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극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 가면극

집필자 전경욱(田耕旭)
갱신일 2019-01-17

정의

연희자들이 등장인물이나 동물을 형상화한 가면을 쓰고 나와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전통연극.

역사

가면극假面劇이라는 명칭 이외에 탈춤・탈놀이・탈놀음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또 지역에 따라 서울과 경기도에서는 산대놀이, 황해도에서는 탈춤, 경상남도의 낙동강 동쪽 지역에서는 야류[野遊], 낙동강 서쪽에서는 오광대五廣大라 부르기도 한다.

그동안 한국 가면극의 기원에 대해 산대희山臺戲 기원설, 기악伎樂 기원설, 제의祭儀 기원설, 산악散樂・백희百戲 기원설 등이 제시되었다. 산대희 기원설과 산악・백희기원설은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산대희와 산악・백희는 동일한 연희를 가리키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대희 기원설이 한국적인 시각에서 가면극의 역사를 고찰하고 있다면, 산악・백희 기원설은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한국 가면극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전문적 연희자가 공연하는 가면극이 산악・백희로부터 성립되는 것이 동아시아의 보편적 현상임을 밝히고 있다.

기악 기원설은 백제인 미마지味摩之가 612년 일본에 전한 기악이 한국 가면극의 기원이라는 학설이다. 제의 기원설은 가면극의 기원이 무당이 주재하는 고대의 제의나 마을굿에 있다고 보는 무속제의 기원설과 풍요제의 기원설(풍농굿 기원설)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풍농굿 기원설에 의하면, 가면극은 풍물패 주도의 풍농굿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마을굿을 연희할 때 풍물패 중에서 가면을 쓰고 노는 무리가 잡색으로 따라다니며 이따금씩 허튼수작을 하는데, 때로는 마을굿을 하는 원래의 행사가 끝난 다음에 따로 기회를 얻어서 연희를 한바탕 벌였고, 거기서 가면극이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은 고을・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고을굿・마을굿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것들은 기본적으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종교적 성격과 풍농・풍어를 기원하는 풍요제의의 성격을 겸하는 점이 특징이다. 고을굿은 강릉 단오제처럼 군 단위로 지내고, 마을굿은 마을 단위로 지낸다. 여기서 다양한 연희들이 벌어졌는데, 이 마을굿놀이나 고을굿놀이들이 발전해서 하회 별신굿 탈놀이강릉 관노 가면극과 같은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2 고성固城 성황사城隍祠조의 “두 무리로 나뉘어 사당의 신상神像을 메고 푸른 깃발을 세우고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닌다. 마을 사람들은 다투어 술과 찬으로써 신상에 제사를 지내며, 연희자들은 모두 모여 온갖 연희를 펼친다.”라는 내용은 이런 추정을 뒷받침한다. 또한 조선 후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2월조>의 “비단으로 신의 가면을 만들어 사당 안에 비치해 두면 12월 20일 이후에 그 신이 고을 사람에게 내린다. 신이 오른 사람은 그 가면을 쓰고 춤추며 관아의 안과 고을을 돌아다니며 논다.”라는 강원도 고성高城의 풍속을 통해서, 마을 수호신을 상징하는 가면을 중심으로 가면극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 가면극의 주류를 이루는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은 산대희, 즉 산악 또는 백희라고 부르던 연희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산악・백희 또는 백희잡기라고 불리는 연희들은 삼국시대에 서역과 중국에서 들어왔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가무백희・잡희・산대잡극・산대희 등으로 불리던 연희들도 바로 이 산악・백희와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 산대도감에 동원되어 연희를 펼치던 반인泮人(성균관 소속 천민)들이 18세기 전반기에 산악・백희 계통의 연희와 기존의 가면희들을 바탕으로 재창조해 낸 것이 본산대놀이이다.

내용

한국의 가면극은 크게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과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으로 나누어 그 내용과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

  1.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마을굿의 일종인 별신굿을 거행할 때 논 것이다. 하회 별신굿은 1928년 이후 전승이 중단되었다. 별신굿은 보통 10년에 한 번씩 신탁神託에 의해 임시로 행해지는 큰 규모의 마을굿이다. 하회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과 사월초파일에 평상제를 지내다가, 부정기적으로 별신굿을 거행했다. 하회리의 서낭신은 열일곱 살의 처녀인 의성 김씨, 혹은 열다섯 살에 과부가 된 서낭신으로 동네 삼신의 며느리신이라고도 전한다.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제1과장 주지춤, 제2과장 백정놀이, 제3과장 할미놀이, 제4과장 파계승놀이, 제5과장 양반・선비놀이로 구성되어 있다. 하회 별신굿에서는 서낭당에서 신이 내린 후에 하산한다. 하산 과정에서 서낭신인 각시의 가면을 쓴 자가 행하는 무동춤은 신성현시神聖顯示를 연출하는 본보기이다. 하회의 서낭신은 이 마을에 시집와 열다섯 살 때에 남편과 사별하고 이곳의 서낭신이 되었다고 전한다. 본 가면극에 앞서 서낭신인 각시의 가면을 쓴 연희자가 무동을 타고 수시로 걸립을 했다. 서낭신인 각시 가면의 등장은 이 가면극이 각시에 의해서 주도되는 어떤 근원적인 것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면서, 이 가면극과 마을굿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 준다.

