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봉사(四代奉祀)

한자명

四代奉祀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제례

집필자 배영동(裵永東)

정의

유교식 제사에서 부모・조부・증조부・고조부까지 4대에 이르는 조상들의 제사를 받드는 일.

내용

사대봉사四代奉祀는 유교식 제사에서 부모로부터 고조부까지 4대에 이르는 조상들의 제사를 받드는 것을 말한다. 고려 말기 우리나라에 처음 유교식 제사가 도입되었을 때는 사대봉사가 아닌 차등봉사제였다. 봉사奉祀에 차등을 준 것은 중국의 종법제도宗法制度에 기반을 둔 것이다. 종법은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으로 구분하여 대종은 제사를 무한히 지속하고, 소종은 4대조까지 지속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후 주나라는 봉건제와 함께 『예기禮記』 「왕제王制」에서 시조를 제외하고 천자天子는 6대조까지, 제후諸侯는 4대조인 고조까지, 대부大夫는 조고祖考까지, 선비와 서인은 고비考妣만을 봉사하게 했다.

주나라의 붕괴와 함께 종법제도는 사라졌지만, 차등봉사와 적정자嫡長子 중심의 원리는 송나라의 종법인사대봉사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북송대사마광司馬光의 『서의書儀』에는 삼대봉사三代奉祀의 기록만 있는데, 정이程伊는 신분과 관계없이 복服을 입는 것이 고조이기 때문에 사대봉사를 주장하였다. 이에 영향을 받은 『주자가례朱子家禮』는 신분과 관계없이 사대봉사를 하도록 했다.

『주자가례』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이전인 고려말기 1390년(공양왕 2)에는 차등봉사를 규정한 법령에서, 대부 이상은 3대, 6품 이상은 2대, 7품 이하 서인은 부모만을 모시도록 했다. 이는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이어져 『경제육전經濟六典』 「예전禮典」 가묘봉사조家廟奉祀條에 그대로 수록되었다. 그러나 차등봉사제에 대한 논란은 고려 말기부터 시작되어 1427년(세종 9) 다시 한 번 논의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박연朴堧(1378~1458)이 『주자가례』에 따라 사대부는 4대조까지 봉사할 것을 상소한 것에서 시작하여, 신분과 관계없이 복을 입는 4대조까지 봉사를 하자는 주장과 제복의 차등은 물론 국가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신분과 관품에 따라 봉사 대수代數에 차등을 두어야한다는 의견이 대립하였다. 그러나 당시 4품 이상의 문신 가운데 사대봉사를 찬성한 사람은 4~5인에 불과하여 성립되지 못했다.

이후 1485년에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어 6품 이상의 관원은 3대, 7품 이하 관원은 2대, 서인은 부모만을 봉사하도록 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주자가례』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여 국가에서 의례의 정비를 도모하고자 했으나, 삼대봉사를 준수하는 『경국대전』을 반포함으로써 국법으로 제정된 삼대봉사를 실천해온 것이다. 그러다가 중종대中宗代에 『주자가례』를 적극적으로 실천한 사림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본격적으로 사대봉사가 거론되었으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중심으로 하되, 『주자가례』를 참고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면서 사림의 사대봉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림은 사화士禍 이후 중앙 정계에서 나와 『주자가례』를 실천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예서禮書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1547년 이현보李賢輔(1476~1555)의 『제례祭禮』, 1577년 이이李珥(1536~1584)의 『제의초(祭儀鈔)』 등에는 증조曾祖를 기준으로 한 삼대봉사三代奉祀를 규정하고 있어 16세기 초반까지도 삼대봉사를 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1550년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봉선잡의奉先雜儀』에서는 국법을 어길 수 없어 삼대봉사를 원칙으로 제례의 절차를 규정하였으나, 일반인들이 삼대봉사를 하는 것을 금하지 않아 사실상 차등봉사제를 인정하지 않았고, 고조高祖에 대한 묘제를 권장하면서 우회적으로 사대봉사를 인정했다. 권호문權好文(1532~1587)은 유서에서 적자든 서자든 모두가 삼대봉사를 하도록 허용했다.

