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천내리용호석

한자명

錦山川內里龍虎石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신체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2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에서 동제의 대상으로 치성을 받던 용석(龍石)과 호석(虎石). 1973년 12월 24일에‘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천내리 서쪽으로 금강변 제원대교 인근에 고려시대 말기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용호석이 있다. 용석은 제원대교 북쪽 50m 지점에 있고, 그곳에서 230m 떨어진 들판에 호석이있다. 용석은 70×80㎝가량 되는 부정형의 대석 위에 조각되었다. 구름 문양이 소용돌이치는 돌기 사이에 꿈틀거리며 승천하는 용의 모습이 역동적으로 묘사되었다.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사슴뿔 모양의 수염이 세밀하게 조각되었다. 호석은 110×80㎝의 네모난 받침돌 위에 앞발을 세우고 앉아서 포효하는 호랑이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두툼하게 융기된 곡선과 원형을 교대로 조각하여 털무늬를 표현하였다. 호랑이의 몸은 서쪽, 머리는 북쪽을 각각 향하고 있다. 왼쪽 발에 꼬리가 감긴 채 잔뜩 힘이 들어간 것은수호신으로서 긴장을 늦추지 않은 모습이다. 천내리를 기준으로 마을 앞 왼쪽에 용석, 오른쪽에 호석이 위치하여 좌청룡·우백호의 좌향(坐向)을 따르고 있다. 크기는 용석이 높이 138㎝와 폭 81㎝이며 호석은 높이 140㎝이다.

역사

천내리용호석은 애당초 동제의 신앙 대상물이 아니라 공민왕의 능묘석으로 건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구전에 따르면 고려 말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안동으로 피란온 공민왕이 지관에게 자신의 능묘를 정하도록 하였다. 지관이 금산 동쪽 20리 지점으로 태백산의 지맥이 떨어진 곳에 명당이 있다고 하자 공민왕은 필요한 석물을 갖추도록 했다. 그것이 지금의용호석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민왕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 피살되면서 방치되었다고 한다.

역사에 전하는 공민왕은 원나라의 오랜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국권 회복을 꾀한 군주였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과 잇따른 내부 반란으로 개경이 함락되는 등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공민왕은 개경을 버리고 경기도 이천을 거쳐 충북 음성, 충주, 죽령을 넘어 복주(지금의 안동)로 떠났다. 이듬해 공민왕의 환도 행렬은“상주를 떠나 보은 원암을 지나서 옥주[옥천]에 한동안 머물다가 다시 회인을 거쳐서 청주로 갔다”고『 고려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공민왕이 옥천에 이르렀을 때 머무른 장소는 영국사(寧國寺)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용호석이 공민왕의 지시로 만들어진 석물이 사실이라면 이 기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서기 668년에 창건된 영국사는 공민왕이 국태민안을 기원한 사찰이라 하여 그 이름을 개칭한 것이다. 이런 연유로 사찰 주변에는 공민왕과 관련된 수많은 전설과 지명이 전해지고있다. 공민왕이 개경을 바라보며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망탑봉과 속칭 공민왕망탑이라 불리는 3층석탑(보물 제535호)이 예이다. 또한 옥새와 노국공주를 숨겼다는 옥새봉, 공민왕을 호종한 6조의 대신들이 몸을 숨긴 육조골, 노국공주와 공민왕이 가죽으로 다리를 놓아 밤마다 상봉했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유다리 또는 누교리 등도 있다.

공민왕의 재위 기간은 대내외적인 시련기였다.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잦은 국난을 당하였고, 안으로는 누차에 걸친 반란과 역모 사건이 발생하여 왕실의 안위는 풍전등화 그 자체였다. 이로 인해 오랜 행궁생활을 감수해야 한 공민왕으로서는 목숨마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공민왕이 금산 천내리에 능소를 정하고 장차 석물로 사용될 용호석을 제작한 것이 사실이라면 용호석 제작은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의식 속에서 추진되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풍수지리상 요인도 빼놓을 수 없다. 천내리는 강원도 태백산에서 뻗어내린 한 지맥이 멈춘 곳이다. 풍수설에서는‘선인부사도강형(仙人浮槎渡江形)’, 즉 신선이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는 형국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환도 후 공민왕이 그토록 총애한 왕비 노국공주가 1365년에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뜬다. 그 충격으로 실의에 잠긴 공민왕은 방탕한 생활을 하며 정신병적 증세를 보인다. 그러다가 1374년에 공민왕이 마침내 신하에게 무참히 살해되는 비운을 맞이함으로써 천내리 능소는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방치된 용호석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좌정하여 천내리 주민들에게 동제로 치성을 받게 되었다.

