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탈굿놀이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 굿놀이

집필자 한진오(韓鎭伍)

정의

입춘날 풍요를 기원하며 치르던 제주도 입춘굿의 한 과정인 탈놀이.

역사

입춘탈굿놀이는 입춘굿에 대한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주도의 입춘굿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 후기에 제주 방어사로 부임했던 이원조李源祚의 『탐라록耽羅錄』(1841)에 있다. 이원조는 『탐라록』에서 “「입춘일념운立春日拈韻」으로 24일은 입춘이다. 호장이 관복을 차려 입고 나무로 만든 소가 끄는 쟁기를 잡고 앞서가면 어린 기생 둘이 좌우에서 부채를 들고 따른다. 이를 일러 ‘퇴우’라고 한다. 무당의 무리들이 북을 치면서 앞에서 이끌어 간다. 먼저 객사를 거친 뒤 영정으로 들어가 밭갈이하는 모습을 흉내 내었다. 이날 관아에서는 음식을 마련하여 대접하였다. 이것은 탐라왕의 적전하는 풍속을 이어 온 것이라고 한다 二十四日立春, 戶長具冠服執耒耟, 兩兒妓左右執扇, 謂之退牛, 執群巫擊鼓所導, 先自客舍次入營庭, 作耕田樣, 其日自本府設饌以饋, 是耽羅王籍田遺俗云.”라고 하였다.

입춘탈굿놀이에 대해서는 20세기 초의 기록인 김석익의 『해상일사海上逸史』 춘경조春耕條에서 최초로 발견된다. 『해상일사』에는 “이때에 아주 큰 붉은 가면에 긴 수염을 달아 농부로 꾸민 사람 하나가 등장해 오곡의 씨앗을 뿌린다. 이어서 다른 한 사람이 깃에 채색을 하여 초란이처럼 꾸미고 등장하여 씨앗을 쪼아 먹는 시늉을 한다. 한 사람은 가면을 써서 사냥꾼으로 꾸미고 초란이의 뒤를 쫓아가며 맞추는 시늉을 한다. 또, 가면을 쓴 두 사람이 여자처럼 꾸미고 처첩이 서로 투기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한 사람이 가면을 써서 남자로 꾸미고 싸움을 말리는 모양을 우스꽝스럽게 보여 주면 모두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그 형태가 꼭두각시놀음과 매우 비슷하다 於是有一人着假面, 絕大赤面, 長鬚餙以農夫, 播五穀種, 一人餙彩羽如抄亂, 做拾啄之狀, 一人着假面餙以獵夫踵抄亂, 而擬中之又二人着假面餙以女優, 有妻妾相妬之容, 一人着假面餙以男優謾作調停之樣, 而皆露齒如笑, 形甚傀儡人.”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밖에 김두봉金斗奉의 『제주도실기濟州島實記』(1936),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일본주위민족의 원시종교─신화종교인류학적 연구日本周圍民族の原始宗教─神話宗教人類学的研究』(1924) 또한 입춘탈굿놀이를 소개하고 있다. 김두봉은 김석익의 기록을 참고로 간단한 부연을 덧붙이는 것에 그쳤고, 도리이 류조는 이 놀이가 묵극黙劇이라고 소개했다.

내용

입춘굿은 다음과 같은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다. 입춘 전날 전도의 무당들이 모여 목우木牛를 만들어 제사를 지낸다. 입춘 당일이 되면 호장이 목우에 쟁기를 메고 그 뒤에 기생, 무당들이 함께 거리를 행진하는 거리굿을 펼친다. 이때 읍성 안의 여염집을 돌아다니며 한 해의 풍흉을 예측하는 농점農占을 친다. 제주목 관아에 이르러 거리굿이 마무리되면 입춘탈굿놀이가 이어진다.

입춘탈굿놀이를 줄거리에 따라 세 부분으로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천하태평天下泰平과 국토안은國土安隱을 신에게 기원한 후 비로소 탈을 쓰고 놀이를 시작한다. 먼저 붉은 탈을 쓴 농부가 나와 씨를 뿌리며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 깃에 채색한 새탈을 쓴 초란이가 나와 씨앗을 쪼아 먹는 장면이 펼쳐진다. 이에 사바치[獵夫]가 등장해 초란이를 사냥하며 쫓고 쫓기는 장면을 펼친 끝에 마침내 쫓아낸다. 이 장면은 모의농경模擬農耕을 통해 풍농을 기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새의 모습을 한 초란이는 사邪를 뜻하는 제주어 ‘새’의 발음과 ‘새[鳥]’가 같다는 착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 번째 부분은 노파와 젊은 여인 모양의 탈을 쓴 광대 두 사람이 등장해 처와 첩이 서로 싸우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들의 싸움이 점점 요란해질 때쯤 남편으로 보이는 탈을 쓴 광대가 나타나 우스꽝스럽게 말리며 중재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이 부분은 다른 지역의 탈놀이처럼 처첩 간의 갈등을 빗대어 삶과 죽음, 겨울과 봄의 순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세 번째 부분은 농부가 다시 등장해 제주 목사에게 술과 담배를 청해 너스레를 떨며 서로 대화하는 장면이다. 이 부분은 입춘굿을 통해 관官과 민民의 화합을 꾀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입춘탈굿놀이가 마무리되면 무당들이 집전하는 풍농굿이 펼쳐진 뒤 비로소 입춘굿 전체가 마무리된다.

