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무수동산신제

한자명

大田無愁洞山神祭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의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2

정의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에서 해마다 음력 정초에 길일(吉日)을 택해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의례.

역사

산신제의 역사는 300여 년 전 무수동에 정착한 안동 권씨(安東 權氏)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이후 무수동은 안동 권씨 집성촌으로 크게 부각되는 마을이 되었다. 입향조는 조선시대 때 호조판서를 지낸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이다. 그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사위이자 자신의 부친인 권유(權惟)가 세상을 뜨자 무수동에 장례를 치르고, 1707년(숙종 33)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마을로 이거하였다. 당시 풍수지리에 밝은 권이진은 마을 뒷산에 손수 제당의 위치를 정하고 해마다 산신제를 지냈다고 구전된다.이러한 사실은 1851년에 작성된 『무수동계첩』을 통해 뒷받침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이래 줄곧 향론을 주도한 안동 권씨가 중심이 되어 지금까지 이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무수동산신제는 19세기 중엽에 중단될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른바 민중봉기 시대와 맞물려 인구의 과반수가 떨어져 나가고, 이에 따라 여러 대를 이어온 산신제는 폐지되거나행하더라도 조악하여 제대로 예를 갖추지 못했다. 자구책으로 1850년(철종 1)에 의논을 정하고 재물을 모아 산신제를 주관할 동계를 결성하였다. 이는 안동 권씨 집안에서 “산속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산신을 제사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산신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전제되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까닭에 “한 마을이 흥하고 망하는 것은 제사로증명이 된다”는 명분을 내세워 산신제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나아가 “산신은 진실로 산의 주인이요, 우리 권씨 또한 동네의 주인이다”라는 논리로 동계 결성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더욱이 무수동의 주산(主山)인 운람산은 인간에게 미치는 재복(灾福)이 여느 산과 사뭇 다른 신비스런 산으로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무수동산신제는 6·25전쟁 이후 동계의 파산 및 급속한 산업화의 여파로 몇 차례 중단과 복원이 거듭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최근에는 인근의 사찰에 산신제를 위임하기도 했으나 2008년 제49회 한국민속예술축제 출전을 계기로 무수동산신제보존회가 결성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내용

산제당은 마을 뒤편 운람산 중턱에 위치한다. 제당은 본래 단칸 기와집이었으며, 내부에는 산신도가 봉안되어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산제당을 돌보지 않아 허물어졌고, 지금은 단지 당집이 있던 자리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1. 택일 : 제일은 정초에 산신하강일(山神下降日)로 택일하는 것이 오랜 전통으로 되어 있다. 동계첩에는 산신이 하강하는 날은 물론 산신제를 피해야 할 천구하강일(天狗下降日), 경오일(庚午日), 산명일(山鳴日) 등이 상세하게 명시되어 있다. 동계첩에는 “본 동중에서 생년이 합일되는 길한 사람을 선정하여 일주일 전에 재계(齋戒)하고, 하루 전에 제수를 준비하여 이튿날 축시(丑時)에 제물을 차려놓고 행사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산신제를 앞두고 초상이나 출산이 있으면 제의를 연기한다. 이때는 ‘생삼사칠(生三死七)’의 원칙에 따라 ‘산부정(출산)’은 사흘 이상, ‘죽은부정(초상)’은 이레 이상을 각각 연기했다가 다시 날짜를 잡는 것이 통례이다.

  2. 유사 선정 산신제는 동계의 대동회의로부터 준비가 시작된다. 주민들은 가을걷이갈무리되면 동계를 개최하여 산신제를 전담할 유사를 선출한다. 유사는 부정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 결정한다. 일제강점기까지는 상유사(上有司), 하유사(下有司), 나무유사를 한 명씩 선출했다. 단 상유사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안동 권씨 집안에서 맡는 것이 관례였고, 상유사를 보좌하는 하유사는 타성(他姓) 중에서 선정했다. 반면에 땔나무와 심부름을 해 주는 나무유사는 산지기나 머슴이 전담했다.그러나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근래에는 상·하 유사와 관계없이 제관, 축관, 음식유사를 선정한다. 제관이나 축관으로 지목된 사람은 일주일 전부터 매일 찬물로 목욕재계하고술·담배를 삼간 채 정성을 들인다. 특히 제관의 집에는 부정한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편다. 마을에서도 부정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는데, 무엇보다 살생을 피한다.

