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대잡극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 용어

집필자 이호승(李鎬丞)

정의

고려 및 조선시대 국가의 여러 행사에서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펼친 연희의 총칭.

내용

고려 말 이색李穡(1328∼1396)의 『목은집牧隱集』 33권에 실린 시 <동대문부터 대궐 문전까지의 산대잡극은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다自東大門至闕門前山臺雜劇前所未見也>를 통해 산대잡극山臺雜劇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산대잡극이란 이 시기에 처음 연행된 것이 아니라 종전에 보지 못했던 더욱 새로워진 모습을 보였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적절하다. 고려 말에 백희잡기百戲雜技가 전 시대보다 높은 수준에 도달했고 이것을 산대잡극이라 불렀다.

산대를 얽어맨 것이 봉래산 같고
과일 바치는 선인이 바다에서 왔네.
연희자들이 울리는 북과 징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처용의 소맷자락은 바람 따라 돌아가네.
긴 장대 위의 연희자는 평지에서 걷듯하고
폭죽은 번개처럼 하늘을 솟네.
태평성대의 참모습을 그리려 하나
늙은 신하 글솜씨 없음이 부끄럽구나.
山臺結綴似蓬萊 獻果仙人海上來
雜客鼓鉦轟地動 處容衫袖逐風廻
長竿倚漢如平地 爆竹衝天似疾雷
欲寫太平眞氣像 老臣簪筆愧非才

이 시를 보면 산대잡극의 공연 규모, 무대, 종목 등을 알 수 있다. 산대의 모양은 봉래산蓬萊山과 같았고, 바다에서 온 선인이 과일을 드리는 춤을 추었고, 북과 징소리에 맞추어 처용무를 추었으며, 장대 위에서 솟대타기를 했고, 폭죽놀이가 있었다. 그러나 동대문부터 대궐 문전까지 펼쳐진 산대잡극 공연 종목이 이 시에 나오는 것으로 한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훨씬 다양한 종목이 연행되었을 것이지만, 우선 이색의 작품을 중심으로 산대잡극에서 펼쳐진 공연 종목을 살펴보고자 한다.

“산대를 얽어맨 것이 봉래산 같고”라는 것은 산대잡극에서 봉래산 모양의 산대를 꾸미고 그 위에 인형 잡상雜像을 설치하여 신선의 고사를 재현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봉래산은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자라가 등에 지고 다닌다고 하여 오산鰲山이라고도 불렀다. 전통사회에서 산대를 오산이라고 표현했고, 산대 잡상놀이를 연행했다는 것은 여러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시대 중국 사신이었던 아극돈阿克敦(1685∼1756)의 『봉사도奉使圖』(1725)이다. 『봉사도』 중 제7폭에 그려진 산대에는 낚시질하는 신선 인형, 춤을 추는 선녀 인형, 원숭이 인형, 붉은 옷을 입은 인형, 그리고 나무들과 누대도 설치되어 있고 산대 잡상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 산대 위에 여러 잡상을 설치했고 그것들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산대 위에 올라가기도 했으며, 산대의 한 모퉁이가 무너져서 사람들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는 내용이 전한다.

“과일 바치는 선인이 바다에서 왔네.”라는 표현을 통해 산대잡극에서 헌선도獻仙桃가 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헌선도는 고려 문종文宗(재위 1046∼1083) 때 송나라로부터 들여온 교방악의 하나이다. 헌선도는 정월 보름날 가회嘉會에서 군왕을 송수頌壽하기 위해 공연한 가무희인데, 서왕모西王母가 선계에서 내려와 군왕에게 선도仙桃를 드리는 내용이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고려사高麗史』 권18에 전하는데, 1167년(의종 21) 4월 의종의 생일인 하청절에 만춘정萬春亭에 나가 연흥전延興殿에서 잔치를 베풀 때, 대악서大樂署와 관현방管絃坊이 앞다투어 채붕綵棚하고 헌선도와 포구락抛毬樂 등의 공연을 펼쳤다고 한다.