입춘탈굿놀이는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각종 민속 경연 대회의 참가작으로 복원된 바 있으며 1999년에 과거의 입춘굿을 계승한 탐라국 입춘굿이라는 축제의 한 프로그램으로 복원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입춘탈굿놀이는 복원 과정에서 다소 변화가 있었지만 최근에는 오방각시 마당, 농부 마당, 기생 마당, 각시 마당으로 정리되었다. 이 중에서 농부 마당은 과거의 입춘탈굿놀이 중 호장의 밭갈이와 농부, 사바치, 초란이가 펼치는 농사와 사냥 장면이다. 각시마당은 처와 첩의 싸움을 남편이 말리는 장면이다. 오방각시 마당과 기생 마당은 새롭게 추가된 장면이다.

입춘탈굿놀이의 유래와 변화 과정을 가늠하려면 외래적인 측면과 재래적인 측면을 두루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외래적인 측면에서는 처첩 간의 갈등과 그것을 조정하는 이른바 ‘씨앗 싸움’을 들 수 있다. 이 부분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탈놀이에 흔히 등장하는 장면이며, 의미 또한 상통한다. 이런 점에서 제주의 입춘탈굿놀이는 다소 미약하지만 다른 지방 탈놀이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외래적인 측면에 비해 재래적인 측면에서는 다면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제주목 풍속조에는 “매년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날까지 남녀 무당이 신의 기旗를 함께 받들고 경을 읽고 귀신 쫓는 놀이를 하는데 징과 북이 앞에서 인도하며 동네를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다투어 재물과 곡식을 내어 제사한다 每歲元日至上元 巫覡共擎神纛 作儺戲錚鼓 前導出入閭閻 爭損財穀 以祭之.”라고 제주의 ‘나희儺戲’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정월 상원조에도 제주의 풍속인 화반花盤이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소개되어 있다. 나희와 화반의 전통은 최근까지도 ‘대돎’, ‘메구’, ‘대변순력’, ‘거리굿’, ‘거릿제’ 등의 명칭으로 제주도의 당굿에서 펼쳐져 왔다. 당기를 앞세우고 마을 곳곳을 순회하며 액막이를 하는 모습은 제주도 입춘굿 중의 거리굿과 매우 비슷하다. 또한 제주도의 굿에는 본풀이에 대응하는 많은 굿놀이가 존재한다. 이 중에서 전상놀이, 영감놀이, 구삼싱 냄 등은 종이탈 또는 헝겊탈을 쓰고 펼친다. 이처럼 탈을 쓰고 펼치는 굿놀이가 예로부터 전승되고 있다. 이로써, 무당들의 입춘굿과 하나로 이어지는 입춘탈굿놀이는 굿놀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징 및 의의

제주도 입춘굿과 비슷한 춘경의례春耕儀禮는 다른 지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희춘의 『미암선생집眉巖先生集』 「입춘나경의立春裸耕議」, 허목의 『척주기사陟洲記事』 「입춘제선색문立春祭先穡文」, 이학규李學逵의 『낙하생집洛下生集』 「춘경제春耕祭」,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 입춘조立春條 등을 살펴보면 함경도에서 경상도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방에 춘경의례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느 지방에서도 제주도의 입춘탈굿놀이와 같은 탈놀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미개未開의 보고寶庫 제주도濟州島』(1924)에는 입춘탈굿놀이를 일본의 입춘 풍속인 미부교겐[壬生狂言]과 비슷한 형식의 탈놀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입춘탈굿놀이는 제주도 무속 특유의 거리굿과 굿놀이가 마을굿을 넘어서서 고을굿으로 확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東國歲時記, 耽羅錄, 海上逸史, 제주도실기(김두봉, 제주도실적연구사, 1936), 탐라국 입춘굿놀이(문무병, 제주전통문화연구소, 2002), 未開の 寶庫 濟州島(全羅南道濟州島廳, 1924), 日本周圍民族の原始宗教(神話宗教人類学的研究, 鳥居龍藏, 1924).

