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인고사

한자명

烙印告祀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가정신앙 > 제의

집필자 문무병(文武秉)
갱신일 2018-12-20

정의

소나 말의 엉덩이에 개인이나 마을의 소유를 구분하기 위하여 낙인을 찍는 날 간단한 제물을 차리고 지내는 고사. 제주도지역에서는 봄이 되면 한라산에 마소를 풀어 놓아 기르다가 추운 겨울이 오면 집에서 기르는 목축방법을 이용한다. 이를 ‘방목(放牧)’이라고 한다. 제주도의 각 마을에서는 한라산에 방목 하는 마소를 거둘 때 마소의 소유자를 확인하고 구분할 수 있는 표시가 필요하였다.

유래

제주도는 한라산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해변으로 이어져 산허리인 중․산간 지대는 광활한 목장을 이루고 있다. 이에 따라 제주도 중․산간 마을 사람들은 반농․반목축의 경제생활을 하였다. 이 지역은 예부터 마소를 방목하기에 적합한 목초지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고대사에도 호양우돈(好養牛豚)하였다고 했다. 탐라국 건국시조 신화인 삼성신화에도 식파오곡차목구독(植播五穀且牧駒犢, 영주지)하여 나라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이는 목축이 오래전부터 제주인의 주요 생업이 되어 왔음을 증거한다.

1276년(충렬왕 2) 7월에 초토사(招討司)를 군민총관부(軍民摠管府)라 고치고 탐라치[塔刺赤]를 다루가치로 삼아 보내었다. 그리고 말 160마리를 몰고 와서 수산평(首山坪, 지금의 성산읍 수산리)에 방목하였다. 이것이 목마장의 시초였다고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목장은 조선시대에는 전국 53곳에 국영목장을 설치하고 점차 제도화하였다.

1429년(세종 11)에 제주 출신 고득종(高得宗)의 건의에 따라 목마장을 한라산 산록으로 옮기어 축장(築場, 잣성)하게 되었다. 이때 목마장을 10소장으로 나누었다. 1소장(所場)에서 6소장까지는 제주목, 7․8소장은 대정현, 9․10소장은 정의현에 각각 속하였다. 목장관리 총책임자는 제주목사이다. 제주판관, 정의현감은 감목관직을 겸임하였다. 감목관 밑에는 목장 관리 책임자로 마감(馬監)과 우감(牛監)이 있었다. 그 밑으로는 군두(群頭)․군부(群副), 맨 밑에는 우마 사육을 직접 담당하는 테우리(牧者)가 각각 있었다. 군두는 테우리 가운데 성적이 우수한 자로 임명하였다. 50마리를 둔마(屯馬) 단위로 하여 두 명의 테우리가 사육을 책임졌다. 각 둔마의 구별은 천자문 글자를 낙인(烙印)으로 사용하였다. 제주목에서는 38자, 정의현에서는 17자, 대정현에서는 3자를 각각 사용하였다. “마둔은 매우 많아 천지현황으로 글자를 배정하여 둔의 이름을 삼았다.”는 제주풍토기의 기록은 이와 같은 사실을 잘 보여준다. 국영목장에서는 암말 100마리와 수말 15마리를 하나의 생산조직으로 하여 여러 자목장으로 세분화하였다. 자목장별로 가축에게 천지현황 등 천자문으로 낙인하여 우마의 소속을 분명히 하고 분실을 예방한 것이다.

민가의 우마들도 우마적에 올려 사사로이 도축하거나 거래하는 것을 금했다. 이때도 관에서는 낙인을 하여 기록 관리하였다. 또한 목야지에서 방목 위주로 가축을 키우다 보면 가축들은 풀을 찾아 사방으로 돌아다니게 되고, 번식기 또는 발정기에는 짝을 찾아 다른 목장까지 침범하거나 먼 곳까지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경우 자기 우마를 찾고 소유를 분명히 하는 방법으로 낙인이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내용

