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사길령산령각제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의

집필자 김도현(金道賢)

정의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 8통 2반에 위치한 고개 새길령(사길령, 신로치, 사길치)에 있는 산령각에서 지내는 제의. 이 산령각은 사길령을 오가며 장사를 하였던 보부상들이 고갯길의 안전과 장사의 번성을 위해 세우고 매년 음력 사월 보름날에 제사를 지냈다. 이후 보부상이 해체되고 이들에 의한 상품 교류가 축소되었어도 태백시 혈리에 사는 주민들이 산령각계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남긴 재산을 관리하고 이에 의한 수익금과 신입회원들의 입회비로 산령각제를 매년 지냄으로써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 있다.

역사

태백산 사길령산령각 내에 있는 중수 현판과 사길령 산령각계에서 보관 중인 문서를 중심으로 산령각과 운영에 대한 연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오래된 현판으로 1888년에 작성한 「상원무자사월십오일태백산산령각중건부조기(上元戊子四月十五日太白山山靈閣重建扶助記)」에 따르면 삼척을 비롯하여 경상도 봉화․안동, 황해도 해주, 평안도 평양 등 전국 각지에서 온 보부상들이 중수에 참여하였다. 이와 함께 산령각계에서 보관하고 있는 「태백산산령각수계계안성첩(太白山山靈閣修稧稧案成帖)」(1870)으로 보아 1870년 이전에 산령각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20년에 중수하였으며, 최근에는 1999년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 사길령산령각 중수에는 항상 산령각계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각종 현판과 함께 사길령 산령각계에서 보관하고 있는 문서를 통해 사길령 산령각계의 운영에 대한 연혁을 알 수 있다. 먼저 경오년(1870)에 작성된 「태백산산령각수계계안성첩」을 보면 1870년대에 사길령산령각제를 운영하기 위한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었고, 이 때 만들어진 제의 관련 직책은 계수․공원․유사(유사, 도유사, 별유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현재 사길령산령각제를 운영하는 직책과 방법 등이 이미 1870년에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잘 전승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1921년부터 ‘사길령상민계수지인(四吉嶺商民契首之印)’이라 새겨진 도장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사길령을 오가던 보부상 집단의 명칭이 ‘사길령상민계(四吉嶺商民契)’였으며, 그들이 사길령산령각제 운영에 직접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태백시혈동새마을회인’이라 새긴 도장을 사용하고 있는 가운데 이는 보부상 집단이 쇠퇴함에 따라 사길령 산령각계가 태백시 혈동 주민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태백산령각계원각록(太白山靈閣稧員各錄)」에는 계원인 박성화(朴聖化)가 산령각 화상(畵像) 제작에 부조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사길령산령각에 산신령을 그린 당신도를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단종대왕의 화상이 제단 정면에 걸려 있다.

내용

사길령은 현재 태백시 소도동 혈리의 정거리에서 천평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 강원도에서 경상도 춘양 지역으로 가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이 고갯길에는 산령각과 함께 국수당이 있으며, 신수로 모시는 엄나무가 있다. 조선 후기에 보부상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니면서 안전을 기원하고 상업의 번창을 위해 산령각을 짓고 매년 음력 사월 보름에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먼저 제당 형태를 살펴보면 산령각은 디귿(ㄷ) 자형 토석혼축(土石混築)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정면 두 칸, 측면 한 칸 규모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건물은 소나무 판재를 이용하여 벽체를 만들었으며, 정면에는 좌우 여닫이문을 달았다. 제당 정면 입구에는 ‘산령각(山靈閣)’이라 쓴 편액을 걸었으며, 내부에는 중수 현판을 비롯하여 각종 현판 17개가 걸려 있다. 제당 내부 정면에 제단을 일(一) 자 형태로 만들어 설치하였으며, 제단 위에 ‘태백산산령지위(太白山山靈之位)’라고 새긴 나무 위패를 모셨다. 제당 정면 오른쪽에는 단종대왕 등을 그린 당신도를 걸었다. 이는 무속인들이 모신 것이라 한다. 국수당은 산령각 옆에 있다. 예전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현재 높이 약 1m, 폭 80㎝ 정도의 작은 규모이다. 예전에 당집이 없을 때 지나가는 이들이 고갯길의 무사 안전을 기원하며 이곳에 돌을 던져 만든 돌무더기이다. 이 사례는 구부시령이나 댓재․백복령 등 다른 지역에서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제일은 매년 음력 사월 보름날 아침에 지낸다. 순서는 산령각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제를 지낸 뒤 제수 일부를 내려 옆의 엄나무 앞에 진설하고 술을 한 잔 올린다.

