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长栍)

한자명

长栍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신체

집필자 배도식(裵桃植)

정의

나무나 돌로 다듬어 만든 사람 모양의 형상물(形象物)로 마을이나 절의 들머리 또는 고개 등지에 세웠던 일종의 수호신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신령시하여 제사를 지내거나 치성을 드리는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어원

장승의 어원은 1527년 최세진이 『훈몽자회(訓蒙字會)』(중권 제9장)에서후(堠)를 설명하면서 ‘댱승 후’라 기록하였으며, 이 ‘댱승’이 ‘쟝승→장승’으로 변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장승의 한자어 표기는 장생(長生, 長栍)으로 나타나며 조선시대에는 ‘댱생’이라 발음했지만 이도 ‘댱승→쟝승→장승’으로 변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장승을 부르는 명칭에는 장생, 장성, 장싱, 장신, 벅수, 벅슈, 벅시, 후, 수살, 수살막이, 수살목 등이 있다. 명칭으로 보아 장승이 일반적인 용어이며, 한자어로는 장생(長生, 長栍)·장성(長性)·장신(長神)·장승(張丞) 등으로도 쓰고, 사투리로 장싱이라 부르는 곳도 있다. 벅수라는 말은 경상도 해안 지역과 전라도에서는 장승을 벅수, 벅슈, 벅시 등으로 부른다. 이는 법수(法首) 또는 법슈에서 온 것이 아닌가 추측되지만 확실치 않다. ‘법수’의 의미를 ‘신선’ 또는 ‘선인’으로 보는 이도 있다. 후(堠)는 옛 문헌에 장승을 표현한 글자이고, 수살·수살막이·수살목 등으로 표현한 것은 장승을 세워서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살(煞)인 나쁜 재액을 막아 준다고 여기고 붙인 말이다.

역사

일찍이 손진태는 우리나라 장승의 기원을 부족국가시대의 소도, 입석, 누석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63항)에 전남 장흥군의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보조국사 영탑비명에 ‘장생표주(長栍標柱)’라는 명문이 있음을 보아 당시에도 장생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같은 책(291항)에 양산 통도사 국장생 석표의 기록에는 손내천(孫仍川, 또는 손잉천)에 국장생(國長栍)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 울주의 상천리에도 고려시대에 세웠다는 국장생이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영암군 불우조)에도 국장생의 기록이 있다. 이들은 모두 조선시대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4, 보양리목조)에 청도 운문산선원에 장생이 있었다(943)는 기록과 운문산선원에 장생표탑(長生標塔)이 있었다(946)는 기록도 보인다.

조선 전기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권5)에 ‘김해에서 밀양으로 가는 길가에 장생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권24, 여지고 도리조)에 ‘석장생(石長栍)’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이상의 역사적인 여러 기록을 보아 신라·고려·조선시대를 막론하고 장생, 장생표주, 장생표탑, 국장생, 황장생 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각기 기능은 달랐겠지만 모두 장승이었음은 물론이다.

우리나라 여러 곳에 예부터 장승을 깎아 세우고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면서 장승제를 지내고 있는 마을이 많다. 충남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의 장승제는 은산별신제와 같이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충남 공주시 탄천면 송학리 소라실, 청양군 대치면 대치리 한티, 이화리 새점, 정산면 용두리, 천장리, 송학리 상송, 아산시 송악면 종곡리의 장승제도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몇 백 년이 되었다 전한다. 또 오래전부터 장승제를 지내오고 있기는 하지만 오래되어 역사를 잘 모르는 곳으로는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 충북 옥천군 군서면 사정리 사기점과 동이면 청마리 마티, 충남 연기군 소정면 대곡리 한적골 등이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판소리 사설가루지기타령」에 나오는 전북 함양군의 장승도 오래되었다. 함양 마천면 추성리의 벽송사에는 약 100년 된 것으로 보이는 유명한 목장승이 장승각에 보관되어 있다.

