역원이었던 구산에 이르면 구산성황당에 이르러 잠시 머문다. 이곳은 성황지신(城隍之神), 토지지신(土地之神), 여역지신(癘疫之神), 그 밖에도 영산지신(靈山之神)을 모시고 있을 정도로 대관령과 관계가 깊다. 그래서 국사성황신의 아들 성황신이라고까지도 말한다. 국사성황신행차가 윗반쟁이, 아랫반쟁이, 제민원, 굴면이를 지나 도착하면 주민들은 싸리나무와 관솔을 묶어서 만든 횃대에 불을 붙여 들고 신을 영접했다고 한다. 조선 초기까지도 그와 같이 했는데, 이렇게 횃불을 들고 신을 맞이할 때 주민들은 ‘산유가’라는 영신가(迎神歌)를 부른다. 이것은 구정면 학산리의 ‘영산홍’이라는 민요와 같은 것인데, 범일국사가 학산리 태생이므로 이 민요를 신맞이 노래로 한 것이다.

    이때 부르는 가사는 “꽃바칠레 꽃바칠레 사월보름날 꽃바칠레 어얼사 지화자자 영산홍, 일년에 한 번밖에 못 만나는 우리 연분 지화자자 영산홍, 보고파라 가고지고 어서 바삐 가자서라 지화자자 영산홍, 국태민안 시화연풍 성황님께 비나이다 지화자자 영산홍, 산호원피 야도자절 성황님께 비나이다 지화자자 영산홍”이라고 다른 가사를 섞어 부르며 맞이한다.

    한 해 동안 헤어져 있던 대관령국사성황신과 홍제동에 모셔져 있는 정씨가의 딸인 국사성황신이 만나는 날이므로 이들 신격뿐만 아니라 주민들도 들뜨게 된다. ‘어서바삐 가자서라’ 하고 부르는 민요는 국사성황신 행차를 재촉하지만, 국태민안을 빌고 시절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며, 호랑이를 피하고 도적도 없게 해달라는 소원도 비는 것이다.

    신이 내린 성황목에 삼색 천으로 장식한 국사성황신 행렬을 맞이하면서 이곳 주민들이 횃대에 불을 붙여 신을 맞는 것은 곧 영산홍(꽃)을 바치는 의식이다. 이것은 불교의 산화공덕과 같은 의미이며, 동시에 신라 때 강릉 태수로 오던 순정공의 부인 수로(水路)를 맞이하며 한 노인이 불렀다는 향가 헌화가(獻花歌), 곧 ‘꽃 바치는 노래’와도 그 의미가 통한다. 횃대의 불꽃과 상상 속의 꽃이 신격을 영접하는 민요로 불려졌다.

    학산성황제는 강릉시에서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구정면 재궁말 마을 성황제인데, 대관령국사성황신인 범일국사의 탄생지이고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굴산사를 짓고 입적한 유적지이므로 1999년부터 이곳을 순례하고 있다. 이 마을은 범일국사의 탄생설화가 깃들어 있는 석천(石泉)과 학바위가 있는데, 국사성황신이 고향을 둘러본다는 의미이다. 학산리 성황당은 마을 입구에 있는데, 당집은 없고 소나무 숲이 우거진 곳에 높이 1미터 되는 돌담을 빙 둘러 쳐놓았다. 이곳에 대관령국사성황신과 제관, 무격 일행이 도착하면 마을에서 제물을 차려놓고 굿을 한다. 성황제가 끝나면 대관령국사성황신을 모신 위패와 신목이 석천과 마을을 한바퀴 돈 다음에 단오제가 시작되기 전까지 국사성황신을 모실 홍제동 대관령국사여성황사로 행차한다.

  4. 봉안제(奉安祭): 신목 행차는 영산홍 민요를 부르면서 위패와 함께 홍제동에 있는 대관령국사여성황신 제당에 도착하여 단오제 본제가 시작되는 날까지 부부 성황신이 함께 봉안된다. 국사성황신과 여성황신이 만나는 음력 4월 15일은 강릉단오제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 이때는 시내 일원을 순례한 다음, 대관령국사여성황사에서 합사를 하고 봉안제(奉安祭)를 올린다. 홀기에 따라 헌관의 독축(讀祝) 제례가 진행되고 봉안굿이 행해진다. 이날은 대관령국사성황신이 여성황신과 부부가 된 날이라고 한다. 대관령국사여성황사는 기와집 세 칸으로 단청을 칠하고 내부 정면 벽에는 여성황신의 화상이 그려져 있다. 대관령국사여성황신의 모습은 머리를 길게 땋아 좌측 어깨에서 앞으로 늘였으며 그 앞에는 호랑이와 시녀가 그려져 있다. 화상 앞에는 검은색 목판에 흰 글씨로 ‘대관령국사여성황신위’라고 쓴 위패가 세워져 있다. 이 여성황사는 남문동에 있었으나, 지금은 수도관리사무소 뒤에 있다.

    대관령에서 음력 4월 15일 국사성황신을 봉안하고 내려오면 단오제가 열리는 날까지 약 보름 동안 이 곳 여성황사에 신목과 위패를 함께 모셨다가 단오 이튿날 남대천으로 모셔 제사를 지낸다. 서로 떨어져 있던 국사성황신 부부는 이 기간 동안 함께 있게 된다. 대관령국사성황신을 모셔가는 날에도 여성황사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의례절차는 국사성황제와 동일하고 제물 진설도 대관령국사성황제와 다르지 않으나 합제 축문만 다르다.

    전설에 따르면 조선조 숙종 때 대관령성황신이 초계 정씨인 정완주의 무남독녀 경방댁 정씨 처녀가 창원 황씨 황수징과 결혼하였으나, 시댁이 멀어 친정에 머물러 있다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다고 한다. 대관령국사성황신이 혼자 있는 정씨 처녀를 데리고 오려고 정씨의 꿈에 나타나 청혼했으나 사람이 아닌 신에게 딸을 줄 수 없다고 거절당하자, 호랑이를 시켜 야밤에 머리를 감고 대청마루에 얌전히 앉아 있던 처녀를 대관령으로 데리고 가서 영혼결혼식을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처녀를 찾아 대관령으로 갔더니 처녀의 영혼은 이미 간 데 없고, 시체는 비석처럼 서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조 후기에 형성된 이러한 전설은 이른바 호환설화(虎患說話)의 유형으로 볼 수 있으며, 해원형(解寃形)의 하나로써 호환당한 처녀가 승화된 신격으로 재생하는 과정을 통해 호환을 방지하고 대관령 험로의 안전과 지역의 안녕, 풍요를 기원하는 공동체 제의의 한 요소가 포함된 것이다.

