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대놀이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 가면극

집필자 정형호(鄭亨鎬)
갱신일 2019-01-18

정의

서울과 인근 지역에서 전승되는 가면극.

역사

산대놀이는 고려시대부터 설치한 산대山臺라는 야외 임시 무대와 그곳의 가무악 및 잡희 등에서 연유한다. 조선 후기에 산대가 폐지되면서 탈놀이만 민간화하여 서울의 본산대로 전승되다가, 이후 서울 인근 지역에 전파되어 정착되었다.

산대山臺는 산과 같이 거대한 임시 무대로 고려 초부터 이미 전승되었다. 산대가 설치되는 시기는 매우 다양했다. 대체로 고려시대에는 팔관회연등회, 궁중의 새해맞이 축귀逐鬼 행사인 나례儺禮, 사찰과 관의 행사 등이 열리는 시기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중국 사신 영접, 연말 나례, 궁의 행사, 국가적 경사와 연회 등에 설치되었다. 산대는 고정된 대형 산대인 대산대大山臺부터 이동식인 예산대曳山臺, 기타 화산대火山臺, 다정산대茶亭山臺, 주산대舟山臺 등으로 다양하다. 산대의 규모는 매우 큰데, 고정 산대의 경우 주요 기둥만 25m 이상이어서 대략 7층 높이의 소규모 아파트가 네 채 정도 세워져 있는 규모였다. 산대는 재사용할 수 없어 해마다 다시 설치했으며, 이 때문에 인력 동원•목재 확보•각종 재료 준비에 어려움을 겪어 과도한 비용 소모, 각종 사고 등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산대에서 이루어진 연희는 각종 궁중정재인 헌선도獻仙桃•처용무•솟대쟁이놀이•폭죽 터뜨리기•축귀의식무 등 다양하며 음악 외에 다른 각종 춤, 화희火戲, 각종 교방가요, 잡희, 마술인 환술幻術, 즉흥극 등이 포함된다. 1725년(영조 1) 아극돈阿克敦의 『봉사도奉使圖』라는 화첩에 그려진 산대의 무대를 보면, 탈놀이는 지상에서 연희되고 있다. 곧 탈놀이•땅재주•줄타기 등은 지상에서 이루어지며, 각종 춤•노래•연극 등은 산대 무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관에서 주도하는 산대는 인조 때에 관련 도감이 폐지되면서 약화되다가 영조 이후에 이르러 완전히 폐지되어, 전문적인 예인패들은 민간으로 연희 장소를 옮겼다.

18세기 말 강이천姜彛天은 한양의 산대놀이를 보고 <남성관희자南城觀戲子>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것은 민간 가면극을 중심으로 쓴 시이다. 1778년에 강이천은 남대문 인근에서 살다가 남대문 밖 소나무 숲의 야외 마당에서 벌어진 가면극과 인형극을 보고 한시를 지었다. 이것은 대형 산대가 아닌 민간화된 소규모 야외 가면극으로서, 여기에는 푸른 소나무 숲의 임시 무대, 차일 속 풍악, 넓은 마당, 많은 구경꾼, 홍의를 입고 뽐내는 관리 등의 주변 환경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 탈놀이에는 노장[老釋], 사미승, 선승, 소매少妹, 대취승大醉僧, 노유생老儒生, 무부武夫, 영청아嬰靑娥, 파로婆老 외에도 거사居士와 사당社堂, 야차夜叉, 달자㺚子 등이 등장한다. 이것을 현전하는 양주 별산대놀이와 대조하여, 노석老釋은 노장, 소매少妹는 소무, 승僧은 상좌, 노유생老儒生은 양반, 무부武夫는 취발이 또는 말뚝이, 파로婆老는 할미, 대취승大醉僧은 취발이 또는 목중, 더벅머리 귀신은 옴중과 목중, 사당과 거사는 현재의 사당•거사 등으로 대입해 볼 수도 있다.

교방의 춤에도 현재의 산대놀이 관련 인물이 등장한다. 고종 시기 정현석鄭顯奭이 편찬한 『교방가요敎坊歌謠』(1872)에는 14종의 춤 속에 승무僧舞 부분이 있으며, 잡희雜戲로 취승醉僧•양반•초라니 등이 등장한다. 여기의 취승은 강이천의 <남성관희자>에 나오는 취승과 동일하며, 다만 초라니는 새로 추가되었다. 특히 승무의 내용은 기생을 사이에 둔 노승과 풍류랑風流郞의 갈등 양상으로 나타나며, 기생을 비단신으로 유혹하여 갈등이 심화된다. 그리고 상좌上佐도 등장하여 노승을 돕는다. 양반 및 미녀 등이 등장하여 추는 춤이 있으며, 취승은 격렬한 춤을 춘다. 이는 현전하는 중부 지역 산대놀이 내용에 근접한다.