  3. 산제답과 제물 : 산신제 비용은 산제답(山祭畓)에서 매년 도조를 받아 충당했다. 동계첩에는 무수동 이웃마을에 세 마지기[三斗落]의 논이 산제답으로 마련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두 섬을 도조로 받았으나 1950년대 동계가 파산하면서 산제답이 매각되었다. 이후 산신제는 집집마다 십시일반으로 갹출하거나 마을기금에서 일부를 떼어 제수를 준비한다. 제물은 돼지머리, 삼색실과, 포, 3탕, 메밀묵, 떡, 메, 나물, 술, 식혜, 정화수, 불밝이쌀 등이다. 제수는 유사의 부인이 시장에서 구입하며, 이때 절대로 값을 깎거나 흥정을 벌이지 않는다. 또한 시장을 오가는 중에 초상집, 상여, 출산 등과 같은 부정한 것이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한다. 음식을 만들 때에도 미리 맛을 보거나 고춧가루, 마늘, 조미료 따위의 양념을 넣지 않는다.조리에 사용할 물은 밤 12시가 지난 뒤 정갈하게 고인 정화수를 떠온다.

  4. 산신제 : 당일 아침이 되면 제관은 산제당으로 올라가는 길을 뚫고 제당과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왼새끼를 꼬아 금줄을 치고 황토를 주변에 한 줌씩 뿌린 다음 산제샘을깨끗이 퍼내고 청소한 뒤에 내려온다. 제관은 날이 저물면 떡과 제물을 준비해 놓고 대기하고 있다가 자정이 가까워지면 산제당으로 향한다. 산제당에 도착한 제관은 화톳불로메[밥]를 지어 올리고 제물을 진설한다. 제차는 유교식으로 진설(陳設)-강신(降神)-분향(焚香)-참신재배(參神再拜)-헌작(獻酌)-독축(讀祝)-분축(焚祝)-사신재배(辭神再拜)-소지(燒紙) 순이다. 즉 제관과 축관은 산신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무릎을 꿇고 향을 사른 다음 참신례(參神禮)를 행한다. 그리고 단작(單酌)으로 술을 올린 다음 축관이 축문을읽는다. 산신제의 축문은 1844년 삼수부군(三守府君) 권구(權耈)가 지은 것으로 1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사용된다. 동계첩에는 한문으로 지은 축과 한글 축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독축을 마치면 제관과 축관은 사신례로 재배하고 산신제의 마지막 절차인 소지를 올린다.

  5. 소지 및 유황제 : 소지는 무수동의 전체 가구를 대상으로 하며, 그해 초상을 당한 집은 부정하다 하여 소지에서 제외된다. 순서는 마을의 안녕을 축원하는 대동소지에 이어 제관과 축관의 소지를 올린다. 대동소지는 연장자부터 가구별로 대주소지를 불사른다. 그리고 소, 돼지, 개, 닭 등 육축(六畜)의 번성을 기원하는 우마소지(牛馬燒紙)를 각각올리는 것으로 제의는 끝난다. 예전에 가구 수가 번성할 때에는 이처럼 소지를 올리는 데에만 서너 시간이 소요되었을 정도로 소지축원은 산신제의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소지를 끝으로 산신제가 마무리되면 일동 재배한다. 산신제가끝나면 제관과 그의 부인은 약간의 제물을 떼어 산제샘 앞에 차려 놓고 유황제(용왕제)를 지낸 다음 하산한다. 본래 산신제를 지낸 제물은 산제당에 그대로 두고 돌아왔다가 날이 밝으면 가져가서 유사의 집에 모여 음복을 나누었다.

