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부인당산제

한자명

論山夫人堂山祭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의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2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부인2리에서 해마다 음력 정월 열나흗날 자정에 부인당에 모신 당할머니에게 제사하는 의례.

역사

부인당산제는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에게 부인(夫人)의 칭호와 식읍(食邑)을 하사받은 무당을 당할머니로 모시는 의례이다. 그 역사는 분명치 않으나 부인당으로 인해 고려시대부인처(夫人處)라는 지명이 유래되었고, 이것은 조선시대 연산현 부인처면으로 이어졌다. 또한 부인의 제사를 받들기 위해 왕건이 하사한 제전(祭田)이 자리한 까닭에 제전리 또는 지밭(제밭)이란 마을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보아 부인당산제의 기원은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부인당 신모(神母)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연산현 고적조이다. 여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진을 치고있다가 꿈을 꾼 뒤 인근에 용한 무당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해몽을 하는 과정이 비교적 상세하게 실려 있다. 이후에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와 『호서읍지(湖西邑誌)』, 일제강점기에 전국의 명승고적을 군 단위로 정리한『 전선명승고적(全鮮名勝古蹟)』 등에도 부인당 사적이 소개되어 있다.『 여지도서』에 언급된 왕건과 무녀에얽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연산에 머물 때 홀연히 꿈을 꾸었다. 삼목(三木)을 등에 짊어지고 머리에는 큰 솥을 인 채 깊은 물에 빠지는 꿈이었다. 깨어나서 매우 나쁘다고 여겨 점을 잘 친다는 노파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친히 가서 묻고자 하였다. 그런데 태조가 도착하기 전에 그 노파는 일이 있어 외출을 하면서 자신의 딸에게 오늘 늦게 집으로 귀인이 올 것이니 너는 다만 그분을 머무르게 해서 기다리게 하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말을 많이 하지 말거라 하고 당부하였다. 늦은 시간에 과연 태조가 와서 꿈에 대하여 물었다. 그 딸이 불길하다고 대답하니 태조가 좋지 않은 마음으로 돌아갔다. 잠시 뒤 노파가 돌아와서 자기 딸에게 묻자 딸이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다.노파가 크게 놀라면서 몇 리나 가셨겠느냐 고 묻자 딸이 방금 갔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라고 대답했다. 딸로 하여금 급히 뒤쫓아 가서 돌아오기를 청하고, 태조가 오자 다시 점괘를 풀어서 말했다. 크게 길할 조짐입니다. 무릇 삼목을 등에 진 것은 임금 왕(王) 자를 이룸이요, 큰 솥을 머리에 인 것은 면류관을 쓴 것이요, 깊은 물에 들어간것은 용왕을 본 것입니다 라고 아뢰었다. 태조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말했다. 과연 그대 말과 같이 된다면 내가 그대의 공을 잊지 않을 것이오. 며칠 뒤에 과연 태조는대승을 거두었다. 태조는 노파의 말을 생각하여 노파를 부인 으로 봉하고, 그 거처하는 주변에 밭을 하사하여 식읍으로 삼게 했다. 노파가 죽자 동네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이로 인해 하사한 밭이 제전이 된 까닭에 그 면의 이름을 부인처라 하고 마을 이름을 제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기록은 18세기 중엽 부인당 고사가 관찬지리지에 공개적으로 소개될 만큼 유력한 설화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부인당의 유래담은 25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부인리를 비롯한 주변의 여러 마을에서 널리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무당 할머니가 부인의 칭호와 제전을 하사받은 시기, 죽은 뒤에 제당을 지어주었다는 사실만 다를 뿐이다. 이로 미루어『 여지도서』의 기록은 당시 민간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부인당 전설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동시에 그것은 부인당 전설을 후세에 확산시키는 데 힘의 원천으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부인당산제를 더욱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와 동일한 설화는 『여지도서』 이산현 고적조에 왕전(王田)의 유래담으로소개되기도 하였다. 또한 부인당 신모는 조선시대 중악단이 위치한 신원사와 계룡산신의 연기설화인 ‘연천봉 신모’ 및 ‘팥거리 할머니’로 치환되어 구전되고 있다.

