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등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놀이

집필자 전경욱(田耕旭)
갱신일 2019-01-21

정의

등불을 밝히고 부처에게 복을 비는 불교 행사인 연등회燃燈會에서 멋있게 꾸민 등을 구경하는 민속놀이.

내용

인도의 연등회에서는 밤새도록 등을 밝혔고, 꽃과 향을 공양했으며, 화려하게 장식한 사륜거에 부처와 보살들을 안치하고 행진하는 행상이 있었고, 연희자들의 각종 연희가 공연되었다. 이러한 방식의 연등 행사는 이후 중국, 한국, 일본의 연등회 및 관등 민속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봄 정월 …… 15일에 임금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관람하고, 그 자리에서 백관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신라 866년(경문왕 6)과 890년(진성여왕 4)에 왕이 정월 15일에 황룡사皇龍寺로 행차하여 등을 구경했다는 내용은 중국의 상원 연등 풍속이 신라에 유입되어 전승되었음을 알려 준다.
고려시대의 연등회는 국왕이 참석한 가운데 상원 또는 2월 15일에 행해지던 국가의례로서의 연등회가 있었으며, 사월초파일에 민간에서 벌인 불탄일 축제로서의 연등회가 있었다. 전자는 국가적인 차원의 행사였고, 후자는 개인적인 차원의 행사였다.
상원 연등회와 2월 연등회 때는 채산, 채붕, 등산을 가설하고, 여러 가지 연희를 공연했다.

(2월) 정유일에 왕이 봉은사에 가서 연등회를 특별히 열고 새로 만든 불상을 찬송했다. 이때에 가로街路에는 이틀 밤에 걸쳐서 각각 3만 개의 등불을 밝혔으며, 중광전과 각 관아에는 모두 채단으로 장식한 다락과 등산을 설치하고 풍악을 잡혔다.
- 고려사高麗史 권9 문종 계축 27년

연등회 때 이틀에 걸쳐 가로에 3만 개의 등불을 밝힌 점으로 볼 때, 이는 백성들에게 멋진 관등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인용문의 등산燈山은 우리나라에서는 실물을 확인할 수 없으나, 중국 명대明代의 <남도번회도권南都繁會圖卷>을 통해 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남도번회도권>은 중국에서 정월 보름날에 집단으로 하는 명절놀이인 사화社火를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의 왼쪽 가운데에 오산鰲山이라고 쓴 것이 바로 등산이다. 중국에서 흔히 오산이라고 부른 무대 구조물을 우리나라에서는 산대山臺라고 불렀는데, 산대 위에 많은 등을 설치한 것이 등산이다. 그 앞에서 나무다리걷기, 탈춤, 접시돌리기, 사자탈춤 등을 공연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궁정 중심의 2월 연등회 이외에 사월초파일에 시행하는 연등회도 있었다. 사월초파일의 연등회는 고려 중기부터 문헌에 나타난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전부터 이미 민간에서는 사월초파일 연등이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충렬왕忠烈王의 비인 숙창 원비淑昌院妃 김씨金氏가] 일찍이 4월 8일에 후원에 등을 달아 화산火山을 설치하고 현관絃管을 갖추어서 스스로 즐기니, 그 황색 주렴과 비단 장막이 다 왕에게 진상한 물건이었다. 보는 사람들이 저자거리와 같았는데 3일 후에 이내 파했다.
- 고려사 권89 열전 후비 충렬왕

1366년(공민왕 15) 4월 8일에 신돈辛旽의 집에서 대연등회大燃燈會 행사를 했더니, 서울 사람들이 모두 본을 따라했고 가난한 집들은 구걸을 해서라도 등을 켰다. …… 신돈은 연등절에 화산을 만들어 놓고 왕을 초청했으므로 왕이 그 집으로 갔다. …… 등의 수가 백만도 될 듯이 많았고, 그 모양이 지극히 교묘하고 기이했으며, 또 잡희를 성대하게 공연했다. 왕이 포목 백 필을 주었다.
- 고려사 권132 열전45 반역 신돈