  1. 테우리[牧者]와 방목 : ‘테우리’는 목자 또는 목동의 제주어이다. 테우리는 마소를 관리하는 일 이외에 조밭을 밟는 일과 ‘바령팟’을 만드는 일 등을 하였다. 단오를 넘기고 보리를 거두어들인 밭을 갈아엎고 조씨를 뿌린다. 이때 씨앗이 땅에 잘 심어지라고 말떼를 밭에 몰아넣어 씨를 뿌린 밭을 밟게 되는데 이를 ‘조밭 밟기’라 한다. 말떼를 잘 부리는 노련한 테우리일수록 좁은 밭 안에서 질서정연하게 밟도록 말떼를 몰 수 있다. 테우리는 말떼를 부리는 한 방법으로 구성지게 소리를 한다. 이를 ‘밧 리는 소리(밭 밟는 소리)’라고 한다. 말을 몰아가며 노래하는 과정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띤다. 보리 경작이 잘되게 하려고 밤에 마소떼를 밭 안에 몰아넣어 그 분뇨를 받아 거름이 되게 하였다. 이를 ‘바령한다[糞田之道]’라고 하고, 이런 밭을 ‘바령팟’이라 하였다.

  2. 곶․곶쉐[野馬野牛] : 테우리의 기량은 마소를 잘 몰고 다루는 것과 함께 풀어놓아 기르는 마소를 밧줄로 걸어 묶어 잡아들이는 특수한 기량도 있어야 한다. 이런 기량의 소유자만이 곶․곶쉐를 다루는 종년방목을 할 수 있다. 제주 사람들은 소와 말의 대량 사육을 필요로 하게 됨에 따라 사람 손이 덜 드는 자연방목을 강구하였다. 이것이 ‘곶․곶쉐’이다. 일 년 내내 우마를 산에 놓아 방목하는 것을 종년방목, 산에 올린 소를 ‘산․산쉐’ 또는 ‘곶․곶쉐’라고 하였다.

  3. 낙인(烙印)과 귀표고사[耳標告祀] : 낙인은 불에 달구어 물건에 찍는 쇠도장이나 구리도장이다. 방목 가축에다 낙인을 하면 여러 가지로 편리하다. 대가축인 소나 말의 개체 표시를 하기 위해 몸의 어느 부위에 표시기로 찍는다. 말에는 엉덩이의 바깥쪽에, 소에는 뿔 또는 발굽에 생산지․생산자․등록번호 등을 불에 달궈 낙인(烙印)으로 찍는다. 소의 몸통에 찍지 않는 것은 가축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낙인은 보통 망아지나 송아지 때인 ‘금승[今生, 한살]’에 실시하였다. 이는 비교적 보정하기가 쉽고 조기에 하는 것이 가축 분실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장인들이 쇠로 글자 또는 특정 표시를 새기면 불에 달구어서 신체의 특정 부위를 지졌다. 이 표시는 없어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게 된다. 보통 엉덩이 대퇴부에 많이 했다. 귀나 다른 신체 부위에 하는 경우도 있었다.

    ‘쉬귀패(馬牛耳標)’는 마소의 귀에 표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음력 10월 상사일(上巳日)에는 소에 귀표[耳標]를 한다. 이때가 되면 소 임자(둔주)들은 새 곡식으로 ‘산듸돌레떡(밭벼로 둥그렇게 만든 떡)’나 ‘조오매기떡(좁쌀로 만든 떡)’을 만들어 제물을 차려 놓고 제를 지낸다. 이를 ‘귀표사[耳標告祀]’라고 한다. ‘귀표사’는 ‘방둥사’라고도 한다. 이 고사에는 ‘우마를 지금부터 간수하니 곡식밭을 주의하라’는 경계의 의미가 있다. 여기서 ‘귀표를 한다는 것’은 금승 송아지의 귀 한 부분을 도려내고 엉덩이에 낙인을 찍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때 도려낸 귀 한 부분은 구워서 ‘귀표사’의 제물로 쓴다. 송아지 엉덩이에 찍는 글자는 마을 단위로 새긴다. 마을에서는 집안마다 달리하여 구분한다. 이는 산에 우마를 놓아 ‘쉬를 꾼다(우마를 방목한다)’하더라도 소유주를 구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 집안에 속해 있는 ‘귀표’를 한 번 낙인으로 정하면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 부득이한 일로 새 낙인으로 갈아야 할 경우에는 장인(匠人, 낙인을 만드는 사람)에게 삯으로 반드시 무명 한 필을 주어야 만들어 준다고 한다. 옛날에는 낙인 만드는 일을 법으로 금하고 있어서 새 낙인을 만들려면 관가에 원문을 첨부해 청원했고 낙점(승낙)을 받은 이후에 비로소 낙인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귀표사(방둥사)’가 끝나면, 마소가 곡식밭에 들어가 남의 곡식을 먹어도 보상을 받지 못한다.

