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제문자도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진준현(陳準鉉)
갱신일 2017-12-20

정의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여덟 자를 소재로 그린 문자화.

내용

효제문자도는 여덟 자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주로 8폭 병풍으로 많이 그려졌다. 효제문자도는 문자화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숙종과 영조 시기에 발생하여 20세기 중엽까지 많이 그려졌다. 효제문자도가 주제로 삼은 여덟 자는 유교의 핵심 윤리를 요약한 것이다. 문헌상 여덟 자가 갖추어 등장한 것은 주희朱熹, 1130~1200가 아동들의 교과서로 편집한 『소학小學』에서 유래한다. 효제문자도의 근본 성격과 관련해 중요하므로 아래 그 일부를 인용한다.

… … 아이들을 가르칠 때, 날마다 고사故事를 기억하게 하고 옛날과 지금에 구애받지 말고 먼저 ‘효제충신예의염치’ 등의 일을 들려주고, 황향黃香이 침석枕席에 부채질한 일, 육적陸績이 귤橘을 품은 일, 손숙오孫叔敖의 음덕, 자로子路가 등에 쌀을 져 나른 일 같은 것을 세속의 이야기처럼 들려준다면 곧 그 도리를 깨닫게 되고, 이것이 오래되어 마음에 젖으면 덕성이 자연적으로 우러 나오게 될 것이다. … …

