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기(明器)

한자명

明器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상장례

집필자 배영동(裵永東)

정의

죽은 사람의 내세를 위해 사람・동물・그릇・시설 등을 모형으로 만들어 무덤에 넣어주는 부장품副葬品(껴묻거리)으로서 조선시대 왕실과 사대부계층에서 일정기간 사용한 의례용품.

역사

명기明器는 순장殉葬을 대체하여 고안된 부장품이다. 순장은 전 세계에 나타나는 장례풍속으로, 죽음 이후에도 현세의 삶을 살아간다는 믿음에서 생겨난 것으로 해석된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상류층들은 죽은 후에도 봉양 받기를 바랐다. 중국에서 순장은 은殷・주周・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데, 부장품으로 명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한대漢代부터이다. 공자孔子는 순장이 사람답지 못하다고 여겼으며, 나무로 인형을 만들어 순장을 대신하자고 했다. 또한, 죽은 사람에게 산 사람의 그릇을 넣는다는 것은 순장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였고, 죽은 사람을 신명神明으로 대하는 것이 명기라고 하였다.

순장풍속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도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이 사망할 당시 그의 신하들 가운데 스스로 묻히려는 자가 많아 순장을 금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6세기 초 신라는 순장금지령을 내려 200여 년간 계속된 풍속이 사라졌다. 이후 사람을 형상화한 부장품이 순장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로 내려오면 부장품으로 명기를 사용하는 것이 성리학에 기초한 가례의 한 부분이자 국가적 제도로서 탄력을 받았다.

조선 세종世宗 때부터 명기가 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의五禮儀」에는 명기의 종류와 수량, 명기에 담는 오곡의 내용에 대해서도 자세히 쓰여 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는 나무를 깎아 평상시 하인과 시녀가 각각 받들던 물건을 형상하되 작게 만들고, 송나라의 법에 따라 5품과 6품은 30가지, 7품과 8품은 20가지, 벼슬에 오르지 못한 사람은 15가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포苞 3개, 소筲 5개, 앵甖 3개를 만들도록 했다. 조선 성종成宗 때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흉례凶禮」의 명기明器 조에는 대부大夫와 사서인士庶人이 상을 당했을 때 4품 이상은 30가지, 5품 이하는 20가지, 서인은 15가지 이하를 사용하되, 종다래끼 하나, 대나무 그릇 다섯, 항아리 셋을 넣어준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종다래끼는 대나무로 만든것으로 견전遣奠(상여를 떠나보내는 제사)에 쓰는 포脯를 담기 위한 것이고, 대나무 그릇 다섯은 오곡을 담기 위한 것이며, 항아리 셋은 옹기로 만든 것으로, 술・소금・젓을 담는 데 필요한 것이다. 이 같은 명기에 대한 내용은 조선 중기 상례지침서인 『상례비요喪禮備要』에도 수록되어 있으니, 당시에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상례비요』에는 품계에 따라 쓰이는 명기 가짓수가 『주자가례』와 동일하다. 이는 후대로 갈수록 명기를 사용하는 품계가 낮아지고 품계가 더 낮은 사람들 조차도 같은 숫자의 명기를 쓴다는 뜻으로, 점차 명기 사용이 보편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 1744년(영조 20)에는 국장國葬이나 예장禮葬에서 나무로 만든 인형을 사용하는 것이 순장을 대신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이를 폐하도록 했다. 조선 후기 『사례편람四禮便覽』에 ‘명기조明器條’가 없는 것을 보면, 당시 사대부들이 더는 명기를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조선 왕실에서는 성리학에 근거한 유교식 상장례로서 명기제도를 마련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16세기에는 사대부층까지 명기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는데, 전란을 겪으며 명기 제작이 어려워지자 점차 명기를 사용하는 장례풍속이 소멸하기 시작했다. 이는 조선 전기에는 어느 정도 인정되던 ‘내세’의 개념이 조선 후기에는 더이상 인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유교식 장례풍습의 정착과 확산의 과정이 작용하였다.