입춘탈굿놀이

입춘탈굿놀이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 굿놀이

집필자 한진오(韓鎭伍)

정의

입춘날 풍요를 기원하며 치르던 제주도 입춘굿의 한 과정인 탈놀이.

역사

입춘탈굿놀이는 입춘굿에 대한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주도의 입춘굿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 후기에 제주 방어사로 부임했던 이원조李源祚의 『탐라록耽羅錄』(1841)에 있다. 이원조는 『탐라록』에서 “「입춘일념운立春日拈韻」으로 24일은 입춘이다. 호장이 관복을 차려 입고 나무로 만든 소가 끄는 쟁기를 잡고 앞서가면 어린 기생 둘이 좌우에서 부채를 들고 따른다. 이를 일러 ‘퇴우’라고 한다. 무당의 무리들이 북을 치면서 앞에서 이끌어 간다. 먼저 객사를 거친 뒤 영정으로 들어가 밭갈이하는 모습을 흉내 내었다. 이날 관아에서는 음식을 마련하여 대접하였다. 이것은 탐라왕의 적전하는 풍속을 이어 온 것이라고 한다 二十四日立春, 戶長具冠服執耒耟, 兩兒妓左右執扇, 謂之退牛, 執群巫擊鼓所導, 先自客舍次入營庭, 作耕田樣, 其日自本府設饌以饋, 是耽羅王籍田遺俗云.”라고 하였다. 입춘탈굿놀이에 대해서는 20세기 초의 기록인 김석익의 『해상일사海上逸史』 춘경조春耕條에서 최초로 발견된다. 『해상일사』에는 “이때에 아주 큰 붉은 가면에 긴 수염을 달아 농부로 꾸민 사람 하나가 등장해 오곡의 씨앗을 뿌린다. 이어서 다른 한 사람이 깃에 채색을 하여 초란이처럼 꾸미고 등장하여 씨앗을 쪼아 먹는 시늉을 한다. 한 사람은 가면을 써서 사냥꾼으로 꾸미고 초란이의 뒤를 쫓아가며 맞추는 시늉을 한다. 또, 가면을 쓴 두 사람이 여자처럼 꾸미고 처첩이 서로 투기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한 사람이 가면을 써서 남자로 꾸미고 싸움을 말리는 모양을 우스꽝스럽게 보여 주면 모두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그 형태가 꼭두각시놀음과 매우 비슷하다 於是有一人着假面, 絕大赤面, 長鬚餙以農夫, 播五穀種, 一人餙彩羽如抄亂, 做拾啄之狀, 一人着假面餙以獵夫踵抄亂, 而擬中之又二人着假面餙以女優, 有妻妾相妬之容, 一人着假面餙以男優謾作調停之樣, 而皆露齒如笑, 形甚傀儡人.”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밖에 김두봉金斗奉의 『제주도실기濟州島實記』(1936),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일본주위민족의 원시종교─신화종교인류학적 연구日本周圍民族の原始宗教─神話宗教人類学的研究』(1924) 또한 입춘탈굿놀이를 소개하고 있다. 김두봉은 김석익의 기록을 참고로 간단한 부연을 덧붙이는 것에 그쳤고, 도리이 류조는 이 놀이가 묵극黙劇이라고 소개했다.

