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장군

한자명

芻將軍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구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4

정의

재액(災厄)을 물리칠 목적으로 동제의 제장에 임시로 안치하는 장군상의 하나.

형태

대부분 짚으로 장군을 만들지만, 마을에 따라서는 대나무로 만들기도 한다. 음력 정초나 정월대보름에 전승되는 거리제나 장군제에 간혹 짚장군이 등장한다. 짚장군은 가부좌를 튼 사람의 등신상(等身像)보다 조금 크게 제작된다. 여기에 갑옷을 입히고, 칼․창․화살 등의 모형 무기 따위를 소지시켜 장군의 위용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홍가골 장군제(거리제)는 짚으로 만든 축귀대장군(逐鬼大將軍)을 장군막(將軍幕)에 안치하고 치제하는 독특한 액막이 의례이다. 짚장군은 가부좌를 한 자세로 만들어진다. 머리에는 벙거지처럼 생긴 투구를 쓰고, 새끼로 촘촘하게 엮어서 만든 갑옷을 몸에 걸친다. 얼굴에는 수염이 덥수룩한 화상을 한지에 그려서 가면을 씌우고, 이마에는 붉은색 띠를 질끈 동여맨다. 그 표정이 자못 해학적이어서 무섭기보다는 우스꽝스럽다. 가슴에는 ‘축귀대장군’이라 묵서한 위목을 부착하여 잡귀를 구축하는 대장군임을 나타낸다. 몸집에 비해 팔과 다리가 짧아 심한 비대칭을 이루지만, 손과 발가락은 비교적 정교하게 만들어진 편이다. 왼쪽 옆구리에는 대나무 칼이 채워져 있으며, 다리 사이에는 발기된 성기가 과도하게 노출되어 있다.

홍가골 짚장군의 형태는 제작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최근에 제작된 장군은 몸 전체를 새끼줄로 엮었으며 목 부위에 갑옷을 입혔다. 얼굴은 가면 대신 수염을 비롯해 눈썹․눈․귀까지 짚으로 만들었다. 팔다리를 길게 만든 것도 기존의 장군과 다른 점이다. 등 뒤에는 두 가닥의 멜빵을 부착하여 유사시 메고 다닐 수 있도록 하였고, 발기된 성기와 불알은 실물에 가깝도록 정교하게 제작되었다. 오른쪽 어깨에는 작은 망태기를 대각선으로 둘렀는데, 이 망태기는 오쟁이와 마찬가지로 거리제를 마친 뒤에 장군이 흠향할 제물을 담아 주는 그릇의 역할을 한다. 장군의 몸체는 앉은키 95㎝, 가슴둘레 106㎝, 다리 95㎝, 성기 20㎝이다.

일제강점기 말까지 충남 공주시 중학동과 산성동에서는 짚으로 만든 장군을 안치하고 장군제를 지냈다. 산성동 장군은 몸집이 두세 아름이 될 정도로 큰 편이었으며 짚단 1~2동이 소요되었다. 장군을 들고 마을을 돌 때는 네 명 또는 여섯 명이 들었다고 하니 그 크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장군은 가부좌를 한 자세로 투구와 갑옷을 입혔다. 손에는 창을 쥐고 있었으며 어깨에 활과 활통을 멨다. 투구와 갑옷은 각대기로 만들었는데, 여기에 은색을 칠하여 반짝반짝 빛이 났고 움직일 때마다 덜렁거렸다. 그 밖에 장군의 복장은 창호지로 분장을 하였다. 반면에 중학동에서는 남녀장군을 안치하였는데, 나중에 대나무로 장군 내외를 만들었으며 창호지를 몸에 발라 장식을 하였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짚장군은 충남 논산시 상월면 지경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짚으로 남녀 허제비 인형 2개를 만들어 놓고 거리제를 지냈다. 허제비의 몸집은 사람보다 다소 크게 만들었다고 한다.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자는 비녀를 꽂은 모습이었다.

내용

동제의 연행 현장에 등장하는 짚장군은 재액을 일소하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동제를 전후하여 장군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마을을 도는 ‘장군놀이’나 각 가정을 방문하여 액운이 없기를 축원하는 ‘장군걸립’이 베풀어진다.

지금도 해마다 정월 초삼일에 산신제와 장군제를 거행하는 부여 홍가골에서는 아침부터 젊은이들이 집집마다 방문하여 짚과 땔나무를 갹출한다. 이것으로 마을 앞 도로변에 장군을 안치할 작은 막을 짓는다. 장군막이 완성되면 왼새끼를 꼬아 시신을 염하듯이 짚으로 만든 장군을 일곱 매로 묶어서 안치한다. 당일 산신제를 마치면 장군을 짊어지고 풍물을 울리며 제관의 집으로 간다. 이때 제관은 별도로 마련한 제물로 간단하게 제를 지낸 다음, 다시 장군을 짊어진 ‘장군애비’를 앞세우고 길군악을 울리며 장군막으로 향한다. 도중에 우물을 만나면 샘굿을 치고 간다. 제장에 도착하면 장군막 우측에 장군을 좌정시킨 뒤 그 앞에 제상을 차리고 제를 지낸다.

