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외연도전횡장군사당

한자명

保寧外烟島田橫將軍祠堂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의장소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2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외연도에서 중국 제나라 무장으로서 왕위에 오른 전횡 장군을 모신 사당. 매년 음력 2월 14일에 거행되는 외연도 당제에서 풍어의 신으로 제사하고 있음.

형태

전횡장군사당은 당산의 동백나무숲에 있다. 규모는 17㎡ 남짓한 아담한 크기의 목조건물로서 맞배지붕이다. 본래 7㎡ 남짓한 함석지붕이던 것을 최근 당집을 개축하여 기와를얹었다. 예전의 건물에는 출입문 위에 「전공사당기(田公祠堂記)」가 걸려 있었다. 사당에서 서북쪽으로 약 30m 떨어진 곳에는 갈당으로 불리는 산제당이 있으며, 그 동쪽에는‘김서방바위’, ‘뼈 묻는 바위’, ‘전횡장군놀던바위’가 있다.

역사

전횡장군사당은 일제강점기 때 처음 건립되었다. 1936년에 사당을 창건하면서 기록한「 전공사당기」에는 전횡의 이력과 그를 신으로 모시게 된 사연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공의 성은 전씨요 휘는 횡이다. 옛 제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한나라가 흥하고 제나라가 망하자 의리로 절개를 굽히지 않고 오백여 명과 더불어 바다 건너 반양산(半洋山)에들어와 살았다. 한나라가 그 후한을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부르자, 공은 부득이 두 사람의 빈객을 데리고 함께 낙양에 이르렀으나 상화점(霜花店)이란 곳에서 스스로 목을 베었다. 오호라! 공이 부름에 응한 것은 실제 한나라의 위세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섬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참화를 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함께 간 두 사람 역시 한나라의 벼슬을 받지 않고 슬퍼하다가 공의 무덤 곁에 구덩이를 파고 죽었다. 섬에 있던 오백여 명도 한날한시에 함께 죽으니 천만년 옛적부터 들을 수 없는 일이다. 공의 은의(恩義)가 어찌 이토록 지극하였는가. 비록 서산(西山)이나 동해로 가려 하였으나 또한 반양산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반양산은 지금의 외연도이다. 지금에 이르러 수천 년이 지났어도 오히려 사당을 세우지 못하고, 다만 석대(石臺)로 신을 제사하는 당(堂)을 삼았다. 섬사람들이 그 절의를 잊고 있다가 신명(神明)에 감동하여 나무를 베어 비로소 사당을 건립하고 희생을 진설하여 제를 지냈다. 공의 정령(精靈)이 완연히 위에 머물러 있으니 어찌 풍성하지 않을 것이며 어찌 공경하지 않으리오

사당기에서 알 수 있듯이 전횡은 외연도와의 연고성(지역성)과 죽음을 불사한 의로운 삶이 경외의 대상이 되어 외연도에서 풍어의 신으로 좌정할 수 있었다. 1967년에 설문조사한 보고서의 ‘중국에서 역적으로 온 선언[전횡] 장군이 왔다간 것을 추모’하기 위해 당제를 지낸다는 짤막한 유래담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전횡 장군의 신격화는 보령의 ‘유격장군청덕비’에서 나타나듯이 조선 초기의 오랜 관행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별도의 사당이 없어 단지 제단을 당으로 삼아 제를 지내 오다가 1936년에 비로소 전횡장군사당을 짓고 신위를 모시게 된 것이다. 당시 사당 건립을 주도한 사람은 외연도에 거주하는 남궁운선(南宮云先)·최문일(崔文日, 1866~1942) 등 10명이 기록되어 있다. 최문일은 1936년 당시 70세의 고령이었다. 또한 10명 가운데 8명은 주로 어업에 종사한 외연도 주민이고, 2명은 어업조합의 간부로 알려져 있다.

내용

전횡장군사당은 단칸으로 건립되었다. 내부 공간은 남쪽을 제외한 세 벽에 1m 높이로 폭 30㎝의 선반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북벽과 동벽의 선반에는 감실(龕室)에 위패 네 개가 놓여 있다. 주벽의 정면에는 전횡장군신위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당산신위(堂山神位)와 도당신위(禱堂神位)를 안치하였고, 오른쪽 선반에는 소저아지씨신위(小姐阿只氏神位)가 놓여있다. 당산신위와 도당신위에는 사당제를 지낼 때 치마저고리 한 벌씩을 그 위패가 있는 제단 위에 바친다. 이로써 두 신격은 여성신으로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에서는 전횡 장군의 부인과 딸로 추측하기도한다. 오른쪽의 소저아지씨 역시 신명(神名)으로 볼때 여성신이 분명하지만 치마저고리를 올리지는 않는다. 소저아지씨는 전횡의 딸로 불리기도 한다.