산령각 내부에 ‘태백산산령지위’라고 새긴 위패를 모셨다. 예전의 기록을 보면 산령각 외부 기둥에 ‘태백산산왕대신위(太白山山王大神位)’라 새긴 주련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사길령산령각에서 태백산신을 모셨음을 알 수 있다. 태백산산신령에게 국태민안(國泰民安), 우순풍조(雨順風調)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사길령산령각제 준비를 위한 제수 비용은 20,000여 ㎡의 토지 임대료와 이자 수입, 계원 신입금, 찬조금 등으로 충당한다.

제관은 예전에는 산령각계 간부들이 담당하였으나 최근에는 태백시장, 문곡소도동장, 산령각제회 반수(班首) 등 지역 기관장을 제관으로 모신다. 제수 준비와 운영은 계장이 주도하며 유사들이 도와준다. 이와 함께 유교식으로 제의를 진행하기에 홀기, 축관, 알자, 집사를 임명한다.

산령제를 지내기 위해 준비한 제수로는 오곡, 쇠머리, 소의 염통과 간, 쇠고기 덩이살, 떡, 문어, 포, 미역, 김, 삼실과(대추․밤․곶감), 과일(수박․사과․배), 채소(미나리․콩나물․무) 등이 있다.

제수 준비는 산령각제를 지내기 하루 전날 계장댁에 모여 하며, 참례자들을 위한 점심 준비용 음식도 함께 준비한다. 이때 산령각계 반수와 계장, 유사 등이 모여 토지 임대료 및 기타 재정 상황에 대한 수입과 지출 내용을 정리하여 문서로 남겨 두는 작업을 한다.

제수를 진설하기 전에 제당 전면에 한지를 걸고 실을 위패에 두른다. 전면에 건 한지가 어떤 의미인지 산령각계원 중에서 아는 사람은 없지만 다른 지역 사례로 보았을 때 태백산산신령의 신체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제의 과정은 유교식 의례를 따라 강신-참신-초헌례-고축-아헌례-종헌례-음복-송신-소지-음복례 순으로 진행된다. 제관들의 음복례가 끝나면 참례자들이 개인적으로 소지를 올린다. 기본 절차를 마치면 제수 가운데 일부를 내려 엄나무 앞에 진설하여 술을 올리고 재배한다. 이는 수부를 위한 의례로 볼 수 있다.

사길령산령각에서 제의를 진행하면서 읽는 축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維歲次 庚寅 四月 甲子朔 十五日 戊寅
太白市 副市長 金鎭滿 敢昭告于
太白山靈神位前 伏惟尊靈
代天宣化 鎭我一方
下民加護 居安而樂
惟靈之賜 食飽而援
惟靈之捕 導民至德
加民惠澤 士農工商
無非共獲 一里洞屬
無汝無我 新綠肇夏
涓吉報祀 牲酒雖簿
夙夜摩寧 陟降之靈
度鑑愚衷 望垂黙佑
克有始終 伏惟 尙饗

소지를 마치면 제의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점심식사를 제공하고, 돌아갈 때 쇠고기 한 덩이와 떡을 나누어 준다. 그리고 산령각제를 마친 후 당해연도 고사에 대한 내용들을 『천금록(千金錄)』에 작성한다.

