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포사마을산신제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의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3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봉정리 포사마을에서 해마다 정월대보름날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례.

역사

포사마을산신제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는 산신제를 마치고 열리는 대동회의 결산내역을 정리한 동계장부이다. 이 문서에는 매년 산신제를 지낸 유사의 명단, 제수품목,지출비용, 돈을 대여해 준 분급기 등이 110여 년 동안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가장 이른 시기는 1888년 1월 15일에 작성된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그해 상유사(上有司) 전동석과 하유사(下有司) 백순기·이상손이 산신제를 지냈다. 또 제수기 물목은 고리짝[稿梩], 체[篩子], 시루[甑], 술동이[盆] 두 개, 탕관(湯灌), 사기(沙器) 두 개, 삼색실과, 명태 다섯 마리, 백미 두 말, 등유, 백염(白塩), 황육(黃肉), 누룩[曲子] 등으로 기록되었다. 아울러 분급질(分給秩)이라 하여 동계의 기금을 일곱 명에게 대여해주고 식리(殖利, 재물을 불리어 이익을 늘림)한 내역이 담겨 있다.

포사마을 동계장부는 1888년 이전부터 매년 작성된 것이지만 문서의 표제와 앞선 기록이 빠져 있어 정확한 연대는 파악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 문서로 미루어 볼 때 늦어도포사마을산신제는 조선 후기 이래 면면이 이어져 온 동제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오랜 전통을 계승할 수 있었던 배경은 마을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남양 전씨(南陽 田氏)의 산신제에 대한 믿음이 무엇보다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있다. 즉 봉정리는 500여 년 전에 남양 전씨가 세거한 이래 그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저명한 종족마을로뿌리를 내렸고, 산신제는 줄곧 남양 전씨의 적극적인 참여와 주도 아래 제향이 이루어져 왔다.

포사마을산신제는 최근 들어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대거 도시로 빠져나가면서 마을의 공동화 현상이 심화된 데다 기독교인의 증가로 인해 산신에 대한 신앙관념이 크게 흔들리게 된 것이다. 게다가 산신제의 금기가 매우 엄격하여 서로 제관으로 선정되는 것을 꺼리는 풍조도 은연중에 만연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6년에는 곤향산 산신제 운영위원회가 조직되어 산제당을 건립하고, 제의 절차도 홀기에 의한 제향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제의 시간도 자시(子時)에서 오전으로 변경하여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행사에 참석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변화는 산신제를 정월대보름 축제로 승화시켜 많은 주민의 동참과 단합을 끌어내기 위한 고육지책의산물이기도 하다.

내용

포사마을산신제는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산신령의 가호로 재앙을 막고,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빌어 풍요롭게 잘살자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와 더불어 산신제를 지내는 뜻은 성이 다른 사람들이 한 마을에 모여 살면서 서로 양보하고 화합하며 좋은 일은 권장하라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 잘못한 일은 깨우쳐 주고, 어려운 일은 도우며,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경하여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평화롭고 행복한 마을을 이루고자 함이다.