“연희자들이 울리는 북과 징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처용의 소맷자락은 바람 따라 돌아가네.”라는 것은 북과 징소리에 맞추어 속악가무俗樂歌舞인 처용무를 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사』 「악지樂志」에는 처용무가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고려사』 충혜왕忠惠王조와 신우辛禑조에는 처용희處容戲를 즐겼다는 기록이 전한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처용무는 궁중을 비롯한 상층의 무용으로 정착되었다. 주로 섣달그믐 잡귀를 쫓는 나례의식에서 행해졌으며, 그 외에 중국 사신 영접 행사, 궁중 다례 등에서 연희되었다.

“긴 장대 위의 연희자는 평지에서 걷듯 하고”는 장대 위에서 솟대타기를 펼쳤음을 보여 준다. 이 장면은 솟대타기 연희자가 솟대 위에서 마치 평지를 걷는 듯이 다리를 움직이는 모습을 연출하는 장면이다.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이 몇 길 높이의 솟대 위에서 한 다리로 서거나 두 다리를 번갈아 서는 고난도의 솟대타기 기예를 보여 주고 있다. 고려시대의 솟대타기는 임금 의 행차, 연등회燃燈會, 수희水戲 등에서 연행되었다.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문기장자文機障子>라는 시에는 연등회 때 관람한 솟대타기[緣橦]가 나온다. 또, <진강후 저택에서 성가를 맞이할 때 교방의 치어와 구호晉康候邸迎聖駕次敎坊致語口號>에서는 고려시대 임금의 행차를 맞이하는 공식 행사에서 솟대타기[尋撞]와 줄타기[走索]가 행해졌음을 보여 준다. 이색의 『목은집』에도 솟대타기를 살펴볼 수 있는 시가 여럿 실려 있다. 9권에 실린 시 〈삼한이라 만 리 먼 나라에서三韓萬里國〉에는 “솟대 타는 건 처음 구경했으리尋橦縱目初”라는 구절이 있다. 조공을 하러 중국에 도착한 사람들이 중국의 솟대타기를 처음 구경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폭죽은 번개처럼 하늘을 솟네.”라는 표현은 산대잡극에서 화희火戲가 연행되었음을 보여 준다. 화희는 화약이 터질 때 나는 소리와 꽃잎처럼 퍼지는 불꽃을 즐기는 연희이다. 군대에서는 화약의 위력을 보이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행해졌다. 13세기 후반부터 등놀이를 할 때 불꽃놀이를 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연말 연초나 사신 접대, 나례儺禮 등에서 벽사辟邪의 의미로 행했다. 아울러 화약의 사용은 군사軍事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국가의 중대사로 여겨졌다.

산대잡극과 나례희儺禮戲는 내용이 같은 대상을 다른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 고려시대 산대잡극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자료에는 이색의 또 다른 작품 <구나행驅儺行>
을 들 수 있다. <구나행>은 나례에서 연행된 연희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1구∼14구)는 12지신과 진자들이 역귀를 쫓는 의식을 묘사하는 내용이고, 후반부(15구∼28구)는 구나의식이 끝난 후 연희자들이 각종 잡희를 연행하는 내용이다. 그 후반부를 살펴보자.

오방귀 춤추고 사자가 뛰놀며
불을 뿜어내기도 하고 칼을 삼키기도 하네.
서방에서 온 저 호인胡人들은
검기도 하고 누렇기도 한 얼굴에 눈은 파란색이네.
그중의 노인이 등은 구부정하면서도 키가 큰데
여러 사람들 모두 남극성이 아닐까 놀라고 감탄하네.
강남의 장사꾼은 무어라 지껄이며
나아갔다 물러났다 가볍고 빠르기 바람결의 반딧불 같네.
신라의 처용은 칠보 장식을 했는데
머리 위의 꽃가지에선 향기가 넘치네.
긴 소매 날리며 태평무를 추는데
불그레히 취한 얼굴은 아직도 다 깨지 않은 듯.
누런 개는 방아 찧고 용은 여의주를 다투며
온갖 짐승 더풀더풀 춤추니 요임금 시절 궁정 같네.
舞五方鬼踊白澤 吐出回祿呑靑萍
金天之精有古月 或黑或黃目靑熒
其中老者傴而長 衆共驚嗟南極星
江南賈客語侏離 進退輕捷風中螢
新羅處容帶七寶 花枝壓頭香露零
低回長袖舞太平 醉臉爛赤猶未醒
黃犬踏碓龍爭珠 蹌蹌百獸如堯庭

