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전

한자명

鬪錢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정일

집필자 유승훈(柳承勳)
갱신일 2018-11-08

정의

각종 문양·문자가 표시된 패를 뽑아 패의 끗수로 승부를 겨루는 놀이.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투전을 투전(鬪錢)·투전(鬪牋)·투전(投牋) 등으로 기록하였다. 투전패 재질이 종이였으므로 지패(紙牌)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투패(鬪牌)·투엽(鬪葉)이라 하였다. 투전은 두꺼운 종이에 기름을 먹여 만든다. 길이는 10~20센티미터 사이이며 너비는 손가락만 하다. 한 면에 동물문양 및 문자를 적어서 끗수를 표시하였다. 25장, 40장, 50장, 60장, 80장이 한 벌이 되며, 일반적으로 40장 한 벌을 많이 사용한다.

유래

조선상식(朝鮮常識)』에서는 투전이 중국의 마조(馬弔)에서 기원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명군(明軍)을 통하여 들어왔다고 추정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투전이 원(元)나라에서 기원되었다고 하였으며, 조선에서는 숙종 때 역관 장현(張炫)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장현은 희빈(嬉嬪) 장씨의 부(父)인 장형(張炯)의 종제(從弟)되는 사람이다. 장씨 집안이 역모에 연루되었을 때 장현도 옥살이를 하였는데 옥중에서 투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장현은 당시 당상통역관(堂上通譯官)으로서 중국어뿐만 아니라 여진어(女眞語)까지 할 수 있었는데, 투전에 적혀진 문자는 여진어라고 추측한다. 이 투전은 영·정조를 거치면서 급속도록 퍼졌다. 항간의 서민들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자제들도 투전에 빠져 재산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최남선(催南善)은 투전이 대중성을 갖게 된 이유로 규칙의 간소화를 들었다. 골패는 놀이방법이 복잡한데 반하여 투전은 규칙이 간단하여 금방 놀이 방법을 익힐 수 있다. 또한 투전패를 만드는 방법이 매우 간단하므로 한양에서는 물론 지방에서까지 성행할 수 있었다. 이 투전은 남성들이 주로 즐기던 놀이이다. 그래서 투전꾼 하면 흔히 남성 노름꾼을, 투전판 하면 남성 노름꾼이 모인 노름판을 떠올리게 된다.

놀이방법

투전의 놀이 방법은 매우 다양하나 공통적으로는 끗수를 맞춰서 그 크기에 따라 승패를 결정한다. 투전놀이로는 돌려대기(갑오잡기)·동동이·가구·우등뽑기(단장대기) 등이 있다. 돌려대기는 가장 많이 유행하는 것으로 아홉 끗으로 순위를 결정한다. 동동이는 같은 끗수 세 짝을 맞추는 놀이이며, 가구는 세 사람이 한 조로 15끗수를 잡는 놀이이다. 우등뽑기는 네다섯 사람이 한 조로 판을 돌리고 한 장씩 더 뽑아서 우열을 다투는 놀이이다. 투전의 놀이 방식은 화투에도 도입되었다. 예를 들면 짓고땡(‘땅’이라도고 함)은 패 3장으로 10, 20, 30을 만들고 나머지 2장의 끗수로 승부를 겨루는 투전놀이이다. 투전장은 한 손에 쥐고 한 장씩 서서히 뽑는데 콩기름을 먹인 만큼 서서히 빠져 나온다. 투전장을 한 손으로 쥐어가면서 마치 엿가락을 뽑듯이 하므로 투전장을 ‘엿방망이’, 투전꾼을 ‘엿방망이꾼’이라고도 한다.