조선 후기에 관 주도 산대가 소멸하고, 서울과 지방의 재인才人과 우인優人들이 흩어지면서 이들이 지역 산대놀이로 정착하게 된다. 따라서 서울의 본산대가 민간예인집단화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성균관에 속했던 천민 집단인 반인泮人이 서울 지역 산대놀이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인들은 북방 유목 민족에 연원을 둔 수척에서 유래하는데, 특히 대표적인 애오개 산대놀이패가 3대 시장의 하나인 칠패의 상인들과 현방懸房의 후원에 의해 활동하였다.

내용

조선시대에는 산대를 세우고 그곳에서 잡다한 연희가 이루어졌지만, 산대에 참여한 광대•기녀•악공 중에서 탈춤을 추었던 전문예인들의 놀이만 서울 지역 산대놀이에서 수용•발전시켜 현전하는 산대 가면극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것이 서울의 본산대로 전승되었는데, 애오개(아현) 산대•녹번 산대•사직동 딱딱이패•홍제동 산대•구파발 산대•노량진 산대 등이 그 중심이다. 전문예인들은 공연 종목이 많아야 인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들 본산대패는 가면극 이외에 줄타기, 풍물과 무동타기, 땅재주 등도 함께 전승하였다. 그중에 가면극이 가장 인기가 있어 이것이 본산대패의 핵심 종목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본산대놀이는 20세기 초에 모두 소멸되었으며, 이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양주•송파•퇴계원의 산대놀이가 현존하고 있다.

양주 별산대놀이는 약 200여 년 전에 서울의 본산대놀이 중에 애오개•녹번•구파발의 산대로부터 영향을 받아 지역민들이 양주에 정착시킨 것이다. 전승 주체는 양주목에 속한 하급 관속들이 중심이 되었다. 여기에 상인층이 관여하고, 일부 무계巫系 집안도 전승을 주도했다. 특히 관속과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도중都中이라는 조합을 설립해서 산대놀이를 주도했다. 따라서 놀이판의 판주가 자릿세를 받고 상인들에게 놀이판 주위에서 영업하는 것을 허가했다.

송파 산대놀이의 전승 배경인 송파장은 15대 향시 중의 하나로, 18세기 이후에 시장 경제의 발달과 새로운 상품 유통으로 활성화되었다. 이곳은 경강포구로서 포구 상업이 발달하면서 포구 주인층이 상권을 장악한 곳으로, 한때 서울의 시전을 능가하는 난전이었다. 따라서 대규모 상품 집산지였던 송파장을 중심으로 사재기가 성행하면서 시전 상인들에 의해 이 장시의 혁파가 제기되기도 했다.

핵심 전승층을 보면, 1900년 이전의 시장판에는 말감고(되나 말로 곡식을 헤아려 주는 직업)•임방꾼(배에 화물을 싣고 푸는 직업)•잡심부름꾼•술집•운송점(마루하치)•선원•연초 가공 상인•신탄상薪炭商•우시장 상인 등이 있었으며, 모두 장시場市와 관련된 직업이 다수이고 일부의 농업 종사자가 참여했다.

퇴계원은 각종 육로와 수로 교통의 중심지로, 경기도 동쪽에서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따라서 한양으로 공급되는 숯•장작•건축재•소•곡식•채소•연초 등이 거쳐 간 곳이다. 예전에는 왕숙천을 끼고 100여 호의 객주와 역원이 자리 잡고, 장터에는 연초 가공업자•장작상• 우시장이 활성화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퇴계원 산대놀이가 전승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현전하는 양주 별산대놀이는 읍치邑治 가면극, 송파 산대놀이와 퇴계원 산대놀이는 장시場市 가면극의 성격을 지닌다.

산대놀이 세 곳의 놀이 시기를 보면, 대체로 단오•초파일•백중 등이 두드러진다. 양주 별산대놀이의 놀이 시기는 20세기 초반만 해도 단오가 중심이고 사월초파일이 부수적이며, 기타 삼짇날•중양절•기타 경사•기우제•타 지역 초청 등에도 공연되었다. 송파 산대놀이의 연희시기는 송파장의 활성화와 관련이 있다. 정초•사월초파일•오월단오•칠월백중•팔월한가위 등의 명절이나 장이 잘되지 않는 시기 등으로 대략 연 3∼4회 정도 공연했는데, 그중에 칠월백중에 가장 크게 했으며 이때는 장마당에서 7∼10일 정도 계속 놀이가 이루어졌다. 송파의 백중장은 매우 성황을 이루어서 각지의 이름난 연희자들을 초청하여 일주일씩 탈놀음을 했다. 특히 장이 약화되면 상인들이 추렴하여 줄타기•씨름민요•산대놀이를 벌였다. 그러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송파장이 폐허가 되면서 산대놀이도 중단되었다.