    낙인은 짚신에 썩은 오줌을 묻혀서 닦으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낙인을 찍는 부위는 대부분 대퇴부이다. 간혹 귀에 할 때도 있다. 표의 형은 각양각색이지만 자연촌 단위로 되어있다. 그 마을 안의 동성집단, 특히 독자적인 것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수기동(水基洞)의 포인(勹印), 대흘리 하늘촌의 복인(卜印), 교래리 대인(大印)은 우마가 통통하게 살찌도록 하는 바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동성집단의 표는 마을의 표와 함께 예를 들어 ‘대(大)’, ‘인(卩)’처럼 차용된다. 말에는 대체로 귀를 자르는 방식으로 구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때로는 표를 차용하기도 한다.

    새로 태어난 새끼를 자기 것으로 확인하는 일은 엉덩이에 낙인을 찍거나 귀표를 해 놓는 방법을 택하였다. 낙인은 무로 자기의 성이나 정해진 약자를 만든 것이다. 이것을 불에 달구어서 짐승의 네 발을 묶고 넘어뜨린 다음 엉덩이를 지진다. 한 예로 성산읍 고성리의 경우 ‘을(乙)’자, 이 마을 홍씨 집안에선 ‘토(土)’자, 오씨 집에선 ‘복(卜)’자 낙인을 찍었다.

    귀를 자르거나 표시하고 숫자가 새겨진 니켈로 귀표 하는 방법은 훨씬 나중에 이루어졌다. 니켈 방법에서는 귀를 ‘V’자나 ‘W’자로 잘라내었으며, 보통 시월 첫 자일(子日)에 제를 지낸 다음 시행하였다. 이와 같이 낙인찍는 작업은 비단 새끼에만 한한 것이 아니었다. 해가 지나면서 희미해지기 때문에 ‘곶․곶쉐’뿐만 아니라 한라산이나 목장에 풀어 놓기 위해 다 자란 소들까지도 낙인을 찍었다.

지역사례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서는 낙인으로 ‘ㄱ’자를 많이 사용했다. 그다음은 ‘우(又)’자, 작대기를 사용하였다. 지금도 그 낙인을 쓴다. 마을목장이 있기 때문에 게인의 소와 하도리의 소를 구분하려면 낙인이 있어야 하였다. 봄에 소를 풀어 목장에 놓으려면 낙인을 해야 한다. 몇 개월이 지나면 송아지가 자라기 때문에 각자의 소를 구분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리고 소의 색깔은 일 년에 네 번 바뀌기 때문에 낙인을 해 놓지 않으면 자신의 소를 알아볼 수가 없다. 낙인은 양력 5월에 한다. 낙인을 지질 때 간단하게 술과 제물을 차려놓고 제를 지냈다.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서는 성씨마다 낙인 표시가 다르다. 양씨는 ‘품(品)’자, 김씨는 ‘읍(邑)’자, 오씨는 ‘본(本)’자, 고씨는 ‘凹’자를 썼다. 이곳에서는 낙인하는 것을 ‘낙인 지르기’, ‘낙인 놓기’, ‘낙인 주기’라 한다. 귀표를 함에 있어서도 집안마다 다르다. 양씨 는 머리카락 끝을 잘랐다. 오씨는 귀를 위아래 두 개로 잘랐다. 그리고 김씨는 귀 끝을 두 개로 쨌다.

성산읍 고성리에서는 10월 첫 자일(子日)에 제를 지내고 귀에다 표를 한다. 방목을 하기 때문에 고성리 우마를 구분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고성리는 그때 뱀사(巳)자 낙인을 찍었고, 홍씨 댁에선 토(土)자, 오씨 댁에선 복(卜)자 낙인을 찍었다. 그리고 귀에는 ‘V’자나 ‘W’식으로 잘라내었다.

