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무수동동계문서

한자명

大田無愁洞洞?文書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자료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2

정의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에서 19세기 중엽 산신제와 관련된 제반 의례절차를 기록해 놓은 문서.

내용

무수동은 조선 후기 남인계의 반촌으로서 대전 지역에 널리 알려진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안동 권씨는 호조판서를 역임하는 권이진(權以鎭, 1668~1734)이 무수동으로 이거하면서 동족마을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무수동계’는 19세기 중엽 안동 권씨가 중단될 위기에 처한 산신제의 복구를 명분으로 상하민을 아울러서 결성한 마을 조직이다.

문서의 표제는 ‘무수동계(無愁洞稧)’이다. 이 문서는 19세기 동계를 결성하게 된 배경과 산신제에 수반되는 제반 의례절차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 특징이다. 문서의 구성은 머리말에 해당하는 「서동계첩수(書洞稧帖首)」를 시작으로, 「제일(祭日) 및 제관(祭官)의 선정기준」, 「제물진설도(祭物陳設圖)」, 「산신제 제차(祭次)」,「 축문(祝文)」,「 산신하강일(山神下降日)」과「 천구하강일(天狗下降日)」,「 동계좌목(洞稧座目)」, 경오년(1870)·을해년(1875)·무술년(1898)「추입자 명단」, 「산제위답(山祭位畓)」, 「동임동답(洞任洞畓)」, 1851년부터 1926년까지의 「제관 명단」 등이다. 그리고 문서의 말미에는「 매년흥성기(每年興盛記)」라 하여 해마다 산신제를 지내면서 새로구입해야 될 제구(祭具) 물목이 첨부되었다.

이 문서에서 주목되는 것은 18세기부터 내려오는 산신제의 제일 및 제관 선정의 관행을 분명하게 적시한 점이다. 즉 “제일은 매년 정월 산신하강일을 취하여 선택한다. 제관은 본동의 주민 중에서 생년이 합하는 길인(吉人)을 선택하여 일주일 전부터 삼가 조심하고, 하루 전에 제수를 갖추어 명일 축시(丑時)에 제물을 진설하고 향사한다”라고 되어 있다. 축문은 한문과 한글축이 함께 실려 있으며, 산신제의 제차는 강신(降神)-분향(焚香)-참신(參神)-헌주(獻酒)-독축(讀祝)-사신(辭神)-분축(焚祝)의 순이다.

서문은 1855년(철종 6) 상원(上元)에 동계의 결성을 주도한 권충전(1806~?)이 작성한 것인데, 19세기 중엽 피폐해진 마을의 사정과 이로 인해 중단 위기에 놓인 산신제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운람산 아래 마을이 있으니 무수동이라고 한다. 그 촌의 시작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우리 안동 권씨가 살기 시작한 때로부터 말한다면, 상서공(尙書公, 입향조 권이진)께서 선친의 산소와 재실을 가꾸어서 이제 5~6대가 된 지 오래이다. 일가친척이 시골에 모였고 뒷산 언덕의 나무도 다 아름드리가 되어 장씨(張氏)의 영벽(靈壁)이 옛 그대로 된 것을 보면 마을이 대개 옛날에도 번성하였다. 그러나 수십 년 내에 석벽이 점점 쇠모(衰耗)하여 터전의 반이나 떨어져나가 사람들이 생기에 힘입지 못하고 기상이 쓸쓸해지니, 이것은 진실로 운수의 오고 감에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 일찍이 옛 노인들이 전하는 바를 들어보면 마을의 민속이 돈후(敦厚)하여 예의를 서로 앞세우고, 단지 제사에 정성을 다할 뿐만 아니라 먼저 산신을 제사 지내는 일에 지극히 정성스럽고 공경하였다. 그리하여 좋은 날을 가려 제수를 갖추고 제관을 선택하였으며, 삼가 재계(齋戒)하고 기름진 희생(犧牲)과 향기로운 술을 담그는 그 의식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근자에 폐지되어 시행치 아니하거나 비록 혹 행한다 할지라도 거칠고 경솔하여 예절을 차리지 못하였다.