돌장승으로는 세운 연대를 알 수 없는 영암 쌍계사지 돌장승, 18세기 중엽에 세웠을 것으로 보는 나주 불회사의 돌장승과 운흥사의 돌장승도 유명하다. 1906년에 세웠다는 명문이 있는 통영의 돌벅수도 특색 있는 장승이다.

형태

장승은 얼굴, 몸통, 체근(體根, 땅에 묻히는 부분)으로 되어 있다. 얼굴은 눈이 큰 퉁방울과 우뚝 솟은 코와 크게 벌려 이빨이 모두 드러나는 입으로 만들어져 있고, 목의 구분 없이 바로 몸통으로 연결되며, 팔과 다리의 표현이 없다. 장승은 만드는 나무에 따라 허리가 굽거나 약간 기우뚱한 것이 있어 재미있게 보이기도 하지만 대개 일자형으로 바로 서 있다. 장승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얼굴 표현이다. 그 모습이 해학적이어서 우락부락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무섭게 보이면서도 다정다감하게 느껴져서 신기하고 재미가 있다.

장승은 남장승과 여장승으로 구분된다. 지역에 따라 눈·코·입을 그려 넣는 곳도 있지만 좀 잘 만드는 곳에서는 눈·코·입을 조각하고, 귀도 만들어 붙여 입체적으로 나타낸다. 머리 모양도 그려서 표현하기도 하지만 관을 쓰거나 사모를 달아내기도 하고, 여장승의 경우 비녀도 만들어 붙였다. 대표적인 것이 옥천군 사기점, 공주시 소라실 및 전북 남원시 실상사 앞의 목장승, 경남 하동군 석계초등학교 앞의 것이다. 남장승은 관모에 사모뿔이 있고, 여장승은 긴 비녀를 꽂았다. 이곳의 여장승들은 쪽머리까지 만들어져 있다. 남장승이 사모 달린 관모를 쓴 예는 많다. 연기군 소정면의 한적골,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 충북 청양군 정산면의 상송과 옥천군 동이면의 마티, 충남 아산시 송악면의 종곡리 등이 그렇다.

장승을 깎아 채색을 한 곳으로는 연기군의 한적골이 대표적이고, 얼굴 모양을 조각하기보다 그려 넣기 위주로 한 곳은 청양의 한티가 대표적이다. 반각반화의 묘미를 살린 곳은 청양의 용두리이다. 광주의 엄미리의 것은 얼굴을 입체적으로 깎고 그려 넣기도 했으며, 수염을 따로 붙이고, 배 부분을 평면으로 깎아서 천하대장군이라 써 놓았다.

장승은 대개 길 양편에 1기씩 세우거나 언덕에 나란히 남녀 한 쌍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 드물게 동서남북 네 방향에 1기씩 세우는 곳도 있다. 중부지방의 청양이나 연기, 공주의 소라실, 광주의 엄미리처럼 옛것을 뽑지 않고 세워 둔 채 새로 또 세워서 여러 기의 장승이 집단으로 서 있는 곳도 있다.

장승은 만드는 재질로 보아 나무로 깎아 세우면 나무장승(목장승)이고, 돌로 깎아 세우면 돌장승(석장승)이다. 나무장승은 주로 소나무와 밤나무를 이용했고, 돌장승은 우리나라에서 많이 나는 화강암을 많이 썼다.

기능

장승의 가장 큰 기능은 수호신의 역할이다. 마을 앞의 장승은 마을, 절 앞의 장승은 절을 각각 지키기 위해 세운 것이다. 마을이나 절에 들어올지도 모르는 나쁜 기운이나 병마·재액·호환을 방비하는 동시에 마을의 풍농과 화평, 출타한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지켜주는 것이 장승을 세우는 가장 큰 목적이었다. 수살막이 장승으로 대표적인 진도 덕병의 돌장승은 마을 어귀에서 목에 쇠뼈를 달고 살막이를 하고 있다.