    첫 과장인 주지춤은 사자춤으로서, 사자 한 쌍이 춤을 추어 잡귀와 사악한 것을 쫓아내고 놀이판을 정화하는 벽사의 의식무이다. 백정놀이는 백정이 소를 도살해 염통과 소불알을 떼어 낸 다음, 관중을 향해 해학적인 말로 희롱하면서 양반층을 풍자하는 내용이다. 할미놀이에서는 쪽박을 허리에 차고 흰 수건을 머리에 쓴 할미가 베를 짜는 시늉을 하며, <베틀가>에 자신의 신세타령을 얹어 부른다. 이어 춤을 추다가 쪽박을 들고 동냥을 구한다. 이 과장은 여성의 고난과 삶의 애환을 그리고 있으며,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파계승놀이에서 중은 춤을 추던 부네가 오줌 누는 것을 엿보고 욕정을 참지 못한다. 중은 부네가 오줌 눈 자리의 흙을 움켜쥐고 냄새를 맡으며 흥분한다. 중은 부네와 어울려 춤을 추다가, 양반의 하인인 초라니에게 들키자 부네를 업고 달아난다. 양반・선비놀이에서 양반과 선비는 기녀인 부네를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면서 지체와 학식을 자랑한다. 양반과 선비가 지체 자랑을 하는 동안 사대부라는 신분, 문하시중이라는 벼슬, 사서오경이라는 유학 경전은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전락한다. 양반과 선비의 하인인 초라니와 이매는 그들의 학식을 웃음거리로 만든다. 백정이 양기를 돕는 데에 좋다며 소불알을 들고 등장하자, 서로 사겠다고 당기므로 백정은 소불알이 터지겠다고 야단한다. 이 와중에 할미가 등장하여 이들을 비판하고, 별채別差(나라에서 특별히 파견하던 임시 관원) 역인 이매가 나와 세금을 바치라고 외치면, 모두 깜짝 놀라 도망간다. 여기서는 관리가 마을 사람들에게 곡식을 거두면서 착취하는 횡포를 풍자하고 있다.

    강릉 관노 가면극은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강릉 단오제에서 관노官奴들에 의해 연행되던 가면극이었다. 옛날에는 음력 5월 1일에 여러 색깔의 천으로 장식한 깃대인 괫대를 세우고 대서낭당의 앞 마당에서 가면극을 행했는데, 단옷날까지 계속했다. 강릉 관노 가면극은 제1과장 장자마리춤, 제2과장 양반광대・소매각시춤, 제3과장 시시딱딱이춤, 제4과장 소매각시의 자살과 소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릉 관노 가면극은 한국의 가면극 가운데 유일한 무언극이다. 또한 다른 지역의 가면극은 각 과장의 내용이 서로 독립적인 모습을 보이는 데에 반해, 강릉 관노 가면극은 각 과장이 서로 긴밀하게 짜여 있다. 즉 양반과 소매각시를 중심으로 한 서사적인 내용의 연희가 진행된다.

    첫 과장인 장자마리춤은 벽사적 의식무로, 장자마리 2인이 마당닦기춤을 통해 놀이판을 정화한다. 장자마리들은 의상에 곡식 이삭과 해초인 말치를 매달고 있고, 불룩한 배를 통해 잉태한 모습을 보여 주며, 둘이 성행위를 흉내 낸 동작을 한다. 이로 보아 장자마리춤은 풍농・풍어를 기원하는 마을굿인 단오제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양반광대・소매각시춤은 양반이 소매각시를 차지해 다정하게 노는 내용이다. 시시딱딱이춤은 시시딱딱이들이 훼방을 놓아 양반과 소매각시의 사이를 이간시키는 내용이다. 제4과장인 소매각시의 자살과 소생은 소매각시가 자살했다가 다시 살아나는 내용이다. 양반이 시시딱딱이들을 쫓아 버린 후에 소매각시를 끌고 와서 시시딱딱이와 놀아났다고 야단치면, 소매각시는 그 사실을 부인하면서 양반에게 용서를 빈다. 그래도 양반이 화를 풀지 않자 그녀는 양반의 긴 수염에 자기 목을 매어 자살을 시도한다. 이때 장자마리들과 시시딱딱이들이 소매각시의 죽음을 확인하고 성황신목城隍神木(서낭대)을 모시고 와서 빌자 소매각시가 소생한다는 내용으로 결말을 맺는다.

    이상과 같이, 하회 별신굿 탈놀이와 강릉 관노 가면극은 연희 내용과 등장인물들이 여느 지역의 가면극과 매우 다르다. 그것은 이 가면극들이 마을굿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회 별신굿 탈놀이의 파계승 과장이나 유학과 유학자를 조롱하는 내용, 강릉 관노 가면극의 소매각시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후대에는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도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의 영향을 일부 받은 것으로 보인다.

  2.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은 본산대놀이로부터 전파된 가면극을 말한다. 본산대놀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근교의 가면극은 애오개(아현), 사직골, 노량진, 구파발 등에 있었다. 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서울과 경기도의 송파 산대놀이양주 별산대놀이퇴계원 산대놀이, 황해도의 봉산 탈춤강령 탈춤은율 탈춤, 경남의 수영 야류동래 야류통영 오광대고성 오광대가산 오광대진주 오광대, 남사당패의 덧뵈기 등이 생겨났다. 현재 본산대놀이는 전하지 않는다. 송파 산대놀이와 양주 별산대놀이는 19세기 초・중엽에 서울 지역 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성립된 가면극이다.