선반 위에 매어 놓은 줄에는 한지가 묶여져 있다. 이것을 ‘느림’이라고 하는데 산제당 신목에도 느림을매단다. 공간의 바닥은 흙으로 되어 있고, 서쪽 부분에 세 개의 항아리와 두 개의 플라스틱 통이 놓여 있다. 이 통은 과거 당제에 바친 옷을 넣어 두는 곳이다. 옷을 넣는 항아리는 사당의 동쪽 밖에 두 개가 더 있다.

외연도당제는 매년 음력 2월 14일 저녁에 시작되어 이튿날 정오 무렵에 막을 내린다. 제관은 당제를 주관하는 당주와 제물 준비 및 심부름을 도맡아하는 안화장, 바깥화장으로구분된다. 당제는 산제당에 노구메와 절편의 일종인 지미를 올리는 산제를 먼저 지낸다. 이어서 전횡장군사당에 지미, 고두메, 삼색실과등을 진설하고 산제와 동일한 절차로 사당제를 지낸다. 이와 함께 육류를 쓰지 않는 소산제(素山祭)인 산제와는 달리 사당제는 희생으로 지태(소)를 도살하여 부위별로 차례로 진설하는 것이 특징이다. 지태의 ㅋ체 과정이 자못 성스럽고 엄숙할 뿐만 아니라 섬마을 특유의 원형적인 희생의례(犧牲儀禮)의 성격이 잘 남아 있다.

지역사례

전횡은 외연도열도를 이루는 녹도와 전북 군산시 옥도면의 어청도에서도 당제의 주신으로 좌정하여 하나의 신앙권을 형성하여 왔다. 이들 섬은 외연도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녹도, 왼쪽에 어청도가 각각 자리하여 일찍부터 빈번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1970년대 서해안 일대를 조사한 보고서에는 “전횡은 외연도 이남에서, 임경업은 창리 이북에서 집단신앙이 되고 있다고 하여야 할 줄 안다”라고 지적되기도 하였다.

어청도에서 전횡을 모신 사당의 이름은 치동묘(淄東廟)이다. 바닷가 근처 민가의 사이에 자리하는 치동묘에는 2m 높이의 돌담이 있고, 대문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문위 에는「 치동묘」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목조 기와 건물인 치동묘는 현재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내부에는 공주에 살던 스님이 이곳에 와서꿈에 본 전횡 장군을 그렸다는 초상화와 창을 든 무사 그림 두 점이 있었으나 도난을 당하였다. 또 주위에 군령기를 비롯한 무기가 놓여 있다. 통상 사흘 동안 진행되는 당제는 섣달그믐날 당산에서 먼저 산신제를 지낸다. 제상이 차려지면 당주가 징이나 꽹과리를 울려서 마을에 신호를 보낸다. 이 소리를 듣고 마을에서도 집집마다 제상을 마련하여선영에 제사하며 한 해 동안의 무사를 빈다. 특히 조난사고나 실패가 없기를 비손한다. 정월 초하룻날에는 치동묘에서 제를 거행한다. 마을의 모든 남자는 목욕재계하고 한복으로 새옷을 갈아입고 갓을 쓰고 당산에 올라 제를 지낸다. 그리고 다시 황소를 잡아 희생으로 바치고 이틀 동안 제를 지낸다.

녹도에서 전횡을 모신 사당은 마을 뒤편 당산에 자리한다. 이곳은 수백 년 된 소나무·후박나무·동백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그 숲속에 당집을 지었다. 당에 모셔진 주신격은 ‘전웅대감(전횡대감)’이라고 한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주벽에 전웅대감, 좌우에 제자(부장) 두 명의 그림이 봉안되어 있었다. 그러나 화상은 40년 전에 분실되고 없다.당에 모셔진 신은‘전웅대감(전횡대감)’이라고 한다. 전웅대감은 어청도에서 활동하였으며, 녹도에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당제는 매년 세 차례 지냈다고 한다. 이월에 모시는 당제, 팔월에 모시는 신곡차례, 동짓달에 모시는 동지제사가 그것이다. 특히 이월의 당제는 외연도와 마찬가지로 봉화산에서 산신제를 지낸 다음 희생으로 소를 잡고 무당을 불러 성대하게 치렀으나 1980년대에 중단되었다.

참조

참고문헌

충남 서해도서의 민속연구 (박계홍, 백제연구 4, 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 1973)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충청남도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75)
도서지 (충청남도·한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1997)
한국의 마을제당-충청남도 (국립민속박물관, 1998)
군산 답사·여행의 길잡이 (김중규, 도서출판 나인, 2003)
외연도 동제 (황의호, 보령문화 17, 보령문화연구회, 2008)
조선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9)
서해안 동제의 중국계 신격 전횡 연구 (이경엽, 도서문화 35,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010)

보령외연도전횡장군사당

보령외연도전횡장군사당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의장소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2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외연도에서 중국 제나라 무장으로서 왕위에 오른 전횡 장군을 모신 사당. 매년 음력 2월 14일에 거행되는 외연도 당제에서 풍어의 신으로 제사하고 있음.

