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중대회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 용어

집필자 서영대(徐永大)

정의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서 부여의 영고迎鼓와 고구려의 동맹東盟을 칭하는 나라의 큰 행사.

내용

부여의 영고와 고구려의 동맹은 모두 제천의례이다. 그러나 제천의례라고 해서 모두 국중대회라 한 것은 아니었다. 『삼국지』 「동이전」에서 동예에 무천舞天이라는 제천 의례가 있었고 삼한에서는 천군天君이 제천을 주관했음을 전하면서도, 이들 제천을 가리켜 국중대회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여•고구려와 동예•삼한은 사회 발전 단계에서 차이가 있었다. 부여와 고구려는 국왕이 있고 국가 단계에 접근한 사회였으나, 동예와 삼한은 아직 국가 단계에 접근하지 못한 족장사회(chiefdom)였다. 그러므로 국중대회란 국가단계 사회에서 거국적으로 거행한 의례를 가리키며, 국중대회라는 명칭은 여러 의례 중에서도 최고신인 천신天神을 모시는 제천의례가 가장 중요하고 규모가 컸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부여의 영고는 은정월殷正月, 즉 12월에 개최되었으며, 이때 ‘형옥刑獄을 단斷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형옥을 ‘단’했다는 말에 대해서는 중단했다고 해석하는 견해와 판단했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전자라면 영고 기간에 형벌을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죄수들을 풀어 주었다는 뜻이 되며, 후자라면 죄인들을 재판하고 방면했다는 뜻이 된다. 이에 따라 영고 때는 형벌과 관련되는 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의 동맹은 10월에 개최되었으며, 평상시에는 국도國都 동쪽의 큰 동굴에 모셔둔 수신隧神을 강변으로 모셔다가 제사했다고 한다. 수신은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柳花 부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굴 속의 수신을 강변으로 모시는 것은 어두운 방에 갇힌 유화가 햇빛의 정기를 받아 주몽을 잉태했다는 고구려 건국 신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동맹은 구전되는 고구려 건국 신화를 의례라는 행위로 재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여의 영고와 고구려의 동맹은 국중대회이자 제천의례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첫째, 의례의 명칭이 달랐다. 의미는 불확실하지만, 영고는 ‘맞이하다[迎]’와 ‘북[鼓]’의 의미가 담긴 우리말을 의역한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된다. 동맹은 기록에 따라 ‘동명東明’이라고도 하며 중국 고대에는 ‘맹’과 ‘명’이 음이 같다고 하는바, 고구려의 건국 시조 동명왕과 관련 있는 명칭인 듯하다. 둘째, 개최 시기가 달랐다. 영고의 거행 시기에 대해 『삼국지』에서는 은정월殷正月, 『후한서後漢書』에서는 납월臘月이라고 했지만 모두 12월의 다른 표현인 데에 반해, 동맹은 10월이었다. 셋째, 부대 행사에도 차이가 있었다. 영고 때는 형옥과 관련된 조치가 있었고 죄수를 사면한 데에 비해, 동맹에서는 수신隧神 제사가 있었다.