인용문은 <구나행> 중 나례에서 구역驅疫이 끝난 뒤에 행해진 연희들을 보고 읊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구나의식이 끝난 후 거행되는 나희의 첫 순서로 오방귀무와 사자무가 진행되었고 이후 불 토해 내기, 칼 삼키기, 서역의 호인희胡人戲, 줄타기, 처용무, 각종 동물로 분장한 가면희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 중 서역의 호인희는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당시 고려에 많이 와 있던 서역인이 직접 등장해 연희를 펼쳤거나, 우리 연희자가 서역인의 형상을 한 가면을 쓰고 연희를 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검기도 하고 누렇기도 한 얼굴에 눈은 파란색인 서역의 호인들과 강남의 장사꾼은 공물바치기놀이에 등장한 외국인들을 가리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고려사』 1165년(의종 19) 4월조에 의하면, 우번右番의 내시들이 채붕을 설치하고 이국인이 고려에 와서 공물을 바치는 광경을 흉내 내는 공물바치기놀이를 연출했다는 내용이 있다. 우번에 귀족의 자제들이 많았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는 우번의 내시들이 원래 전문 연희자들이 연행하던 공물바치기놀이를 모방한 흉내 내기 연희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갔다 물러났다 가볍고 빠르기가 바람결의 반딧불 같네”라는 부분은 강남 장사꾼의 줄타기를 묘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강남 장사꾼의 다른 연기를 묘사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특징 및 의의

고려 이후 조선시대에 걸쳐 국가의 여러 행사에 채붕을 설치하고 공연한 가무백희歌舞百戲를 산대잡극이라 부르는데, 산대잡극이란 산 모양의 높은 채붕을 산대라고 부른 데서 연유한다. 산대잡극의 내용은 성현成俔의 <관나희觀儺戲>(방울 받기•줄타기인형극솟대타기),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만연어룡지희•무동•땅재주•솟대타기•각종 동물춤),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戲>(영산회상•가곡•12가사•어룡만연지희•불 토해 내기•포구락•사자무•처용무•유자희•요요기•단가판소리•땅재주•검무•줄타기•솟대타기•홍패고사) 등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또, 현재 전하는 여러 지역의 탈춤과 죽방울 돌리기, 솟대타기, 풍물, 남사당패의 대접돌리기(버나), 땅재주(살판), 줄타기(어름), 탈놀이(덧뵈기), 꼭두각시놀음(덜미) 등과 같은 종목에서 산대잡극의 잔존양상을 볼 수 있다.

무용, 음악, 연극, 체육, 무술이 세분되지 않은 채 연행되던 고대의 총체적인 연행 예술을 산악백희散樂百戲라 부른다. 삼국시대 동아시아 공동의 문어인 한문과 공동의 종교인 불교가 유입됐을 때, 동아시아 공동의 연희 자산인 산악백희도 한반도에 전래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이후 조선 전기까지의 중세 보편주의 시대는 한•중•일 각국이 함께 동아시아의 공동 문화를 완성해 간 시기였는데, 공연 문화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에서 산악백희라고 부르던 연희들을 백희, 가무백희, 잡희, 산대잡극, 산대희, 나례, 나희, 나 등으로 불렀다. 이것은 유사한 대상을 다양한 용어로 부른 것이다. 따라서 신라시대의 행사(팔관회연등회•가배 등), 고려시대의 행사(우란분재•나례•수희•과거 급제자 축하 행사•환영 행사 등), 조선시대의 행사(나례•중국 사신 영접 행사•문희연•수륙재•우란분재•관아 행사•읍치제의•동제•사대부가의 잔치•왕의 각종 행차와 궁중의 내농작•지방관 환영 등)에서는 산대잡극에 해당하는 연희를 전문 연희자들이 활발하게 공연했을 것이다.

참고문헌

공연문화의 전통(사진실, 태학사, 2002), 국문학연구산고(양재연, 일신사, 1976), 산대탈놀이(서연호, 열화당, 1987), 한국고전희곡의 역사(박진태, 민속원, 2001), 한국 연극사(이두현, 학연사, 2000), 한국의 전통연희(전경욱, 학고재, 2004), 한국 민족 공연학(김익두, 지식산업사, 2013).