    황해도 일대의 가면극을 해서海西 탈춤이라고 부른다. 해서 탈춤은 1930년대까지만 해도 봉산・사리원을 중심으로 하여 그 동쪽 지대인 기린・서흥・평산・신계・금천・수안, 북쪽 지대인 황주, 서쪽 지대인 안악・은율・재령・신천・송화, 남쪽 지대인 강령・옹진・연백・해주 등지에서 전승되고 있었다. 황해도에서는 5일장이 서는 거의 모든 장터에서 1년에 한 번씩 가면극을 초청해 놀았다고 한다. 산대놀이와 해서 탈춤의 영향 관계는 북한학자 김일출의 황해도 현지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특히 해주는 황해도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해주 감영의 교방에 모여든 가무인들이 있었고, 통인청을 중심으로 하급 관속과 한량들이 해주 탈춤을 전승했다고 한다. 더욱이 김일출은 “특히 해주탈놀이는 그 관계자들이 자인하고 있는 바와 같이 경기의 산대놀이와 부단한 교류를 형성하고 있어 여러 가지 면들에 산대놀이의 일정한 영향이 인정되고 있다.”라고 밝혔다.

    경남에서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 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가면극을 야류野遊라고 부르고, 서쪽 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가면극을 오광대五廣大라고 부른다. 송석하는 1930년대에 현지 조사를 통해 야류와 오광대의 전파 경로를 밝혔다. 야류와 오광대의 발생지는 낙동강변인 밤마리(경남 합천 덕곡면 율지리)라고 전한다. 밤마리의 시장에서 대광대패라는 유랑예인집단이 여러 공연물 가운데 하나로 가면극을 놀았다. 다만 진주 오광대는 1880년 무렵 경남 의령 부림면 신반리新反里 대광대패의 가면극을 배워 온 것이다. 야류는 들놀음이라고도 부르는데, 동래・수영・부산진 등지에서 전승되었다. 오광대는 다섯 광대가 나오기 때문에, 또는 다섯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오광대라고 한다. 합천・신반・통영・고성・가산・창원・가락・거제・진주・산청・학산・도동・서구・남구 등지에서 전승되었다.

    조선 후기에 서울의 시정에서는 성균관 소속의 노비인 반인들에 의해 본산대놀이가 공연되고 있었다. 특히 애오개와 사직골의 본산대패는 지역으로 순회공연을 자주 다녔는데, 이것이 각 지역의 가면극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남사당패, 대광대패 등의 유랑예인집단이 각 지역을 떠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연희를 공연하면서, 흥행을 위해 본산대패의 가면극을 그들의 공연 종목 가운데 하나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인 해서 탈춤, 별산대놀이, 야류와 오광대 등은 각 과장의 구성과 연희 내용, 등장인물, 대사의 형식, 연극적 형식, 가면의 유형 등을 살펴볼 때, 동일 계통임이 드러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들은 사악한 것을 쫓아 버리는 벽사辟邪의 의식무, 양반 과장, 파계승 과장, 영감・할미 과장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둘째, 그 등장인물들은 양반, 샌님, 영감, 할미, 상좌, 노장, 먹중 등 공통적으로 신분이나 계층・부류를 나타내는 명칭을 사용한다. 양반의 하인은 모두 말뚝이이다. 별산대놀이와 해서 탈춤에서는 소무를 사이에 두고 노장과 대결하는 술 취한 중이 모두 취발이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셋째,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의 첫째 과장에는 상좌춤오방신장무・사자춤 같은 벽사적인 의식무가 있다.

    넷째, 양반 과장은 몇 개의 단락을 반복하는데, 앞부분에 반드시 말뚝이가 많은 지명을 열거하며 양반을 찾으려고 그곳들을 돌아다녔다는 말뚝이 노정기路程記가 있다. 그리고 말뚝이는 양반의 시중을 들고 복종하는 체하면서, 실제로는 양반의 약점을 폭로하고 양반의 위선을 풍자하며, 양반층의 전유물인 문자를 통해 양반층을 모욕한다. 양반들의 가면은 대부분 언청이・곰보・비뚤어진 얼굴 등 비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다섯째, 별산대놀이와 해서 탈춤은 파계승 과장인 노장 과장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등장인물도 많으며, 연희 내용이 동일할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명칭도 노장・먹중・소무(소매)・취발이・신장수・원숭이 등으로 완전히 일치한다.

    여섯째, 할미 과장은 영감과 할미가 젊은 첩 때문에 싸우는 내용으로, 할미는 대부분 무당으로 나타난다. 할미의 죽음 후에는 무당굿을 하거나 상여를 내가며 <상엿소리>를 부른다.

    일곱째,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의 가면들을 보면 공통된 형상을 하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취발이 가면의 경우, 현재 모든 별산대놀이와 해서 탈춤에서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1929년 수집된 양주 별산대놀이 가면, 일제강점기에 수집된 퇴계원 산대놀이 가면 등의 취발이탈이 모두 공통된 모습을 보인다. 서울・경기와 황해도라는 지역적 차이와 1920년대와 2000년대라는 시간적 차이가 있음에도 취발이탈이 공통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미 예전부터 취발이탈이 일정한 유형을 이루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노장탈・할미탈・영감탈・샌님탈・종갓도령탈・상좌탈・소무탈・첩탈 등도 취발이탈과 마찬가지로, 지역적 차이와 시간적 차이가 있지만 공통된 모습을 보인다.