엉덩이에 낙인찍는 날은 10월 들어서 첫 쥐날[子日]에 한다. 우적(牛籍)과 같은 것이다. ‘사(巳)’자가 찍힌 고성리의 소가 다른 마을에 가면 그 마을에서는 고성리로 소를 돌려보냈다. 제주시 봉개동에서는 여름에 마소를 산에다 부리는 집에서 산으로 가기 전에 밭벼밭을 밟을 때 마소를 몰고 가서 낙인을 하였다. 말 100여 마리를 밭에 몰아다 놓고 큰 말도 다 눕혀서 낙인을 한다. 100마리가 넘는 말에 낙인을 하고 난 뒤 술과 하얀 쌀밥을 올려 제를 올렸다.

구좌읍 송당리 대천동에 있는 홍씨 집안에서는 ‘사(巳)’자를 썼다. 낙인을 찍는 것도 기술이다. 소를 눌러서 발을 묶은 다음 낙인을 찍는다. 말은 눕혀서 꼬리를 잡고 낙인을 찍는다. 낙인을 할 때 불을 달궈 너무 지지면 살이 타고 위험하기 때문에 낙인찍을 곳에 살짝 대어 가죽만 타게 한다. 낙인고사는 간단히 하지만 시루떡도 장만하고 귀표하면서 자른 고기도 구워먹는다.

귀표하고 낙인할 때 귀 자르는 방법도 마을마다 다르다. 예를 들면 오른쪽 귀를 자른 것은 제주시 소, 왼쪽 귀를 자른 소는 남군 소라는 식으로 구분하였다.

낙인은 보통 소를 방목하기 위해 산에 올리는 봄에 하지만 가을에 하는 사람도 있다. 가을에 찍은 낙인은 선명하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면 봄에 한 낙인은 잘 보이지 않아 가을에 다시 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瀛洲誌, 耽羅志, 濟州風土記, 남국의 민속-제주도 무속 (진성기, 교학사, 1975)
한국민속대사전 1 (민속문화사, 1991)
제주의 민속 Ⅱ (제주도지편찬위원회, 1998)
제주의 마을 (오성찬 외, 반석출판사, 2002)
제주도지 7 (제주도지편찬위원회, 제주특별자치도, 2006)

낙인고사

낙인고사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가정신앙 > 제의

집필자 문무병(文武秉)
갱신일 2018-12-20

정의

소나 말의 엉덩이에 개인이나 마을의 소유를 구분하기 위하여 낙인을 찍는 날 간단한 제물을 차리고 지내는 고사. 제주도지역에서는 봄이 되면 한라산에 마소를 풀어 놓아 기르다가 추운 겨울이 오면 집에서 기르는 목축방법을 이용한다. 이를 ‘방목(放牧)’이라고 한다. 제주도의 각 마을에서는 한라산에 방목 하는 마소를 거둘 때 마소의 소유자를 확인하고 구분할 수 있는 표시가 필요하였다.