  6. 정월대보름 거리제 : 산신제와는 별도로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동구 밖에 있는 장승·솟대 앞에서 올렸던 거리제는 일제강점기 말에 중단되었다. 거리제는 무수동의 상·천민들이 주관하는 의례로서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하여 한 해의 소망을 빌었다. 참여자들은 초저녁부터 풍장을 울리며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액운을 물리친 다음 장승·솟대가 있는 동구밖으로 가서 거리제를 지냈다.

의의

무수동산신제는 조선 후기 ‘남인계’ 반촌에서 전승되던 동제의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사례이다. 무엇보다도 산신제와 거리제가 전승되는 과정에서 사족인 안동 권씨와 그 예하에 속한 하민들의 역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좀 더 입체적으로 포착할수 있다. 정초의 산신제가 안동 권씨가 주도하는 신년맞이 의례였다면 하층민들이 주관하는 거리제는 흥겨운 풍물굿이 수반되는 정월대보름 마을축제의 성격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산신제와 거리제로 이루어진 무수동의 동제는 반촌이라는 신분관계속에서 형성되고 전승되어 온 측면을 배제하기 어렵다. 곧 안동 권씨가 공동체를 강화하고 상·천민들의 일탈을 통제하기 위한 문화적 장치로 산신제를 활용했다면 타성으로 일컬어지는 마을의 구성원들은 역시 거리제를 통하여 그들 나름대로의 유대를 강화하고 결속을 꾀한 것이다.

참고문헌

충남지방 장승·솟대신앙 (국립민속박물관, 1991)
한국의 마을제당-충청도 (국립민속박물관, 2002)
무수동계첩조선후기 대전 무수동 동계와 동제의 성격 (강성복, 충청민속문화론, 민속원, 2005)
조선후기 충청지역의 동제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대전무수동산신제

대전무수동산신제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의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2

정의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에서 해마다 음력 정초에 길일(吉日)을 택해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의례.

역사

산신제의 역사는 300여 년 전 무수동에 정착한 안동 권씨(安東 權氏)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이후 무수동은 안동 권씨 집성촌으로 크게 부각되는 마을이 되었다. 입향조는 조선시대 때 호조판서를 지낸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이다. 그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사위이자 자신의 부친인 권유(權惟)가 세상을 뜨자 무수동에 장례를 치르고, 1707년(숙종 33)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마을로 이거하였다. 당시 풍수지리에 밝은 권이진은 마을 뒷산에 손수 제당의 위치를 정하고 해마다 산신제를 지냈다고 구전된다.이러한 사실은 1851년에 작성된 『무수동계첩』을 통해 뒷받침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이래 줄곧 향론을 주도한 안동 권씨가 중심이 되어 지금까지 이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무수동산신제는 19세기 중엽에 중단될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른바 민중봉기 시대와 맞물려 인구의 과반수가 떨어져 나가고, 이에 따라 여러 대를 이어온 산신제는 폐지되거나행하더라도 조악하여 제대로 예를 갖추지 못했다. 자구책으로 1850년(철종 1)에 의논을 정하고 재물을 모아 산신제를 주관할 동계를 결성하였다. 이는 안동 권씨 집안에서 “산속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산신을 제사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산신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전제되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까닭에 “한 마을이 흥하고 망하는 것은 제사로증명이 된다”는 명분을 내세워 산신제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나아가 “산신은 진실로 산의 주인이요, 우리 권씨 또한 동네의 주인이다”라는 논리로 동계 결성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더욱이 무수동의 주산(主山)인 운람산은 인간에게 미치는 재복(灾福)이 여느 산과 사뭇 다른 신비스런 산으로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무수동산신제는 6·25전쟁 이후 동계의 파산 및 급속한 산업화의 여파로 몇 차례 중단과 복원이 거듭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최근에는 인근의 사찰에 산신제를 위임하기도 했으나 2008년 제49회 한국민속예술축제 출전을 계기로 무수동산신제보존회가 결성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내용