    강이천姜彛天(1769~1801)이 열 살 때인 1778년 남대문 밖에서 연행된 인형극과 가면극을 보고, 11년 후인 1789년에 지은 한시 <남성관희자南城觀戲子>는 1770년대에 상좌춤 과장, 노장 과장, 샌님・포도부장 과장, 거사・사당 과장, 할미 과장을 갖춘 본산대놀이 가면극이 현존하는 별산대놀이・해서 탈춤・야류・오광대와 거의 같은 모습으로 서울 근교에서 전문적 연희자에 의해 연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준다.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들은 공통적인 연희 내용을 보이고 있지만, 지역에 따라 특징적인 과장도 나타난다. 별산대놀이의 연잎・눈끔적이 과장, 해서 탈춤의 사자춤 과장, 야류와 오광대의 사자춤 과장・영노(비비)과장・문둥이춤 과장 등이 그것이다. 이는 본산대놀이가 각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각 지역에서 나름대로 새로운 내용을 삽입한 결과이다. 실제로 김일출의 조사에 의하면, 봉산 탈춤의 사자춤 과장은 1913~1915년 무렵부터 비로소 놀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의 많은 대목은 독립적인 우희優戲의 모습을 하고 있다. 본산대놀이의 형성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을 터이지만, 대사의 구성이나 양반 과장 중 양반의 모습 등은 우희・유희儒戲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보여 준다. 우희는 골계적인 내용으로서 요즘의 코미디와 유사한 연희였다.

    유희는 우희 중에서도 유학자, 유학 경전, 유학의 내용 등을 우스꽝스럽게 풍자한 코미디였다. 우희와 유희에 이미 양반층을 풍자하는 내용이 있었으므로, 가면극의 양반 과장에 그 내용이 자연스럽게 반영되었다. 전국의 모든 가면극에 양반 과장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에서 양반 과장의 분량과 내용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가면극에는 양반이나 유학자를 조롱하는 내용이 많고, 유가의 오륜과 경서, 그리고 문자 등 양반층의 문화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양반의 가면은 대부분 추한 모습이고 의복도 비정상적인 경우가 많아서,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조롱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우희・유희와 가면극의 양반 과장은 그 형식과 내용이 무척이나 유사한 것이다. 양반 과장 이외에 노장 과장 가운데 먹중과 취발이의 대사, 영감・할미 과장 가운데 영감과 할미의 대사에 보이는 골계적인 내용의 재담들도 우희의 전통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 이는 나례도감에 동원되던 연희자들이 이미 우희를 하고 있었고 18세기 전반에 본산대놀이가 성립될 때 그 연희자들이 우희를 연희 내용에 적극 활용한 결과인 것이다.

특징 및 의의

양반의 신분적 특권, 노장의 관념적 허위, 영감의 남성적 횡포는 봉건사회의 유물로서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부정적 유물이 청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면극의 주제를 통하여 새로운 사회의식의 발전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긍정적 인물인 취발이포도부장말뚝이할미를 통하여 기존 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요구하는 민중의식을 보여 준다.

대부분의 가면극은 정월대보름이나 오월단오에 세시풍속의 하나로 즐거운 잔치판에서 거행되었다. 정월대보름이나 단오는 가면극・줄다리기・차전놀이・횃불싸움・지신밟기・씨름민속놀이를 거행하며 지역 주민들 간의 단결과 화합을 도모하던 특별한 절기이다. 가면극 공연의 앞이나 뒤에 이런 민속놀이들이 결합되어 있는 지역이 많았다. 민중은 해마다 이러한 시기에 가면극을 공연함으로써 일시적으로 기존 질서로부터 벗어나 광복을 구가했다. 일상 세계에서라면 마땅히 금기시되던 문제들을 놀이판에 드러내어 다룸으로써, 평소 억압되었던 갈등과 불만을 발산하고 해소하는 기회로 삼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탈춤 부흥 운동이 크게 일어나 전국의 대학생들이 가면극을 배워 공연하는 일이 자주 있었고 그 열의도 대단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접어들자 이런 열기가 식으면서, 그 대신에 민속극에 기반을 둔 창작극인 마당극(마당굿) 또는 민족극이라 불리는 일단의 정치극이 활발하게 공연되면서 체제 비판을 시도했다.

한편 전문적인 연극 단체 가운데도 가면극・판소리인형극 등 전통연희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창작극을 정립해 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연출가 허규를 중심으로 한 극단 민예(1973년 창단), 그리고 손진책의 극단 미추(1981년 창단)이다. 극단 민예는 <허생전>・<놀부전>・<서울말뚝이>・<다시라기> 등을 공연했다. 허생전은 가면극의 장단춤사위・등퇴장 동작과 판소리의 아니리를 활용했다. <놀부전>은 창극인데, 등퇴장과 몸동작에 가면극의 춤사위를 활용했다. <서울말뚝이>는 현대판 가면극이고, <다시라기>는 민속놀이였다. 그러므로 가면극은 요즘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류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현대 공연예술의 한국화를 위해 창작 자원을 제공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이다.

참고문헌

산대극과 기악(이혜구, 한국음악연구소, 국민음악연구회, 1957), 조선민속탈놀이연구(김일출, 과학원출판사, 1958), 탈춤의 역사와 원리(조동일, 홍성사, 1979), 한국 가면극 연구(서연호, 월인, 2002), 한국의 가면극(이두현, 일지사, 1979), 한국의 가면극(전경욱, 열화당,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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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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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전경욱(田耕旭)
갱신일 2019-01-17

정의

연희자들이 등장인물이나 동물을 형상화한 가면을 쓰고 나와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전통연극.