위의 인용문에서 효제충신예의염치의 유교적 덕목에서 구체적인 예가 몇 가지 언급되어 있다. 황향이 여름 날 부모님이 더워 잠을 못 이루자 미리 잠자리에 부채질하여 시원하게 한 일, 육적이 부모님에게 가져다 드리려고 귤을 몰래 가슴 속에 감춘 일, 손숙오가 머리가 둘 달린 뱀을 보고(당시 쌍두사를 보면 죽는다는 속설이 있었음) 다른 사람이 볼까 봐 땅에 묻은 일, 자로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쌀을 져 나른 일 등이 인용되어 있다. 효제문자도는 이런 고사에 나오는 인물과 소재들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황향의 부채, 육적의 귤과 위에서는 언급하지 않은 왕상의 잉어, 맹종의 죽순 등 다양한 소재들이 효제문자도 중 ‘효孝’자 표현에 이용되었다. 이 밖에 ‘제悌’는 형제간의 우애를, ‘충忠’은 임금과 국가에 대한 충성, ‘신信’은 사람 사이의 믿음을, ‘예禮’는 사회를 지탱하는 예의를, ‘의義’는 올바름과 의로움을, ‘염廉’과 ‘치恥’는 염치, 즉 청렴함과 부끄러움을 아는 덕목을 각기 지칭한다. 이들 각각은 해당하는 고사와 인물, 관련된 사물들이 다양하게 존재하며, 그 중 다수가 효제문자도에 표현되었다.
『소학』은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에게 크게 중시되어 조선시대 동안 『대학大學』을 읽기 전 아동은 물론, 성인들의 일상생활 규범을 요약한 서적으로 중시되었다. 게다가 조선 초기 왕들뿐 아니라 후기의 숙종, 영조, 정조 등 왕들이 중시하였고, 세자 교육을 위한 중요 교재이기도 했다. 여러 상황을 볼 때, 효제문자도는 숙종과 영조 때 궁중에서 왕세자 교육을 위해 도화서 화원에서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효제문자도가 처음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건국된 조선왕조가 성리학의 대성자 주자朱子에게 바친 경의, 주자의 효제충신예의염치 여덟 자 필적이 조선에 전래된 것, 기타 중국의 각종 문자화가 전래된 상황 등을 배경으로 한다. 효제문자도의 성립 시기를 숙종과 영조 때로 추정하는 이유는 초기 효제문자도에 그려진 도상이나 양식이 정조 대인 1797년에 간행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보다 선행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치열한 예송을 거쳐 성리학이 조선화된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효제문자도는 이러한 성리학적 규범이 조선시대 왕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친 것을 보여 주는 시각적 증거이다. 그런데 처음 도화서에서 그려진 효제문자도가 일반 백성들까지 전파되자 양식상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일반 백성들은 딱딱하고 정형화된 도화서 양식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유래했으나 중국에서는 표현되지 않는 조선 양식으로 변화시켰다. 여러 고사에서 채용한 인물, 꽃과 새, 동물, 물고기, 사물 등을 이용하여 다양한 변주를 이루어, 한국인의 창의성, 미술적 재능을 잘 보여 주는 화제가 되었다.
효제문자도는 크게 세 시기로 양식 변천을 이루며 발전하였다. 처음 도화서에서 그려질 때는 여덟 자 글자의 원형을 유지하며 글자 획 속에 각종 그림 장식을 집어넣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효제도 8폭 병풍> 중 ‘효’ 자를 보면, 역사상 효자로 이름 난 순 임금, 겨울에 어머니에게 죽순을 구해 드린 맹종, 또 겨울에 어머니에게 잉어를 구해 드린 왕상, 노래자 등의 고사가 그림과 동그라미 속 문자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초기의 효제문자도 중에는 판화로 된 것도 다수 있는데, 조선에 전래된 주자의 ‘효제충신예의염치’ 여덟 자 필적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자는 소재 면에서뿐만 아니라 필적을 통해서도 효제문자도의 발전에도 직접 연결된다.
효제문자도는 두 번째 단계에서 원래 글자의 형태를 과감히 탈피하여 필획의 일부를 아예 그림으로 대체하게 된다. 즉 앞 단계에서 자획 내부에 표현되는 소재들, 특히 잉어, 죽순, 새, 용 등이 글자의 자획을 구성하게 되어, 본격적인 회화로 발전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효제문자도 병풍>은 필획 중 일부분만 사물의 형태로 바꾸어 두 번째 단계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에 산수화, 인물화, 책가도, 화조화 등 다양한 다른 소재들과 결합하여 더 복잡하고 다채롭게 발전한 예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효제문자도>이다.
여기에는 하단에 간단한 산수화를 배치하고 상단에는 각 글자와 관련된 시구를 써 넣었다. ‘효’ 자의 경우 죽순에 싹이 나 대나무가 무성하게 된 형태로 표현되었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효제도 8폭 병풍>의 경우 상하단에 책가도를 삽입하고 중앙에 효제문자도를 배치하였다. 한편 제주도, 강원도, 경상도 등 지역에 따라 지역적 특징이 가미된 양식이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테면 제주도 효제문자도에는 제주도의 지역적 특징을 보여 주는 물고기와 새, 꽃 등이 들어가고, 자획 내부에 물결 문양이 들어가는 등의 특징이 있다.
효제문자도의 세 번째 단계는 추상화와 단순화가 큰 특징이다. 자획을 여러 가지 상형 소재로 다채롭게 꾸미던 중기 양식에서 변화되어, 이제는 원래의 소재가 뭐였는지 모를 정도로 추상화 되는 곳이 많아진다. 예로 ‘충’자의 경우 ‘中’ 부분은 원래 용龍으로 표현되다가 점차 새우[蝦]로 단순화되는데, 세 번째 단계에는 더욱 간략화되어 얼핏 보면 그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게 된다. 덕성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효제도 8폭 병풍>이이런 변화를 잘 보여 준다.
‘신’ 자의 경우에도 필획이 마치 무늬 벽돌을 쌓아올린 듯 추상화되었다.
효제문자도의 세 단계 양식 변천 과정의 배경은 무엇일까? 첫째, 문자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고 굵은 획 속에 여러 가지 관련된 고사가 삽입되던 단계는 중국 문자화의 양식과 유사하며 문자의 고유한 의미가 존중되던 단계였다. 효제문자도의 유교적, 교화적 의미와 목적에 충실했던 단계로, 아마도 주자의 필적을 따라 썼을 것이다. 이 단계의 효제문자도는 궁중에서 세자의 교육용으로 시작되어 사대부 계층에 널리 퍼졌을 것이다. 그러다가 두 번째 단계에서 문자의 획이 그림으로 대체되기 시작하고, 문자도 상하단에 산수, 책거리, 화조 등이 첨가되는 등 다양한 형식으로 변형되었다. 이는 일반 백성들의 자유로운 미감과 상상력이 반영된 본격적 민화의 단계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단계의 효제문자도가 가장 다양하고 재미있는 민화적 특성과 조형성을 갖고 있다. 세 번째 단계는 그림과 필획이 더욱 추상화, 단순화되는 것은 하층 백성들에게 널리 퍼져나가다가 마침내는 원래의 의미와 취지까지 잊히는 단계, 즉단순 장식으로의 쇠퇴기로 볼 수 있다.