부인당산제는 지난날 인근의 다섯 마을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성대한 제의였다. 그러나 이 제의는 함께 참여하던 마을이 배제되면서 부인리 지밭마을의 동제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마을에서는 이미 고인이 된 서우석·이태복·이근서 등이 주축이 되어 제를 지내 왔다. 그러나 열성으로 산제를 모시던 마을 사람들이 타계한 뒤에는 서로 제관하기를 기피하여 한때는 부녀자들이 산제를 모시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여의치 않게 되자 최근에는 유사와 제관을 뽑지 않고 이장,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이 사실상 부인당산제의 명맥을 잇고 있다.

내용

속칭 산제당으로 불리는 부인당은 지밭마을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들판에 위치한다. 본래 이곳은 야트막한 구릉으로서 주위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었으나 몇 차례 경지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모두 논으로 개간되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제당은 단칸 기와집으로 건축되었으며, 내부에는 부인당의 유래와 축문이 기록된 액자가 걸려 있다. 액자 밑에 설치된 제상 위에는 ‘부인영신(夫人靈神)’이라 쓴 신위가 놓여 있다. 일제강점기 말까지도 주벽에는 ‘조영부인영신(窕英夫人靈神)’이라 묵서한 편액이 걸려 있었다. 당할머니를 모신 부인당은 마을에서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신앙되었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평소에 그 주변을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특히 부정한 사람이나 산모 등의 접근은 매우 금기시했다. 이런 연유로 80여 년을 살아온 노인들마저 지금까지 한번도 부인당산제를 구경하지 못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1. 제관의 선정과 금기 : 부인당산제는 매년 정월 열나흗날 자정에 거행된다. 제관은 정월 초사흗날 무렵에 부정하지 않은 다복한 노인 중에서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닿는 주민들 가운데에서 뽑는다. 제관은 흔히‘산제 잡숫는 사람’ 또는 ‘유사(有司)’라고 부르는데, 으레 부부를 함께 선정하여 제를 주관하도록 한다. 축관은 마을에서 한문에 능한사람이 맡는다.

    선출된 제관은 엄격한 금기를 수행한다. 제관은 자신의 집 대문 앞에 왼새끼로 꼰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서 마을 사람들의 방문을 일절 금한다. 부인당에도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편다. 이때 오물이 섞이지 않은 붉은 흙을 파다가 마을에서 부인당 입구까지 길게 황토를 한 줌씩 뿌린다. 일주일 전부터 제관은 부인당 뒤편에 있는 도랑으로 가 매일 밤얼음을 깨고 찬물로 목욕재계를 한다. 제관은 술과 담배를 금해야 하며 비린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젓갈이 들어간 김치조차 먹지 않는다. 이 뿐만 아니라 그해제관으로서 산제를 모신 사람은 1년 동안 부정한 장소에 가지 않는다. 이를 어기면 자신은 물론 마을에 우환이 닥치는 까닭에 이웃에서 초상이 나도 문상을 가지 않았다. 실제아내가 임신한 줄을 모르고 산제를 모셨다가 동티가 나서 제관을 지낸 본인과 아이가 죽었다든가, 산제를 잘못 모신 탓에 가족이 화를 당했다는 이야기는 마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일화이다. 이렇듯 산제를 주관할 제관에게는 유난히 까다로운 금기가 적용되는 탓에 예전에는 1년 전에 미리 원로들이 상의하여 적임자를 선정하고 언행을 조심하도록했다고 한다. 금기가 엄했던 당시에는 제관과 축관이 여자가 없는 가정을 택하여 그 집에서 일주일을 함께 숙식하며 정성을 들였고, 이 기간에는 누구도 제관이 머무는 곳에 침범할 수 없었다고 한다.