한편 이 두 의례의 공통점도 존재한다. 첫째, 영고와 동맹은 각국의 국도에서 거행되었다. 부여의 영고가 어디에서 거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지만, 고구려의 동맹은 국도에서 거행되었음이 확실하며, 국도인 국내성(지금의 중국 지린성 지안) 동쪽에서 수신을 모시던 수혈 유적까지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국’이라는 글자는 영역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국도라는 뜻도 있으므로, 부여의 영고도 국도를 두고 다른 곳에서 열렸을 것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둘째, 거국적 행사라는 점이다. 고구려의 동맹 때는 모든 지배층이 비단옷에 금은으로 장식하는 등 한껏 화려하게 꾸미고 참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배층만 참가하는 흉노족의 행사를 소회小會라고 하여 대회와 구별한 중국의 기록으로 미루어, 국중대회의 참가 범위는 지배층에 한정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아가 부여의 영고 기간에는 연일 먹고 마시면서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피지배층까지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국가적 기능이 있었다. 동맹은 시조 주몽이 하늘의 아들임을 말하는 건국 신화를 재연함으로써 왕권의 신성성과 정당성을 모든 고구려 구성원에게 각인했다. 또 영고와 동맹과 관련해서는 그런 기록이 없지만, 북방 민족인 흉노족이나 선비족의 경우 국가 의례 때 지배층들이 모여 국세國勢를 파악하고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했으며, 참석하지 않는 지배층은 반역자로 몰려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영고와 동맹도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기회인 동시에, 지배층의 참석을 의무화함으로써 왕권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넷째, 신년의례적 성격을 띠었다는 점이다. 영고나 동맹은 각각 12월과 10월로 거행 시기가 다르다. 그래서 영고는 연말이나 연초의 제사를 위한 수렵 의례, 동맹은 수확제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영고의 거행 시기를 은정월이라 했다. 은정월이란 은나라 역법의 정월이라는 의미인데, 『삼국지』 「동이전」 편찬 당시에는 이미 사용되지 않던 역법이다. 그럼에도 굳이 은정월이라 했다는 것은 영고에 신년제적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 동맹도 수확제로 보기에는 시기가 늦다. 10월이란 음력이며 양력으로는 11월인데, 고구려의 국도인 국내성 지역에서는 9월 이전에 추수가 끝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맹이 고구려의 시작을 알리는 주몽의 잉태 신화를 재연한 것이라면, 그것을 통해 고구려가 매년 거듭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다섯째, 이들은 국가적 축제였다. 영고 기간 중에 연일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했다는 기록은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고구려 사람들은 술을 잘 빚었으며 가무를 좋아하여 밤마다 남녀가 모여 노래하며 놀았다고 전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동맹 기간에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이며, 동맹 역시 일종의 국가적 축제였다고 할 수 있다.

여섯째, 영고나 동맹 때는 가면놀이도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이나 씨름을 비롯한 온갖 놀이 장면이 많은데, 그런 장면에 가면을 쓴 인물들이 상당수 보인다. 예컨대 안악 3호분에는 다리를 꼬는 춤을 추는 사람, 장천 1호분에서는 말타기 재주를 부리는 사람이 가면을 쓰고 있다. 또 대안리 1호분 전실 행렬도의 인물도 가면을 쓴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자료만으로 고구려에서 가면놀이가 가면극으로까지 발전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면놀이가 있었다면 국중대회인 동맹에서 행해졌을 가능성은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영고와 동맹은 부여 및 고구려의 흥망성쇠와 더불어 변화했다고 짐작된다. 특히 동맹은 고구려가 압록강 유역의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성으로 천도함에 따라 의례의 장소가 바뀌었기 때문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또 평양 천도 이후에는 국왕의 참석 하에 매년 초 패수浿水(대동강)변에서 개최되는 일련의 의례와 석전石戰이 국가적 행사로 떠오름에 따라 동맹의 위상도 과거와 같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징 및 의의

한국에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집단마다 다양한 축제가 있었지만, 부여의 영고나 고구려의 동맹은 국가적 차원의 행사였다는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해 지배층뿐만 아니라 피지배층까지 참여하는 대규모의 행사였고, 왕권의 정당화와 국가 구성원의 결속을 다지면서 국가적인 목적에 이바지하는 행사였다는 점에서 한국의 다른 의례들과 구별된다. 또 이들 국중대회는 주변 민족의 국가적 행사와도 구별되는 점이 있다. 중국의 기록을 살펴보면 주변 민족의 의례를 전하는 것이 많지만, 의례 기간에 음주하고 가무를 했다는 기록은 『삼국지』 「동이전」에만 보인다. 따라서 국가 의례가 일종의 축제였다는 것은 한국 고대 국중대회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례의 축제적 전통은 오늘날 한국의 마을 신앙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마을굿이 축제 분위기에서 진행되어 마을 구성원들이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된다는 점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국가적 행사인 국중대회와 마을 단위의 마을굿은 그 규모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국중대회와 마을굿을 바로 연결 짓는 데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고구려 괴뢰자와 장천1호분 앞방 왼쪽 벽 벽화(안상복, 한국민속학37, 한국민속학회, 2003), 고구려 국중대회 동맹의 구성과 축제성(이준성, 역사와 현실87, 한국역사연구회, 2013), 고구려의 국가제사(서영대, 한국사연구120, 한국사연구회, 2003), 한국 고대의 축제와 재판(이기백, 역사학보154, 역사학회, 1997).