산대잡극

산대잡극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 용어

집필자 이호승(李鎬丞)

정의

고려 및 조선시대 국가의 여러 행사에서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펼친 연희의 총칭.

내용

고려 말 이색李穡(1328∼1396)의 『목은집牧隱集』 33권에 실린 시 를 통해 산대잡극山臺雜劇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산대잡극이란 이 시기에 처음 연행된 것이 아니라 종전에 보지 못했던 더욱 새로워진 모습을 보였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적절하다. 고려 말에 백희잡기百戲雜技가 전 시대보다 높은 수준에 도달했고 이것을 산대잡극이라 불렀다. 산대를 얽어맨 것이 봉래산 같고과일 바치는 선인이 바다에서 왔네.연희자들이 울리는 북과 징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처용의 소맷자락은 바람 따라 돌아가네.긴 장대 위의 연희자는 평지에서 걷듯하고폭죽은 번개처럼 하늘을 솟네.태평성대의 참모습을 그리려 하나늙은 신하 글솜씨 없음이 부끄럽구나.山臺結綴似蓬萊 獻果仙人海上來雜客鼓鉦轟地動 處容衫袖逐風廻長竿倚漢如平地 爆竹衝天似疾雷欲寫太平眞氣像 老臣簪筆愧非才 이 시를 보면 산대잡극의 공연 규모, 무대, 종목 등을 알 수 있다. 산대의 모양은 봉래산蓬萊山과 같았고, 바다에서 온 선인이 과일을 드리는 춤을 추었고, 북과 징소리에 맞추어 처용무를 추었으며, 장대 위에서 솟대타기를 했고, 폭죽놀이가 있었다. 그러나 동대문부터 대궐 문전까지 펼쳐진 산대잡극 공연 종목이 이 시에 나오는 것으로 한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훨씬 다양한 종목이 연행되었을 것이지만, 우선 이색의 작품을 중심으로 산대잡극에서 펼쳐진 공연 종목을 살펴보고자 한다. “산대를 얽어맨 것이 봉래산 같고”라는 것은 산대잡극에서 봉래산 모양의 산대를 꾸미고 그 위에 인형 잡상雜像을 설치하여 신선의 고사를 재현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봉래산은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자라가 등에 지고 다닌다고 하여 오산鰲山이라고도 불렀다. 전통사회에서 산대를 오산이라고 표현했고, 산대 잡상놀이를 연행했다는 것은 여러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시대 중국 사신이었던 아극돈阿克敦(1685∼1756)의 『봉사도奉使圖』(1725)이다. 『봉사도』 중 제7폭에 그려진 산대에는 낚시질하는 신선 인형, 춤을 추는 선녀 인형, 원숭이 인형, 붉은 옷을 입은 인형, 그리고 나무들과 누대도 설치되어 있고 산대 잡상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 산대 위에 여러 잡상을 설치했고 그것들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산대 위에 올라가기도 했으며, 산대의 한 모퉁이가 무너져서 사람들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는 내용이 전한다. “과일 바치는 선인이 바다에서 왔네.”라는 표현을 통해 산대잡극에서 헌선도獻仙桃가 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헌선도는 고려 문종文宗(재위 1046∼1083) 때 송나라로부터 들여온 교방악의 하나이다. 헌선도는 정월 보름날 가회嘉會에서 군왕을 송수頌壽하기 위해 공연한 가무희인데, 서왕모西王母가 선계에서 내려와 군왕에게 선도仙桃를 드리는 내용이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고려사高麗史』 권18에 전하는데, 1167년(의종 21) 4월 의종의 생일인 하청절에 만춘정萬春亭에 나가 연흥전延興殿에서 잔치를 베풀 때, 대악서大樂署와 관현방管絃坊이 앞다투어 채붕綵棚하고 헌선도와 포구락抛毬樂 등의 공연을 펼쳤다고 한다. “연희자들이 울리는 북과 징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처용의 소맷자락은 바람 따라 돌아가네.”라는 것은 북과 징소리에 맞추어 속악가무俗樂歌舞인 처용무를 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사』 「악지樂志」에는 처용무가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고려사』 충혜왕忠惠王조와 신우辛禑조에는 처용희處容戲를 즐겼다는 기록이 전한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처용무는 궁중을 비롯한 상층의 무용으로 정착되었다. 주로 섣달그믐 잡귀를 쫓는 나례의식에서 행해졌으며, 그 외에 중국 사신 영접 행사, 궁중 다례 등에서 연희되었다. “긴 장대 위의 연희자는 평지에서 걷듯 하고”는 장대 위에서 솟대타기를 펼쳤음을 보여 준다. 이 장면은 솟대타기 연희자가 솟대 위에서 마치 평지를 걷는 듯이 다리를 움직이는 모습을 연출하는 장면이다.