  2. 공동체 금기 : 마을에서도 정월 초열흘날 이후에는 각별히 조심한다. 그래서 온 마을 사람들은 산제가 3~4일 앞으로 다가오면 고기는 물론 멸치나 새우젓이 들어간 음식을 먹지 않고, 부정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매사에 주의를 기울였다. 특히 살생을 금기시하여 파리, 빈대, 이도 잡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빨래도 꺼렸으며 집안에서 도마질을 하거나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갈 때에는 부상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런가 하면 산제 당일에 마을로 들어온 사람은 제사가 끝난 뒤에야 동구 밖으로 내보냈을 정도로 부정을 가렸다. 한편 제관이 선출되면 마을 사람들은 풍장을 치고 가서 부인당 앞에 두레의 농기를 세워 놓는다. 농기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묵서되어 있으며, 산제가 끝난 뒤에도한동안 그대로 세워 두었다가 2월 초하루가 되기 전에 내린다. 농기를 세우는 것에는 머지않아 산제를 지낸다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동시에 당할머니가 제당에 깃들기를 염원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3. 제전 및 비용 : 산제 비용은 40~50만 원이 소요되며, 예부터 제전(현재는 논)에서 나오는 쌀로 충당한다.『여지도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당할머니의 제전은 고려 태조 왕건이 하사한 밭인데 무녀가 죽은 뒤에 동네 사람들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면서 제전이 된 것이다. 전하는 말로는 그 땅이 얼마나 넓었는지 마을에서 보이는 곳은 모두 제전에 속했으며, 80여 년 전까지도 대부분 부인당의 제답(祭畓)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이 제전은 그해 제관으로 임명된 사람에게 경작권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 제관은 마을에서 적임자를 선정하되 가족이 단출하고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 뽑았다. 제전을 농사짓는 사람은 도조(賭租)를 내는 대신 그 곡식으로 산제의 제수 비용을 부담하고 음식을 준비했다. 한편 산제에 올릴 메를 수확하게 될 논에는 네 귀퉁이에 대나무를 꽂고 왼새끼로 금줄을 쳤다고 한다. 이것은 들쥐나 조류, 기타 해충 따위가 감히 범접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만큼 주민들은 산제를 신성시하여 제물을 준비함에 있어서도 부정함이 없도록 정성을 들였다.

  4. 제수 준비 제물은 시루떡, 메, 삼색실과, 전, 조기, 탕, 산적, 나물(고사리·도라지·콩나물) 등이다. 종류는 기제사(忌祭祀)와 대동소이하지만 과일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채 진설하고, 술 대신 식혜를 쓰며, 탕으로 소탕(素湯)만 쓰되 어류와 육류를 넣은 어탕(魚湯)이나 육탕(肉湯)은 올리지 않는다. 또한 이 제의는 흔히 산신제의 희생물로 바치는 돼지머리나 쇠머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며, 닭도 쓰지 않는다. 이것은 부인당에 좌정한 당할머니의 신격이 실존한 무녀인 것과 관련이 깊다. 제물은 하루 전에 구입하며, 시장을 오가는 중에 부정한 것을 피하고 상인과 값을 흥정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이 뿐만 아니라 유사의 집에서 음식을 조리할 때에도 침이 튀지 않도록 입마개를 하고 도중에 말을 하지 않는 등의 금기가 수반된다. 제기는 자기로 된 주전자와 대접, 잔을 비롯하여 예부터 내려오는 해묵은 그릇이 있었으나 도둑을 맞아 소실되었다.

    정월 열사흗날이 되면 동네 청년들은 화톳불로 사용할 땔감을 구하러 간다. 밤을 꼬박 지새우며 산제를 지내려면 나무가 여러 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들판에 자리한 지밭은 땔나무가 매우 귀해 20리 이상 화목(땔나무) 원정을 떠나기 일쑤였으며, 이로 인해 더러는 다른 마을과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인색한 산주인이라 하더라도 당할머니 제사에 필요한 나무라고 하면 묵인해 주었다고 한다.

  5. 부인당산제 제물은 당일 오후에 유사의 집에서 준비한다. 이윽고 땅거미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면 유사는 지게에 제물을 지고 부인당으로 향한다. 이때 징잡이가 힘차게 징을울리면서 함께 간다. 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잠시 뒤에 산제가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이다. 이 소리를 듣고 개별적으로 치성을 드리는 집에서는 마짐시루(마중시루)를 안치한다.부인당에 도착한 유사는 당내에 마련된 제상에 차례로 제물을 진설한다. 예전에는 부정을 막기 위하여 모든 제물을 하나하나 백지로 싸서 가지고 갔다고 한다. 유사는 미리 준비해 둔 화목으로 불을 지펴 두었다가 밤 10시쯤이 되면 화톳불에 메를 올린다. 유사가 메를 지어서 제상에 올리면 징잡이는 다시 한 번 징을 울린다. 이는 각 가정에서도 마짐시루를 떼어서 장독대(당산이라고도부름)나 마당으로 옮기고 치성을 드리라는 신호이다. 이것은 당할머니를 극진히 위하는 집에서 부인당의 산제가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가정의 평안과 무병제액을 비는 당산고사를 올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이다.