내용

명기는 목인木人, 식기, 악기, 집기, 무기 등 실생활에 쓰이는 물건을 형상화하되 그 크기를 인형처럼 작게 만든 것이다. 조선 초기부터 사용된 명기는 『세종실록』「오례의」에 수록된 그림과 왕실의 명기제작 기록을 통해 재질, 형태, 종류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제작된 명기의 형태는 자기磁氣 또는 와기瓦器이며, 종류로는 호壺, 주병酒甁, 잔盞, 향로香爐, 관반盥盤, 관이盥匜, 혼병溷甁, 수기溲器, 갱접羹楪, 타우唾盂, 영嬰, 주준酒尊, 시접匙楪, 소채포해접蔬菜脯醢楪, 반발飯鉢, 와부瓦釜, 와정瓦鼎, 인물상人物像, 마상馬像, 기마인물상騎馬人物像 등이 있다. 초기의 명기는 분청사기로 만들어졌다. 이후 백자 명기가 사용되었으나 , 이는 왕실에서만 사용하는 것으로 사대부가에서는 사용하지 못하게 금지되었다. 그러다가 16세기 이후 백자 제작이 확산되기 시작되면서 사대부층에서도 백자를 명기로 쓰기 시작했으나, 전란을 겪으면서 17세기 후반 점차 소멸되었다.

대표적인 명기로는 국보 제91호인 신라시대 금령총에서 출토된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가 있다. 기마인 물형 명기는 기마에도 속하지 않고 인물에도 속하지 않는, 흔하지 않은 명기 가운데 하나이다. 이 명기는 한 쌍의 토기로, 하나는 말 장식이 화려하며 고깔 형태의 띠와 장식이 있는 삼각모를 쓰고 갑옷을 늘어뜨리고 있는 주인상이며, 다른 하나는 웃옷을 벗고 상투머리를 했으며 등에 짐을 메고 있는 하인상으로 마치 저승길로 가는 주인을 인도하는 듯하다. 이 명기는 죽음의례와 관련된 관념・복식・무기・공예・말갖춤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 도움을 준다.

이 밖에도 광주광역시 북구 생룡동의 광산 노씨 노옥손盧玉孫의 분묘에서 철화마형鐵畫馬形과 인형 명기를 포함한 32점의 명기가 출토되었다. 이 분묘에서 출토된 명기는 사대부층에서 명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의 사례로 보인다. 판결사를 지낸 김흠조金欽祖(1461~1528)의 부부묘에서 출토된 입호立壺 명기 역시 조선 초기 사대부가의 명기 사용 사례로 상장례 풍속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시대 초기 청화백자의 수가 적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호암미술관 소장 ‘백자청화 초화칠보문 명기’가 명기로 쓰이기 위해 소형으로 만들어진 것은 도자사陶磁史 연구에도 기여하는 바가 크다.

특징 및 의의

명기는 조선시대 왕실이나 사대부 등 일부 지배계층에 한정된 부장품으로서 유교의 상장례 풍속을 살펴보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명기는 삼국시대 순장풍습의 대체물로 고안되어 조선 초기에 사용되기 시작하여 국가적으로 법제화되었다. 명기의 사용은 필시 내세를 인정한다는 전제에서 가능하므로, 명기가 사용되다가 중단된 것은 내세를 인정하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는 의식이 전환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조선 전기 장례 풍속에 적용된 유교와 조선 후기 장례 풍속에 적용된 유교가 조상의 영혼과 내세에 관해 상당히 다른 관점을 보였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또한, 시기별 도자 기술에 따른 명기의 형태나 양식의 변화도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명기는 역사・민속・미술사적 의의를 지닌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정담부부묘 출토 도자의 양식적 특징과 성격(이종민, 안동대학교박물관총서47, 안동대학교박물관, 2010), 조선시대 명기의 연구(이지현,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주자가례(임민혁 역, 예문서원, 1999).