유래

제주도는 한라산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해변으로 이어져 산허리인 중․산간 지대는 광활한 목장을 이루고 있다. 이에 따라 제주도 중․산간 마을 사람들은 반농․반목축의 경제생활을 하였다. 이 지역은 예부터 마소를 방목하기에 적합한 목초지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고대사에도 호양우돈(好養牛豚)하였다고 했다. 탐라국 건국시조 신화인 삼성신화에도 식파오곡차목구독(植播五穀且牧駒犢, 영주지)하여 나라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이는 목축이 오래전부터 제주인의 주요 생업이 되어 왔음을 증거한다. 1276년(충렬왕 2) 7월에 초토사(招討司)를 군민총관부(軍民摠管府)라 고치고 탐라치[塔刺赤]를 다루가치로 삼아 보내었다. 그리고 말 160마리를 몰고 와서 수산평(首山坪, 지금의 성산읍 수산리)에 방목하였다. 이것이 목마장의 시초였다고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목장은 조선시대에는 전국 53곳에 국영목장을 설치하고 점차 제도화하였다. 1429년(세종 11)에 제주 출신 고득종(高得宗)의 건의에 따라 목마장을 한라산 산록으로 옮기어 축장(築場, 잣성)하게 되었다. 이때 목마장을 10소장으로 나누었다. 1소장(所場)에서 6소장까지는 제주목, 7․8소장은 대정현, 9․10소장은 정의현에 각각 속하였다. 목장관리 총책임자는 제주목사이다. 제주판관, 정의현감은 감목관직을 겸임하였다. 감목관 밑에는 목장 관리 책임자로 마감(馬監)과 우감(牛監)이 있었다. 그 밑으로는 군두(群頭)․군부(群副), 맨 밑에는 우마 사육을 직접 담당하는 테우리(牧者)가 각각 있었다. 군두는 테우리 가운데 성적이 우수한 자로 임명하였다. 50마리를 둔마(屯馬) 단위로 하여 두 명의 테우리가 사육을 책임졌다. 각 둔마의 구별은 천자문 글자를 낙인(烙印)으로 사용하였다. 제주목에서는 38자, 정의현에서는 17자, 대정현에서는 3자를 각각 사용하였다. “마둔은 매우 많아 천지현황으로 글자를 배정하여 둔의 이름을 삼았다.”는 제주풍토기의 기록은 이와 같은 사실을 잘 보여준다. 국영목장에서는 암말 100마리와 수말 15마리를 하나의 생산조직으로 하여 여러 자목장으로 세분화하였다. 자목장별로 가축에게 천지현황 등 천자문으로 낙인하여 우마의 소속을 분명히 하고 분실을 예방한 것이다. 민가의 우마들도 우마적에 올려 사사로이 도축하거나 거래하는 것을 금했다. 이때도 관에서는 낙인을 하여 기록 관리하였다. 또한 목야지에서 방목 위주로 가축을 키우다 보면 가축들은 풀을 찾아 사방으로 돌아다니게 되고, 번식기 또는 발정기에는 짝을 찾아 다른 목장까지 침범하거나 먼 곳까지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경우 자기 우마를 찾고 소유를 분명히 하는 방법으로 낙인이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내용