장군제를 마치면 장군애비는 풍물패를 대동하고 각 가정을 방문하여 한 해 동안 무탈하기를 축원해 준다. 초저녁에 시작된 걸립굿은 한 집도 빠짐없이 도는 까닭에 예전에는 동이 틀 무렵에야 끝이 났다고 한다. 이때 장군을 맞이한 가정에서는 초사흘 고사로 올린 쌀이나 돈을 내주었으며, 더러는 장군에 동전을 넣어 주기도 하였다. 장군걸립이 끝나면 다시 장군막으로 돌아와서 장군의 가슴에 돈과 쌀을 넣어 주며 “나쁜 액을 다 가져 가십시오!”라고 크게 소리친다. 그런 다음 장군을 짊어지고 장군둠벙으로 가서 버리는데, 장군과 함께 모든 액운이 소멸된다고 한다. 일단 장군을 버리고 나면 횃불을 끈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을로 돌아와 음복을 한다.

공주 중학동의 장군제는 짚장군의 기능이 한층 극명하게 드러난다. 장군제는 임시로 천막을 설치하여 이곳에 장군을 안치하고 제를 지냈는데, 제사 후에는 장군을 메고 온 마을 사람이 골목골목을 행진하며 장군놀이를 즐겼다. 행사를 마치면 장군의 정면이 공주시내를 보게 하고 불을 질렀다. 장군이 앞쪽으로 넘어지면 그 해는 액운이 들 징조이고, 뒤로 넘어지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전한다.

논산 상월에서는 거리제를 지내기 전에 짚으로 만든 허제비를 등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걸립을 하였다. 걸립을 당한 집에서는 한복의 동정을 떼어 허제비의 목에 걸어 주면 한 해의 액땜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것은 마치 달집을 태울 때 마을 사람들이 저고리의 동정을 불사르고, 액년(厄年)이 든 가정에서 거리제를 지내며 당사자의 동정을 불에 사르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다.

이와 동일한 의식은 장승을 매개로 한 동제에서도 나타난다. 충남 아산시 배방읍 북수리에서는 해마다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장승제를 지냈다. 장승은 윤달이 드는 해마다 삼살방(三煞方)을 가려 다시 깎아 세웠다. 남녀장승이 만들어지면 이를 등에 업고 흥겹게 풍물을 치면서 가가호호를 방문한다. 이때 풍물패를 맞이한 집에서는 대주의 저고리 동정을 떼어 장승의 관모에 매달아 준다. 그렇게 빠짐없이 각 가정을 돌다 보면 공간이 부족하여 장승의 몸에 동정을 매기도 했다. 이로써 한 해 동안 대주에게 액운이 없고 집안이 무탈하다고 여겼다. 특히 어린아이가 있는 집은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바람으로 아이가 입던 옷깃을 떼어 장승에 달아 주는 전통이 있었다. 그래서 걸립이 끝날 무렵이면 마을 사람들이 매달아 놓은 동정과 옷고름으로 장승이 하얗게 뒤덮일 정도였다.

의의

거리제나 장군제에 등장하는 짚장군은 제장에 임시로 안치되는 주술적인 존재이지만, 그것이 곧 신체(神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액운과 잡신을 구축(驅逐)하는 신승물(神乘物)의 성격을 띠고 있을 뿐이다. 제사 후에 소임을 다한 장군을 불사르거나 동구 밖에 내다버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결국 짚장군은 출중한 무예를 지닌 장수야말로 액운을 쫓는 주술적인 힘이 더욱 강할 것이라는 민간사고가 전제된 산물이다. 이 때문에 장군을 등에 지고 온 마을을 도는 장군놀이를 베풀거나, 장군애비가 장군을 메고 걸립을 할 때 동정을 걸어 주고 아이들의 옷깃을 매달아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짚장군은 가정과 마을에 깃든 모든 액운을 일소하는 존재이자, 궁극적으로는 항복무강을 축원하는 동제의 기능을 더욱 강화시켜 주는 중요한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공주의 민속신앙 (공주문화원, 1995)
천안 북수~송촌 간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서 (충청매장문화재연구원, 2001)
가회리 장군제 조사보고서 (부여문화원, 2002)
한국세시풍속사전-정월 (국립민속박물관, 2004)
백마강 (부여군, 2008)

짚장군

짚장군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구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4

정의

재액(災厄)을 물리칠 목적으로 동제의 제장에 임시로 안치하는 장군상의 하나.