  5. 영신제(迎神祭)와 국사성황신행차: 강릉단오제의 본제가 시작됨을 알리는 영신제는 음력 5월 3일 남대천 단오제단에서 행해진다. 영신제는 대관령국사여성황사에 모신 국사성황신 부부를 단오제가 열리는 남대천으로 봉송하여 지내는데, 지금도 강릉의 옛 정씨가 살던 경방댁에서는 두 신이 단오장으로 나가는 전야제 때 제물을 차려 맞이하며 두 신도 친정과 처가를 방문하게 된다.

    강릉시내 여성황신의 친정인 경방댁에 들른 국사성황신 부부는 현재 이 집에 살고 있는 최씨 집안에서 장만한 제물 앞에 머무른다. 이 집주인은 제례를 지내기 3일 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부정을 막고 행동을 조심하고 근신을 한다. 조선조 때 정씨가 살던 이 집은 현재 주인의 5대조인 최윤정이라는 분이 이사와서 지금까지 후손들이 살고 있으므로, 영신제 때 최씨 집안 사람들이 나와서 위패와 신목 앞에 절을 한다. 무녀들은 친정나들이를 축하하는 굿을 한 다음, 소지를 올려 잘 흠향했는지 알아본 후, 두 신을 상징하는 위패와 신목을 앞세우고 남대천으로 향한다. 이때 제관과 무당이 따르고, 관노가면극과 농악대는 괫대인 화개(花蓋)를 앞세우고 탈놀이와 함께 흥겨운 풍물가락을 연주한다. 주민들은 영산홍 민요를 부르며 창포등을 들고 신의 행차를 따른다. 이렇게 국사성황신 행차가 시내를 한바퀴 도는 신유행사를 마치고 나면 남대천을 건너 가설제단에 봉안된다. 이때 무녀들이 영신굿을 하여 신을 좌정시키고 단오행사를 마칠 때까지 각종 제사를 지낸다.

  6. 조전제(朝奠祭): 음력 5월 4일부터 단오제를 마치는 날까지 매일 아침 유교식으로 제를 지내는 행사가 조전제이다. 홀기에 따라 유교식 복장을 갖춰 입고 제례부분 기능보유자가 함께 진행하는데, 지역의 단체장이나 인사들이 지역의 안녕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낸다.

  7. 무당굿: 강릉단오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무당굿은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굿은 인간의 뜻을 신에게 전달하는 제의로 무녀들이 춤과 굿 사설로 축원하고, 무격은 무악을 연주하여 신을 즐겁게 한다. 강릉단오제에서 전통성이 가장 강한 것으로 열두거리 전체를 단오제 마지막 날인 7일까지 펼친다.

    강릉단오굿의 구성은 시대에 따라 변화를 보이는데, 1937년대에는 12신악(神樂)으로 ① 부정굿 ② 감응굿(가족의 安幸을 축원) ③ 군웅굿(가축의 번식을 축원) ④ 시중굿[豊年祝] ⑤ 성황굿[城隍祝] ⑥ 지신굿[地神祝] ⑦ 맞이굿[海神祝] ⑧ 별상굿[疫神祝] ⑨ 조상굿[祖先祝] ⑩ 성조굿[家神祝] ⑪ 조왕굿[竈神祝] ⑫ 거리풀이굿 순서로 행해졌다. 그 이후 1966년 임동권 교수가 무형문화재 지정조사에서는 강릉 출신 무녀 장대연(당시 85세)을 조사하였는데, ① 부정굿 ② 서낭굿 ③ 성주굿 ④ 군웅굿 ⑤ 세존굿 ⑥ 조상굿 ⑦ 설영굿 ⑧ 제석굿 ⑨ 당고마기 ⑩ 심청굿 ⑪ 손요굿 ⑫ 뒤풀이의 순서였다. 이후 20석(席: 거리)으로 늘어나기도 하고 22석 또는 23석을 하기도 했다. 대체로 열두거리를 중심으로 여기에 몇 거리가 더 들어가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이상의 굿 절차 외에도 산신굿, 천왕굿(원님굿), 축원굿, 조상굿이 더 들어가기도 한다. 굿거리는 매년 일정하지 않으나 3~4일 동안 행해진다.

  8. 송신제(送神祭): 단오제 행사를 마치는 음력 5월 7일 저녁 7시에 마지막으로 성황신을 대관령과 홍제동 여성황사로 모시는 제사이다. 이때는 제관들이 단오제 기간 동안 신격이 잘 흠향했는지를 묻고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게 된다.

    송신제는 소제(燒祭)라고도 하는데, 무녀들의 환우굿이 끝나면 신목과 단오제단에 치장했던 각종 꽃장식과 기물을 불에 태워 보내는 마지막 의식이다. 이때 무녀는 내년에 다시 신을 모시겠다는 굿을 하며 한 해 동안 주민들을 잘 보살펴주기를 간구한다. 신을 모시는 강신의례와 주민들이 신을 맞이하는 영신의례, 마지막으로 신을 보내는 송신의례는 단오제도 절차상 예외가 아니다.

    강릉단오제에서 벌이는 가면극은 성황신제 계통극으로 관노들에 의해 연희되어 관노가면극이라고도 불린다. 강릉가면극은 주로 음력 5월 5일 단오 무렵에 행해졌다. 관노가면극 연희자 김동하(金東夏, 1884년 1월 22일생), 차형원(車亨元, 1890년 9월 5일생)을 대상으로 1966년에 조사한 자료 내용을 보면, 음력 5월 1일 본제가 시작될 때 화개(花蓋)를 만들고 이때부터 연희가 이루어져 4일과 5일에 걸쳐 이어졌다 한다. 경성제대 교수 추엽융(秋葉隆)의 조사에도, 5월 1일 본제 때부터 화개를 꾸미고 가면극을 했는데 화개는 부사청에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가면극은 4일에 대성황사 앞에서 놀고 5일에도 계속했다고 한다.

    연희장소는 강릉 남대천변이 아니라 대성황사를 비롯하여 여러 곳으로 옮겼는데, 음력 5월 5일에는 오전에 대성황사 앞에서 먼저 행하고, 다음에는 화개를 받들고 약국성황당, 제관청, 여성황당 순으로 순례하며 탈놀이를 했다. 현재는 여성황당만 있고 나머지는 없어졌으므로 남대천 단오터에서 4일간 연희하고 있다.