명기

명기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상장례

집필자 배영동(裵永東)

정의

죽은 사람의 내세를 위해 사람・동물・그릇・시설 등을 모형으로 만들어 무덤에 넣어주는 부장품副葬品(껴묻거리)으로서 조선시대 왕실과 사대부계층에서 일정기간 사용한 의례용품.

역사

명기明器는 순장殉葬을 대체하여 고안된 부장품이다. 순장은 전 세계에 나타나는 장례풍속으로, 죽음 이후에도 현세의 삶을 살아간다는 믿음에서 생겨난 것으로 해석된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상류층들은 죽은 후에도 봉양 받기를 바랐다. 중국에서 순장은 은殷・주周・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데, 부장품으로 명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한대漢代부터이다. 공자孔子는 순장이 사람답지 못하다고 여겼으며, 나무로 인형을 만들어 순장을 대신하자고 했다. 또한, 죽은 사람에게 산 사람의 그릇을 넣는다는 것은 순장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였고, 죽은 사람을 신명神明으로 대하는 것이 명기라고 하였다. 순장풍속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도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이 사망할 당시 그의 신하들 가운데 스스로 묻히려는 자가 많아 순장을 금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6세기 초 신라는 순장금지령을 내려 200여 년간 계속된 풍속이 사라졌다. 이후 사람을 형상화한 부장품이 순장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로 내려오면 부장품으로 명기를 사용하는 것이 성리학에 기초한 가례의 한 부분이자 국가적 제도로서 탄력을 받았다. 조선 세종世宗 때부터 명기가 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의五禮儀」에는 명기의 종류와 수량, 명기에 담는 오곡의 내용에 대해서도 자세히 쓰여 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는 나무를 깎아 평상시 하인과 시녀가 각각 받들던 물건을 형상하되 작게 만들고, 송나라의 법에 따라 5품과 6품은 30가지, 7품과 8품은 20가지, 벼슬에 오르지 못한 사람은 15가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포苞 3개, 소筲 5개, 앵甖 3개를 만들도록 했다. 조선 성종成宗 때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흉례凶禮」의 명기明器 조에는 대부大夫와 사서인士庶人이 상을 당했을 때 4품 이상은 30가지, 5품 이하는 20가지, 서인은 15가지 이하를 사용하되, 종다래끼 하나, 대나무 그릇 다섯, 항아리 셋을 넣어준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종다래끼는 대나무로 만든것으로 견전遣奠(상여를 떠나보내는 제사)에 쓰는 포脯를 담기 위한 것이고, 대나무 그릇 다섯은 오곡을 담기 위한 것이며, 항아리 셋은 옹기로 만든 것으로, 술・소금・젓을 담는 데 필요한 것이다. 이 같은 명기에 대한 내용은 조선 중기 상례지침서인 『상례비요喪禮備要』에도 수록되어 있으니, 당시에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상례비요』에는 품계에 따라 쓰이는 명기 가짓수가 『주자가례』와 동일하다. 이는 후대로 갈수록 명기를 사용하는 품계가 낮아지고 품계가 더 낮은 사람들 조차도 같은 숫자의 명기를 쓴다는 뜻으로, 점차 명기 사용이 보편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 1744년(영조 20)에는 국장國葬이나 예장禮葬에서 나무로 만든 인형을 사용하는 것이 순장을 대신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이를 폐하도록 했다. 조선 후기 『사례편람四禮便覽』에 ‘명기조明器條’가 없는 것을 보면, 당시 사대부들이 더는 명기를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조선 왕실에서는 성리학에 근거한 유교식 상장례로서 명기제도를 마련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16세기에는 사대부층까지 명기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는데, 전란을 겪으며 명기 제작이 어려워지자 점차 명기를 사용하는 장례풍속이 소멸하기 시작했다. 이는 조선 전기에는 어느 정도 인정되던 ‘내세’의 개념이 조선 후기에는 더이상 인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유교식 장례풍습의 정착과 확산의 과정이 작용하였다.