원래 투전은 투기성이 강한 노름이 아니었다. 수투전(數鬪牋)의 경우는 문아(文雅)한 양반들이 즐기는 놀이였다고 한다. 또한 금전 추구에 집착하기 보다는 우열승부를 결정하는 놀이였다. 즉, 수투전은 각종 동물이 표시된 본패와 그에 해당하는 장수(將帥)패가 있어서 일정한 규칙대로 우열승부를 가리는 놀이이다. 그런데 점차 수투전의 오락적 기능은 사라지고 투전의 도박성이 커지게 되었다. 투전의 도박성이 확대됨에 따라 조선사회에서는 집, 토지, 재산을 팔아야 하는 큰 폐해가 생겨났다. 또한 투전꾼들이 전문적인 도박단을 형성하여 다니기도 하였다.

기타

투전이 확산되는 배경으로는 먼저 화폐의 통용과 발달을 들 수 있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보면 으레 투전판에는 동전묶음이 놓여 있다. 숙종(肅宗) 4년(1678) 이후에는 각도(各道) 감영(監營)에 주전(鑄錢)을 허가함으로써 많은 양의 주화가 유통되었다. 이러한 화폐경제의 발달은 투기성을 높일 수 있었다. 물물교환에 비하여 즉자적으로 교환되는 동전은 심리적으로 강한 자극과 흥분을 주었다. 또한 상업이 활성화되고 장시가 발달하는 것도 투전 확산의 배경이 된다. 전문적인 도박판은 인구가 집중된 한성부나 지방에서는 장시·기방 등 저자거리에 형성되었다. 이곳에서는 마을의 인정적·지속적 유대관계가 배제되었다. 도박을 통한 일시적 관계에서는 인정을 배제하고 오직 금전 추구에 집착하게 되었다.

투전은 다양한 민속문화의 장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탈놀이·도둑잡이굿·민요 등에 투전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다. 이것은 투전이 미친 사회적 파장이 매우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五洲衍文長箋散稿
朝鮮常識-風俗 篇 (崔南善, 東明社, 1948)
韓國民俗大觀4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81)
서울六百年史 民俗 篇 (서울特別市, 199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투전고 (유승훈, 民俗學硏究11, 국립민속박물관, 2002)

투전

투전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정일

집필자 유승훈(柳承勳)
갱신일 2018-11-08

정의

각종 문양·문자가 표시된 패를 뽑아 패의 끗수로 승부를 겨루는 놀이.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투전을 투전(鬪錢)·투전(鬪牋)·투전(投牋) 등으로 기록하였다. 투전패 재질이 종이였으므로 지패(紙牌)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투패(鬪牌)·투엽(鬪葉)이라 하였다. 투전은 두꺼운 종이에 기름을 먹여 만든다. 길이는 10~20센티미터 사이이며 너비는 손가락만 하다. 한 면에 동물문양 및 문자를 적어서 끗수를 표시하였다. 25장, 40장, 50장, 60장, 80장이 한 벌이 되며, 일반적으로 40장 한 벌을 많이 사용한다.

유래

『조선상식(朝鮮常識)』에서는 투전이 중국의 마조(馬弔)에서 기원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명군(明軍)을 통하여 들어왔다고 추정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투전이 원(元)나라에서 기원되었다고 하였으며, 조선에서는 숙종 때 역관 장현(張炫)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장현은 희빈(嬉嬪) 장씨의 부(父)인 장형(張炯)의 종제(從弟)되는 사람이다. 장씨 집안이 역모에 연루되었을 때 장현도 옥살이를 하였는데 옥중에서 투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장현은 당시 당상통역관(堂上通譯官)으로서 중국어뿐만 아니라 여진어(女眞語)까지 할 수 있었는데, 투전에 적혀진 문자는 여진어라고 추측한다. 이 투전은 영·정조를 거치면서 급속도록 퍼졌다. 항간의 서민들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자제들도 투전에 빠져 재산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최남선(催南善)은 투전이 대중성을 갖게 된 이유로 규칙의 간소화를 들었다. 골패는 놀이방법이 복잡한데 반하여 투전은 규칙이 간단하여 금방 놀이 방법을 익힐 수 있다. 또한 투전패를 만드는 방법이 매우 간단하므로 한양에서는 물론 지방에서까지 성행할 수 있었다. 이 투전은 남성들이 주로 즐기던 놀이이다. 그래서 투전꾼 하면 흔히 남성 노름꾼을, 투전판 하면 남성 노름꾼이 모인 노름판을 떠올리게 된다.