산제당은 마을 뒤편 운람산 중턱에 위치한다. 제당은 본래 단칸 기와집이었으며, 내부에는 산신도가 봉안되어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산제당을 돌보지 않아 허물어졌고, 지금은 단지 당집이 있던 자리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택일 : 제일은 정초에 산신하강일(山神下降日)로 택일하는 것이 오랜 전통으로 되어 있다. 동계첩에는 산신이 하강하는 날은 물론 산신제를 피해야 할 천구하강일(天狗下降日), 경오일(庚午日), 산명일(山鳴日) 등이 상세하게 명시되어 있다. 동계첩에는 “본 동중에서 생년이 합일되는 길한 사람을 선정하여 일주일 전에 재계(齋戒)하고, 하루 전에 제수를 준비하여 이튿날 축시(丑時)에 제물을 차려놓고 행사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산신제를 앞두고 초상이나 출산이 있으면 제의를 연기한다. 이때는 ‘생삼사칠(生三死七)’의 원칙에 따라 ‘산부정(출산)’은 사흘 이상, ‘죽은부정(초상)’은 이레 이상을 각각 연기했다가 다시 날짜를 잡는 것이 통례이다. 유사 선정 산신제는 동계의 대동회의로부터 준비가 시작된다. 주민들은 가을걷이가 갈무리되면 동계를 개최하여 산신제를 전담할 유사를 선출한다. 유사는 부정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 결정한다. 일제강점기까지는 상유사(上有司), 하유사(下有司), 나무유사를 한 명씩 선출했다. 단 상유사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안동 권씨 집안에서 맡는 것이 관례였고, 상유사를 보좌하는 하유사는 타성(他姓) 중에서 선정했다. 반면에 땔나무와 심부름을 해 주는 나무유사는 산지기나 머슴이 전담했다.그러나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근래에는 상·하 유사와 관계없이 제관, 축관, 음식유사를 선정한다. 제관이나 축관으로 지목된 사람은 일주일 전부터 매일 찬물로 목욕재계하고술·담배를 삼간 채 정성을 들인다. 특히 제관의 집에는 부정한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편다. 마을에서도 부정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는데, 무엇보다 살생을 피한다. 산제답과 제물 : 산신제 비용은 산제답(山祭畓)에서 매년 도조를 받아 충당했다. 동계첩에는 무수동 이웃마을에 세 마지기[三斗落]의 논이 산제답으로 마련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두 섬을 도조로 받았으나 1950년대 동계가 파산하면서 산제답이 매각되었다. 이후 산신제는 집집마다 십시일반으로 갹출하거나 마을기금에서 일부를 떼어 제수를 준비한다. 제물은 돼지머리, 삼색실과, 포, 3탕, 메밀묵, 떡, 메, 나물, 술, 식혜, 정화수, 불밝이쌀 등이다. 제수는 유사의 부인이 시장에서 구입하며, 이때 절대로 값을 깎거나 흥정을 벌이지 않는다. 또한 시장을 오가는 중에 초상집, 상여, 출산 등과 같은 부정한 것이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한다. 음식을 만들 때에도 미리 맛을 보거나 고춧가루, 마늘, 조미료 따위의 양념을 넣지 않는다.조리에 사용할 물은 밤 12시가 지난 뒤 정갈하게 고인 정화수를 떠온다. 산신제 : 당일 아침이 되면 제관은 산제당으로 올라가는 길을 뚫고 제당과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왼새끼를 꼬아 금줄을 치고 황토를 주변에 한 줌씩 뿌린 다음 산제샘을깨끗이 퍼내고 청소한 뒤에 내려온다. 제관은 날이 저물면 떡과 제물을 준비해 놓고 대기하고 있다가 자정이 가까워지면 산제당으로 향한다. 산제당에 도착한 제관은 화톳불로메[밥]를 지어 올리고 제물을 진설한다. 제차는 유교식으로 진설(陳設)-강신(降神)-분향(焚香)-참신재배(參神再拜)-헌작(獻酌)-독축(讀祝)-분축(焚祝)-사신재배(辭神再拜)-소지(燒紙) 순이다. 즉 제관과 축관은 산신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무릎을 꿇고 향을 사른 다음 참신례(參神禮)를 행한다. 그리고 단작(單酌)으로 술을 올린 다음 축관이 축문을읽는다. 산신제의 축문은 1844년 삼수부군(三守府君) 권구(權耈)가 지은 것으로 1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사용된다. 동계첩에는 한문으로 지은 축과 한글 축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독축을 마치면 제관과 축관은 사신례로 재배하고 산신제의 마지막 절차인 소지를 올린다. 소지 및 유황제 : 소지는 무수동의 전체 가구를 대상으로 하며, 그해 초상을 당한 집은 부정하다 하여 소지에서 제외된다. 순서는 마을의 안녕을 축원하는 대동소지에 이어 제관과 축관의 소지를 올린다. 대동소지는 연장자부터 가구별로 대주소지를 불사른다. 그리고 소, 돼지, 개, 닭 등 육축(六畜)의 번성을 기원하는 우마소지(牛馬燒紙)를 각각올리는 것으로 제의는 끝난다. 예전에 가구 수가 번성할 때에는 이처럼 소지를 올리는 데에만 서너 시간이 소요되었을 정도로 소지축원은 산신제의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소지를 끝으로 산신제가 마무리되면 일동 재배한다. 산신제가끝나면 제관과 그의 부인은 약간의 제물을 떼어 산제샘 앞에 차려 놓고 유황제(용왕제)를 지낸 다음 하산한다. 본래 산신제를 지낸 제물은 산제당에 그대로 두고 돌아왔다가 날이 밝으면 가져가서 유사의 집에 모여 음복을 나누었다. 정월대보름 거리제 : 산신제와는 별도로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동구 밖에 있는 장승·솟대 앞에서 올렸던 거리제는 일제강점기 말에 중단되었다. 거리제는 무수동의 상·천민들이 주관하는 의례로서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하여 한 해의 소망을 빌었다. 참여자들은 초저녁부터 풍장을 울리며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액운을 물리친 다음 장승·솟대가 있는 동구밖으로 가서 거리제를 지냈다.

