솟대타기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놀이

집필자 신근영(辛槿姈)
갱신일 2019-01-21

정의

솟대타기 연희자(솟대쟁이)가 솟대 아래의 어릿광대(매호씨)와 재담을 나누며, 솟대 위나 솟대를 연결한 줄에서 물구나무서기, 매달리기, 악기 연주를 하는 연희.

역사

솟대놀이, 솟대놀음, 장대놀이, 장대타기, 쌍줄백이, 도로심장都盧尋橦, 도로장都盧橦, 상간上竿, 간희竿戲, 장간희長竿戲, 섭독교躡獨趫, 연간緣竿이라고도 한다. 삼국시대는 우리 전통연희의 성행기로서, 탄탄한 국력을 바탕으로 중국과 서역의 산악백희를 받아들였고 이를 통해 각종 다양한 연희들이 연행되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묘사된 각종 연희 장면과 『신서고악도信西古樂圖』에 소개된 ‘신라악新羅樂 입호무入壺舞’, ‘신라박新羅狛’ 그리고 백제가 일본에 전해준 각종 기악들이 이를 증명한다. 솟대타기에 영향을 준 도로심장都盧尋橦도 이 무렵 우리에게 전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솟대타기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나타난다.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과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에는 연장緣橦, 심장尋撞, 장간長竿 등 다양한 표현의 솟대타기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유학자 성현成俔(1439∼1504)은 <관나희觀儺戲>, <관괴뢰잡희觀傀儡雜戲〉 등의 시를 통해 솟대타기의 여러 모습을 전해준다. “백 척 솟대 위에서 잔 잡고 춤추네長竿百尺舞壺觥.”, “거꾸로 매달렸다 몸을 날리니 새가 나는 듯하네跟絓投身條似飛.” 등의 구절을 통해 나례와 중국 사신 영접 행사에서도 솟대타기[長竿戲]가 연행되었으며, 그 연희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의 시 <조선부朝鮮賦>에 묘사된 연희 중 ‘섭독교躡獨趫’는 솟대타기로 해석된다. 섭躡은 ‘밟다, 오르다’, 교趫는 ‘나무에 잘 오르는 사람’이므로 솟대타기를 연상시킨다. 중국 사신 영접 행사에 연행된 솟대타기를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것은 청나라 사신 아극돈阿克敦(1685∼1756)의 『봉사도奉使圖』이다. 이 화첩의 제11폭에는 솟대타기를 하는 연희자가 묘사되어 있다.

조선시대 솟대타기의 다양한 양상은 많은 도상 자료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그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수륙재水陸齋에 사용된 감로탱甘露幀이다. 이 감로탱 하단부에 묘사된 유랑예인들은 수륙재의 천도 대상으로서, 감로탱에는 이들의 생전 공연 모습이 등장한다. 솟대타기는 여러 유랑예인집단에서 연행한 중요 종목 중 하나였기에 다양한 연행 장면이 확인된다. 일본 야쿠센사藥仙寺 소장 감로탱(1589)과 조덴사朝田寺 소장 감로탱(1591)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감로탱이며, 모두 솟대타기가 발견된다. 특히 조덴사 소장 감로탱에는 두 명의 연희자가 솟대 위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는데, 한 사람은 솟대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솟대 꼭대기에 다리를 걸고 거꾸로 매달려 있는 ‘쌍줄백이’를 하고 있다.

안동 권씨 소장 <문희연도聞喜宴圖>(1683)에 나타난 솟대타기 공연 장면에는 두 개의 솔대(솟대) 꼭대기에 용 조각이 보인다. 과거 급제자의 집에서는 솔대를 세울 때 등용문登龍門의 의미를 담아 솔대 꼭대기에 용을 조각한 나무를 연결해 놓은 것으로 해석된다.