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이 몇 길 높이의 솟대 위에서 한 다리로 서거나 두 다리를 번갈아 서는 고난도의 솟대타기 기예를 보여 주고 있다. 고려시대의 솟대타기는 임금 의 행차, 연등회燃燈會, 수희水戲 등에서 연행되었다.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라는 시에는 연등회 때 관람한 솟대타기[緣橦]가 나온다. 또, 에서는 고려시대 임금의 행차를 맞이하는 공식 행사에서 솟대타기[尋撞]와 줄타기[走索]가 행해졌음을 보여 준다. 이색의 『목은집』에도 솟대타기를 살펴볼 수 있는 시가 여럿 실려 있다. 9권에 실린 시 〈삼한이라 만 리 먼 나라에서三韓萬里國〉에는 “솟대 타는 건 처음 구경했으리尋橦縱目初”라는 구절이 있다. 조공을 하러 중국에 도착한 사람들이 중국의 솟대타기를 처음 구경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폭죽은 번개처럼 하늘을 솟네.”라는 표현은 산대잡극에서 화희火戲가 연행되었음을 보여 준다. 화희는 화약이 터질 때 나는 소리와 꽃잎처럼 퍼지는 불꽃을 즐기는 연희이다. 군대에서는 화약의 위력을 보이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행해졌다. 13세기 후반부터 등놀이를 할 때 불꽃놀이를 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연말 연초나 사신 접대, 나례儺禮 등에서 벽사辟邪의 의미로 행했다. 아울러 화약의 사용은 군사軍事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국가의 중대사로 여겨졌다. 산대잡극과 나례희儺禮戲는 내용이 같은 대상을 다른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 고려시대 산대잡극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자료에는 이색의 또 다른 작품 을 들 수 있다. 은 나례에서 연행된 연희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1구∼14구)는 12지신과 진자들이 역귀를 쫓는 의식을 묘사하는 내용이고, 후반부(15구∼28구)는 구나의식이 끝난 후 연희자들이 각종 잡희를 연행하는 내용이다. 그 후반부를 살펴보자. 오방귀 춤추고 사자가 뛰놀며불을 뿜어내기도 하고 칼을 삼키기도 하네.서방에서 온 저 호인胡人들은검기도 하고 누렇기도 한 얼굴에 눈은 파란색이네.그중의 노인이 등은 구부정하면서도 키가 큰데여러 사람들 모두 남극성이 아닐까 놀라고 감탄하네.강남의 장사꾼은 무어라 지껄이며나아갔다 물러났다 가볍고 빠르기 바람결의 반딧불 같네.신라의 처용은 칠보 장식을 했는데머리 위의 꽃가지에선 향기가 넘치네.긴 소매 날리며 태평무를 추는데불그레히 취한 얼굴은 아직도 다 깨지 않은 듯.누런 개는 방아 찧고 용은 여의주를 다투며온갖 짐승 더풀더풀 춤추니 요임금 시절 궁정 같네.舞五方鬼踊白澤 吐出回祿呑靑萍金天之精有古月 或黑或黃目靑熒其中老者傴而長 衆共驚嗟南極星江南賈客語侏離 進退輕捷風中螢新羅處容帶七寶 花枝壓頭香露零低回長袖舞太平 醉臉爛赤猶未醒黃犬踏碓龍爭珠 蹌蹌百獸如堯庭 인용문은 중 나례에서 구역驅疫이 끝난 뒤에 행해진 연희들을 보고 읊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구나의식이 끝난 후 거행되는 나희의 첫 순서로 오방귀무와 사자무가 진행되었고 이후 불 토해 내기, 칼 삼키기, 서역의 호인희胡人戲, 줄타기, 처용무, 각종 동물로 분장한 가면희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 중 서역의 호인희는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당시 고려에 많이 와 있던 서역인이 직접 등장해 연희를 펼쳤거나, 우리 연희자가 서역인의 형상을 한 가면을 쓰고 연희를 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검기도 하고 누렇기도 한 얼굴에 눈은 파란색인 서역의 호인들과 강남의 장사꾼은 공물바치기놀이에 등장한 외국인들을 가리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고려사』 1165년(의종 19) 4월조에 의하면, 우번右番의 내시들이 채붕을 설치하고 이국인이 고려에 와서 공물을 바치는 광경을 흉내 내는 공물바치기놀이를 연출했다는 내용이 있다. 우번에 귀족의 자제들이 많았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는 우번의 내시들이 원래 전문 연희자들이 연행하던 공물바치기놀이를 모방한 흉내 내기 연희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갔다 물러났다 가볍고 빠르기가 바람결의 반딧불 같네”라는 부분은 강남 장사꾼의 줄타기를 묘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강남 장사꾼의 다른 연기를 묘사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특징 및 의의