이상과 같이, 사월초파일 연등회는 연등과 채붕의 가설, 잡희의 공연이라는 점에서 상원과 2월의 연등회와 차이가 없었으나, 행사 주체는 국가가 아닌 개인이었다. 연등회의 주최자들은 자기 집에서 개인적으로 연등회를 열었지만, 채붕을 가설하고 기악과 백희를 공연했으며, 매우 많은 등을 달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의 연등회는 전기와 후기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우선 조선 전기에는 고려 중후기와 마찬가지로 상원 연등과 사월초파일 연등이 모두 전승되었다. 그런데 조선 전기 문인들의 한시에서는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한도십영漢都十詠> 중 <종가관등鍾街觀燈>, 강희맹姜希孟(1424~1483)의 <사가의 한도십영 병풍에 쓰다題四佳漢都十詠屛風> 중 <종가관등鍾街觀燈>,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 4월 8일 밤에 겸선과 함께 남산 기슭에 올라 관등을 했는데, 이때 양궁과 세자가 원각사에서 법사를 보았다四月八日夜 與兼善登南山脚觀燈 時兩宮與世子 在圓覺寺 作法事>, 정수강丁壽崗(1454~1527)의 <종가관등鍾街觀燈>, 권필權韠(1569~1612)의 <관등 행렬에서 친구를 보다觀燈行 示友人>처럼 연등 대신에 관등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백만 명이 사는 장안에 비단 문을 여니, 등불을 건 곳곳마다 누대가 아름답네.
오직 밝은 달이 사람을 따라가는 줄만 알고, 향기 티끌이 말을 쫓아오는 것은 보지 못했네.
새해의 유광은 십오일 밤이고, 소년의 행락은 십천의 술잔이네.
번화가 눈에 가득하여 보아도 싫어함이 없으니, 옥루의 물시계는 재촉하지 말게나.
- 상원 관등上元觀燈, 월헌집月軒集, 정수강丁壽崗

위의 시를 통해 조선 전기의 상원 연등은 고려의 상원 연등과는 달리 국가 의례로서의 연등회가 아닌 민간에서 개인적으로 행한 연등회임을 알 수 있다. 명칭도 연등이라 하지 않고 관등이라고 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문인들의 한시에서 조선 전기 사월초파일 연등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임금이 한성부漢城府에 전교하기를, “오늘은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집집마다의 연등놀이에 화재가 날까 두렵다. 금지하도록 하라.” 했다.
우리나라의 풍속에 이 날을 석가 탄신이라 하여 집집마다 등燈을 켜 놓는다. 장대를 많이 세우고 수십 개의 등을 연달아 달며, 등으로 새나 짐승, 물고기나 용의 형상을 만들어 대단히 호화롭게 하기에 힘썼으므로, 구경하는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다.
- 성종실록成宗實錄 6년 4월 8일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월초파일의 연등은 이미 풍속화되었기 때문에, 왕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계속 전승되었다. 이때의 연등회는 매우 호화롭고 화려했으며, 많은 사람이 즐기던 행사였다.

조선 후기의 연등 풍속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 등 각종 세시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목되는 점은 조선 후기의 세시기에는 사월초파일의 연등에 대한 내용만 있고, 상원 연등에 대한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에는 상원 연등의 풍속이 사라져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월초파일은 곧 석가모니의 탄생일이다. 우리나라 풍속에 이 날 등불을 켜므로 등석燈夕이라 한다. 며칠 전부터 인가에서는 각기 등간燈竿을 세우고 위쪽에 꿩의 꼬리를 장식하고 채색 비단으로 깃발을 만들어 단다. 작은 집에서는 깃대 꼭대기에 대개 노송老松을 붙들어 맨다. 그리고 각 집에서는 집안 자녀들의 수대로 등을 매달고 그 밝은 것을 길하게 여긴다. 이러다가 9일에 가서야 그친다. ……
등의 이름에는 수박등, 마늘등, 연꽃등, 칠성등, 오행등, 일월등, 공등[毬燈], 배등[船燈], 종등鍾燈, 북등, 누각등, 난간등, 화분등, 가마등, 머루등, 병등, 항아리등, 방울등, 알등, 봉등, 학등, 잉어등, 거북등, 자라등, 수복등壽福燈, 태평등太平燈, 만세등萬歲燈, 남산등南山燈 등이 있는데 모두 그 모양을 상징하고 있다. ……
연등회 날 저녁에는 전례에 따라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된다. 온 장안의 남녀들은 초저녁부터 남북의 산기슭에 올라가 등 달아놓은 광경을 구경한다. 혹 어떤 이는 악기를 들고 거리를 쏘다니며 논다. 그리하여 서울 장안은 사람의 바다를 이루고 불의 성을 만든다. 그렇게 떠들썩하기를 밤을 새워서 한다.
장안 밖의 시골 노파들은 서로 붙들고 다투어 와서 반드시 남산의 잠두봉蠶頭峯에 올라가 이 장관을 구경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집집마다 등간 즉 장대를 세우고 위쪽에 꿩의 꼬리를 장식하고 채색 비단으로 깃발을 만들어 달았다. 또한 집안 자녀들의 수대로 등을 매달고 그 밝은 것을 길하게 여겼다. 등은 그 형태에 따라 앞의 『동국세시기』에 나오는 것처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또 등에는 종이를 잘라서 말을 타고 매, 개를 데리고 호랑이·이리·사슴·노루·꿩·토끼 등을 사냥하는 모양을 그려 등 안의 갈이틀에 붙인 다음, 밖에서 비쳐 나오는 그림자를 보는 영등도 있었다. 또 시내에서 파는 등은 천태만상으로, 오색이 찬란하고 값이 비싸며 기이했고, 난조鸞鳥·학·사자·호랑이·거북·사슴·잉어·자라 등에 선관仙官·선녀가 올라탄 형상의 등도 있었다.