절을 지키는 장승은 대개 절 들머리의 길 양쪽에 서서 마주보고 있다. 목장승이 있는 곳으로는 함양 벽송사, 순천 선암사, 양산 통도사 등이다. 또 돌장승이 서 있는 곳으로는 창녕 관룡사, 남원 실상사, 나주 운흥사와 불회사, 영암 쌍계사지 등이다.

장승은 수호신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장승의 몸체에 어디까지는 몇 리라고 써서 이정표 구실을 하기도 했다. 이를 노표(路標)장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경기도 광주시 하번내, 전남 진도군의 석현리 장승에는 거리가 표시되어 있다.

장승의 또 하나 기능은 풍수적으로 보아 지세가 허한 곳에 세워 지세를 보완하는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이를 풍수에서는 비보적(裨補的) 역할이라고 하는데, 절이나 마을에서 고려하여 세웠다. 서산시의 해미읍성에는 사방에 비보장승을 세웠다.

장승은 마을의 네 방위에 세워 방위신 역할도 했으며, 성문 앞에 세워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도 했다. 아산 종곡리에는 동방·서방·남방·북방 축귀대장군을 세워 놓았고, 청양 용두리에는 장승 하나에 ‘동서남북중앙축귀대장군’이라고 써서 모든 방위를 지키도록 했다.

내용

일반적으로 장승의 몸체 전면에 세로로 새겨지는 글자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가장 많다. 청양 새점에는 ‘동방청제축귀대장군’과 ‘서방백제축귀대장군’, 아산 종곡리에는 ‘천하축귀대장군’과 ‘지하축귀여장군’이라고 했다. 공주의 소라실에는 남장승에 ‘동방천원축귀대장군’, 여장승에 ‘서방지하축귀여장군’이라고 했다. 여기서 ‘천원(天元)’은 하늘, ‘지하(地下)’는 땅이란 뜻으로 각각 쓰였다.

경남 통영의 돌장승에는 ‘토지대장군’, 함양 벽송사 목장승에는 ‘금호장군’과 ‘호법대신’이라 했으며, 진도 덕병의 돌장승은 ‘대장군’과 ‘진살등(鎭殺嶝)’이라 썼다. 남장승에 대장군이란 이름이 붙는 예는 많지만 여장승에 진살등이란 이름이 붙는 경우는 유일하다. ‘진살등’은 살기나 재액을 눌러서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 달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전남 순천의 선암사 들머리의 목장승에는 ‘방생정계(放生定界)’와 ‘호법선신(護法善神)’이란 독특한 기록이 있다. 방생정계는 ‘매인 것들에게 자유를 베푼다’(안내 입간판의 설명), 호법선신은 불법을 보호하는 착한 신이란 뜻이다.

장승을 만들기 위해 산에 가서 나무를 벨 때 그냥 베는 것이 아니라 깍듯이 예를 갖추어야 한다. 적당한 나무가 정해지면 그 앞에 술을 한 잔 붓고 정중히 절을 한 뒤에 도끼질을 한다. 장승을 깎을 때에는 대개 솟대도 함께 깎는다. 이 작업은 대부분 정월 열나흗날에 하고, 정월대보름날 저녁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장승제를 지낸다. 푸짐하게 제수를 차리고 술도 올린 다음 절을 하고, 축문을 읽고 소지도 올린다. 장승제를 지내기 전부터 풍물패는 동네를 몇 바퀴나 돌면서 축제의 시간이 다가옴을 알리려는 듯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달이 뜨면 달집을 태우고 마을 사람들은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참조

참고문헌

조선민족문화의 연구 (손진태, 을유문화사, 1948), 장승제 (김수남 황루시, 1986), 장승 (황헌만․이종철 외, 열화당, 1988), 벅수와 장승 (김두하, 집문당, 1990), 마을신앙의 사회사 (이필영, 웅진, 1994), 전남지방 장승솟대신앙 (국립미속박물관, 1996), 풍속기행 (이형권, 고래실, 2003), 장승 (안승복, 동천당, 2008)