조선 말 <기산풍속도箕山風俗圖>에 그려진 솟대쟁이패는 솟대타기·방울쳐 올리기·죽방울 놀리기 등을 공연하고 있다. 솟대쟁이패란 솟대타기를 주요 기예로 삼은 유랑예인집단이다. 연희자는 놀이판의 한가운데에 긴 솟대를 세우고, 그 꼭대기로부터 양편으로 쌍줄을 늘여 놓은 다음 솟대와 쌍줄 위에서 여러가지 기예를 펼쳤다. 솟대쟁이패의 공연 종목은 풍물, 땅재주, 얼른(요술), 줄타기, 병신굿, 솟대타기 등의 여섯 가지였다고 한다. 솟대쟁이패는 1910년대까지 광무대 등 근대식 공연 무대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1930년대에는 만주로 순회공연을 가기도 했다고 한다.

내용

솟대타기는 각종 문헌에서 연희장면이 언급되기도 하고 감로탱, 풍속화 등 도상 자료를 통해 연행양상이 묘사되어 있어 전승이 끊어졌음에도 그 대강을 살펴볼 수 있다.

솟대타기의 연행 방식은 크게 솟대 위 기예와 줄 위의 기예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다시 중심잡기, 매달리기, 물구나무서기, 악기 연주로 나뉘고, 후자는 줄타기(건너기, 매달리기)와 악기 연주로 나눌 수 있다. 솟대 위에서나 줄 위에서 악기 연주를 하는 것이 공통적이며, 줄 아래에 어릿광대(매호씨)와의 재담도 특징적이다.

중심잡기는 솟대 위에서 몸의 균형을 맞추는 동시에 다음 동작을 준비하는 자세이다. 솟대 꼭대기에 서거나 손, 배 등으로 중심을 잡아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청나라 사신 아극돈의 『봉사도』 제11폭에 그려진 솟대타기 연희자도 중심잡기를 하고 있다. 이 연희자는 솟대 꼭대기에서 한 손으로 중심을 잡고 다른 한 팔과 양다리를 공중에 띄우는 기예를 하고 있다. 솟대 아래에서 북을 치는 사람은 어릿광대로서, 솟대타기 연희자의 기예에 맞춰 장단을 두드리면서 서로 재담을 주고받는 장면으로 보인다.

매달리기는 솟대 꼭대기에 매달리기와 중간에 매달리기로 나뉜다. 솟대 꼭대기에 매달리기는 일본 조덴사 소장 감로탱에도 등장한다. 이 감로탱에 그려진 것은 쌍줄백이에 속하는 솟대타기인데, 한 명은 솟대 꼭대기에 두 발을 걸치고 아래로 거꾸로 매달려 있고, 다른 한 명은 솟대를 연결한 줄 위에서 기예를 펼치고 있다. 표충사表忠寺 감로탱(1738)에 그려진 두 명의 솟대쟁이 중 한 사람은 솟대 꼭대기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솟대 중간에서 다리를 꼬고 중심을 잡으면서 두 팔로 장구를 치고 있다. 솟대를 오르다 말고 중간에서 다리로 솟대를 휘감아 버티면서 장구를 연주하는 기예를 펼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다리로 매달리기와 악기 연주를 결합한 기예로 보인다. 조선 말 <기산풍속도>에 묘사된 솟대쟁이패는 솟대 꼭대기에 매달린 연희자가 솟대 아래의 어릿광대와 함께 재담을 나누고 있다.

물구나무서기는 솟대 꼭대기에서 한 팔 혹은 두 팔로 물구나무를 서는 것으로, 솟대타기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기예이다. 감로탱에 나타난 물구나무서기는 대개 솟대 꼭대기의 십十자형 가로목을 잡고 거꾸로 서 있다. 독특하게 남장사南長寺 감로탱(1701)에 등장한 솟대타기 꼭대기는 누운 Y자형을 하고 있으며, 새 모양 장식이 발견된다.