이 날은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었고, 사람들은 남북의 산기슭에 올라가 등 달아놓은 광경을 구경했고, 어떤 이는 악기를 들고 거리를 쏘다니며 놀았기 때문에, 서울 장안은 매우 번잡했다. 시골 노파들은 다투어 와서 남산의 잠두봉에 올라가 서울의 연등을 구경하는 관등 풍속이 있었다.

특징 및 의의

연등회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축제로서 부처에게 복을 비는 한편 다양한 악무백희를 연행했던 행사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주로 다양한 등을 구경하는 관등 풍속으로 전승되었다. 현대에는 이러한 연등회의 전통을 잇고자 연등회를 복원하여 사월초파일 무렵 동국대학교에서 출발하여 종로를 거쳐 조계사까지 이어지는 연등 축제를 거행하고 있다. 서울연등축제에서는 각양각색의 등을 들고 가거나, 화려하게 꾸민 수레와 자동차 위에 불상·보살·코끼리·공작 등 각종 조형물을 안치하고 찬란한 등으로 장식하여 대규모의 가두행렬을 한다.

참고문헌

고려시대 국가 불교의례 연구(안지원,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낙양가람기(양현지, 서윤희 역, 눌와, 2001), 연등회의 전통과 현대축제화의 방안(전경욱, 남도민속연구17, 남도민속학회, 2008), 조선세시기(이석호 역, 동문선, 1991), 중국 등절의 기원과 형성에 관한 새로운 탐색(康保成, 김순희 역, 한중일 전통등문화의 어제와 오늘, 한국전통등연구원, 2006).

관등

관등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놀이

집필자 전경욱(田耕旭)
갱신일 2019-01-21

정의

등불을 밝히고 부처에게 복을 비는 불교 행사인 연등회燃燈會에서 멋있게 꾸민 등을 구경하는 민속놀이.