특징 및 의의

효제문자도는 유교철학의 기본 윤리를 집약한 ‘효제충신예의염치’ 여덟 자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여덟 자는 주로 8폭으로 구성되는 병풍과 딱 맞아떨어져 병풍이 대유행한 조선 후기 사회에 더 잘 퍼질 수 있었다. 효제문자도는 주자가 대성한 성리학의 주요 텍스트인 『소학』이 조선 사회에 중시된 것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조선 후기 숙종~영조 대 성리학의 토착화와 중화사상과도 관련되어 크게 보급되었다고 판단된다. 효제문자도에 표현된 원래의 고사는 대부분 중국의 것이나, 그 표현 방식이나 양식화는 순전히 조선 사회의 독창이었다. 효제문자도는 민화 금강산도와 함께 어떤 소재에 대한 뚜렷한 양식의 형성과 그 양식의 시대에 따른 변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 주는 면에서, 조선시대 미술의 한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미술이 시대의 이념과 철학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미감을 잘 보여 주는 예로서도 중요하다.

참고문헌

민화 효제문자도의 기원에 대하여(진준현, 민화연구2, 계명대학교 한국민화연구소, 2013), 소학, 민화 문자도의 의미와 사회적 역할(진준현, 미술사와 시각문화3, 사회평론, 2004), 제주도 민화 연구-문자도 병풍화를 중심으로(정병모, 강좌미술사24, 한국미술사연구소, 2005).

효제문자도

효제문자도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진준현(陳準鉉)
갱신일 2017-12-20

정의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여덟 자를 소재로 그린 문자화.

