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涓吉)

한자명

涓吉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혼례

집필자 김만태(金萬泰)

정의

신랑 측으로부터 사성四星을 받은 뒤에 신부 측에서 혼인날을 택하여 신랑 측에 보내는 것. 날받이, 택일, 납길納吉, 추길諏吉이라고도 함.

역사

우리나라에서 택일과 직접 관련된 가장 초기의 자료도 연길과 관련하여 등장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진평왕대(재위 579~632)에 설씨녀薛氏女가 혼인을 앞두고 날을 골랐다[卜日]는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설씨녀는 율리 마을 민가의 여자이다. …… 진평왕 때에 …… 설씨가 ‘혼인은 인간의 윤리라 갑작스레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제가 마음으로 허락한 이상 죽어도 변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대가 변방 방위에 나갔다가 교대하여 돌아온 후에, 날을 골라서[卜日] 예식을 올려도 늦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기록을 볼때, 6세기 말경에는 이미 민가에서도 혼인을 앞두고 좋은 날을 택하는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택일과 관련해서 이전보다 더 구체적인 기록들이 나온다. 왕태자의 혼례와 관련해서 ‘채택고기采擇告期’가 행해졌음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신랑과 신부 될 사람의 사주四柱를 갖고 궁합을 보고, 신부 측에서 여러 사정을 고려해 혼인날을 정하는 지금의 연길・날받이 관행과 다르지 않다.

조선시대에도 국가와 왕실, 그리고 민간에서 날을 가리는 풍습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더욱 성행하기까지 하였다. 이문건李文楗(1494~1567)의 『묵재일기黙齋日記』에는 조선 전기에 민간에서 행해지던 택일 관련 풍습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종손從孫의 혼인날을 잡을 때 점복자占卜者에게 택일을 의뢰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자수가 저녁에 와서 만났다. (종손인) 천택의 혼인 문제를 점쳐 보게 하였다. ‘해亥’자를 불렀더니 점을 쳐서 이르기를, ‘서합변이괘噬嗑變頤卦가 나왔으니 고향에서 여자를 얻어야 할 것 같고, 이듬해 정월에 성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고는 갔다.”

17세기 초 경상도 현풍에 살았던 곽주郭澍(1569~1617)와 그 가족이 쓴 한글 편지인 『현풍곽씨언간』도 당시의 다양했던 택일 관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십악대패일十惡大敗日과 천구일天狗日을 피하고 책력(녁)과 날 받는 책(날 밧 )을 이용하여 딸의 혼인날을 받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스무이튿날은 누구에게 받으니 좋다고 하던가. 그날이 십악대패 날이고, 또 하늘개가 땅에 내려와 먹는 날이어서 아무 일도 못할 날이니, 하물며 그 일(혼례)을 어떻게 할꼬. 새 책력도 여기 왔고, 날 받는 책(택일서)도 여기 있거늘 자세히 받아보니 정월까지는 마땅한 날이 없으니, 내가 내려가서 다시 자세히 가리어 볼 것이니, 순희 오거든 가지 말고 있다가 나를 보고 가게 이르소.

“고대 이후 천문역법의 발달과 길일・흉일의 인식위에 형성된 우리의 택일 풍속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연길 등 각종 행사에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날 받는 책인 택일서도 계속 증보・발간되어 민간으로 택일 풍속이 널리 보급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로써 택일 풍속은 근대까지도 계속 확대되었으며 우리 선조들의 일상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내용

인륜지대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큰일인 혼인의 택일 즉, 연길은 예로부터 매우 중요시되었다. 택일에 관한 초기 기록으로 『삼국사기』에 설씨녀가 혼인날을 고른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 자유로운 남녀 교제가 금지되고 중매 없이는 혼인할 수 없던 시절에는 혼인날이 신랑・신부가 처음 만나는 날이고 신랑・신부의 기와 천지의 기가 합덕合德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혼인날을 정하는 택일은 다른 어떤 절차보다 중요한 의미가 부여되었고, 또 소중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육례六禮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양가에서 혼인하기로 합의한 뒤에는 정혼定婚(약혼)을 하는데, 남자 측에서 신랑이 될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적은 사성四星・사주단자四柱單子를 여자 측에 보낸다. 그러면 사주단자를 받은 답례로 신부 측에서 신랑측으로 혼인 날짜를 택일하여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택일을 ‘연길’ 또는 ‘날받이’라고 한다. 연길은 신부 측에서 신랑 측으로 허혼서許婚書와 같이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나 부득이한 경우 신랑 측에서 연길을 보낼 수도 있는데 이를 ‘맞택일’이라 부른다.