장승

장승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신체

집필자 배도식(裵桃植)

정의

나무나 돌로 다듬어 만든 사람 모양의 형상물(形象物)로 마을이나 절의 들머리 또는 고개 등지에 세웠던 일종의 수호신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신령시하여 제사를 지내거나 치성을 드리는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어원

장승의 어원은 1527년 최세진이 『훈몽자회(訓蒙字會)』(중권 제9장)에서후(堠)를 설명하면서 ‘댱승 후’라 기록하였으며, 이 ‘댱승’이 ‘쟝승→장승’으로 변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장승의 한자어 표기는 장생(長生, 長栍)으로 나타나며 조선시대에는 ‘댱생’이라 발음했지만 이도 ‘댱승→쟝승→장승’으로 변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장승을 부르는 명칭에는 장생, 장성, 장싱, 장신, 벅수, 벅슈, 벅시, 후, 수살, 수살막이, 수살목 등이 있다. 명칭으로 보아 장승이 일반적인 용어이며, 한자어로는 장생(長生, 長栍)·장성(長性)·장신(長神)·장승(張丞) 등으로도 쓰고, 사투리로 장싱이라 부르는 곳도 있다. 벅수라는 말은 경상도 해안 지역과 전라도에서는 장승을 벅수, 벅슈, 벅시 등으로 부른다. 이는 법수(法首) 또는 법슈에서 온 것이 아닌가 추측되지만 확실치 않다. ‘법수’의 의미를 ‘신선’ 또는 ‘선인’으로 보는 이도 있다. 후(堠)는 옛 문헌에 장승을 표현한 글자이고, 수살·수살막이·수살목 등으로 표현한 것은 장승을 세워서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살(煞)인 나쁜 재액을 막아 준다고 여기고 붙인 말이다.

역사

일찍이 손진태는 우리나라 장승의 기원을 부족국가시대의 소도, 입석, 누석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63항)에 전남 장흥군의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보조국사 영탑비명에 ‘장생표주(長栍標柱)’라는 명문이 있음을 보아 당시에도 장생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같은 책(291항)에 양산 통도사 국장생 석표의 기록에는 손내천(孫仍川, 또는 손잉천)에 국장생(國長栍)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 울주의 상천리에도 고려시대에 세웠다는 국장생이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영암군 불우조)에도 국장생의 기록이 있다. 이들은 모두 조선시대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4, 보양리목조)에 청도 운문산선원에 장생이 있었다(943)는 기록과 운문산선원에 장생표탑(長生標塔)이 있었다(946)는 기록도 보인다. 조선 전기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권5)에 ‘김해에서 밀양으로 가는 길가에 장생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권24, 여지고 도리조)에 ‘석장생(石長栍)’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이상의 역사적인 여러 기록을 보아 신라·고려·조선시대를 막론하고 장생, 장생표주, 장생표탑, 국장생, 황장생 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각기 기능은 달랐겠지만 모두 장승이었음은 물론이다. 우리나라 여러 곳에 예부터 장승을 깎아 세우고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면서 장승제를 지내고 있는 마을이 많다. 충남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의 장승제는 은산별신제와 같이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충남 공주시 탄천면 송학리 소라실, 청양군 대치면 대치리 한티, 이화리 새점, 정산면 용두리, 천장리, 송학리 상송, 아산시 송악면 종곡리의 장승제도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몇 백 년이 되었다 전한다. 또 오래전부터 장승제를 지내오고 있기는 하지만 오래되어 역사를 잘 모르는 곳으로는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 충북 옥천군 군서면 사정리 사기점과 동이면 청마리 마티, 충남 연기군 소정면 대곡리 한적골 등이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판소리 사설 「가루지기타령」에 나오는 전북 함양군의 장승도 오래되었다. 함양 마천면 추성리의 벽송사에는 약 100년 된 것으로 보이는 유명한 목장승이 장승각에 보관되어 있다. 돌장승으로는 세운 연대를 알 수 없는 영암 쌍계사지 돌장승, 18세기 중엽에 세웠을 것으로 보는 나주 불회사의 돌장승과 운흥사의 돌장승도 유명하다. 1906년에 세웠다는 명문이 있는 통영의 돌벅수도 특색 있는 장승이다.