퇴계원 산대놀이는 별산대로서 주로 정월대보름, 사월초파일, 단오, 백중, 추석, 봄의 농한기에 놀았다. 놀이 장소는 왕숙천의 모래 마당이었다. 봄 농한기와 사월초파일에는 연초상•음식점 등의 상인들이 돈을 대서 박춘재•송만갑•이동백 같은 소리꾼들도 초청했다. 백중이나 추석 때는 송아지를 걸고 씨름 대회가 열렸고, 산대놀이•광대줄타기•남사당놀이 등을 즐기며 밤새도록 놀았다. 그러나 정부에서 연초상을 금지한 1920년대 초반 이후 퇴계원의 경제는 급격하게 쇠퇴하였고, 이에 따라 산대놀이를 놀 수 있는 재정적 지원이 어려워지면서 1920년대 말 이후 중단되었다.

결국 산대놀이의 경우, 양주 별산대놀이는 단오가 중심이고 사월초파일•백중이 부수적 시기이며, 송파 산대놀이는 칠월백중을 중심으로 하여 놀고 단오에 부수적으로 논다. 퇴계원 산대놀이는 사월초파일과 백중이 중요 시기이고 단오가 부수적이다. 따라서 산대놀이의 연희 시기는 단오, 백중, 초파일이 병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송파 산대놀이와 퇴계원 산대놀이에서 백중이 중요한 시기인 것은 이 지역이 서울 인근의 핵심적인 장시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산대놀이의 놀이 공간을 보면, 양주 별산대놀이의 놀이 공간은 원래 불곡산佛谷山 아래 사직골에 있는 사직단社稷壇이었다. 이후 마을 뒷산 송림松林 속의 잔디밭, 현 놀이마당 뒤편 방선폭포 주변의 완만한 산비탈, 향교鄕校 외삼문外三門 안마당, 예전 전수관 동쪽 언덕의 솔밭, 마을 앞의 밤나무 동산, 승학교乘鶴橋 건너의 놀이판 등이 사용되었다. 무형문화재 지정 이후의 놀이마당은 1985년에 전수관 앞뜰에 완공한 타원형의 노천 계단식 공간으로 마당에는 잔디를 깔았다. 이후 2007년도에 현재의 대규모 원형 야외 공연장이 완성되었다.

송파 산대놀이의 놀이 공간은 주로 송파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예전 송파장터는 현 석촌호수 바로 남쪽으로, 잠실동이나 신천동은 큰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용인 백애미장터, 장지리(장지동) 강바닥, 남한산성 서장대, 봉은사 바깥마당, 돌말이 일본 사찰 등에서 탈놀이를 했다. 그러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송파장과 삼전동 인근 마을이 유실되면서 시장이 소멸되고 회생하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송파 산대놀이도 쇠퇴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다시 복원되어, 현재 석촌호수 서쪽 서울놀이마당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현전하는 산대놀이의 과장별 구성은 253쪽의 표와 같다.

산대놀이는 대체로 상좌춤 관련 과장으로 시작해서 할미영감이 나오는 과장으로 마무리된다. 중이 노장•옴중•먹중•상좌 등으로 세분화되며, 중 관련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쇠뚝이가 등장해 말뚝이와 갈등•화해를 이루며 연잎과 눈끔적이, 애사당왜장녀 등의 독특한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노장은 불도佛道를 오래 닦는 노승으로 나오지만, 소무라는 젊은 여자에게 접근하는 파계승의 모습을 보인다. 취발이는 노랑머리를 휘날리며 노장의 여자인 소무를 빼앗아 아이를 출산케 하는 파격적인 인물이다. 할미가 처첩 갈등에 의해 죽는 설정은 다른 지역과 유사하나, 허리를 노출하지 않고 파격적인 엉덩이춤과 방뇨도 없어 비교적 일탈이 없는 인물로 등장한다.

산대놀이에는 말이 없이 무언無言으로 등장하는 인물로 노장•애사당•소무•연잎과 눈끔적이 등이 있다. 노장은 불제자와 파계승의 이중적 모습을 부각하기 위해 무언으로 등장하며, 애사당과 소무는 외모와 교태를 내세우지만 주체적 삶을 살지 못하고 현실적 제약을 받는 존재임을 암시하기 위해 무언으로 연희한다. 연잎과 눈끔적이는 신비스러운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무언으로 등장한다.

산대놀이의 주제와 미의식을 갈등과 화해의 구조로 보면, 그 핵심에는 현실의 한계를 벗어난 전도와 일탈, 비극적 일상의 사실적 형상화, 바람직한 삶의 구현, 극단적 갈등의 해소와 일시적 화해의 추구, 대동놀이적 집단 신명이 있다.

우선 산대놀이는 현실의 한계와 억압 구조를 벗어나서 한결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지향한다. 샌님의 권위적 신분, 그리고 노장의 관념과 본능의 이중적 세계는 현실적 삶의 이상과 거리가 있다. 따라서 하인형인 쇠뚝이나 말뚝이가 지배자인 샌님을, 먹중과 취발이가 관념적인 노장을 세속적 존재로 끌어내린다. 곧 비일상적 시공간에서 일상의 전도나 일탈이 이루어진다. 비극적 일상의 사실적 형상화도 나타나는데, 성적 차별에 의한 가부장제 아래에서 벌어지는 남성의 횡포는 미얄할미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특히 침놀이마당에 나타나는 질병과 액운에 의한 죽음의 위기는 질병에 속수무책인 상황을 반영한다. 모두 민중 집단이 맞닥뜨리는 비극적인 삶의 실제적 반영이다.

