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 줄다리기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놀이

집필자 한양명(韓陽明)

정의

보름에 경상남도 창녕의 영산면에서 줄을 당겨 승부를 겨루는 편싸움 형식의 대동놀이.

역사

영산의 대보름 축제에서 연행하던 줄다리기는 1930년대에 이르러 전승이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1949년)에 한 차례 옛 모습을 되찾는 듯했으나 6·25전쟁으로 종언을 고하였다. 그러던 중에 하봉주와 조성국 등 영산의 전통문화에 관심을 기울인 이들의 노력에 힘입어 1963년 제2회 3·1문화제(현재의 삼일민속문화제)에서 재현된 뒤 다시 전승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69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 26호로 지정되었으며,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보존 단체로 인정받은 ‘영산 줄다리기보존회’의 주도 하에 매년 삼일민속문화제의 마지막 날인 3월 3일 오후에 연행되고 있다.

내용

전근대 사회에서 영산의 줄다리기는 영산현의 읍치(현 영산면 소재지)를 중심으로 연행된 ‘고을형’과 읍외의 각 마을에서 전승한 ‘마을형’의 두 형태로 전승되었다. 영산 읍치의 줄다리기는 ‘골목줄’과 ‘큰 줄’로 이루어졌는데, 골목줄은 영산 읍치의 가장 큰 골목인 ‘한골목’에서 당기는 소규모의 줄다리기로서 이른바 ‘읍 4리(성내리, 교리, 서리, 동리)’의 청소년들과 주민들이 참여했다. 여기에 비해서 큰 줄은 원칙적으로 옛 영산 고을의 모든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는 대규모의 줄다리기로서 줄의 규모가 골목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영산 줄다리기는 거주 지역에 따라 동부와 서부로 편을 구성한다. 거주 지역을 가르는 기준은 옛 영산고을의 읍치에 속하는 ‘읍 4리’를 동부와 서부로 나누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영산에서는 전통적으로 읍성 내에 있던 영산면 성내리와 교리를 동부로 인식하고, 읍성 밖의 서리와 동리를 서부로 인식해 왔다. 이 가름은 비단 읍 4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옛 영산고을 전체로 확장·적용되었으며, 지금은 창녕 전체로 확대되어 줄다리기에 참여하는 지역민들로 하여금 귀속감을 느끼게 한다.

현재의 편 구성을 살펴보면 동부에는 창녕의 북부에 해당하는 창녕읍·성산면·고암면·대지면·이방면·대합면·유어면이 속하고, 서부에는 창녕의 남부에 해당하는 남지읍·도천면·부곡면·길곡면·계성면·장마면이 속한다. 영산면은 편 구성의 중심이기 때문에 면 단위로 편이 갈리지 않고 리里 단위로 편이 갈린다. 동부에는 성내리·교리·구계리·죽사리가 속하고, 서부에는 동리·서리·작포리·둔암리·월령리가 속한다.

전통사회의 줄다리기를 염두에 두고 영산 줄다리기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매년 정초가 되면 아이들이 손목 정도 굵기의 가는 줄을 메고 골목을 돌아다니면서 줄을 당긴다. 시간이 흐를수록 참여하는 아이들의 나이와 수, 그리고 줄의 규모도 점점 커져서 대보름이 가까워오면 제법 규모 있는 줄이 된다. 이때쯤이면 동·서부의 어른들도 놀이에 관심을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아이들과 함께 줄을 당기는데, 이처럼 어른들의 참여로 규모가 커진 골목줄을 따로 ‘중줄’이라고도 했다. 제법 규모 있는 골목줄을 당길 때는, 각 편의 대장을 태운 뒤에 줄을 메고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양편이 마주치면 대장들이 싸움을 벌여 한쪽을 줄 밑으로 떨어뜨림으로써 승부를 결정하는데, 이 놀이를 ‘이싸움’이라고 한다. 이싸움의 ‘이’는 한자어인 ‘螭’로서 교룡 또는 새끼용을 뜻한다. 따라서 이싸움은 곧 ‘용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골목줄은 3·1민속문화제 기간 중인 3월 1일 오후에 예전처럼 ‘한골목’에서 당기며, 영산 줄다리기보존회의 지도하에 지역 청소년들이 연행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해마다 당기는 골목줄과 달리 큰 줄은 여건이 허락하고 지역민이 합의를 하면 당기는 부정기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부정기적으로 당기던 큰 줄을 당기게 되는 계기 가운데 하나가 골목줄이었다. 골목줄로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양편의 유력자가 “올해 큰 줄을 한 번 당겨 보자.”라고 상대편에게 제안하고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면 본격적으로 큰 줄을 당길 준비를 하게 된다.

