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놀이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 가면극

집필자 허모영(許募永)
갱신일 2019-01-17

정의

본놀이에 앞서 연행 장소로 이동하면서 거리에서 펼치는 놀이.

내용

길놀이는 길굿, 거리굿으로도 불린다. 길놀이는 탈춤을 연행하는 장소로 연희자들이 이동하면서 거리에서 갖는 놀이를 일컫는다. 탈꾼 외에도 풍물패나 길군악대들이 풍악을 울리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와 함께 마을에서 들에 나갈 때와 김을 다 매고 마을로 들어올 때 그 뒤를 길군악을 치며 노는 두레풍장(풍물놀이)이 뒤따르는 것을 길놀이라고도 한다. 길놀이는 대동놀이의 앞놀이로도 볼 수 있는데, 행사를 알리면서 관객도 모은다. 이러한 앞놀이에 사람들이 나와 뒤치배 역할을 하며 행렬을 따르는 가운데 대동놀이가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가면극에서 길놀이는 원래 읍치 등의 제당에서 고사를 마치고 연행 장소로 이동하면서 풍악을 울리는 등 각종 놀이를 벌이는 것을 지칭한다. 그렇지만 탈춤이 제의와 분리되어 연행하게 되면서 지역에 따라서는 연행 장소로 이동하는 행진을 거창한 퍼레이드로 발전시켜 연출하는 변화도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수영 야류동래 야류일 것이다. 동래 야류의 경우 1928년에 이르러 연희자들만이 아니라 지역민들도 합세하여 연행 장소에서 사용할 각종 등을 갖고 긴 행진을 하도록 연출했다. 종래의 길놀이와 구분하여 퍼레이드 자체를 화려하고 스케일이 크게 기획한 첫 사례일 것이다. 이것은 큰 호응을 얻어서 그 후 동래 야류 연행의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민속예술 전통의 근대적 창출의 중요 사례의 하나일 것이다.

가면극 연행에서 마당판 대신 극장이나 야외무대의 공연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요즘은 길놀이는 아예 하지 못하거나, 하더라도 연행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연출한다. 통상적으로는 극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길놀이를 시작하거나 극장 앞에서 상쇠의 신호에 따라 어름굿을 내어 치배들이 악을 맞추어 보고 공연을 알리거나 사람을 모으는 정도의 역할을 한다. 또, 극장 안에 연희자들이 들어서면 관객석의 통로를 가로질러 무대에 오르는 방식으로 가능한 관객들과 가깝게 다가서려고 하는 것이다.

지역사례

해서 탈춤의 경우 길놀이와 관련된 각종 정보는 대부분 일제강점기의 것이고, 그전의 것이 일부 섞여 있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 전의 연행을 추론하는 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봉산을 비롯하여 강령이나 은율, 해주 등 해서 지역의 탈춤들은 관청이 있고 이서 등 관속들이 세거한 읍치邑治가 일제강점기 전에도 연행 장소였고 일제강점기에도 연행 장소였다. 연희자나 관객 상당수는 읍치의 거주자로서 일상에서도 늘 부딪히는 존재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회 환경은 길놀이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분단 이후 현재 남한에서 연행되고 있는 해서 지역의 탈춤들은 이러한 지역 기반과 철저하게 유리되었다. 요컨대, 일제강점기 이전의 길놀이를 따라 재연하더라도 그 사회적 맥락은 전혀 다르며, 이 점은 길놀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봉산 탈춤의 경우 밤에 연행을 할 당시에는 오후에 길놀이를 했다. 악사의 반주를 선두로 사자, 말뚝이, 취발이, 포도부장 등의 순서로 열을 지어 읍내를 일주했다고 한다. 일주하는 도중 넓은 마당에 이르면 모두 한참 춤을 추고, 다시 열을 지어 일주를 했다고 한다.

강령 탈춤은 대표적인 단오놀이로서 음력 5월 4일에 길놀이를 했으며, 5일과 6일에는 저녁부터 새벽 무렵까지 밤새도록 가면극을 놀았다. 길놀이 때에 주요 배역은 소나 말을 타고 마을을 순회하였고, 다른 놀이꾼들은 탈을 쓰고 따라다녔다. 길놀이가 끝나면 밤늦도록 잔치가 벌어졌다고 한다.