바람직한 삶의 구현도 나타나는데, 취발이는 2세 교육을 통해 풍요로운 미래의 보장, 신분의 벽을 넘는 평등한 삶의 실현을 이루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노골적 성의 노출을 통해 강하고 자유로운 성을 통해 더욱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기도 한다. 또한 상좌춤의 축귀의식을 통해 액운을 보내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려는 민중 집단의 이상적 삶을 구현한다.

한편 인물 간 갈등은 극단적 대립으로 나아가지 않고 일시적 화해로 전환되는데, 춤에 의한 상황 봉합, 가요를 통한 갈등 풀이와 신명 도출을 유도한다. 따라서 설정된 시공간에서 현실의 문제를 신명으로 풀어 가며, 궁극적으로 대동놀이적 집단 신명풀이로 유도한다.

산대놀이는 탈의 특징과 제작과정, 춤사위와 장단, 재담과 춤을 연결하는 불림 등에서 서로 유사성이 있으나 약간 차이가 있다. 양주 별산대놀이의 탈은 대략 스물세 점 정도이며, 전부 바가지탈에 창호지를 덧대어 색칠을 한다. 코는 송피로 붙이며 눈과 입은 한지를 말아서 만드는데, 다른 탈에 비해 눈꼬리가 긴 편이다. 염료는 요즘에는 페인트를 쓰며, 접착제로는 풀을 사용한다. 탈보는 주로 흰색과 검은색이며, 붉은색도 사용한다. 송파 산대놀이의 탈도 바가지탈이며 재료는 바가지, 한지, 종이 죽, 고무풀, 찹쌀 풀, 무광 페인트와 희석재, 아교, 검정 면포, 굵은 실 등이며 제작 과정은 양주별 산대놀이와 유사하다.

산대놀이의 춤은 황해도 해서 탈춤에 비해 춤이 섬세하고 우아하며, 손과 발을 이용한 다양한 춤사위가 발달했다. 양주 별산대놀이의 춤은 거드름춤깨끼춤 위주로 되어 있다. 거드름춤은 몸의 마디마디에 멋을 집어넣은 춤사위로, 사방치기•용트림•합장재배•부채놀이 등으로 세분화된다. 깨끼춤은 4박 타령장단에 맞추어 깎아 내리는 무예적인 깨끼사위와 고개를 끄덕거리며 상대를 유혹하는 고개잡이를 비롯한 팔뚝잡이•삼진삼퇴•자라춤•까치걸음•여닫이(여다지)•멍석말이•곱사위 등으로 구성된다. 장단은 염불장단이 중심적이며, 타령장단도 많이 나온다.

송파 산대놀이의 춤과 장단을 보면, 크게 염불장단의 거드름춤, 타령장단의 깨끼춤, 걸음걸이춤으로 나뉜다. 염불장단 거드름춤에는 합장재배•사방치기•용트림•끄떡이•돌단춤•부채놀이•팔뚝잡이•활개펴기•너울질(활개치기)•복무伏舞•삼진삼퇴 등이 있으며, 타령장단 깨끼춤에는 깨끼리•곱사위•여닫이•고개잡이•거수잡이•팔뚝잡이•멍석말이•목잡이•자라춤•어깨춤•엉덩이춤•배꼽춤•갈지자춤•너울질•맞춤 등 있다. 한편 걸음걸이춤에는 까치걸음•빗사위걸음•갈지자걸음•짐걸이걸음•원숭이걸음•두루치기걸음•허리잡이걸음•앉은걸음걸이가 있다.

불림은 재담이 끝나고 춤으로 전환될 때에 장단을 청하기 위해 사용하는 짧은 노랫말을 말한다. 대개 4음보 격의 가사나 잡가 형태이며, 한자어가 삽입된 경우가 흔한 것으로 보아, 양반 가사를 삽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징 및 의의

산대놀이는 고려시대부터 설치되던 산대라는 임시 무대에서 유래한다. 이것이 영조 이후 산대의 폐지에 의해 당시 전문예인들이 흩어지면서 서울의 본산대로 정착하게 되고, 본산대 소멸 이후 양주•송파•퇴계원 등의 서울 인근으로 전파되어 정착했다. 원래 조선시대까지 산대의 무대에서는 가무악과 민속극, 다양한 잡희가 공연되었으나 현존하는 산대놀이는 가면극 중심으로 재편되어 전승되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敎坊歌謠, 산대•성황신제 가면극의 연구(최상수, 성문각, 1985), 산대탈놀이(서연호, 열화당, 1987), 송파산대놀이(이병옥, 집문당, 1982), 양주별산대놀이(정형호, 화산문화, 2001), 퇴계원산대놀이(퇴계원 산대놀이보존회, 월인, 1999), 한국 전통연희 전승과 미의식(정형호, 민속원, 2008), 한국가면극 그 역사와 원리(전경욱, 열화당, 1998), 한국가면극의 유형과 전승원리 연구(정형호,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한국의 가면극(이두현, 일지사, 1979).