    1965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면서 구체화되었다. 이어서 1966년 문화재 지정자료가 작성되고, 1967년 1월 16일 강릉단오제의 한 종목으로 강릉관노가면극이 인정되어, 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면서 확고한 전승체계를 갖추었다. 1993년 8월 2일 기예능보유자로 권영하(權寧夏, 1918년 6월 4일생, 작고)가 지정되었고, 뒤를 이어 김종군(金鍾群, 1942년 3월 5일생)이 지정되었다.

    고증에 따르면, 이 탈놀이는 대체로 더운 절기에 행해지므로 약 두서너 시간 놀다가 더우니까 탈바가지를 벗어놓는다 하였다. 여러 조사보고서에 관노가면극은 무언극으로 이루어지거나 약간의 재담이 들어 있다고 한다. 탈놀이의 반주음악은 비교적 소상한 고증이 남아있는데, 차형원 옹은 날라리, 장구, 꽹새, 징을 오음육율에 따라 쳤다고 한다.

    등장인물은 모두 개성이 강하게 표출되는데 강릉관노가면극에는 양반광대, 소매각시, 시시딱딱이 2명, 장자마리 2명으로 총 6명이 등장한다. 고증 내용을 바탕으로 추려내면 장자마리의 춤사위는 소위 ‘마당딱이춤(마당깨끼)’이다. 마당을 닦듯이 추는 춤이라는 뜻인데 매우 독특하다. 이와 함께 ‘도리깨춤’을 춘다. 배불뚝이 모습으로 도리깨를 쳐내듯이 마당을 넓게 하는 의도로 추는 춤이다.

    다음은 양반광대와 소매각시의 춤사위로 고증에는 점잖게 추는 맞춤과 어깨춤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다. 시시딱딱이 춤사위는 가면극의 상징성을 잘 보여주는데, 무서운 탈을 쓰고 칼을 휘둘러 재앙을 쫓는 칼춤과 사랑놀음을 훼방하는 ‘제개는춤’과 소매각시를 유혹하는 ‘너울질춤’을 춘다. 차형원 옹의 고증에는 날라리, 꽹과리, 북, 장구, 징을 사용했고, 무당들이 반주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그것은 관노 중에 무격으로 일했던 사람이 많았고, 탈놀이와 무격희를 대성황당이나 여러 곳을 함께 순례하면서 행한 데에도 기인한다. 탈놀이는 고증 내용에 따라 놀이마당을 분류하면 대체로 다섯 마당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마당은 장자마리의 개시, 둘째 마당은 양반광대와 소매각시의 사랑, 셋째 마당은 시시딱딱이의 훼방, 넷째 마당은 소매각시의 자살소동, 다섯째 마당은 양반광대와 소매각시의 화해이다.

참고문헌

江陵誌, 高麗史, 東國歲時記, 惺所覆瓿藁, 秋江先生文集, 荊楚歲時記
江陵端午祭 (秋葉隆, 日本民俗學2-5, 1930)
增修臨瀛誌 (농택성, 강릉고적보존회, 1933)
江陵端午祭 (任東權, 文化財管理局, 1966)
韓·中 歲時風俗 및 歌謠硏究 (張正龍, 集文堂, 1988)
江陵官奴假面劇硏究 (張正龍 著, 集文堂, 1989)
강릉단오민속여행 (장정룡, 斗山, 1998)
江原道 民俗硏究 (張正龍, 국학자료원, 2002)
강릉단오제 (장정룡, 집문당, 2003)

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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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단오제

