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양청소리산신제문서

한자명

靑陽靑所里山神祭文書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자료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7

정의

20세기 초부터 2006년까지 충청남도 청양군 청남면 청소리의 산신제 의례절차와 이를 주관하는 동계(산제계)의 운영내력을 기록한 문서.

내용

청소리 산신제문서는 총 4건으로, 『강신기(講信記)』 2책, 『계원명부』 1책, 『청소동 재산대장』 1책이다. 산신제와 직접 관련된 자료는 『강신기』와 『계원명부』이다. 1905년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강신기』는 산신제의 「제수기(祭需記)」, 「소지인명부(燒紙人名簿)」, 「계서(稧序)」, 「입의신증(立議新增)」, 「추입기(追入記)」, 「강신기」 등이 차례로 수록되었다.

「제수기」는 매년 산신제를 지낼 때 필요한 제기(祭器)와 제물(祭物)의 종류를 기재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제기는 사기 2개, 접시 6개, 술동이 4개, 대접 2개, 토부(土釜) 1개, 시루 1좌, 호(壺) 1개, 조라단지[小甕] 1개, 백지 5권, 명태 2미, 대추․밤․감 3승, 곡자 1개, 닭[鷄] 1수, 청기름 2종발, 백미 3두 등이다. 백미는 상산시루미(米) 서되서홉(三升三合)을 비롯해, 조라미․노기미․하산시루미․하산노기미로, 이는 상산제(上山祭)와 하산제(下山祭)에 올릴 떡․메․술의 제조에 사용되는 쌀을 의미한다. 「소지인명부」는 산신제의 마지막 절차인 호구소지를 올릴 때의 명단이다. 따라서 이 명단은 당시 청소동의 가구 수와 인구를 추적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런가 하면 청소리 산제계의 시말을 기록한 「계서」는 “마을에 산신이 있는 것은 고을에 사(社)가 있는 것과 같다”고 전제한 뒤, 산신제의 비용은 경자년(1840) 이후로 65년 동안 계를 만들어 그 이자 수입과 해마다 걷은 돈으로 충당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폐단이 생겨 규칙이 무용지물이 되자 1905년 다시 계를 중수하게 된 배경이 간략하게 언급되었다. 이를 위해 「입의신증」 세 가지 조목을 추가하였다. 즉 “산신제를 모실 때 재계(齋戒)를 근본으로 하고, 원금을 빌려 줄 때는 보증인을 세우되 만약 기한을 어긴 자가 있으면 일제히 찾아가서 돈을 받도록 할 것”을 규약으로 정한 것이다. 이와 함께 계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청소리 26가구가 집집마다 벼 1~3두씩 갹출하여 자산으로 삼았다.

「추입기」는 1908년 이후 새로 가입한 주민들의 명단과 납부한 ‘추입조(追入租)’를 연도별로 기록했다. 또한 「강신기」는 을사년(1905)부터 기해년(1959)까지 매년 음력 9~10월 동계의 강신일에 결의된 사항을 기록한 것인데, 주로 기금의 식리(殖利)와 동답의 운용에 관한 것이다. 이 문서에 이어서 작성된 경자년 「강신기」는 1960년부터 2006년까지 47년 동안 동계의 결산을 기록한 장부책이다. 이에 따르면 청소동 동계의 재정은 현물수입(도조수입과 대부수입), 추입조(追入租), 미조(米租), 전조(錢租) 등인데, 해마다 마을을 운영하면서 기록한 수입지출 내역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962년 가을에 개초(改抄)된 『계원명부』는 「산제축문」, 「산제제수기」, 상산제(上山祭)와 하산제(下山祭)의 「제물진설도」, 「계원명단」이 실려 있다. 유교식 절차로 진행되는 청소리 산신제는 축문을 21회 낭독하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축문 옆에 ‘최소한 칠독(七讀)’이라 추기(追記)하여 근래의 변화된 사정을 엿볼 수 있다. 계원명단에는 기본금(액면)․산제계․건물 가입 명목으로 가구당 납부한 금액을 비롯해 이후에 가입하는 계원의 납부 현황과 추입년도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청소동에서는 1960~1970년대 타지에서 이사를 온 세대나 분가한 사람은 기본금․산제계․건물․신입례 이 네 가지의 비용을 각각 별도로 부담하는 것이 관례였다. 근래까지도 대동(동계)에 드는 몫으로 벼 2말, 산제계 벼 2말, 신입례로 벼 2말을 각각 부담해야 비로소 마을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청소동 재산대장』은 마을(동계)에서 보유한 공동재산 목록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에는 부동산부․건물부․건구(建具)․식기구(食器具)로 나누어 기재하였고, 문서의 말미에는 청소동에서 보유한 전답의 부동산 표시를 하였다. 먼저 부동산부는 청소리와 동강리에 소재한 전답의 지번과 평수를, 건물부는 창고․공회당․상여막의 건물 형태와 면적 등을 기재하였다. 그리고 건구는 마을의 공공기물인 사륜차․보교(步轎)․혼구․상여․농악기․저울․종․농기구 등 동물(洞物)의 현황과 식기류의 종류와 수량이 낱낱이 수록되었다. 말미에는 변경된 청소동 부동산의 주소와 지번, 면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문서가 작성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그 내용으로 미루어 1962년 계원명부를 다시 작성하면서 등재한 것으로 추정되며, 식기부와 부동산 표시는 이후에 추기(追記)한 것이다.

