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사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가정신앙 > 제의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8

정의

고기를 잡기 위해 설치한 독살이나 어살[漁箭]에 고기가 많이 들기를 기원하는 어로신앙의 하나. 살고사는 살의 종류와 대상신의 신격에 따라 독살고사, 함정고사, 유왕고사, 참봉고사, 덤장고사 등으로 불린다.

역사

살고사의 역사를 기록을 통해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어살을 놓아 고기를 잡는 방식이 가장 원시적인 어로기술의 하나임을 상기할 때 살고사는 어살의 역사와 더불어 유래된 어로신앙의 하나로 이해된다.

어살은 조수간만의 차이를 이용한 대표적인 어법이다. 조류를 따라 내유하는 조기, 청어, 민어, 갈치, 숭어, 대하, 전어 등 거의 모든 어족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어살은 충청도를 비롯하여 경기도, 전라도, 황해도 등의 서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한 곳에 집중적으로 분포했으며, 이는 지난날 살고사의 전승지역과 일치한다.

어살은 처음에 하천에서 시작되었다. 즉 하천을 토석, 대나무, 싸리나무 등으로 가로막고 그 일부만 틔어 물이 흐르게 한 다음 그곳에 발이나 통발을 설치하여 물의 흐름에 따라 내려오는 고기를 잡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금강의 중하류인 백마강 연안에서는 마을마다 으레 한두 곳에 살을 설치하는 ‘살자리’가 있었다. 주로 강폭이 좁고 물살이 빠른 여울목에 살을 놓은 뒤 고기가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포획하는 방식이다. 백마강에서 특산물로 유명한 숭어를 낚는데 이용되었다. 근래까지도 살자리에는 관의 입찰을 거쳐 ‘전취특권(全取特權)’을 획득한 ‘살주’만이 어살을 놓을 권리가 부여되었다.

하천에서 유래된 어살은 바다에서 발을 설치하는 해면어량어법으로 발전하였고, 이미 고려시대에도 중요한 어로방법의 하나였다. 규모가 큰 어살은 주로 권문세가에 의하여 장악되었다. 국가에서도 왕자에게는 어살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궁원(宮院)이나 불사의 소유 대상이었다. 이는 어살어업이 많은 수익을 냈음을 방증 한다. 어살은 조선시대에도 널리 성행한 어법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빈민에게 사용수익권을 주고 삼 년마다 교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서해안 일대의 어살과 어족 현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충청도지역의 경우 태안이 46곳으로 가장 많다. 그 다음으로 홍주 33곳, 서천 17곳, 서산 10곳 등으로 나타난다.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는 가로림만과 천수만을 끼고 있는 태안, 홍주, 서산을 비롯하여 비인만 주변의 서천 등지는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해 어살의 입지조건으로 매우 유리하였다.

어살의 일종인 독살은 어살과 동일한 원리로 바다 쪽을 향해 말굽(U) 모양으로 쌓은 함정어구(陷穽漁具, Trap)이다. 즉 밀물과 함께 바닷가로 밀려온 어류들은 썰물 때 자연스레 돌담 가운데의 ‘불뚝’에 갇히게 되고, 살주는 독 안에 든 고기를 건져 올리는 단순한 어법이다. 살을 설치하는 재료가 돌인 까닭에 충청도 방언으로 ‘돌로 막은 살’이란 뜻의 ‘독살’로 불린다. 남해안지역에서는 ‘돌발’, 제주도지역에서는 ‘원’이라고 한다.

독살은 주로 충청남도 서해안에서 나타난다. 이 밖에 전라도, 경기도, 평안도, 황해도, 제주도 등에서 전승되던 어법이다. 그러나 경기도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사라졌고, 대나무가 풍부한 전라도는 일찍부터 대를 이용한 어살이 발달하여 상대적으로 미미한 편이었다. 반면에 용암이 흔한 제주도지역에서는 독살이 이루어질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독살이 집중적으로 분포한 곳은 충남 서해안과 제주도라고 할 수 있다.

어살이나 독살은 지난날 어촌에서 널리 이용된 전래어법이었고, 갯가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이때문에 살을 소유한 주인은 고기가 많이 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정기적인 의례를 베풀었다. 그것이 바로 살고사이다.