    부인당산제는 기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제차는 분향-강신-헌작-독축-헌작-첨작 순으로 진행한다. 헌작은 술 대신 식혜를 쓴다. 산제의 마지막 절차로 거행하는 소지는 대통령의 소지를 필두로 도지사, 논산시장, 면장, 이장, 새마을지도자 순으로 행한다. 이어서 제관은 각 가정의 대주소지와 이웃마을 이장, 지역 유지들의 소지를 고사덕담으로 축원해 준다. 다만 상중인 사람은 부정하다 하여 소지에서 제외하는 것이 관례이다. 예전에 다섯 마을이 합동으로 산제를 모실 때에는 해당 동리의 대주소지도 모두 올려주었다고한다. 그렇게 수백 장의 소지를 일일이 올려야 하는 까닭에 산제는 새벽녘이 되어야 마칠 수 있었다.

  6. 대보름 걸립 소지를 끝으로 산제가 마무리되면 징잡이는 징을 쳐서 주민들에게 알린다. 유사와 축관은 즉석에서 간단하게 음복을 하고 제상에 올린 제물은 시냇물에 띄워 보낸다. 이것은 산제 지낸 음식을 먹은 사람은 반드시 화를 당한다는 속설이 전하기 때문이다. 산제를 마치면 풍물패가 마중을 나와 길군악을 울리며 마을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튿날인 정월대보름날에는 오전부터 풍물패가 가가호호를 돌며 지신밟기로 축원해 준다. 이때 풍물패가 집 안으로 들어서면 뒤꼍 당산(장독대)으로 가서 당산굿을 친 다음 부엌(조왕굿), 마루(성주굿), 마당(마당굿)을 차례로 돌며 액운이 없기를 기원한다. 풍물패를 맞이한 집에서는 푸짐하게 주안상을 차려 이들을 대접하고, 온 마을 사람들은 진종일 풍물놀이를 벌이면서 흥겨운 대보름날을 보낸다.

참고문헌

輿地圖書
全鮮名勝古蹟
忠淸道邑誌
湖西邑誌
태조왕건 전설과 논산 부인당산제의 성격 (강성복, 충청민속문화론, 민속원, 2005)

논산부인당산제

논산부인당산제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의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2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부인2리에서 해마다 음력 정월 열나흗날 자정에 부인당에 모신 당할머니에게 제사하는 의례.