내용

천내리에서는 매년 정월 초사흗날 자정에 산신제를 지낸 뒤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용호석제를 지냈으나 중단되었다. 엄격한 금기가 요구되는 산신제와 달리 용호석제는 단지 하루전 또는 당일 아침에 용석과 호석에 왼새끼를 두르고 황토를 뿌렸을 뿐 마을에서 크게 꺼리는 일은 없었다. 제관은 마을에서 부정하지 않은 사람으로 선정하였으며, 제를 앞두고 사흘 동안 정성을 들였다. 제물은 용석과 호석에 올릴 백설기, 돼지머리, 삼색실과, 포, 나물, 탕 등을 각각 준비하되 용왕신을 치제하는 용석제에는 미역을 따로 준비했다. 용호석제는 해질 무렵에 거행되었고,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그 제차는 용석에 먼저 헌작 재배하고 소지를 올린 뒤 호석 앞으로 가서 마을의 안녕과 가가호호의 무병제액을 축원했다. 용호석제를 마치면 더 두고 흠향하라는 뜻으로 떡과 제물을 조금씩 떼어 놓고 온다. 이때 아이들은 이 음식을 먼저 먹으면 그해에 재수가 좋다고 하여 용호석제가 끝나기 무섭게 앞을 다투었다.

용호석은 천내리에서 개별적으로 치성을 드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하여 매년 정초나 칠월 칠석, 시월상달에는 제수를 갖추어서 집안이 무탈하기를 기원했다. 특히 후사를 두지못했거나 우환이 있는 가정은 신심으로 용호석을 위했다. 마을에서는 그 영험으로 아들을 얻었다 하여 태어난 아이에게 호석이란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한편 천내리에서는 금강을 건너기 위해 예부터 전담 사공을 두고 나룻배를 운영했다. 이를 위해 몇 년마다 주기적으로 배걸립굿을 통해 배의 건조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 천내나루 배걸립굿이 대표적이다. 이 굿은 비단 금산 관내뿐만 아니라 충북 옥천·영동 및 무주 일원을 망라하는 대규모의 걸립굿이었다. 상쇠·장구잽이 등은 걸출한 솜씨를 자랑하는 전문 풍물꾼을 초빙하여 걸립단을 구성했다. 걸립이 시작되는 날 총대를 멘 화주(化主)는 걸립단을 대동하고 용석과 호석에 간단하게 제를 지낸 뒤 가까운 마을부터 걸립에들어갔다. 즉 마을의 수호신으로 치성을 받는 용석과 호석을 돌며 출정을 알리는 제향을 베풀고, 이로써 걸립단의 안전과 원만한 걸립이 이루어지도록 기원한 것이다.

참고문헌

천내강 배걸립굿 (강성복, 금산문화원, 1999)
高麗思 (공민왕과 금산 용호석의 비밀, 강성복, 국사편찬위원회 회보, 2002)
충청남도 문화재대관 2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 2009)

금산천내리용호석

금산천내리용호석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신체

집필자 강성복(姜成福)
갱신일 2018-12-12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에서 동제의 대상으로 치성을 받던 용석(龍石)과 호석(虎石). 1973년 12월 24일에‘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천내리 서쪽으로 금강변 제원대교 인근에 고려시대 말기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용호석이 있다. 용석은 제원대교 북쪽 50m 지점에 있고, 그곳에서 230m 떨어진 들판에 호석이있다. 용석은 70×80㎝가량 되는 부정형의 대석 위에 조각되었다. 구름 문양이 소용돌이치는 돌기 사이에 꿈틀거리며 승천하는 용의 모습이 역동적으로 묘사되었다.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사슴뿔 모양의 수염이 세밀하게 조각되었다. 호석은 110×80㎝의 네모난 받침돌 위에 앞발을 세우고 앉아서 포효하는 호랑이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두툼하게 융기된 곡선과 원형을 교대로 조각하여 털무늬를 표현하였다. 호랑이의 몸은 서쪽, 머리는 북쪽을 각각 향하고 있다. 왼쪽 발에 꼬리가 감긴 채 잔뜩 힘이 들어간 것은수호신으로서 긴장을 늦추지 않은 모습이다. 천내리를 기준으로 마을 앞 왼쪽에 용석, 오른쪽에 호석이 위치하여 좌청룡·우백호의 좌향(坐向)을 따르고 있다. 크기는 용석이 높이 138㎝와 폭 81㎝이며 호석은 높이 140㎝이다.