내용

명기는 목인木人, 식기, 악기, 집기, 무기 등 실생활에 쓰이는 물건을 형상화하되 그 크기를 인형처럼 작게 만든 것이다. 조선 초기부터 사용된 명기는 『세종실록』「오례의」에 수록된 그림과 왕실의 명기제작 기록을 통해 재질, 형태, 종류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제작된 명기의 형태는 자기磁氣 또는 와기瓦器이며, 종류로는 호壺, 주병酒甁, 잔盞, 향로香爐, 관반盥盤, 관이盥匜, 혼병溷甁, 수기溲器, 갱접羹楪, 타우唾盂, 영嬰, 주준酒尊, 시접匙楪, 소채포해접蔬菜脯醢楪, 반발飯鉢, 와부瓦釜, 와정瓦鼎, 인물상人物像, 마상馬像, 기마인물상騎馬人物像 등이 있다. 초기의 명기는 분청사기로 만들어졌다. 이후 백자 명기가 사용되었으나 , 이는 왕실에서만 사용하는 것으로 사대부가에서는 사용하지 못하게 금지되었다. 그러다가 16세기 이후 백자 제작이 확산되기 시작되면서 사대부층에서도 백자를 명기로 쓰기 시작했으나, 전란을 겪으면서 17세기 후반 점차 소멸되었다. 대표적인 명기로는 국보 제91호인 신라시대 금령총에서 출토된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가 있다. 기마인 물형 명기는 기마에도 속하지 않고 인물에도 속하지 않는, 흔하지 않은 명기 가운데 하나이다. 이 명기는 한 쌍의 토기로, 하나는 말 장식이 화려하며 고깔 형태의 띠와 장식이 있는 삼각모를 쓰고 갑옷을 늘어뜨리고 있는 주인상이며, 다른 하나는 웃옷을 벗고 상투머리를 했으며 등에 짐을 메고 있는 하인상으로 마치 저승길로 가는 주인을 인도하는 듯하다. 이 명기는 죽음의례와 관련된 관념・복식・무기・공예・말갖춤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 도움을 준다. 이 밖에도 광주광역시 북구 생룡동의 광산 노씨 노옥손盧玉孫의 분묘에서 철화마형鐵畫馬形과 인형 명기를 포함한 32점의 명기가 출토되었다. 이 분묘에서 출토된 명기는 사대부층에서 명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의 사례로 보인다. 판결사를 지낸 김흠조金欽祖(1461~1528)의 부부묘에서 출토된 입호立壺 명기 역시 조선 초기 사대부가의 명기 사용 사례로 상장례 풍속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시대 초기 청화백자의 수가 적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호암미술관 소장 ‘백자청화 초화칠보문 명기’가 명기로 쓰이기 위해 소형으로 만들어진 것은 도자사陶磁史 연구에도 기여하는 바가 크다.

특징 및 의의

명기는 조선시대 왕실이나 사대부 등 일부 지배계층에 한정된 부장품으로서 유교의 상장례 풍속을 살펴보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명기는 삼국시대 순장풍습의 대체물로 고안되어 조선 초기에 사용되기 시작하여 국가적으로 법제화되었다. 명기의 사용은 필시 내세를 인정한다는 전제에서 가능하므로, 명기가 사용되다가 중단된 것은 내세를 인정하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는 의식이 전환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조선 전기 장례 풍속에 적용된 유교와 조선 후기 장례 풍속에 적용된 유교가 조상의 영혼과 내세에 관해 상당히 다른 관점을 보였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또한, 시기별 도자 기술에 따른 명기의 형태나 양식의 변화도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명기는 역사・민속・미술사적 의의를 지닌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정담부부묘 출토 도자의 양식적 특징과 성격(이종민, 안동대학교박물관총서47, 안동대학교박물관, 2010), 조선시대 명기의 연구(이지현,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주자가례(임민혁 역, 예문서원,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