이 기록에서 잘 드러나듯이 무수동계가 결성되는 배경은 급속한 향촌사회의 변동이 전제된 것이었다. 즉 무수동은 유랑민의 급증으로 인구의 절반 정도가 떨어져나가고 민심의동요가 극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매년 안동 권씨의 주도하에 경건하게 지내오던 산신제조차 지속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을의 사정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따라서 안동 권씨 입장에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사족의 권위와 향촌지배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1844년(헌종 10)에 중단된 산신제를 복구하고자 마을에서 돈과 곡식을 갹출하여 비용을 마련하는 한편 예학에 밝은 문중의 원로 삼수부군(三守府君) 권구(權耈, 1769~1847)에게 알리어 축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겨우몇 해가 지나지 않아 또다시 산신제는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850년(철종 1)에 유명무실해진 산신제의 복구를 명분으로 내세워 의논을 정하고 재물을 모으게 된다. 이를계기로 안동 권씨와 하층민이 함께하는 동계를 출범시킴으로써 흔들리는 민심을 안착시키고 마을의 구심점을 공고히 하게 된 것이다. 실제 동계좌목에 등재된 60명의 명단을살펴보면 안동 권씨 23명을 비롯해 타성(他姓) 및 하민으로 보이는 37명이 적시되어 상하민이 함께 동계를 조직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무수동계가 성립되는 이면에는 당시 마을 사람들의 산신제에 대한 인식도 한몫 거들었다. 특히 안동 권씨 집안에서는 ‘산속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산신을 제사해야한다’고 생각할 만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무수동의 주산인 운람산은 인간에게 미치는 재복(灾福)이 여느 산과는 사뭇 다른 신비스런 산으로 경외의 대상이되었다. 그런 까닭에‘한 마을이 흥하고 망하는 것은 제사로써 증명이 된다’는 논리로 산신제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한편 “산신은 진실로 산의 주인이요, 우리 권씨 또한 마을의 주인이다”라고 그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19세기 중엽 중단된 산신제를 복구하고 마을의 안정을 도모할 목적으로 조직된 무수동계는 1950년대에 파산되고현재는 산신제만 전승되고 있다.

의의

무수동계문서는 19세기 반촌의 실상과 존폐의 기로에 봉착한 산신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동계첩의 서문에 기록된 것처럼 당시 반촌이었던 무수동은 가구의 절반이 유리될 만큼 극심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이에 마을의 주인인 안동 권씨 입장에서는 중단된 산신제의 복구를 대의명분으로 내세워 동계 결성을 주도함으로써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문서의 사료적 가치를 높여 주는 것은 19세기 중엽 산신제와 관련된 제반 준비절차와 의례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당시 사족층의 산신제에 대한 인식과 동향을 면밀하게 추적할 수 있다.

참고문헌

충남지방 장승ㆍ솟대신앙 (국립민속박물관, 1991)
한국의 마을제당-충청도 (국립민속박물관, 2002)
조선후기 대전 무수동 동계와 동제의 성격 (강성복, 충청민속문화론, 2005)
조선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대전무수동동계문서

대전무수동동계문서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자료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2

정의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에서 19세기 중엽 산신제와 관련된 제반 의례절차를 기록해 놓은 문서.