강릉단오제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여름(夏) > 5월 > 정일

집필자 장정룡(張正龍)
갱신일 2019-05-17

정의

음력 5월 5일 강릉 지역에서 펼쳐지는 제의(祭儀). 1967년에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유래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단오민속은 부족국가시대부터 행해져 온 파종의례(播種儀禮)에서 출발하여 벽사진경의 신앙적 의미가 강조되었다. 그 후 그네와 씨름 등 민속예능을 결합하여 명절축제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강릉단오제의 표피적 주제는 세시풍속 주기이나, 이면적 주제는 지역 신화와 예능으로 형성되어 있다. 단오는 3월부터 5월까지 춘계 파종 후 5월의 성장촉진 의례로 진행되면서 길일의 정점을 이루는 시기이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추강선생문집(秋江先生文集)』 권5,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에 오늘날 한국의 대표 축제라고 할 수 있는 강릉단오제의 원류인 영동산신제와 고을 풍습에 대해 기록해 놓았다. 1603년 교산 허균의 기록에 강릉단오제의 중심 신격(神格)은 대관령 산신으로 좌정한 김유신 장군이라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도 “강릉에는 제사지내는 외에 특별히 다른 것이 있다(江陵則享祀外 別有異者).”라고 하였다. 곧, 마을에서 봄가을로 행해지는 일반적 마을 성황제와 특별히 다른 것은 매년 4월 15일 호장과 무격이 대관령에서 신목(神木)으로 국사신(國師神)을 모셔 와서 봉안하였다가, 5월 5일 굿과 탈놀이 등으로 신을 즐겁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별히 다른 것’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중국 단오와 다른 토착 제의의 요체를 말하고자 한 뜻이다. 그것은 삼국통일을 성취한 신라의 김유신을 산신으로, 나말여초(羅末麗初)의 승려 범일(梵日, 810~889)을 국사신격으로 봉안하고 독자적인 축제를 펼쳐왔다는 것이다. 이후 범일국사의 탄생설화는 952년에 편찬된 『조당집(祖堂集)』과 달리 『증수임영지』에서는 양가(良家)의 처녀가 해가 비친 물을 마시고 잉태한 고대형 태양신화의 신비한 화소로 바뀌었다. 오늘날 강릉단오제의 내용은 향토지 『증수임영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마을마다 성황사가 있어 춘추로 제사를 지내는데, 강릉에서는 제사지내는 외에 특별히 다른 것이 있다. 매년 4월 15일 본부의 호장이 무당을 거느리고 대관령 산 위에 있는 한 칸의 신사(神祠)에 가서 고유(告由)하고, 무당으로 하여금 나무에다가 신령을 구하게 한다. 나무에 신이 내려 그 가지가 저절로 흔들리게 되면, 신령의 소의로 이렇게 된다고 한다. 그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서 기운 센 젊은이에게 들게 하고 오는데, 이 행차를 국사의 행차라고 말한다. (중략) 황혼에 관사에 이르면 횃불이 들판을 메우고 관청의 일꾼들이 이를 맞아 모셔 안치하였다.” 성황사의 춘추제와 특별히 다른 일을 추적해 보면 단오제의 원형에 대해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이 기록해 놓았다. 이것은 이능화(李能和, 1869~1945)가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에서 『추강냉화』에 수록된 것으로 잘못 본 것이나, 남효온은 문집 『추강선생문집』 권5, 유금강산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영동민속에는 매년 3, 4, 5월 중에 날을 가려 무당과 함께 바다와 육지에서 나는 음식을 아주 잘 장만하여 산신제를 지낸다. 부자는 말에 음식을 싣고 가고 가난한 사람은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가서 신의 제단에 제물을 진설한다.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비파를 뜯으면서 연 사흘을 즐겁게 취하고 배불리 먹은 후 집으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매매(賣買)를 시작한다.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조그만 물건도 얻을 수도 없고 주지도 않는다.” 추강 선생이 1471년에 영동 지역을 다닌 것을 기록한 것으로 산신제를 지내고 축제를 여는 모습이 강릉단오제와 흡사하다. 특히 3월부터 준비하여 4월과 5월 단옷날을 택해서 제를 지내는 모습이 그러하다. 실제로 강릉단오제가 시작되는 4월에는 분위기가 고조되는데, 4월 15일 대관령산신제를 전후하여 어촌인 강릉시 강문동마을에서는 성황당에서 별신제 풍어굿을 올리고, 산촌인 강동면 심곡마을에서는 마을 뒷산에 올라가 산맥이제를 지낸다. 이처럼 지금도 강릉 일대의 어촌과 산촌에서 3월부터 5월까지 마을 제례를 지내는 것을 보면, 추강의 기록은 강원도 산간마을의 산메기나 별신제와 유사한 점도 발견된다. 오늘날의 단오제는 중심신격으로 범일이라는 강릉 출신의 실존 승려를 국사성황신으로 봉안하고 있는 점이 기록과 다르다. 『고려사(高麗史)』에 전하는 김순식 장군 이야기는 그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출병하였을 때 태조의 꿈에 이상한 중이 군사 삼천 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그 이튿날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도왔다는 꿈 이야기를 하자, 김순식은 자신이 대관령에 이르렀을 때 이상한 승사(僧祠)가 있었으므로 제단을 만들어 기도했다는 기록이 처음이다. 