산대놀이

산대놀이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 가면극

집필자 정형호(鄭亨鎬)
갱신일 2019-01-18

정의

서울과 인근 지역에서 전승되는 가면극.

역사

산대놀이는 고려시대부터 설치한 산대山臺라는 야외 임시 무대와 그곳의 가무악 및 잡희 등에서 연유한다. 조선 후기에 산대가 폐지되면서 탈놀이만 민간화하여 서울의 본산대로 전승되다가, 이후 서울 인근 지역에 전파되어 정착되었다. 산대山臺는 산과 같이 거대한 임시 무대로 고려 초부터 이미 전승되었다. 산대가 설치되는 시기는 매우 다양했다. 대체로 고려시대에는 팔관회와 연등회, 궁중의 새해맞이 축귀逐鬼 행사인 나례儺禮, 사찰과 관의 행사 등이 열리는 시기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중국 사신 영접, 연말 나례, 궁의 행사, 국가적 경사와 연회 등에 설치되었다. 산대는 고정된 대형 산대인 대산대大山臺부터 이동식인 예산대曳山臺, 기타 화산대火山臺, 다정산대茶亭山臺, 주산대舟山臺 등으로 다양하다. 산대의 규모는 매우 큰데, 고정 산대의 경우 주요 기둥만 25m 이상이어서 대략 7층 높이의 소규모 아파트가 네 채 정도 세워져 있는 규모였다. 산대는 재사용할 수 없어 해마다 다시 설치했으며, 이 때문에 인력 동원•목재 확보•각종 재료 준비에 어려움을 겪어 과도한 비용 소모, 각종 사고 등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산대에서 이루어진 연희는 각종 궁중정재인 헌선도獻仙桃•처용무•솟대쟁이놀이•폭죽 터뜨리기•축귀의식무 등 다양하며 음악 외에 다른 각종 춤, 화희火戲, 각종 교방가요, 잡희, 마술인 환술幻術, 즉흥극 등이 포함된다. 1725년(영조 1) 아극돈阿克敦의 『봉사도奉使圖』라는 화첩에 그려진 산대의 무대를 보면, 탈놀이는 지상에서 연희되고 있다. 곧 탈놀이•땅재주•줄타기 등은 지상에서 이루어지며, 각종 춤•노래•연극 등은 산대 무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관에서 주도하는 산대는 인조 때에 관련 도감이 폐지되면서 약화되다가 영조 이후에 이르러 완전히 폐지되어, 전문적인 예인패들은 민간으로 연희 장소를 옮겼다. 18세기 말 강이천姜彛天은 한양의 산대놀이를 보고 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것은 민간 가면극을 중심으로 쓴 시이다. 1778년에 강이천은 남대문 인근에서 살다가 남대문 밖 소나무 숲의 야외 마당에서 벌어진 가면극과 인형극을 보고 한시를 지었다. 이것은 대형 산대가 아닌 민간화된 소규모 야외 가면극으로서, 여기에는 푸른 소나무 숲의 임시 무대, 차일 속 풍악, 넓은 마당, 많은 구경꾼, 홍의를 입고 뽐내는 관리 등의 주변 환경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 탈놀이에는 노장[老釋], 사미승, 선승, 소매少妹, 대취승大醉僧, 노유생老儒生, 무부武夫, 영청아嬰靑娥, 파로婆老 외에도 거사居士와 사당社堂, 야차夜叉, 달자㺚子 등이 등장한다. 이것을 현전하는 양주 별산대놀이와 대조하여, 노석老釋은 노장, 소매少妹는 소무, 승僧은 상좌, 노유생老儒生은 양반, 무부武夫는 취발이 또는 말뚝이, 파로婆老는 할미, 대취승大醉僧은 취발이 또는 목중, 더벅머리 귀신은 옴중과 목중, 사당과 거사는 현재의 사당•거사 등으로 대입해 볼 수도 있다. 교방의 춤에도 현재의 산대놀이 관련 인물이 등장한다. 고종 시기 정현석鄭顯奭이 편찬한 『교방가요敎坊歌謠』(1872)에는 14종의 춤 속에 승무僧舞 부분이 있으며, 잡희雜戲로 취승醉僧•양반•초라니 등이 등장한다. 여기의 취승은 강이천의 에 나오는 취승과 동일하며, 다만 초라니는 새로 추가되었다. 특히 승무의 내용은 기생을 사이에 둔 노승과 풍류랑風流郞의 갈등 양상으로 나타나며, 기생을 비단신으로 유혹하여 갈등이 심화된다. 그리고 상좌上佐도 등장하여 노승을 돕는다. 양반 및 미녀 등이 등장하여 추는 춤이 있으며, 취승은 격렬한 춤을 춘다. 이는 현전하는 중부 지역 산대놀이 내용에 근접한다. 조선 후기에 관 주도 산대가 소멸하고, 서울과 지방의 재인才人과 우인優人들이 흩어지면서 이들이 지역 산대놀이로 정착하게 된다. 따라서 서울의 본산대가 민간예인집단화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성균관에 속했던 천민 집단인 반인泮人이 서울 지역 산대놀이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인들은 북방 유목 민족에 연원을 둔 수척에서 유래하는데, 특히 대표적인 애오개 산대놀이패가 3대 시장의 하나인 칠패의 상인들과 현방懸房의 후원에 의해 활동하였다.