내용

무수동은 조선 후기 남인계의 반촌으로서 대전 지역에 널리 알려진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안동 권씨는 호조판서를 역임하는 권이진(權以鎭, 1668~1734)이 무수동으로 이거하면서 동족마을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무수동계’는 19세기 중엽 안동 권씨가 중단될 위기에 처한 산신제의 복구를 명분으로 상하민을 아울러서 결성한 마을 조직이다. 문서의 표제는 ‘무수동계(無愁洞稧)’이다. 이 문서는 19세기 동계를 결성하게 된 배경과 산신제에 수반되는 제반 의례절차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 특징이다. 문서의 구성은 머리말에 해당하는 「서동계첩수(書洞稧帖首)」를 시작으로, 「제일(祭日) 및 제관(祭官)의 선정기준」, 「제물진설도(祭物陳設圖)」, 「산신제 제차(祭次)」,「 축문(祝文)」,「 산신하강일(山神下降日)」과「 천구하강일(天狗下降日)」,「 동계좌목(洞稧座目)」, 경오년(1870)·을해년(1875)·무술년(1898)「추입자 명단」, 「산제위답(山祭位畓)」, 「동임동답(洞任洞畓)」, 1851년부터 1926년까지의 「제관 명단」 등이다. 그리고 문서의 말미에는「 매년흥성기(每年興盛記)」라 하여 해마다 산신제를 지내면서 새로구입해야 될 제구(祭具) 물목이 첨부되었다. 이 문서에서 주목되는 것은 18세기부터 내려오는 산신제의 제일 및 제관 선정의 관행을 분명하게 적시한 점이다. 즉 “제일은 매년 정월 산신하강일을 취하여 선택한다. 제관은 본동의 주민 중에서 생년이 합하는 길인(吉人)을 선택하여 일주일 전부터 삼가 조심하고, 하루 전에 제수를 갖추어 명일 축시(丑時)에 제물을 진설하고 향사한다”라고 되어 있다. 축문은 한문과 한글축이 함께 실려 있으며, 산신제의 제차는 강신(降神)-분향(焚香)-참신(參神)-헌주(獻酒)-독축(讀祝)-사신(辭神)-분축(焚祝)의 순이다. 서문은 1855년(철종 6) 상원(上元)에 동계의 결성을 주도한 권충전(1806~?)이 작성한 것인데, 19세기 중엽 피폐해진 마을의 사정과 이로 인해 중단 위기에 놓인 산신제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운람산 아래 마을이 있으니 무수동이라고 한다. 그 촌의 시작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우리 안동 권씨가 살기 시작한 때로부터 말한다면, 상서공(尙書公, 입향조 권이진)께서 선친의 산소와 재실을 가꾸어서 이제 5~6대가 된 지 오래이다. 일가친척이 시골에 모였고 뒷산 언덕의 나무도 다 아름드리가 되어 장씨(張氏)의 영벽(靈壁)이 옛 그대로 된 것을 보면 마을이 대개 옛날에도 번성하였다. 그러나 수십 년 내에 석벽이 점점 쇠모(衰耗)하여 터전의 반이나 떨어져나가 사람들이 생기에 힘입지 못하고 기상이 쓸쓸해지니, 이것은 진실로 운수의 오고 감에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 일찍이 옛 노인들이 전하는 바를 들어보면 마을의 민속이 돈후(敦厚)하여 예의를 서로 앞세우고, 단지 제사에 정성을 다할 뿐만 아니라 먼저 산신을 제사 지내는 일에 지극히 정성스럽고 공경하였다. 그리하여 좋은 날을 가려 제수를 갖추고 제관을 선택하였으며, 삼가 재계(齋戒)하고 기름진 희생(犧牲)과 향기로운 술을 담그는 그 의식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근자에 폐지되어 시행치 아니하거나 비록 혹 행한다 할지라도 거칠고 경솔하여 예절을 차리지 못하였다. 이 기록에서 잘 드러나듯이 무수동계가 결성되는 배경은 급속한 향촌사회의 변동이 전제된 것이었다. 즉 무수동은 유랑민의 급증으로 인구의 절반 정도가 떨어져나가고 민심의동요가 극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매년 안동 권씨의 주도하에 경건하게 지내오던 산신제조차 지속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을의 사정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따라서 안동 권씨 입장에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사족의 권위와 향촌지배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1844년(헌종 10)에 중단된 산신제를 복구하고자 마을에서 돈과 곡식을 갹출하여 비용을 마련하는 한편 예학에 밝은 문중의 원로 삼수부군(三守府君) 권구(權耈, 1769~1847)에게 알리어 축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겨우몇 해가 지나지 않아 또다시 산신제는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850년(철종 1)에 유명무실해진 산신제의 복구를 명분으로 내세워 의논을 정하고 재물을 모으게 된다. 이를계기로 안동 권씨와 하층민이 함께하는 동계를 출범시킴으로써 흔들리는 민심을 안착시키고 마을의 구심점을 공고히 하게 된 것이다. 실제 동계좌목에 등재된 60명의 명단을살펴보면 안동 권씨 23명을 비롯해 타성(他姓) 및 하민으로 보이는 37명이 적시되어 상하민이 함께 동계를 조직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무수동계가 성립되는 이면에는 당시 마을 사람들의 산신제에 대한 인식도 한몫 거들었다. 특히 안동 권씨 집안에서는 ‘산속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산신을 제사해야한다’고 생각할 만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무수동의 주산인 운람산은 인간에게 미치는 재복(灾福)이 여느 산과는 사뭇 다른 신비스런 산으로 경외의 대상이되었다. 그런 까닭에‘한 마을이 흥하고 망하는 것은 제사로써 증명이 된다’는 논리로 산신제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한편 “산신은 진실로 산의 주인이요, 우리 권씨 또한 마을의 주인이다”라고 그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19세기 중엽 중단된 산신제를 복구하고 마을의 안정을 도모할 목적으로 조직된 무수동계는 1950년대에 파산되고현재는 산신제만 전승되고 있다.

의의

무수동계문서는 19세기 반촌의 실상과 존폐의 기로에 봉착한 산신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동계첩의 서문에 기록된 것처럼 당시 반촌이었던 무수동은 가구의 절반이 유리될 만큼 극심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이에 마을의 주인인 안동 권씨 입장에서는 중단된 산신제의 복구를 대의명분으로 내세워 동계 결성을 주도함으로써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문서의 사료적 가치를 높여 주는 것은 19세기 중엽 산신제와 관련된 제반 준비절차와 의례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당시 사족층의 산신제에 대한 인식과 동향을 면밀하게 추적할 수 있다.

참조

대전무수동산신제

참고문헌

충남지방 장승ㆍ솟대신앙 (국립민속박물관, 1991)한국의 마을제당-충청도 (국립민속박물관, 2002)조선후기 대전 무수동 동계와 동제의 성격 (강성복, 충청민속문화론, 2005)조선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