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횡장군

한자명

田橫將軍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신격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4

정의

중국 제나라 출신의 무장으로서 서해안 외연열도에서 풍어의 신으로 모시는 인물신.

내용

역사에 전하는 전횡은 한 고조 유방(기원전 274~195)과 동시대에 활약한 중국 전국시대의 인물이다. 사마천의 『사기』 「전담열전」에 따르면 전횡은 삼형제가 평민의 신분으로 몸을 일으켜 번갈아서 제나라의 재상을 거쳐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의 호걸다운 면모는 유방에게 천하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유방이 황제로 등극하여 팽월을 양나라 왕으로 삼자 피살될 것을 두려워한 전횡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 500여 명과 함께 바다로 들어가 섬에서 살았다. 유방은 전횡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신을 보내어 회유하였으나 전횡은 끝내 이를 거부하고 사신이 낙양에 당도하기 전에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목숨을 끊는다. 유방이 그 소식을 듣고 의롭게 여겨 섬에 남아 있는 부하들을 데려오도록 하였으나 사신으로부터 전횡의 비보를 접한 500여 명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와 유사한 사연은 1936년에 건립된 외연도 「전공사당기(田公祠堂記)」에도 자세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전횡의 고사는 『사기』에 소개된 이후 천고의 미담이 되었으며, 당나라 문호 한유(韓愈)는 ‘제전횡문(祭田橫文)’을 지어 애도하였다. 또한 정몽주․정도전 등 숱한 문인들이 전횡을 추모하는 시와 글을 남겼고, 『선조실록』과 『숙종실록』 등에는 의로움의 상징적인 인물로 거론하기도 하였다. 이런 전횡을 풍어의 신으로 받드는 까닭은 외연도와의 인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서산의 사찬읍지인 『호산록』(1619)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쾌청한 날에 도비산에 올라보면 바닷길이 분명하고 해중(海中)에 위안도(蘶眼島)․오호도(嗚呼島)가 있다. 이 섬은 전횡의 제나라 지경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혹자는 이르기를 오호도는 전횡이 의사 오백 명을 인솔하고 한고조를 피하여 살던 섬이라고 한다. … 우리나라의 포은 선생께서 중국에 조회가기 위하여 바다를 건널 때 오호도에 이르러 전횡의 의리를 생각하여 한 구절의 시를 써서 이르기를 ‘오백 명의 사람들이 서로 죽고 말았으니 전횡의 높은 절의 천년에도 감동하네. 당시에 잃은 땅을 대체 무엇 때문에 책망할까. 대한(大漢)의 너그럽고 어진 정치 만민을 얻었도다’라고 하였다. 내가 천년 아래에 있어서 이 시를 외울 적마다 세 번을 감탄하면서 책상을 치지 않을 때가 없었다. 어찌 죽을 나이를 당하여 그 섬을 오늘에야 바라볼 것을 생각이나 했을까? 배를 타고 빨리 노를 저으면서 그 섬에 도착하여 오백 명 의사의 영령을 불러 위안제를 지내고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이 기록에 보이는 위안도는 ‘오얀도’로 불리는 외연도를 지칭하고, 오호도 역시 외연열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전횡도(田橫島)를 언급한 옛 문헌에는 전횡도는 홍주의 앞바다에 있으며, 일명 오호도이다. 토질이 매우 비옥하고 닥나무와 옻나무, 화살대가 난다. 둘레는 95리이고, 옛 성터가 남아 있다. 그 곁에는 작은 섬이 있으며, ‘횡건(橫巾)’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횡건은 외연도에 딸린 속칭 ‘빗갱이머금’이란 열도를 지칭한다. 비스듬히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에 ‘비껸’ 또는 ‘횡견도’로 불린다. 이처럼 전횡이 은거했다는 오호도를 외연도로 비정하려는 움직임은 일각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이러한 인식은 실제 여부와는 무관하게 고려 때부터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정몽주는 중국 사신으로 파견되어 오호도를 지나면서 전횡의 높은 절의를 찬미하는 한시를 지어 읊은 것이다. 따라서 ‘외연도=전횡도’라는 세간의 인식은 서해안 일대는 물론 의리를 중시하는 식자층을 중심으로 널리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외연도 당산에는 전횡이 놀았다고 구전되는 ‘전횡장군놀던바위’가 있다. 이는 외연도가 전횡도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자연스레 덧붙여진 지명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가 하면 전횡이 피신한 곳은 어청도로 구전되기도 한다. 전횡은 초나라의 패왕 항우가 자결하고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자 두 명의 형제와 500여 명을 거느린 채 돛단배를 타고 탈출한 지 3개월 만에 어청도에 도착했다고 한다. 전횡이 어청도를 발견한 날은 바다 위에 안개가 약간 끼어 있었는데 갑자기 푸른 산 하나가 우뚝 나타나서 군사들이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섬에 상륙하였다. 이 섬에 살게 된 전횡은 푸른 섬이라 하여 어청도(於淸島)로 지었다는 것이다. 전횡은 식량이 떨어지자 인근을 지나는 선박을 보면 쇠로 만든 부채로 바람을 일으켜서 수송선을 어청도로 대피하도록 한 다음 배를 탈취하여 생활했다고 한다.