국중대회

국중대회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 용어

집필자 서영대(徐永大)

정의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서 부여의 영고迎鼓와 고구려의 동맹東盟을 칭하는 나라의 큰 행사.

내용

부여의 영고와 고구려의 동맹은 모두 제천의례이다. 그러나 제천의례라고 해서 모두 국중대회라 한 것은 아니었다. 『삼국지』 「동이전」에서 동예에 무천舞天이라는 제천 의례가 있었고 삼한에서는 천군天君이 제천을 주관했음을 전하면서도, 이들 제천을 가리켜 국중대회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여•고구려와 동예•삼한은 사회 발전 단계에서 차이가 있었다. 부여와 고구려는 국왕이 있고 국가 단계에 접근한 사회였으나, 동예와 삼한은 아직 국가 단계에 접근하지 못한 족장사회(chiefdom)였다. 그러므로 국중대회란 국가단계 사회에서 거국적으로 거행한 의례를 가리키며, 국중대회라는 명칭은 여러 의례 중에서도 최고신인 천신天神을 모시는 제천의례가 가장 중요하고 규모가 컸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부여의 영고는 은정월殷正月, 즉 12월에 개최되었으며, 이때 ‘형옥刑獄을 단斷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형옥을 ‘단’했다는 말에 대해서는 중단했다고 해석하는 견해와 판단했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전자라면 영고 기간에 형벌을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죄수들을 풀어 주었다는 뜻이 되며, 후자라면 죄인들을 재판하고 방면했다는 뜻이 된다. 이에 따라 영고 때는 형벌과 관련되는 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의 동맹은 10월에 개최되었으며, 평상시에는 국도國都 동쪽의 큰 동굴에 모셔둔 수신隧神을 강변으로 모셔다가 제사했다고 한다. 수신은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柳花 부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굴 속의 수신을 강변으로 모시는 것은 어두운 방에 갇힌 유화가 햇빛의 정기를 받아 주몽을 잉태했다는 고구려 건국 신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동맹은 구전되는 고구려 건국 신화를 의례라는 행위로 재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여의 영고와 고구려의 동맹은 국중대회이자 제천의례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첫째, 의례의 명칭이 달랐다. 의미는 불확실하지만, 영고는 ‘맞이하다[迎]’와 ‘북[鼓]’의 의미가 담긴 우리말을 의역한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된다. 동맹은 기록에 따라 ‘동명東明’이라고도 하며 중국 고대에는 ‘맹’과 ‘명’이 음이 같다고 하는바, 고구려의 건국 시조 동명왕과 관련 있는 명칭인 듯하다. 둘째, 개최 시기가 달랐다. 영고의 거행 시기에 대해 『삼국지』에서는 은정월殷正月, 『후한서後漢書』에서는 납월臘月이라고 했지만 모두 12월의 다른 표현인 데에 반해, 동맹은 10월이었다. 셋째, 부대 행사에도 차이가 있었다. 영고 때는 형옥과 관련된 조치가 있었고 죄수를 사면한 데에 비해, 동맹에서는 수신隧神 제사가 있었다. 한편 이 두 의례의 공통점도 존재한다. 첫째, 영고와 동맹은 각국의 국도에서 거행되었다. 부여의 영고가 어디에서 거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지만, 고구려의 동맹은 국도에서 거행되었음이 확실하며, 국도인 국내성(지금의 중국 지린성 지안) 동쪽에서 수신을 모시던 수혈 유적까지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국’이라는 글자는 영역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국도라는 뜻도 있으므로, 부여의 영고도 국도를 두고 다른 곳에서 열렸을 것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둘째, 거국적 행사라는 점이다. 고구려의 동맹 때는 모든 지배층이 비단옷에 금은으로 장식하는 등 한껏 화려하게 꾸미고 참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배층만 참가하는 흉노족의 행사를 소회小會라고 하여 대회와 구별한 중국의 기록으로 미루어, 국중대회의 참가 범위는 지배층에 한정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아가 부여의 영고 기간에는 연일 먹고 마시면서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피지배층까지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국가적 기능이 있었다. 동맹은 시조 주몽이 하늘의 아들임을 말하는 건국 신화를 재연함으로써 왕권의 신성성과 정당성을 모든 고구려 구성원에게 각인했다. 또 영고와 동맹과 관련해서는 그런 기록이 없지만, 북방 민족인 흉노족이나 선비족의 경우 국가 의례 때 지배층들이 모여 국세國勢를 파악하고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했으며, 참석하지 않는 지배층은 반역자로 몰려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영고와 동맹도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기회인 동시에, 지배층의 참석을 의무화함으로써 왕권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넷째, 신년의례적 성격을 띠었다는 점이다. 영고나 동맹은 각각 12월과 10월로 거행 시기가 다르다. 그래서 영고는 연말이나 연초의 제사를 위한 수렵 의례, 동맹은 수확제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영고의 거행 시기를 은정월이라 했다. 은정월이란 은나라 역법의 정월이라는 의미인데, 『삼국지』 「동이전」 편찬 당시에는 이미 사용되지 않던 역법이다. 그럼에도 굳이 은정월이라 했다는 것은 영고에 신년제적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 동맹도 수확제로 보기에는 시기가 늦다. 10월이란 음력이며 양력으로는 11월인데, 고구려의 국도인 국내성 지역에서는 9월 이전에 추수가 끝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맹이 고구려의 시작을 알리는 주몽의 잉태 신화를 재연한 것이라면, 그것을 통해 고구려가 매년 거듭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다섯째, 이들은 국가적 축제였다. 영고 기간 중에 연일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했다는 기록은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고구려 사람들은 술을 잘 빚었으며 가무를 좋아하여 밤마다 남녀가 모여 노래하며 놀았다고 전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동맹 기간에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이며, 동맹 역시 일종의 국가적 축제였다고 할 수 있다. 여섯째, 영고나 동맹 때는 가면놀이도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이나 씨름을 비롯한 온갖 놀이 장면이 많은데, 그런 장면에 가면을 쓴 인물들이 상당수 보인다. 예컨대 안악 3호분에는 다리를 꼬는 춤을 추는 사람, 장천 1호분에서는 말타기 재주를 부리는 사람이 가면을 쓰고 있다. 또 대안리 1호분 전실 행렬도의 인물도 가면을 쓴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자료만으로 고구려에서 가면놀이가 가면극으로까지 발전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면놀이가 있었다면 국중대회인 동맹에서 행해졌을 가능성은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영고와 동맹은 부여 및 고구려의 흥망성쇠와 더불어 변화했다고 짐작된다. 특히 동맹은 고구려가 압록강 유역의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성으로 천도함에 따라 의례의 장소가 바뀌었기 때문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또 평양 천도 이후에는 국왕의 참석 하에 매년 초 패수浿水(대동강)변에서 개최되는 일련의 의례와 석전石戰이 국가적 행사로 떠오름에 따라 동맹의 위상도 과거와 같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징 및 의의