테우리[牧者]와 방목 : ‘테우리’는 목자 또는 목동의 제주어이다. 테우리는 마소를 관리하는 일 이외에 조밭을 밟는 일과 ‘바령팟’을 만드는 일 등을 하였다. 단오를 넘기고 보리를 거두어들인 밭을 갈아엎고 조씨를 뿌린다. 이때 씨앗이 땅에 잘 심어지라고 말떼를 밭에 몰아넣어 씨를 뿌린 밭을 밟게 되는데 이를 ‘조밭 밟기’라 한다. 말떼를 잘 부리는 노련한 테우리일수록 좁은 밭 안에서 질서정연하게 밟도록 말떼를 몰 수 있다. 테우리는 말떼를 부리는 한 방법으로 구성지게 소리를 한다. 이를 ‘밧 리는 소리(밭 밟는 소리)’라고 한다. 말을 몰아가며 노래하는 과정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띤다. 보리 경작이 잘되게 하려고 밤에 마소떼를 밭 안에 몰아넣어 그 분뇨를 받아 거름이 되게 하였다. 이를 ‘바령한다[糞田之道]’라고 하고, 이런 밭을 ‘바령팟’이라 하였다. 곶․곶쉐[野馬野牛] : 테우리의 기량은 마소를 잘 몰고 다루는 것과 함께 풀어놓아 기르는 마소를 밧줄로 걸어 묶어 잡아들이는 특수한 기량도 있어야 한다. 이런 기량의 소유자만이 곶․곶쉐를 다루는 종년방목을 할 수 있다. 제주 사람들은 소와 말의 대량 사육을 필요로 하게 됨에 따라 사람 손이 덜 드는 자연방목을 강구하였다. 이것이 ‘곶․곶쉐’이다. 일 년 내내 우마를 산에 놓아 방목하는 것을 종년방목, 산에 올린 소를 ‘산․산쉐’ 또는 ‘곶․곶쉐’라고 하였다. 낙인(烙印)과 귀표고사[耳標告祀] : 낙인은 불에 달구어 물건에 찍는 쇠도장이나 구리도장이다. 방목 가축에다 낙인을 하면 여러 가지로 편리하다. 대가축인 소나 말의 개체 표시를 하기 위해 몸의 어느 부위에 표시기로 찍는다. 말에는 엉덩이의 바깥쪽에, 소에는 뿔 또는 발굽에 생산지․생산자․등록번호 등을 불에 달궈 낙인(烙印)으로 찍는다. 소의 몸통에 찍지 않는 것은 가축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낙인은 보통 망아지나 송아지 때인 ‘금승[今生, 한살]’에 실시하였다. 이는 비교적 보정하기가 쉽고 조기에 하는 것이 가축 분실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장인들이 쇠로 글자 또는 특정 표시를 새기면 불에 달구어서 신체의 특정 부위를 지졌다. 이 표시는 없어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게 된다. 보통 엉덩이 대퇴부에 많이 했다. 귀나 다른 신체 부위에 하는 경우도 있었다. ‘쉬귀패(馬牛耳標)’는 마소의 귀에 표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음력 10월 상사일(上巳日)에는 소에 귀표[耳標]를 한다. 이때가 되면 소 임자(둔주)들은 새 곡식으로 ‘산듸돌레떡(밭벼로 둥그렇게 만든 떡)’나 ‘조오매기떡(좁쌀로 만든 떡)’을 만들어 제물을 차려 놓고 제를 지낸다. 이를 ‘귀표사[耳標告祀]’라고 한다. ‘귀표사’는 ‘방둥사’라고도 한다. 이 고사에는 ‘우마를 지금부터 간수하니 곡식밭을 주의하라’는 경계의 의미가 있다. 여기서 ‘귀표를 한다는 것’은 금승 송아지의 귀 한 부분을 도려내고 엉덩이에 낙인을 찍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때 도려낸 귀 한 부분은 구워서 ‘귀표사’의 제물로 쓴다. 송아지 엉덩이에 찍는 글자는 마을 단위로 새긴다. 마을에서는 집안마다 달리하여 구분한다. 이는 산에 우마를 놓아 ‘쉬를 꾼다(우마를 방목한다)’하더라도 소유주를 구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 집안에 속해 있는 ‘귀표’를 한 번 낙인으로 정하면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 부득이한 일로 새 낙인으로 갈아야 할 경우에는 장인(匠人, 낙인을 만드는 사람)에게 삯으로 반드시 무명 한 필을 주어야 만들어 준다고 한다. 옛날에는 낙인 만드는 일을 법으로 금하고 있어서 새 낙인을 만들려면 관가에 원문을 첨부해 청원했고 낙점(승낙)을 받은 이후에 비로소 낙인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귀표사(방둥사)’가 끝나면, 마소가 곡식밭에 들어가 남의 곡식을 먹어도 보상을 받지 못한다. 낙인은 짚신에 썩은 오줌을 묻혀서 닦으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낙인을 찍는 부위는 대부분 대퇴부이다. 간혹 귀에 할 때도 있다. 표의 형은 각양각색이지만 자연촌 단위로 되어있다. 그 마을 안의 동성집단, 특히 독자적인 것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수기동(水基洞)의 포인(勹印), 대흘리 하늘촌의 복인(卜印), 교래리 대인(大印)은 우마가 통통하게 살찌도록 하는 바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동성집단의 표는 마을의 표와 함께 예를 들어 ‘대(大)’, ‘인(卩)’처럼 차용된다. 말에는 대체로 귀를 자르는 방식으로 구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때로는 표를 차용하기도 한다. 새로 태어난 새끼를 자기 것으로 확인하는 일은 엉덩이에 낙인을 찍거나 귀표를 해 놓는 방법을 택하였다. 낙인은 무로 자기의 성이나 정해진 약자를 만든 것이다. 이것을 불에 달구어서 짐승의 네 발을 묶고 넘어뜨린 다음 엉덩이를 지진다. 한 예로 성산읍 고성리의 경우 ‘을(乙)’자, 이 마을 홍씨 집안에선 ‘토(土)’자, 오씨 집에선 ‘복(卜)’자 낙인을 찍었다. 귀를 자르거나 표시하고 숫자가 새겨진 니켈로 귀표 하는 방법은 훨씬 나중에 이루어졌다. 니켈 방법에서는 귀를 ‘V’자나 ‘W’자로 잘라내었으며, 보통 시월 첫 자일(子日)에 제를 지낸 다음 시행하였다. 이와 같이 낙인찍는 작업은 비단 새끼에만 한한 것이 아니었다. 해가 지나면서 희미해지기 때문에 ‘곶․곶쉐’뿐만 아니라 한라산이나 목장에 풀어 놓기 위해 다 자란 소들까지도 낙인을 찍었다.

