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후동동계문서

한자명

論山後洞洞文書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자료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2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대명리 후동에서 1859년 산신제의 재원을 마련할 목적으로 조직한 산제계 및 동계 관련 문서.

내용

후동동계문서는 『후동산제절목(後洞山祭節目)』·『동계기(洞稧記)』 등 4건이다. 이중에서 주목되는 문서는『 후동산제절목』이다. 이는 기미년(1859) 10월 후동에서 해마다음력 시월 초이튿날에 거행되는 산신제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주민들이 돈을 갹출하여 산제계를 조직하고 그 절목을 정리한 자료이다. 이 문서는 「설계좌목(設契座目)」, 「추입좌목(追入座目)」, 「하계좌목(下稧座目)」, 「제물건기(祭物件記)」,「 축문식(祝文式)」으로 구성되어 있다.

「설계좌목」은 계의 결성을 주도한 인물로 추정되는 유학 오원규(吳元奎, 1794년생)을 필두로 32명의 성명, 생년, 자, 이주 여부 등이 기록되었다. 이후에 작성된 「추입좌목」은 1860년부터 1911년까지 52년 동안 약 110명이 새로 가입한 명단이고, 「하계좌목」은 1859년에 등재된 5인 외에 15명의 이름이 추가로 실려 있다. 이로 미루어 설립 초기 산제계는 신분의 고하를 구별하지 않고 마을의 전체 구성원을 포괄하는 상하합계의 형태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서의 말미에는 산신제의 제수물목(祭需物目)인 「제물건기」와 「축문식」이 첨부되었다. 「제물건기」에는 산신제를 지낼 때 진설되는 쇠머리, 명태, 미역, 삼색실과(대추·밤·감), 백지, 반미(飯米)·병미(餠米)·객주미(客酒米) 등 제물의 종류가 기록되었고, 이와 함께 솥[土鼎], 시루, 병, 술항아리, 향로, 술잔, 작구점(酌具坫), 사발, 향, 송명(松明) 등 제기(祭器) 품목이 실려 있다. 「축문식」은 두 종류의 산신제축문이 기재되어 있는데, 앞에 실린 축문은 ‘해동조선국(海東朝鮮國) 충청우도(忠淸右道) 노성(魯城)상도면(上道面) 후동리(後洞里)’로 시작되는 구절로 보아 1859년 계를 조직할 때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에 있는 축문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에 작성된 것인데 한자로 된 원문의 중간에 한글 독음(讀音)을 달아 놓았다.

후동동계문서는 산제절목 외에 1860년부터 1952년까지 약 한 세기에 걸친 기록이 소실되었고, 이후 작성된 자료는 동계의 운영상황을 기록한『 동계기』이다. 여기에는 1953~1968년까지 마을의 세입세출 내역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 특히 기해년(1959) 10월 초사흗날에 열린 동계에서는 중수에 가까운 7개항의 결의사항이 채택되었다. 주요내용을간추리면 첫째는 계의 기본금은 장리(長利)로 하고 명년도에 이월할 것, 둘째는 추입자의 추입조는 백미 3두로 정하되 동계 재산의 증감에 따라 총회결의에 의하여 가감할 수 있으며, 기거주인이라도 분가자는 그 반액으로 할 것, 셋째는 자금의 관리는 전유사(錢有司)가 주관할 것, 넷째는 계원이 상을 당할 시에는 각 가구에서 1인씩 필히 조력할 것,다섯째는 동산에서 사사롭게 벌목을 하다가 송유사(松有司)에게 적발된 자는 한 짐의 송목대로 100원을 징수하고, 차후에는 벌송(伐松)을 엄단하기 위하여 한 짐에 300원을 부과할 것, 여섯째는 계원명부를 새롭게 작성할 것 등이다. 이에 의거하여 다시 작성된 좌목에 등재된 동계원은 모두 70명이다.『동계기』에 나타난 후동동계는 4명의 역원을 두고 마을의 대소사 및 재산을 관리했다. 곧 재정을 담당하는 전유사를 비롯해, 동유림의 남벌을 감시하는 송유사, 혼구(婚具)의 출납을 맡은 혼구유사, 산신제의 제물을 담당하는 공물유사(供物有司)가 그것이다. 또한 동사(洞事)를 관장하는 각 유사에게는 동계에서 매년 수고비 명목으로 백미 1~2두를 지급하는 것이 관례였다.

의의

후동동계문서는 19세기 중엽 이래 자연마을 단위로 치제되었던 산신제와 동계의 운영 모습이 잘 갈무리된 자료이다. 무엇보다 이 문서는 19세기 산신제의 제물과 제기 등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또한 지난 시기 후동에서 이루어졌던 다양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마을 운영에 필요한 재원의 확보와 기금의 식리(殖利), 마을 운영의 주체와 역원, 새로운 구성원에 대한 신입례, 해마다 산신제를 지내는 일, 동답(洞畓)의 관리, 혼례에 필수적인 동물(洞物)의 구비와 운용, 동산의 관리, 두레의 비용 등 진솔한 생활문화상이 생생하게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대전·충남지역 촌계류문서수집사업 최종보고서 (강성복·유병덕 외, 국사편찬위원회, 2008)
조선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논산후동동계문서

논산후동동계문서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자료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2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대명리 후동에서 1859년 산신제의 재원을 마련할 목적으로 조직한 산제계 및 동계 관련 문서.