조선 경종 무렵에 펴낸 강릉 향토지 『강릉지(江陵誌)』 풍속조 대관산신탑산기(大關山神 塔山記)에 보면, “김순식이 고려 태조를 따라 남쪽을 정벌할 때, 꿈에 승속(僧俗) 두 신이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구해 주었다. 꿈에서 깨어보니 싸움에 이겼으므로, 대관령에 사우(寺宇)를 지어 제사를 올린다.”라고 하였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승려는 범일국사, 속인은 김유신 장군이라고 한다. 허균은 조선 선조 36년(1603) 여름, 그의 나이 34세 때 당시 수안군수를 역임하고 잠시 모친과 함께 외가인 강릉 사천의 애일당에 내려와 약 4개월 간 머물렀을 때 강릉단오제를 보았다.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14, 문부11, 대령산신찬병서(大嶺山神贊幷書)에는, 당시 명주사람들이 5월 길일을 택해, 대관령 산신인 김유신 장군을 괫대와 꽃으로 맞이하여 부사에 모신 다음, 온갖 잡희를 베풀어 신을 즐겁게 해준다고 하였다. 신이 즐거워하면 하루 종일 괫대[花蓋]가 쓰러지지 않으며 그해는 풍년이 들고, 신이 화를 내면 이것이 쓰러져 그해는 반드시 풍재나 한재가 있다고 말한 수노(首奴)의 이야기를 그대로 적고 있으며, 이 말을 듣고 자신도 이상하게 여겨 그날 가서 보았더니 과연 괫대가 쓰러지지 않아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며 환호성을 지르고 경사롭게 여겨 서로 손뼉을 치며 춤을 추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살펴보면 지금부터 400여 년 전에 강릉단오제의 주신격은 김유신 장군이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강릉단오제가 산신제의 성격에서 성황제로 옮겨가는 시기는 영조 무렵으로 추정된다. 강릉국사성황제와 관련된 조선 영조 때 일화가 전한다. 영조 임오년(1762) 여름에 부사 윤방(尹坊)이 삼척에서 사람을 죽인 사건을 살피는 검사관으로 갔다. 금부에 있는 서리를 파면했다는 이유로 이규(李逵)라는 사람이 명을 받고 관아에 와서 아전의 우두머리를 문책하려고 했다. 최광진(崔光振)이 호장(戶長)이었다. 아전이 그를 부르니, 바로 이날이 국사성황신을 모셨다가 보내는 5월 5일이었다. 호장이 성황사에서 일을 보다가 시간이 흐른 뒤 관아에 도착했다. 이규의 성격이 조급하여 사람을 시켜 결박하고, 마패로 마구 때리면서 “너는 성황신만 중히 여기고 나를 천박하게 대우하니 대체 성황은 어떤 신령이냐? 너는 비록 성황신을 존경할지 모르나 나에게는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면서 흉악한 말을 하자, 갑자기 사지가 뒤틀리며 뼛속을 찌르는 아픔을 느끼고 결박당하듯이 정신이 혼미해지자 비로소 겁을 내면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로 “나는 이제 죽는구나.” 하고 피를 토하면서 죽었다. 이 기록을 근거로 본다면, 조선 후기에 성황신의 위엄과 신앙적 기반이 지속적으로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강릉단오제는 향리가 주관하고 향직의 우두머리격인 호장이 초헌관을 맡았으며, 관노들은 탈춤을 추고, 나팔수와 신목잡이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수노(首奴)가 삼헌관을 맡아 성황신 행렬에 참가하였다. 산신에서 성황신으로의 신격 변화는 1600년 무렵 허균의 김유신 산신 기록이 150년 뒤에는 국사성황신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국사성황신이 누구인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범일이 국사로 추증(追贈)되었다는 사실이 국사성황신으로서 위상설정에 기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김유신 장군은 강릉 출신이 아니라는 점에 반하여, 범일국사는 강릉의 굴산사를 세운 고승으로 일찍이 이 지방에서 존숭했다는 사실로 그 추정이 가능하다. 또한 강릉 지역이 일찍이 영향을 받은 바 있는 신라 김유신 장군을 배제하고 제의를 통해 지역주민의 구심체를 형성하여 이를 토착 세력화하려는 의지도 일조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국사’라는 칭호는 국사봉, 구수봉, 국수봉이라는 지명이 전국에 퍼져 있으며 동시에 ‘신이 좌정한 봉우리’라는 뜻이 있음을 감안할 때, 대관령을 신성한 봉으로 인정하고 여기서 산신제를 지낸 것이 신라 때의 승려와 연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강릉단오제는 범일국사가 실질적인 중심신격으로 바뀌면서 성황신제를 봉안하는 마을 제의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금부터 약 1,000년 전인 고려시대부터 대관령의 치제를 대략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강릉을 중심으로 동예국(東濊國)의 무천제(舞天祭)가 전승되었는데, 농공시필기(農功始畢期)인 5월과 10월에 국중대회(國中大會)가 열렸다. 다시 말해 10월 상달의 예국 무천제와 연계된 5월 수릿달 축제로 이미 정착되었다가 중국으로부터 단오민속을 수용하면서 길일인 단옷날을 택해 축제를 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강릉단오제는 토착 향토축제에서 일찍이 출발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예국의 무천제는 시기가 지남에 따라 산신제와 성황제로 바뀌어 전승되었으며, 현대에 이르러 강릉 고유의 전통문화를 중심으로 한 지역 전통의 향토축제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강릉단오제는 3월부터 5월에 이르는 기간동안 응천순시(應天順時)에 따라 마을의 토착신격을 봉안하고 곡물 성장을 도모하는 파종 후 성장의례와 질병 예방의 주술의례가 중심이 되어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용