내용

조선시대에는 산대를 세우고 그곳에서 잡다한 연희가 이루어졌지만, 산대에 참여한 광대•기녀•악공 중에서 탈춤을 추었던 전문예인들의 놀이만 서울 지역 산대놀이에서 수용•발전시켜 현전하는 산대 가면극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것이 서울의 본산대로 전승되었는데, 애오개(아현) 산대•녹번 산대•사직동 딱딱이패•홍제동 산대•구파발 산대•노량진 산대 등이 그 중심이다. 전문예인들은 공연 종목이 많아야 인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들 본산대패는 가면극 이외에 줄타기, 풍물과 무동타기, 땅재주 등도 함께 전승하였다. 그중에 가면극이 가장 인기가 있어 이것이 본산대패의 핵심 종목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본산대놀이는 20세기 초에 모두 소멸되었으며, 이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양주•송파•퇴계원의 산대놀이가 현존하고 있다. 양주 별산대놀이는 약 200여 년 전에 서울의 본산대놀이 중에 애오개•녹번•구파발의 산대로부터 영향을 받아 지역민들이 양주에 정착시킨 것이다. 전승 주체는 양주목에 속한 하급 관속들이 중심이 되었다. 여기에 상인층이 관여하고, 일부 무계巫系 집안도 전승을 주도했다. 특히 관속과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도중都中이라는 조합을 설립해서 산대놀이를 주도했다. 따라서 놀이판의 판주가 자릿세를 받고 상인들에게 놀이판 주위에서 영업하는 것을 허가했다. 송파 산대놀이의 전승 배경인 송파장은 15대 향시 중의 하나로, 18세기 이후에 시장 경제의 발달과 새로운 상품 유통으로 활성화되었다. 이곳은 경강포구로서 포구 상업이 발달하면서 포구 주인층이 상권을 장악한 곳으로, 한때 서울의 시전을 능가하는 난전이었다. 따라서 대규모 상품 집산지였던 송파장을 중심으로 사재기가 성행하면서 시전 상인들에 의해 이 장시의 혁파가 제기되기도 했다. 핵심 전승층을 보면, 1900년 이전의 시장판에는 말감고(되나 말로 곡식을 헤아려 주는 직업)•임방꾼(배에 화물을 싣고 푸는 직업)•잡심부름꾼•술집•운송점(마루하치)•선원•연초 가공 상인•신탄상薪炭商•우시장 상인 등이 있었으며, 모두 장시場市와 관련된 직업이 다수이고 일부의 농업 종사자가 참여했다. 퇴계원은 각종 육로와 수로 교통의 중심지로, 경기도 동쪽에서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따라서 한양으로 공급되는 숯•장작•건축재•소•곡식•채소•연초 등이 거쳐 간 곳이다. 예전에는 왕숙천을 끼고 100여 호의 객주와 역원이 자리 잡고, 장터에는 연초 가공업자•장작상• 우시장이 활성화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퇴계원 산대놀이가 전승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현전하는 양주 별산대놀이는 읍치邑治 가면극, 송파 산대놀이와 퇴계원 산대놀이는 장시場市 가면극의 성격을 지닌다. 산대놀이 세 곳의 놀이 시기를 보면, 대체로 단오•초파일•백중 등이 두드러진다. 양주 별산대놀이의 놀이 시기는 20세기 초반만 해도 단오가 중심이고 사월초파일이 부수적이며, 기타 삼짇날•중양절•기타 경사•기우제•타 지역 초청 등에도 공연되었다. 송파 산대놀이의 연희시기는 송파장의 활성화와 관련이 있다. 정초•사월초파일•오월단오•칠월백중•팔월한가위 등의 명절이나 장이 잘되지 않는 시기 등으로 대략 연 3∼4회 정도 공연했는데, 그중에 칠월백중에 가장 크게 했으며 이때는 장마당에서 7∼10일 정도 계속 놀이가 이루어졌다. 송파의 백중장은 매우 성황을 이루어서 각지의 이름난 연희자들을 초청하여 일주일씩 탈놀음을 했다. 특히 장이 약화되면 상인들이 추렴하여 줄타기•씨름•민요•산대놀이를 벌였다. 그러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송파장이 폐허가 되면서 산대놀이도 중단되었다. 퇴계원 산대놀이는 별산대로서 주로 정월대보름, 사월초파일, 단오, 백중, 추석, 봄의 농한기에 놀았다. 놀이 장소는 왕숙천의 모래 마당이었다. 봄 농한기와 사월초파일에는 연초상•음식점 등의 상인들이 돈을 대서 박춘재•송만갑•이동백 같은 소리꾼들도 초청했다. 