솟대 위 악기 연주는 솟대타기 연희자가 솟대 곡예뿐만 아니라 전통악기에도 능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호암미술관 소장 감로탱(18세기 말)의 연희자는 솟대 꼭대기에서 대금을 불고 있다. 표충사 감로탱에는 다리로 솟대 중간을 휘감고 장구를 연주하고 있는 연희자가 보이며, 만월산滿月山 수국사守國寺 감로탱(1832)에는 장구를 메고 초라니탈을 쓴 채 솟대를 오르는 연희자가 발견된다. 이는 초라니광대로 해석되는데, 탈광대가 솟대타기도 연행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솟대타기의 줄기예는 한국 솟대타기의 가장 큰 특징이다. 솟대를 지탱하려고 지면에 고정한 줄을 연희 공간으로 확장하여 더 많은 기예를 선보일 수 있게 했다. 줄 위에 서기, 줄 위를 걸어서 건너기, 엎드려서 건너기, 줄에 다리를 걸고 매달리기, 줄 위에서 혹은 줄에 매달려서 악기 연주하기 등 다양한 변주가 가능했다. 솟대를 지지하기 위해서 사용한 줄을 점차 놀이에 응용하고, 이것이 더욱 확대·발전하여 이른바 ‘쌍줄백이’로 진화해 갔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쌍줄백이는 솟대를 세운 다음 양쪽으로 각각 두 개의 줄을 늘어뜨려 놓고 솟대 꼭대기뿐만 아니라 줄 위에서도 공연하는 것이다. 쌍줄타기와도 유사해 보이지만 두 줄이 팽팽하게 이어져 탄력을 가졌던 쌍줄타기에 비해 쌍줄백이는 솟대에서부터 경사를 이루며 줄을 내려뜨린다. 애초에 솟대를 지지하기 위해 내린 줄로서 경사가 심했던 쌍줄은 점차 완만한 쪽으로 변화했으며 줄 위에서 기예가 가능하게 되었다. 일본 조덴사 소장 감로탱과 운흥사雲興寺 감로탱(1730), 봉서암峰瑞庵 감로탱(1759) 등에서 연행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진주 솟대쟁이패였다가 후일 남사당패의 일원이 되었던 송순갑의 회고담에 의하면, 솟대쟁이패의 쌍줄백이는 높은 솟대 위에 오늘날의 평행봉 너비의 두 가닥 줄을 양편으로 장치하고 그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두손걷기·한손걷기·고물묻히기(떡고물 묻히듯이 줄 위를 빙글빙글 구르기) 등의 묘기를 연행했다고 한다.

솟대를 연결한 줄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장면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많이 발견된다. 줄 위에서 악기를 연주한 것은 솟대타기의 연행 공간을 솟대에서 줄까지 확장하여, 솟대타기의 기예 수준을 한층 높였다. 운흥사 감로탱의 솟대타기 연희자는 줄 위에 서서 대금을 불고 있고, 용주사龍珠寺 감로탱(1790)의 솟대타기 연희자는 쌍줄에 거꾸로 매달려 대금을 부는 기예를 보여주고 있다. 솟대타기 기예와 줄타기 기예가 적절히 섞인 기예로서, 솟대에 부속된 줄을 연희 공간으로 확장하고, 거기에 줄타기 기예와 악기 연주까지 첨가한 멀티플레이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다.

재담은 한국 전통연희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솟대타기에서도 솟대쟁이와 어릿광대(매호씨)가 재담을 나눈 흔적이 여럿 발견된다. 솟대쟁이와 함께 솟대 아래에서 이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춤을 추거나 부채를 들고 서 있는 어릿광대를 볼 수 있는데, 어릿광대는 솟대쟁이와 재담을 나누고, 음악 장단에 맞춰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솟대타기의 재담 내용은 전승되지 않았으나, 각종 도상 자료에서 어릿광대를 동반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솟대타기에 재담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특히 솟대타기가 쌍줄백이로 변화해 가면서 고난도의 기예 대신 어릿광대를 매개로 관객과 소통하는 쪽으로 연행 방식을 바꾸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기예는 단순해지지만 어릿광대와의 재담은 관객을 즐겁게 하였고, 시간이 갈수록 어릿광대의 역할이 커지고 재담이 증가한다. 솟대타기는 고난도 기예 중심에서 어릿광대와의 재담, 악기 연주 등 관객과의 소통과 재미를 우선하는 한국적 솟대타기로 변화되었다.