강릉단오제는 제례를 중심으로 행해지는데 기예능보유자로는 1967년 지정된 김신묵(金信黙, 1893년 3월 18일생, 작고)의 뒤를 1982년 2월 1일 지정된 김진덕(金振悳, 1910년 5월 20일생, 작고)이 이어나갔으며, 또 조규돈(曹圭燉)이 보유자로서 집례를 맡고 있다. 제례와 함께 행해지는 무속행사는 장재인(張在仁, 1907년 4월 25일생, 작고) 무녀의 뒤를 이어 박용녀(朴龍女, 1912년 12월 18일생, 작고)와 신석남(申石南, 1930년 2월 28일생, 작고) 무녀가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신석남의 며느리인 빈순애(賓順愛) 무녀가 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음력으로 기록된 단오제 일정은 다음과 같다. 3월 20일: 신주근양(神酒謹釀)4월 1일(初端午): 헌주(獻酒)와 무악(巫樂)4월 8일(再端午): 헌주와 무악4월 14일: 봉영(奉迎) 출발4월 15일(三端午): 봉영, 대관령성황제 및 산신제4월 27일(四端午): 무제(巫祭)5월 1일(五端午): 화개(花蓋),관노가면극(官奴假面劇) 본제 시작5월 4일(六端午): 관노가면극, 무악(巫樂)5월 5일(七端午): 관노가면극, 무악 본제5월 6일(八端午): 소제(燒祭), 봉영 일정은 다소 신축성이 있으나, 근 50여 일에 걸쳐서 강릉단오제를 준비하고 시행한다는 점에서 강릉의 충분한 문화적 역량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강릉단오제 지정문화재 행사인 제례, 굿, 관노가면극 이외에도 민속행사로 강릉농악, 향토민요경창, 시조경창, 그네대회, 씨름대회, 궁도대회 같은 수릿날의 전통풍속과 지역 민속놀이가 있으며, 체육행사와 경축행사가 열린다. 강릉단오제의 제례는 전래 유교식 제례양식을 취하는데, 복식과 홀기, 축문을 갖추고 헌관 및 집사들이 산신제, 성황제, 영신제, 봉안제, 조전제, 송신제를 거행한다. 제전행사의 제물은 도가(都家)에서 정성껏 마련하며, 신주(神酒)는 칠사당에서 제관들과 무당이 주관하여 빚는다. 제례진행은 강릉시장과 각급 기관장, 사회단체장이 제관이 되어 향토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한다. 현재 행해지는 제례의식은 다음과 같다. 신주빚기: 강릉단오제를 준비하는 과정의 하나로서 가장 먼저 행해지는 의식으로 음력 4월 5일에 신에게 바칠 술을 빚는다. 이것을 ‘신주’라고 하는데, 1960년대에는 음력 3월 20일 제주로 사용되는 술을 도가에서 정성껏 담갔다. 옛날 관아였던 칠사당에는 일주일전에 미리 금줄을 치고 황토와 소금을 뿌려 부정한 일을 막는다. 당일 칠사당 마루에서 무녀가 부정굿을 하여 사방의 부정과 제관에게 따라온 부정 등 온갖 부정함을 깨끗하게 제거하는 굿을 한다. 무녀가 신칼을 휘두르고 재액을 몰아내는 굿 사설을 늘어놓으며, 깨끗한 물로 부정치기를 한다. 신에게 바치는 술은 제관들이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갖추어 입은 다음, 기능보유자가 참여한 가운데 부정 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말을 못하도록 입을 흰 천으로 감싼 다음 강릉시장이 보낸 관미(官米) 두 되와 시민들이 보낸 헌미(獻米)로 누룩, 솔잎을 버무려 단지에 넣고 정화수를 붓는다. 제주단지는 한지로 덮고 금줄로 잘 묶어 칠사당 호장청의 아랫방에 두어 익히는데, 이때 무격(巫覡)들이 장단을 울리고 무녀가 술이 잘 숙성되기를 기원하는 축원가를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호장, 부사, 수노(首奴), 성황직(남자 무당의 우두머리), 내무녀가 참여하여 관에서 보내준 쌀이나 제전(祭田)에서 산출된 깨끗한 쌀 한말에 누룩을 섞어 신주를 빚었다. 신주는 탁주로 쌀과 누룩을 2 : 1 비율로 섞는데, 쌀 한 말을 했을 때 술맛이 좋도록 솔잎 닷 되를 넣는다. 신주를 정성껏 빚는 일은 매년 단오제를 잘 지내 국사성황신과 여성황신이 이곳 주민들에게 풍요와 안녕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행한다. 신주는 제의 진행상 중요한 제물의 하나이며, 신주를 빚음으로써 시민뿐만 아니라 이 일에 참여하는 제관들도 제의가 시작된 것으로 믿었다. 산신제와 국사성황제: 대관령은 강릉의 진산(鎭山)으로 높이 865미터, 고갯길이 13킬로미터로 아흔아홉 굽이로써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관문이다. 이곳의 북쪽 능선에 산신당과 성황사가 있는데, 음력 4월 15일 헌관들이 산신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40미터 정도 아래에 있는 국사성황사에서 성황제를 지낸 다음 성황신을 모셔온다. 산신당은 한 칸의 기와집으로 ‘山神堂’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에는 나무 제단에 산신화상과 대관령산신지신(大關嶺山神之神)이라고 쓴 위패(位牌)를 세워놓았다. 산신은 김유신 장군이라고 전하는데, 호랑이와 함께 있는 고승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음력 4월 15일 아침 10시부터 대관령 산신당에서는 산신제가 행해지는데,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의 헌작과 홀기에 따라 행해지는 유교식 제례이다. 국사성황신제는 11시 무렵부터 행해지는데 ‘城隍祠’라고 쓰인 한 칸의 기와집에 제물을 차려놓고 지낸다. 내부에는 ‘대관령국사성황지신(大關嶺國師城隍之神)’이라고 쓴 위패를 세워놓았으며 벽 쪽에 걸린 화상은 범일국사를 상징하는데, 전립을 쓰고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다. 이 행사를 자세하게 기록한 『증수임영지』에 따르면 “매년 4월 15일에 강릉부의 호장이 무당을 거느리고 대관령 산 위에 있는 한 칸의 신사에 가서 고유(告由)하고 무당으로 하여금 나무에다가 신령을 구하게 하여 나무에 신이 내려 흔들리면 가지를 하나 꺾어 기운 센 사람이 들게 하고 온다.”라고 하였다. 이 행차를 국사(國師) 행차라고 했는데, 날라리를 부는 사람이 앞에서 인도하고 무당들이 징을 치고 북을 울리면서 따르고 호장이 대창역마를 타고 천천히 그 뒤를 따른다고 하였다. 이때는 도로 가에 사람들이 담을 에워싼 것과 같이 모여들어 종이나 천을 신목에 걸고 기원하거나 음식을 장만하여 무당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기록에는 대관령에서 내려와 저녁에 강릉부 관사에 이르면 횃불이 들판을 메우는데, 하급 관노들이 신목을 맞이하여 성황사에 안치한다고 되어 있다. 현재의 행사 역시 이 내용과 큰 차이는 없지만, 자동차로 신목을 봉송하다가 대관령 옛길로 구산성황당까지 내려오는 과정을 재현하고 있다. 