내용

인도의 연등회에서는 밤새도록 등을 밝혔고, 꽃과 향을 공양했으며, 화려하게 장식한 사륜거에 부처와 보살들을 안치하고 행진하는 행상이 있었고, 연희자들의 각종 연희가 공연되었다. 이러한 방식의 연등 행사는 이후 중국, 한국, 일본의 연등회 및 관등 민속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봄 정월 …… 15일에 임금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관람하고, 그 자리에서 백관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신라 866년(경문왕 6)과 890년(진성여왕 4)에 왕이 정월 15일에 황룡사皇龍寺로 행차하여 등을 구경했다는 내용은 중국의 상원 연등 풍속이 신라에 유입되어 전승되었음을 알려 준다.고려시대의 연등회는 국왕이 참석한 가운데 상원 또는 2월 15일에 행해지던 국가의례로서의 연등회가 있었으며, 사월초파일에 민간에서 벌인 불탄일 축제로서의 연등회가 있었다. 전자는 국가적인 차원의 행사였고, 후자는 개인적인 차원의 행사였다.상원 연등회와 2월 연등회 때는 채산, 채붕, 등산을 가설하고, 여러 가지 연희를 공연했다. (2월) 정유일에 왕이 봉은사에 가서 연등회를 특별히 열고 새로 만든 불상을 찬송했다. 이때에 가로街路에는 이틀 밤에 걸쳐서 각각 3만 개의 등불을 밝혔으며, 중광전과 각 관아에는 모두 채단으로 장식한 다락과 등산을 설치하고 풍악을 잡혔다.- 고려사高麗史 권9 문종 계축 27년 연등회 때 이틀에 걸쳐 가로에 3만 개의 등불을 밝힌 점으로 볼 때, 이는 백성들에게 멋진 관등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인용문의 등산燈山은 우리나라에서는 실물을 확인할 수 없으나, 중국 명대明代의 을 통해 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은 중국에서 정월 보름날에 집단으로 하는 명절놀이인 사화社火를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의 왼쪽 가운데에 오산鰲山이라고 쓴 것이 바로 등산이다. 중국에서 흔히 오산이라고 부른 무대 구조물을 우리나라에서는 산대山臺라고 불렀는데, 산대 위에 많은 등을 설치한 것이 등산이다. 그 앞에서 나무다리걷기, 탈춤, 접시돌리기, 사자탈춤 등을 공연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궁정 중심의 2월 연등회 이외에 사월초파일에 시행하는 연등회도 있었다. 사월초파일의 연등회는 고려 중기부터 문헌에 나타난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전부터 이미 민간에서는 사월초파일 연등이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충렬왕忠烈王의 비인 숙창 원비淑昌院妃 김씨金氏가] 일찍이 4월 8일에 후원에 등을 달아 화산火山을 설치하고 현관絃管을 갖추어서 스스로 즐기니, 그 황색 주렴과 비단 장막이 다 왕에게 진상한 물건이었다. 보는 사람들이 저자거리와 같았는데 3일 후에 이내 파했다.- 고려사 권89 열전 후비 충렬왕 1366년(공민왕 15) 4월 8일에 신돈辛旽의 집에서 대연등회大燃燈會 행사를 했더니, 서울 사람들이 모두 본을 따라했고 가난한 집들은 구걸을 해서라도 등을 켰다. …… 신돈은 연등절에 화산을 만들어 놓고 왕을 초청했으므로 왕이 그 집으로 갔다. …… 등의 수가 백만도 될 듯이 많았고, 그 모양이 지극히 교묘하고 기이했으며, 또 잡희를 성대하게 공연했다. 왕이 포목 백 필을 주었다.- 고려사 권132 열전45 반역 신돈 이상과 같이, 사월초파일 연등회는 연등과 채붕의 가설, 잡희의 공연이라는 점에서 상원과 2월의 연등회와 차이가 없었으나, 행사 주체는 국가가 아닌 개인이었다. 연등회의 주최자들은 자기 집에서 개인적으로 연등회를 열었지만, 채붕을 가설하고 기악과 백희를 공연했으며, 매우 많은 등을 달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의 연등회는 전기와 후기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우선 조선 전기에는 고려 중후기와 마찬가지로 상원 연등과 사월초파일 연등이 모두 전승되었다. 그런데 조선 전기 문인들의 한시에서는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중 , 강희맹姜希孟(1424~1483)의 중 ,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 정수강丁壽崗(1454~1527)의 , 권필權韠(1569~1612)의 처럼 연등 대신에 관등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백만 명이 사는 장안에 비단 문을 여니, 등불을 건 곳곳마다 누대가 아름답네.오직 밝은 달이 사람을 따라가는 줄만 알고, 향기 티끌이 말을 쫓아오는 것은 보지 못했네.새해의 유광은 십오일 밤이고, 소년의 행락은 십천의 술잔이네.번화가 눈에 가득하여 보아도 싫어함이 없으니, 옥루의 물시계는 재촉하지 말게나.- 상원 관등上元觀燈, 월헌집月軒集, 정수강丁壽崗 위의 시를 통해 조선 전기의 상원 연등은 고려의 상원 연등과는 달리 국가 의례로서의 연등회가 아닌 민간에서 개인적으로 행한 연등회임을 알 수 있다. 