지역사례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서는 낙인으로 ‘ㄱ’자를 많이 사용했다. 그다음은 ‘우(又)’자, 작대기를 사용하였다. 지금도 그 낙인을 쓴다. 마을목장이 있기 때문에 게인의 소와 하도리의 소를 구분하려면 낙인이 있어야 하였다. 봄에 소를 풀어 목장에 놓으려면 낙인을 해야 한다. 몇 개월이 지나면 송아지가 자라기 때문에 각자의 소를 구분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리고 소의 색깔은 일 년에 네 번 바뀌기 때문에 낙인을 해 놓지 않으면 자신의 소를 알아볼 수가 없다. 낙인은 양력 5월에 한다. 낙인을 지질 때 간단하게 술과 제물을 차려놓고 제를 지냈다.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서는 성씨마다 낙인 표시가 다르다. 양씨는 ‘품(品)’자, 김씨는 ‘읍(邑)’자, 오씨는 ‘본(本)’자, 고씨는 ‘凹’자를 썼다. 이곳에서는 낙인하는 것을 ‘낙인 지르기’, ‘낙인 놓기’, ‘낙인 주기’라 한다. 귀표를 함에 있어서도 집안마다 다르다. 양씨 는 머리카락 끝을 잘랐다. 오씨는 귀를 위아래 두 개로 잘랐다. 그리고 김씨는 귀 끝을 두 개로 쨌다. 성산읍 고성리에서는 10월 첫 자일(子日)에 제를 지내고 귀에다 표를 한다. 방목을 하기 때문에 고성리 우마를 구분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고성리는 그때 뱀사(巳)자 낙인을 찍었고, 홍씨 댁에선 토(土)자, 오씨 댁에선 복(卜)자 낙인을 찍었다. 그리고 귀에는 ‘V’자나 ‘W’식으로 잘라내었다. 엉덩이에 낙인찍는 날은 10월 들어서 첫 쥐날[子日]에 한다. 우적(牛籍)과 같은 것이다. ‘사(巳)’자가 찍힌 고성리의 소가 다른 마을에 가면 그 마을에서는 고성리로 소를 돌려보냈다. 제주시 봉개동에서는 여름에 마소를 산에다 부리는 집에서 산으로 가기 전에 밭벼밭을 밟을 때 마소를 몰고 가서 낙인을 하였다. 말 100여 마리를 밭에 몰아다 놓고 큰 말도 다 눕혀서 낙인을 한다. 100마리가 넘는 말에 낙인을 하고 난 뒤 술과 하얀 쌀밥을 올려 제를 올렸다. 구좌읍 송당리 대천동에 있는 홍씨 집안에서는 ‘사(巳)’자를 썼다. 낙인을 찍는 것도 기술이다. 소를 눌러서 발을 묶은 다음 낙인을 찍는다. 말은 눕혀서 꼬리를 잡고 낙인을 찍는다. 낙인을 할 때 불을 달궈 너무 지지면 살이 타고 위험하기 때문에 낙인찍을 곳에 살짝 대어 가죽만 타게 한다. 낙인고사는 간단히 하지만 시루떡도 장만하고 귀표하면서 자른 고기도 구워먹는다. 귀표하고 낙인할 때 귀 자르는 방법도 마을마다 다르다. 예를 들면 오른쪽 귀를 자른 것은 제주시 소, 왼쪽 귀를 자른 소는 남군 소라는 식으로 구분하였다. 낙인은 보통 소를 방목하기 위해 산에 올리는 봄에 하지만 가을에 하는 사람도 있다. 가을에 찍은 낙인은 선명하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면 봄에 한 낙인은 잘 보이지 않아 가을에 다시 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瀛洲誌, 耽羅志, 濟州風土記, 남국의 민속-제주도 무속 (진성기, 교학사, 1975)한국민속대사전 1 (민속문화사, 1991)제주의 민속 Ⅱ (제주도지편찬위원회, 1998)제주의 마을 (오성찬 외, 반석출판사, 2002)제주도지 7 (제주도지편찬위원회, 제주특별자치도,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