택일 결과를 알리는 연길단자는 백지를 다섯 칸 또는 일곱 칸으로 접어 중앙에 ‘전안○○년○월○일○시奠雁◦◦年◦月◦日◦時’를 쓴 다음, 봉투에 넣어 청・홍 보자기에 싸서 보낸다. 연길단자에는 납폐일納幣日을 쓰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납폐동일선행納幣同日先行’이라고 쓴다. 그리고 연길단자를 넣은 봉투의 앞면에는 ‘연길涓吉’이라고 쓴다.

혼인날을 정하는 연길은 혼인 준비의 복잡함이나 생리 현상 등으로 인해 신부 측에서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래서 대강의 시기를 양가에서 합의한 뒤에 신부측에서 택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신랑・신부의 부모가 혼인한 달, 양가에 불길한 일이 있었던 날, 양가 조상의 기일 등은 피하여 택일하기도 한다.

혼인날은 신부의 생리 현상과 여러 사정을 고려하고 신랑・신부의 사주를 가지고 역학 원리에 따라서 선택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일주일 주기로 생활의 흐름이 짜여 있는 현대인들은 역학으로 따진 길일보다 하객이 더 많이 참석할 수 있는 공휴일을 훨씬 선호한다. 여기에 길일까지 겹치면 금상첨화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사례로, 경상북도 안동 풍산읍의 김○○(남, 70세) 씨의 경우에도 “옛날에는 농사일이 바쁘지 않은 조용할 때 당사자의 사주를 넣어서 (혼인날을) 잡았지만, 지금은 공휴일에 나쁜 화禍만 없다면 혼인한다. 철학관 하는 이들도 그렇게 날을 잡아주더라. 그리고 예전에는 날이 나오지 않아서 혼인을 이듬해로 미루는 경우도 많았는데, 요새는 그런 경우가 잘 없더라.” 라고 하여 오늘날 혼인날 정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신랑・신부의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서 살을 피하고 길일을 가려서 혼인날을 잡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공휴일로 혼삿날을 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과거에는 농번기, 두 집안의 부모가 혼인한 날, 두 집안의 불길했던 날, 제삿날, 삼복이 낀 달 등을 피해서 신랑・신부의 사주를 넣어서 날을 받았다면 최근에는 속칭 길일과 공휴일, 신랑・신부의 사주, 축의금 수입까지 두루 참작해서 택일하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입춘立春이 일 년에 두 번 겹친 쌍춘년雙春年에 혼인하면 잘 산다고 해서 쌍춘년으로 알려진 2006년에는 결혼식을 올리려는 예비부부들이 급증하여 비수기인 한여름 평일에도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혼인 택일을 할 때 속칭 ‘길일’보다는 공휴일을 반드시 먼저 선호하는 것은 아님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본래 쌍춘년은 오래전 중국 한족에서 유행하던 풍속이다. “쌍춘년에 산동・하북에서는 콩이 금처럼 귀하고, 호남・하남에서는 가축이 불리하여 소가 금처럼 귀하다.”라는 속담이 전한다. 다만, 하남에서는 ‘춘春’이 길상의 뜻도 있어서 쌍춘년에 결혼하면 ‘매우 좋다大吉大利’고 여겨왔다. 반대로 입춘이 들어있지 않는 무춘년無春年에는 혼인을 꺼려 혼인을 앞당기거나 늦추기도 하였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윤월閏月」에는 “풍속에 혼인하기에 좋고 수의를 만들기에 좋으며 모든 일을 꺼리지 않는다.俗宜嫁娶, 又宜裁壽衣, 百事不忌.”라고 하였다. 이처럼 예전에는 윤달을 혼인하기에도 좋은 달로 여겼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윤달에 혼인을 꺼리는 풍속이 생겨났다. 따라서, 윤달에 혼인을 꺼리는 것은 근래 새롭게 변형된 연길 풍속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쌍춘년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상업자본과 대중심리의 시류적인 영합으로 인해 혼인 택일은 약화하기보다는 다양한 양상으로 끊임없이 새롭게 나타날 것으로 예상한다.

특징 및 의의

혼인날을 정하는 연길은 대강의 시기를 양가에서 합의한 뒤에 신부 측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랑・신부의 부모가 혼인한 달, 양가에 불길한 일이 있었던 날, 양가 조상의 기일 등을 피하는 경우도 있다.

참고문헌

묵재일기에 나타난 조선전기의 민속(이복규, 민속원, 1999), 역서류를 통해 본 택일문화의 변화(김만태, 민속학연구20, 국립민속박물관, 2007), 우리문화와 음양오행(권오호, 교보문고, 1999), 한국 민속의 세계2(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1), 한국 사주명리의 활용양상과 인식체계(김만태, 안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한국 택일풍속의 전승양상과 특징(김만태, 정신문화연구32-1,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현풍곽씨언간 주해(백두현, 태학사, 2003).