은율 탈춤은 읍에서 1㎞ 정도 떨어진 마숲(풍수적으로 고양이와 솔개 형상의 기운을 막기 위해 마을 입구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숲)에서 가면을 만들고 평소에 연습해 두었다가 단오날이 되면 놀이꾼 전원이 숲속에 모여 탈고사를 지내고 음복을 한 후 길놀이를 시작했다. 오후 늦게 마숲에서 시작된 길놀이는 맨 앞에 재비들이 서고 그 다음에 사자, 소를 탄 첫째 양반, 말을 탄 둘째 양반, 당나귀를 탄 셋째 양반, 팔먹중 등의 순서로 읍내를 한 바퀴 돌고 나서, 장마당에 마련된 놀이판에서 가면극을 벌였다.

경기도 양주 별산대놀이의 경우 초파일•단오•추석에 주로 연희되었고, 그 밖에 명절이나 기우제祈雨祭 때도 연행하였다고 한다. 양주 별산대놀이 전에 탈고사를 지내는 것이 상례인데, 고사에는 푸짐한 제물이 준비되었다. 제물과 제주를 음복하여 취기가 돌면 앞놀이(길놀이)가 시작되는데, 서낭대와 탈들을 앞세우고 풍물을 울리며 마을을 순회했다.

동래 야류는 연행을 하기에 앞서 삼백여 명이 참가하는 본격적인 길놀이를 거행한다. 길놀이는 세병교에서 출발하거나 안락동 쪽에서 출발해 시장터까지 행진했다. 놀이패가 놀이마당에 도착하면, 놀이꾼뿐만 아니라 구경꾼도 함께 음악 반주에 맞추어 군무를 추며 놀았다. 이때 구경꾼들은 각자 가면을 준비했다가 착용하고 춤을 추었다. 가면이 없으면 솥 밑바닥의 검댕을 칠하고 춤을 추었다. 동래 야류의 이 같은 퍼레이드는 인근 수영의 야류 연행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수영 야류는 공연하기에 앞서 음력 정월 3∼4일 무렵부터 13일까지 야류계野遊契가 주동이 되어 집집마다 방문해 지신밟기를 해 주고, 이때 들어온 곡식으로 가면극의 경비를 조달했다. 그리고 지신밟기 기간 동안에 일부 놀이꾼은 부정을 타지 않은 정결한 장소에서 가면과 도구를 제작했다. 가면 제작이 끝나면 탈제를 지내면서 가면극의 원만한 거행을 기원했다. 정월대보름 저녁달이 뜰 무렵 마을 주민들과 탈놀이꾼들은 먼물샘에 모여 길놀이를 시작했다. 그런데 현재 기억하고 있는 수영 야류의 길놀이는 동래 야류의 길놀이와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이후의 것이다. 맨 앞에는 소등대小燈隊, 대등대大燈隊, 풍악대, 길군악대 등의 순서로 화려한 행렬을 이루었다. 소등대와 대등대가 놀이판에 도착하면, 미리 놀이판 주위에 장치해 둔 장대에다 등을 옮겨 조명을 삼았다. 모든 길놀이패가 놀이판에 도착하면 풍물패의 반주에 맞춰 놀이꾼뿐만 아니라 구경꾼도 함께 군무를 추며 놀았다.

통영 오광대는 처음에 의흥계義興契를 조직해서 가면극을 하며 놀았는데, 의흥계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통영에 있는 수군통제사의 통제영 부속 관아인 취고수청吹鼓手廳(악사청)의 악공 출신이었다. 의흥계는 정월 2일부터 14일까지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매귀, 즉 지신밟기를 해 주고 받은 기부금으로 가면극을 준비해 정월 14일 밤에 파방굿과 오광대가면극을 거행했다.

특징 및 의의

길놀이는 마을이나 고을의 가장 번화한 거리, 즉 부군당이나 서낭당이 있는 길목의 장터 네거리에서 이루어진다. 길놀이 중에는 구경꾼도 풍물놀이나 자신의 특기를 풀어 보이며 흥을 돋워 연희자와 관중이 하나가 된다. 따라서 길놀이는 지역 공동체가 하나의 연희 공동체로서 일체감을 조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대규모 퍼레이드로 조직화한 경우도 나타난다.

참고문헌

길놀이의 제의적 특성과 전통(남성진, 실천민속학연구10, 실천민속학회, 2007), 식민지기 경남 지역사회의 탈춤 부흥 운동과 주도자들·동래 야류 연행의 문화정치학(이훈상, 대동문화연구79,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2012), 한국의 가면극(전경욱. 열화당, 2007), 한국의 탈(한국문화재보호재단, 태학사, 1996), 한국의 탈춤(이두현, 일지사, 1995), 황해도탈놀이(서연호, 열화당, 1988).