녹도에서도 유사한 전설이 전해진다. 그렇지만 어청도와는 달리 전횡은 주민들을 구제하는 의적형(義賊型)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 즉 섬 주민들을 위해 세곡선을 쇠부채로 끌어당겨 쌀을 나누어 주고 그 배를 불살랐다고 한다. 이러한 영웅적인 모습은 전횡이 신격화된 이후에 형성된 전설일 가능성이 크지만 동시에 그것은 전횡이 외연열도에서 오랜 세월 당제의 주신으로 지속될 수 있는 토대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외연도에서 당제의 제물을 구입하러 가는 장배가 떠나면 어청도 쪽으로 마파람(남풍)이 불고, 당제를 다 모시면 하늬바람(북서풍)이 분다고 한다. 또 전횡 장군의 동생 두 명이 남쪽으로부터 왔다가 제사를 함께 즐거이 받고 나면 다시 북풍을 타고 어청도로 돌아간다는 속설이 전한다. 이 때문에 주민들 사이에서는 어청도의 당산신은 전횡 장군의 아우들이라는 이야기도 구전된다. 이는 두 섬에서 모신 전횡의 신격 사이에도 은연중에 상하의 구별이 있음을 반영하는 전설로 풀이된다.

그러나 전횡이 은거한 곳은 외연도나 어청도가 아니라 산둥반도 연안의 섬으로, 중국의 산둥성(山東省) 지모시(卽墨市) 동부 해안에 자리한 전횡도를 일컫는다. 이 섬의 위쪽에 있는 오백 장령의 무덤은 가장 유명한 역사유적이다. 후세 사람들이 전횡과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오백 열사의 충성과 의리에 감동하여 전횡도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전횡이 피신한 섬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외연도 또는 어청도로 알려진 까닭은 지리적인 위치상 산둥반도와 빈번한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방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연고성은 전횡이 신격화되는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무엇보다 전횡과 그를 따르는 무리의 의로운 죽음은 섬 주민들에 의해 해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것이고, 결국 풍어의 신으로 수용되기에 이르렀다.