형태

전횡장군사당은 당산의 동백나무숲에 있다. 규모는 17㎡ 남짓한 아담한 크기의 목조건물로서 맞배지붕이다. 본래 7㎡ 남짓한 함석지붕이던 것을 최근 당집을 개축하여 기와를얹었다. 예전의 건물에는 출입문 위에 「전공사당기(田公祠堂記)」가 걸려 있었다. 사당에서 서북쪽으로 약 30m 떨어진 곳에는 갈당으로 불리는 산제당이 있으며, 그 동쪽에는‘김서방바위’, ‘뼈 묻는 바위’, ‘전횡장군놀던바위’가 있다.

역사

전횡장군사당은 일제강점기 때 처음 건립되었다. 1936년에 사당을 창건하면서 기록한「 전공사당기」에는 전횡의 이력과 그를 신으로 모시게 된 사연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공의 성은 전씨요 휘는 횡이다. 옛 제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한나라가 흥하고 제나라가 망하자 의리로 절개를 굽히지 않고 오백여 명과 더불어 바다 건너 반양산(半洋山)에들어와 살았다. 한나라가 그 후한을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부르자, 공은 부득이 두 사람의 빈객을 데리고 함께 낙양에 이르렀으나 상화점(霜花店)이란 곳에서 스스로 목을 베었다. 오호라! 공이 부름에 응한 것은 실제 한나라의 위세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섬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참화를 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함께 간 두 사람 역시 한나라의 벼슬을 받지 않고 슬퍼하다가 공의 무덤 곁에 구덩이를 파고 죽었다. 섬에 있던 오백여 명도 한날한시에 함께 죽으니 천만년 옛적부터 들을 수 없는 일이다. 공의 은의(恩義)가 어찌 이토록 지극하였는가. 비록 서산(西山)이나 동해로 가려 하였으나 또한 반양산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반양산은 지금의 외연도이다. 지금에 이르러 수천 년이 지났어도 오히려 사당을 세우지 못하고, 다만 석대(石臺)로 신을 제사하는 당(堂)을 삼았다. 섬사람들이 그 절의를 잊고 있다가 신명(神明)에 감동하여 나무를 베어 비로소 사당을 건립하고 희생을 진설하여 제를 지냈다. 공의 정령(精靈)이 완연히 위에 머물러 있으니 어찌 풍성하지 않을 것이며 어찌 공경하지 않으리오 사당기에서 알 수 있듯이 전횡은 외연도와의 연고성(지역성)과 죽음을 불사한 의로운 삶이 경외의 대상이 되어 외연도에서 풍어의 신으로 좌정할 수 있었다. 1967년에 설문조사한 보고서의 ‘중국에서 역적으로 온 선언[전횡] 장군이 왔다간 것을 추모’하기 위해 당제를 지낸다는 짤막한 유래담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전횡 장군의 신격화는 보령의 ‘유격장군청덕비’에서 나타나듯이 조선 초기의 오랜 관행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별도의 사당이 없어 단지 제단을 당으로 삼아 제를 지내 오다가 1936년에 비로소 전횡장군사당을 짓고 신위를 모시게 된 것이다. 당시 사당 건립을 주도한 사람은 외연도에 거주하는 남궁운선(南宮云先)·최문일(崔文日, 1866~1942) 등 10명이 기록되어 있다. 최문일은 1936년 당시 70세의 고령이었다. 또한 10명 가운데 8명은 주로 어업에 종사한 외연도 주민이고, 2명은 어업조합의 간부로 알려져 있다.