구산성황신제와 학산성황제: 국사성황신이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를 내려오다가 조선조 때 역원이었던 구산에 이르면 구산성황당에 이르러 잠시 머문다. 이곳은 성황지신(城隍之神), 토지지신(土地之神), 여역지신(癘疫之神), 그 밖에도 영산지신(靈山之神)을 모시고 있을 정도로 대관령과 관계가 깊다. 그래서 국사성황신의 아들 성황신이라고까지도 말한다. 국사성황신행차가 윗반쟁이, 아랫반쟁이, 제민원, 굴면이를 지나 도착하면 주민들은 싸리나무와 관솔을 묶어서 만든 횃대에 불을 붙여 들고 신을 영접했다고 한다. 조선 초기까지도 그와 같이 했는데, 이렇게 횃불을 들고 신을 맞이할 때 주민들은 ‘산유가’라는 영신가(迎神歌)를 부른다. 이것은 구정면 학산리의 ‘영산홍’이라는 민요와 같은 것인데, 범일국사가 학산리 태생이므로 이 민요를 신맞이 노래로 한 것이다. 이때 부르는 가사는 “꽃바칠레 꽃바칠레 사월보름날 꽃바칠레 어얼사 지화자자 영산홍, 일년에 한 번밖에 못 만나는 우리 연분 지화자자 영산홍, 보고파라 가고지고 어서 바삐 가자서라 지화자자 영산홍, 국태민안 시화연풍 성황님께 비나이다 지화자자 영산홍, 산호원피 야도자절 성황님께 비나이다 지화자자 영산홍”이라고 다른 가사를 섞어 부르며 맞이한다. 한 해 동안 헤어져 있던 대관령국사성황신과 홍제동에 모셔져 있는 정씨가의 딸인 국사성황신이 만나는 날이므로 이들 신격뿐만 아니라 주민들도 들뜨게 된다. ‘어서바삐 가자서라’ 하고 부르는 민요는 국사성황신 행차를 재촉하지만, 국태민안을 빌고 시절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며, 호랑이를 피하고 도적도 없게 해달라는 소원도 비는 것이다. 신이 내린 성황목에 삼색 천으로 장식한 국사성황신 행렬을 맞이하면서 이곳 주민들이 횃대에 불을 붙여 신을 맞는 것은 곧 영산홍(꽃)을 바치는 의식이다. 이것은 불교의 산화공덕과 같은 의미이며, 동시에 신라 때 강릉 태수로 오던 순정공의 부인 수로(水路)를 맞이하며 한 노인이 불렀다는 향가 헌화가(獻花歌), 곧 ‘꽃 바치는 노래’와도 그 의미가 통한다. 횃대의 불꽃과 상상 속의 꽃이 신격을 영접하는 민요로 불려졌다. 학산성황제는 강릉시에서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구정면 재궁말 마을 성황제인데, 대관령국사성황신인 범일국사의 탄생지이고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굴산사를 짓고 입적한 유적지이므로 1999년부터 이곳을 순례하고 있다. 이 마을은 범일국사의 탄생설화가 깃들어 있는 석천(石泉)과 학바위가 있는데, 국사성황신이 고향을 둘러본다는 의미이다. 학산리 성황당은 마을 입구에 있는데, 당집은 없고 소나무 숲이 우거진 곳에 높이 1미터 되는 돌담을 빙 둘러 쳐놓았다. 이곳에 대관령국사성황신과 제관, 무격 일행이 도착하면 마을에서 제물을 차려놓고 굿을 한다. 성황제가 끝나면 대관령국사성황신을 모신 위패와 신목이 석천과 마을을 한바퀴 돈 다음에 단오제가 시작되기 전까지 국사성황신을 모실 홍제동 대관령국사여성황사로 행차한다. 봉안제(奉安祭): 신목 행차는 영산홍 민요를 부르면서 위패와 함께 홍제동에 있는 대관령국사여성황신 제당에 도착하여 단오제 본제가 시작되는 날까지 부부 성황신이 함께 봉안된다. 국사성황신과 여성황신이 만나는 음력 4월 15일은 강릉단오제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 이때는 시내 일원을 순례한 다음, 대관령국사여성황사에서 합사를 하고 봉안제(奉安祭)를 올린다. 홀기에 따라 헌관의 독축(讀祝) 제례가 진행되고 봉안굿이 행해진다. 이날은 대관령국사성황신이 여성황신과 부부가 된 날이라고 한다. 대관령국사여성황사는 기와집 세 칸으로 단청을 칠하고 내부 정면 벽에는 여성황신의 화상이 그려져 있다. 대관령국사여성황신의 모습은 머리를 길게 땋아 좌측 어깨에서 앞으로 늘였으며 그 앞에는 호랑이와 시녀가 그려져 있다. 화상 앞에는 검은색 목판에 흰 글씨로 ‘대관령국사여성황신위’라고 쓴 위패가 세워져 있다. 이 여성황사는 남문동에 있었으나, 지금은 수도관리사무소 뒤에 있다. 대관령에서 음력 4월 15일 국사성황신을 봉안하고 내려오면 단오제가 열리는 날까지 약 보름 동안 이 곳 여성황사에 신목과 위패를 함께 모셨다가 단오 이튿날 남대천으로 모셔 제사를 지낸다. 서로 떨어져 있던 국사성황신 부부는 이 기간 동안 함께 있게 된다. 대관령국사성황신을 모셔가는 날에도 여성황사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의례절차는 국사성황제와 동일하고 제물 진설도 대관령국사성황제와 다르지 않으나 합제 축문만 다르다. 전설에 따르면 조선조 숙종 때 대관령성황신이 초계 정씨인 정완주의 무남독녀 경방댁 정씨 처녀가 창원 황씨 황수징과 결혼하였으나, 시댁이 멀어 친정에 머물러 있다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다고 한다. 대관령국사성황신이 혼자 있는 정씨 처녀를 데리고 오려고 정씨의 꿈에 나타나 청혼했으나 사람이 아닌 신에게 딸을 줄 수 없다고 거절당하자, 호랑이를 시켜 야밤에 머리를 감고 대청마루에 얌전히 앉아 있던 처녀를 대관령으로 데리고 가서 영혼결혼식을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처녀를 찾아 대관령으로 갔더니 처녀의 영혼은 이미 간 데 없고, 시체는 비석처럼 서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조 후기에 형성된 이러한 전설은 이른바 호환설화(虎患說話)의 유형으로 볼 수 있으며, 해원형(解寃形)의 하나로써 호환당한 처녀가 승화된 신격으로 재생하는 과정을 통해 호환을 방지하고 대관령 험로의 안전과 지역의 안녕, 풍요를 기원하는 공동체 제의의 한 요소가 포함된 것이다. 영신제(迎神祭)와 국사성황신행차: 강릉단오제의 본제가 시작됨을 알리는 영신제는 음력 5월 3일 남대천 단오제단에서 행해진다. 영신제는 대관령국사여성황사에 모신 국사성황신 부부를 단오제가 열리는 남대천으로 봉송하여 지내는데, 지금도 강릉의 옛 정씨가 살던 경방댁에서는 두 신이 단오장으로 나가는 전야제 때 제물을 차려 맞이하며 두 신도 친정과 처가를 방문하게 된다. 강릉시내 여성황신의 친정인 경방댁에 들른 국사성황신 부부는 현재 이 집에 살고 있는 최씨 집안에서 장만한 제물 앞에 머무른다. 이 집주인은 제례를 지내기 3일 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부정을 막고 행동을 조심하고 근신을 한다. 조선조 때 정씨가 살던 이 집은 현재 주인의 5대조인 최윤정이라는 분이 이사와서 지금까지 후손들이 살고 있으므로, 영신제 때 최씨 집안 사람들이 나와서 위패와 신목 앞에 절을 한다. 무녀들은 친정나들이를 축하하는 굿을 한 다음, 소지를 올려 잘 흠향했는지 알아본 후, 두 신을 상징하는 위패와 신목을 앞세우고 남대천으로 향한다. 이때 제관과 무당이 따르고, 관노가면극과 농악대는 괫대인 화개(花蓋)를 앞세우고 탈놀이와 함께 흥겨운 풍물가락을 연주한다. 주민들은 영산홍 민요를 부르며 창포등을 들고 신의 행차를 따른다. 