의의

청소리에서는 주산인 석봉산(石峰山) 기슭에 산제당을 마련하고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상산제와 하산제를 지낸다. 이를 위해 1840년 마을 사람들이 산제계를 조직하여 해마다 그 기금으로 제수비용을 충당하여 왔다. 이 계는 오늘날 동계로 뿌리를 내려 산신제 및 마을의 대소사를 주관하는 조직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처럼 청소리 산신제문서는 한 세기 이상 지속되어온 산신제의 전승 양상과 마을의 운영에 관한 기록물이다. 따라서 그 속에는 산신제의 지속과 변화는 물론 마을사의 단면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동제를 비롯한 향촌사회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참고문헌

대전․충남지역 촌계류문서수집사업 최종보고서 (강성복, 국사편찬위원회, 2008)
백마강 상 (부여군, 2008)
조선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청양청소리산신제문서

청양청소리산신제문서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자료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7

정의

20세기 초부터 2006년까지 충청남도 청양군 청남면 청소리의 산신제 의례절차와 이를 주관하는 동계(산제계)의 운영내력을 기록한 문서.

내용

청소리 산신제문서는 총 4건으로, 『강신기(講信記)』 2책, 『계원명부』 1책, 『청소동 재산대장』 1책이다. 산신제와 직접 관련된 자료는 『강신기』와 『계원명부』이다. 1905년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강신기』는 산신제의 「제수기(祭需記)」, 「소지인명부(燒紙人名簿)」, 「계서(稧序)」, 「입의신증(立議新增)」, 「추입기(追入記)」, 「강신기」 등이 차례로 수록되었다. 「제수기」는 매년 산신제를 지낼 때 필요한 제기(祭器)와 제물(祭物)의 종류를 기재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제기는 사기 2개, 접시 6개, 술동이 4개, 대접 2개, 토부(土釜) 1개, 시루 1좌, 호(壺) 1개, 조라단지[小甕] 1개, 백지 5권, 명태 2미, 대추․밤․감 3승, 곡자 1개, 닭[鷄] 1수, 청기름 2종발, 백미 3두 등이다. 백미는 상산시루미(米) 서되서홉(三升三合)을 비롯해, 조라미․노기미․하산시루미․하산노기미로, 이는 상산제(上山祭)와 하산제(下山祭)에 올릴 떡․메․술의 제조에 사용되는 쌀을 의미한다. 「소지인명부」는 산신제의 마지막 절차인 호구소지를 올릴 때의 명단이다. 따라서 이 명단은 당시 청소동의 가구 수와 인구를 추적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런가 하면 청소리 산제계의 시말을 기록한 「계서」는 “마을에 산신이 있는 것은 고을에 사(社)가 있는 것과 같다”고 전제한 뒤, 산신제의 비용은 경자년(1840) 이후로 65년 동안 계를 만들어 그 이자 수입과 해마다 걷은 돈으로 충당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폐단이 생겨 규칙이 무용지물이 되자 1905년 다시 계를 중수하게 된 배경이 간략하게 언급되었다. 이를 위해 「입의신증」 세 가지 조목을 추가하였다. 즉 “산신제를 모실 때 재계(齋戒)를 근본으로 하고, 원금을 빌려 줄 때는 보증인을 세우되 만약 기한을 어긴 자가 있으면 일제히 찾아가서 돈을 받도록 할 것”을 규약으로 정한 것이다. 이와 함께 계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청소리 26가구가 집집마다 벼 1~3두씩 갹출하여 자산으로 삼았다. 「추입기」는 1908년 이후 새로 가입한 주민들의 명단과 납부한 ‘추입조(追入租)’를 연도별로 기록했다. 