백중이나 추석 때는 송아지를 걸고 씨름 대회가 열렸고, 산대놀이•광대줄타기•남사당놀이 등을 즐기며 밤새도록 놀았다. 그러나 정부에서 연초상을 금지한 1920년대 초반 이후 퇴계원의 경제는 급격하게 쇠퇴하였고, 이에 따라 산대놀이를 놀 수 있는 재정적 지원이 어려워지면서 1920년대 말 이후 중단되었다. 결국 산대놀이의 경우, 양주 별산대놀이는 단오가 중심이고 사월초파일•백중이 부수적 시기이며, 송파 산대놀이는 칠월백중을 중심으로 하여 놀고 단오에 부수적으로 논다. 퇴계원 산대놀이는 사월초파일과 백중이 중요 시기이고 단오가 부수적이다. 따라서 산대놀이의 연희 시기는 단오, 백중, 초파일이 병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송파 산대놀이와 퇴계원 산대놀이에서 백중이 중요한 시기인 것은 이 지역이 서울 인근의 핵심적인 장시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산대놀이의 놀이 공간을 보면, 양주 별산대놀이의 놀이 공간은 원래 불곡산佛谷山 아래 사직골에 있는 사직단社稷壇이었다. 이후 마을 뒷산 송림松林 속의 잔디밭, 현 놀이마당 뒤편 방선폭포 주변의 완만한 산비탈, 향교鄕校 외삼문外三門 안마당, 예전 전수관 동쪽 언덕의 솔밭, 마을 앞의 밤나무 동산, 승학교乘鶴橋 건너의 놀이판 등이 사용되었다. 무형문화재 지정 이후의 놀이마당은 1985년에 전수관 앞뜰에 완공한 타원형의 노천 계단식 공간으로 마당에는 잔디를 깔았다. 이후 2007년도에 현재의 대규모 원형 야외 공연장이 완성되었다. 송파 산대놀이의 놀이 공간은 주로 송파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예전 송파장터는 현 석촌호수 바로 남쪽으로, 잠실동이나 신천동은 큰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용인 백애미장터, 장지리(장지동) 강바닥, 남한산성 서장대, 봉은사 바깥마당, 돌말이 일본 사찰 등에서 탈놀이를 했다. 그러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송파장과 삼전동 인근 마을이 유실되면서 시장이 소멸되고 회생하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송파 산대놀이도 쇠퇴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다시 복원되어, 현재 석촌호수 서쪽 서울놀이마당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현전하는 산대놀이의 과장별 구성은 253쪽의 표와 같다. 산대놀이는 대체로 상좌춤 관련 과장으로 시작해서 할미와 영감이 나오는 과장으로 마무리된다. 중이 노장•옴중•먹중•상좌 등으로 세분화되며, 중 관련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쇠뚝이가 등장해 말뚝이와 갈등•화해를 이루며 연잎과 눈끔적이, 애사당와 왜장녀 등의 독특한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노장은 불도佛道를 오래 닦는 노승으로 나오지만, 소무라는 젊은 여자에게 접근하는 파계승의 모습을 보인다. 취발이는 노랑머리를 휘날리며 노장의 여자인 소무를 빼앗아 아이를 출산케 하는 파격적인 인물이다. 할미가 처첩 갈등에 의해 죽는 설정은 다른 지역과 유사하나, 허리를 노출하지 않고 파격적인 엉덩이춤과 방뇨도 없어 비교적 일탈이 없는 인물로 등장한다. 산대놀이에는 말이 없이 무언無言으로 등장하는 인물로 노장•애사당•소무•연잎과 눈끔적이 등이 있다. 노장은 불제자와 파계승의 이중적 모습을 부각하기 위해 무언으로 등장하며, 애사당과 소무는 외모와 교태를 내세우지만 주체적 삶을 살지 못하고 현실적 제약을 받는 존재임을 암시하기 위해 무언으로 연희한다. 연잎과 눈끔적이는 신비스러운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무언으로 등장한다. 산대놀이의 주제와 미의식을 갈등과 화해의 구조로 보면, 그 핵심에는 현실의 한계를 벗어난 전도와 일탈, 비극적 일상의 사실적 형상화, 바람직한 삶의 구현, 극단적 갈등의 해소와 일시적 화해의 추구, 대동놀이적 집단 신명이 있다. 우선 산대놀이는 현실의 한계와 억압 구조를 벗어나서 한결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지향한다. 