큰 줄을 당기기로 결정하면 동부와 서부에서는 각각 덕망 있는 이를 장군으로 추대하고 놀이를 진행하는 동안 축제적 권위를 부여한다. 장군에게는 장군복을 제공하고, 그들의 집 앞에는 장군기를 꽂아 둔다. 또한 장군이 움직이고 곳에는 항상 서낭대와 각종 깃발, 풍물패가 따른다.

줄을 만드는 데 쓰는 짚은 원래 동부와 서부의 각 농가에서 형편에 맞게 내놓은 것을 모아서 썼다. 짚을 모으면 ‘작수발이’라는 나무 구조물을 만든 다음 줄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영산줄은 수십 개의 가닥줄을 결합한 것으로 가닥줄의 길이와 개수에 따라 줄의 규모가 결정된다. 1930년대까지만 하여도 영산줄은 길이 300m 내외의 가닥줄 100여 개가 들어가는 규모였지만 1963년의 재현 이후에는 100m 내외의 가닥줄 30개를 쓰다가 지금은 같은 길이의 가닥줄 40여 개 정도를 쓴다. 한편 줄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짚과 별도로 수백 타래의 새끼줄과 가마니 여러 장이 필요하다. 새끼줄은 ‘몸줄’에 지네발처럼 달아서 줄을 당기는 데 사용하는 ‘젓줄’을 만드는 데 쓰고, 가마니는 ‘줄머리’를 만들 때 보강재로 사용한다.

하나의 ‘가닥줄’을 능률적으로 만드는 데는 보통 일곱 사람이 필요하다. 한 사람은 만들어지는 줄을 잡는 ‘줄잡이’이고, 나머지 세 사람은 줄을 꼬아가는 이들이며, 나머지 셋은 짚을 공급하는 이들이다. 지금도 이처럼 각 마을이 역할을 분담하여 줄을 만드는 전통이 일정하게 지속되고 있지만 점점 줄을 만드는 데 참여할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가닥줄을 모아 큰 줄을 만드는 날이 되면 각 마을에서는 줄을 만드는 장소로 가닥줄을 가져온다. 이어서 가닥줄을 편 뒤에 새끼줄로 촘촘히 엮는다. 줄을 다 엮으면 소금과 물을 뿌린다. 소금은 부정한 기운을 물리치는 한편 줄의 강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소금과 물을 뿌린 다음 줄의 강도를 더 높이기 위해서 줄 밟기를 한다. 각 편의 장군과 풍물패, ‘줄꾼’이 어우러져 줄 위를 밟고 다니면 마치 다림질을 한 것처럼 줄이 미끈하게 된다.

줄 밟기를 마치면 줄을 만다. 보통 100여 명의 인원이 필요한데 거대한 줄에 달라붙어서 줄을 마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줄을 다 말면 미리 준비해 둔 새끼로 묶은 뒤 줄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줄의 중심을 기준으로 두 편이 나뉘어서 반대 방향으로 줄을 굴린다. 5∼6회쯤 반복하면 줄의 중심부는 통나무처럼 단단해지고, 끝부분도 두어 번 더 말면 역시 단단해진다.

줄을 말고 나면 줄의 한쪽 끝을 다른 쪽 끝으로 끌고 가서 나란히 놓는데 이를 “줄 곱친다.”고 한다. 이어서 목줄이 될 부분을 정한 다음에 몸줄과 몸줄을 서로 단단히 붙들어 매서 풀리지 않게 하고, 꼬리줄이 될 부분도 새끼줄로 야무지게 맨다. 줄 곱치기가 끝나면 목줄을 만든다. 목줄을 만들고 나면 그 앞부분은 줄머리가 되고 뒷부분은 몸줄이 된다. 암줄의 머리는 나중에 줄을 결합할 때 숫줄의 머리가 들어와야 하므로 숫줄보다 크게 만든다. 젓줄은 몸줄에 달려 있는 작은 줄을 말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 줄을 ‘종줄’ 또는 ‘가지줄’ 등으로 부르지만 영산에서는 젓줄이라고 부른다. 젓줄은 새끼줄 몇 가닥을 겹친 뒤에 꼬아서 세 가닥을 만들고 이것을 다시 한 번 더 꼬아서 만든다. 젓줄은 원래 줄을 당기는 현장에서 바로 달았지만 요즘은 신속한 진행을 위해 미리 달아 둔다. 젓줄의 길이는 12∼13m 정도이다. 한편 꼬리줄은 몸줄의 끝부분에 있는 줄로서 보통 예닐곱 개를 만드는데, 길이는 6∼7m 정도이고 보통 열 사람 정도가 매달릴 수 있도록 한다. 꼬리줄 역시 줄을 당기는 현장에서 만들었지만 지금은 편의상 미리 만들어 놀이판으로 나간다.