외연도에서 전횡의 신격화는 늦어도 조선 전기로 거슬러 올라갈 개연성이 높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 충청수영이 위치한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건립된 「유격장군청덕비(遊擊將軍淸德碑)」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된 이 비석은 정유재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파견된 명나라 장수 계금(季金)의 업적을 기리고 바다에 나갈 때 소원을 비는 신으로 모시기 위해 1598(선조 31)에 충청수영의 군졸들이 주축이 되어 건립하였다. 비문의 요지는 계금 장군은 인자함과 청렴함, 덕성을 겸비한 장수로서 삼천의 동덕지사(同德之士)를 거느렸으니 500명의 동덕지사를 얻은 전횡과 누가 더 많고 적으냐는 것이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계금 장군의 위엄이 외연도에서 제사를 받는 전횡보다 더 효험이 있을 것이므로 영맹(獰猛)한 서해바다의 신으로 모시고 영원히 제향을 받들자는 뜻이다. 이에 따라 전횡은 이미 외연도에서 임진왜란 이전부터 당제의 주신으로 신격화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전횡은 특정 성씨에 의해 배향되고 있다. 전북 군산시에서 토성으로 널리 알려진 담양 전씨(潭陽 田氏) 후손이 그들이다. 군산의 담양 전씨는 전횡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겨 1926년에 치동묘(淄東廟)를 건립하고 제사를 지내 왔다. 최근에는 오곡리 원오곡 마을로 사당을 옮겨 치동원이라 칭하며 제향을 받들고 있다. 군산의 치동묘는 어청도 전횡사당의 당호와 동일한 것이어서 긴밀한 관련성을 암시한다. 물론 담양 전씨의 치동묘는 외연열도의 당제와는 분명 구분되는 것이지만 전횡을 조상신으로 섬기는 보기 드문 사례라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지모시 톈헝섬(田橫島)에도 전횡 일가를 배향한 제왕전(齊王殿)이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전횡은 역사의 영웅으로 인식되더라도 관우처럼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수용된 것은 아니다.

참고문헌

충남 서해도서의 민속연구 (박계홍, 백제연구 4,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73)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충남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75)
도서지 (충청남도․한남대 충청문화연구소, 1997)
한국의 마을제당-충청남도 (국립민속박물관, 1998)
萬機要覽, 史記, 湖山錄, 군산 답사․여행의 길잡이 (김중규, 도서출판 나인, 2003)
외연도 동제 (황의호, 보령문화 17, 2008)
조선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충청남도문화재대관 2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9)
서해안 동제의 중국계 신격 전횡 연구 (이경엽, 도서문화 35,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010)

전횡장군

전횡장군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신격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4

정의

중국 제나라 출신의 무장으로서 서해안 외연열도에서 풍어의 신으로 모시는 인물신.