역사

부인당산제는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에게 부인(夫人)의 칭호와 식읍(食邑)을 하사받은 무당을 당할머니로 모시는 의례이다. 그 역사는 분명치 않으나 부인당으로 인해 고려시대부인처(夫人處)라는 지명이 유래되었고, 이것은 조선시대 연산현 부인처면으로 이어졌다. 또한 부인의 제사를 받들기 위해 왕건이 하사한 제전(祭田)이 자리한 까닭에 제전리 또는 지밭(제밭)이란 마을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보아 부인당산제의 기원은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부인당 신모(神母)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연산현 고적조이다. 여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진을 치고있다가 꿈을 꾼 뒤 인근에 용한 무당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해몽을 하는 과정이 비교적 상세하게 실려 있다. 이후에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와 『호서읍지(湖西邑誌)』, 일제강점기에 전국의 명승고적을 군 단위로 정리한『 전선명승고적(全鮮名勝古蹟)』 등에도 부인당 사적이 소개되어 있다.『 여지도서』에 언급된 왕건과 무녀에얽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연산에 머물 때 홀연히 꿈을 꾸었다. 삼목(三木)을 등에 짊어지고 머리에는 큰 솥을 인 채 깊은 물에 빠지는 꿈이었다. 깨어나서 매우 나쁘다고 여겨 점을 잘 친다는 노파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친히 가서 묻고자 하였다. 그런데 태조가 도착하기 전에 그 노파는 일이 있어 외출을 하면서 자신의 딸에게 오늘 늦게 집으로 귀인이 올 것이니 너는 다만 그분을 머무르게 해서 기다리게 하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말을 많이 하지 말거라 하고 당부하였다. 늦은 시간에 과연 태조가 와서 꿈에 대하여 물었다. 그 딸이 불길하다고 대답하니 태조가 좋지 않은 마음으로 돌아갔다. 잠시 뒤 노파가 돌아와서 자기 딸에게 묻자 딸이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다.노파가 크게 놀라면서 몇 리나 가셨겠느냐 고 묻자 딸이 방금 갔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라고 대답했다. 딸로 하여금 급히 뒤쫓아 가서 돌아오기를 청하고, 태조가 오자 다시 점괘를 풀어서 말했다. 크게 길할 조짐입니다. 무릇 삼목을 등에 진 것은 임금 왕(王) 자를 이룸이요, 큰 솥을 머리에 인 것은 면류관을 쓴 것이요, 깊은 물에 들어간것은 용왕을 본 것입니다 라고 아뢰었다. 태조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말했다. 과연 그대 말과 같이 된다면 내가 그대의 공을 잊지 않을 것이오. 며칠 뒤에 과연 태조는대승을 거두었다. 태조는 노파의 말을 생각하여 노파를 부인 으로 봉하고, 그 거처하는 주변에 밭을 하사하여 식읍으로 삼게 했다. 노파가 죽자 동네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이로 인해 하사한 밭이 제전이 된 까닭에 그 면의 이름을 부인처라 하고 마을 이름을 제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기록은 18세기 중엽 부인당 고사가 관찬지리지에 공개적으로 소개될 만큼 유력한 설화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부인당의 유래담은 25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부인리를 비롯한 주변의 여러 마을에서 널리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무당 할머니가 부인의 칭호와 제전을 하사받은 시기, 죽은 뒤에 제당을 지어주었다는 사실만 다를 뿐이다. 이로 미루어『 여지도서』의 기록은 당시 민간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부인당 전설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동시에 그것은 부인당 전설을 후세에 확산시키는 데 힘의 원천으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부인당산제를 더욱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와 동일한 설화는 『여지도서』 이산현 고적조에 왕전(王田)의 유래담으로소개되기도 하였다. 또한 부인당 신모는 조선시대 중악단이 위치한 신원사와 계룡산신의 연기설화인 ‘연천봉 신모’ 및 ‘팥거리 할머니’로 치환되어 구전되고 있다. 부인당산제는 지난날 인근의 다섯 마을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성대한 제의였다. 그러나 이 제의는 함께 참여하던 마을이 배제되면서 부인리 지밭마을의 동제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마을에서는 이미 고인이 된 서우석·이태복·이근서 등이 주축이 되어 제를 지내 왔다. 그러나 열성으로 산제를 모시던 마을 사람들이 타계한 뒤에는 서로 제관하기를 기피하여 한때는 부녀자들이 산제를 모시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여의치 않게 되자 최근에는 유사와 제관을 뽑지 않고 이장,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이 사실상 부인당산제의 명맥을 잇고 있다.