줄을 완성하면 굵고 긴 나무 등을 이용하여 줄 머리를 높게 올린 뒤, 여성이 줄을 타넘거나 상대편에서 줄을 훼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서낭대와 영기를 세워 두고 줄을 지킨다.

줄을 당기는 시간이 가까워 오면 양 편에서는 줄머리 앞에 고사상을 차리고 줄고사를 지낸다. 그런 다음에 줄을 놀이판으로 옮긴다. 놀이판으로 가는 행렬의 선두에는 각 편을 상징하는 서낭대와 각종 깃발이 서고 풍물패가 뒤를 따르며 작은 영기를 든 주민들이 뒤를 따른다.

놀이 공간은 원래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신작로 또는 연지蓮池 앞의 넓은 들이었는데 나중에 양파를 많이 재배하게 되면서 영산중학교와 영산초등학교로 장소를 옮겼다. 그러다가 1990년에 영산면 소재지 근처에 별도의 놀이마당을 만든 다음부터는 줄곧 이곳에서 줄을 당기고 있다.

놀이마당에 도착하면 양편은 암줄과 숫줄을 결합하기 시작한다. 암줄과 숫줄은 각기 여성과 남성을 표상하는데 두 줄의 결합은 양성이 교합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양편은 듣기에 민망할 정도로 질펀한 성적 언술을 주고받으며 줄을 결합하는데, 서로 자존심을 내세우며 쉽사리 나서지 않기 때문에 수줄의 머리를 암줄의 머리에 끼우고 비녀목을 꽂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줄을 걸고 난 뒤 징을 치면 줄을 당기기 시작한다. 줄 위에 올라탄 양편의 장군들은 연신 칼을 휘두르면서 자기편을 독려하고, 풍물패는 빠른 가락을 연주하며 사기를 북돋운다. 옆에서 팔짱을 끼고 구경하던 사람도 승부가 한창 진행되면 신명이 나서 사람들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줄을 당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승부가 결정되면 곧바로 줄을 잘라 가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바빠진다. 미리 낫이나 칼을 준비해 온 사람들은 이긴 편의 줄머리나 목줄, 그게 안 되면 몸줄이나 젓줄이라도 끊어 가기 위해서 줄로 몰려든다. 줄을 한 뭉치씩 끊은 사람들은 그 줄을 목에 걸거나 손에 들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이렇게 끊어 간 줄을 지붕에 올려 두면 집안에 우환이 생기지 않고, 여자가 달여 먹으면 남자아이를 순산할 수 있으며, 논밭에 넣으면 농사가 잘되고, 소에게 먹이면 소가 탈 없이 잘 자란다는 속신이 전해온다.

특징 및 의의

영산 줄다리기는 쇠머리대기와 함께 전통 사회의 새해맞이 축제에서 중심적 연행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두 놀이는 싸움의 방식과 성격에서 대조적이다. 쇠머리대기가 건장한 남성들을 위주로 한 놀이인 데 비해 줄다리기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참여의 기회가 보장되는 열린 형식의 대동놀이이다. 또한 쇠머리대기는 서로 나무소[木牛]를 밀어붙여서 승부를 결정하는 데 비해 줄다리기는 줄을 당겨서 승부를 결정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영산의 새해맞이 축제는, 장대한 쇠머리를 격렬하게 밀어붙임으로써 강렬한 남성성男性性을 보여주는 쇠머리대기와 만물의 어머니인 대지 위에서 모두를 품어 안는 여성성女性性을 간직한 줄다리기의 상보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영산 줄다리기에서 골목줄의 앞놀이로 진행하는 이싸움은 줄을 수신水神이자 농신農神인 용으로 인식하는 용사신앙龍蛇信仰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이와 같은 형태의 앞놀이와 주술종교적 인식은 쌍줄을 당기는 지역에서 보편적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참고문헌

영산줄다리기(한양명, 피아, 2005).