내용

충남 서해안 일대에서 남아 있던 어살과 독살은 소유권이 있는 살주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에 따라 살고사는 전적으로 살주가 제수를 준비하여 고사를 지내는 것이 관례였다. 절차는 독살이나 어살의 정면에 제물을 차린 뒤 어로를 관장한다고 여겨지는 용왕이나 물참봉(도깨비)에게 간단하게 비손을 한다. 그리고 희식을 한다. 희식은 살고사에 올린 제물을 사방에 뿌리며 고기가 많이 들기를 기원하는 의식이다. 규모가 큰 덤장고사의 경우 단골을 부르고 푸짐하게 제수를 준비하여 지내기도 했다.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개미목에는 무려 24개의 독살이 있었다. 모두 개인이 소유한 것이었다. 이들 독살은 집안마다 대물림을 하면서 누대를 이어오다가 1960년대 이후 어족자원이 고갈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독살은 사람을 사서 고기를 잡거나 이웃의 도움을 받아 운영하면서 서로 고기를 나누는 관행도 있었다. 독살의 주인은 매년 정초에 수문 앞에 떡, 과일, 포 등을 차려 놓고 고기가 많이 들기를 비는 독살고사를 지냈다. 대상 신은 용왕과 물참봉(도깨비)이었다.

비인만 일대의 서천군 비인면 장포리와 서면 도둔리․마량리를 비롯해 보령군 오천면의 원산도․효자도․장고도, 태안군 근흥면의 신진도․마도 등지에는 각각 여러 개의 독살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육지와 연륙된 신진도와 마도의 독살이 서해안 최대의 독살로 손꼽힌다. 이들 독살 역시 모두 개인이 운영했다. 마을 사람들은 독살을 쌓는 것을 돕는 대신 반찬거리를 얻었다. 독살이 한창일 때는 농어․조기․갈치․멸치․주꾸미․숭어 같은 어종이 들었다. 이들 어종은 지게로 퍼 날랐다. 회유성 어족이 사라지고부터는 숭어같이 고작 근해에 사는 고기만 잡다가 근래에 독살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매년 정초가 되면 독살에 ‘함정고사’ 또는 ‘유왕고사’로도 불리는 살고사를 지냈다. 물참봉을 달래는 고사이다. 물참봉은 도깨비를 뜻한다. 이때 독살의 주인은 수문 바로 앞에 떡, 과일, 포 등을 차려놓고 고기가 많이 들기를 기원했다.

가로림만을 끼고 있는 서산시 팔봉면 일대의 포구마을에서는 1960년대만 해도 뱅어로 널리 알려진 실치잡이가 성업을 이루었다. 실치가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한 고파도, 우도 등지에서는 중선으로 조업을 하였다. 이들 연안에 위치한 호리, 어송리, 덕송리 등지에서는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곳에 살을 설치하여 실치를 잡았다. 실치잡이 어살은 큰살과 온둘살 두 가지가 있었다. 큰살은 ‘살자리’를 소유한 개인이 매는 살이었다. 온둘살은 몇 집이 공동으로 살을 엮어서 설치했다.

살고사는 주로 큰살을 소유한 살주만 지냈다. 실치잡이가 시작되는 매년 음력 3월에 정기적인 의례를 베풀었다. 고기가 잘 잡히지 않을 때는 별도의 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제일은 조수가 점점 불어나는 서무날이나 열무날이었다. 바닷물이 빠지는 낮에 제물을 지게에 짊어지고 살을 매어 놓은 곳으로 간다. 그리고 고기가 들어오는 살통 안에 범벅과 술, 떡 등 제물을 차린다. 절차는 무릎을 꿇고 재배한 다음 고사를 지낸 제물을 살통 사방에 뿌리며 희식을 한다. 이때 살주는 “물 위 참봉 물 아래 참봉 / 오는 재물 가는 재물 / 전부 우리 살로 들어오게 해 주십시오.”라고 축원을 한다. 고사를 지낸 술과 음식은 살을 매는 데 도움을 준 이웃과 나누어 먹는다.

서천군 서면 마량리에서는 덤장고사를 지냈다. 덤장은 말장(긴 장대)을 박고 새끼줄을 촘촘하게 엮은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는 어살의 일종이다. 곡우 이전에 덤장을 매어 음력 6월까지 조업을 하였다. 예전에는 갈치, 민어, 뱅어 등을 많이 잡았다. 정기적인 고사는 섣달그믐날에 이루어졌다. 해마다 봄에 덤장을 매거나 간혹 고기가 잘 잡히지 않을 때에는 길일을 택하여 고사를 지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고사는 덤장을 처음 맬 때이다. 덤장의 주인은 돼지머리, 제숙(덤장에서 잡은 고기), 명태, 삼색실과, 술 등을 갖추어서 일꾼들과 배를 타고 덤장으로 나아가 뱃머리에 제수를 차려서 고사를 지낸다. 이때 부잣집은 단골을 불러서 비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덤장의 주인은 간단하게 떡, 제숙, 명태, 범벅, 술을 놓고 고사를 지낸다. 제물은 모두 세 그릇씩을 차린다. 이는 각각 중서낭, 남서낭, 여서낭의 몫이다. 제물을 차린 뒤에는 재배를 한다. 이어서 “비늘 크고 꼬리 크고 머리 큰 고기를 많이 잡도록 해 주십시오. 물 묻은 박쪽에 깨 들러붙듯이 많이 잡게 해주십시오.”라고 축원한다. 범벅을 제외한 제물은 조금씩 떼어내 그릇에 담아 사방에 던진다. 이때 “이 놈을 잡수시고 벌이를 많이 하게 해 주십사.” 하고 기원을 한다. 희식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온다.