형태

장승은 얼굴, 몸통, 체근(體根, 땅에 묻히는 부분)으로 되어 있다. 얼굴은 눈이 큰 퉁방울과 우뚝 솟은 코와 크게 벌려 이빨이 모두 드러나는 입으로 만들어져 있고, 목의 구분 없이 바로 몸통으로 연결되며, 팔과 다리의 표현이 없다. 장승은 만드는 나무에 따라 허리가 굽거나 약간 기우뚱한 것이 있어 재미있게 보이기도 하지만 대개 일자형으로 바로 서 있다. 장승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얼굴 표현이다. 그 모습이 해학적이어서 우락부락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무섭게 보이면서도 다정다감하게 느껴져서 신기하고 재미가 있다. 장승은 남장승과 여장승으로 구분된다. 지역에 따라 눈·코·입을 그려 넣는 곳도 있지만 좀 잘 만드는 곳에서는 눈·코·입을 조각하고, 귀도 만들어 붙여 입체적으로 나타낸다. 머리 모양도 그려서 표현하기도 하지만 관을 쓰거나 사모를 달아내기도 하고, 여장승의 경우 비녀도 만들어 붙였다. 대표적인 것이 옥천군 사기점, 공주시 소라실 및 전북 남원시 실상사 앞의 목장승, 경남 하동군 석계초등학교 앞의 것이다. 남장승은 관모에 사모뿔이 있고, 여장승은 긴 비녀를 꽂았다. 이곳의 여장승들은 쪽머리까지 만들어져 있다. 남장승이 사모 달린 관모를 쓴 예는 많다. 연기군 소정면의 한적골,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 충북 청양군 정산면의 상송과 옥천군 동이면의 마티, 충남 아산시 송악면의 종곡리 등이 그렇다. 장승을 깎아 채색을 한 곳으로는 연기군의 한적골이 대표적이고, 얼굴 모양을 조각하기보다 그려 넣기 위주로 한 곳은 청양의 한티가 대표적이다. 반각반화의 묘미를 살린 곳은 청양의 용두리이다. 광주의 엄미리의 것은 얼굴을 입체적으로 깎고 그려 넣기도 했으며, 수염을 따로 붙이고, 배 부분을 평면으로 깎아서 천하대장군이라 써 놓았다. 장승은 대개 길 양편에 1기씩 세우거나 언덕에 나란히 남녀 한 쌍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 드물게 동서남북 네 방향에 1기씩 세우는 곳도 있다. 중부지방의 청양이나 연기, 공주의 소라실, 광주의 엄미리처럼 옛것을 뽑지 않고 세워 둔 채 새로 또 세워서 여러 기의 장승이 집단으로 서 있는 곳도 있다. 장승은 만드는 재질로 보아 나무로 깎아 세우면 나무장승(목장승)이고, 돌로 깎아 세우면 돌장승(석장승)이다. 나무장승은 주로 소나무와 밤나무를 이용했고, 돌장승은 우리나라에서 많이 나는 화강암을 많이 썼다.