특징 및 의의

서역과 중국의 전문적 공연 예술이 전래되기 전부터 우리에게도 자생적인 전통연희 종목들이 존재했다. 외부와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새롭고 다양하며 수준 높은 연희들이 다수 유입되었고, 기존에 존재하던 연희들도 더욱 발전했다. 높은 나무를 오르는 것에서 기인한 솟대타기류 기예 역시 자생적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며, 서역의 도로심장의 영향으로 크게 변화·발전했다.

솟대타기 기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임금 행차나 사신 영접 행사, 연등회와 같은 국가적 행사에 빠질 수 없는 공연예술 종목으로 연행되었다. 기예의 수준도 매우 높아서 솟대 위에서 중심을 잡거나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솟대에 매달리고, 악기도 연주하는가 하면 솟대를 지지하는 줄도 연희 공간으로 활용했다.

솟대의 줄을 활용한 쌍줄백이는 솟대쟁이가 어릿광대와 나누는 재담과 더불어 한국 솟대타기의 가장 큰 특징이다. 자생적 연희 전통 위에 외부의 세련된 기예(도로심장)를 받아들이고, 이를 우리 정서에 맞게 재해석하여 독자적인 한국 솟대타기를 만들어 냈다.

참고문헌

솟대놀음의 변화와 놀음의 미학(한양명, 비교민속학55, 비교민속학회, 2014), 솟대타기 연희의 기원과 전개양상(김시덕, 한국민속학38, 한국민속학회, 2003), 솟대타기의 역사적 전개와 연희양상(신근영, 민속학연구20, 국립민속박물관, 2007), 한국 줄타기의 역사와 연행양상(이호승,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한국의 전통연희(전경욱, 학고재, 2004), 한국전통예술개론(심우성, 동문선, 2001).

솟대타기

솟대타기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놀이

집필자 신근영(辛槿姈)
갱신일 2019-01-21

정의

솟대타기 연희자(솟대쟁이)가 솟대 아래의 어릿광대(매호씨)와 재담을 나누며, 솟대 위나 솟대를 연결한 줄에서 물구나무서기, 매달리기, 악기 연주를 하는 연희.