지역사례

주요 고개를 오가며 장사를 한 보부상단 관련 산령각(성황당)은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을 중심으로 여러 고갯마루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제당이다. 이들 제당 가운데 일부는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이를 오가는 보부상(이후 선질꾼)들이 제당이 훼손되면 돈을 모아 중수하였고 매년 제의를 주도하였다. 경북 울진군 후포면 다투고개에 있는 산신각, 태백산 사길령산령각, 원주 치악산 싸리재와 가리파 성황당, 울진 새재성황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로 울진과 봉화의 장시를 연결하여 물화의 교역과 판매를 주관한 보부상 조직은 반수, 접장(接長), 반수공원(班首公員), 본방공원(本房公員), 문서공원(文書公員), 성주도감(城主都監), 도집사(都執事), 도공원(都公員), 별공원(別公員), 별임(別任), 장재(掌財), 수전유사(收錢有司), 칠읍도공원(七邑都公員), 대방(大房), 비방(比房) 등으로 체계적인 면모를 갖추고 울진 새재[鳥嶺]성황사의 중수와 제의를 주도하였다. 이에 비해 태백산 사길령산령각을 비롯하여 울진 후포 다투고개에 있는 산신각과 원주 치악산 싸리재와 가리파 성황당의 경우 울진 새재성황사 사례와는 달리 보부상들이 계를 조직하여 이들 고개를 넘나드는 상행위를 관장하면서 고갯마루에 있는 제당 운영과 제의를 주관하였다. 즉 사길령을 중심으로 삼척과 봉화의 장시를 아우르는 보부상 조직은 없었지만 사길령을 중심으로 한 보부상 조직은 있었다. 이들은 상업활동에서의 안전과 번성을 위하는 동시에 사길령산령각계를 조직하여 매년 산령각제를 지냄으로써 내부 결속을 다진 것으로 보인다.

참조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계 문서

참고문헌

太白山山靈閣修稧稧案成帖 (1870), 四吉嶺契中家垈文券 (1881), 山靈閣重修時扶助列名錄 (1888), 太白山靈閣稧員名錄 (1892), 太白山靈閣稧員各錄 (1898), 千金錄 (1908~), 己酉四月十五日 各有司錄 (1909), 삼척군지 (심의승, 1916), 自辛酉四月十五日士吉嶺告祀時所用下記 (1921), 四吉嶺新入稧金出入帳 (1926), 壬午四月十五日 (1941~),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제 연구 (신종원․노남호, 강원문화사연구 3, 강원향토문화연구회, 1998), 강원도 영동 남부지역 고을 및 마을신앙 (김도현,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사료로 읽는 태백산과 천제 (김도현, 강원도민일보ㆍ강원도ㆍ태백시, 2009), 울진 12령 샛재[鳥嶺] 성황사와 보부상단 (김도현, 실천민속학연구 16, 실천민속학회, 2010)

태백산사길령산령각제

태백산사길령산령각제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의

집필자 김도현(金道賢)

정의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 8통 2반에 위치한 고개 새길령(사길령, 신로치, 사길치)에 있는 산령각에서 지내는 제의. 이 산령각은 사길령을 오가며 장사를 하였던 보부상들이 고갯길의 안전과 장사의 번성을 위해 세우고 매년 음력 사월 보름날에 제사를 지냈다. 이후 보부상이 해체되고 이들에 의한 상품 교류가 축소되었어도 태백시 혈리에 사는 주민들이 산령각계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남긴 재산을 관리하고 이에 의한 수익금과 신입회원들의 입회비로 산령각제를 매년 지냄으로써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 있다.

역사

태백산 사길령산령각 내에 있는 중수 현판과 사길령 산령각계에서 보관 중인 문서를 중심으로 산령각과 운영에 대한 연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오래된 현판으로 1888년에 작성한 「상원무자사월십오일태백산산령각중건부조기(上元戊子四月十五日太白山山靈閣重建扶助記)」에 따르면 삼척을 비롯하여 경상도 봉화․안동, 황해도 해주, 평안도 평양 등 전국 각지에서 온 보부상들이 중수에 참여하였다. 이와 함께 산령각계에서 보관하고 있는 「태백산산령각수계계안성첩(太白山山靈閣修稧稧案成帖)」(1870)으로 보아 1870년 이전에 산령각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20년에 중수하였으며, 최근에는 1999년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 사길령산령각 중수에는 항상 산령각계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각종 현판과 함께 사길령 산령각계에서 보관하고 있는 문서를 통해 사길령 산령각계의 운영에 대한 연혁을 알 수 있다. 먼저 경오년(1870)에 작성된 「태백산산령각수계계안성첩」을 보면 1870년대에 사길령산령각제를 운영하기 위한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었고, 이 때 만들어진 제의 관련 직책은 계수․공원․유사(유사, 도유사, 별유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현재 사길령산령각제를 운영하는 직책과 방법 등이 이미 1870년에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잘 전승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1921년부터 ‘사길령상민계수지인(四吉嶺商民契首之印)’이라 새겨진 도장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사길령을 오가던 보부상 집단의 명칭이 ‘사길령상민계(四吉嶺商民契)’였으며, 그들이 사길령산령각제 운영에 직접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태백시혈동새마을회인’이라 새긴 도장을 사용하고 있는 가운데 이는 보부상 집단이 쇠퇴함에 따라 사길령 산령각계가 태백시 혈동 주민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태백산령각계원각록(太白山靈閣稧員各錄)」에는 계원인 박성화(朴聖化)가 산령각 화상(畵像) 제작에 부조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사길령산령각에 산신령을 그린 당신도를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단종대왕의 화상이 제단 정면에 걸려 있다.

