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도붕기풍어제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무속신앙 > 무속제의

집필자 김효경(金孝慶)
갱신일 2016-11-03

정의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황도리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지내는 마을제사. 이 제사는 1991년 7월 9일에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용

황도붕기풍어제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면서 붕기풍어놀이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본래는 충청도 서북부 해안지역에서 흔히 불리는 당제이다.

황도는 전형적인 어촌마을 섬으로 인근에서 가장 많이 풍선(風船)을 부렸기에 배사업의 원고장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한편 다른 마을에 비해 소득이 높아 황도를 황금도(黃金島)라고도 불렀다. 풍선을 부리던 시절에 만선(滿船)을 하면 배에 대나무를 잘라서 장식한 붕기를 달고 귀도한다. 배가 물에 잠길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 사용하는 이 붕기는 만선의 상징으로 모든 어부의 희망을 담고 있다. 풍어를 희망하기에 당제를 붕기 풍어제라고도 부른다.

불규칙적이며 험준한 바다를 대상으로 생활해야 했던 황도 어민들은 그 어려운 현실을 당제를 통해 극복하고자 해마다 음력 정월 초이튿날부터 초사흗날까지 당제를 베푼다.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베푸는 당제만 거행했으나 풍선을 이용한 어업이 번성하면서부터는 선주들이 나서서 당굿을 추가했다. 당굿은 3~5년에 한 번 무당을 불러 행하다가 1983년부터 지금껏 해마다 베풀고 있다. 2008년까지는 서해안배연신굿의 주무로 활동하는 김금화(金錦花) 무당패가 굿을 연행했으나 2009년에는 태안군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앉은굿[坐經]을 행하는 장세일(張世壹) 법사 일행이 굿을 주관하고 있다.

제당은 입촌주인 나주(羅州) 정씨와 해주(海州) 오씨의 거주처에 한 개씩 있었다. 1930년대 중반에 오씨 당이 무너져 현재의 제당에서 함께 제를 지내고 있다. 황도당제는 일제강점기에도 중단되지 않을 정도로 극진하게 이어져 왔다. 당시 일본인이 제당을 부수고 이곳에 신사(神社)를 건립하면서 제당 안에 모셔둔 화본(畵本)을 불살랐지만 화본의 종이만 탈 뿐 주신으로 모셔진 뱀서낭인 뱀의 화상은 타지 않았다. 이를 두고 “몇 천 년간 녹 받아먹은 것이라 불에 타지 않는다.”는 말들을 했다. 광복 후 신사를 부수고 이전의 집으로 복원했으며, 이를 기념하여 큰굿을 한 차례 행했다.

제당의 주신(主神)은 진대[巳]라 하나 현재는 성주 이하 다섯 장군(왼쪽부터 용왕각시, 성조천신, 군왕님, 삼불제석, 동서남북이십사방잡귀축출장군)을 포함한 열두 당을 모신다. 신격의 구체적인 실체와 봉안 시기는 알 수 없다. 주신을 서낭, 즉 진대서낭이라고 믿는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진대와 상극인 돼지를 사육하지 않는다. 돼지를 사육하면 돼지는 잘 되지만 그 집의 식구가 병신이 되거나 죽게 되므로 돼지 사육을 그만두었다. 돼지고기를 먹고 배를 타면 배가 난파되거나 사고가 발생하므로 돈육의 식육마저도 금했다. 이 금기는 특히 당을 모시는 당주와 선주 사이에서 강하게 지켜졌다. 이처럼 당을 정성껏 모신 탓에 그 덕으로 마을이 부유하게 되었다고 믿는다.

제당은 섬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당산의 튼 상봉과 작은 상봉의 두 봉우리가 만나는 편평한 지점에 있으며, 주변에는 홰나무가 군을 이루고 있다. 당집은 왼쪽부터 원당, 산제당, 창고로 이루어져 있다. 원당 내부에는 다섯 점의 화상(畵像)이 걸려 있다. 산신당은 소당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에 쇠고기를 올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소당(素堂)의 성격을 지닌다고도 할 수 있다. 정면에는 산신의 화상이 봉안되어 있다. 가장 오른쪽의 허름한 공간은 제물을 장만하는 장소로, 통소를 손질하는 육간(肉間)이다. 이외에 제당으로부터 50m 떨어진 곳에 당샘 혹은 당너머 샴이라 부르는 작은 샘이 있다. 이 물로 제물을 장만한다.