독살과 어살은 서해안의 지리적 특성을 충분히 활용한 슬기로운 어법이다. 어살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여 바다를 섬기고 의지하며 살아온 어민들에게 내린 마르지 않는 어류의 곳간이었다. 이러한 전래어법은 20세기 이후에 급속히 사라져 갔다. 어족자원의 고갈과 환경오염, 동력선 등장 등으로 더 이상 고기가 들지 않는 탓이다. 어살의 소멸은 1970년대 이후에 가속화되었다.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간석지 개발과 무차별한 저인망식 어획 등 급속한 어업환경의 변화는 연안에 의지하여 고기를 잡는 전래어법이 지속될 수 있는 토양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이와 더불어 독살과 어살에서 이루어진 소박한 살고사의 전통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참고문헌

현지조사(임기항, 남, 1936년생, 충남 서산시 팔봉면 호리, 윤덕용, 남, 1931년생, 충남 서천군 마령리)면담자료
湖山錄, 世宗實錄地理志, 서해안 독살보고서 (주강현, 주강현의 우리문화 기행, 해냄, 1997)
충남 서해안의 독살 분포와 특징 (주강현, 고고와 민속 1, 한남대학교박물관, 1998)
태안 개미목마을 (충남대학교 마을연구단, 대원사, 2006)
한국의 가정신앙-충청남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6)
충남 서해안의 어로민속 (강성복, 충남의 민속문화, 충남․국립민속박물관, 2010)

살고사

살고사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가정신앙 > 제의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8

정의

고기를 잡기 위해 설치한 독살이나 어살[漁箭]에 고기가 많이 들기를 기원하는 어로신앙의 하나. 살고사는 살의 종류와 대상신의 신격에 따라 독살고사, 함정고사, 유왕고사, 참봉고사, 덤장고사 등으로 불린다.