또한 「강신기」는 을사년(1905)부터 기해년(1959)까지 매년 음력 9~10월 동계의 강신일에 결의된 사항을 기록한 것인데, 주로 기금의 식리(殖利)와 동답의 운용에 관한 것이다. 이 문서에 이어서 작성된 경자년 「강신기」는 1960년부터 2006년까지 47년 동안 동계의 결산을 기록한 장부책이다. 이에 따르면 청소동 동계의 재정은 현물수입(도조수입과 대부수입), 추입조(追入租), 미조(米租), 전조(錢租) 등인데, 해마다 마을을 운영하면서 기록한 수입지출 내역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962년 가을에 개초(改抄)된 『계원명부』는 「산제축문」, 「산제제수기」, 상산제(上山祭)와 하산제(下山祭)의 「제물진설도」, 「계원명단」이 실려 있다. 유교식 절차로 진행되는 청소리 산신제는 축문을 21회 낭독하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축문 옆에 ‘최소한 칠독(七讀)’이라 추기(追記)하여 근래의 변화된 사정을 엿볼 수 있다. 계원명단에는 기본금(액면)․산제계․건물 가입 명목으로 가구당 납부한 금액을 비롯해 이후에 가입하는 계원의 납부 현황과 추입년도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청소동에서는 1960~1970년대 타지에서 이사를 온 세대나 분가한 사람은 기본금․산제계․건물․신입례 이 네 가지의 비용을 각각 별도로 부담하는 것이 관례였다. 근래까지도 대동(동계)에 드는 몫으로 벼 2말, 산제계 벼 2말, 신입례로 벼 2말을 각각 부담해야 비로소 마을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청소동 재산대장』은 마을(동계)에서 보유한 공동재산 목록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에는 부동산부․건물부․건구(建具)․식기구(食器具)로 나누어 기재하였고, 문서의 말미에는 청소동에서 보유한 전답의 부동산 표시를 하였다. 먼저 부동산부는 청소리와 동강리에 소재한 전답의 지번과 평수를, 건물부는 창고․공회당․상여막의 건물 형태와 면적 등을 기재하였다. 그리고 건구는 마을의 공공기물인 사륜차․보교(步轎)․혼구․상여․농악기․저울․종․농기구 등 동물(洞物)의 현황과 식기류의 종류와 수량이 낱낱이 수록되었다. 말미에는 변경된 청소동 부동산의 주소와 지번, 면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문서가 작성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그 내용으로 미루어 1962년 계원명부를 다시 작성하면서 등재한 것으로 추정되며, 식기부와 부동산 표시는 이후에 추기(追記)한 것이다.

의의

청소리에서는 주산인 석봉산(石峰山) 기슭에 산제당을 마련하고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상산제와 하산제를 지낸다. 이를 위해 1840년 마을 사람들이 산제계를 조직하여 해마다 그 기금으로 제수비용을 충당하여 왔다. 이 계는 오늘날 동계로 뿌리를 내려 산신제 및 마을의 대소사를 주관하는 조직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처럼 청소리 산신제문서는 한 세기 이상 지속되어온 산신제의 전승 양상과 마을의 운영에 관한 기록물이다. 따라서 그 속에는 산신제의 지속과 변화는 물론 마을사의 단면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동제를 비롯한 향촌사회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참고문헌

대전․충남지역 촌계류문서수집사업 최종보고서 (강성복, 국사편찬위원회, 2008)백마강 상 (부여군, 2008)조선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