의의

무수동산신제는 조선 후기 ‘남인계’ 반촌에서 전승되던 동제의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사례이다. 무엇보다도 산신제와 거리제가 전승되는 과정에서 사족인 안동 권씨와 그 예하에 속한 하민들의 역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좀 더 입체적으로 포착할수 있다. 정초의 산신제가 안동 권씨가 주도하는 신년맞이 의례였다면 하층민들이 주관하는 거리제는 흥겨운 풍물굿이 수반되는 정월대보름 마을축제의 성격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산신제와 거리제로 이루어진 무수동의 동제는 반촌이라는 신분관계속에서 형성되고 전승되어 온 측면을 배제하기 어렵다. 곧 안동 권씨가 공동체를 강화하고 상·천민들의 일탈을 통제하기 위한 문화적 장치로 산신제를 활용했다면 타성으로 일컬어지는 마을의 구성원들은 역시 거리제를 통하여 그들 나름대로의 유대를 강화하고 결속을 꾀한 것이다.

참조

대전무수동동계문서

참고문헌

충남지방 장승·솟대신앙 (국립민속박물관, 1991)한국의 마을제당-충청도 (국립민속박물관, 2002)무수동계첩조선후기 대전 무수동 동계와 동제의 성격 (강성복, 충청민속문화론, 민속원, 2005)조선후기 충청지역의 동제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