제사 비용은 원칙적으로 중선배 선주들이 추렴했지만 지금은 마을 기금으로 충당한다. 선주들에게 제비를 걷는 행위를 ‘당추렴한다’라고 표현한다.

제물 장만은 연륙되기 이전에 배를 이용했다. 그중 깨끗한 배를 탔으며, 그 배에는 상주나 부정한 사람은 타지 않았다. 서산장에 나가 제물 일체와 수소 한 마리를 구입한다. 수소는 뿔이 삐뚤게 나지 않고, 흰털 등의 잡털이 섞이지 않은 온통 붉은 털을 지닌 것으로 고른다. 소를 파는 집 역시 깨끗한 집의 것을 구입한다. 구입해온 소는 더 이상 소라 부르지 않고 지태 혹은 제태라 불린다. 지태가 있는 외양간에는 금줄을 치고, 깨끗한 것만을 먹인다. 당주 집에서 가장 가까운 샘에서 처음 길어온 물로 술을 빚는다. 이 술은 조라라고 하며 선주가 가져온 쌀과 누룩 8말 정도의 분량으로 빚다.

제사를 앞두고 부정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섣달과 정월이 날달[産月]인 임신부 중 출산일에 임박한 사람은 마을을 떠난다. 1960년대 이전까지는 지금 연륙교가 있는 곳에 해산막(解産幕)이 있어서 그곳을 이용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구습을 지키는 것이 번거롭다 하여 행하지 않는다. 이와는 별개로 당제를 앞두고 초상이 나면 그 집과 왕래하지 않고 제사를 거행한다. 초상집에서는 곡이나 울음소리를 내서는 안 되며, 제사를 지내고 나서야 장사를 모실 수 있었다.

당제는 당주와 선주가 중심이 되어 치르지만 3~4년에 한 번 치르는 당굿은 인근의 단골을 불러 했다. 단골은 안면도, 원산도, 당진 등지의 큰무당을 불렀다. 1950년경까지는 마을을 돌보아주는 단골이 있어서 그가 제를 지낼 때 비손을 맡았다. 단골이 외지로 떠난 후 한동안은 무당의 비손 없이 당제만을 거행했다. 그후 1980년대 초반까지는 한국전쟁 이후 마을 에서 거주하던 무당인 박한성 씨가 비손을 맡았다. 1980년대 중반에 큰 무당 김금화 패를 초빙했다.

초이튿날이 되면 아침 일찍 당주가 소를 몰고 나와 당산에서 소를 잡는다. 소는 당집 바깥쪽에 별도의 공간에서 육간 사람들이 잡는다. 소가 죽을 때 음매하는 소리의 횟수가 많을수록 운수가 대통한다고 해석한다. 소를 해체하는 열두 군데 부위를 조금씩 잘라 굽거나 삶거나 해서 제물을 마련한다.

하산한 당주는 조라를 가지고 당에 오른다. 집에서 씻어온 쌀로 노기를 짓는다. 밥이 다 될 때까지 당주는 그 앞에 꿇어 앉아 공손하게 불을 지핀다. 오전 11시경이 되면 준비된 제물을 모두 올리고 피고사를 지낸다. 당주와 화주가 원당 앞에서 재배하면 그 위에 선 선주들이 이어 재배한다. 간단하게 피고사를 마친 후에는 올렸던 제물을 꺼내 제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당주 일행은 하산해 본제 제물을 장만한다.

오후 3~4시에 당주와 무당 일행이 함께 제당에 오른다. 이를 당오르기라고 한다. 이때 당주는 조라를 머리에 이고 앞선다. 선주들은 꽃반을 마련해 가지고 오른다. 당집에 이르다가 바깥 금줄이 쳐진 곳에 도착하면 먼저 부정풀이를 한다. 모든 부정을 푼 후에야 제물을 제당 안으로 들인다. 제당 안에 먼저 길지를 걸고 이어 제물을 올린다. 제물은 북쪽 신위 앞에 먼저 올린다. 화상은 다섯 개뿐이지만 과거로부터 열두 당을 위했다고 전하므로 제물은 모두 열두 몫을 올린다. 밤 12시경이 되면 원당제를 거행한다. 밤에 지내는 제사라 하여 밤제사라 한다. 당주와 화주를 비롯하여 선주가 재배를 한 후 무당이 비손한다. 이렇게 하여 원당제사를 마친 후에는 산제당으로 건너가 산신제를 모신다. 산신제를 마친 후에는 무당이 본격적으로 열두거리 굿을 한다.