이렇게 국사성황신 행차가 시내를 한바퀴 도는 신유행사를 마치고 나면 남대천을 건너 가설제단에 봉안된다. 이때 무녀들이 영신굿을 하여 신을 좌정시키고 단오행사를 마칠 때까지 각종 제사를 지낸다. 조전제(朝奠祭): 음력 5월 4일부터 단오제를 마치는 날까지 매일 아침 유교식으로 제를 지내는 행사가 조전제이다. 홀기에 따라 유교식 복장을 갖춰 입고 제례부분 기능보유자가 함께 진행하는데, 지역의 단체장이나 인사들이 지역의 안녕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낸다. 무당굿: 강릉단오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무당굿은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굿은 인간의 뜻을 신에게 전달하는 제의로 무녀들이 춤과 굿 사설로 축원하고, 무격은 무악을 연주하여 신을 즐겁게 한다. 강릉단오제에서 전통성이 가장 강한 것으로 열두거리 전체를 단오제 마지막 날인 7일까지 펼친다. 강릉단오굿의 구성은 시대에 따라 변화를 보이는데, 1937년대에는 12신악(神樂)으로 ① 부정굿 ② 감응굿(가족의 安幸을 축원) ③ 군웅굿(가축의 번식을 축원) ④ 시중굿[豊年祝] ⑤ 성황굿[城隍祝] ⑥ 지신굿[地神祝] ⑦ 맞이굿[海神祝] ⑧ 별상굿[疫神祝] ⑨ 조상굿[祖先祝] ⑩ 성조굿[家神祝] ⑪ 조왕굿[竈神祝] ⑫ 거리풀이굿 순서로 행해졌다. 그 이후 1966년 임동권 교수가 무형문화재 지정조사에서는 강릉 출신 무녀 장대연(당시 85세)을 조사하였는데, ① 부정굿 ② 서낭굿 ③ 성주굿 ④ 군웅굿 ⑤ 세존굿 ⑥ 조상굿 ⑦ 설영굿 ⑧ 제석굿 ⑨ 당고마기 ⑩ 심청굿 ⑪ 손요굿 ⑫ 뒤풀이의 순서였다. 이후 20석(席: 거리)으로 늘어나기도 하고 22석 또는 23석을 하기도 했다. 대체로 열두거리를 중심으로 여기에 몇 거리가 더 들어가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이상의 굿 절차 외에도 산신굿, 천왕굿(원님굿), 축원굿, 조상굿이 더 들어가기도 한다. 굿거리는 매년 일정하지 않으나 3~4일 동안 행해진다. 송신제(送神祭): 단오제 행사를 마치는 음력 5월 7일 저녁 7시에 마지막으로 성황신을 대관령과 홍제동 여성황사로 모시는 제사이다. 이때는 제관들이 단오제 기간 동안 신격이 잘 흠향했는지를 묻고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게 된다. 송신제는 소제(燒祭)라고도 하는데, 무녀들의 환우굿이 끝나면 신목과 단오제단에 치장했던 각종 꽃장식과 기물을 불에 태워 보내는 마지막 의식이다. 이때 무녀는 내년에 다시 신을 모시겠다는 굿을 하며 한 해 동안 주민들을 잘 보살펴주기를 간구한다. 신을 모시는 강신의례와 주민들이 신을 맞이하는 영신의례, 마지막으로 신을 보내는 송신의례는 단오제도 절차상 예외가 아니다. 강릉단오제에서 벌이는 가면극은 성황신제 계통극으로 관노들에 의해 연희되어 관노가면극이라고도 불린다. 강릉가면극은 주로 음력 5월 5일 단오 무렵에 행해졌다. 관노가면극 연희자 김동하(金東夏, 1884년 1월 22일생), 차형원(車亨元, 1890년 9월 5일생)을 대상으로 1966년에 조사한 자료 내용을 보면, 음력 5월 1일 본제가 시작될 때 화개(花蓋)를 만들고 이때부터 연희가 이루어져 4일과 5일에 걸쳐 이어졌다 한다. 경성제대 교수 추엽융(秋葉隆)의 조사에도, 5월 1일 본제 때부터 화개를 꾸미고 가면극을 했는데 화개는 부사청에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가면극은 4일에 대성황사 앞에서 놀고 5일에도 계속했다고 한다. 연희장소는 강릉 남대천변이 아니라 대성황사를 비롯하여 여러 곳으로 옮겼는데, 음력 5월 5일에는 오전에 대성황사 앞에서 먼저 행하고, 다음에는 화개를 받들고 약국성황당, 제관청, 여성황당 순으로 순례하며 탈놀이를 했다. 현재는 여성황당만 있고 나머지는 없어졌으므로 남대천 단오터에서 4일간 연희하고 있다. 1965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면서 구체화되었다. 이어서 1966년 문화재 지정자료가 작성되고, 1967년 1월 16일 강릉단오제의 한 종목으로 강릉관노가면극이 인정되어, 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면서 확고한 전승체계를 갖추었다. 1993년 8월 2일 기예능보유자로 권영하(權寧夏, 1918년 6월 4일생, 작고)가 지정되었고, 뒤를 이어 김종군(金鍾群, 1942년 3월 5일생)이 지정되었다. 고증에 따르면, 이 탈놀이는 대체로 더운 절기에 행해지므로 약 두서너 시간 놀다가 더우니까 탈바가지를 벗어놓는다 하였다. 여러 조사보고서에 관노가면극은 무언극으로 이루어지거나 약간의 재담이 들어 있다고 한다. 탈놀이의 반주음악은 비교적 소상한 고증이 남아있는데, 차형원 옹은 날라리, 장구, 꽹새, 징을 오음육율에 따라 쳤다고 한다. 등장인물은 모두 개성이 강하게 표출되는데 강릉관노가면극에는 양반광대, 소매각시, 시시딱딱이 2명, 장자마리 2명으로 총 6명이 등장한다. 고증 내용을 바탕으로 추려내면 장자마리의 춤사위는 소위 ‘마당딱이춤(마당깨끼)’이다. 마당을 닦듯이 추는 춤이라는 뜻인데 매우 독특하다. 이와 함께 ‘도리깨춤’을 춘다. 배불뚝이 모습으로 도리깨를 쳐내듯이 마당을 넓게 하는 의도로 추는 춤이다. 다음은 양반광대와 소매각시의 춤사위로 고증에는 점잖게 추는 맞춤과 어깨춤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다. 시시딱딱이 춤사위는 가면극의 상징성을 잘 보여주는데, 무서운 탈을 쓰고 칼을 휘둘러 재앙을 쫓는 칼춤과 사랑놀음을 훼방하는 ‘제개는춤’과 소매각시를 유혹하는 ‘너울질춤’을 춘다. 차형원 옹의 고증에는 날라리, 꽹과리, 북, 장구, 징을 사용했고, 무당들이 반주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그것은 관노 중에 무격으로 일했던 사람이 많았고, 탈놀이와 무격희를 대성황당이나 여러 곳을 함께 순례하면서 행한 데에도 기인한다. 탈놀이는 고증 내용에 따라 놀이마당을 분류하면 대체로 다섯 마당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마당은 장자마리의 개시, 둘째 마당은 양반광대와 소매각시의 사랑, 셋째 마당은 시시딱딱이의 훼방, 넷째 마당은 소매각시의 자살소동, 다섯째 마당은 양반광대와 소매각시의 화해이다.

참고문헌

江陵誌, 高麗史, 東國歲時記, 惺所覆瓿藁, 秋江先生文集, 荊楚歲時記江陵端午祭 (秋葉隆, 日本民俗學2-5, 1930)增修臨瀛誌 (농택성, 강릉고적보존회, 1933)江陵端午祭 (任東權, 文化財管理局, 1966)韓·中 歲時風俗 및 歌謠硏究 (張正龍, 集文堂, 1988)江陵官奴假面劇硏究 (張正龍 著, 集文堂, 1989)강릉단오민속여행 (장정룡, 斗山, 1998)江原道 民俗硏究 (張正龍, 국학자료원, 2002)강릉단오제 (장정룡, 집문당,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