역사

살고사의 역사를 기록을 통해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어살을 놓아 고기를 잡는 방식이 가장 원시적인 어로기술의 하나임을 상기할 때 살고사는 어살의 역사와 더불어 유래된 어로신앙의 하나로 이해된다. 어살은 조수간만의 차이를 이용한 대표적인 어법이다. 조류를 따라 내유하는 조기, 청어, 민어, 갈치, 숭어, 대하, 전어 등 거의 모든 어족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어살은 충청도를 비롯하여 경기도, 전라도, 황해도 등의 서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한 곳에 집중적으로 분포했으며, 이는 지난날 살고사의 전승지역과 일치한다. 어살은 처음에 하천에서 시작되었다. 즉 하천을 토석, 대나무, 싸리나무 등으로 가로막고 그 일부만 틔어 물이 흐르게 한 다음 그곳에 발이나 통발을 설치하여 물의 흐름에 따라 내려오는 고기를 잡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금강의 중하류인 백마강 연안에서는 마을마다 으레 한두 곳에 살을 설치하는 ‘살자리’가 있었다. 주로 강폭이 좁고 물살이 빠른 여울목에 살을 놓은 뒤 고기가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포획하는 방식이다. 백마강에서 특산물로 유명한 숭어를 낚는데 이용되었다. 근래까지도 살자리에는 관의 입찰을 거쳐 ‘전취특권(全取特權)’을 획득한 ‘살주’만이 어살을 놓을 권리가 부여되었다. 하천에서 유래된 어살은 바다에서 발을 설치하는 해면어량어법으로 발전하였고, 이미 고려시대에도 중요한 어로방법의 하나였다. 규모가 큰 어살은 주로 권문세가에 의하여 장악되었다. 국가에서도 왕자에게는 어살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궁원(宮院)이나 불사의 소유 대상이었다. 이는 어살어업이 많은 수익을 냈음을 방증 한다. 어살은 조선시대에도 널리 성행한 어법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빈민에게 사용수익권을 주고 삼 년마다 교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서해안 일대의 어살과 어족 현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충청도지역의 경우 태안이 46곳으로 가장 많다. 그 다음으로 홍주 33곳, 서천 17곳, 서산 10곳 등으로 나타난다.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는 가로림만과 천수만을 끼고 있는 태안, 홍주, 서산을 비롯하여 비인만 주변의 서천 등지는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해 어살의 입지조건으로 매우 유리하였다. 어살의 일종인 독살은 어살과 동일한 원리로 바다 쪽을 향해 말굽(U) 모양으로 쌓은 함정어구(陷穽漁具, Trap)이다. 즉 밀물과 함께 바닷가로 밀려온 어류들은 썰물 때 자연스레 돌담 가운데의 ‘불뚝’에 갇히게 되고, 살주는 독 안에 든 고기를 건져 올리는 단순한 어법이다. 살을 설치하는 재료가 돌인 까닭에 충청도 방언으로 ‘돌로 막은 살’이란 뜻의 ‘독살’로 불린다. 남해안지역에서는 ‘돌발’, 제주도지역에서는 ‘원’이라고 한다. 독살은 주로 충청남도 서해안에서 나타난다. 이 밖에 전라도, 경기도, 평안도, 황해도, 제주도 등에서 전승되던 어법이다. 그러나 경기도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사라졌고, 대나무가 풍부한 전라도는 일찍부터 대를 이용한 어살이 발달하여 상대적으로 미미한 편이었다. 반면에 용암이 흔한 제주도지역에서는 독살이 이루어질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독살이 집중적으로 분포한 곳은 충남 서해안과 제주도라고 할 수 있다. 어살이나 독살은 지난날 어촌에서 널리 이용된 전래어법이었고, 갯가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이때문에 살을 소유한 주인은 고기가 많이 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정기적인 의례를 베풀었다. 그것이 바로 살고사이다.

