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호

한자명

投壺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놀이

집필자 박환규(朴懽圭)
갱신일 2018-07-05

정의

일정한 거리에 병[壺]를 놓고 편을 갈라 병 속에 화살을 던져 넣는 놀이.

유래

원래 투호는 중국 한나라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춘추좌전(春秋左傳)』에는 진나라 제후와 제나라 제후가 술을 마시는 가운데 투호를 한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당나라 때에는 손님 접대의 수단이 되기도 했으며, 주로 왕실이나 귀족층의 놀이로 발달해 왔다. 이러한 투호가 언제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고구려의 풍속에 연회를 즐기고 투호와 축국(蹴鞠)을 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서(周書)』와 『수서(隋書)』의 백제조(百濟條)에는 투호가 위기(圍碁)·저포(樗蒲)·악삭(握槊) 등의 잡희로 행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이미 투호가 시행되었고, 특히 고구려와 백제에서 크게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투호는 고려 초기에는 한동안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예종 때 송나라에서 투호의 도구를 보내오면서 보문각 학사들에게 투호의례와 그림을 그려 투호를 권장하기 시작하였다. 투호가 왕실에서 예법을 익히는 법도인 동시에 수단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투호는 조선왕조에 들어와 유교의식 확산과 더불어 유교적 예법을 익히는 수단으로서, 왕실은 물론이고 양반관료 내지 사족층들에게 크게 인기가 있었다. 투호는 왕비는 물론 내외 명부(命婦)들의 여성 오락으로서도 자주 행해졌다.

내용

{투호(投壺)의 특징과 놀이법} 투호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미 오래된 예법을 실천하는 수단으로 주인과 손님이 술자리를 베푼 자리에서 재예(才藝)를 강론하는 예로써 권장되고 장려되었다. 활쏘기가 덕을 함양하는 수단으로 권장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투호 역시 마음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수단이었다.

성종(成宗) 10년에는 투호의(投壺儀)를 제정하고 권장하면서, 궁중행사의 하나로 관례화되어 갔다. 그 결과 매년 3월 3일이나 9월 9일에 기로연과 기영회에서는 투호를 시행하게 하였다. 또한 궁중에서 투호를 행할 때에 낙양춘(洛陽春)과 같은 아악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투호는 서울의 왕실과 양반관료층 내에서 뿐 아니라, 지방의 향교를 중심으로도 행해졌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투호가 흥학(興學)의 일환으로 향사(鄕射)와 더불어 권장되었다고 밝힌 점은 이를 잘 말해준다.

사마광(司馬光)의 『투호격범(投壺格範)』에는 투호의 놀이 기구에 대한 설명과 노는 법이 쓰여 있다. 즉, 투호 병은 입지름이 3치[寸]이고, 귀[耳]의 입지름은 1치이며 높이는 1자[尺]이다. 병 속은 팥으로 채운다. 병은 던지는 이의 앉은 자라에서 2살[矢]반쯤 되는 거리에 놓고, 살은 12개를 사용하며 그 길이는 2차 4치이다. 실수하지 않고 병에 던져 꽂힌 것을 상(上)으로 삼는데, 먼저 120을 채우는 쪽이 이긴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놀이 기구나 놀이 방법에 대하여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투호를 할 때 쓰는 병의 종류나 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화살의 크기 또한 다양하다. 노는 법은 일정한 장소에 둔 병을 향하여 일정한 위치에서 살을 던져 병 속이나 귀에 던져 넣은 것으로, 살이 꽂히는 데 따라 득점이 정해진다. 던지는 위치는 병에서 2살 반, 즉 3자 가량 떨어진 거리이며, 한 사람이 살 12개를 가지고 승패를 다툰다. 살은 병의 위로 5치 가량 되는 데서 수직으로 떨어지게 한다. 투입법(投入法)에 유의할 점은 던지는 사람의 양쪽 어깨가 균형을 취할 것과 어깨가 기울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기는 것을 현(賢), 지는 것을 불승(不勝)이라 하며 한 번을 일호(一壺)라 한다. 그 점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헌배(獻盃)·벌배(罰盃) 등이 행해진다.

의의

투호는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 말까지 성행한 유교적 예법을 익히는 하나의 수단이자 놀이의 도구였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왕실을 비롯해 지배층 중심으로 투호가 발달되었다. 특히 왕비를 비롯한 지배층 여성들의 오락 수단이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러한 투호는 근대와 현대시기를 거치면서 일반적인 놀이로 대중화되어 갔다. 일반 놀이로 대중화되면서 투호가 담고 있는 유교적인 예법은 거의 간소화되거나 사라졌다. 오늘날 투호가 명절 때 고궁을 비롯한 어디에서나 전통놀이로 행해지는 것은 이러한 시대의 변화상을 말해준다.