내용

효제문자도는 여덟 자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주로 8폭 병풍으로 많이 그려졌다. 효제문자도는 문자화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숙종과 영조 시기에 발생하여 20세기 중엽까지 많이 그려졌다. 효제문자도가 주제로 삼은 여덟 자는 유교의 핵심 윤리를 요약한 것이다. 문헌상 여덟 자가 갖추어 등장한 것은 주희朱熹, 1130~1200가 아동들의 교과서로 편집한 『소학小學』에서 유래한다. 효제문자도의 근본 성격과 관련해 중요하므로 아래 그 일부를 인용한다. … … 아이들을 가르칠 때, 날마다 고사故事를 기억하게 하고 옛날과 지금에 구애받지 말고 먼저 ‘효제충신예의염치’ 등의 일을 들려주고, 황향黃香이 침석枕席에 부채질한 일, 육적陸績이 귤橘을 품은 일, 손숙오孫叔敖의 음덕, 자로子路가 등에 쌀을 져 나른 일 같은 것을 세속의 이야기처럼 들려준다면 곧 그 도리를 깨닫게 되고, 이것이 오래되어 마음에 젖으면 덕성이 자연적으로 우러 나오게 될 것이다. … … 위의 인용문에서 효제충신예의염치의 유교적 덕목에서 구체적인 예가 몇 가지 언급되어 있다. 황향이 여름 날 부모님이 더워 잠을 못 이루자 미리 잠자리에 부채질하여 시원하게 한 일, 육적이 부모님에게 가져다 드리려고 귤을 몰래 가슴 속에 감춘 일, 손숙오가 머리가 둘 달린 뱀을 보고(당시 쌍두사를 보면 죽는다는 속설이 있었음) 다른 사람이 볼까 봐 땅에 묻은 일, 자로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쌀을 져 나른 일 등이 인용되어 있다. 효제문자도는 이런 고사에 나오는 인물과 소재들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황향의 부채, 육적의 귤과 위에서는 언급하지 않은 왕상의 잉어, 맹종의 죽순 등 다양한 소재들이 효제문자도 중 ‘효孝’자 표현에 이용되었다. 이 밖에 ‘제悌’는 형제간의 우애를, ‘충忠’은 임금과 국가에 대한 충성, ‘신信’은 사람 사이의 믿음을, ‘예禮’는 사회를 지탱하는 예의를, ‘의義’는 올바름과 의로움을, ‘염廉’과 ‘치恥’는 염치, 즉 청렴함과 부끄러움을 아는 덕목을 각기 지칭한다. 이들 각각은 해당하는 고사와 인물, 관련된 사물들이 다양하게 존재하며, 그 중 다수가 효제문자도에 표현되었다.『소학』은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에게 크게 중시되어 조선시대 동안 『대학大學』을 읽기 전 아동은 물론, 성인들의 일상생활 규범을 요약한 서적으로 중시되었다. 게다가 조선 초기 왕들뿐 아니라 후기의 숙종, 영조, 정조 등 왕들이 중시하였고, 세자 교육을 위한 중요 교재이기도 했다. 여러 상황을 볼 때, 효제문자도는 숙종과 영조 때 궁중에서 왕세자 교육을 위해 도화서 화원에서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효제문자도가 처음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건국된 조선왕조가 성리학의 대성자 주자朱子에게 바친 경의, 주자의 효제충신예의염치 여덟 자 필적이 조선에 전래된 것, 기타 중국의 각종 문자화가 전래된 상황 등을 배경으로 한다. 효제문자도의 성립 시기를 숙종과 영조 때로 추정하는 이유는 초기 효제문자도에 그려진 도상이나 양식이 정조 대인 1797년에 간행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보다 선행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치열한 예송을 거쳐 성리학이 조선화된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효제문자도는 이러한 성리학적 규범이 조선시대 왕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친 것을 보여 주는 시각적 증거이다. 그런데 처음 도화서에서 그려진 효제문자도가 일반 백성들까지 전파되자 양식상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일반 백성들은 딱딱하고 정형화된 도화서 양식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유래했으나 중국에서는 표현되지 않는 조선 양식으로 변화시켰다. 여러 고사에서 채용한 인물, 꽃과 새, 동물, 물고기, 사물 등을 이용하여 다양한 변주를 이루어, 한국인의 창의성, 미술적 재능을 잘 보여 주는 화제가 되었다.효제문자도는 크게 세 시기로 양식 변천을 이루며 발전하였다. 처음 도화서에서 그려질 때는 여덟 자 글자의 원형을 유지하며 글자 획 속에 각종 그림 장식을 집어넣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중 ‘효’ 자를 보면, 역사상 효자로 이름 난 순 임금, 겨울에 어머니에게 죽순을 구해 드린 맹종, 또 겨울에 어머니에게 잉어를 구해 드린 왕상, 노래자 등의 고사가 그림과 동그라미 속 문자로 표현되어 있다.이런 초기의 효제문자도 중에는 판화로 된 것도 다수 있는데, 조선에 전래된 주자의 ‘효제충신예의염치’ 여덟 자 필적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자는 소재 면에서뿐만 아니라 필적을 통해서도 효제문자도의 발전에도 직접 연결된다.효제문자도는 두 번째 단계에서 원래 글자의 형태를 과감히 탈피하여 필획의 일부를 아예 그림으로 대체하게 된다. 즉 앞 단계에서 자획 내부에 표현되는 소재들, 특히 잉어, 죽순, 새, 용 등이 글자의 자획을 구성하게 되어, 본격적인 회화로 발전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은 필획 중 일부분만 사물의 형태로 바꾸어 두 번째 단계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그런데 여기에 산수화, 인물화, 책가도, 화조화 등 다양한 다른 소재들과 결합하여 더 복잡하고 다채롭게 발전한 예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이다.여기에는 하단에 간단한 산수화를 배치하고 상단에는 각 글자와 관련된 시구를 써 넣었다. ‘효’ 자의 경우 죽순에 싹이 나 대나무가 무성하게 된 형태로 표현되었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의 경우 상하단에 책가도를 삽입하고 중앙에 효제문자도를 배치하였다. 한편 제주도, 강원도, 경상도 등 지역에 따라 지역적 특징이 가미된 양식이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테면 제주도 효제문자도에는 제주도의 지역적 특징을 보여 주는 물고기와 새, 꽃 등이 들어가고, 자획 내부에 물결 문양이 들어가는 등의 특징이 있다.효제문자도의 세 번째 단계는 추상화와 단순화가 큰 특징이다. 자획을 여러 가지 상형 소재로 다채롭게 꾸미던 중기 양식에서 변화되어, 이제는 원래의 소재가 뭐였는지 모를 정도로 추상화 되는 곳이 많아진다. 예로 ‘충’자의 경우 ‘中’ 부분은 원래 용龍으로 표현되다가 점차 새우[蝦]로 단순화되는데, 세 번째 단계에는 더욱 간략화되어 얼핏 보면 그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게 된다. 덕성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이이런 변화를 잘 보여 준다.‘신’ 자의 경우에도 필획이 마치 무늬 벽돌을 쌓아올린 듯 추상화되었다.효제문자도의 세 단계 양식 변천 과정의 배경은 무엇일까? 첫째, 문자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고 굵은 획 속에 여러 가지 관련된 고사가 삽입되던 단계는 중국 문자화의 양식과 유사하며 문자의 고유한 의미가 존중되던 단계였다. 효제문자도의 유교적, 교화적 의미와 목적에 충실했던 단계로, 아마도 주자의 필적을 따라 썼을 것이다. 이 단계의 효제문자도는 궁중에서 세자의 교육용으로 시작되어 사대부 계층에 널리 퍼졌을 것이다. 그러다가 두 번째 단계에서 문자의 획이 그림으로 대체되기 시작하고, 문자도 상하단에 산수, 책거리, 화조 등이 첨가되는 등 다양한 형식으로 변형되었다. 이는 일반 백성들의 자유로운 미감과 상상력이 반영된 본격적 민화의 단계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단계의 효제문자도가 가장 다양하고 재미있는 민화적 특성과 조형성을 갖고 있다. 세 번째 단계는 그림과 필획이 더욱 추상화, 단순화되는 것은 하층 백성들에게 널리 퍼져나가다가 마침내는 원래의 의미와 취지까지 잊히는 단계, 즉단순 장식으로의 쇠퇴기로 볼 수 있다.