산제당은 마을 뒤편 곤향산 아래에 위치한다. 본래 산제당에는 수백 년 된 참나무 한 그루가 신목으로 치성을 받았으나 1950~1960년에 고사되었다. 예전에는 그 나무 밑에 광목을 떠다가 임시로 포장을 치고 제를 지내다가 최근에 조립식으로 제당을 건립했다. 산신제에 필요한 경비는 마을 주민들로부터 갹출한 돈으로 충당한다. 즉 그해 산신제의 유사로 지명된 사람이 정초에 가가호호를 방문하면 각자 성의껏 쌀이나 돈을 희사한다. 이러한 관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교회가 들어오면서 기독교를 믿는 가정은 산신제에 불참한다. 제관은 매년 음력 섣달 말쯤 산신제 운영위원회에서 주모(主母), 제관, 축관 각 한 명을 지명하되 부정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닿는가의여부를 따져서 임명한다. 음식을 준비하는 주모는 산제 기간에 집안에 임산부가 있거나 상중(喪中)인 사람은 제외한다. 또한 폐경기를 지나 생식 능력이 없는 부지런하고 깔끔한 부인이나 과부여야 한다. 제관 역시 초상이나 임산부가 없는 가정에서 학덕이 높고 운이 좋은 성인남자를 대상으로 하며, 축관은 동일한 조건을 갖추었으면서도 한학에 능한 사람으로 뽑는다. 이에 반해 유사는 일명 ‘굴뚝돌림’이라 하여 지난해 유사의 집 굴뚝과 가장 가깝게 보이는 사람 중에서 부정하지 않은 남자 두 명을 산신제를 마친 뒤결산하는 자리에서 미리 정해 준다. 예전에는 산신제의 봉사자(奉祀者)로 한 번 지명을 당하면 산신의 벌이 무서워 아무도 거절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주무자로 지명된 사람들은 정월 초하루부터 산신제가 끝나는 날까지 부정한 것이 눈에 띄지 않도록 외출을 삼간다. 아울러 상가나 출산한 집은 절대로 가지 않으며, 길에서 상복을 입은 사람을 만나면 외면하고 말도 걸지 않아야 한다. 특히 주모와 제관은 더욱 엄격한 금기가 수반되어 비린 음식을 일절 입에 대지 않고 육식을 하지 않는다. 이뿐만 아니라 대문 앞에 금줄을 치고 깨끗한 황토를 좌우로 세 무더기씩 놓아 부정한 사람의 접근을 막는다. 제물을 구입하러 갈 때에도 궂은일을 피해 새벽 일찍 장으로 가서 물건을 사되 물건 값을 깎지 않고 달라는 대로 주고 가능한 한 빨리 돌아온다. 제수를 준비할 우물은 따로 한 곳을 지정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리하여 섣달그믐날 깨끗이 우물을 품고 주위에 금줄을 드리우면 주모외에 누구도 사용할 수 없다. 주모의 집은 그 가족과 제관 외에는 방문이 금지된다. 마을 사람들도 산신제가 임박하면 살생을 하지 않으며, 특히 정월 열나흗날에는 모든 사람이 목욕재계하고 하루 동안 육식을 금한다. 심지어 새우젓이 들어간 김치도 먹지 않는다. 이 밖에 마을에서 정해 놓은 제관의 역할과 임무는 다음과 같다.

  1. 주모 : 정월 초하룻날부터 방 하나를 깨끗이 치운다. 그 방은 식구도 들어가는 것을 금하고 주모만 사용한다. 남편이 있는 사람은 각방을 사용하고, 설날부터 산제가 끝날때까지 매일 찬물로 목욕재계한다. 주모는 정월 초이렛날 제주를 담근 뒤 아침저녁으로 지정된 우물에서 정화수를 길어 제주단지 앞에 떠 놓고 하루 두 차례씩 사배(四拜)를 드린다. 정월 열나흗날 모든 제수품을 장만하여 산제당으로 보내면 주모의 임무가 끝난다.

  2. 제관 : 외출을 삼가고 부인과 각방을 써야 한다. 산신제 일주일 전부터 매일 찬물로 목욕재계한다. 열나흗날 밤에는 의관을 정제하고 산신제의 헌관이 된다. 또한 각 세대주의 이름이 적힌 소지를 올린다. 이때 해당자의 주소와 성명을 고한 다음 그 가정의 형편에 맞는 덕담으로 축원을 해 준다. 소지를 신청한 사람을 모두 올려야 한다.

  3. 축관·유사 : 축관은 외출을 삼가고 정성껏 축을 닦는다. 열나흗날에는 찬물로 목욕재계하고, 산신제 당일 제관이 술을 올릴 때마다 축을 읽는다. 모두 세 번 읽고 또 산신제의 모든 의전을 담당한다. 유사는 산신제 기간에 외출을 삼가고, 정초에 집집마다 방문하여 산신제 경비를 추렴한다. 소지 올릴 대상자를 조사하는 한편 산신제에 필요한 모든 물품 구입과 잡일, 제당 청소 및 제단 준비 등을 맡는다. 산신제 때 제물을 진설하고, 소지가 잘못 올라간 사람은 기록하였다가 산신제가 끝난 다음날 개인에게 일러 주어일 년 동안 몸조심하도록 해야 한다. 보름날 아침 음복을 총괄하고, 운영위원회에 결산보고를 한다.