고려 이후 조선시대에 걸쳐 국가의 여러 행사에 채붕을 설치하고 공연한 가무백희歌舞百戲를 산대잡극이라 부르는데, 산대잡극이란 산 모양의 높은 채붕을 산대라고 부른 데서 연유한다. 산대잡극의 내용은 성현成俔의 (방울 받기•줄타기•인형극•솟대타기),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만연어룡지희•무동•땅재주•솟대타기•각종 동물춤), 송만재宋晩載의 (영산회상•가곡•12가사•어룡만연지희•불 토해 내기•포구락•사자무•처용무•유자희•요요기•단가•판소리•땅재주•검무•줄타기•솟대타기•홍패고사) 등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또, 현재 전하는 여러 지역의 탈춤과 죽방울 돌리기, 솟대타기, 풍물, 남사당패의 대접돌리기(버나), 땅재주(살판), 줄타기(어름), 탈놀이(덧뵈기), 꼭두각시놀음(덜미) 등과 같은 종목에서 산대잡극의 잔존양상을 볼 수 있다. 무용, 음악, 연극, 체육, 무술이 세분되지 않은 채 연행되던 고대의 총체적인 연행 예술을 산악백희散樂百戲라 부른다. 삼국시대 동아시아 공동의 문어인 한문과 공동의 종교인 불교가 유입됐을 때, 동아시아 공동의 연희 자산인 산악백희도 한반도에 전래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이후 조선 전기까지의 중세 보편주의 시대는 한•중•일 각국이 함께 동아시아의 공동 문화를 완성해 간 시기였는데, 공연 문화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에서 산악백희라고 부르던 연희들을 백희, 가무백희, 잡희, 산대잡극, 산대희, 나례, 나희, 나 등으로 불렀다. 이것은 유사한 대상을 다양한 용어로 부른 것이다. 따라서 신라시대의 행사(팔관회•연등회•가배 등), 고려시대의 행사(우란분재•나례•수희•과거 급제자 축하 행사•환영 행사 등), 조선시대의 행사(나례•중국 사신 영접 행사•문희연•수륙재•우란분재•관아 행사•읍치제의•동제•사대부가의 잔치•왕의 각종 행차와 궁중의 내농작•지방관 환영 등)에서는 산대잡극에 해당하는 연희를 전문 연희자들이 활발하게 공연했을 것이다.

참고문헌

공연문화의 전통(사진실, 태학사, 2002), 국문학연구산고(양재연, 일신사, 1976), 산대탈놀이(서연호, 열화당, 1987), 한국고전희곡의 역사(박진태, 민속원, 2001), 한국 연극사(이두현, 학연사, 2000), 한국의 전통연희(전경욱, 학고재, 2004), 한국 민족 공연학(김익두, 지식산업사,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