역사

천내리용호석은 애당초 동제의 신앙 대상물이 아니라 공민왕의 능묘석으로 건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구전에 따르면 고려 말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안동으로 피란온 공민왕이 지관에게 자신의 능묘를 정하도록 하였다. 지관이 금산 동쪽 20리 지점으로 태백산의 지맥이 떨어진 곳에 명당이 있다고 하자 공민왕은 필요한 석물을 갖추도록 했다. 그것이 지금의용호석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민왕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 피살되면서 방치되었다고 한다. 역사에 전하는 공민왕은 원나라의 오랜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국권 회복을 꾀한 군주였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과 잇따른 내부 반란으로 개경이 함락되는 등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공민왕은 개경을 버리고 경기도 이천을 거쳐 충북 음성, 충주, 죽령을 넘어 복주(지금의 안동)로 떠났다. 이듬해 공민왕의 환도 행렬은“상주를 떠나 보은 원암을 지나서 옥주[옥천]에 한동안 머물다가 다시 회인을 거쳐서 청주로 갔다”고『 고려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공민왕이 옥천에 이르렀을 때 머무른 장소는 영국사(寧國寺)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용호석이 공민왕의 지시로 만들어진 석물이 사실이라면 이 기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서기 668년에 창건된 영국사는 공민왕이 국태민안을 기원한 사찰이라 하여 그 이름을 개칭한 것이다. 이런 연유로 사찰 주변에는 공민왕과 관련된 수많은 전설과 지명이 전해지고있다. 공민왕이 개경을 바라보며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망탑봉과 속칭 공민왕망탑이라 불리는 3층석탑(보물 제535호)이 예이다. 또한 옥새와 노국공주를 숨겼다는 옥새봉, 공민왕을 호종한 6조의 대신들이 몸을 숨긴 육조골, 노국공주와 공민왕이 가죽으로 다리를 놓아 밤마다 상봉했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유다리 또는 누교리 등도 있다. 공민왕의 재위 기간은 대내외적인 시련기였다.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잦은 국난을 당하였고, 안으로는 누차에 걸친 반란과 역모 사건이 발생하여 왕실의 안위는 풍전등화 그 자체였다. 이로 인해 오랜 행궁생활을 감수해야 한 공민왕으로서는 목숨마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공민왕이 금산 천내리에 능소를 정하고 장차 석물로 사용될 용호석을 제작한 것이 사실이라면 용호석 제작은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의식 속에서 추진되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풍수지리상 요인도 빼놓을 수 없다. 천내리는 강원도 태백산에서 뻗어내린 한 지맥이 멈춘 곳이다. 풍수설에서는‘선인부사도강형(仙人浮槎渡江形)’, 즉 신선이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는 형국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환도 후 공민왕이 그토록 총애한 왕비 노국공주가 1365년에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뜬다. 그 충격으로 실의에 잠긴 공민왕은 방탕한 생활을 하며 정신병적 증세를 보인다. 그러다가 1374년에 공민왕이 마침내 신하에게 무참히 살해되는 비운을 맞이함으로써 천내리 능소는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방치된 용호석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좌정하여 천내리 주민들에게 동제로 치성을 받게 되었다.

내용

천내리에서는 매년 정월 초사흗날 자정에 산신제를 지낸 뒤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용호석제를 지냈으나 중단되었다. 엄격한 금기가 요구되는 산신제와 달리 용호석제는 단지 하루전 또는 당일 아침에 용석과 호석에 왼새끼를 두르고 황토를 뿌렸을 뿐 마을에서 크게 꺼리는 일은 없었다. 제관은 마을에서 부정하지 않은 사람으로 선정하였으며, 제를 앞두고 사흘 동안 정성을 들였다. 제물은 용석과 호석에 올릴 백설기, 돼지머리, 삼색실과, 포, 나물, 탕 등을 각각 준비하되 용왕신을 치제하는 용석제에는 미역을 따로 준비했다. 용호석제는 해질 무렵에 거행되었고,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그 제차는 용석에 먼저 헌작 재배하고 소지를 올린 뒤 호석 앞으로 가서 마을의 안녕과 가가호호의 무병제액을 축원했다. 용호석제를 마치면 더 두고 흠향하라는 뜻으로 떡과 제물을 조금씩 떼어 놓고 온다. 이때 아이들은 이 음식을 먼저 먹으면 그해에 재수가 좋다고 하여 용호석제가 끝나기 무섭게 앞을 다투었다. 용호석은 천내리에서 개별적으로 치성을 드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하여 매년 정초나 칠월 칠석, 시월상달에는 제수를 갖추어서 집안이 무탈하기를 기원했다. 특히 후사를 두지못했거나 우환이 있는 가정은 신심으로 용호석을 위했다. 마을에서는 그 영험으로 아들을 얻었다 하여 태어난 아이에게 호석이란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한편 천내리에서는 금강을 건너기 위해 예부터 전담 사공을 두고 나룻배를 운영했다. 이를 위해 몇 년마다 주기적으로 배걸립굿을 통해 배의 건조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 천내나루 배걸립굿이 대표적이다. 이 굿은 비단 금산 관내뿐만 아니라 충북 옥천·영동 및 무주 일원을 망라하는 대규모의 걸립굿이었다. 상쇠·장구잽이 등은 걸출한 솜씨를 자랑하는 전문 풍물꾼을 초빙하여 걸립단을 구성했다. 걸립이 시작되는 날 총대를 멘 화주(化主)는 걸립단을 대동하고 용석과 호석에 간단하게 제를 지낸 뒤 가까운 마을부터 걸립에들어갔다. 즉 마을의 수호신으로 치성을 받는 용석과 호석을 돌며 출정을 알리는 제향을 베풀고, 이로써 걸립단의 안전과 원만한 걸립이 이루어지도록 기원한 것이다.

참고문헌

천내강 배걸립굿 (강성복, 금산문화원, 1999)高麗思 (공민왕과 금산 용호석의 비밀, 강성복, 국사편찬위원회 회보, 2002)충청남도 문화재대관 2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