형태

대부분 짚으로 장군을 만들지만, 마을에 따라서는 대나무로 만들기도 한다. 음력 정초나 정월대보름에 전승되는 거리제나 장군제에 간혹 짚장군이 등장한다. 짚장군은 가부좌를 튼 사람의 등신상(等身像)보다 조금 크게 제작된다. 여기에 갑옷을 입히고, 칼․창․화살 등의 모형 무기 따위를 소지시켜 장군의 위용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홍가골 장군제(거리제)는 짚으로 만든 축귀대장군(逐鬼大將軍)을 장군막(將軍幕)에 안치하고 치제하는 독특한 액막이 의례이다. 짚장군은 가부좌를 한 자세로 만들어진다. 머리에는 벙거지처럼 생긴 투구를 쓰고, 새끼로 촘촘하게 엮어서 만든 갑옷을 몸에 걸친다. 얼굴에는 수염이 덥수룩한 화상을 한지에 그려서 가면을 씌우고, 이마에는 붉은색 띠를 질끈 동여맨다. 그 표정이 자못 해학적이어서 무섭기보다는 우스꽝스럽다. 가슴에는 ‘축귀대장군’이라 묵서한 위목을 부착하여 잡귀를 구축하는 대장군임을 나타낸다. 몸집에 비해 팔과 다리가 짧아 심한 비대칭을 이루지만, 손과 발가락은 비교적 정교하게 만들어진 편이다. 왼쪽 옆구리에는 대나무 칼이 채워져 있으며, 다리 사이에는 발기된 성기가 과도하게 노출되어 있다. 홍가골 짚장군의 형태는 제작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최근에 제작된 장군은 몸 전체를 새끼줄로 엮었으며 목 부위에 갑옷을 입혔다. 얼굴은 가면 대신 수염을 비롯해 눈썹․눈․귀까지 짚으로 만들었다. 팔다리를 길게 만든 것도 기존의 장군과 다른 점이다. 등 뒤에는 두 가닥의 멜빵을 부착하여 유사시 메고 다닐 수 있도록 하였고, 발기된 성기와 불알은 실물에 가깝도록 정교하게 제작되었다. 오른쪽 어깨에는 작은 망태기를 대각선으로 둘렀는데, 이 망태기는 오쟁이와 마찬가지로 거리제를 마친 뒤에 장군이 흠향할 제물을 담아 주는 그릇의 역할을 한다. 장군의 몸체는 앉은키 95㎝, 가슴둘레 106㎝, 다리 95㎝, 성기 20㎝이다. 일제강점기 말까지 충남 공주시 중학동과 산성동에서는 짚으로 만든 장군을 안치하고 장군제를 지냈다. 산성동 장군은 몸집이 두세 아름이 될 정도로 큰 편이었으며 짚단 1~2동이 소요되었다. 장군을 들고 마을을 돌 때는 네 명 또는 여섯 명이 들었다고 하니 그 크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장군은 가부좌를 한 자세로 투구와 갑옷을 입혔다. 손에는 창을 쥐고 있었으며 어깨에 활과 활통을 멨다. 투구와 갑옷은 각대기로 만들었는데, 여기에 은색을 칠하여 반짝반짝 빛이 났고 움직일 때마다 덜렁거렸다. 그 밖에 장군의 복장은 창호지로 분장을 하였다. 반면에 중학동에서는 남녀장군을 안치하였는데, 나중에 대나무로 장군 내외를 만들었으며 창호지를 몸에 발라 장식을 하였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짚장군은 충남 논산시 상월면 지경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짚으로 남녀 허제비 인형 2개를 만들어 놓고 거리제를 지냈다. 허제비의 몸집은 사람보다 다소 크게 만들었다고 한다.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자는 비녀를 꽂은 모습이었다.