새벽 1~2시에 두 번째 노기를 짓는다. 이것은 동네노기이다. 날이 샐 무렵에는 세 번째 노기인 제를 지내는 당주의 몸노기를 지어 군왕님 앞에 놓고 무당이 비손한다. 새벽이 되면 당주가 미리 나누어 둔 고기를 각 배에 나누어 준다. 큰 배부터 작은 배의 순으로 고기를 주면 줄달음쳐서 자기 배로 내려간다. 고기가 도착하면 각 배에서는 제숙고사를 지낸다. 먼저 고사를 지내면 기분도 좋고 돈도 많이 번다고 하여 경쟁하듯이 서두른다.

아침 9시경이 되면 선주들을 위한 비손을 한다. 이것이 기내림 혹은 당내리기이다. 큰 배의 선주부터 작은 배의 선주까지 순서대로 집에서 길지 한 장을 마련해 가지고 당에 오른다. 당에 오르면 가지고 간 길지를 제당 안에 건 다음 걸려 있는 길지 한 장을 꺼내 들고 나온다. 이어 무당이 선주 한 명씩을 불러 축언해준다. 축언을 받은 선주는 자신의 배로 가서 당맞이 고사를 지낸다. 기를 모두 내린 후에 철상(撤床)을 한다.

당을 내린 후에는 무당과 아녀자들이 주축이 되어 선창에서 요왕제[용왕제]를 지낸다. 이를 요왕제 혹은 부정풀이, 희식[獻食]이라고 한다. 선창-장벌-연륙교에서 순서대로 행한다. 해상에서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이다.

<제사를 마친 후에 당주는 매월 초사흗날 새벽 3시에 당집에 올라 시루떡과 청수만을 올리고 만선의 해상 안전을 위해 기도한다. 혼자 올리는 치성이라 하여 독치성이라고 한다.

이처럼 황도의 당제는 어민들의 실생활에서 가장 절실했던 풍어와 안전을 위한 노력이 결집 되어 있다. 농촌과 달리 어민들은 불안전하고 변화무쌍한 바다를 대상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러한 삶의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마을마다 치른 당제에 당굿을 추가했다. 강렬한 종교적 열망이 당굿으로 표현된 것이다.

참고문헌

황도 붕기풍어제 (태안군ㆍ태안문화원, 공주대박물관, 1996)

황도붕기풍어제

황도붕기풍어제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무속신앙 > 무속제의

집필자 김효경(金孝慶)
갱신일 2016-11-03

정의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황도리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지내는 마을제사. 이 제사는 1991년 7월 9일에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용