내용

후동동계문서는 『후동산제절목(後洞山祭節目)』·『동계기(洞稧記)』 등 4건이다. 이중에서 주목되는 문서는『 후동산제절목』이다. 이는 기미년(1859) 10월 후동에서 해마다음력 시월 초이튿날에 거행되는 산신제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주민들이 돈을 갹출하여 산제계를 조직하고 그 절목을 정리한 자료이다. 이 문서는 「설계좌목(設契座目)」, 「추입좌목(追入座目)」, 「하계좌목(下稧座目)」, 「제물건기(祭物件記)」,「 축문식(祝文式)」으로 구성되어 있다. 「설계좌목」은 계의 결성을 주도한 인물로 추정되는 유학 오원규(吳元奎, 1794년생)을 필두로 32명의 성명, 생년, 자, 이주 여부 등이 기록되었다. 이후에 작성된 「추입좌목」은 1860년부터 1911년까지 52년 동안 약 110명이 새로 가입한 명단이고, 「하계좌목」은 1859년에 등재된 5인 외에 15명의 이름이 추가로 실려 있다. 이로 미루어 설립 초기 산제계는 신분의 고하를 구별하지 않고 마을의 전체 구성원을 포괄하는 상하합계의 형태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서의 말미에는 산신제의 제수물목(祭需物目)인 「제물건기」와 「축문식」이 첨부되었다. 「제물건기」에는 산신제를 지낼 때 진설되는 쇠머리, 명태, 미역, 삼색실과(대추·밤·감), 백지, 반미(飯米)·병미(餠米)·객주미(客酒米) 등 제물의 종류가 기록되었고, 이와 함께 솥[土鼎], 시루, 병, 술항아리, 향로, 술잔, 작구점(酌具坫), 사발, 향, 송명(松明) 등 제기(祭器) 품목이 실려 있다. 「축문식」은 두 종류의 산신제축문이 기재되어 있는데, 앞에 실린 축문은 ‘해동조선국(海東朝鮮國) 충청우도(忠淸右道) 노성(魯城)상도면(上道面) 후동리(後洞里)’로 시작되는 구절로 보아 1859년 계를 조직할 때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에 있는 축문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에 작성된 것인데 한자로 된 원문의 중간에 한글 독음(讀音)을 달아 놓았다. 후동동계문서는 산제절목 외에 1860년부터 1952년까지 약 한 세기에 걸친 기록이 소실되었고, 이후 작성된 자료는 동계의 운영상황을 기록한『 동계기』이다. 여기에는 1953~1968년까지 마을의 세입세출 내역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 특히 기해년(1959) 10월 초사흗날에 열린 동계에서는 중수에 가까운 7개항의 결의사항이 채택되었다. 주요내용을간추리면 첫째는 계의 기본금은 장리(長利)로 하고 명년도에 이월할 것, 둘째는 추입자의 추입조는 백미 3두로 정하되 동계 재산의 증감에 따라 총회결의에 의하여 가감할 수 있으며, 기거주인이라도 분가자는 그 반액으로 할 것, 셋째는 자금의 관리는 전유사(錢有司)가 주관할 것, 넷째는 계원이 상을 당할 시에는 각 가구에서 1인씩 필히 조력할 것,다섯째는 동산에서 사사롭게 벌목을 하다가 송유사(松有司)에게 적발된 자는 한 짐의 송목대로 100원을 징수하고, 차후에는 벌송(伐松)을 엄단하기 위하여 한 짐에 300원을 부과할 것, 여섯째는 계원명부를 새롭게 작성할 것 등이다. 이에 의거하여 다시 작성된 좌목에 등재된 동계원은 모두 70명이다.『동계기』에 나타난 후동동계는 4명의 역원을 두고 마을의 대소사 및 재산을 관리했다. 곧 재정을 담당하는 전유사를 비롯해, 동유림의 남벌을 감시하는 송유사, 혼구(婚具)의 출납을 맡은 혼구유사, 산신제의 제물을 담당하는 공물유사(供物有司)가 그것이다. 또한 동사(洞事)를 관장하는 각 유사에게는 동계에서 매년 수고비 명목으로 백미 1~2두를 지급하는 것이 관례였다.

의의

후동동계문서는 19세기 중엽 이래 자연마을 단위로 치제되었던 산신제와 동계의 운영 모습이 잘 갈무리된 자료이다. 무엇보다 이 문서는 19세기 산신제의 제물과 제기 등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또한 지난 시기 후동에서 이루어졌던 다양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마을 운영에 필요한 재원의 확보와 기금의 식리(殖利), 마을 운영의 주체와 역원, 새로운 구성원에 대한 신입례, 해마다 산신제를 지내는 일, 동답(洞畓)의 관리, 혼례에 필수적인 동물(洞物)의 구비와 운용, 동산의 관리, 두레의 비용 등 진솔한 생활문화상이 생생하게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대전·충남지역 촌계류문서수집사업 최종보고서 (강성복·유병덕 외, 국사편찬위원회, 2008)조선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