놀이방법

투전의 놀이 방법은 매우 다양하나 공통적으로는 끗수를 맞춰서 그 크기에 따라 승패를 결정한다. 투전놀이로는 돌려대기(갑오잡기)·동동이·가구·우등뽑기(단장대기) 등이 있다. 돌려대기는 가장 많이 유행하는 것으로 아홉 끗으로 순위를 결정한다. 동동이는 같은 끗수 세 짝을 맞추는 놀이이며, 가구는 세 사람이 한 조로 15끗수를 잡는 놀이이다. 우등뽑기는 네다섯 사람이 한 조로 판을 돌리고 한 장씩 더 뽑아서 우열을 다투는 놀이이다. 투전의 놀이 방식은 화투에도 도입되었다. 예를 들면 짓고땡(‘땅’이라도고 함)은 패 3장으로 10, 20, 30을 만들고 나머지 2장의 끗수로 승부를 겨루는 투전놀이이다. 투전장은 한 손에 쥐고 한 장씩 서서히 뽑는데 콩기름을 먹인 만큼 서서히 빠져 나온다. 투전장을 한 손으로 쥐어가면서 마치 엿가락을 뽑듯이 하므로 투전장을 ‘엿방망이’, 투전꾼을 ‘엿방망이꾼’이라고도 한다. 원래 투전은 투기성이 강한 노름이 아니었다. 수투전(數鬪牋)의 경우는 문아(文雅)한 양반들이 즐기는 놀이였다고 한다. 또한 금전 추구에 집착하기 보다는 우열승부를 결정하는 놀이였다. 즉, 수투전은 각종 동물이 표시된 본패와 그에 해당하는 장수(將帥)패가 있어서 일정한 규칙대로 우열승부를 가리는 놀이이다. 그런데 점차 수투전의 오락적 기능은 사라지고 투전의 도박성이 커지게 되었다. 투전의 도박성이 확대됨에 따라 조선사회에서는 집, 토지, 재산을 팔아야 하는 큰 폐해가 생겨났다. 또한 투전꾼들이 전문적인 도박단을 형성하여 다니기도 하였다.

기타

투전이 확산되는 배경으로는 먼저 화폐의 통용과 발달을 들 수 있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보면 으레 투전판에는 동전묶음이 놓여 있다. 숙종(肅宗) 4년(1678) 이후에는 각도(各道) 감영(監營)에 주전(鑄錢)을 허가함으로써 많은 양의 주화가 유통되었다. 이러한 화폐경제의 발달은 투기성을 높일 수 있었다. 물물교환에 비하여 즉자적으로 교환되는 동전은 심리적으로 강한 자극과 흥분을 주었다. 또한 상업이 활성화되고 장시가 발달하는 것도 투전 확산의 배경이 된다. 전문적인 도박판은 인구가 집중된 한성부나 지방에서는 장시·기방 등 저자거리에 형성되었다. 이곳에서는 마을의 인정적·지속적 유대관계가 배제되었다. 도박을 통한 일시적 관계에서는 인정을 배제하고 오직 금전 추구에 집착하게 되었다. 투전은 다양한 민속문화의 장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탈놀이·도둑잡이굿·민요 등에 투전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다. 이것은 투전이 미친 사회적 파장이 매우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五洲衍文長箋散稿朝鮮常識-風俗 篇 (崔南善, 東明社, 1948)韓國民俗大觀4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81)서울六百年史 民俗 篇 (서울特別市, 1990)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투전고 (유승훈, 民俗學硏究11, 국립민속박물관, 2002)