내용

역사에 전하는 전횡은 한 고조 유방(기원전 274~195)과 동시대에 활약한 중국 전국시대의 인물이다. 사마천의 『사기』 「전담열전」에 따르면 전횡은 삼형제가 평민의 신분으로 몸을 일으켜 번갈아서 제나라의 재상을 거쳐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의 호걸다운 면모는 유방에게 천하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유방이 황제로 등극하여 팽월을 양나라 왕으로 삼자 피살될 것을 두려워한 전횡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 500여 명과 함께 바다로 들어가 섬에서 살았다. 유방은 전횡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신을 보내어 회유하였으나 전횡은 끝내 이를 거부하고 사신이 낙양에 당도하기 전에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목숨을 끊는다. 유방이 그 소식을 듣고 의롭게 여겨 섬에 남아 있는 부하들을 데려오도록 하였으나 사신으로부터 전횡의 비보를 접한 500여 명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와 유사한 사연은 1936년에 건립된 외연도 「전공사당기(田公祠堂記)」에도 자세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전횡의 고사는 『사기』에 소개된 이후 천고의 미담이 되었으며, 당나라 문호 한유(韓愈)는 ‘제전횡문(祭田橫文)’을 지어 애도하였다. 또한 정몽주․정도전 등 숱한 문인들이 전횡을 추모하는 시와 글을 남겼고, 『선조실록』과 『숙종실록』 등에는 의로움의 상징적인 인물로 거론하기도 하였다. 이런 전횡을 풍어의 신으로 받드는 까닭은 외연도와의 인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서산의 사찬읍지인 『호산록』(1619)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쾌청한 날에 도비산에 올라보면 바닷길이 분명하고 해중(海中)에 위안도(蘶眼島)․오호도(嗚呼島)가 있다. 이 섬은 전횡의 제나라 지경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혹자는 이르기를 오호도는 전횡이 의사 오백 명을 인솔하고 한고조를 피하여 살던 섬이라고 한다. … 우리나라의 포은 선생께서 중국에 조회가기 위하여 바다를 건널 때 오호도에 이르러 전횡의 의리를 생각하여 한 구절의 시를 써서 이르기를 ‘오백 명의 사람들이 서로 죽고 말았으니 전횡의 높은 절의 천년에도 감동하네. 당시에 잃은 땅을 대체 무엇 때문에 책망할까. 대한(大漢)의 너그럽고 어진 정치 만민을 얻었도다’라고 하였다. 내가 천년 아래에 있어서 이 시를 외울 적마다 세 번을 감탄하면서 책상을 치지 않을 때가 없었다. 어찌 죽을 나이를 당하여 그 섬을 오늘에야 바라볼 것을 생각이나 했을까? 배를 타고 빨리 노를 저으면서 그 섬에 도착하여 오백 명 의사의 영령을 불러 위안제를 지내고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이 기록에 보이는 위안도는 ‘오얀도’로 불리는 외연도를 지칭하고, 오호도 역시 외연열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전횡도(田橫島)를 언급한 옛 문헌에는 전횡도는 홍주의 앞바다에 있으며, 일명 오호도이다. 토질이 매우 비옥하고 닥나무와 옻나무, 화살대가 난다. 둘레는 95리이고, 옛 성터가 남아 있다. 그 곁에는 작은 섬이 있으며, ‘횡건(橫巾)’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횡건은 외연도에 딸린 속칭 ‘빗갱이머금’이란 열도를 지칭한다. 비스듬히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에 ‘비껸’ 또는 ‘횡견도’로 불린다. 이처럼 전횡이 은거했다는 오호도를 외연도로 비정하려는 움직임은 일각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이러한 인식은 실제 여부와는 무관하게 고려 때부터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정몽주는 중국 사신으로 파견되어 오호도를 지나면서 전횡의 높은 절의를 찬미하는 한시를 지어 읊은 것이다. 따라서 ‘외연도=전횡도’라는 세간의 인식은 서해안 일대는 물론 의리를 중시하는 식자층을 중심으로 널리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외연도 당산에는 전횡이 놀았다고 구전되는 ‘전횡장군놀던바위’가 있다. 이는 외연도가 전횡도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자연스레 덧붙여진 지명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가 하면 전횡이 피신한 곳은 어청도로 구전되기도 한다. 전횡은 초나라의 패왕 항우가 자결하고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자 두 명의 형제와 500여 명을 거느린 채 돛단배를 타고 탈출한 지 3개월 만에 어청도에 도착했다고 한다. 전횡이 어청도를 발견한 날은 바다 위에 안개가 약간 끼어 있었는데 갑자기 푸른 산 하나가 우뚝 나타나서 군사들이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섬에 상륙하였다. 이 섬에 살게 된 전횡은 푸른 섬이라 하여 어청도(於淸島)로 지었다는 것이다. 전횡은 식량이 떨어지자 인근을 지나는 선박을 보면 쇠로 만든 부채로 바람을 일으켜서 수송선을 어청도로 대피하도록 한 다음 배를 탈취하여 생활했다고 한다. 녹도에서도 유사한 전설이 전해진다. 