역사

가면극假面劇이라는 명칭 이외에 탈춤・탈놀이・탈놀음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또 지역에 따라 서울과 경기도에서는 산대놀이, 황해도에서는 탈춤, 경상남도의 낙동강 동쪽 지역에서는 야류[野遊], 낙동강 서쪽에서는 오광대五廣大라 부르기도 한다. 그동안 한국 가면극의 기원에 대해 산대희山臺戲 기원설, 기악伎樂 기원설, 제의祭儀 기원설, 산악散樂・백희百戲 기원설 등이 제시되었다. 산대희 기원설과 산악・백희기원설은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산대희와 산악・백희는 동일한 연희를 가리키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대희 기원설이 한국적인 시각에서 가면극의 역사를 고찰하고 있다면, 산악・백희 기원설은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한국 가면극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전문적 연희자가 공연하는 가면극이 산악・백희로부터 성립되는 것이 동아시아의 보편적 현상임을 밝히고 있다. 기악 기원설은 백제인 미마지味摩之가 612년 일본에 전한 기악이 한국 가면극의 기원이라는 학설이다. 제의 기원설은 가면극의 기원이 무당이 주재하는 고대의 제의나 마을굿에 있다고 보는 무속제의 기원설과 풍요제의 기원설(풍농굿 기원설)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풍농굿 기원설에 의하면, 가면극은 풍물패 주도의 풍농굿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마을굿을 연희할 때 풍물패 중에서 가면을 쓰고 노는 무리가 잡색으로 따라다니며 이따금씩 허튼수작을 하는데, 때로는 마을굿을 하는 원래의 행사가 끝난 다음에 따로 기회를 얻어서 연희를 한바탕 벌였고, 거기서 가면극이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은 고을・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고을굿・마을굿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것들은 기본적으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종교적 성격과 풍농・풍어를 기원하는 풍요제의의 성격을 겸하는 점이 특징이다. 고을굿은 강릉 단오제처럼 군 단위로 지내고, 마을굿은 마을 단위로 지낸다. 여기서 다양한 연희들이 벌어졌는데, 이 마을굿놀이나 고을굿놀이들이 발전해서 하회 별신굿 탈놀이나 강릉 관노 가면극과 같은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2 고성固城 성황사城隍祠조의 “두 무리로 나뉘어 사당의 신상神像을 메고 푸른 깃발을 세우고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닌다. 마을 사람들은 다투어 술과 찬으로써 신상에 제사를 지내며, 연희자들은 모두 모여 온갖 연희를 펼친다.”라는 내용은 이런 추정을 뒷받침한다. 또한 조선 후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의 “비단으로 신의 가면을 만들어 사당 안에 비치해 두면 12월 20일 이후에 그 신이 고을 사람에게 내린다. 신이 오른 사람은 그 가면을 쓰고 춤추며 관아의 안과 고을을 돌아다니며 논다.”라는 강원도 고성高城의 풍속을 통해서, 마을 수호신을 상징하는 가면을 중심으로 가면극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 가면극의 주류를 이루는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은 산대희, 즉 산악 또는 백희라고 부르던 연희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산악・백희 또는 백희잡기라고 불리는 연희들은 삼국시대에 서역과 중국에서 들어왔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가무백희・잡희・산대잡극・산대희 등으로 불리던 연희들도 바로 이 산악・백희와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 산대도감에 동원되어 연희를 펼치던 반인泮人(성균관 소속 천민)들이 18세기 전반기에 산악・백희 계통의 연희와 기존의 가면희들을 바탕으로 재창조해 낸 것이 본산대놀이이다.