내용

속칭 산제당으로 불리는 부인당은 지밭마을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들판에 위치한다. 본래 이곳은 야트막한 구릉으로서 주위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었으나 몇 차례 경지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모두 논으로 개간되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제당은 단칸 기와집으로 건축되었으며, 내부에는 부인당의 유래와 축문이 기록된 액자가 걸려 있다. 액자 밑에 설치된 제상 위에는 ‘부인영신(夫人靈神)’이라 쓴 신위가 놓여 있다. 일제강점기 말까지도 주벽에는 ‘조영부인영신(窕英夫人靈神)’이라 묵서한 편액이 걸려 있었다. 당할머니를 모신 부인당은 마을에서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신앙되었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평소에 그 주변을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특히 부정한 사람이나 산모 등의 접근은 매우 금기시했다. 이런 연유로 80여 년을 살아온 노인들마저 지금까지 한번도 부인당산제를 구경하지 못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제관의 선정과 금기 : 부인당산제는 매년 정월 열나흗날 자정에 거행된다. 제관은 정월 초사흗날 무렵에 부정하지 않은 다복한 노인 중에서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닿는 주민들 가운데에서 뽑는다. 제관은 흔히‘산제 잡숫는 사람’ 또는 ‘유사(有司)’라고 부르는데, 으레 부부를 함께 선정하여 제를 주관하도록 한다. 축관은 마을에서 한문에 능한사람이 맡는다. 선출된 제관은 엄격한 금기를 수행한다. 제관은 자신의 집 대문 앞에 왼새끼로 꼰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서 마을 사람들의 방문을 일절 금한다. 부인당에도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편다. 이때 오물이 섞이지 않은 붉은 흙을 파다가 마을에서 부인당 입구까지 길게 황토를 한 줌씩 뿌린다. 일주일 전부터 제관은 부인당 뒤편에 있는 도랑으로 가 매일 밤얼음을 깨고 찬물로 목욕재계를 한다. 제관은 술과 담배를 금해야 하며 비린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젓갈이 들어간 김치조차 먹지 않는다. 이 뿐만 아니라 그해제관으로서 산제를 모신 사람은 1년 동안 부정한 장소에 가지 않는다. 이를 어기면 자신은 물론 마을에 우환이 닥치는 까닭에 이웃에서 초상이 나도 문상을 가지 않았다. 실제아내가 임신한 줄을 모르고 산제를 모셨다가 동티가 나서 제관을 지낸 본인과 아이가 죽었다든가, 산제를 잘못 모신 탓에 가족이 화를 당했다는 이야기는 마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일화이다. 이렇듯 산제를 주관할 제관에게는 유난히 까다로운 금기가 적용되는 탓에 예전에는 1년 전에 미리 원로들이 상의하여 적임자를 선정하고 언행을 조심하도록했다고 한다. 금기가 엄했던 당시에는 제관과 축관이 여자가 없는 가정을 택하여 그 집에서 일주일을 함께 숙식하며 정성을 들였고, 이 기간에는 누구도 제관이 머무는 곳에 침범할 수 없었다고 한다. 공동체 금기 : 마을에서도 정월 초열흘날 이후에는 각별히 조심한다. 그래서 온 마을 사람들은 산제가 3~4일 앞으로 다가오면 고기는 물론 멸치나 새우젓이 들어간 음식을 먹지 않고, 부정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매사에 주의를 기울였다. 특히 살생을 금기시하여 파리, 빈대, 이도 잡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빨래도 꺼렸으며 집안에서 도마질을 하거나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갈 때에는 부상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런가 하면 산제 당일에 마을로 들어온 사람은 제사가 끝난 뒤에야 동구 밖으로 내보냈을 정도로 부정을 가렸다. 한편 제관이 선출되면 마을 사람들은 풍장을 치고 가서 부인당 앞에 두레의 농기를 세워 놓는다. 농기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묵서되어 있으며, 산제가 끝난 뒤에도한동안 그대로 세워 두었다가 2월 초하루가 되기 전에 내린다. 농기를 세우는 것에는 머지않아 산제를 지낸다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동시에 당할머니가 제당에 깃들기를 염원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제전 및 비용 : 산제 비용은 40~50만 원이 소요되며, 예부터 제전(현재는 논)에서 나오는 쌀로 충당한다.『여지도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당할머니의 제전은 고려 태조 왕건이 하사한 밭인데 무녀가 죽은 뒤에 동네 사람들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면서 제전이 된 것이다. 