내용

동제의 연행 현장에 등장하는 짚장군은 재액을 일소하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동제를 전후하여 장군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마을을 도는 ‘장군놀이’나 각 가정을 방문하여 액운이 없기를 축원하는 ‘장군걸립’이 베풀어진다. 지금도 해마다 정월 초삼일에 산신제와 장군제를 거행하는 부여 홍가골에서는 아침부터 젊은이들이 집집마다 방문하여 짚과 땔나무를 갹출한다. 이것으로 마을 앞 도로변에 장군을 안치할 작은 막을 짓는다. 장군막이 완성되면 왼새끼를 꼬아 시신을 염하듯이 짚으로 만든 장군을 일곱 매로 묶어서 안치한다. 당일 산신제를 마치면 장군을 짊어지고 풍물을 울리며 제관의 집으로 간다. 이때 제관은 별도로 마련한 제물로 간단하게 제를 지낸 다음, 다시 장군을 짊어진 ‘장군애비’를 앞세우고 길군악을 울리며 장군막으로 향한다. 도중에 우물을 만나면 샘굿을 치고 간다. 제장에 도착하면 장군막 우측에 장군을 좌정시킨 뒤 그 앞에 제상을 차리고 제를 지낸다. 장군제를 마치면 장군애비는 풍물패를 대동하고 각 가정을 방문하여 한 해 동안 무탈하기를 축원해 준다. 초저녁에 시작된 걸립굿은 한 집도 빠짐없이 도는 까닭에 예전에는 동이 틀 무렵에야 끝이 났다고 한다. 이때 장군을 맞이한 가정에서는 초사흘 고사로 올린 쌀이나 돈을 내주었으며, 더러는 장군에 동전을 넣어 주기도 하였다. 장군걸립이 끝나면 다시 장군막으로 돌아와서 장군의 가슴에 돈과 쌀을 넣어 주며 “나쁜 액을 다 가져 가십시오!”라고 크게 소리친다. 그런 다음 장군을 짊어지고 장군둠벙으로 가서 버리는데, 장군과 함께 모든 액운이 소멸된다고 한다. 일단 장군을 버리고 나면 횃불을 끈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을로 돌아와 음복을 한다. 공주 중학동의 장군제는 짚장군의 기능이 한층 극명하게 드러난다. 장군제는 임시로 천막을 설치하여 이곳에 장군을 안치하고 제를 지냈는데, 제사 후에는 장군을 메고 온 마을 사람이 골목골목을 행진하며 장군놀이를 즐겼다. 행사를 마치면 장군의 정면이 공주시내를 보게 하고 불을 질렀다. 장군이 앞쪽으로 넘어지면 그 해는 액운이 들 징조이고, 뒤로 넘어지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전한다. 논산 상월에서는 거리제를 지내기 전에 짚으로 만든 허제비를 등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걸립을 하였다. 걸립을 당한 집에서는 한복의 동정을 떼어 허제비의 목에 걸어 주면 한 해의 액땜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것은 마치 달집을 태울 때 마을 사람들이 저고리의 동정을 불사르고, 액년(厄年)이 든 가정에서 거리제를 지내며 당사자의 동정을 불에 사르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다. 이와 동일한 의식은 장승을 매개로 한 동제에서도 나타난다. 충남 아산시 배방읍 북수리에서는 해마다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장승제를 지냈다. 장승은 윤달이 드는 해마다 삼살방(三煞方)을 가려 다시 깎아 세웠다. 남녀장승이 만들어지면 이를 등에 업고 흥겹게 풍물을 치면서 가가호호를 방문한다. 이때 풍물패를 맞이한 집에서는 대주의 저고리 동정을 떼어 장승의 관모에 매달아 준다. 그렇게 빠짐없이 각 가정을 돌다 보면 공간이 부족하여 장승의 몸에 동정을 매기도 했다. 이로써 한 해 동안 대주에게 액운이 없고 집안이 무탈하다고 여겼다. 특히 어린아이가 있는 집은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바람으로 아이가 입던 옷깃을 떼어 장승에 달아 주는 전통이 있었다. 그래서 걸립이 끝날 무렵이면 마을 사람들이 매달아 놓은 동정과 옷고름으로 장승이 하얗게 뒤덮일 정도였다.

의의

거리제나 장군제에 등장하는 짚장군은 제장에 임시로 안치되는 주술적인 존재이지만, 그것이 곧 신체(神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액운과 잡신을 구축(驅逐)하는 신승물(神乘物)의 성격을 띠고 있을 뿐이다. 제사 후에 소임을 다한 장군을 불사르거나 동구 밖에 내다버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결국 짚장군은 출중한 무예를 지닌 장수야말로 액운을 쫓는 주술적인 힘이 더욱 강할 것이라는 민간사고가 전제된 산물이다. 이 때문에 장군을 등에 지고 온 마을을 도는 장군놀이를 베풀거나, 장군애비가 장군을 메고 걸립을 할 때 동정을 걸어 주고 아이들의 옷깃을 매달아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짚장군은 가정과 마을에 깃든 모든 액운을 일소하는 존재이자, 궁극적으로는 항복무강을 축원하는 동제의 기능을 더욱 강화시켜 주는 중요한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공주의 민속신앙 (공주문화원, 1995)천안 북수~송촌 간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서 (충청매장문화재연구원, 2001)가회리 장군제 조사보고서 (부여문화원, 2002)한국세시풍속사전-정월 (국립민속박물관, 2004)백마강 (부여군,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