내용

한국의 가면극은 크게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과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으로 나누어 그 내용과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마을굿의 일종인 별신굿을 거행할 때 논 것이다. 하회 별신굿은 1928년 이후 전승이 중단되었다. 별신굿은 보통 10년에 한 번씩 신탁神託에 의해 임시로 행해지는 큰 규모의 마을굿이다. 하회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과 사월초파일에 평상제를 지내다가, 부정기적으로 별신굿을 거행했다. 하회리의 서낭신은 열일곱 살의 처녀인 의성 김씨, 혹은 열다섯 살에 과부가 된 서낭신으로 동네 삼신의 며느리신이라고도 전한다.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제1과장 주지춤, 제2과장 백정놀이, 제3과장 할미놀이, 제4과장 파계승놀이, 제5과장 양반・선비놀이로 구성되어 있다. 하회 별신굿에서는 서낭당에서 신이 내린 후에 하산한다. 하산 과정에서 서낭신인 각시의 가면을 쓴 자가 행하는 무동춤은 신성현시神聖顯示를 연출하는 본보기이다. 하회의 서낭신은 이 마을에 시집와 열다섯 살 때에 남편과 사별하고 이곳의 서낭신이 되었다고 전한다. 본 가면극에 앞서 서낭신인 각시의 가면을 쓴 연희자가 무동을 타고 수시로 걸립을 했다. 서낭신인 각시 가면의 등장은 이 가면극이 각시에 의해서 주도되는 어떤 근원적인 것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면서, 이 가면극과 마을굿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 준다. 첫 과장인 주지춤은 사자춤으로서, 사자 한 쌍이 춤을 추어 잡귀와 사악한 것을 쫓아내고 놀이판을 정화하는 벽사의 의식무이다. 백정놀이는 백정이 소를 도살해 염통과 소불알을 떼어 낸 다음, 관중을 향해 해학적인 말로 희롱하면서 양반층을 풍자하는 내용이다. 할미놀이에서는 쪽박을 허리에 차고 흰 수건을 머리에 쓴 할미가 베를 짜는 시늉을 하며, 에 자신의 신세타령을 얹어 부른다. 이어 춤을 추다가 쪽박을 들고 동냥을 구한다. 이 과장은 여성의 고난과 삶의 애환을 그리고 있으며,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파계승놀이에서 중은 춤을 추던 부네가 오줌 누는 것을 엿보고 욕정을 참지 못한다. 중은 부네가 오줌 눈 자리의 흙을 움켜쥐고 냄새를 맡으며 흥분한다. 중은 부네와 어울려 춤을 추다가, 양반의 하인인 초라니에게 들키자 부네를 업고 달아난다. 양반・선비놀이에서 양반과 선비는 기녀인 부네를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면서 지체와 학식을 자랑한다. 양반과 선비가 지체 자랑을 하는 동안 사대부라는 신분, 문하시중이라는 벼슬, 사서오경이라는 유학 경전은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전락한다. 양반과 선비의 하인인 초라니와 이매는 그들의 학식을 웃음거리로 만든다. 백정이 양기를 돕는 데에 좋다며 소불알을 들고 등장하자, 서로 사겠다고 당기므로 백정은 소불알이 터지겠다고 야단한다. 이 와중에 할미가 등장하여 이들을 비판하고, 별채別差(나라에서 특별히 파견하던 임시 관원) 역인 이매가 나와 세금을 바치라고 외치면, 모두 깜짝 놀라 도망간다. 여기서는 관리가 마을 사람들에게 곡식을 거두면서 착취하는 횡포를 풍자하고 있다. 강릉 관노 가면극은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강릉 단오제에서 관노官奴들에 의해 연행되던 가면극이었다. 옛날에는 음력 5월 1일에 여러 색깔의 천으로 장식한 깃대인 괫대를 세우고 대서낭당의 앞 마당에서 가면극을 행했는데, 단옷날까지 계속했다. 강릉 관노 가면극은 제1과장 장자마리춤, 제2과장 양반광대・소매각시춤, 제3과장 시시딱딱이춤, 제4과장 소매각시의 자살과 소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릉 관노 가면극은 한국의 가면극 가운데 유일한 무언극이다. 또한 다른 지역의 가면극은 각 과장의 내용이 서로 독립적인 모습을 보이는 데에 반해, 강릉 관노 가면극은 각 과장이 서로 긴밀하게 짜여 있다. 즉 양반과 소매각시를 중심으로 한 서사적인 내용의 연희가 진행된다. 첫 과장인 장자마리춤은 벽사적 의식무로, 장자마리 2인이 마당닦기춤을 통해 놀이판을 정화한다. 장자마리들은 의상에 곡식 이삭과 해초인 말치를 매달고 있고, 불룩한 배를 통해 잉태한 모습을 보여 주며, 둘이 성행위를 흉내 낸 동작을 한다. 이로 보아 장자마리춤은 풍농・풍어를 기원하는 마을굿인 단오제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양반광대・소매각시춤은 양반이 소매각시를 차지해 다정하게 노는 내용이다. 시시딱딱이춤은 시시딱딱이들이 훼방을 놓아 양반과 소매각시의 사이를 이간시키는 내용이다. 제4과장인 소매각시의 자살과 소생은 소매각시가 자살했다가 다시 살아나는 내용이다. 양반이 시시딱딱이들을 쫓아 버린 후에 소매각시를 끌고 와서 시시딱딱이와 놀아났다고 야단치면, 소매각시는 그 사실을 부인하면서 양반에게 용서를 빈다. 그래도 양반이 화를 풀지 않자 그녀는 양반의 긴 수염에 자기 목을 매어 자살을 시도한다. 이때 장자마리들과 시시딱딱이들이 소매각시의 죽음을 확인하고 성황신목城隍神木(서낭대)을 모시고 와서 빌자 소매각시가 소생한다는 내용으로 결말을 맺는다. 이상과 같이, 하회 별신굿 탈놀이와 강릉 관노 가면극은 연희 내용과 등장인물들이 여느 지역의 가면극과 매우 다르다. 그것은 이 가면극들이 마을굿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회 별신굿 탈놀이의 파계승 과장이나 유학과 유학자를 조롱하는 내용, 강릉 관노 가면극의 소매각시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후대에는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도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의 영향을 일부 받은 것으로 보인다.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은 본산대놀이로부터 전파된 가면극을 말한다. 본산대놀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근교의 가면극은 애오개(아현), 사직골, 노량진, 구파발 등에 있었다. 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서울과 경기도의 송파 산대놀이와 양주 별산대놀이・퇴계원 산대놀이, 황해도의 봉산 탈춤・강령 탈춤・은율 탈춤, 경남의 수영 야류・동래 야류・통영 오광대・고성 오광대・가산 오광대・진주 오광대, 남사당패의 덧뵈기 등이 생겨났다. 현재 본산대놀이는 전하지 않는다. 송파 산대놀이와 양주 별산대놀이는 19세기 초・중엽에 서울 지역 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성립된 가면극이다. 황해도 일대의 가면극을 해서海西 탈춤이라고 부른다. 해서 탈춤은 1930년대까지만 해도 봉산・사리원을 중심으로 하여 그 동쪽 지대인 기린・서흥・평산・신계・금천・수안, 북쪽 지대인 황주, 서쪽 지대인 안악・은율・재령・신천・송화, 남쪽 지대인 강령・옹진・연백・해주 등지에서 전승되고 있었다. 황해도에서는 5일장이 서는 거의 모든 장터에서 1년에 한 번씩 가면극을 초청해 놀았다고 한다. 산대놀이와 해서 탈춤의 영향 관계는 북한학자 김일출의 황해도 현지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특히 해주는 황해도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해주 감영의 교방에 모여든 가무인들이 있었고, 통인청을 중심으로 하급 관속과 한량들이 해주 탈춤을 전승했다고 한다. 더욱이 김일출은 “특히 해주탈놀이는 그 관계자들이 자인하고 있는 바와 같이 경기의 산대놀이와 부단한 교류를 형성하고 있어 여러 가지 면들에 산대놀이의 일정한 영향이 인정되고 있다.”