기능

장승의 가장 큰 기능은 수호신의 역할이다. 마을 앞의 장승은 마을, 절 앞의 장승은 절을 각각 지키기 위해 세운 것이다. 마을이나 절에 들어올지도 모르는 나쁜 기운이나 병마·재액·호환을 방비하는 동시에 마을의 풍농과 화평, 출타한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지켜주는 것이 장승을 세우는 가장 큰 목적이었다. 수살막이 장승으로 대표적인 진도 덕병의 돌장승은 마을 어귀에서 목에 쇠뼈를 달고 살막이를 하고 있다. 절을 지키는 장승은 대개 절 들머리의 길 양쪽에 서서 마주보고 있다. 목장승이 있는 곳으로는 함양 벽송사, 순천 선암사, 양산 통도사 등이다. 또 돌장승이 서 있는 곳으로는 창녕 관룡사, 남원 실상사, 나주 운흥사와 불회사, 영암 쌍계사지 등이다. 장승은 수호신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장승의 몸체에 어디까지는 몇 리라고 써서 이정표 구실을 하기도 했다. 이를 노표(路標)장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경기도 광주시 하번내, 전남 진도군의 석현리 장승에는 거리가 표시되어 있다. 장승의 또 하나 기능은 풍수적으로 보아 지세가 허한 곳에 세워 지세를 보완하는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이를 풍수에서는 비보적(裨補的) 역할이라고 하는데, 절이나 마을에서 고려하여 세웠다. 서산시의 해미읍성에는 사방에 비보장승을 세웠다. 장승은 마을의 네 방위에 세워 방위신 역할도 했으며, 성문 앞에 세워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도 했다. 아산 종곡리에는 동방·서방·남방·북방 축귀대장군을 세워 놓았고, 청양 용두리에는 장승 하나에 ‘동서남북중앙축귀대장군’이라고 써서 모든 방위를 지키도록 했다.

내용

일반적으로 장승의 몸체 전면에 세로로 새겨지는 글자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가장 많다. 청양 새점에는 ‘동방청제축귀대장군’과 ‘서방백제축귀대장군’, 아산 종곡리에는 ‘천하축귀대장군’과 ‘지하축귀여장군’이라고 했다. 공주의 소라실에는 남장승에 ‘동방천원축귀대장군’, 여장승에 ‘서방지하축귀여장군’이라고 했다. 여기서 ‘천원(天元)’은 하늘, ‘지하(地下)’는 땅이란 뜻으로 각각 쓰였다. 경남 통영의 돌장승에는 ‘토지대장군’, 함양 벽송사 목장승에는 ‘금호장군’과 ‘호법대신’이라 했으며, 진도 덕병의 돌장승은 ‘대장군’과 ‘진살등(鎭殺嶝)’이라 썼다. 남장승에 대장군이란 이름이 붙는 예는 많지만 여장승에 진살등이란 이름이 붙는 경우는 유일하다. ‘진살등’은 살기나 재액을 눌러서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 달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전남 순천의 선암사 들머리의 목장승에는 ‘방생정계(放生定界)’와 ‘호법선신(護法善神)’이란 독특한 기록이 있다. 방생정계는 ‘매인 것들에게 자유를 베푼다’(안내 입간판의 설명), 호법선신은 불법을 보호하는 착한 신이란 뜻이다. 장승을 만들기 위해 산에 가서 나무를 벨 때 그냥 베는 것이 아니라 깍듯이 예를 갖추어야 한다. 적당한 나무가 정해지면 그 앞에 술을 한 잔 붓고 정중히 절을 한 뒤에 도끼질을 한다. 장승을 깎을 때에는 대개 솟대도 함께 깎는다. 이 작업은 대부분 정월 열나흗날에 하고, 정월대보름날 저녁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장승제를 지낸다. 푸짐하게 제수를 차리고 술도 올린 다음 절을 하고, 축문을 읽고 소지도 올린다. 장승제를 지내기 전부터 풍물패는 동네를 몇 바퀴나 돌면서 축제의 시간이 다가옴을 알리려는 듯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달이 뜨면 달집을 태우고 마을 사람들은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참조

장승제

참고문헌

조선민족문화의 연구 (손진태, 을유문화사, 1948)장승제 (김수남 황루시, 1986)장승 (황헌만․이종철 외, 열화당, 1988)벅수와 장승 (김두하, 집문당, 1990)마을신앙의 사회사 (이필영, 웅진, 1994)전남지방 장승솟대신앙 (국립미속박물관, 1996)풍속기행 (이형권, 고래실, 2003)장승 (안승복, 동천당,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