황도붕기풍어제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면서 붕기풍어놀이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본래는 충청도 서북부 해안지역에서 흔히 불리는 당제이다. 황도는 전형적인 어촌마을 섬으로 인근에서 가장 많이 풍선(風船)을 부렸기에 배사업의 원고장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한편 다른 마을에 비해 소득이 높아 황도를 황금도(黃金島)라고도 불렀다. 풍선을 부리던 시절에 만선(滿船)을 하면 배에 대나무를 잘라서 장식한 붕기를 달고 귀도한다. 배가 물에 잠길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 사용하는 이 붕기는 만선의 상징으로 모든 어부의 희망을 담고 있다. 풍어를 희망하기에 당제를 붕기 풍어제라고도 부른다. 불규칙적이며 험준한 바다를 대상으로 생활해야 했던 황도 어민들은 그 어려운 현실을 당제를 통해 극복하고자 해마다 음력 정월 초이튿날부터 초사흗날까지 당제를 베푼다.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베푸는 당제만 거행했으나 풍선을 이용한 어업이 번성하면서부터는 선주들이 나서서 당굿을 추가했다. 당굿은 3~5년에 한 번 무당을 불러 행하다가 1983년부터 지금껏 해마다 베풀고 있다. 2008년까지는 서해안배연신굿의 주무로 활동하는 김금화(金錦花) 무당패가 굿을 연행했으나 2009년에는 태안군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앉은굿[坐經]을 행하는 장세일(張世壹) 법사 일행이 굿을 주관하고 있다. 제당은 입촌주인 나주(羅州) 정씨와 해주(海州) 오씨의 거주처에 한 개씩 있었다. 1930년대 중반에 오씨 당이 무너져 현재의 제당에서 함께 제를 지내고 있다. 황도당제는 일제강점기에도 중단되지 않을 정도로 극진하게 이어져 왔다. 당시 일본인이 제당을 부수고 이곳에 신사(神社)를 건립하면서 제당 안에 모셔둔 화본(畵本)을 불살랐지만 화본의 종이만 탈 뿐 주신으로 모셔진 뱀서낭인 뱀의 화상은 타지 않았다. 이를 두고 “몇 천 년간 녹 받아먹은 것이라 불에 타지 않는다.”는 말들을 했다. 광복 후 신사를 부수고 이전의 집으로 복원했으며, 이를 기념하여 큰굿을 한 차례 행했다. 제당의 주신(主神)은 진대[巳]라 하나 현재는 성주 이하 다섯 장군(왼쪽부터 용왕각시, 성조천신, 군왕님, 삼불제석, 동서남북이십사방잡귀축출장군)을 포함한 열두 당을 모신다. 신격의 구체적인 실체와 봉안 시기는 알 수 없다. 주신을 서낭, 즉 진대서낭이라고 믿는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진대와 상극인 돼지를 사육하지 않는다. 돼지를 사육하면 돼지는 잘 되지만 그 집의 식구가 병신이 되거나 죽게 되므로 돼지 사육을 그만두었다. 돼지고기를 먹고 배를 타면 배가 난파되거나 사고가 발생하므로 돈육의 식육마저도 금했다. 이 금기는 특히 당을 모시는 당주와 선주 사이에서 강하게 지켜졌다. 이처럼 당을 정성껏 모신 탓에 그 덕으로 마을이 부유하게 되었다고 믿는다. 제당은 섬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당산의 튼 상봉과 작은 상봉의 두 봉우리가 만나는 편평한 지점에 있으며, 주변에는 홰나무가 군을 이루고 있다. 당집은 왼쪽부터 원당, 산제당, 창고로 이루어져 있다. 원당 내부에는 다섯 점의 화상(畵像)이 걸려 있다. 산신당은 소당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에 쇠고기를 올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소당(素堂)의 성격을 지닌다고도 할 수 있다. 정면에는 산신의 화상이 봉안되어 있다. 가장 오른쪽의 허름한 공간은 제물을 장만하는 장소로, 통소를 손질하는 육간(肉間)이다. 이외에 제당으로부터 50m 떨어진 곳에 당샘 혹은 당너머 샴이라 부르는 작은 샘이 있다. 이 물로 제물을 장만한다. 제사 비용은 원칙적으로 중선배 선주들이 추렴했지만 지금은 마을 기금으로 충당한다. 선주들에게 제비를 걷는 행위를 ‘당추렴한다’라고 표현한다. 제물 장만은 연륙되기 이전에 배를 이용했다. 그중 깨끗한 배를 탔으며, 그 배에는 상주나 부정한 사람은 타지 않았다. 서산장에 나가 제물 일체와 수소 한 마리를 구입한다. 수소는 뿔이 삐뚤게 나지 않고, 흰털 등의 잡털이 섞이지 않은 온통 붉은 털을 지닌 것으로 고른다. 소를 파는 집 역시 깨끗한 집의 것을 구입한다. 구입해온 소는 더 이상 소라 부르지 않고 지태 혹은 제태라 불린다. 지태가 있는 외양간에는 금줄을 치고, 깨끗한 것만을 먹인다. 당주 집에서 가장 가까운 샘에서 처음 길어온 물로 술을 빚는다. 이 술은 조라라고 하며 선주가 가져온 쌀과 누룩 8말 정도의 분량으로 빚다. 