길놀이

길놀이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 가면극

집필자 허모영(許募永)
갱신일 2019-01-17

정의

본놀이에 앞서 연행 장소로 이동하면서 거리에서 펼치는 놀이.

내용

길놀이는 길굿, 거리굿으로도 불린다. 길놀이는 탈춤을 연행하는 장소로 연희자들이 이동하면서 거리에서 갖는 놀이를 일컫는다. 탈꾼 외에도 풍물패나 길군악대들이 풍악을 울리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와 함께 마을에서 들에 나갈 때와 김을 다 매고 마을로 들어올 때 그 뒤를 길군악을 치며 노는 두레풍장(풍물놀이)이 뒤따르는 것을 길놀이라고도 한다. 길놀이는 대동놀이의 앞놀이로도 볼 수 있는데, 행사를 알리면서 관객도 모은다. 이러한 앞놀이에 사람들이 나와 뒤치배 역할을 하며 행렬을 따르는 가운데 대동놀이가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가면극에서 길놀이는 원래 읍치 등의 제당에서 고사를 마치고 연행 장소로 이동하면서 풍악을 울리는 등 각종 놀이를 벌이는 것을 지칭한다. 그렇지만 탈춤이 제의와 분리되어 연행하게 되면서 지역에 따라서는 연행 장소로 이동하는 행진을 거창한 퍼레이드로 발전시켜 연출하는 변화도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수영 야류와 동래 야류일 것이다. 동래 야류의 경우 1928년에 이르러 연희자들만이 아니라 지역민들도 합세하여 연행 장소에서 사용할 각종 등을 갖고 긴 행진을 하도록 연출했다. 종래의 길놀이와 구분하여 퍼레이드 자체를 화려하고 스케일이 크게 기획한 첫 사례일 것이다. 이것은 큰 호응을 얻어서 그 후 동래 야류 연행의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민속예술 전통의 근대적 창출의 중요 사례의 하나일 것이다. 가면극 연행에서 마당판 대신 극장이나 야외무대의 공연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요즘은 길놀이는 아예 하지 못하거나, 하더라도 연행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연출한다. 통상적으로는 극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길놀이를 시작하거나 극장 앞에서 상쇠의 신호에 따라 어름굿을 내어 치배들이 악을 맞추어 보고 공연을 알리거나 사람을 모으는 정도의 역할을 한다. 또, 극장 안에 연희자들이 들어서면 관객석의 통로를 가로질러 무대에 오르는 방식으로 가능한 관객들과 가깝게 다가서려고 하는 것이다.