내용

충남 서해안 일대에서 남아 있던 어살과 독살은 소유권이 있는 살주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에 따라 살고사는 전적으로 살주가 제수를 준비하여 고사를 지내는 것이 관례였다. 절차는 독살이나 어살의 정면에 제물을 차린 뒤 어로를 관장한다고 여겨지는 용왕이나 물참봉(도깨비)에게 간단하게 비손을 한다. 그리고 희식을 한다. 희식은 살고사에 올린 제물을 사방에 뿌리며 고기가 많이 들기를 기원하는 의식이다. 규모가 큰 덤장고사의 경우 단골을 부르고 푸짐하게 제수를 준비하여 지내기도 했다.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개미목에는 무려 24개의 독살이 있었다. 모두 개인이 소유한 것이었다. 이들 독살은 집안마다 대물림을 하면서 누대를 이어오다가 1960년대 이후 어족자원이 고갈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독살은 사람을 사서 고기를 잡거나 이웃의 도움을 받아 운영하면서 서로 고기를 나누는 관행도 있었다. 독살의 주인은 매년 정초에 수문 앞에 떡, 과일, 포 등을 차려 놓고 고기가 많이 들기를 비는 독살고사를 지냈다. 대상 신은 용왕과 물참봉(도깨비)이었다. 비인만 일대의 서천군 비인면 장포리와 서면 도둔리․마량리를 비롯해 보령군 오천면의 원산도․효자도․장고도, 태안군 근흥면의 신진도․마도 등지에는 각각 여러 개의 독살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육지와 연륙된 신진도와 마도의 독살이 서해안 최대의 독살로 손꼽힌다. 이들 독살 역시 모두 개인이 운영했다. 마을 사람들은 독살을 쌓는 것을 돕는 대신 반찬거리를 얻었다. 독살이 한창일 때는 농어․조기․갈치․멸치․주꾸미․숭어 같은 어종이 들었다. 이들 어종은 지게로 퍼 날랐다. 회유성 어족이 사라지고부터는 숭어같이 고작 근해에 사는 고기만 잡다가 근래에 독살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매년 정초가 되면 독살에 ‘함정고사’ 또는 ‘유왕고사’로도 불리는 살고사를 지냈다. 물참봉을 달래는 고사이다. 물참봉은 도깨비를 뜻한다. 이때 독살의 주인은 수문 바로 앞에 떡, 과일, 포 등을 차려놓고 고기가 많이 들기를 기원했다. 가로림만을 끼고 있는 서산시 팔봉면 일대의 포구마을에서는 1960년대만 해도 뱅어로 널리 알려진 실치잡이가 성업을 이루었다. 실치가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한 고파도, 우도 등지에서는 중선으로 조업을 하였다. 이들 연안에 위치한 호리, 어송리, 덕송리 등지에서는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곳에 살을 설치하여 실치를 잡았다. 실치잡이 어살은 큰살과 온둘살 두 가지가 있었다. 큰살은 ‘살자리’를 소유한 개인이 매는 살이었다. 온둘살은 몇 집이 공동으로 살을 엮어서 설치했다. 살고사는 주로 큰살을 소유한 살주만 지냈다. 실치잡이가 시작되는 매년 음력 3월에 정기적인 의례를 베풀었다. 고기가 잘 잡히지 않을 때는 별도의 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제일은 조수가 점점 불어나는 서무날이나 열무날이었다. 바닷물이 빠지는 낮에 제물을 지게에 짊어지고 살을 매어 놓은 곳으로 간다. 그리고 고기가 들어오는 살통 안에 범벅과 술, 떡 등 제물을 차린다. 절차는 무릎을 꿇고 재배한 다음 고사를 지낸 제물을 살통 사방에 뿌리며 희식을 한다. 이때 살주는 “물 위 참봉 물 아래 참봉 / 오는 재물 가는 재물 / 전부 우리 살로 들어오게 해 주십시오.”라고 축원을 한다. 고사를 지낸 술과 음식은 살을 매는 데 도움을 준 이웃과 나누어 먹는다. 서천군 서면 마량리에서는 덤장고사를 지냈다. 덤장은 말장(긴 장대)을 박고 새끼줄을 촘촘하게 엮은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는 어살의 일종이다. 곡우 이전에 덤장을 매어 음력 6월까지 조업을 하였다. 예전에는 갈치, 민어, 뱅어 등을 많이 잡았다. 정기적인 고사는 섣달그믐날에 이루어졌다. 해마다 봄에 덤장을 매거나 간혹 고기가 잘 잡히지 않을 때에는 길일을 택하여 고사를 지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고사는 덤장을 처음 맬 때이다. 덤장의 주인은 돼지머리, 제숙(덤장에서 잡은 고기), 명태, 삼색실과, 술 등을 갖추어서 일꾼들과 배를 타고 덤장으로 나아가 뱃머리에 제수를 차려서 고사를 지낸다. 이때 부잣집은 단골을 불러서 비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덤장의 주인은 간단하게 떡, 제숙, 명태, 범벅, 술을 놓고 고사를 지낸다. 제물은 모두 세 그릇씩을 차린다. 이는 각각 중서낭, 남서낭, 여서낭의 몫이다. 제물을 차린 뒤에는 재배를 한다. 이어서 “비늘 크고 꼬리 크고 머리 큰 고기를 많이 잡도록 해 주십시오. 물 묻은 박쪽에 깨 들러붙듯이 많이 잡게 해주십시오.”라고 축원한다. 범벅을 제외한 제물은 조금씩 떼어내 그릇에 담아 사방에 던진다. 이때 “이 놈을 잡수시고 벌이를 많이 하게 해 주십사.” 하고 기원을 한다. 희식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온다. 독살과 어살은 서해안의 지리적 특성을 충분히 활용한 슬기로운 어법이다. 어살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여 바다를 섬기고 의지하며 살아온 어민들에게 내린 마르지 않는 어류의 곳간이었다. 이러한 전래어법은 20세기 이후에 급속히 사라져 갔다. 어족자원의 고갈과 환경오염, 동력선 등장 등으로 더 이상 고기가 들지 않는 탓이다. 어살의 소멸은 1970년대 이후에 가속화되었다.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간석지 개발과 무차별한 저인망식 어획 등 급속한 어업환경의 변화는 연안에 의지하여 고기를 잡는 전래어법이 지속될 수 있는 토양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이와 더불어 독살과 어살에서 이루어진 소박한 살고사의 전통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참고문헌

현지조사(임기항, 남, 1936년생, 충남 서산시 팔봉면 호리, 윤덕용, 남, 1931년생, 충남 서천군 마령리)면담자료湖山錄, 世宗實錄地理志, 서해안 독살보고서 (주강현, 주강현의 우리문화 기행, 해냄, 1997)충남 서해안의 독살 분포와 특징 (주강현, 고고와 민속 1, 한남대학교박물관, 1998)태안 개미목마을 (충남대학교 마을연구단, 대원사, 2006)한국의 가정신앙-충청남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6)충남 서해안의 어로민속 (강성복, 충남의 민속문화, 충남․국립민속박물관,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