샌님의 권위적 신분, 그리고 노장의 관념과 본능의 이중적 세계는 현실적 삶의 이상과 거리가 있다. 따라서 하인형인 쇠뚝이나 말뚝이가 지배자인 샌님을, 먹중과 취발이가 관념적인 노장을 세속적 존재로 끌어내린다. 곧 비일상적 시공간에서 일상의 전도나 일탈이 이루어진다. 비극적 일상의 사실적 형상화도 나타나는데, 성적 차별에 의한 가부장제 아래에서 벌어지는 남성의 횡포는 미얄할미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특히 침놀이마당에 나타나는 질병과 액운에 의한 죽음의 위기는 질병에 속수무책인 상황을 반영한다. 모두 민중 집단이 맞닥뜨리는 비극적인 삶의 실제적 반영이다. 바람직한 삶의 구현도 나타나는데, 취발이는 2세 교육을 통해 풍요로운 미래의 보장, 신분의 벽을 넘는 평등한 삶의 실현을 이루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노골적 성의 노출을 통해 강하고 자유로운 성을 통해 더욱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기도 한다. 또한 상좌춤의 축귀의식을 통해 액운을 보내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려는 민중 집단의 이상적 삶을 구현한다. 한편 인물 간 갈등은 극단적 대립으로 나아가지 않고 일시적 화해로 전환되는데, 춤에 의한 상황 봉합, 가요를 통한 갈등 풀이와 신명 도출을 유도한다. 따라서 설정된 시공간에서 현실의 문제를 신명으로 풀어 가며, 궁극적으로 대동놀이적 집단 신명풀이로 유도한다. 산대놀이는 탈의 특징과 제작과정, 춤사위와 장단, 재담과 춤을 연결하는 불림 등에서 서로 유사성이 있으나 약간 차이가 있다. 양주 별산대놀이의 탈은 대략 스물세 점 정도이며, 전부 바가지탈에 창호지를 덧대어 색칠을 한다. 코는 송피로 붙이며 눈과 입은 한지를 말아서 만드는데, 다른 탈에 비해 눈꼬리가 긴 편이다. 염료는 요즘에는 페인트를 쓰며, 접착제로는 풀을 사용한다. 탈보는 주로 흰색과 검은색이며, 붉은색도 사용한다. 송파 산대놀이의 탈도 바가지탈이며 재료는 바가지, 한지, 종이 죽, 고무풀, 찹쌀 풀, 무광 페인트와 희석재, 아교, 검정 면포, 굵은 실 등이며 제작 과정은 양주별 산대놀이와 유사하다. 산대놀이의 춤은 황해도 해서 탈춤에 비해 춤이 섬세하고 우아하며, 손과 발을 이용한 다양한 춤사위가 발달했다. 양주 별산대놀이의 춤은 거드름춤과 깨끼춤 위주로 되어 있다. 거드름춤은 몸의 마디마디에 멋을 집어넣은 춤사위로, 사방치기•용트림•합장재배•부채놀이 등으로 세분화된다. 깨끼춤은 4박 타령장단에 맞추어 깎아 내리는 무예적인 깨끼사위와 고개를 끄덕거리며 상대를 유혹하는 고개잡이를 비롯한 팔뚝잡이•삼진삼퇴•자라춤•까치걸음•여닫이(여다지)•멍석말이•곱사위 등으로 구성된다. 장단은 염불장단이 중심적이며, 타령장단도 많이 나온다. 송파 산대놀이의 춤과 장단을 보면, 크게 염불장단의 거드름춤, 타령장단의 깨끼춤, 걸음걸이춤으로 나뉜다. 염불장단 거드름춤에는 합장재배•사방치기•용트림•끄떡이•돌단춤•부채놀이•팔뚝잡이•활개펴기•너울질(활개치기)•복무伏舞•삼진삼퇴 등이 있으며, 타령장단 깨끼춤에는 깨끼리•곱사위•여닫이•고개잡이•거수잡이•팔뚝잡이•멍석말이•목잡이•자라춤•어깨춤•엉덩이춤•배꼽춤•갈지자춤•너울질•맞춤 등 있다. 한편 걸음걸이춤에는 까치걸음•빗사위걸음•갈지자걸음•짐걸이걸음•원숭이걸음•두루치기걸음•허리잡이걸음•앉은걸음걸이가 있다. 불림은 재담이 끝나고 춤으로 전환될 때에 장단을 청하기 위해 사용하는 짧은 노랫말을 말한다. 대개 4음보 격의 가사나 잡가 형태이며, 한자어가 삽입된 경우가 흔한 것으로 보아, 양반 가사를 삽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징 및 의의

산대놀이는 고려시대부터 설치되던 산대라는 임시 무대에서 유래한다. 이것이 영조 이후 산대의 폐지에 의해 당시 전문예인들이 흩어지면서 서울의 본산대로 정착하게 되고, 본산대 소멸 이후 양주•송파•퇴계원 등의 서울 인근으로 전파되어 정착했다. 원래 조선시대까지 산대의 무대에서는 가무악과 민속극, 다양한 잡희가 공연되었으나 현존하는 산대놀이는 가면극 중심으로 재편되어 전승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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