연길

연길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혼례

집필자 김만태(金萬泰)

정의

신랑 측으로부터 사성四星을 받은 뒤에 신부 측에서 혼인날을 택하여 신랑 측에 보내는 것. 날받이, 택일, 납길納吉, 추길諏吉이라고도 함.

역사

우리나라에서 택일과 직접 관련된 가장 초기의 자료도 연길과 관련하여 등장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진평왕대(재위 579~632)에 설씨녀薛氏女가 혼인을 앞두고 날을 골랐다[卜日]는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설씨녀는 율리 마을 민가의 여자이다. …… 진평왕 때에 …… 설씨가 ‘혼인은 인간의 윤리라 갑작스레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제가 마음으로 허락한 이상 죽어도 변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대가 변방 방위에 나갔다가 교대하여 돌아온 후에, 날을 골라서[卜日] 예식을 올려도 늦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기록을 볼때, 6세기 말경에는 이미 민가에서도 혼인을 앞두고 좋은 날을 택하는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택일과 관련해서 이전보다 더 구체적인 기록들이 나온다. 왕태자의 혼례와 관련해서 ‘채택고기采擇告期’가 행해졌음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신랑과 신부 될 사람의 사주四柱를 갖고 궁합을 보고, 신부 측에서 여러 사정을 고려해 혼인날을 정하는 지금의 연길・날받이 관행과 다르지 않다. 조선시대에도 국가와 왕실, 그리고 민간에서 날을 가리는 풍습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더욱 성행하기까지 하였다. 이문건李文楗(1494~1567)의 『묵재일기黙齋日記』에는 조선 전기에 민간에서 행해지던 택일 관련 풍습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종손從孫의 혼인날을 잡을 때 점복자占卜者에게 택일을 의뢰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자수가 저녁에 와서 만났다. (종손인) 천택의 혼인 문제를 점쳐 보게 하였다. ‘해亥’자를 불렀더니 점을 쳐서 이르기를, ‘서합변이괘噬嗑變頤卦가 나왔으니 고향에서 여자를 얻어야 할 것 같고, 이듬해 정월에 성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고는 갔다.” 17세기 초 경상도 현풍에 살았던 곽주郭澍(1569~1617)와 그 가족이 쓴 한글 편지인 『현풍곽씨언간』도 당시의 다양했던 택일 관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십악대패일十惡大敗日과 천구일天狗日을 피하고 책력(녁)과 날 받는 책(날 밧 )을 이용하여 딸의 혼인날을 받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스무이튿날은 누구에게 받으니 좋다고 하던가. 그날이 십악대패 날이고, 또 하늘개가 땅에 내려와 먹는 날이어서 아무 일도 못할 날이니, 하물며 그 일(혼례)을 어떻게 할꼬. 새 책력도 여기 왔고, 날 받는 책(택일서)도 여기 있거늘 자세히 받아보니 정월까지는 마땅한 날이 없으니, 내가 내려가서 다시 자세히 가리어 볼 것이니, 순희 오거든 가지 말고 있다가 나를 보고 가게 이르소. “고대 이후 천문역법의 발달과 길일・흉일의 인식위에 형성된 우리의 택일 풍속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연길 등 각종 행사에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날 받는 책인 택일서도 계속 증보・발간되어 민간으로 택일 풍속이 널리 보급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로써 택일 풍속은 근대까지도 계속 확대되었으며 우리 선조들의 일상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내용