영산 줄다리기

영산 줄다리기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놀이

집필자 한양명(韓陽明)

정의

보름에 경상남도 창녕의 영산면에서 줄을 당겨 승부를 겨루는 편싸움 형식의 대동놀이.

역사

영산의 대보름 축제에서 연행하던 줄다리기는 1930년대에 이르러 전승이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1949년)에 한 차례 옛 모습을 되찾는 듯했으나 6·25전쟁으로 종언을 고하였다. 그러던 중에 하봉주와 조성국 등 영산의 전통문화에 관심을 기울인 이들의 노력에 힘입어 1963년 제2회 3·1문화제(현재의 삼일민속문화제)에서 재현된 뒤 다시 전승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69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 26호로 지정되었으며,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보존 단체로 인정받은 ‘영산 줄다리기보존회’의 주도 하에 매년 삼일민속문화제의 마지막 날인 3월 3일 오후에 연행되고 있다.

내용

전근대 사회에서 영산의 줄다리기는 영산현의 읍치(현 영산면 소재지)를 중심으로 연행된 ‘고을형’과 읍외의 각 마을에서 전승한 ‘마을형’의 두 형태로 전승되었다. 영산 읍치의 줄다리기는 ‘골목줄’과 ‘큰 줄’로 이루어졌는데, 골목줄은 영산 읍치의 가장 큰 골목인 ‘한골목’에서 당기는 소규모의 줄다리기로서 이른바 ‘읍 4리(성내리, 교리, 서리, 동리)’의 청소년들과 주민들이 참여했다. 여기에 비해서 큰 줄은 원칙적으로 옛 영산 고을의 모든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는 대규모의 줄다리기로서 줄의 규모가 골목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영산 줄다리기는 거주 지역에 따라 동부와 서부로 편을 구성한다. 거주 지역을 가르는 기준은 옛 영산고을의 읍치에 속하는 ‘읍 4리’를 동부와 서부로 나누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영산에서는 전통적으로 읍성 내에 있던 영산면 성내리와 교리를 동부로 인식하고, 읍성 밖의 서리와 동리를 서부로 인식해 왔다. 이 가름은 비단 읍 4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옛 영산고을 전체로 확장·적용되었으며, 지금은 창녕 전체로 확대되어 줄다리기에 참여하는 지역민들로 하여금 귀속감을 느끼게 한다. 현재의 편 구성을 살펴보면 동부에는 창녕의 북부에 해당하는 창녕읍·성산면·고암면·대지면·이방면·대합면·유어면이 속하고, 서부에는 창녕의 남부에 해당하는 남지읍·도천면·부곡면·길곡면·계성면·장마면이 속한다. 영산면은 편 구성의 중심이기 때문에 면 단위로 편이 갈리지 않고 리里 단위로 편이 갈린다. 동부에는 성내리·교리·구계리·죽사리가 속하고, 서부에는 동리·서리·작포리·둔암리·월령리가 속한다. 전통사회의 줄다리기를 염두에 두고 영산 줄다리기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매년 정초가 되면 아이들이 손목 정도 굵기의 가는 줄을 메고 골목을 돌아다니면서 줄을 당긴다. 시간이 흐를수록 참여하는 아이들의 나이와 수, 그리고 줄의 규모도 점점 커져서 대보름이 가까워오면 제법 규모 있는 줄이 된다. 이때쯤이면 동·서부의 어른들도 놀이에 관심을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아이들과 함께 줄을 당기는데, 이처럼 어른들의 참여로 규모가 커진 골목줄을 따로 ‘중줄’이라고도 했다. 제법 규모 있는 골목줄을 당길 때는, 각 편의 대장을 태운 뒤에 줄을 메고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양편이 마주치면 대장들이 싸움을 벌여 한쪽을 줄 밑으로 떨어뜨림으로써 승부를 결정하는데, 이 놀이를 ‘이싸움’이라고 한다. 이싸움의 ‘이’는 한자어인 ‘螭’로서 교룡 또는 새끼용을 뜻한다. 따라서 이싸움은 곧 ‘용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골목줄은 3·1민속문화제 기간 중인 3월 1일 오후에 예전처럼 ‘한골목’에서 당기며, 영산 줄다리기보존회의 지도하에 지역 청소년들이 연행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해마다 당기는 골목줄과 달리 큰 줄은 여건이 허락하고 지역민이 합의를 하면 당기는 부정기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부정기적으로 당기던 큰 줄을 당기게 되는 계기 가운데 하나가 골목줄이었다. 