특징 및 의의

효제문자도는 유교철학의 기본 윤리를 집약한 ‘효제충신예의염치’ 여덟 자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여덟 자는 주로 8폭으로 구성되는 병풍과 딱 맞아떨어져 병풍이 대유행한 조선 후기 사회에 더 잘 퍼질 수 있었다. 효제문자도는 주자가 대성한 성리학의 주요 텍스트인 『소학』이 조선 사회에 중시된 것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조선 후기 숙종~영조 대 성리학의 토착화와 중화사상과도 관련되어 크게 보급되었다고 판단된다. 효제문자도에 표현된 원래의 고사는 대부분 중국의 것이나, 그 표현 방식이나 양식화는 순전히 조선 사회의 독창이었다. 효제문자도는 민화 금강산도와 함께 어떤 소재에 대한 뚜렷한 양식의 형성과 그 양식의 시대에 따른 변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 주는 면에서, 조선시대 미술의 한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미술이 시대의 이념과 철학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미감을 잘 보여 주는 예로서도 중요하다.

참고문헌

민화 효제문자도의 기원에 대하여(진준현, 민화연구2, 계명대학교 한국민화연구소, 2013), 소학, 민화 문자도의 의미와 사회적 역할(진준현, 미술사와 시각문화3, 사회평론, 2004), 제주도 민화 연구-문자도 병풍화를 중심으로(정병모, 강좌미술사24, 한국미술사연구소,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