한국에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집단마다 다양한 축제가 있었지만, 부여의 영고나 고구려의 동맹은 국가적 차원의 행사였다는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해 지배층뿐만 아니라 피지배층까지 참여하는 대규모의 행사였고, 왕권의 정당화와 국가 구성원의 결속을 다지면서 국가적인 목적에 이바지하는 행사였다는 점에서 한국의 다른 의례들과 구별된다. 또 이들 국중대회는 주변 민족의 국가적 행사와도 구별되는 점이 있다. 중국의 기록을 살펴보면 주변 민족의 의례를 전하는 것이 많지만, 의례 기간에 음주하고 가무를 했다는 기록은 『삼국지』 「동이전」에만 보인다. 따라서 국가 의례가 일종의 축제였다는 것은 한국 고대 국중대회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례의 축제적 전통은 오늘날 한국의 마을 신앙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마을굿이 축제 분위기에서 진행되어 마을 구성원들이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된다는 점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국가적 행사인 국중대회와 마을 단위의 마을굿은 그 규모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국중대회와 마을굿을 바로 연결 짓는 데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고구려 괴뢰자와 장천1호분 앞방 왼쪽 벽 벽화(안상복, 한국민속학37, 한국민속학회, 2003), 고구려 국중대회 동맹의 구성과 축제성(이준성, 역사와 현실87, 한국역사연구회, 2013), 고구려의 국가제사(서영대, 한국사연구120, 한국사연구회, 2003), 한국 고대의 축제와 재판(이기백, 역사학보154, 역사학회,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