골목줄로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양편의 유력자가 “올해 큰 줄을 한 번 당겨 보자.”라고 상대편에게 제안하고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면 본격적으로 큰 줄을 당길 준비를 하게 된다. 큰 줄을 당기기로 결정하면 동부와 서부에서는 각각 덕망 있는 이를 장군으로 추대하고 놀이를 진행하는 동안 축제적 권위를 부여한다. 장군에게는 장군복을 제공하고, 그들의 집 앞에는 장군기를 꽂아 둔다. 또한 장군이 움직이고 곳에는 항상 서낭대와 각종 깃발, 풍물패가 따른다. 줄을 만드는 데 쓰는 짚은 원래 동부와 서부의 각 농가에서 형편에 맞게 내놓은 것을 모아서 썼다. 짚을 모으면 ‘작수발이’라는 나무 구조물을 만든 다음 줄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영산줄은 수십 개의 가닥줄을 결합한 것으로 가닥줄의 길이와 개수에 따라 줄의 규모가 결정된다. 1930년대까지만 하여도 영산줄은 길이 300m 내외의 가닥줄 100여 개가 들어가는 규모였지만 1963년의 재현 이후에는 100m 내외의 가닥줄 30개를 쓰다가 지금은 같은 길이의 가닥줄 40여 개 정도를 쓴다. 한편 줄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짚과 별도로 수백 타래의 새끼줄과 가마니 여러 장이 필요하다. 새끼줄은 ‘몸줄’에 지네발처럼 달아서 줄을 당기는 데 사용하는 ‘젓줄’을 만드는 데 쓰고, 가마니는 ‘줄머리’를 만들 때 보강재로 사용한다. 하나의 ‘가닥줄’을 능률적으로 만드는 데는 보통 일곱 사람이 필요하다. 한 사람은 만들어지는 줄을 잡는 ‘줄잡이’이고, 나머지 세 사람은 줄을 꼬아가는 이들이며, 나머지 셋은 짚을 공급하는 이들이다. 지금도 이처럼 각 마을이 역할을 분담하여 줄을 만드는 전통이 일정하게 지속되고 있지만 점점 줄을 만드는 데 참여할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가닥줄을 모아 큰 줄을 만드는 날이 되면 각 마을에서는 줄을 만드는 장소로 가닥줄을 가져온다. 이어서 가닥줄을 편 뒤에 새끼줄로 촘촘히 엮는다. 줄을 다 엮으면 소금과 물을 뿌린다. 소금은 부정한 기운을 물리치는 한편 줄의 강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소금과 물을 뿌린 다음 줄의 강도를 더 높이기 위해서 줄 밟기를 한다. 각 편의 장군과 풍물패, ‘줄꾼’이 어우러져 줄 위를 밟고 다니면 마치 다림질을 한 것처럼 줄이 미끈하게 된다. 줄 밟기를 마치면 줄을 만다. 보통 100여 명의 인원이 필요한데 거대한 줄에 달라붙어서 줄을 마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줄을 다 말면 미리 준비해 둔 새끼로 묶은 뒤 줄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줄의 중심을 기준으로 두 편이 나뉘어서 반대 방향으로 줄을 굴린다. 5∼6회쯤 반복하면 줄의 중심부는 통나무처럼 단단해지고, 끝부분도 두어 번 더 말면 역시 단단해진다. 줄을 말고 나면 줄의 한쪽 끝을 다른 쪽 끝으로 끌고 가서 나란히 놓는데 이를 “줄 곱친다.”고 한다. 이어서 목줄이 될 부분을 정한 다음에 몸줄과 몸줄을 서로 단단히 붙들어 매서 풀리지 않게 하고, 꼬리줄이 될 부분도 새끼줄로 야무지게 맨다. 줄 곱치기가 끝나면 목줄을 만든다. 목줄을 만들고 나면 그 앞부분은 줄머리가 되고 뒷부분은 몸줄이 된다. 암줄의 머리는 나중에 줄을 결합할 때 숫줄의 머리가 들어와야 하므로 숫줄보다 크게 만든다. 젓줄은 몸줄에 달려 있는 작은 줄을 말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 줄을 ‘종줄’ 또는 ‘가지줄’ 등으로 부르지만 영산에서는 젓줄이라고 부른다. 젓줄은 새끼줄 몇 가닥을 겹친 뒤에 꼬아서 세 가닥을 만들고 이것을 다시 한 번 더 꼬아서 만든다. 젓줄은 원래 줄을 당기는 현장에서 바로 달았지만 요즘은 신속한 진행을 위해 미리 달아 둔다. 젓줄의 길이는 12∼13m 정도이다. 