역사

솟대놀이, 솟대놀음, 장대놀이, 장대타기, 쌍줄백이, 도로심장都盧尋橦, 도로장都盧橦, 상간上竿, 간희竿戲, 장간희長竿戲, 섭독교躡獨趫, 연간緣竿이라고도 한다. 삼국시대는 우리 전통연희의 성행기로서, 탄탄한 국력을 바탕으로 중국과 서역의 산악백희를 받아들였고 이를 통해 각종 다양한 연희들이 연행되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묘사된 각종 연희 장면과 『신서고악도信西古樂圖』에 소개된 ‘신라악新羅樂 입호무入壺舞’, ‘신라박新羅狛’ 그리고 백제가 일본에 전해준 각종 기악들이 이를 증명한다. 솟대타기에 영향을 준 도로심장都盧尋橦도 이 무렵 우리에게 전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솟대타기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나타난다.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과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에는 연장緣橦, 심장尋撞, 장간長竿 등 다양한 표현의 솟대타기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유학자 성현成俔(1439∼1504)은 , &lt;관괴뢰잡희觀傀儡雜戲〉 등의 시를 통해 솟대타기의 여러 모습을 전해준다. “백 척 솟대 위에서 잔 잡고 춤추네長竿百尺舞壺觥.”, “거꾸로 매달렸다 몸을 날리니 새가 나는 듯하네跟絓投身條似飛.” 등의 구절을 통해 나례와 중국 사신 영접 행사에서도 솟대타기[長竿戲]가 연행되었으며, 그 연희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의 시 에 묘사된 연희 중 ‘섭독교躡獨趫’는 솟대타기로 해석된다. 섭躡은 ‘밟다, 오르다’, 교趫는 ‘나무에 잘 오르는 사람’이므로 솟대타기를 연상시킨다. 중국 사신 영접 행사에 연행된 솟대타기를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것은 청나라 사신 아극돈阿克敦(1685∼1756)의 『봉사도奉使圖』이다. 이 화첩의 제11폭에는 솟대타기를 하는 연희자가 묘사되어 있다. 조선시대 솟대타기의 다양한 양상은 많은 도상 자료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그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수륙재水陸齋에 사용된 감로탱甘露幀이다. 이 감로탱 하단부에 묘사된 유랑예인들은 수륙재의 천도 대상으로서, 감로탱에는 이들의 생전 공연 모습이 등장한다. 솟대타기는 여러 유랑예인집단에서 연행한 중요 종목 중 하나였기에 다양한 연행 장면이 확인된다. 일본 야쿠센사藥仙寺 소장 감로탱(1589)과 조덴사朝田寺 소장 감로탱(1591)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감로탱이며, 모두 솟대타기가 발견된다. 특히 조덴사 소장 감로탱에는 두 명의 연희자가 솟대 위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는데, 한 사람은 솟대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솟대 꼭대기에 다리를 걸고 거꾸로 매달려 있는 ‘쌍줄백이’를 하고 있다. 안동 권씨 소장 (1683)에 나타난 솟대타기 공연 장면에는 두 개의 솔대(솟대) 꼭대기에 용 조각이 보인다. 과거 급제자의 집에서는 솔대를 세울 때 등용문登龍門의 의미를 담아 솔대 꼭대기에 용을 조각한 나무를 연결해 놓은 것으로 해석된다. 조선 말 에 그려진 솟대쟁이패는 솟대타기·방울쳐 올리기·죽방울 놀리기 등을 공연하고 있다. 솟대쟁이패란 솟대타기를 주요 기예로 삼은 유랑예인집단이다. 연희자는 놀이판의 한가운데에 긴 솟대를 세우고, 그 꼭대기로부터 양편으로 쌍줄을 늘여 놓은 다음 솟대와 쌍줄 위에서 여러가지 기예를 펼쳤다. 솟대쟁이패의 공연 종목은 풍물, 땅재주, 얼른(요술), 줄타기, 병신굿, 솟대타기 등의 여섯 가지였다고 한다. 솟대쟁이패는 1910년대까지 광무대 등 근대식 공연 무대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1930년대에는 만주로 순회공연을 가기도 했다고 한다.