명칭도 연등이라 하지 않고 관등이라고 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문인들의 한시에서 조선 전기 사월초파일 연등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임금이 한성부漢城府에 전교하기를, “오늘은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집집마다의 연등놀이에 화재가 날까 두렵다. 금지하도록 하라.” 했다.우리나라의 풍속에 이 날을 석가 탄신이라 하여 집집마다 등燈을 켜 놓는다. 장대를 많이 세우고 수십 개의 등을 연달아 달며, 등으로 새나 짐승, 물고기나 용의 형상을 만들어 대단히 호화롭게 하기에 힘썼으므로, 구경하는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다.- 성종실록成宗實錄 6년 4월 8일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월초파일의 연등은 이미 풍속화되었기 때문에, 왕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계속 전승되었다. 이때의 연등회는 매우 호화롭고 화려했으며, 많은 사람이 즐기던 행사였다. 조선 후기의 연등 풍속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 등 각종 세시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목되는 점은 조선 후기의 세시기에는 사월초파일의 연등에 대한 내용만 있고, 상원 연등에 대한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에는 상원 연등의 풍속이 사라져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월초파일은 곧 석가모니의 탄생일이다. 우리나라 풍속에 이 날 등불을 켜므로 등석燈夕이라 한다. 며칠 전부터 인가에서는 각기 등간燈竿을 세우고 위쪽에 꿩의 꼬리를 장식하고 채색 비단으로 깃발을 만들어 단다. 작은 집에서는 깃대 꼭대기에 대개 노송老松을 붙들어 맨다. 그리고 각 집에서는 집안 자녀들의 수대로 등을 매달고 그 밝은 것을 길하게 여긴다. 이러다가 9일에 가서야 그친다. ……등의 이름에는 수박등, 마늘등, 연꽃등, 칠성등, 오행등, 일월등, 공등[毬燈], 배등[船燈], 종등鍾燈, 북등, 누각등, 난간등, 화분등, 가마등, 머루등, 병등, 항아리등, 방울등, 알등, 봉등, 학등, 잉어등, 거북등, 자라등, 수복등壽福燈, 태평등太平燈, 만세등萬歲燈, 남산등南山燈 등이 있는데 모두 그 모양을 상징하고 있다. ……연등회 날 저녁에는 전례에 따라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된다. 온 장안의 남녀들은 초저녁부터 남북의 산기슭에 올라가 등 달아놓은 광경을 구경한다. 혹 어떤 이는 악기를 들고 거리를 쏘다니며 논다. 그리하여 서울 장안은 사람의 바다를 이루고 불의 성을 만든다. 그렇게 떠들썩하기를 밤을 새워서 한다.장안 밖의 시골 노파들은 서로 붙들고 다투어 와서 반드시 남산의 잠두봉蠶頭峯에 올라가 이 장관을 구경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집집마다 등간 즉 장대를 세우고 위쪽에 꿩의 꼬리를 장식하고 채색 비단으로 깃발을 만들어 달았다. 또한 집안 자녀들의 수대로 등을 매달고 그 밝은 것을 길하게 여겼다. 등은 그 형태에 따라 앞의 『동국세시기』에 나오는 것처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또 등에는 종이를 잘라서 말을 타고 매, 개를 데리고 호랑이·이리·사슴·노루·꿩·토끼 등을 사냥하는 모양을 그려 등 안의 갈이틀에 붙인 다음, 밖에서 비쳐 나오는 그림자를 보는 영등도 있었다. 또 시내에서 파는 등은 천태만상으로, 오색이 찬란하고 값이 비싸며 기이했고, 난조鸞鳥·학·사자·호랑이·거북·사슴·잉어·자라 등에 선관仙官·선녀가 올라탄 형상의 등도 있었다. 이 날은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었고, 사람들은 남북의 산기슭에 올라가 등 달아놓은 광경을 구경했고, 어떤 이는 악기를 들고 거리를 쏘다니며 놀았기 때문에, 서울 장안은 매우 번잡했다. 시골 노파들은 다투어 와서 남산의 잠두봉에 올라가 서울의 연등을 구경하는 관등 풍속이 있었다.

특징 및 의의

연등회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축제로서 부처에게 복을 비는 한편 다양한 악무백희를 연행했던 행사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주로 다양한 등을 구경하는 관등 풍속으로 전승되었다. 현대에는 이러한 연등회의 전통을 잇고자 연등회를 복원하여 사월초파일 무렵 동국대학교에서 출발하여 종로를 거쳐 조계사까지 이어지는 연등 축제를 거행하고 있다. 서울연등축제에서는 각양각색의 등을 들고 가거나, 화려하게 꾸민 수레와 자동차 위에 불상·보살·코끼리·공작 등 각종 조형물을 안치하고 찬란한 등으로 장식하여 대규모의 가두행렬을 한다.

참고문헌

고려시대 국가 불교의례 연구(안지원,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낙양가람기(양현지, 서윤희 역, 눌와, 2001), 연등회의 전통과 현대축제화의 방안(전경욱, 남도민속연구17, 남도민속학회, 2008), 조선세시기(이석호 역, 동문선, 1991), 중국 등절의 기원과 형성에 관한 새로운 탐색(康保成, 김순희 역, 한중일 전통등문화의 어제와 오늘, 한국전통등연구원,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