이황李滉(1501~1570) 역시 사대봉사를 해도 무방하다고 했으나, 모든 사람에게 사대봉사를 요구하지 않아 국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에 영향을 받은 이황의 문인들은 사대봉사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며 실천하기 시작했다. 김성일金誠一(1538~1593)은 효孝의 논리에 따라 고조의 제사를 허용하였고, 오히려 국법을 핑계로 후손들이 제사를 소홀히 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렇게 영남 사림들은 『주자가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사대봉사를 수용하고 실천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이후 『주자가례』가 서민층까지 확대・보급됨에 따라 사대봉사가 정착되었다. 1973년 「가정의례준칙」에는 기제사는 2대에 한하여 봉사하도록 하였다. 최근에 삼대봉사, 이대봉사二代奉祀등 봉사의 대수를 줄이거나 조상의 제사를 한꺼번에 지내는 합사合祀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전통적 관행으로 여전히 사대봉사를 원칙으로 삼고 있다.

특징 및 의의

사대봉사는 전통적으로 부모부터 고조까지 이르는 4대 조상들의 신주를 사당에 모셔두고 제사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사당이 없는 일반 가정에서는 지방紙榜으로 대신하여 사대봉사를 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신분제에 따라 차등을 두어 봉사 대수를 달리했지만, 『주자가례』의 보급과 확산에 따라 조선 후기에는 서민층까지 사대봉사를 하게 되었다. 조상에 대한 봉사를 4대조까지 규정한 것은 생전에 만나서 ‘얼굴을 아는 조상’, 즉 면식조상面識祖上의 최대 범위가 고조까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조의 후손들은 유복친有服親이라하여 초상이 나면 상복을 함께 입는 친족의 범위이기도하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사대봉사를 원칙으로 하는 것은 최대 범위의 면식조상에 대한 효행의 연장선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제사와 제례문화(박원재・유권종・배영동 외, 한국국학진흥원, 2002), 조상제사 어떻게 지낼 것인가(이욱 외, 한국국학진흥원, 2012), 조선시대 사대봉사의 형성과정에 대한 일고찰(정긍식, 외국법제정보11, 한국법제연구원, 1996), 주자가례(임민혁 역, 예문서원, 1999), 차례와 제사(이영춘, 대원사, 1994), 한국의 제사(국립민속박물관, 2003).

사대봉사

사대봉사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제례

집필자 배영동(裵永東)

정의

유교식 제사에서 부모・조부・증조부・고조부까지 4대에 이르는 조상들의 제사를 받드는 일.