내용

솟대타기는 각종 문헌에서 연희장면이 언급되기도 하고 감로탱, 풍속화 등 도상 자료를 통해 연행양상이 묘사되어 있어 전승이 끊어졌음에도 그 대강을 살펴볼 수 있다. 솟대타기의 연행 방식은 크게 솟대 위 기예와 줄 위의 기예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다시 중심잡기, 매달리기, 물구나무서기, 악기 연주로 나뉘고, 후자는 줄타기(건너기, 매달리기)와 악기 연주로 나눌 수 있다. 솟대 위에서나 줄 위에서 악기 연주를 하는 것이 공통적이며, 줄 아래에 어릿광대(매호씨)와의 재담도 특징적이다. 중심잡기는 솟대 위에서 몸의 균형을 맞추는 동시에 다음 동작을 준비하는 자세이다. 솟대 꼭대기에 서거나 손, 배 등으로 중심을 잡아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청나라 사신 아극돈의 『봉사도』 제11폭에 그려진 솟대타기 연희자도 중심잡기를 하고 있다. 이 연희자는 솟대 꼭대기에서 한 손으로 중심을 잡고 다른 한 팔과 양다리를 공중에 띄우는 기예를 하고 있다. 솟대 아래에서 북을 치는 사람은 어릿광대로서, 솟대타기 연희자의 기예에 맞춰 장단을 두드리면서 서로 재담을 주고받는 장면으로 보인다. 매달리기는 솟대 꼭대기에 매달리기와 중간에 매달리기로 나뉜다. 솟대 꼭대기에 매달리기는 일본 조덴사 소장 감로탱에도 등장한다. 이 감로탱에 그려진 것은 쌍줄백이에 속하는 솟대타기인데, 한 명은 솟대 꼭대기에 두 발을 걸치고 아래로 거꾸로 매달려 있고, 다른 한 명은 솟대를 연결한 줄 위에서 기예를 펼치고 있다. 표충사表忠寺 감로탱(1738)에 그려진 두 명의 솟대쟁이 중 한 사람은 솟대 꼭대기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솟대 중간에서 다리를 꼬고 중심을 잡으면서 두 팔로 장구를 치고 있다. 솟대를 오르다 말고 중간에서 다리로 솟대를 휘감아 버티면서 장구를 연주하는 기예를 펼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다리로 매달리기와 악기 연주를 결합한 기예로 보인다. 조선 말 에 묘사된 솟대쟁이패는 솟대 꼭대기에 매달린 연희자가 솟대 아래의 어릿광대와 함께 재담을 나누고 있다. 물구나무서기는 솟대 꼭대기에서 한 팔 혹은 두 팔로 물구나무를 서는 것으로, 솟대타기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기예이다. 감로탱에 나타난 물구나무서기는 대개 솟대 꼭대기의 십十자형 가로목을 잡고 거꾸로 서 있다. 독특하게 남장사南長寺 감로탱(1701)에 등장한 솟대타기 꼭대기는 누운 Y자형을 하고 있으며, 새 모양 장식이 발견된다. 솟대 위 악기 연주는 솟대타기 연희자가 솟대 곡예뿐만 아니라 전통악기에도 능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호암미술관 소장 감로탱(18세기 말)의 연희자는 솟대 꼭대기에서 대금을 불고 있다. 표충사 감로탱에는 다리로 솟대 중간을 휘감고 장구를 연주하고 있는 연희자가 보이며, 만월산滿月山 수국사守國寺 감로탱(1832)에는 장구를 메고 초라니탈을 쓴 채 솟대를 오르는 연희자가 발견된다. 이는 초라니광대로 해석되는데, 탈광대가 솟대타기도 연행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솟대타기의 줄기예는 한국 솟대타기의 가장 큰 특징이다. 솟대를 지탱하려고 지면에 고정한 줄을 연희 공간으로 확장하여 더 많은 기예를 선보일 수 있게 했다. 줄 위에 서기, 줄 위를 걸어서 건너기, 엎드려서 건너기, 줄에 다리를 걸고 매달리기, 줄 위에서 혹은 줄에 매달려서 악기 연주하기 등 다양한 변주가 가능했다. 솟대를 지지하기 위해서 사용한 줄을 점차 놀이에 응용하고, 이것이 더욱 확대·발전하여 이른바 ‘쌍줄백이’로 진화해 갔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쌍줄백이는 솟대를 세운 다음 양쪽으로 각각 두 개의 줄을 늘어뜨려 놓고 솟대 꼭대기뿐만 아니라 줄 위에서도 공연하는 것이다. 쌍줄타기와도 유사해 보이지만 두 줄이 팽팽하게 이어져 탄력을 가졌던 쌍줄타기에 비해 쌍줄백이는 솟대에서부터 경사를 이루며 줄을 내려뜨린다. 애초에 솟대를 지지하기 위해 내린 줄로서 경사가 심했던 쌍줄은 점차 완만한 쪽으로 변화했으며 줄 위에서 기예가 가능하게 되었다. 일본 조덴사 소장 감로탱과 운흥사雲興寺 감로탱(1730), 봉서암峰瑞庵 감로탱(1759) 등에서 연행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진주 솟대쟁이패였다가 후일 남사당패의 일원이 되었던 송순갑의 회고담에 의하면, 솟대쟁이패의 쌍줄백이는 높은 솟대 위에 오늘날의 평행봉 너비의 두 가닥 줄을 양편으로 장치하고 그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두손걷기·한손걷기·고물묻히기(떡고물 묻히듯이 줄 위를 빙글빙글 구르기) 등의 묘기를 연행했다고 한다. 솟대를 연결한 줄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장면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많이 발견된다. 줄 위에서 악기를 연주한 것은 솟대타기의 연행 공간을 솟대에서 줄까지 확장하여, 솟대타기의 기예 수준을 한층 높였다. 운흥사 감로탱의 솟대타기 연희자는 줄 위에 서서 대금을 불고 있고, 용주사龍珠寺 감로탱(1790)의 솟대타기 연희자는 쌍줄에 거꾸로 매달려 대금을 부는 기예를 보여주고 있다. 솟대타기 기예와 줄타기 기예가 적절히 섞인 기예로서, 솟대에 부속된 줄을 연희 공간으로 확장하고, 거기에 줄타기 기예와 악기 연주까지 첨가한 멀티플레이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다. 재담은 한국 전통연희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솟대타기에서도 솟대쟁이와 어릿광대(매호씨)가 재담을 나눈 흔적이 여럿 발견된다. 솟대쟁이와 함께 솟대 아래에서 이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춤을 추거나 부채를 들고 서 있는 어릿광대를 볼 수 있는데, 어릿광대는 솟대쟁이와 재담을 나누고, 음악 장단에 맞춰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솟대타기의 재담 내용은 전승되지 않았으나, 각종 도상 자료에서 어릿광대를 동반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솟대타기에 재담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특히 솟대타기가 쌍줄백이로 변화해 가면서 고난도의 기예 대신 어릿광대를 매개로 관객과 소통하는 쪽으로 연행 방식을 바꾸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기예는 단순해지지만 어릿광대와의 재담은 관객을 즐겁게 하였고, 시간이 갈수록 어릿광대의 역할이 커지고 재담이 증가한다. 솟대타기는 고난도 기예 중심에서 어릿광대와의 재담, 악기 연주 등 관객과의 소통과 재미를 우선하는 한국적 솟대타기로 변화되었다.