지역사례

해서 탈춤의 경우 길놀이와 관련된 각종 정보는 대부분 일제강점기의 것이고, 그전의 것이 일부 섞여 있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 전의 연행을 추론하는 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봉산을 비롯하여 강령이나 은율, 해주 등 해서 지역의 탈춤들은 관청이 있고 이서 등 관속들이 세거한 읍치邑治가 일제강점기 전에도 연행 장소였고 일제강점기에도 연행 장소였다. 연희자나 관객 상당수는 읍치의 거주자로서 일상에서도 늘 부딪히는 존재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회 환경은 길놀이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분단 이후 현재 남한에서 연행되고 있는 해서 지역의 탈춤들은 이러한 지역 기반과 철저하게 유리되었다. 요컨대, 일제강점기 이전의 길놀이를 따라 재연하더라도 그 사회적 맥락은 전혀 다르며, 이 점은 길놀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봉산 탈춤의 경우 밤에 연행을 할 당시에는 오후에 길놀이를 했다. 악사의 반주를 선두로 사자, 말뚝이, 취발이, 포도부장 등의 순서로 열을 지어 읍내를 일주했다고 한다. 일주하는 도중 넓은 마당에 이르면 모두 한참 춤을 추고, 다시 열을 지어 일주를 했다고 한다. 강령 탈춤은 대표적인 단오놀이로서 음력 5월 4일에 길놀이를 했으며, 5일과 6일에는 저녁부터 새벽 무렵까지 밤새도록 가면극을 놀았다. 길놀이 때에 주요 배역은 소나 말을 타고 마을을 순회하였고, 다른 놀이꾼들은 탈을 쓰고 따라다녔다. 길놀이가 끝나면 밤늦도록 잔치가 벌어졌다고 한다. 은율 탈춤은 읍에서 1㎞ 정도 떨어진 마숲(풍수적으로 고양이와 솔개 형상의 기운을 막기 위해 마을 입구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숲)에서 가면을 만들고 평소에 연습해 두었다가 단오날이 되면 놀이꾼 전원이 숲속에 모여 탈고사를 지내고 음복을 한 후 길놀이를 시작했다. 오후 늦게 마숲에서 시작된 길놀이는 맨 앞에 재비들이 서고 그 다음에 사자, 소를 탄 첫째 양반, 말을 탄 둘째 양반, 당나귀를 탄 셋째 양반, 팔먹중 등의 순서로 읍내를 한 바퀴 돌고 나서, 장마당에 마련된 놀이판에서 가면극을 벌였다. 경기도 양주 별산대놀이의 경우 초파일•단오•추석에 주로 연희되었고, 그 밖에 명절이나 기우제祈雨祭 때도 연행하였다고 한다. 양주 별산대놀이 전에 탈고사를 지내는 것이 상례인데, 고사에는 푸짐한 제물이 준비되었다. 제물과 제주를 음복하여 취기가 돌면 앞놀이(길놀이)가 시작되는데, 서낭대와 탈들을 앞세우고 풍물을 울리며 마을을 순회했다. 동래 야류는 연행을 하기에 앞서 삼백여 명이 참가하는 본격적인 길놀이를 거행한다. 길놀이는 세병교에서 출발하거나 안락동 쪽에서 출발해 시장터까지 행진했다. 놀이패가 놀이마당에 도착하면, 놀이꾼뿐만 아니라 구경꾼도 함께 음악 반주에 맞추어 군무를 추며 놀았다. 이때 구경꾼들은 각자 가면을 준비했다가 착용하고 춤을 추었다. 가면이 없으면 솥 밑바닥의 검댕을 칠하고 춤을 추었다. 동래 야류의 이 같은 퍼레이드는 인근 수영의 야류 연행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수영 야류는 공연하기에 앞서 음력 정월 3∼4일 무렵부터 13일까지 야류계野遊契가 주동이 되어 집집마다 방문해 지신밟기를 해 주고, 이때 들어온 곡식으로 가면극의 경비를 조달했다. 그리고 지신밟기 기간 동안에 일부 놀이꾼은 부정을 타지 않은 정결한 장소에서 가면과 도구를 제작했다. 가면 제작이 끝나면 탈제를 지내면서 가면극의 원만한 거행을 기원했다. 정월대보름 저녁달이 뜰 무렵 마을 주민들과 탈놀이꾼들은 먼물샘에 모여 길놀이를 시작했다. 그런데 현재 기억하고 있는 수영 야류의 길놀이는 동래 야류의 길놀이와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이후의 것이다. 맨 앞에는 소등대小燈隊, 대등대大燈隊, 풍악대, 길군악대 등의 순서로 화려한 행렬을 이루었다. 소등대와 대등대가 놀이판에 도착하면, 미리 놀이판 주위에 장치해 둔 장대에다 등을 옮겨 조명을 삼았다. 모든 길놀이패가 놀이판에 도착하면 풍물패의 반주에 맞춰 놀이꾼뿐만 아니라 구경꾼도 함께 군무를 추며 놀았다. 통영 오광대는 처음에 의흥계義興契를 조직해서 가면극을 하며 놀았는데, 의흥계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통영에 있는 수군통제사의 통제영 부속 관아인 취고수청吹鼓手廳(악사청)의 악공 출신이었다. 의흥계는 정월 2일부터 14일까지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매귀, 즉 지신밟기를 해 주고 받은 기부금으로 가면극을 준비해 정월 14일 밤에 파방굿과 오광대가면극을 거행했다.

특징 및 의의

길놀이는 마을이나 고을의 가장 번화한 거리, 즉 부군당이나 서낭당이 있는 길목의 장터 네거리에서 이루어진다. 길놀이 중에는 구경꾼도 풍물놀이나 자신의 특기를 풀어 보이며 흥을 돋워 연희자와 관중이 하나가 된다. 따라서 길놀이는 지역 공동체가 하나의 연희 공동체로서 일체감을 조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대규모 퍼레이드로 조직화한 경우도 나타난다.

참고문헌

길놀이의 제의적 특성과 전통(남성진, 실천민속학연구10, 실천민속학회, 2007), 식민지기 경남 지역사회의 탈춤 부흥 운동과 주도자들·동래 야류 연행의 문화정치학(이훈상, 대동문화연구79,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2012), 한국의 가면극(전경욱. 열화당, 2007), 한국의 탈(한국문화재보호재단, 태학사, 1996), 한국의 탈춤(이두현, 일지사, 1995), 황해도탈놀이(서연호, 열화당,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