한편 꼬리줄은 몸줄의 끝부분에 있는 줄로서 보통 예닐곱 개를 만드는데, 길이는 6∼7m 정도이고 보통 열 사람 정도가 매달릴 수 있도록 한다. 꼬리줄 역시 줄을 당기는 현장에서 만들었지만 지금은 편의상 미리 만들어 놀이판으로 나간다. 줄을 완성하면 굵고 긴 나무 등을 이용하여 줄 머리를 높게 올린 뒤, 여성이 줄을 타넘거나 상대편에서 줄을 훼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서낭대와 영기를 세워 두고 줄을 지킨다. 줄을 당기는 시간이 가까워 오면 양 편에서는 줄머리 앞에 고사상을 차리고 줄고사를 지낸다. 그런 다음에 줄을 놀이판으로 옮긴다. 놀이판으로 가는 행렬의 선두에는 각 편을 상징하는 서낭대와 각종 깃발이 서고 풍물패가 뒤를 따르며 작은 영기를 든 주민들이 뒤를 따른다. 놀이 공간은 원래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신작로 또는 연지蓮池 앞의 넓은 들이었는데 나중에 양파를 많이 재배하게 되면서 영산중학교와 영산초등학교로 장소를 옮겼다. 그러다가 1990년에 영산면 소재지 근처에 별도의 놀이마당을 만든 다음부터는 줄곧 이곳에서 줄을 당기고 있다. 놀이마당에 도착하면 양편은 암줄과 숫줄을 결합하기 시작한다. 암줄과 숫줄은 각기 여성과 남성을 표상하는데 두 줄의 결합은 양성이 교합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양편은 듣기에 민망할 정도로 질펀한 성적 언술을 주고받으며 줄을 결합하는데, 서로 자존심을 내세우며 쉽사리 나서지 않기 때문에 수줄의 머리를 암줄의 머리에 끼우고 비녀목을 꽂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줄을 걸고 난 뒤 징을 치면 줄을 당기기 시작한다. 줄 위에 올라탄 양편의 장군들은 연신 칼을 휘두르면서 자기편을 독려하고, 풍물패는 빠른 가락을 연주하며 사기를 북돋운다. 옆에서 팔짱을 끼고 구경하던 사람도 승부가 한창 진행되면 신명이 나서 사람들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줄을 당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승부가 결정되면 곧바로 줄을 잘라 가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바빠진다. 미리 낫이나 칼을 준비해 온 사람들은 이긴 편의 줄머리나 목줄, 그게 안 되면 몸줄이나 젓줄이라도 끊어 가기 위해서 줄로 몰려든다. 줄을 한 뭉치씩 끊은 사람들은 그 줄을 목에 걸거나 손에 들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이렇게 끊어 간 줄을 지붕에 올려 두면 집안에 우환이 생기지 않고, 여자가 달여 먹으면 남자아이를 순산할 수 있으며, 논밭에 넣으면 농사가 잘되고, 소에게 먹이면 소가 탈 없이 잘 자란다는 속신이 전해온다.

특징 및 의의

영산 줄다리기는 쇠머리대기와 함께 전통 사회의 새해맞이 축제에서 중심적 연행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두 놀이는 싸움의 방식과 성격에서 대조적이다. 쇠머리대기가 건장한 남성들을 위주로 한 놀이인 데 비해 줄다리기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참여의 기회가 보장되는 열린 형식의 대동놀이이다. 또한 쇠머리대기는 서로 나무소[木牛]를 밀어붙여서 승부를 결정하는 데 비해 줄다리기는 줄을 당겨서 승부를 결정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영산의 새해맞이 축제는, 장대한 쇠머리를 격렬하게 밀어붙임으로써 강렬한 남성성男性性을 보여주는 쇠머리대기와 만물의 어머니인 대지 위에서 모두를 품어 안는 여성성女性性을 간직한 줄다리기의 상보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영산 줄다리기에서 골목줄의 앞놀이로 진행하는 이싸움은 줄을 수신水神이자 농신農神인 용으로 인식하는 용사신앙龍蛇信仰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이와 같은 형태의 앞놀이와 주술종교적 인식은 쌍줄을 당기는 지역에서 보편적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참고문헌

영산줄다리기(한양명, 피아,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