특징 및 의의

서역과 중국의 전문적 공연 예술이 전래되기 전부터 우리에게도 자생적인 전통연희 종목들이 존재했다. 외부와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새롭고 다양하며 수준 높은 연희들이 다수 유입되었고, 기존에 존재하던 연희들도 더욱 발전했다. 높은 나무를 오르는 것에서 기인한 솟대타기류 기예 역시 자생적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며, 서역의 도로심장의 영향으로 크게 변화·발전했다. 솟대타기 기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임금 행차나 사신 영접 행사, 연등회와 같은 국가적 행사에 빠질 수 없는 공연예술 종목으로 연행되었다. 기예의 수준도 매우 높아서 솟대 위에서 중심을 잡거나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솟대에 매달리고, 악기도 연주하는가 하면 솟대를 지지하는 줄도 연희 공간으로 활용했다. 솟대의 줄을 활용한 쌍줄백이는 솟대쟁이가 어릿광대와 나누는 재담과 더불어 한국 솟대타기의 가장 큰 특징이다. 자생적 연희 전통 위에 외부의 세련된 기예(도로심장)를 받아들이고, 이를 우리 정서에 맞게 재해석하여 독자적인 한국 솟대타기를 만들어 냈다.

참고문헌

솟대놀음의 변화와 놀음의 미학(한양명, 비교민속학55, 비교민속학회, 2014), 솟대타기 연희의 기원과 전개양상(김시덕, 한국민속학38, 한국민속학회, 2003), 솟대타기의 역사적 전개와 연희양상(신근영, 민속학연구20, 국립민속박물관, 2007), 한국 줄타기의 역사와 연행양상(이호승,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한국의 전통연희(전경욱, 학고재, 2004), 한국전통예술개론(심우성, 동문선,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