제사를 앞두고 부정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섣달과 정월이 날달[産月]인 임신부 중 출산일에 임박한 사람은 마을을 떠난다. 1960년대 이전까지는 지금 연륙교가 있는 곳에 해산막(解産幕)이 있어서 그곳을 이용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구습을 지키는 것이 번거롭다 하여 행하지 않는다. 이와는 별개로 당제를 앞두고 초상이 나면 그 집과 왕래하지 않고 제사를 거행한다. 초상집에서는 곡이나 울음소리를 내서는 안 되며, 제사를 지내고 나서야 장사를 모실 수 있었다. 당제는 당주와 선주가 중심이 되어 치르지만 3~4년에 한 번 치르는 당굿은 인근의 단골을 불러 했다. 단골은 안면도, 원산도, 당진 등지의 큰무당을 불렀다. 1950년경까지는 마을을 돌보아주는 단골이 있어서 그가 제를 지낼 때 비손을 맡았다. 단골이 외지로 떠난 후 한동안은 무당의 비손 없이 당제만을 거행했다. 그후 1980년대 초반까지는 한국전쟁 이후 마을 에서 거주하던 무당인 박한성 씨가 비손을 맡았다. 1980년대 중반에 큰 무당 김금화 패를 초빙했다. 초이튿날이 되면 아침 일찍 당주가 소를 몰고 나와 당산에서 소를 잡는다. 소는 당집 바깥쪽에 별도의 공간에서 육간 사람들이 잡는다. 소가 죽을 때 음매하는 소리의 횟수가 많을수록 운수가 대통한다고 해석한다. 소를 해체하는 열두 군데 부위를 조금씩 잘라 굽거나 삶거나 해서 제물을 마련한다. 하산한 당주는 조라를 가지고 당에 오른다. 집에서 씻어온 쌀로 노기를 짓는다. 밥이 다 될 때까지 당주는 그 앞에 꿇어 앉아 공손하게 불을 지핀다. 오전 11시경이 되면 준비된 제물을 모두 올리고 피고사를 지낸다. 당주와 화주가 원당 앞에서 재배하면 그 위에 선 선주들이 이어 재배한다. 간단하게 피고사를 마친 후에는 올렸던 제물을 꺼내 제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당주 일행은 하산해 본제 제물을 장만한다. 오후 3~4시에 당주와 무당 일행이 함께 제당에 오른다. 이를 당오르기라고 한다. 이때 당주는 조라를 머리에 이고 앞선다. 선주들은 꽃반을 마련해 가지고 오른다. 당집에 이르다가 바깥 금줄이 쳐진 곳에 도착하면 먼저 부정풀이를 한다. 모든 부정을 푼 후에야 제물을 제당 안으로 들인다. 제당 안에 먼저 길지를 걸고 이어 제물을 올린다. 제물은 북쪽 신위 앞에 먼저 올린다. 화상은 다섯 개뿐이지만 과거로부터 열두 당을 위했다고 전하므로 제물은 모두 열두 몫을 올린다. 밤 12시경이 되면 원당제를 거행한다. 밤에 지내는 제사라 하여 밤제사라 한다. 당주와 화주를 비롯하여 선주가 재배를 한 후 무당이 비손한다. 이렇게 하여 원당제사를 마친 후에는 산제당으로 건너가 산신제를 모신다. 산신제를 마친 후에는 무당이 본격적으로 열두거리 굿을 한다. 새벽 1~2시에 두 번째 노기를 짓는다. 이것은 동네노기이다. 날이 샐 무렵에는 세 번째 노기인 제를 지내는 당주의 몸노기를 지어 군왕님 앞에 놓고 무당이 비손한다. 새벽이 되면 당주가 미리 나누어 둔 고기를 각 배에 나누어 준다. 큰 배부터 작은 배의 순으로 고기를 주면 줄달음쳐서 자기 배로 내려간다. 고기가 도착하면 각 배에서는 제숙고사를 지낸다. 먼저 고사를 지내면 기분도 좋고 돈도 많이 번다고 하여 경쟁하듯이 서두른다. 아침 9시경이 되면 선주들을 위한 비손을 한다. 이것이 기내림 혹은 당내리기이다. 큰 배의 선주부터 작은 배의 선주까지 순서대로 집에서 길지 한 장을 마련해 가지고 당에 오른다. 당에 오르면 가지고 간 길지를 제당 안에 건 다음 걸려 있는 길지 한 장을 꺼내 들고 나온다. 이어 무당이 선주 한 명씩을 불러 축언해준다. 축언을 받은 선주는 자신의 배로 가서 당맞이 고사를 지낸다. 기를 모두 내린 후에 철상(撤床)을 한다. 당을 내린 후에는 무당과 아녀자들이 주축이 되어 선창에서 요왕제[용왕제]를 지낸다. 이를 요왕제 혹은 부정풀이, 희식[獻食]이라고 한다. 선창-장벌-연륙교에서 순서대로 행한다. 해상에서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이다. &lt;제사를 마친 후에 당주는 매월 초사흗날 새벽 3시에 당집에 올라 시루떡과 청수만을 올리고 만선의 해상 안전을 위해 기도한다. 혼자 올리는 치성이라 하여 독치성이라고 한다. 이처럼 황도의 당제는 어민들의 실생활에서 가장 절실했던 풍어와 안전을 위한 노력이 결집 되어 있다. 농촌과 달리 어민들은 불안전하고 변화무쌍한 바다를 대상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러한 삶의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마을마다 치른 당제에 당굿을 추가했다. 강렬한 종교적 열망이 당굿으로 표현된 것이다.

참고문헌

황도 붕기풍어제 (태안군ㆍ태안문화원, 공주대박물관,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