포사마을산신제는 정월대보름 오전 10시쯤에 거행된다. 본래는 정월 열나흗날 자정(정월대보름 자시)에 치제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으나 산신제를 주관하는 주민들이 연로한데다 기왕이면 모든 주민이 함께하자는 여론에 따라 대보름 오전으로 날짜를 옮기게 되었다. 당일 아침이 되면 산신제 준비로 온 마을이 부산하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묵서한 농기를 선두로 흥겨운 길군악을 울리며 산제당으로 향한다. 이때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한편교회에 다니는 주민들은 제사에는 참여하지 않고 음복만 함께한다. 산신제는 전형적인 유교식 홀기에 따라 진행된다. 이는 산신제를 정월대보름 마을축제로 전환하면서 새롭게도입된 것이다. 순서는 강신례(降神禮)-참신례(參神禮)-초헌례(初獻禮)-재헌례(再獻禮)-독축(讀祝)-삼헌례(三獻禮)-소지례(燒紙禮)-사신례(辭神禮)-음복례(飮福禮)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산신제를 마치면 주민들은 그 자리에서 음복을 하고 풍장을 치면서 하산한다. 마을회관에 집결한 주민들은 진종일 주연을 베풀고 윷놀이를 하는 등 하루를즐긴다.

의의

포사마을산신제의 두드러진 특색은 여느 마을에서 볼 수 없는 ‘주모 제도’이다. 주모란 제관과는 별도로 제물을 전담하는 나이가 지긋한 여성을 지칭하는데, 산신제의 전승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존재이다. 주모를 뽑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조건은 산제기간 동안 출산 예정인 임신부와 초상 등을 당한 부정한 사람이 없어야 한다. 아울러 가급적 폐경기를 지나 생식 능력이 없는 과부로 지명하되, 생기복덕이 닿는 길한 여성이라야 주모가 될 수 있다. 주모는 단지 제물의 준비뿐 아니라 제를 앞두고 공동체의 구성원을 대표하여 산신에게 치성을 드리는 사제(司祭)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여 왔다.

참고문헌

곤향산산신제문서 (1888~2010)
곤향산 산신제 내력 (2007)
조선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파진산의 옛문화-민속 (부여군, 2009)

부여포사마을산신제

부여포사마을산신제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의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3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봉정리 포사마을에서 해마다 정월대보름날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례.

역사

포사마을산신제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는 산신제를 마치고 열리는 대동회의 결산내역을 정리한 동계장부이다. 이 문서에는 매년 산신제를 지낸 유사의 명단, 제수품목,지출비용, 돈을 대여해 준 분급기 등이 110여 년 동안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가장 이른 시기는 1888년 1월 15일에 작성된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그해 상유사(上有司) 전동석과 하유사(下有司) 백순기·이상손이 산신제를 지냈다. 또 제수기 물목은 고리짝[稿梩], 체[篩子], 시루[甑], 술동이[盆] 두 개, 탕관(湯灌), 사기(沙器) 두 개, 삼색실과, 명태 다섯 마리, 백미 두 말, 등유, 백염(白塩), 황육(黃肉), 누룩[曲子] 등으로 기록되었다. 아울러 분급질(分給秩)이라 하여 동계의 기금을 일곱 명에게 대여해주고 식리(殖利, 재물을 불리어 이익을 늘림)한 내역이 담겨 있다. 포사마을 동계장부는 1888년 이전부터 매년 작성된 것이지만 문서의 표제와 앞선 기록이 빠져 있어 정확한 연대는 파악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 문서로 미루어 볼 때 늦어도포사마을산신제는 조선 후기 이래 면면이 이어져 온 동제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오랜 전통을 계승할 수 있었던 배경은 마을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남양 전씨(南陽 田氏)의 산신제에 대한 믿음이 무엇보다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있다. 즉 봉정리는 500여 년 전에 남양 전씨가 세거한 이래 그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저명한 종족마을로뿌리를 내렸고, 산신제는 줄곧 남양 전씨의 적극적인 참여와 주도 아래 제향이 이루어져 왔다. 포사마을산신제는 최근 들어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대거 도시로 빠져나가면서 마을의 공동화 현상이 심화된 데다 기독교인의 증가로 인해 산신에 대한 신앙관념이 크게 흔들리게 된 것이다. 게다가 산신제의 금기가 매우 엄격하여 서로 제관으로 선정되는 것을 꺼리는 풍조도 은연중에 만연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6년에는 곤향산 산신제 운영위원회가 조직되어 산제당을 건립하고, 제의 절차도 홀기에 의한 제향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제의 시간도 자시(子時)에서 오전으로 변경하여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행사에 참석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변화는 산신제를 정월대보름 축제로 승화시켜 많은 주민의 동참과 단합을 끌어내기 위한 고육지책의산물이기도 하다.