라고 밝혔다. 경남에서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 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가면극을 야류野遊라고 부르고, 서쪽 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가면극을 오광대五廣大라고 부른다. 송석하는 1930년대에 현지 조사를 통해 야류와 오광대의 전파 경로를 밝혔다. 야류와 오광대의 발생지는 낙동강변인 밤마리(경남 합천 덕곡면 율지리)라고 전한다. 밤마리의 시장에서 대광대패라는 유랑예인집단이 여러 공연물 가운데 하나로 가면극을 놀았다. 다만 진주 오광대는 1880년 무렵 경남 의령 부림면 신반리新反里 대광대패의 가면극을 배워 온 것이다. 야류는 들놀음이라고도 부르는데, 동래・수영・부산진 등지에서 전승되었다. 오광대는 다섯 광대가 나오기 때문에, 또는 다섯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오광대라고 한다. 합천・신반・통영・고성・가산・창원・가락・거제・진주・산청・학산・도동・서구・남구 등지에서 전승되었다. 조선 후기에 서울의 시정에서는 성균관 소속의 노비인 반인들에 의해 본산대놀이가 공연되고 있었다. 특히 애오개와 사직골의 본산대패는 지역으로 순회공연을 자주 다녔는데, 이것이 각 지역의 가면극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남사당패, 대광대패 등의 유랑예인집단이 각 지역을 떠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연희를 공연하면서, 흥행을 위해 본산대패의 가면극을 그들의 공연 종목 가운데 하나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인 해서 탈춤, 별산대놀이, 야류와 오광대 등은 각 과장의 구성과 연희 내용, 등장인물, 대사의 형식, 연극적 형식, 가면의 유형 등을 살펴볼 때, 동일 계통임이 드러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들은 사악한 것을 쫓아 버리는 벽사辟邪의 의식무, 양반 과장, 파계승 과장, 영감・할미 과장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둘째, 그 등장인물들은 양반, 샌님, 영감, 할미, 상좌, 노장, 먹중 등 공통적으로 신분이나 계층・부류를 나타내는 명칭을 사용한다. 양반의 하인은 모두 말뚝이이다. 별산대놀이와 해서 탈춤에서는 소무를 사이에 두고 노장과 대결하는 술 취한 중이 모두 취발이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셋째,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의 첫째 과장에는 상좌춤・오방신장무・사자춤 같은 벽사적인 의식무가 있다. 넷째, 양반 과장은 몇 개의 단락을 반복하는데, 앞부분에 반드시 말뚝이가 많은 지명을 열거하며 양반을 찾으려고 그곳들을 돌아다녔다는 말뚝이 노정기路程記가 있다. 그리고 말뚝이는 양반의 시중을 들고 복종하는 체하면서, 실제로는 양반의 약점을 폭로하고 양반의 위선을 풍자하며, 양반층의 전유물인 문자를 통해 양반층을 모욕한다. 양반들의 가면은 대부분 언청이・곰보・비뚤어진 얼굴 등 비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다섯째, 별산대놀이와 해서 탈춤은 파계승 과장인 노장 과장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등장인물도 많으며, 연희 내용이 동일할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명칭도 노장・먹중・소무(소매)・취발이・신장수・원숭이 등으로 완전히 일치한다. 여섯째, 할미 과장은 영감과 할미가 젊은 첩 때문에 싸우는 내용으로, 할미는 대부분 무당으로 나타난다. 할미의 죽음 후에는 무당굿을 하거나 상여를 내가며 를 부른다. 일곱째,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의 가면들을 보면 공통된 형상을 하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취발이 가면의 경우, 현재 모든 별산대놀이와 해서 탈춤에서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1929년 수집된 양주 별산대놀이 가면, 일제강점기에 수집된 퇴계원 산대놀이 가면 등의 취발이탈이 모두 공통된 모습을 보인다. 서울・경기와 황해도라는 지역적 차이와 1920년대와 2000년대라는 시간적 차이가 있음에도 취발이탈이 공통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미 예전부터 취발이탈이 일정한 유형을 이루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노장탈・할미탈・영감탈・샌님탈・종갓도령탈・상좌탈・소무탈・첩탈 등도 취발이탈과 마찬가지로, 지역적 차이와 시간적 차이가 있지만 공통된 모습을 보인다. 강이천姜彛天(1769~1801)이 열 살 때인 1778년 남대문 밖에서 연행된 인형극과 가면극을 보고, 11년 후인 1789년에 지은 한시 는 1770년대에 상좌춤 과장, 노장 과장, 샌님・포도부장 과장, 거사・사당 과장, 할미 과장을 갖춘 본산대놀이 가면극이 현존하는 별산대놀이・해서 탈춤・야류・오광대와 거의 같은 모습으로 서울 근교에서 전문적 연희자에 의해 연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준다.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들은 공통적인 연희 내용을 보이고 있지만, 지역에 따라 특징적인 과장도 나타난다. 별산대놀이의 연잎・눈끔적이 과장, 해서 탈춤의 사자춤 과장, 야류와 오광대의 사자춤 과장・영노(비비)과장・문둥이춤 과장 등이 그것이다. 이는 본산대놀이가 각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각 지역에서 나름대로 새로운 내용을 삽입한 결과이다. 실제로 김일출의 조사에 의하면, 봉산 탈춤의 사자춤 과장은 1913~1915년 무렵부터 비로소 놀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의 많은 대목은 독립적인 우희優戲의 모습을 하고 있다. 본산대놀이의 형성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을 터이지만, 대사의 구성이나 양반 과장 중 양반의 모습 등은 우희・유희儒戲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보여 준다. 우희는 골계적인 내용으로서 요즘의 코미디와 유사한 연희였다. 유희는 우희 중에서도 유학자, 유학 경전, 유학의 내용 등을 우스꽝스럽게 풍자한 코미디였다. 우희와 유희에 이미 양반층을 풍자하는 내용이 있었으므로, 가면극의 양반 과장에 그 내용이 자연스럽게 반영되었다. 전국의 모든 가면극에 양반 과장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에서 양반 과장의 분량과 내용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가면극에는 양반이나 유학자를 조롱하는 내용이 많고, 유가의 오륜과 경서, 그리고 문자 등 양반층의 문화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양반의 가면은 대부분 추한 모습이고 의복도 비정상적인 경우가 많아서,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조롱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우희・유희와 가면극의 양반 과장은 그 형식과 내용이 무척이나 유사한 것이다. 양반 과장 이외에 노장 과장 가운데 먹중과 취발이의 대사, 영감・할미 과장 가운데 영감과 할미의 대사에 보이는 골계적인 내용의 재담들도 우희의 전통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 이는 나례도감에 동원되던 연희자들이 이미 우희를 하고 있었고 18세기 전반에 본산대놀이가 성립될 때 그 연희자들이 우희를 연희 내용에 적극 활용한 결과인 것이다.