전하는 말로는 그 땅이 얼마나 넓었는지 마을에서 보이는 곳은 모두 제전에 속했으며, 80여 년 전까지도 대부분 부인당의 제답(祭畓)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이 제전은 그해 제관으로 임명된 사람에게 경작권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 제관은 마을에서 적임자를 선정하되 가족이 단출하고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 뽑았다. 제전을 농사짓는 사람은 도조(賭租)를 내는 대신 그 곡식으로 산제의 제수 비용을 부담하고 음식을 준비했다. 한편 산제에 올릴 메를 수확하게 될 논에는 네 귀퉁이에 대나무를 꽂고 왼새끼로 금줄을 쳤다고 한다. 이것은 들쥐나 조류, 기타 해충 따위가 감히 범접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만큼 주민들은 산제를 신성시하여 제물을 준비함에 있어서도 부정함이 없도록 정성을 들였다. 제수 준비 제물은 시루떡, 메, 삼색실과, 전, 조기, 탕, 산적, 나물(고사리·도라지·콩나물) 등이다. 종류는 기제사(忌祭祀)와 대동소이하지만 과일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채 진설하고, 술 대신 식혜를 쓰며, 탕으로 소탕(素湯)만 쓰되 어류와 육류를 넣은 어탕(魚湯)이나 육탕(肉湯)은 올리지 않는다. 또한 이 제의는 흔히 산신제의 희생물로 바치는 돼지머리나 쇠머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며, 닭도 쓰지 않는다. 이것은 부인당에 좌정한 당할머니의 신격이 실존한 무녀인 것과 관련이 깊다. 제물은 하루 전에 구입하며, 시장을 오가는 중에 부정한 것을 피하고 상인과 값을 흥정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이 뿐만 아니라 유사의 집에서 음식을 조리할 때에도 침이 튀지 않도록 입마개를 하고 도중에 말을 하지 않는 등의 금기가 수반된다. 제기는 자기로 된 주전자와 대접, 잔을 비롯하여 예부터 내려오는 해묵은 그릇이 있었으나 도둑을 맞아 소실되었다. 정월 열사흗날이 되면 동네 청년들은 화톳불로 사용할 땔감을 구하러 간다. 밤을 꼬박 지새우며 산제를 지내려면 나무가 여러 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들판에 자리한 지밭은 땔나무가 매우 귀해 20리 이상 화목(땔나무) 원정을 떠나기 일쑤였으며, 이로 인해 더러는 다른 마을과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인색한 산주인이라 하더라도 당할머니 제사에 필요한 나무라고 하면 묵인해 주었다고 한다. 부인당산제 제물은 당일 오후에 유사의 집에서 준비한다. 이윽고 땅거미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면 유사는 지게에 제물을 지고 부인당으로 향한다. 이때 징잡이가 힘차게 징을울리면서 함께 간다. 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잠시 뒤에 산제가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이다. 이 소리를 듣고 개별적으로 치성을 드리는 집에서는 마짐시루(마중시루)를 안치한다.부인당에 도착한 유사는 당내에 마련된 제상에 차례로 제물을 진설한다. 예전에는 부정을 막기 위하여 모든 제물을 하나하나 백지로 싸서 가지고 갔다고 한다. 유사는 미리 준비해 둔 화목으로 불을 지펴 두었다가 밤 10시쯤이 되면 화톳불에 메를 올린다. 유사가 메를 지어서 제상에 올리면 징잡이는 다시 한 번 징을 울린다. 이는 각 가정에서도 마짐시루를 떼어서 장독대(당산이라고도부름)나 마당으로 옮기고 치성을 드리라는 신호이다. 이것은 당할머니를 극진히 위하는 집에서 부인당의 산제가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가정의 평안과 무병제액을 비는 당산고사를 올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이다. 부인당산제는 기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제차는 분향-강신-헌작-독축-헌작-첨작 순으로 진행한다. 헌작은 술 대신 식혜를 쓴다. 산제의 마지막 절차로 거행하는 소지는 대통령의 소지를 필두로 도지사, 논산시장, 면장, 이장, 새마을지도자 순으로 행한다. 이어서 제관은 각 가정의 대주소지와 이웃마을 이장, 지역 유지들의 소지를 고사덕담으로 축원해 준다. 다만 상중인 사람은 부정하다 하여 소지에서 제외하는 것이 관례이다. 예전에 다섯 마을이 합동으로 산제를 모실 때에는 해당 동리의 대주소지도 모두 올려주었다고한다. 그렇게 수백 장의 소지를 일일이 올려야 하는 까닭에 산제는 새벽녘이 되어야 마칠 수 있었다. 대보름 걸립 소지를 끝으로 산제가 마무리되면 징잡이는 징을 쳐서 주민들에게 알린다. 유사와 축관은 즉석에서 간단하게 음복을 하고 제상에 올린 제물은 시냇물에 띄워 보낸다. 이것은 산제 지낸 음식을 먹은 사람은 반드시 화를 당한다는 속설이 전하기 때문이다. 산제를 마치면 풍물패가 마중을 나와 길군악을 울리며 마을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튿날인 정월대보름날에는 오전부터 풍물패가 가가호호를 돌며 지신밟기로 축원해 준다. 이때 풍물패가 집 안으로 들어서면 뒤꼍 당산(장독대)으로 가서 당산굿을 친 다음 부엌(조왕굿), 마루(성주굿), 마당(마당굿)을 차례로 돌며 액운이 없기를 기원한다. 풍물패를 맞이한 집에서는 푸짐하게 주안상을 차려 이들을 대접하고, 온 마을 사람들은 진종일 풍물놀이를 벌이면서 흥겨운 대보름날을 보낸다.

참고문헌

輿地圖書全鮮名勝古蹟忠淸道邑誌湖西邑誌태조왕건 전설과 논산 부인당산제의 성격 (강성복, 충청민속문화론, 민속원,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