내용

사길령은 현재 태백시 소도동 혈리의 정거리에서 천평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 강원도에서 경상도 춘양 지역으로 가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이 고갯길에는 산령각과 함께 국수당이 있으며, 신수로 모시는 엄나무가 있다. 조선 후기에 보부상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니면서 안전을 기원하고 상업의 번창을 위해 산령각을 짓고 매년 음력 사월 보름에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먼저 제당 형태를 살펴보면 산령각은 디귿(ㄷ) 자형 토석혼축(土石混築)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정면 두 칸, 측면 한 칸 규모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건물은 소나무 판재를 이용하여 벽체를 만들었으며, 정면에는 좌우 여닫이문을 달았다. 제당 정면 입구에는 ‘산령각(山靈閣)’이라 쓴 편액을 걸었으며, 내부에는 중수 현판을 비롯하여 각종 현판 17개가 걸려 있다. 제당 내부 정면에 제단을 일(一) 자 형태로 만들어 설치하였으며, 제단 위에 ‘태백산산령지위(太白山山靈之位)’라고 새긴 나무 위패를 모셨다. 제당 정면 오른쪽에는 단종대왕 등을 그린 당신도를 걸었다. 이는 무속인들이 모신 것이라 한다. 국수당은 산령각 옆에 있다. 예전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현재 높이 약 1m, 폭 80㎝ 정도의 작은 규모이다. 예전에 당집이 없을 때 지나가는 이들이 고갯길의 무사 안전을 기원하며 이곳에 돌을 던져 만든 돌무더기이다. 이 사례는 구부시령이나 댓재․백복령 등 다른 지역에서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제일은 매년 음력 사월 보름날 아침에 지낸다. 순서는 산령각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제를 지낸 뒤 제수 일부를 내려 옆의 엄나무 앞에 진설하고 술을 한 잔 올린다. 산령각 내부에 ‘태백산산령지위’라고 새긴 위패를 모셨다. 예전의 기록을 보면 산령각 외부 기둥에 ‘태백산산왕대신위(太白山山王大神位)’라 새긴 주련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사길령산령각에서 태백산신을 모셨음을 알 수 있다. 태백산산신령에게 국태민안(國泰民安), 우순풍조(雨順風調)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사길령산령각제 준비를 위한 제수 비용은 20,000여 ㎡의 토지 임대료와 이자 수입, 계원 신입금, 찬조금 등으로 충당한다. 제관은 예전에는 산령각계 간부들이 담당하였으나 최근에는 태백시장, 문곡소도동장, 산령각제회 반수(班首) 등 지역 기관장을 제관으로 모신다. 제수 준비와 운영은 계장이 주도하며 유사들이 도와준다. 이와 함께 유교식으로 제의를 진행하기에 홀기, 축관, 알자, 집사를 임명한다. 산령제를 지내기 위해 준비한 제수로는 오곡, 쇠머리, 소의 염통과 간, 쇠고기 덩이살, 떡, 문어, 포, 미역, 김, 삼실과(대추․밤․곶감), 과일(수박․사과․배), 채소(미나리․콩나물․무) 등이 있다. 제수 준비는 산령각제를 지내기 하루 전날 계장댁에 모여 하며, 참례자들을 위한 점심 준비용 음식도 함께 준비한다. 이때 산령각계 반수와 계장, 유사 등이 모여 토지 임대료 및 기타 재정 상황에 대한 수입과 지출 내용을 정리하여 문서로 남겨 두는 작업을 한다. 제수를 진설하기 전에 제당 전면에 한지를 걸고 실을 위패에 두른다. 전면에 건 한지가 어떤 의미인지 산령각계원 중에서 아는 사람은 없지만 다른 지역 사례로 보았을 때 태백산산신령의 신체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제의 과정은 유교식 의례를 따라 강신-참신-초헌례-고축-아헌례-종헌례-음복-송신-소지-음복례 순으로 진행된다. 제관들의 음복례가 끝나면 참례자들이 개인적으로 소지를 올린다. 기본 절차를 마치면 제수 가운데 일부를 내려 엄나무 앞에 진설하여 술을 올리고 재배한다. 이는 수부를 위한 의례로 볼 수 있다. 사길령산령각에서 제의를 진행하면서 읽는 축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維歲次 庚寅 四月 甲子朔 十五日 戊寅太白市 副市長 金鎭滿 敢昭告于太白山靈神位前 伏惟尊靈代天宣化 鎭我一方下民加護 居安而樂惟靈之賜 食飽而援惟靈之捕 導民至德加民惠澤 士農工商無非共獲 一里洞屬無汝無我 新綠肇夏涓吉報祀 牲酒雖簿夙夜摩寧 陟降之靈度鑑愚衷 望垂黙佑克有始終 伏惟 尙饗 소지를 마치면 제의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점심식사를 제공하고, 돌아갈 때 쇠고기 한 덩이와 떡을 나누어 준다. 그리고 산령각제를 마친 후 당해연도 고사에 대한 내용들을 『천금록(千金錄)』에 작성한다.