내용

입춘굿은 다음과 같은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다. 입춘 전날 전도의 무당들이 모여 목우木牛를 만들어 제사를 지낸다. 입춘 당일이 되면 호장이 목우에 쟁기를 메고 그 뒤에 기생, 무당들이 함께 거리를 행진하는 거리굿을 펼친다. 이때 읍성 안의 여염집을 돌아다니며 한 해의 풍흉을 예측하는 농점農占을 친다. 제주목 관아에 이르러 거리굿이 마무리되면 입춘탈굿놀이가 이어진다. 입춘탈굿놀이를 줄거리에 따라 세 부분으로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천하태평天下泰平과 국토안은國土安隱을 신에게 기원한 후 비로소 탈을 쓰고 놀이를 시작한다. 먼저 붉은 탈을 쓴 농부가 나와 씨를 뿌리며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 깃에 채색한 새탈을 쓴 초란이가 나와 씨앗을 쪼아 먹는 장면이 펼쳐진다. 이에 사바치[獵夫]가 등장해 초란이를 사냥하며 쫓고 쫓기는 장면을 펼친 끝에 마침내 쫓아낸다. 이 장면은 모의농경模擬農耕을 통해 풍농을 기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새의 모습을 한 초란이는 사邪를 뜻하는 제주어 ‘새’의 발음과 ‘새[鳥]’가 같다는 착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 번째 부분은 노파와 젊은 여인 모양의 탈을 쓴 광대 두 사람이 등장해 처와 첩이 서로 싸우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들의 싸움이 점점 요란해질 때쯤 남편으로 보이는 탈을 쓴 광대가 나타나 우스꽝스럽게 말리며 중재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이 부분은 다른 지역의 탈놀이처럼 처첩 간의 갈등을 빗대어 삶과 죽음, 겨울과 봄의 순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세 번째 부분은 농부가 다시 등장해 제주 목사에게 술과 담배를 청해 너스레를 떨며 서로 대화하는 장면이다. 이 부분은 입춘굿을 통해 관官과 민民의 화합을 꾀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입춘탈굿놀이가 마무리되면 무당들이 집전하는 풍농굿이 펼쳐진 뒤 비로소 입춘굿 전체가 마무리된다. 입춘탈굿놀이는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각종 민속 경연 대회의 참가작으로 복원된 바 있으며 1999년에 과거의 입춘굿을 계승한 탐라국 입춘굿이라는 축제의 한 프로그램으로 복원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입춘탈굿놀이는 복원 과정에서 다소 변화가 있었지만 최근에는 오방각시 마당, 농부 마당, 기생 마당, 각시 마당으로 정리되었다. 이 중에서 농부 마당은 과거의 입춘탈굿놀이 중 호장의 밭갈이와 농부, 사바치, 초란이가 펼치는 농사와 사냥 장면이다. 각시마당은 처와 첩의 싸움을 남편이 말리는 장면이다. 오방각시 마당과 기생 마당은 새롭게 추가된 장면이다. 입춘탈굿놀이의 유래와 변화 과정을 가늠하려면 외래적인 측면과 재래적인 측면을 두루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외래적인 측면에서는 처첩 간의 갈등과 그것을 조정하는 이른바 ‘씨앗 싸움’을 들 수 있다. 이 부분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탈놀이에 흔히 등장하는 장면이며, 의미 또한 상통한다. 이런 점에서 제주의 입춘탈굿놀이는 다소 미약하지만 다른 지방 탈놀이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외래적인 측면에 비해 재래적인 측면에서는 다면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제주목 풍속조에는 “매년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날까지 남녀 무당이 신의 기旗를 함께 받들고 경을 읽고 귀신 쫓는 놀이를 하는데 징과 북이 앞에서 인도하며 동네를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다투어 재물과 곡식을 내어 제사한다 每歲元日至上元 巫覡共擎神纛 作儺戲錚鼓 前導出入閭閻 爭損財穀 以祭之.”라고 제주의 ‘나희儺戲’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정월 상원조에도 제주의 풍속인 화반花盤이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소개되어 있다. 나희와 화반의 전통은 최근까지도 ‘대돎’, ‘메구’, ‘대변순력’, ‘거리굿’, ‘거릿제’ 등의 명칭으로 제주도의 당굿에서 펼쳐져 왔다. 당기를 앞세우고 마을 곳곳을 순회하며 액막이를 하는 모습은 제주도 입춘굿 중의 거리굿과 매우 비슷하다. 또한 제주도의 굿에는 본풀이에 대응하는 많은 굿놀이가 존재한다. 이 중에서 전상놀이, 영감놀이, 구삼싱 냄 등은 종이탈 또는 헝겊탈을 쓰고 펼친다. 이처럼 탈을 쓰고 펼치는 굿놀이가 예로부터 전승되고 있다. 이로써, 무당들의 입춘굿과 하나로 이어지는 입춘탈굿놀이는 굿놀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징 및 의의

제주도 입춘굿과 비슷한 춘경의례春耕儀禮는 다른 지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희춘의 『미암선생집眉巖先生集』 「입춘나경의立春裸耕議」, 허목의 『척주기사陟洲記事』 「입춘제선색문立春祭先穡文」, 이학규李學逵의 『낙하생집洛下生集』 「춘경제春耕祭」,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 입춘조立春條 등을 살펴보면 함경도에서 경상도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방에 춘경의례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느 지방에서도 제주도의 입춘탈굿놀이와 같은 탈놀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미개未開의 보고寶庫 제주도濟州島』(1924)에는 입춘탈굿놀이를 일본의 입춘 풍속인 미부교겐[壬生狂言]과 비슷한 형식의 탈놀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입춘탈굿놀이는 제주도 무속 특유의 거리굿과 굿놀이가 마을굿을 넘어서서 고을굿으로 확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東國歲時記, 耽羅錄, 海上逸史, 제주도실기(김두봉, 제주도실적연구사, 1936), 탐라국 입춘굿놀이(문무병, 제주전통문화연구소, 2002), 未開の 寶庫 濟州島(全羅南道濟州島廳, 1924), 日本周圍民族の原始宗教(神話宗教人類学的研究, 鳥居龍藏, 1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