특징 및 의의

양반의 신분적 특권, 노장의 관념적 허위, 영감의 남성적 횡포는 봉건사회의 유물로서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부정적 유물이 청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면극의 주제를 통하여 새로운 사회의식의 발전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긍정적 인물인 취발이・포도부장・말뚝이・할미를 통하여 기존 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요구하는 민중의식을 보여 준다. 대부분의 가면극은 정월대보름이나 오월단오에 세시풍속의 하나로 즐거운 잔치판에서 거행되었다. 정월대보름이나 단오는 가면극・줄다리기・차전놀이・횃불싸움・지신밟기・씨름 등 민속놀이를 거행하며 지역 주민들 간의 단결과 화합을 도모하던 특별한 절기이다. 가면극 공연의 앞이나 뒤에 이런 민속놀이들이 결합되어 있는 지역이 많았다. 민중은 해마다 이러한 시기에 가면극을 공연함으로써 일시적으로 기존 질서로부터 벗어나 광복을 구가했다. 일상 세계에서라면 마땅히 금기시되던 문제들을 놀이판에 드러내어 다룸으로써, 평소 억압되었던 갈등과 불만을 발산하고 해소하는 기회로 삼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탈춤 부흥 운동이 크게 일어나 전국의 대학생들이 가면극을 배워 공연하는 일이 자주 있었고 그 열의도 대단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접어들자 이런 열기가 식으면서, 그 대신에 민속극에 기반을 둔 창작극인 마당극(마당굿) 또는 민족극이라 불리는 일단의 정치극이 활발하게 공연되면서 체제 비판을 시도했다. 한편 전문적인 연극 단체 가운데도 가면극・판소리・인형극 등 전통연희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창작극을 정립해 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연출가 허규를 중심으로 한 극단 민예(1973년 창단), 그리고 손진책의 극단 미추(1981년 창단)이다. 극단 민예는 ・・・ 등을 공연했다. 허생전은 가면극의 장단・춤사위・등퇴장 동작과 판소리의 아니리를 활용했다. 은 창극인데, 등퇴장과 몸동작에 가면극의 춤사위를 활용했다. 는 현대판 가면극이고, 는 민속놀이였다. 그러므로 가면극은 요즘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류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현대 공연예술의 한국화를 위해 창작 자원을 제공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이다.

참고문헌

산대극과 기악(이혜구, 한국음악연구소, 국민음악연구회, 1957), 조선민속탈놀이연구(김일출, 과학원출판사, 1958), 탈춤의 역사와 원리(조동일, 홍성사, 1979), 한국 가면극 연구(서연호, 월인, 2002), 한국의 가면극(이두현, 일지사, 1979), 한국의 가면극(전경욱, 열화당,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