지역사례

주요 고개를 오가며 장사를 한 보부상단 관련 산령각(성황당)은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을 중심으로 여러 고갯마루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제당이다. 이들 제당 가운데 일부는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이를 오가는 보부상(이후 선질꾼)들이 제당이 훼손되면 돈을 모아 중수하였고 매년 제의를 주도하였다. 경북 울진군 후포면 다투고개에 있는 산신각, 태백산 사길령산령각, 원주 치악산 싸리재와 가리파 성황당, 울진 새재성황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로 울진과 봉화의 장시를 연결하여 물화의 교역과 판매를 주관한 보부상 조직은 반수, 접장(接長), 반수공원(班首公員), 본방공원(本房公員), 문서공원(文書公員), 성주도감(城主都監), 도집사(都執事), 도공원(都公員), 별공원(別公員), 별임(別任), 장재(掌財), 수전유사(收錢有司), 칠읍도공원(七邑都公員), 대방(大房), 비방(比房) 등으로 체계적인 면모를 갖추고 울진 새재[鳥嶺]성황사의 중수와 제의를 주도하였다. 이에 비해 태백산 사길령산령각을 비롯하여 울진 후포 다투고개에 있는 산신각과 원주 치악산 싸리재와 가리파 성황당의 경우 울진 새재성황사 사례와는 달리 보부상들이 계를 조직하여 이들 고개를 넘나드는 상행위를 관장하면서 고갯마루에 있는 제당 운영과 제의를 주관하였다. 즉 사길령을 중심으로 삼척과 봉화의 장시를 아우르는 보부상 조직은 없었지만 사길령을 중심으로 한 보부상 조직은 있었다. 이들은 상업활동에서의 안전과 번성을 위하는 동시에 사길령산령각계를 조직하여 매년 산령각제를 지냄으로써 내부 결속을 다진 것으로 보인다.

참조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계 문서

참고문헌

太白山山靈閣修稧稧案成帖 (1870)四吉嶺契中家垈文券 (1881)山靈閣重修時扶助列名錄 (1888)太白山靈閣稧員名錄 (1892)太白山靈閣稧員各錄 (1898)千金錄 (1908~)己酉四月十五日 各有司錄 (1909)삼척군지 (심의승, 1916)自辛酉四月十五日士吉嶺告祀時所用下記 (1921)四吉嶺新入稧金出入帳 (1926)壬午四月十五日 (1941~)태백산 사길령 산령각제 연구 (신종원․노남호, 강원문화사연구 3, 강원향토문화연구회, 1998)강원도 영동 남부지역 고을 및 마을신앙 (김도현,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사료로 읽는 태백산과 천제 (김도현, 강원도민일보ㆍ강원도ㆍ태백시, 2009)울진 12령 샛재[鳥嶺] 성황사와 보부상단 (김도현, 실천민속학연구 16, 실천민속학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