인륜지대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큰일인 혼인의 택일 즉, 연길은 예로부터 매우 중요시되었다. 택일에 관한 초기 기록으로 『삼국사기』에 설씨녀가 혼인날을 고른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 자유로운 남녀 교제가 금지되고 중매 없이는 혼인할 수 없던 시절에는 혼인날이 신랑・신부가 처음 만나는 날이고 신랑・신부의 기와 천지의 기가 합덕合德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혼인날을 정하는 택일은 다른 어떤 절차보다 중요한 의미가 부여되었고, 또 소중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육례六禮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양가에서 혼인하기로 합의한 뒤에는 정혼定婚(약혼)을 하는데, 남자 측에서 신랑이 될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적은 사성四星・사주단자四柱單子를 여자 측에 보낸다. 그러면 사주단자를 받은 답례로 신부 측에서 신랑측으로 혼인 날짜를 택일하여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택일을 ‘연길’ 또는 ‘날받이’라고 한다. 연길은 신부 측에서 신랑 측으로 허혼서許婚書와 같이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나 부득이한 경우 신랑 측에서 연길을 보낼 수도 있는데 이를 ‘맞택일’이라 부른다. 택일 결과를 알리는 연길단자는 백지를 다섯 칸 또는 일곱 칸으로 접어 중앙에 ‘전안○○년○월○일○시奠雁◦◦年◦月◦日◦時’를 쓴 다음, 봉투에 넣어 청・홍 보자기에 싸서 보낸다. 연길단자에는 납폐일納幣日을 쓰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납폐동일선행納幣同日先行’이라고 쓴다. 그리고 연길단자를 넣은 봉투의 앞면에는 ‘연길涓吉’이라고 쓴다. 혼인날을 정하는 연길은 혼인 준비의 복잡함이나 생리 현상 등으로 인해 신부 측에서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래서 대강의 시기를 양가에서 합의한 뒤에 신부측에서 택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신랑・신부의 부모가 혼인한 달, 양가에 불길한 일이 있었던 날, 양가 조상의 기일 등은 피하여 택일하기도 한다. 혼인날은 신부의 생리 현상과 여러 사정을 고려하고 신랑・신부의 사주를 가지고 역학 원리에 따라서 선택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일주일 주기로 생활의 흐름이 짜여 있는 현대인들은 역학으로 따진 길일보다 하객이 더 많이 참석할 수 있는 공휴일을 훨씬 선호한다. 여기에 길일까지 겹치면 금상첨화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사례로, 경상북도 안동 풍산읍의 김○○(남, 70세) 씨의 경우에도 “옛날에는 농사일이 바쁘지 않은 조용할 때 당사자의 사주를 넣어서 (혼인날을) 잡았지만, 지금은 공휴일에 나쁜 화禍만 없다면 혼인한다. 철학관 하는 이들도 그렇게 날을 잡아주더라. 그리고 예전에는 날이 나오지 않아서 혼인을 이듬해로 미루는 경우도 많았는데, 요새는 그런 경우가 잘 없더라.” 라고 하여 오늘날 혼인날 정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신랑・신부의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서 살을 피하고 길일을 가려서 혼인날을 잡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공휴일로 혼삿날을 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과거에는 농번기, 두 집안의 부모가 혼인한 날, 두 집안의 불길했던 날, 제삿날, 삼복이 낀 달 등을 피해서 신랑・신부의 사주를 넣어서 날을 받았다면 최근에는 속칭 길일과 공휴일, 신랑・신부의 사주, 축의금 수입까지 두루 참작해서 택일하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입춘立春이 일 년에 두 번 겹친 쌍춘년雙春年에 혼인하면 잘 산다고 해서 쌍춘년으로 알려진 2006년에는 결혼식을 올리려는 예비부부들이 급증하여 비수기인 한여름 평일에도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혼인 택일을 할 때 속칭 ‘길일’보다는 공휴일을 반드시 먼저 선호하는 것은 아님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본래 쌍춘년은 오래전 중국 한족에서 유행하던 풍속이다. “쌍춘년에 산동・하북에서는 콩이 금처럼 귀하고, 호남・하남에서는 가축이 불리하여 소가 금처럼 귀하다.”라는 속담이 전한다. 다만, 하남에서는 ‘춘春’이 길상의 뜻도 있어서 쌍춘년에 결혼하면 ‘매우 좋다大吉大利’고 여겨왔다. 반대로 입춘이 들어있지 않는 무춘년無春年에는 혼인을 꺼려 혼인을 앞당기거나 늦추기도 하였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윤월閏月」에는 “풍속에 혼인하기에 좋고 수의를 만들기에 좋으며 모든 일을 꺼리지 않는다.俗宜嫁娶, 又宜裁壽衣, 百事不忌.”라고 하였다. 이처럼 예전에는 윤달을 혼인하기에도 좋은 달로 여겼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윤달에 혼인을 꺼리는 풍속이 생겨났다. 따라서, 윤달에 혼인을 꺼리는 것은 근래 새롭게 변형된 연길 풍속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쌍춘년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상업자본과 대중심리의 시류적인 영합으로 인해 혼인 택일은 약화하기보다는 다양한 양상으로 끊임없이 새롭게 나타날 것으로 예상한다.

특징 및 의의

혼인날을 정하는 연길은 대강의 시기를 양가에서 합의한 뒤에 신부 측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랑・신부의 부모가 혼인한 달, 양가에 불길한 일이 있었던 날, 양가 조상의 기일 등을 피하는 경우도 있다.

참고문헌

묵재일기에 나타난 조선전기의 민속(이복규, 민속원, 1999), 역서류를 통해 본 택일문화의 변화(김만태, 민속학연구20, 국립민속박물관, 2007), 우리문화와 음양오행(권오호, 교보문고, 1999), 한국 민속의 세계2(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1), 한국 사주명리의 활용양상과 인식체계(김만태, 안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한국 택일풍속의 전승양상과 특징(김만태, 정신문화연구32-1,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현풍곽씨언간 주해(백두현, 태학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