내용

전횡장군사당은 단칸으로 건립되었다. 내부 공간은 남쪽을 제외한 세 벽에 1m 높이로 폭 30㎝의 선반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북벽과 동벽의 선반에는 감실(龕室)에 위패 네 개가 놓여 있다. 주벽의 정면에는 전횡장군신위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당산신위(堂山神位)와 도당신위(禱堂神位)를 안치하였고, 오른쪽 선반에는 소저아지씨신위(小姐阿只氏神位)가 놓여있다. 당산신위와 도당신위에는 사당제를 지낼 때 치마저고리 한 벌씩을 그 위패가 있는 제단 위에 바친다. 이로써 두 신격은 여성신으로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에서는 전횡 장군의 부인과 딸로 추측하기도한다. 오른쪽의 소저아지씨 역시 신명(神名)으로 볼때 여성신이 분명하지만 치마저고리를 올리지는 않는다. 소저아지씨는 전횡의 딸로 불리기도 한다. 선반 위에 매어 놓은 줄에는 한지가 묶여져 있다. 이것을 ‘느림’이라고 하는데 산제당 신목에도 느림을매단다. 공간의 바닥은 흙으로 되어 있고, 서쪽 부분에 세 개의 항아리와 두 개의 플라스틱 통이 놓여 있다. 이 통은 과거 당제에 바친 옷을 넣어 두는 곳이다. 옷을 넣는 항아리는 사당의 동쪽 밖에 두 개가 더 있다. 외연도당제는 매년 음력 2월 14일 저녁에 시작되어 이튿날 정오 무렵에 막을 내린다. 제관은 당제를 주관하는 당주와 제물 준비 및 심부름을 도맡아하는 안화장, 바깥화장으로구분된다. 당제는 산제당에 노구메와 절편의 일종인 지미를 올리는 산제를 먼저 지낸다. 이어서 전횡장군사당에 지미, 고두메, 삼색실과등을 진설하고 산제와 동일한 절차로 사당제를 지낸다. 이와 함께 육류를 쓰지 않는 소산제(素山祭)인 산제와는 달리 사당제는 희생으로 지태(소)를 도살하여 부위별로 차례로 진설하는 것이 특징이다. 지태의 ㅋ체 과정이 자못 성스럽고 엄숙할 뿐만 아니라 섬마을 특유의 원형적인 희생의례(犧牲儀禮)의 성격이 잘 남아 있다.

지역사례

전횡은 외연도열도를 이루는 녹도와 전북 군산시 옥도면의 어청도에서도 당제의 주신으로 좌정하여 하나의 신앙권을 형성하여 왔다. 이들 섬은 외연도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녹도, 왼쪽에 어청도가 각각 자리하여 일찍부터 빈번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1970년대 서해안 일대를 조사한 보고서에는 “전횡은 외연도 이남에서, 임경업은 창리 이북에서 집단신앙이 되고 있다고 하여야 할 줄 안다”라고 지적되기도 하였다. 어청도에서 전횡을 모신 사당의 이름은 치동묘(淄東廟)이다. 바닷가 근처 민가의 사이에 자리하는 치동묘에는 2m 높이의 돌담이 있고, 대문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문위 에는「 치동묘」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목조 기와 건물인 치동묘는 현재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내부에는 공주에 살던 스님이 이곳에 와서꿈에 본 전횡 장군을 그렸다는 초상화와 창을 든 무사 그림 두 점이 있었으나 도난을 당하였다. 또 주위에 군령기를 비롯한 무기가 놓여 있다. 통상 사흘 동안 진행되는 당제는 섣달그믐날 당산에서 먼저 산신제를 지낸다. 제상이 차려지면 당주가 징이나 꽹과리를 울려서 마을에 신호를 보낸다. 이 소리를 듣고 마을에서도 집집마다 제상을 마련하여선영에 제사하며 한 해 동안의 무사를 빈다. 특히 조난사고나 실패가 없기를 비손한다. 정월 초하룻날에는 치동묘에서 제를 거행한다. 마을의 모든 남자는 목욕재계하고 한복으로 새옷을 갈아입고 갓을 쓰고 당산에 올라 제를 지낸다. 그리고 다시 황소를 잡아 희생으로 바치고 이틀 동안 제를 지낸다. 녹도에서 전횡을 모신 사당은 마을 뒤편 당산에 자리한다. 이곳은 수백 년 된 소나무·후박나무·동백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그 숲속에 당집을 지었다. 당에 모셔진 주신격은 ‘전웅대감(전횡대감)’이라고 한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주벽에 전웅대감, 좌우에 제자(부장) 두 명의 그림이 봉안되어 있었다. 그러나 화상은 40년 전에 분실되고 없다.당에 모셔진 신은‘전웅대감(전횡대감)’이라고 한다. 전웅대감은 어청도에서 활동하였으며, 녹도에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당제는 매년 세 차례 지냈다고 한다. 이월에 모시는 당제, 팔월에 모시는 신곡차례, 동짓달에 모시는 동지제사가 그것이다. 특히 이월의 당제는 외연도와 마찬가지로 봉화산에서 산신제를 지낸 다음 희생으로 소를 잡고 무당을 불러 성대하게 치렀으나 1980년대에 중단되었다.

참조

보령외연도당제전횡장군

참고문헌

충남 서해도서의 민속연구 (박계홍, 백제연구 4, 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 1973)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충청남도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75)도서지 (충청남도·한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1997)한국의 마을제당-충청남도 (국립민속박물관, 1998)군산 답사·여행의 길잡이 (김중규, 도서출판 나인, 2003)외연도 동제 (황의호, 보령문화 17, 보령문화연구회, 2008)조선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9)서해안 동제의 중국계 신격 전횡 연구 (이경엽, 도서문화 35,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