내용

포사마을산신제는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산신령의 가호로 재앙을 막고,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빌어 풍요롭게 잘살자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와 더불어 산신제를 지내는 뜻은 성이 다른 사람들이 한 마을에 모여 살면서 서로 양보하고 화합하며 좋은 일은 권장하라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 잘못한 일은 깨우쳐 주고, 어려운 일은 도우며,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경하여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평화롭고 행복한 마을을 이루고자 함이다. 산제당은 마을 뒤편 곤향산 아래에 위치한다. 본래 산제당에는 수백 년 된 참나무 한 그루가 신목으로 치성을 받았으나 1950~1960년에 고사되었다. 예전에는 그 나무 밑에 광목을 떠다가 임시로 포장을 치고 제를 지내다가 최근에 조립식으로 제당을 건립했다. 산신제에 필요한 경비는 마을 주민들로부터 갹출한 돈으로 충당한다. 즉 그해 산신제의 유사로 지명된 사람이 정초에 가가호호를 방문하면 각자 성의껏 쌀이나 돈을 희사한다. 이러한 관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교회가 들어오면서 기독교를 믿는 가정은 산신제에 불참한다. 제관은 매년 음력 섣달 말쯤 산신제 운영위원회에서 주모(主母), 제관, 축관 각 한 명을 지명하되 부정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닿는가의여부를 따져서 임명한다. 음식을 준비하는 주모는 산제 기간에 집안에 임산부가 있거나 상중(喪中)인 사람은 제외한다. 또한 폐경기를 지나 생식 능력이 없는 부지런하고 깔끔한 부인이나 과부여야 한다. 제관 역시 초상이나 임산부가 없는 가정에서 학덕이 높고 운이 좋은 성인남자를 대상으로 하며, 축관은 동일한 조건을 갖추었으면서도 한학에 능한 사람으로 뽑는다. 이에 반해 유사는 일명 ‘굴뚝돌림’이라 하여 지난해 유사의 집 굴뚝과 가장 가깝게 보이는 사람 중에서 부정하지 않은 남자 두 명을 산신제를 마친 뒤결산하는 자리에서 미리 정해 준다. 예전에는 산신제의 봉사자(奉祀者)로 한 번 지명을 당하면 산신의 벌이 무서워 아무도 거절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주무자로 지명된 사람들은 정월 초하루부터 산신제가 끝나는 날까지 부정한 것이 눈에 띄지 않도록 외출을 삼간다. 아울러 상가나 출산한 집은 절대로 가지 않으며, 길에서 상복을 입은 사람을 만나면 외면하고 말도 걸지 않아야 한다. 특히 주모와 제관은 더욱 엄격한 금기가 수반되어 비린 음식을 일절 입에 대지 않고 육식을 하지 않는다. 이뿐만 아니라 대문 앞에 금줄을 치고 깨끗한 황토를 좌우로 세 무더기씩 놓아 부정한 사람의 접근을 막는다. 제물을 구입하러 갈 때에도 궂은일을 피해 새벽 일찍 장으로 가서 물건을 사되 물건 값을 깎지 않고 달라는 대로 주고 가능한 한 빨리 돌아온다. 제수를 준비할 우물은 따로 한 곳을 지정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리하여 섣달그믐날 깨끗이 우물을 품고 주위에 금줄을 드리우면 주모외에 누구도 사용할 수 없다. 주모의 집은 그 가족과 제관 외에는 방문이 금지된다. 마을 사람들도 산신제가 임박하면 살생을 하지 않으며, 특히 정월 열나흗날에는 모든 사람이 목욕재계하고 하루 동안 육식을 금한다. 심지어 새우젓이 들어간 김치도 먹지 않는다. 이 밖에 마을에서 정해 놓은 제관의 역할과 임무는 다음과 같다. 주모 : 정월 초하룻날부터 방 하나를 깨끗이 치운다. 그 방은 식구도 들어가는 것을 금하고 주모만 사용한다. 