내용

사대봉사四代奉祀는 유교식 제사에서 부모로부터 고조부까지 4대에 이르는 조상들의 제사를 받드는 것을 말한다. 고려 말기 우리나라에 처음 유교식 제사가 도입되었을 때는 사대봉사가 아닌 차등봉사제였다. 봉사奉祀에 차등을 준 것은 중국의 종법제도宗法制度에 기반을 둔 것이다. 종법은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으로 구분하여 대종은 제사를 무한히 지속하고, 소종은 4대조까지 지속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후 주나라는 봉건제와 함께 『예기禮記』 「왕제王制」에서 시조를 제외하고 천자天子는 6대조까지, 제후諸侯는 4대조인 고조까지, 대부大夫는 조고祖考까지, 선비와 서인은 고비考妣만을 봉사하게 했다. 주나라의 붕괴와 함께 종법제도는 사라졌지만, 차등봉사와 적정자嫡長子 중심의 원리는 송나라의 종법인사대봉사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북송대사마광司馬光의 『서의書儀』에는 삼대봉사三代奉祀의 기록만 있는데, 정이程伊는 신분과 관계없이 복服을 입는 것이 고조이기 때문에 사대봉사를 주장하였다. 이에 영향을 받은 『주자가례朱子家禮』는 신분과 관계없이 사대봉사를 하도록 했다. 『주자가례』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이전인 고려말기 1390년(공양왕 2)에는 차등봉사를 규정한 법령에서, 대부 이상은 3대, 6품 이상은 2대, 7품 이하 서인은 부모만을 모시도록 했다. 이는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이어져 『경제육전經濟六典』 「예전禮典」 가묘봉사조家廟奉祀條에 그대로 수록되었다. 그러나 차등봉사제에 대한 논란은 고려 말기부터 시작되어 1427년(세종 9) 다시 한 번 논의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박연朴堧(1378~1458)이 『주자가례』에 따라 사대부는 4대조까지 봉사할 것을 상소한 것에서 시작하여, 신분과 관계없이 복을 입는 4대조까지 봉사를 하자는 주장과 제복의 차등은 물론 국가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신분과 관품에 따라 봉사 대수代數에 차등을 두어야한다는 의견이 대립하였다. 그러나 당시 4품 이상의 문신 가운데 사대봉사를 찬성한 사람은 4~5인에 불과하여 성립되지 못했다. 이후 1485년에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어 6품 이상의 관원은 3대, 7품 이하 관원은 2대, 서인은 부모만을 봉사하도록 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주자가례』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여 국가에서 의례의 정비를 도모하고자 했으나, 삼대봉사를 준수하는 『경국대전』을 반포함으로써 국법으로 제정된 삼대봉사를 실천해온 것이다. 그러다가 중종대中宗代에 『주자가례』를 적극적으로 실천한 사림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본격적으로 사대봉사가 거론되었으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중심으로 하되, 『주자가례』를 참고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면서 사림의 사대봉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림은 사화士禍 이후 중앙 정계에서 나와 『주자가례』를 실천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예서禮書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1547년 이현보李賢輔(1476~1555)의 『제례祭禮』, 1577년 이이李珥(1536~1584)의 『제의초(祭儀鈔)』 등에는 증조曾祖를 기준으로 한 삼대봉사三代奉祀를 규정하고 있어 16세기 초반까지도 삼대봉사를 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1550년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봉선잡의奉先雜儀』에서는 국법을 어길 수 없어 삼대봉사를 원칙으로 제례의 절차를 규정하였으나, 일반인들이 삼대봉사를 하는 것을 금하지 않아 사실상 차등봉사제를 인정하지 않았고, 고조高祖에 대한 묘제를 권장하면서 우회적으로 사대봉사를 인정했다. 권호문權好文(1532~1587)은 유서에서 적자든 서자든 모두가 삼대봉사를 하도록 허용했다. 이황李滉(1501~1570) 역시 사대봉사를 해도 무방하다고 했으나, 모든 사람에게 사대봉사를 요구하지 않아 국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에 영향을 받은 이황의 문인들은 사대봉사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며 실천하기 시작했다. 김성일金誠一(1538~1593)은 효孝의 논리에 따라 고조의 제사를 허용하였고, 오히려 국법을 핑계로 후손들이 제사를 소홀히 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렇게 영남 사림들은 『주자가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사대봉사를 수용하고 실천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이후 『주자가례』가 서민층까지 확대・보급됨에 따라 사대봉사가 정착되었다. 1973년 「가정의례준칙」에는 기제사는 2대에 한하여 봉사하도록 하였다. 최근에 삼대봉사, 이대봉사二代奉祀등 봉사의 대수를 줄이거나 조상의 제사를 한꺼번에 지내는 합사合祀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전통적 관행으로 여전히 사대봉사를 원칙으로 삼고 있다.

특징 및 의의

사대봉사는 전통적으로 부모부터 고조까지 이르는 4대 조상들의 신주를 사당에 모셔두고 제사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사당이 없는 일반 가정에서는 지방紙榜으로 대신하여 사대봉사를 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신분제에 따라 차등을 두어 봉사 대수를 달리했지만, 『주자가례』의 보급과 확산에 따라 조선 후기에는 서민층까지 사대봉사를 하게 되었다. 조상에 대한 봉사를 4대조까지 규정한 것은 생전에 만나서 ‘얼굴을 아는 조상’, 즉 면식조상面識祖上의 최대 범위가 고조까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조의 후손들은 유복친有服親이라하여 초상이 나면 상복을 함께 입는 친족의 범위이기도하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사대봉사를 원칙으로 하는 것은 최대 범위의 면식조상에 대한 효행의 연장선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제사와 제례문화(박원재・유권종・배영동 외, 한국국학진흥원, 2002), 조상제사 어떻게 지낼 것인가(이욱 외, 한국국학진흥원, 2012), 조선시대 사대봉사의 형성과정에 대한 일고찰(정긍식, 외국법제정보11, 한국법제연구원, 1996), 주자가례(임민혁 역, 예문서원, 1999), 차례와 제사(이영춘, 대원사, 1994), 한국의 제사(국립민속박물관,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