그렇지만 어청도와는 달리 전횡은 주민들을 구제하는 의적형(義賊型)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 즉 섬 주민들을 위해 세곡선을 쇠부채로 끌어당겨 쌀을 나누어 주고 그 배를 불살랐다고 한다. 이러한 영웅적인 모습은 전횡이 신격화된 이후에 형성된 전설일 가능성이 크지만 동시에 그것은 전횡이 외연열도에서 오랜 세월 당제의 주신으로 지속될 수 있는 토대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외연도에서 당제의 제물을 구입하러 가는 장배가 떠나면 어청도 쪽으로 마파람(남풍)이 불고, 당제를 다 모시면 하늬바람(북서풍)이 분다고 한다. 또 전횡 장군의 동생 두 명이 남쪽으로부터 왔다가 제사를 함께 즐거이 받고 나면 다시 북풍을 타고 어청도로 돌아간다는 속설이 전한다. 이 때문에 주민들 사이에서는 어청도의 당산신은 전횡 장군의 아우들이라는 이야기도 구전된다. 이는 두 섬에서 모신 전횡의 신격 사이에도 은연중에 상하의 구별이 있음을 반영하는 전설로 풀이된다. 그러나 전횡이 은거한 곳은 외연도나 어청도가 아니라 산둥반도 연안의 섬으로, 중국의 산둥성(山東省) 지모시(卽墨市) 동부 해안에 자리한 전횡도를 일컫는다. 이 섬의 위쪽에 있는 오백 장령의 무덤은 가장 유명한 역사유적이다. 후세 사람들이 전횡과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오백 열사의 충성과 의리에 감동하여 전횡도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전횡이 피신한 섬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외연도 또는 어청도로 알려진 까닭은 지리적인 위치상 산둥반도와 빈번한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방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연고성은 전횡이 신격화되는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무엇보다 전횡과 그를 따르는 무리의 의로운 죽음은 섬 주민들에 의해 해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것이고, 결국 풍어의 신으로 수용되기에 이르렀다. 외연도에서 전횡의 신격화는 늦어도 조선 전기로 거슬러 올라갈 개연성이 높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 충청수영이 위치한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건립된 「유격장군청덕비(遊擊將軍淸德碑)」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된 이 비석은 정유재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파견된 명나라 장수 계금(季金)의 업적을 기리고 바다에 나갈 때 소원을 비는 신으로 모시기 위해 1598(선조 31)에 충청수영의 군졸들이 주축이 되어 건립하였다. 비문의 요지는 계금 장군은 인자함과 청렴함, 덕성을 겸비한 장수로서 삼천의 동덕지사(同德之士)를 거느렸으니 500명의 동덕지사를 얻은 전횡과 누가 더 많고 적으냐는 것이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계금 장군의 위엄이 외연도에서 제사를 받는 전횡보다 더 효험이 있을 것이므로 영맹(獰猛)한 서해바다의 신으로 모시고 영원히 제향을 받들자는 뜻이다. 이에 따라 전횡은 이미 외연도에서 임진왜란 이전부터 당제의 주신으로 신격화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전횡은 특정 성씨에 의해 배향되고 있다. 전북 군산시에서 토성으로 널리 알려진 담양 전씨(潭陽 田氏) 후손이 그들이다. 군산의 담양 전씨는 전횡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겨 1926년에 치동묘(淄東廟)를 건립하고 제사를 지내 왔다. 최근에는 오곡리 원오곡 마을로 사당을 옮겨 치동원이라 칭하며 제향을 받들고 있다. 군산의 치동묘는 어청도 전횡사당의 당호와 동일한 것이어서 긴밀한 관련성을 암시한다. 물론 담양 전씨의 치동묘는 외연열도의 당제와는 분명 구분되는 것이지만 전횡을 조상신으로 섬기는 보기 드문 사례라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지모시 톈헝섬(田橫島)에도 전횡 일가를 배향한 제왕전(齊王殿)이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전횡은 역사의 영웅으로 인식되더라도 관우처럼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수용된 것은 아니다.

참고문헌

충남 서해도서의 민속연구 (박계홍, 백제연구 4,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73)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충남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75)도서지 (충청남도․한남대 충청문화연구소, 1997)한국의 마을제당-충청남도 (국립민속박물관, 1998)萬機要覽, 史記, 湖山錄, 군산 답사․여행의 길잡이 (김중규, 도서출판 나인, 2003)외연도 동제 (황의호, 보령문화 17, 2008)조선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충청남도문화재대관 2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9)서해안 동제의 중국계 신격 전횡 연구 (이경엽, 도서문화 35,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