남편이 있는 사람은 각방을 사용하고, 설날부터 산제가 끝날때까지 매일 찬물로 목욕재계한다. 주모는 정월 초이렛날 제주를 담근 뒤 아침저녁으로 지정된 우물에서 정화수를 길어 제주단지 앞에 떠 놓고 하루 두 차례씩 사배(四拜)를 드린다. 정월 열나흗날 모든 제수품을 장만하여 산제당으로 보내면 주모의 임무가 끝난다. 제관 : 외출을 삼가고 부인과 각방을 써야 한다. 산신제 일주일 전부터 매일 찬물로 목욕재계한다. 열나흗날 밤에는 의관을 정제하고 산신제의 헌관이 된다. 또한 각 세대주의 이름이 적힌 소지를 올린다. 이때 해당자의 주소와 성명을 고한 다음 그 가정의 형편에 맞는 덕담으로 축원을 해 준다. 소지를 신청한 사람을 모두 올려야 한다. 축관·유사 : 축관은 외출을 삼가고 정성껏 축을 닦는다. 열나흗날에는 찬물로 목욕재계하고, 산신제 당일 제관이 술을 올릴 때마다 축을 읽는다. 모두 세 번 읽고 또 산신제의 모든 의전을 담당한다. 유사는 산신제 기간에 외출을 삼가고, 정초에 집집마다 방문하여 산신제 경비를 추렴한다. 소지 올릴 대상자를 조사하는 한편 산신제에 필요한 모든 물품 구입과 잡일, 제당 청소 및 제단 준비 등을 맡는다. 산신제 때 제물을 진설하고, 소지가 잘못 올라간 사람은 기록하였다가 산신제가 끝난 다음날 개인에게 일러 주어일 년 동안 몸조심하도록 해야 한다. 보름날 아침 음복을 총괄하고, 운영위원회에 결산보고를 한다. 포사마을산신제는 정월대보름 오전 10시쯤에 거행된다. 본래는 정월 열나흗날 자정(정월대보름 자시)에 치제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으나 산신제를 주관하는 주민들이 연로한데다 기왕이면 모든 주민이 함께하자는 여론에 따라 대보름 오전으로 날짜를 옮기게 되었다. 당일 아침이 되면 산신제 준비로 온 마을이 부산하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묵서한 농기를 선두로 흥겨운 길군악을 울리며 산제당으로 향한다. 이때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한편교회에 다니는 주민들은 제사에는 참여하지 않고 음복만 함께한다. 산신제는 전형적인 유교식 홀기에 따라 진행된다. 이는 산신제를 정월대보름 마을축제로 전환하면서 새롭게도입된 것이다. 순서는 강신례(降神禮)-참신례(參神禮)-초헌례(初獻禮)-재헌례(再獻禮)-독축(讀祝)-삼헌례(三獻禮)-소지례(燒紙禮)-사신례(辭神禮)-음복례(飮福禮)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산신제를 마치면 주민들은 그 자리에서 음복을 하고 풍장을 치면서 하산한다. 마을회관에 집결한 주민들은 진종일 주연을 베풀고 윷놀이를 하는 등 하루를즐긴다.

의의

포사마을산신제의 두드러진 특색은 여느 마을에서 볼 수 없는 ‘주모 제도’이다. 주모란 제관과는 별도로 제물을 전담하는 나이가 지긋한 여성을 지칭하는데, 산신제의 전승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존재이다. 주모를 뽑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조건은 산제기간 동안 출산 예정인 임신부와 초상 등을 당한 부정한 사람이 없어야 한다. 아울러 가급적 폐경기를 지나 생식 능력이 없는 과부로 지명하되, 생기복덕이 닿는 길한 여성이라야 주모가 될 수 있다. 주모는 단지 제물의 준비뿐 아니라 제를 앞두고 공동체의 구성원을 대표하여 산신에게 치성을 드리는 사제(司祭)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여 왔다.

참고문헌

곤향산산신제문서 (1888~2010)곤향산 산신제 내력 (2007)조선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파진산의 옛문화-민속 (부여군,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