참고문헌

高麗史, 牧民心書, 三國志, 成宗實錄, 隋書, 周書, 春秋左傳, 投壺格範

투호

투호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놀이

집필자 박환규(朴懽圭)
갱신일 2018-07-05

정의

일정한 거리에 병[壺]를 놓고 편을 갈라 병 속에 화살을 던져 넣는 놀이.

유래

원래 투호는 중국 한나라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춘추좌전(春秋左傳)』에는 진나라 제후와 제나라 제후가 술을 마시는 가운데 투호를 한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당나라 때에는 손님 접대의 수단이 되기도 했으며, 주로 왕실이나 귀족층의 놀이로 발달해 왔다. 이러한 투호가 언제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고구려의 풍속에 연회를 즐기고 투호와 축국(蹴鞠)을 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서(周書)』와 『수서(隋書)』의 백제조(百濟條)에는 투호가 위기(圍碁)·저포(樗蒲)·악삭(握槊) 등의 잡희로 행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이미 투호가 시행되었고, 특히 고구려와 백제에서 크게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투호는 고려 초기에는 한동안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예종 때 송나라에서 투호의 도구를 보내오면서 보문각 학사들에게 투호의례와 그림을 그려 투호를 권장하기 시작하였다. 투호가 왕실에서 예법을 익히는 법도인 동시에 수단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투호는 조선왕조에 들어와 유교의식 확산과 더불어 유교적 예법을 익히는 수단으로서, 왕실은 물론이고 양반관료 내지 사족층들에게 크게 인기가 있었다. 투호는 왕비는 물론 내외 명부(命婦)들의 여성 오락으로서도 자주 행해졌다.

내용

{투호(投壺)의 특징과 놀이법} 투호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미 오래된 예법을 실천하는 수단으로 주인과 손님이 술자리를 베푼 자리에서 재예(才藝)를 강론하는 예로써 권장되고 장려되었다. 활쏘기가 덕을 함양하는 수단으로 권장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투호 역시 마음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수단이었다. 성종(成宗) 10년에는 투호의(投壺儀)를 제정하고 권장하면서, 궁중행사의 하나로 관례화되어 갔다. 그 결과 매년 3월 3일이나 9월 9일에 기로연과 기영회에서는 투호를 시행하게 하였다. 또한 궁중에서 투호를 행할 때에 낙양춘(洛陽春)과 같은 아악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투호는 서울의 왕실과 양반관료층 내에서 뿐 아니라, 지방의 향교를 중심으로도 행해졌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투호가 흥학(興學)의 일환으로 향사(鄕射)와 더불어 권장되었다고 밝힌 점은 이를 잘 말해준다. 사마광(司馬光)의 『투호격범(投壺格範)』에는 투호의 놀이 기구에 대한 설명과 노는 법이 쓰여 있다. 즉, 투호 병은 입지름이 3치[寸]이고, 귀[耳]의 입지름은 1치이며 높이는 1자[尺]이다. 병 속은 팥으로 채운다. 병은 던지는 이의 앉은 자라에서 2살[矢]반쯤 되는 거리에 놓고, 살은 12개를 사용하며 그 길이는 2차 4치이다. 실수하지 않고 병에 던져 꽂힌 것을 상(上)으로 삼는데, 먼저 120을 채우는 쪽이 이긴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놀이 기구나 놀이 방법에 대하여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투호를 할 때 쓰는 병의 종류나 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화살의 크기 또한 다양하다. 노는 법은 일정한 장소에 둔 병을 향하여 일정한 위치에서 살을 던져 병 속이나 귀에 던져 넣은 것으로, 살이 꽂히는 데 따라 득점이 정해진다. 던지는 위치는 병에서 2살 반, 즉 3자 가량 떨어진 거리이며, 한 사람이 살 12개를 가지고 승패를 다툰다. 살은 병의 위로 5치 가량 되는 데서 수직으로 떨어지게 한다. 투입법(投入法)에 유의할 점은 던지는 사람의 양쪽 어깨가 균형을 취할 것과 어깨가 기울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기는 것을 현(賢), 지는 것을 불승(不勝)이라 하며 한 번을 일호(一壺)라 한다. 그 점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헌배(獻盃)·벌배(罰盃) 등이 행해진다.

의의

투호는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 말까지 성행한 유교적 예법을 익히는 하나의 수단이자 놀이의 도구였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왕실을 비롯해 지배층 중심으로 투호가 발달되었다. 특히 왕비를 비롯한 지배층 여성들의 오락 수단이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러한 투호는 근대와 현대시기를 거치면서 일반적인 놀이로 대중화되어 갔다. 일반 놀이로 대중화되면서 투호가 담고 있는 유교적인 예법은 거의 간소화되거나 사라졌다. 오늘날 투호가 명절 때 고궁을 비롯한 어디에서나 전통놀이로 행해지는 것은 이러한 시대의 변화상을 말해준다.

참고문헌

高麗史, 牧民心書, 三國志, 成宗實錄, 隋書, 周書, 春秋左傳, 投壺格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